스자오지
1. 개요
중화민국의 외교관. 외교부장, 주영 중국공사, 주미 중국대사를 지냈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1877년 강소성 소주부 오강현에서 태어났으며 원적은 절강성 항주다. 정부의 지원을 받아 미국 코넬 대학교에 유학했으며 1902년 문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미국에서 유학할 시에 1893년 워싱턴에서 흠차대신 양자통(楊子通)의 번역원으로 일했고 귀국 후 외교총장 루정샹 밑에서 외무부 직원으로 일하였다. 1912년 탕사오이 내각에서 교통총장으로 일했으며 1914년 영국공사 부임을 시작으로 미국 공사, 외교총장 직을 두루 역임했다.
1910년 만주에서 페스트가 유행하였을때, 일본, 러시아등이 저마다 청나라 조정을 향해 자신들에게 방역을 맡길것을 요구하자 외무부 우승(차관)으로 있던 스자오지는 방역주권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화교출신의사 우롄더(吳連德)를[1] 천거하고 그를 지원하여 페스트 종식에 공을 세웠다.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서 대표단으로 참여하여 산동반도에 대한 중국의 주권을 지키고자 하였고 열강이 중국의 주권을 무시하고 일본의 21개조 요구를 승인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쉬스창 대총통에게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하지 말 것을 촉구했다. 1921년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에 수석대표로 참여하여 산동반도 문제, 조차지 반환, 관세자주권 회수 등을 주장하며 중국의 국익을 수호하려고 노력했다. 국민혁명이 성공한 이후에 국민정부에 합류했다.
1920년 미국공사에 임명되어 1929년까지 재직했다.
2.2. 만주사변에서 당고정전협정까지
1929년 1월 22일 주영 중국공사에 임명되었다. 1931년 만주사변이 발생하자 국제연맹 이사회 특별대표에 임명, 1931년에 개최된 국제연맹 12차 대회에 중국대표로 참여했다. 수석대표로서 국제연맹 맹약 11조에 따라 관동군의 침략을 제소하고 일본군의 침략 확대 저지와 점령한 영토 반환을 요구하는 등 정력적으로 일했으나 과로로 쓰러졌는데 구웨이쥔과 함께 제출한 진저우 중립화 방면에 대해 분노한 화교들의 비난을 받아 충격을 받고 수석대표직을 사퇴, 옌후이칭에게 수석대표 자리를 넘겨주었다. 1931년 10월 3일, 왕정팅이 학생들의 구타 사건으로 퇴임하자 그의 뒤를 이어 외교부장에 임명되었으나 외국에서의 활동이 바빠 외교부장직을 수행할 수 없었으므로 11월 23일 사임했다.[2] 국제연맹이 리튼 조사단 파견을 결정하자 일본군의 신속한 철수에 방해가 된다고 크게 반대했다.
1932년 1월 29일 뤄원간이 신임 외교부장에 취임한 이후 외교부 총무부장에 임명되었다. 1932년 5월 30일까지 영국공사로 재직하다가 궈타이치에게 자리를 내주고 1933년 1월 7일, 구웨이쥔의 추천으로 옌후이칭의 뒤를 이어 미국공사로 이임하였다. 그곳에서 만주사변과 만주국 건국에 대한 미국의 반응에 대해 검토하는 등 중국의 이권 수호에 노력함은 물론이고 진지매를 비롯한 후학 양성에 힘을 썼다. 상하이 사변 시기 미국 공사관 학습원으로 근무하던 진지매는 스자오지의 업무 수행 태도가 공정하고 근면성실했다고 크게 칭찬했다."국제연맹 조사단의 파견은 중복된 병폐와 같다. 중국은 이 제의를 반대하지 않겠지만, 국제연맹 조사 위원단의 성립으로 일본군의 완전한 철수의 개시나 최단시간 내의 진행이 연기된다면 동의할 수 없다. 중국은 조사 위원단의 파견 여부와 관계없이 국제연맹 이사회가 완수해야 할 업무는 만주사변의 사태를 확대하지 않고 즉시 전쟁을 중지시키며 일본군의 철수를 보장하는 것이라고 본다. 중국은 관동군의 철수를 즉시 시작하고 신속하게 완성해야 한다고 요청한다."
1932년 제1차 상하이 사변과 1933년 열하사변이 발생하자 일본에 대한 적극적인 항전을 주장했고 1933년 당고정전협정이 체결되자 크게 반발하였다."스자오지는 외교 업무를 수행할 때 주도면밀하고 객관적인 태도로 처리하였고, 직무와 관계된 일을 함부로 얘기하지 않는 신중함을 보였으며, 정부 및 관료를 비판하거나 국정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2.3. 미국 대사 재임과 은퇴
1935년 5월 미국 대사로 승격되어 초대 미국 대사를 지냈으며 1935년 재정부장 쿵샹시와 함께 법폐개혁을 위해 미국달러와 중국 법폐를 연계시키겠다는 의사를 타진했으나 국무장관 코델 헐의 반대로 무산되었으나 대신에 중미은협정 체결에 참여했다. 이후 1937년 5월 24일까지 미국대사를 지내다가 하매 협정과 진토 협정의 체결에 분개하여 왕정팅에게 자리를 내주고 사임, 귀국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한 이후 상하이에 거주하다가 1941년 미국으로 이주했다. 항일전쟁 승리 이후 국제연합의 중국 대표단의 고등고문으로 재직했다. 이후 1946년 세계은행 설립에 참여했으며 1947년부터 1950년까지 세계은행 고문으로 재직했다.
2.4. 말년
말년에 후스의 권고로 자서전 집필에 들어가 <시조기조년회억록>을 쓰기 시작했으나 건강이 악화되어 1914년 처음으로 영국 공사에 파견될 때까지만 서술하고 중단하였다. 1954년에 중풍으로 쓰러졌으며 1958년 워싱턴 D.C에서 사망했다.
3. 주요경력
4. 참고문헌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 만주사변기 중일외교사, 유신순, 고려원.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國民政府의 幣制改革과 中美銀協定의 의미, 김정현, 동아시아역사연구 5권, 동아시아역사연구회.
- 塘沽停戰協定 이후 국제정세와 職業外交官의 항전 입장, 중국사연구 83권, 중국사학회.
- 滿洲事變 以後 南京國民政府 職業外交官의 부상에 대한 硏究, 석미자, 중국사연구 89권, 중국사학회.
- 滿洲事變 以後 職業外交官의 對日 强硬態度와 國內活動 硏究, 석미자, 중국사연구 95권, 중국사학회.
- 만주사변 이후 남경국민정부 직업 외교관의 역할 연구 : 1931-1936, 석미자,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