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사변

 



'''열하사변
熱河事變'''

[image]
'''날짜'''
1933년 2월 23일 ~ 1933년 5월 31일
'''장소'''
중국 열하성 ~ 하북성
'''교전국'''
[image] 중화민국
[image] 일본 제국
[image] 만주국
'''지휘관'''
[image] 장제스
[image] 장쉐량
[image] 허잉친
[image] 쑹저위안
[image] 탕위린
[image] 양걸
<^|1>[image] 무토 노부요시
[image] 고이소 구니아키
[image] 오카무라 야스지
[image] 장해봉
'''결과'''
'''일본 제국의 승리, 당고정전협정의 체결.'''
'''영향'''
열하성만주국에 합병됨, 만리장성 일대의 비무장화.일본제국의 팽창 일시적 중지.
'''병력'''
동북군 20만[1]
쑹저위안의 29군
중앙군 5만
관동군
만리장성 주둔군
만주군
총 10만명
1. 개요
2. 배경
3. 전개
3.1. 열하에서 고조되는 긴장
3.1.1. 이시모토 사건과 중일의 군사적 충돌
3.1.2. 산해관 전투
3.1.3. 일본의 폭주와 중국의 대응
3.2. 열하작전
3.2.1. 열하성의 실함
3.2.2. 장쉐량의 사직
3.2.3. 장성전투
3.2.4. 일본의 국제연맹 탈퇴
3.3. 화북침략
3.3.1. 일본의 1차 화북공세(1933.4.11~1933.4.19)
3.3.2. 일본의 2차 화북공세(1933.5.7~1933.5.22)
4. 여파
4.1. 국방건설의 강화
4.2. 반일 분위기의 고조
4.3. 동북군의 몰락
5. 참고 문헌
6. 관련 문서


1. 개요


1933년 2월 23일, 일본군이 관동군 스파이 총살사건을 빌미삼아 만주국의 영토라 주장해오던 열하성을 공격하여 만주국에 합병시킨 사건. 이 사건으로 장쉐량과 봉천군벌은 마지막 기반까지 날아가고 낭인 신세가 되었다가 서안 사건을 일으킨다.
중국에선 장성전쟁(長城戰役), 장성항전(長城抗戰), 장성대회전(長城大會戰)이라는 표현도 쓴다.

2. 배경


원래 열하성은 장쉐량동북역치 이후 자신의 세력권으로 넣었던 곳인데, 만주사변으로 본거지인 만주에서 축출당한 후에는 그의 유일한 거점[2]이 되었다. 일본은 만주를 점령한 여세를 몰아 열하성까지 점령하려는 야욕을 숨기지 않았다. 일본군 참모본부는 1932년 3월 <열하성 병요지지> 등을 편찬하며 열하성 병탄을 통해 중국과 소련으로부터 만주국을 격리할 수 있는 완충지대를 확보할 수 있으며 평진 지방을 영유하는 동쪽으로의 작전이 가능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장쉐량은 만주 상실 이후로 권토중래를 꿈꿨지만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렸고 장제스와의 관계도 악화되었으며 왕징웨이 등에게는 만주를 잃은 책임을 지고 하야하라는 공격을 받았다. 장제스는 1932년 5월 15일 열하성 주석 탕위린이 만주국 건국 선언에 서명한 것을 지적하며 그를 해임할 것을 요구했지만, 장쉐량은 이를 거부하고 대신 자신의 직속 부대인 7여단과 16여단을 파병하는 것으로 끝냈다. 장쉐량은 3개 여단을 추가 배치하여 열하성의 방비를 증강하고 중앙군을 주둔시키며 탕위린을 차하얼 성으로 좌천시키자는 장제스의 제안도 거부했다. 중앙군의 파병이 일본군에게 공격의 구실을 제공할 것이라 생각했으며 실추된 자신의 권위가 더욱 실추될까봐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장쉐량의 선택은 열하까지 날려버리는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3. 전개



3.1. 열하에서 고조되는 긴장



3.1.1. 이시모토 사건과 중일의 군사적 충돌


1932년 7월, 관동군 촉탁 이시모토가 게릴라 부대에 납치되는 이시모토 사건이 발생했다. 일본군은 이를 구실로 출병하여 중국군과 대치, 중국군의 사죄를 요구했다. 장제스는 강경대응을 지시하였으나 장쉐량과 열하성장 탕위린은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시모토 사건은 아직 만주의 치안을 정리하지 못했던 관동군이 물러남에 따라 일단락되었고 장제스는 일본군이 열하를 공격할 여유가 없다고 낙관하고 있었다. 하지만 1932년 12월 3일 장쉐량은 일본 측의 심상치 않은 동정에 대한 상세한 전보를 국민정부에 타전했다.
난징 장 위원장 앞. 첩보에 의하면 일본은 만몽정책을 서두르기 위해 연일 중국어에 숙달된 다수의 일본인을 중국인과 함께 각 왕기에 은밀히 잠입시켜 비밀공작을 하고 있음. 장래 열하에 침공할 때 호응시키기 위함임. 고륜의 백 라마와도 이미 접촉이 있으며 그는 심양으로 사람을 파견했음. 근일 전해오는 소식에 의하면 일본은 열하의 교통이 불편하기 때문에 침공 개시를 늦추고 있으나 현재 요령 병공창과 본국의 각 공장에서는 적재량이 많은 자동차 5천대를 서둘러 제조중이라고 함. 그 한대에는 군인 50명 외에도 기관총 2문, 신식 75mm구경 포 1문을 탑재한다 함. 총탄을 막기 위해 주위에는 철판을 쌓았는데 이는 모두 열하 침공을 위한 준비라 함.
11월 19일, 일본군은 금주역에 보급용 차량 10여대, 백미를 만재한 대형차 15대, 그리고 풀로 뒤덮은 적재물 불명의 차량 10여대를 수송, 일본 군단부에 운반해갔음. 또 금주의 일본군 헌병 사령부에 출동한 비민, 조경운, 이맹춘 등 두 사람은 열하 공격의 지휘자 역을 떠맡고 석산참, 대릉하 주변에서 병사를 모집하고 있음. 기병 25원, 보병 15원의 조건으로 6개 여를 편성하여 일본군 3개 여단과 함께 열하에 침략하려고 생각하고 있음. 이것은 정확한 정보임.
이에 장제스는 12월 23일에 다음과 같은 일기를 썼다.

"왜구의 열하 침공은 절대로 피할 수가 없다. 아마도 3개월 이내에 쳐들어올 것이다. 최악의 경우에는, 일본군이 하북으로 진출한 다음 푸이을 업고 들어오든가, 혹은 또 다른 매국노를 괴뢰로 내세워서 '화북독립'을 외치고, 우리 중국을 분열시켜 통일을 불능케 하고, 모든 것을 왜구의 지배하에 둘 것임에 틀림없다. 그 광망한 탐욕은 득롱망촉보다 더해서 중국 전토를 정복하지 않고는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당시 일본군은 의화단 사건 이래로 철도보호를 명목으로 산해관, 진황도 등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었는데 산해관에 일본군 100명과 소규모 공병부대가 주둔하여 4개의 포대를 갖추고 있었고 진황도에서도 50명의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중국 측에서는 하주국 휘하의 장쉐량 직속 9여가 산해관 수비를 맡고 있었는데 일본군에게 금주를 빼앗긴 이후 중국군도 산해관 방비를 중히 여겨 임수, 임영경비사령부를 발족하여 하주국을 사령관에 임명하여 하북의 방비를 다지고 있었다. 이에 일본군은 야간 실탄사격 연습 및 중국 촌락 습격 등의 도발 행위를 벌이며 무력 행사의 구실을 찾고자 했다.

3.1.2. 산해관 전투


1932년 10월 1일 오후 5시, 만주국 경찰 10여명이 거수자 체포를 구실로 산해관 동라성에 몰려들었다. 중국군은 문을 닫고 이들을 저지했으나 별동대 10명이 남문으로 난입해 동라문을 열고 동라성 문루를 점령하고 천하제일관을 장악하기 위해 중국군과 총격전을 벌였다. 이에 만주국 경찰 1명과 중국군 수비대 1명이 각 전사했으며 일본군 산해관 수비대장 오치아이 소위와 하주국 사령관이 교섭하여 쌍방의 오해였던 것으로 마무리하고 사망자에 대한 보상금을 지불한 다음에 종결되었다.
하지만 12월 8일 밤 10시, 관동군 8사단 장갑열차가 산해관에 들이닥쳐 9여 사령부를 향해 4발의 포탄을 발사했다. 장갑열차는 계속 남진하여 관내까지 밀어닥쳤고 석하 철교에서 산해관 성내를 향해 10발을 추가로 발사했다. 중국군이 오치아이 소위에게 항의하여 장갑열차는 9일 새벽 2시에 발포를 중지하고 철수했으나 동이 트자마자 다시 다수의 일본인이 무장하고 진황도 세관에서 중국군 위병을 구타하고 물건을 약탈했다. 중국군은 일본군의 개입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무력을 쓰지 않고 이 사건을 무마하려 했고 외교부장 뤄원간은 12월 11일 일본 외상 우치다에게 항의하였다. 우치다는 문제의 장갑열차가 석탄과 물의 보급을 위해 산해관으로 가고 있었는데 중국군이 먼저 공격하여 응사한 것이라고 대답하여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1933년 1월 1일 정오, 오치아이 소위는 임영경비사령부를 방문하여 신년인사를 하였는데 사령관인 하주국이 베이핑 군사위원회 분회에 참석한 상태라는 것을 확인한 오치아이는 즉각 도발에 들어갔고 1월 1일 심야에 결정적인 충돌이 발생하였다. 산해관 남쪽 일본 헌병 분견대 및 일본군 수비대 주역 파출소 부근의 철도노선에서 수류탄 두발이 폭발했다. 그리고 산해관 남문 중국군 경계초소에 10여발의 총탄이 발사되었다. 이는 일본군 오치아이 소위가 시행한 자작극으로 추정되고 있다. 중국군은 재빨리 성안으로 철수하여 성문을 폐쇄하고 경계태세에 돌입했다. 남문 관외에 대기하고 있던 일본군 장갑열차와 일본군 병력은 즉각 무력시위를 감행했다. 중국군은 비서를 파견해 일본군 헌병대에 공격한 이유에 대해 항의했으나 일본군은 중국군이 먼저 공격했다고 오리발을 내밀었고 2일 새벽 1시 4개 항목을 요구해왔다.
1. 남관 일대의 경계를 일본군에게 맡긴다.
2. 남관 일대의 중국군은 성내로 철수한다.
3. 남관 일대의 중국 경찰 및 공안대도 전부 또는 일부가 성내로 철수한다.
4. 남문 및 산해관 성벽 위의 중국군대는 철수한다.
황당한 요구였지만 일본군이 거부를 구실로 공격할 것을 우려한 중국군 임수사령부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일본에게 만약 해결할 성의가 있다면 우리는 요구조건 중 일부를 승인할 것이다.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는 동안, 야간충돌이 일어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남관의 일본인 거주구역의 경계는 잠시 일본군에게 맡겨도 좋다. 남관 일대의 중국 병사도 잠시 성내로 철수한다. 그러나 남문 성벽 위의 초병에 대해서는 참모를 파견하여, 일본군이 발포만 하지 않는다면 절대로 발포하지 않도록 감시시킨다. 어쨌든 날이 밝는 것을 기다렸다가 진상을 밝힌 다음 다시 교섭하도록 하자.
새벽 3시, 일본군은 남문 및 산해관 성벽 위의 중국병사가 철수하라는 요구를 수정, 남문을 개방하고 문과 성벽 위의 경계를 일본군에게 맡길 것을 요구해왔고 진상 조사 따위는 할 필요 없으니 요구를 승인하지 않으면 즉각 공격하여 무력으로 남문을 탈취하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중국 측은 화답을 거절했다. 이 시각 일본군 장갑열차가 속속 도착함에 따라 일본군 병력은 보병과 포병을 합쳐 2천명 이상으로 증강되었다. 일본군은 오안성과 만수산 일대 고지에서 진지를 구축하고 이리점, 오가령 일대에 보병과 기병을 진출시켰다. 그리고 오전 9시부터 일본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30명의 일본군이 남쪽 성벽으로 사다리를 타고 올라오기 시작하자 중국군이 응사하여 3명을 죽이거나 부상입혔다. 일본군은 이것을 중국군의 선제공격으로 규정하고 주중공사 아리요시를 통해 중국군이 남문을 일본군에게 넘겨주기로 약속해놓고 남문을 인수하러 온 일본군을 공격했다고 얼토당토않은 거짓말로 항의했다.
오전 10시, 석하철교에서 일본군 포 30여문이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고 8대의 비행기가 성내를 폭격하여 민간인 사상자가 속출했다. 하지만 중국군은 성벽으로 접근하는 일본군을 잇달아 격퇴했다. 3일 오전 10시 증원군을 얻은 일본군이 남문과 성벽 동남쪽을 중심으로 맹공을 퍼부었다. 비행기 10여대가 100여발의 폭탄을 투하했고 전차와 공병대가 투입되어 성문과 성벽을 폭파시키려 했다. 그리고 진황도에서 대기하던 히라도 등 일본군 함선 2척도 포격을 가함으로 산해관은 일본군 육해공의 맹공에 휩싸였다. 결국 정오에 남문이 돌파되었고 그곳의 중국군 수비대는 전멸하였다. 중국군은 남문으로 진입하는 일본군을 1차례 격퇴했으나 결국 일본군의 화력을 이기지 못하고 성루가 모두 파괴되었고 수비대 거의 전원이 전사했다. 이어 서문과 북문이 잇달아 함락되고 성내로 일본군이 몰려들자 중국군은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3시 반에 중국군은 산해관을 포기하고 석하를 건너 철수했다. 일본군은 석하를 건너 남맹점과 오리대를 공격했으나 이는 중국군에게 격퇴되었다. 이 싸움으로 중국군 600명과 일본군 300명이 전사, 부상당했다. 장쉐량은 이 소식에 경악하여 "야만적이고 잔인한 국가를 뒤로하고 후퇴해야만 하는가?"라고 외쳤다.

3.1.3. 일본의 폭주와 중국의 대응


일본군이 산해관을 공격하고 있단 소식은 1월 3일 국민정부에 전해졌다. 초공작전을 독려하기 위해 상하이에서 항저우에 막 도착했던 장제스는 이 소식에 즉각 군사위원장 명의로 장쉐량에게 타전했다.

"왜구의 행동이 어떻게 변하든간에, 우리 군이 조속하게 열하로 진군하는 계획을 결코 변경해서는 안된다. 일본 측의 계략은 지극히 교활하다. 만약 어떤 조건을 제시하는 일이 있으면 사전에 꼭 중앙과 검토할 것."

하지만 이 전보를 보내자마자 산해관이 함락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장제스도 난징으로 돌아와 문제에 대해 협의했다. 한편 일본은 우치다 야스야 외상의 명의로 1월 4일,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이탈리아 5개국 대사에게 사건의 경과에 대해 설명하고 일본은 사건의 확대를 원하지 않으며 국지적 사건으로 현지에서 교섭해서 해결하라고 지시했다고 주장했다. 히로히토 천황은 시종무관장 나라를 통해 군대의 진공이 국제연맹과의 관계를 복잡하게 할 것이니 일이 커지지 않게 하라고 육군에 경고하였으며 마키노를 시켜 어전회의 소집을 제안했으나 소집되진 않았다. 상층부의 비확전의도와는 별개로 군부의 폭주는 걷잡을 수가 없어 주일 중국공사 장작빈은 외무성 출입기자들 사이에 일본군의 열하 진공이 방침으로 정해졌다는 보고를 올렸다. 1월 7일에는 베이징에서 톈진 총영사 구와미자와 톈진 주둔군 사령관 나카무라가 비밀리에 회담하여 관동군의 열하 진공을 돕기 위해 베이핑에서 소동을 일으키기로 합의했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1월 9일 일본군 해군 육전대가 진황도에 상륙했고 일본군 전차대가 배치되었다. 1월 10일 일본군은 구문구 요새를 점령, 대포를 설치했다. 1월 11일 육군은 "열하성이 만주국의 일부라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따라서 열하성 안에서 치안을 불안하게 하는 것은 만주국의 불령분자다."라고 주장하며 열하작전은 군사작전이 아니라 만주국의 내부를 안정시키려는 경찰작전이라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1월 13일의 각의에서 사토 내각은 열하성에 대한 국지적 군사작전을 승인했다.
1월 14일 참모총장 간인노미야가 만주에 병력을 추가파병하는 것을 윤허해줄 것을 요청하자 히로히토는 열하성 방면에 대해서는 매우 신중한 대처를 주문하며 열하에 대한 군사작전이 실패할 것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 1월 16일에는 "지금까지는 만주 문제를 '''잘 해왔으나''' 열하 방면의 문제도 있으므로 충분히 신중하게 처리하여 공든 탑을 무너뜨리지 않도록 하라."고 하였다. 같은날 일본군 4여단장 스즈키가 산해관 상공회의에서 일본군은 산해관을 중립지대로 삼고 철수할 것이라며 일본군은 탄약이 충분하여 몇년이고 싸울 수 있다고 큰소리를 쳤다. 1월 19일 내대신 마키노의 상주에 따라 히로히토는 간인노미야의 병력 추가 파병을 윤허하였다는 것을 내각에 알렸다. 1월 21일 우치다 외상은 귀족원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만주, 몽골과 중국은 만리장성에 의해 나누어지고 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논의의 여지가 없다고 하겠다. 또 열하성이 만주의 일부인 것은 만주국 건국 경위만 보더라도 명백하다. 최근 열하성 안에서 치안을 문란하게 하는 자가 있을 뿐 아니라 장쉐량 휘하의 정규군으로서 국경을 넘어 성내로 침입하는 자도 있다. 일만의정서에 의하면 만주국 영토는 일만 양일이 공동으로 치안을 유지하도록 되어 있다. 열하문제는 만주국의 국내문제이며 또 일본은 조약상 의무를 지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하여 지극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열하와 만주에 대한 중국의 주권을 부정하는 발언으로 열하작전이 대외 팽창이 아니라 경찰작전에 불과하다는 육군의 견해를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23일에 장제스는 난징에서 장쉐량과 돤치루이를 불러 회담했다. 이날의 삼자회담에서 중앙군 참모단과 중앙군 6사단의 파견이 결정되었다. 한편 장제스에겐 일본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화북으로 와달란 요구가 계속되었으나 초공작전을 도중에 그만둘 수 없는 노릇이라 장제스는 북상할 수 없었다. 1월 27일 장작빈이 사이온지 긴모치가 곧 내각 개조가 있을 것이니 그렇게 되면 소장파 군인들이 정치를 휘두를 수 없게 되어 곧 일본이 중국에 접근할 것이라고 전해왔다는 것을 알려왔다. 하지만 장제스는 이를 믿지 않았다.

"침략은 일본 전통의 정책이다. 일본의 정책은 어느 정도 큰 타격을 입지 않는 한 변화될 가능성이 없다. 만약 열하공격을 서두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수단을 완하하는 것이리라. 어찌 이 말을 믿을 수 있겠는가?"

같은날 관동군 사령관 무토는 "열하성의 형세는 날로 험악해지고 있으며 만주국의 기초 확립을 위해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정세가 되었다. 관동군의 작전행동상 중요한 시기가 닥쳐왔다."고 훈시하고 1월 28일 관동군 출동 명령을 내렸다. 열하에 대한 군사공격이 임박했다는 것을 감지한 국민정부는 2월 6일 베이핑의 고궁박물관에 있는 1만 상자의 유물을 남쪽으로 소개했다.[3] 2월 10일 장쉐량은 사령부를 베이핑에서 러허성의 성도인 청더로 옮기고 러허성 사수 의지를 곧추세웠고 행정원장 대리 쑹쯔원도 베이핑에서 다음과 같은 결의를 발표했다.

"열하는 중국의 일부이며 마치 광동, 강소 등과 같다. 열하에 대한 공격은 수도에 대한 공격과 다를 바 없다. 일본이 공격을 실행하면 우리는 전국의 힘을 모아 대항할 것이다."

같은 시각 일본군의 침략 준비도 착착 완료되어 가고 있었다. 2월 4일 히로히토는 만리장성을 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열하성 작전을 재가했다. 2월 8일 사이토 내각은 국제연맹 관계상 열하침공이 어렵다고 반대했다. 이에 히로히토는 2월 10일 간인노미야에게 열하 작전 중지가 가능한지 물었다. 2월 11일 사이토는 열하를 공격하면 일본이 국제연맹에서 제명될 가능성을 제기했다. 히로히토는 통수권자의 직권으로 작전을 중지시키는 것을 고려했으나 시종무관 나라가 이것이 정변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하자 그만두었고 사이토 내각도 일본 군부의 완강함을 꺾을 수 없어 열하 작전을 승인했다. 2월 12일 히로히토는 열하 작전에 대한 두번째 재가를 해주었다. 관동군은 2월 9일 열하경략계획을 수립, 20일부터 전투배치에 들어갔다. 관동군은 만주국군 4만 2천명과 2개 사단, 1개 독립혼성여단, 1개 기병여단, 1개 비행대대와 전차 중대까지 동원하여 전투 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같은날 사이토 내각은 국제연맹 탈퇴를 비밀리에 결정했다.
21일 관동군의 진격이 시작되어 조양과 개로에서 교전이 벌어졌고 탕위린은 이 상황을 전국에 타전하고 원조를 요청했다.

3.2. 열하작전



3.2.1. 열하성의 실함


2월 23일 일본 외무성은 중국에게 열하성에서 군대를 철수시킬 것을 요구하는 비망록을 제출했다. 중국 외교부는 즉각 이를 거부했다. 주중 일본 공사는 외교부장 뤄원간에게 '열하침략의 논리' 3개항을 제출했다.
1. 열하성 내에 있어 장쉐량의 군대 및 기타 반만군대의 존재는 만주국 주권에 저촉될 뿐 아니라, 열하성의 치안회복과도 양립될 수 없다. 이제 만주국은 열하성내의 비적과 병비 잔당의 숙청을 실시하는데, 일본군은 일만의정서에 따라 이에 협력한다. 일본군이 장쉐량의 군대 등과 충돌하더라도 그것은 그들이 만주국의 요구대로 관내에서 철수하지 않았기 때문이니, 책임은 중국측에 있다.
2. 일본군의 행동은 열하성의 치안회복만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데, 장쉐량군 및 기타 반만군이 적극행동으로 나오면 전국이 화북으로 미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3. 만주국은 반만군의 귀순에 일관하여 관대한 처분을 한다. 탕위린 등이 귀순하면 종래의 방침에 따라 관대하게 처치한다.
뤄원간은 즉석에서 반박하는 공문서를 제출했다.
1. 중국 정부가 열하에 파병하여 외국의 무력침략에 방위하는 것은 국가로서의 주권행사이다. 동북의 가짜 조직이 일본에 의해 조작된 괴뢰임은 온 세상이 주지하는 사실이며 그 비법행위 일체는 일본이 책임져야 할 일이다. 중국 정부는 가짜 조직 및 일만의정서에 대해서도 이미 엄중한 항의를 하였으며 그를 일절 승인하지 않는다.
2. 일본군의 행동이 화북에까지 미치게 되는 일이 있다고 하는데 이는 아직도 자각하지 못하고 침략의 의사를 드러내는 증거이다. 일본군대가 화북을 침략하면 중국 군대는 국토자위의 권리를 행사한다.
3. 열하성 주석 탕위린은 중국의 지방장관이다. 일본 정부가 탕 주석에게 언급한 점은 실로 의식적인 모욕행위임으로 이를 특히 항의한다.
일본군은 이에 화답하듯이 2월 23일 열하작전을 개시하였다. 일본군의 세갈래에 걸친 공격에 탕위린 휘하 2만명의 군대는 거의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다. 일본군은 소이탄으로 숲과 마을을 태워버리며 전진했고 탕위린의 부대 대부분은 싸우지도 않고 퇴각하거나 심지어 일본군에 투항하기도 했다. 그나마 장쉐량의 부대는 능원, 평천, 적봉 3개 거점을 중심으로 열심히 맞서 싸웠으나 일본군의 압도적인 화력에 처참히 깨져 3월 2일 능원이 함락되고 반격하려던 우조린 휘하 130사단은 일본군의 포격에 전멸, 사단장 우조린까지 전사했다. 일본군이 청더로 몰려들자 장제스는 결국 초공작전 중지를 결정하고 군정부장 허잉친에게 북상하라고 지시했다.

"이제 성패의 관건은 한경이 열하에 나서느냐 안 나서느냐에 달려 있다. 은 오늘밤 기차로 북상하기 바란다."

이때 열하성 주석 탕위린은 징발한 대량의 트럭에 재물과 아편을 가득 채워 전선을 독려한다는 구실로 달아났다. 그의 재물들은 중앙군이 압수했으나 탕위린은 200명의 호위병을 거느리고 빠져나갔다. 탕위린이 달아나버렸단 소식에 일본군은 즉각 3월 4일 청더를 함락시켰는데 청더에 진입한 일본군은 고작 120명에 지나지 않는 소부대였다. 결국 탕위린의 도주에 탕위린 군대는 완전히 와해되어 적봉과 평천도 함락되었고 난평이 함락됨에 따라 열하는 일본군 손에 완전히 떨어졌다.

3.2.2. 장쉐량의 사직


불과 일주일만에 열하 전역이 함락되자 중국군은 허잉친의 중앙군을 포함한 화북의 부대들을 8개 군단으로 나누어 방어선을 꾸리기 시작했다. 황당한 패배에 전국 각지에서 장쉐량에 대한 비난이 빗발쳤고 장제스가 조속히 북상해서 직접 전쟁을 지휘할 것을 요구했다. 장제스는 3월 6일 비행기를 타고 난창에서 한커우로 이동, 그곳에서 평행철로를 타고 7일 정저우에 도착하여 담화를 발표했다.

"열하의 실수, 동북의 함락은 모두 내가 전 책임을 질 생각이다. 실지를 회복하기까지는 항일의 책임을 결코 방기하지 않겠다. 국민의 선봉으로서 당과 국가에 보답하며 군민의 희망에 응할 것을 맹세한다."

같은날 장쉐량도 사직을 원한다고 타전해왔다. 3월 8일 스좌장에 도착하여 장쉐량, 허잉친을 만난 장제스는 5분 간의 회담 이후 장쉐량의 사직을 받아들이고 군사위원회 베이핑 분회를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위원장, 즉 장제스의 직접 지휘 하에 둘 것이며 베이핑, 톈진, 치치하얼 계엄사령부를 설치하는 것을 결정했다. 9일 바오딩에 도착한 장제스는 쑹쯔원과 장쉐량 사직 문제를 협의했다. 쑹쯔원은 장쉐량을 사직시키면 북방 군대를 다루기 힘들 것이라 여겨 난색을 표했으나 이미 장쉐량에 대한 여론이 너무 나빠져서 어쩔 수 없었다. 3월 10일 장쉐량의 사직이 정식으로 수리되었고 장쉐량은 휘하 장병들에게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우리가 중원으로 들어온 까닭은 국가 통일을 달성하기 위함이었다. (...) 하지만 그 결과는 이제 우리가 돌아갈 집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병사들에게 장제스에게 복종할 것이며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하면 만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 덧붙인 다음에 아내들과 경호원, 그리고 개인 고문인 윌리엄 헨리 도널드를 데리고 비행기를 타고 상하이로 떠났다. 그가 상하이에 도착하자 군중이 당신 때문에 만주에 이어 열하까지 잃었다고 비난했다. 장쉐량은 3월 11일 사직을 발표하는 전보를 띄우고 도널드에게 아편 중독을 치료받은 후 유럽으로 외유를 떠났다. 장쉐량의 자리였던 군사위원회 베이핑 분회 대리위원장 자리에는 3월 12일 허잉친이 임명되었다.

3.2.3. 장성전투


열하를 함락시킨 후에도 일본군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무토 사령관은 3월 4일 만리장성의 주요관문을 탈취하라고 지시하였고 이에 따라 장성의 소유권을 놓고 중국군과 일본군의 공방전이 이어졌다.
첫번째 격전장은 베이핑 동북쪽에서 100킬로미터 떨어진 고북구였다. 고북구는 열하의 성도인 청더와 베이핑을 잇는 장성관문으로 전략적 요충지라 베이핑을 사수하기 위해 대단히 중요한 곳이었는데 중국군도 이를 인지하고 있어 장쉐량 휘하의 양걸과 허잉친의 군대는 북상하면서 고북구 방면에서 일본군에게 반격할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 원래 계획에는 양걸 휘하의 8군단 67군을 고북구에 주둔시키고 107사단을 북상시켜 장성 북쪽 청석량에서 일본군에 맞섰단 계획이었다. 하지만 일본군의 진격속도가 너무도 빨라 107사단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107사단의 선봉인 621단은 3월 5일 밤, 청석량 인근의 노호산, 마권자, 황토량 인근에서 일본군과 조우하여 교전에 들어갔다. 일본군은 전차 2대와 장갑차 2,30대로 중무장하고 있었으나 621단은 일본군은 전차 2대를 파괴하고 일본군을 격퇴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증원군이 속속 도착하면서 3월 7일 새벽에 격전이 벌어졌다. 중국군도 619, 620단을 추가 투입하여 맞서 3일 간의 격전 끝에 일본군의 진격을 저지할 수 있었으나 107사단은 병력의 삼분의 일을 잃는 참혹한 피해를 치러야 했다. 이에 67군 군장 왕이철은 3월 9일 107사단을 후퇴시키고 112사단을 배치했으나 일본군은 107사단이 철수하는 틈을 노려 3월 10일 장성에 육박했다. 또한 같은날 고북구 동쪽 5킬로미터 떨어진 장군루 역시 일본군의 공격을 받았다. 중국군의 저항은 치열했으나 3월 11일 아침 일본군 항공기들이 폭격을 퍼붓자 결국 당해내지 못하고 무너지고 말았다. 이때 쉬저우에서 달려온 중앙군 17군 소속 25사단이 도착하여 반격을 시도했으나 일본군의 화력에 밀려 17일 오후 고북구 남쪽으로 철수했고 고북구는 일본군에게 함락되었다.
한편 고북구 동편 100킬로미터 지점의 회봉구에서도 격전이 벌어졌다. 희봉구는 쑹저위안 휘하 3군 29군 소속 37사단과 38사단이 주둔하고 있었다. 37사단은 3월 9일 오후 희봉구에 도착하였는데 이미 평천에서 남하한 일본군은 8사단 혼성 14연대가 장성의 최고지점을 점령한 상태였다. 37사단 217단 단장 왕장해는 일본군을 급습해 장성을 탈환하였으나 일본군이 다시 반격해 함락시켰다. 오후 11시, 37사단장 풍치안은 110여를 217단의 증원부대로 출동시키고 2개 영을 우회시켜 일본군 배후를 공격하게했다. 이들은 일본군 보급물자에 불을 지르고 기관총 10여정을 노획하고 돌아왔다. 3월 10일부터 일본군이 반격했고 3월 11일에는 일본군의 총공격이 벌어졌다. 3군단 부총지휘 친더춘은 38사단장 장자춘, 37사단장 풍치안과 협의하여 정예 여단 2개를 선발해 반가구에서 일본군 배후를 기습하였다. 11시 반 반가구에서 출동한 중국군 1개 여단은 난하를 따라 3킬로미터 북상한 후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12일 새벽 5시 제가욕 일대의 일본군을 습격하여 몰아내고 중국군을 맹폭하던 일본군 포병 진지를 함락시켰다. 날이 밝자 일본군은 반격해왔으나 중국군은 일본군 야포와 탄약을 파괴하고 기관총과 군용지도 등의 다수의 군수품을 노획하여 성공적으로 철수했다. 또 다른 1개 여단은 반가구 북동쪽의 일본군 부대를 습격하여 10대의 차량을 파괴하고 12일 오후에 복귀했다. 이 두개 여단의 활약으로 18문의 대포가 노획되었으며 일본군 800명이 전사, 부상당했다. 이들이 유명한 쑹저위안의 대도대다. 3월 16일 희봉구 서남쪽 30킬로미터 지점의 나문욕을 일본군이 공격했으나 유여명이 지휘하는 29군 부대들이 3일 간의 교전 끝에 이들을 저지했다. 따라서 희봉구 일대 장성은 모두 중국군이 사수하게 되었는데 이는 열하사변이 발발한 이후로 중국의 첫 승리였다. 장제스는 크게 고무되어 23일 쑹저위안에게 위로 전보를 보냈다.

"적을 퇴각시켜, 용기를 고무하고 높은 전의를 얻었다. 그러나 조등우 여장이 부상을 당하고, 왕봉지 영장은 전사했다하니 그 격렬함을 짐작하겠다. 실로 마음 든든한 한편 슬프다."

3월 19일자 익세보 역시 희봉구 전투에 찬사를 보냈다.
프랑스인이 베르됭의 영웅을 잊지 않는 것처럼 중국인은 영세만대에 걸쳐 희봉구의 영웅을 잊지 못할 것이다. 희봉구에서의 몇 차례에 걸친 전투에 의해 우리 중국인은 이제 인격을 유지할 수가 있게 된 것이다.
이 시기를 장성항전이라고도 한다.

3.2.4. 일본의 국제연맹 탈퇴


한편 일본의 침략행위에 국제연맹에서는 일본의 입지가 크게 좁아지고 있었다. 1932년 11월 21일부터 국제연맹 이사회는 리튼 보고서를 심의하고 있었는데 일본 대표 마쓰오카 요스케는 이미 "일본은 연맹의 행위와 언론에 불만이 있을 경우, 탈퇴한다."고 경고를 한 상태였다. 히로히토는 이 방침에 대하여 일본의 남양군도 통치에 영향이 있지 않을 것인가만을 물을 뿐이었다. 1932년 12월 6일에 열린 국제연맹 특별총회에서 옌후이칭 중국대표가 국제연맹규약, 부전조약, 9개국 조약을 위반한 것을 놓고 일본을 공격하며 만주국 해체와 일본군 철수를 요구했다. 체코슬로바키아에드바르트 베네시 외무장관[4]은 일본의 행동이 부전조약 위반이고 국제연맹규약 대부분을 위반했다고 비판했으며 만주국 설립도 규약 10조 위반으로 '기정사실은 세계 평화를 위해 가장 위험한 것'이라고 호소했다. 스페인 대표도 규약 10조와 12조를 위반한 일본의 행동을 예외 행동으로 인정하면 모든 사건들이 예외적 사건이 될 것이라며 법과 질서 유지를 주장했다.
하지만 일본의 탈퇴를 두려워한 영국 등이 일본의 입장을 옹호하였다. 12월 7일 영국 램지 맥도널드 정권의 사이먼 외무장관은 "한 나라의 국경이 인접국 군대의 침략을 받은 것 같은 간단한 사건이 아니다."라는 리튼 보고서의 대목을 인용하며 중국 측의 배타주의를 지적하며 실제적 해결이 필요하다고 했고 중국 측에 일본과 직접 교섭에 나서라고 요구했다. 12월 8일 캐나다도 중국에 중앙정부가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며 중국에게 국제연맹 회원국 자격이 있는지를 물었고 이번 사건 때문에 국제연맹의 권위가 실추된단 주장은 과장되었다고 주장했다. 12월 8일 궈타이치가 중국의 일본에 대한 보이콧의 정당성을 주장했고 총회 마지막에 일본 대표 마쓰오카가 국제연맹에 소련과 미국이 참가하지 않았으니 국제연맹은 일본을 심판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결국 스페인, 체코슬로바키아, 아일랜드, 스웨덴의 비난 결의안은 기각되었고 보고서는 실질검토되지 못하였다. 제네바에 파견된 구웨이쥔은 일본에 대한 경제제재를 요구했지만 중국과 일본이 단교하지 않았단 이유로 거부되었다. 이에 빡친 구웨이쥔은 일본에 선전포고하고 단교를 할 것을 주장했지만 왕징웨이는 열강은 그래봐야 중국을 돕지 않을 것이라며 그랬다간 화북 전역이 일본 손아귀에 들어간다고 반대했고 대일 개전은 무산되었다.
하지만 새롭게 출범한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정권은 일본의 침략에 묵과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굳건히 하고 있었다. 미국은 스팀슨 선언을 통해 만주국에 대한 불승인 정책을 확고히 하고 옵저버 역할로 국제연맹에 출두한 주 스위스 영사 윌슨을 통해 벨기에 대표이며 총회 의장인 이만스에게 미국이 일본에 굴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 전하게 했다. 여기에 일본의 산해관 침공 소식 등이 잇달아 전해지면서 일본의 입장이 크게 불리해지기 시작했다. 일본의 연맹탈퇴를 막기 위해 일본의 입장을 옹호하는 트리먼드-스기무라 시안이 제출되었으나 이는 부결되었고 영국도 기존의 유화적인 입장을 버리고 강경한 태도로 돌아섰다. 영국 정부는 1월 12일 주영 일본대사 마쓰히라를 초치함으로 항의했고 미국, 소련의 개입을 막아주는 조건으로 국제연맹의 조치를 받아들일 것을 권유했으나 일본은 이를 거부했다. 일본은 두차례 수정안을 제출함으로 위기를 모면하려 했으나 역시 부결되었다.
국제연맹 특별 19인 위원회는 2월 14일 총회보고서안을 심의가결하여 2월 21일 임시총회를 개최하도록 요청했다. 이 총회보고서는 만주의 주권은 중국에 속하며 일본이 동삼성에 탈취한 권리는 중국의 주권행사를 제한한 것이고 일본이 연맹 제10조 규정을 위반해 중국 영토를 점거, 독립시켰으며 일본군의 군사행위가 자위 행위가 아님 등을 명시했다. 따라서 국제연맹은 만철 부속지 이외의 일본군의 철수, 만주의 일본 특수권익은 보장하며 만주에서의 자치정부 수립을 요구함으로 완전한 원상복구는 아니나 그렇다고 만주국 승인 역시 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이사회가 일본의 편이라 믿었던 일본은 경악했고 이시와라 간지 등은 연맹 따위는 신경 쓸 것 없다고 날뛰기 시작했다. 2월 19일 사이온지 긴모치는 사이토에게 현지의 의견에 따라야 한다고 했으나 2월 20일의 각의는 국제연맹 탈퇴를 결정했다. 22일에는 추밀원이 연맹탈퇴를 승인했다. 24일의 연맹총회에서 중국 대표 옌후이칭은 이것이 미흡하여 모든 것에 동의할 수는 없으나 중국이 연맹의 충실한 일원이므로 3자가 공평하게 판단하리라 믿는다는 이유로 보고서 수락 방침을 밝혔다.

"국제연맹이 만주국 불승인을 견지한 것은 지극히 정당한 일로서 중국 대표단은 심심한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연맹의 각 가맹국은 평화적 수단 이외의 방법으로 만들어진 어떠한 국세 또는 조약에 대해서도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이미 밝히고 있는 바 이번에도 이를 계씅, 사실상 법률상의 만주국 불승인을 표명하였다. 또한 연맹에 가맹하지 않은 관계국[5]

역시 가맹국과 마찬가지로 불승인 결정을 내린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로서, 국제연맹의 목표에 날로 가까워지고 있다 하겠다. 중국 정부는 미국 및 소련 정부가 국제연맹에 협력, 중일분쟁의 해결에 나선 것을 마음 속 깊이 환영한다. 태평양을 끼고 있는 두 나라의 참가는, 극동의 평화유지에 큰 이익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나는 여기서 중국 정부가 보고서안에 찬성의 한표를 던질 것임을 정식으로 표명한다."

마쓰오카는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보고서 전체를 통해 분명한 것은, 19인 위원회가 극동의 실정과 일본의 곤란한 입장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 그리고 일본이 행동하지 않을 수 없는 그 최종적 목적을 인식하지 있지 못한다는 점이다. (...) 일본은 만주에서 두 차례의 전쟁을 했고, 더구나 그 전쟁에 일본 국민의 존립을 모두 걸었다. 일본은 이제 전쟁에 대한 욕심은 없다. 국제평화는 호양을 기초로 했을 때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진실이다. 그러나 어느 나라건 그 존립을 위해 도저히 양보할 수도 혹은 타협할 수도 없는 사활문제를 안고 있다. 만주문제는 곧 그런 것이다."

곧 표결이 벌어졌고 총회는 찬성 42, 반대 1[6], 기권 1[7]의 압도적인 표결로 만주국 불승인 방침을 담은 총회보고서안의 채택을 가결했다. 이에 수틀린 마쓰오카는 내각에서 결정한 바에 따라 퇴장했다.

"일본 정부는 이제 극동에서 평화를 달성하는 방법에 대하여, 일본과 여타 연맹국이 별개의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일본 정부는 일중 분쟁에 관하여 국제연맹과 협력하고자 하는 노력이 한계점에 도달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마지막으로 '사요나라'라고 말하고 떠났고 나가오카, 사토 등 다른 대표와 수행원들도 뒤를 따랐다. 3월 27일 국제연맹 탈퇴가 정식으로 통고되었다. 히로히토는 외무성 아시아국장 다니 마사유키와 상의하여 칙서를 내렸다.

"문무가 서로 그 직분에 충실하고 일반 백성이 각자 자기 일에 힘써 가고자 하는 길을 걷고 또 협력에 매진함으로써 이 정국에 대처하라."

마키노는 다음과 같이 일기에 썼다.

"연맹 탈외 문제의 의미를 충분히 음미하지 않고, 단지 탈퇴에 의해 크게 목적을 달성하는 것처럼, 탈퇴 자체가 마치 목적인 것 같이 생각해버리고, 그 목적 달성에 광분하는 언론계의 현 상황은 제국 인심의 경박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앞날을 위해 실로 우려할 만하다. 시일이 경과한 후에는 틀림없이 깨닫는 점이 있으리라 믿는다."


3.3. 화북침략



3.3.1. 일본의 1차 화북공세(1933.4.11~1933.4.19)


국제적 정세가 긴박한 가운데 3월 10일 새벽에는 장성 전역에서 일본군의 총공세가 시작되어 11일 란저우 복쪽 60킬로미터 지점인 냉구가 함락되고 13일 계령구도 3일 밤낮에 걸친 전투 끝에 함락되었다. 일본군은 대두영을 거쳐 무령으로 진격했고 쑹저위안이 사수한 희봉구 역시 위기에 처했다. 일본군의 이러한 움직임에 영국 공사 램프슨을 중재역으로 삼아 정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19일 일본 공사관원 나카야마가 램프슨과 면담하고 정전교섭에 대한 협력을 요청했다. 이에 허잉친도 베이징 대학장 장몽린(장멍린), 후스 등 지식인과 논의하고 그 결과에 따라 장몽린이 개인 자격으로 램프슨에게 정전 조정을 의뢰했다. 하지만 일본군은 아랑곳않고 진격했고 20일 창려, 북대하 등이 함락됨으로 란저우 동쪽 전역이 함락되어 베이핑과 텐진이 위험해졌다. 일본군은 이미 톈진에서 200킬로미터도 떨이지 않은 지점에 이르고 있었다.
한편 바오딩까지 북상했던 장제스는 3월 26일 다시 난징으로 돌아와 외유에서 돌아와 행정원장에 복귀한 왕징웨이, 쑨커, 다이지타오 등과 일본의 국제연맹 탈퇴 및 일본의 열하침공을 틈타 확장하는 공산당 문제 등에 대해 논의했다.[8] 이날 회의에서 장제스는 '대일 방위와 대공 공세를 강화할 것'이라는 당면방침을 제시했다.
이때 군사위원회 베이핑 분회는 일본이 장성배후를 칠 준비를 하는 모습에 하주국 휘하의 2군단 57군은 석문채에 전진배치하고 석하를 방위선으로 삼으며 란저우를 2차 방위선으로 하는 수비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장제스가 난징에 도착했던 3월 26일, 일본군 8사단 4여단이 항공기와 전차를 대거 동원하여 공세를 시작했다. 다음날인 3월 27일에 관동군 사령관 무토 노부요시가 장성 이남에서의 활동을 금지하는 정부 방침을 씹고 491호 명령을 발동하여 장성 이남을 공격할 것을 지시했고 구문구 방면에서 시작된 공세에 일본군의 화력이 압도적이라 4월 1일 석문채가 함락되었고 일본의 장성 이남에서의 군사행동에 다시 국제적 관심이 주목되었다. 베이핑 주재 각국 외교단은 4일 긴급 대책회의를 열어 일본 공사관에 외국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장할 것이며 신축조약을 통해 보장된 주병권을 이탈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일본은 이미 외국의 목소리 따윈 안중에도 없었고 4일 밤 진황도의 후배 지역인 해양진을 점령, 5일에는 란저우에 폭격을 가했다. 4월 11일부터 관동군은 독자 작전에 돌입하였다. 4월 22일 장제스는 허잉친에게서 장몽린-램프슨 정전교섭에 대한 양해를 요구받았다. 장제스는 전황이 불리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왕징웨이와 연락하여 정전교섭을 진행하기로 했다. 허잉친에게 장제스는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장몽린과 영국 공사 두 사람이 조정문제를 다루는 것은 좋다. 그 준비와 적절한 방법에 대해서는 이미 왕 원장에게 상세한 지시를 내릴 준비를 갖추도록 전보로 연락해 놓았다. 단, 다음 네가지 점에 특히 주의하기 바란다.

1. 이 문제는 사회의 유력자 힘으로 추천하되, 국제적 문제로 끌고 가고, 정부 인사들은 얼굴을 내밀지 않는 것이 좋다.

2. 대체적인 방침은 우선 화북의 군인들 의견에 따를 것이다. 군장 이상의 장군을 일단 개별적으로 초치하여 타진할 일이다.

3. 사회지도자와 군인의 의견이 일치되거든 그들로 하여금 중앙부에 건의시킨다. 중앙부는 어디까지나 수동적인 입장을 취하는 형식을 갖춘다.

4. 공명심이 강한 군인에 대해서는 사전에 직접 얘기해두는 편이 좋겠다. 이 문제를 끌고 갈 사회적 유력자를 시켜 간접적으로 설명하게 하면 좋겠다."

4월 22일 장몽린은 램프슨을 찾아가 상하이 때 영국이 보여준 성의에 대해 감사를 표하면서 중국 측은 베이핑의 외교부차장 유숭걸(류충제)이 정부대표가 되며 모든 책임을 행정원장 왕징웨이가 질 것임을 전했다. 램프스은 이러한 상황을 본국에 보고하는 한편 주중 미국공사 넬슨 존슨에게도 알렸다. 하지만 외교부장 뤄원간이 중일 직접 교섭을 반대하면서 일이 틀어졌다. 당시 중화민국 외교부는 일본에 대한 결사항전을 주장하며 교섭에 반대하고 있었다. 22일 밤 외교부의 아시아국장 심근정이 램프슨에게 자신이 장몽린의 행동에 대해 아무런 훈령을 받은 바 없다고 알리자 램프슨은 조정을 보류했다. 뤄원간은 유숭걸에게 전보를 보내 정전협상에 반대했고 황부와 허잉친에게도 강경한 항전 의사를 드러냈다.

"장성항전 시기 일본과 정전협정을 체결하면 동북 지방의 영토를 되찾을 수 없게 되고, 정전 협정을 체결하더라도 국제연맹의 규약과 결의안에 의거하여 적당한 방법으로 모든 중일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정전협정을 체결하더라도 일본군이 다시 진격해 압박하면 베이핑과 톈진을 잃게 될 것이므로, 정전협정을 효과가 없을 것이다."

이때 장제스는 허잉친에게 추가적인 지시를 내렸다.

"기한을 지켜 북경성의 방위공사를 적극적으로 완성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것이 좋겠다. 만약 밀운이 함락되어 동쪽의 방위선이 확보되지 않게 되면 이곳을 최후의 거점으로 삼지 않으면 안된다. 현재의 평화해결 움직임은 그대로 계속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효과가 없을는지도 모르고, 시간적으로 맞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준비는 서두르지 않으면 안된다. 준비만 하면 완급 어느 쪽에도 대처할 수 있다. 만일 일본이 베이핑, 톈진을 공격할 기미가 보이거든 그 즉시 고북구 방면의 정예부대를 비밀리에 베이핑에 입성시켜 배성차일의 계로써 대비하도록 등은 조속한 준비를 진행시키는 것이 좋겠다. 나는 전문을 침과 동시에 난징으로 연락하여 제88사단[9]

을 은밀히 베이핑으로 이동시킬 것이다."

국민정부는 유숭걸에게 연락해 영국공사 램프슨, 프랑스 공사 윌던, 미국 공사 존슨에게 일본군이 베이핑과 텐진을 공격한다면 중국군이 항전하는 것을 전제로 각국 공사들이 적극적으로 조정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이들은 모두 냉담한 반응을 보였고 유숭걸은 뤄원간에게 공사들의 조정을 기대할 수 없다고 보고했다.
한편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일본군의 4월 공세는 상부의 재가를 받지 않은 독자적 행동이었고 이 때문에 히로히토가 개입하여 일본군의 공세를 중지시킬 것을 지시했다. 이 때문에 4월 19일 일본군은 군대를 돌려 관외로 철수했다. 하지만 이런 내부 사정을 외국에선 알지 못했으므로 온갖 추측이 오갔다. 톈진의 대공보는 병력 부족과 국제적 간섭을 두려워 일본이 철수한 것이라 추측했다.
하지만 관동군과 육군 중앙 등은 관내 진출을 위해 계속하기 모략을 꾸미고 있었다. 관동군 참모본부의 이타가키 세이시로는 화북에 괴뢰정부를 만들어 일본에 호응하게 하기 위해 돤치루이, 쑨촨팡 등과 접촉하였으나 이들은 일본의 접촉을 모두 거절했다. 이에 전 호남독군인 장징야오스여우싼 등과 재차 접촉했는데 장징야오가 호응하여 자신이 쑹저위안과 친분이 있다면서 쑹저위안을 끌어들이겠다고 나섰다. 이에 이타가키는 장징야오에게 공작금 30만원을 지급하였고 4월 18일 관동군에 전보를 쳐 4월 21일이면 장징야오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쑹저위안이 호응할 것이니 관동군이 남하해야 한다고 김칫국을 마셨으나 4월 19일에 철수명령이 내려짐에 따라 무산되었다. 이타가키는 4월 26일이나 27일에 중국군 112사단이 반란을 일으키고 쑹저위안 등이 호응한다 운운했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3.3.2. 일본의 2차 화북공세(1933.5.7~1933.5.22)


장제스는 일본군이 일단 철수했으나 재차 공격할 것을 의심치 않고 허잉친에게 추가적으로 지령하고 경계를 촉구했다.

"평화공작이 성취되든 안 됟든 관계없이 우리 군은 적극적으로 방위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 이는 우리 민족 최후의 일전이다. 불행히 패하는 일이 있더라도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어 더 이상 적이 깊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저지할 수만 있으면 된다. 범위를 넓히면 넓힐수록 배비도 점점 곤란하게 된다. 또 병력이 많아지면 지휘도 어렵게 되며 결국은 수렁에 빠져서 발을 빼지 못하여 붕괴하게 될 것이다. 성내에 식량, 탄약도 준비하는 것이 좋겠다."

허잉친은 27일 다음과 같이 답장했다.

"26일, 고급장령들과 밀담했는데 전원이 군인은 그저 명령에 복종할 뿐이라며 정전문제에 대해서는 완전히 중앙 및 군사위원회 베이핑분회의 명령에 따를 것임을 표명했음. 베이핑, 톈진을 대일 장기 저항의 근거지로 만들되 당면한 방책으로는 1. 베이핑, 톈진 방면의 군사배치를 극력강화한다, 2. 외교적 수단을 동원하여 적의 진격을 늦추고 그 사이에 우리 쪽의 준비를 진행한다는 두 가지로 결정했음."

이 때 일본군은 장성 이남에서만 철수했을 뿐 중국군이 장악한 장성에서는 여전히 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베이핑의 북동쪽 관문인 남천문에서는 황걸이 지휘하는 2사단이 22일 이래로 진지를 사수하고 있었고 여기에 일전에 2사단과 교대했던 25사단과 83사단이 추가로 투입되어 일본군에 맞섰다. 화력이 부족했던 중국군은 짚신을 신고 방한구도 없이 일본군의 항공기와 중화기에 처절하게 맞서 싸웠다. 근처가 온통 돌산이라 엄페할 곳도 찾기 어려웠던 중국군은 철봉으로 구멍을 뚫어 폭격을 피하고 일본군 보병이 접근하면 매복공격하는 식으로 일본군의 공격에 맞섰다. 고북구 남쪽 40킬로미터 지점인 흥륭현에서는 중국군이 장성 넘어 반격하여 일본군을 포위하였다. 이에 일본군은 군정부장 진의에게 정전할 의사가 있다고 알려왔다. 상하이 주재 무관 네모토는 4월 27일 진의에게 중국이 흥륭현의 포위망을 풀어준다면 일본군은 남천문에서 철수할 것이며 중국군이 영평-옥전-순의 선까지 물러나준다면 정전할 용의가 있다고 전했다. 허잉친은 29일 진의에게 일본군의 요구를 수락하겠다고 알렸고 남천문의 중국군을 철수시키고 흥륭현의 포위도 풀었다. 하지만 일본군의 이타가키와 베이핑 주재무관 나가쓰는 정전에 반대하였다. 이타가키는 지금이야말로 중국의 반중앙운동을 자극할 시간이며 중국을 내버려두면 곧 항일정책을 할 것이라 주장했고 나가쓰는 1개 사단을 투입해 베이핑과 텐진을 점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관동부 참모부 작전과 등이 호응하여 결전을 주장했고 정보과를 뜰어들여 다시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5월 3일 국민정부는 행정원 베이핑 정무정리위원회를 설치하고 일본에 인맥이 많던 황부를 위원장에 임명해 정전교섭 준비를 갖추었다. 이때 관동군 참모장 고이소 구니아키가 다롄으로 돌아와 관동군 사령관 무토에게 결전을 해야 한다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육군 중앙도 관동군의 행패를 전황상 필요한 일시작전이라고 옹호하고 있었고 결국 이러한 분위기에 고무된 관동군은 5월 7일 난동 방면에서 관내작전을 다시 발효하여 6사단을 선봉으로 산해관에서 무령으로 침공해들어왔다. 이날 호남 독군을 지냈던 장징야오가 베이핑의 한 호텔 욕실에서 암살되었다.[10] 그가 가지고 있던 비밀문서를 통해 일본군이 화북에 괴뢰정권을 세우려 했음이 드러났다. 일본군은 11일 밤부터 12일에 걸쳐 난하를 도하해 14일 란저우를 점령했고 고북구 쪽에서는 8사단이 공세를 취해 12일 신개령을 돌파, 밀운 동쪽 30킬로미터 지점의 석갑진을 점령했다. 단 며칠동안 중국군은 3천명을 잃었다. 황부는 정전교섭에 희망을 걸고 네모토와 접촉했다. 네모토는 관동군의 지시에 따라 '일본군이 베이핑, 텐진까지 진격할 의도는 없으나 중국군이 일본군 수비구역에 포탄이 미치지 않는 선까지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이에 황부는 장제스에게 다음과 같이 알렸다.

"왜군은 촌을 얻으면 척을 나아간다. 우리가 가까운 길을 택하려 하면, 해결은 도리어 늦어진다. 일본에게 성의있는 보장이 없는 한 결코 가볍게 양보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관내침공은 일본의 기정방침이며, 그 방침은 근본적으로 결코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허잉친도 군사위원회 베이핑 분회 총참의 웅빈을 나가쓰에게 파견하여 중국군을 노대-보지 선으로 후퇴시키라는 일본의 조건을 받아들였는데 나가쓰는 중국 측의 양보에 오히려 더욱 흥분하여 중국군이 나약하니 지금이야말로 공격할 절호의 기회라고 공세를 부추겼다. 결국 탕산, 밀운, 삼하, 계현이 잇달아 함락되어 일본군은 베이핑에서 불과 50킬로미터 떨어진 지점까지 진출했다. 여기에 이타가키의 특무기관이 스여우싼의 부하들을 선동하여 18일 란저우에서 독립을 선포하게 했고 일본이 매수한 깡패들이 텐진의 일본 조계의 해광사에 폭탄을 던지고 베이핑 일본 해군무관실의 국화 문양을 파괴하게 했다. 거기에 20일에는 중국 청년이 베이핑 일본공사관 위병을 칼로 찔렀고 톈진의 일본군은 이를 구실로 신축조약의 방위출동을 명분삼아 보병과 포병 600명을 베이핑 성내로 진입시켰다. 5월 22일 신하촌, 마구교에서 만복린과 왕이철이 잇달아 패했고 쑹저위안은 우익이 텅 비어 방어하기 불가능해졌다.
한편 히로히토는 관동군의 독자행동에 대해 사후재가를 해주긴 했으나 상당한 노여움을 표했다. 이는 관동군이 자신의 통수권을 우습게 여겼기 때문이라고 신임 시종무관장 혼조 시게루는 설명했다.

3.3.3. 당고정전협정


그러던 중 5월 22일, 일본측이 허잉친에게 정전의사를 타진했다. 외교부는 만주사변과 열하사변을 묶어 동북지방에 관련된 정치적 문제를 한꺼번에 처리할 것을 주장했으나 군부는 일본군의 공세를 당해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 일본측과 교섭에 들어가 5월 31일 굴욕적인 당고정전협정을 체결함으로 열하사변은 완전히 종결되었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 참조.

4. 여파



4.1. 국방건설의 강화


"그러므로 숨이 붙어 있는 한, 나는 적과의 싸움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 나라가 치욕을 당할 때 우리는 마땅히 와신상담해야 하며, 결코 의기소침하거나 경계심을 늦추어서는 안된다. (...) 우리는 반드시 국가 재건 계획을 세워 되도록 최대한의 효과를 10년 안에 이루어 내야 한다!"

장제스의 일기.

열하사변에서의 참패는 장제스가 군 현대화와 공업화에 투자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장제스는 일본을 미친 개라고 욕하며 이들에게 지모를 요구하는 것은 호랑이에게 가죽을 벗으라고 요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빈정댔다. 중국군이 얼마나 약체인지 인식하게 된 장제스는 즉각 군 현대화에 박차를 가해 6월 25일 국민혁명군 개조를 선언, 난창 행영을 설치하고 군대 개혁에 들어갔으며 1932년 11월 참모본부 직속기관으로 국방설계위원회를 설치, 총력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1933년 6월 미국과 5천만달러의 차관협정을 체결, 항공기술 원조를 받기 시작했고 독일의 군사고문단을 초빙하였으며 기술제휴, 자금원조를 받았고 소련과도 경제협정을 체결했다. 이에 대해 일본이 적극적인 방해공작을 실시하였으나 이때의 소득이 훗날 8년 중일전쟁을 수행할 밑거름을 제공하게 된다. 1936년 7월부터 중공업 건설 5개년계획이 시작되어 중국 역사상 최대의 중공업 건설이 시작되었다.
자세한 것은 국방건설 문서 참조.

4.2. 반일 분위기의 고조


탕구 정전협정의 결과에 학생세력과 쑹칭링은 국민당이 배신을 저질렀다고 성토했지만 이는 대책없는 무분별한 비난에 불과했다. 오히려 이기적인 군벌들의 태업으로 붕괴된 화북 전선을 이 정도나마 수습한 것은 국민정부의 공이었다.
어쨌거나 국민정부 내부에서도 탕구 정전협정에 대한 비판적인 의견이 개진되었는데 대표주자가 강경한 항전 입장을 견지하고 있던 외교부였다. 당시 외교부의 주요 인사들은 다음과 같은 의견을 내놓았다.

"중국이 먼저 정전을 제의하여 일본이 일방적으로 작성한 조약의 내용을 제3자의 조정도 없이 승낙하였다. 또한 일본군의 점령 지역이 베이핑과 톈진에 인접해 있어 중국이 협정의 조건을 어기게 되면, 일본군이 수시로 진격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이 지역을 보호할 수 없을 것이다."

구웨이쥔

"정부의 대일본 타협 정책과 탕구 정전협정을 찬성할 수 없다."

주미 중국공사 스자오지

"탕구 정전협정 제2항은 군대의 철수가 중국 측의 일방적인 의무로 되어 있고, 일본군 철수의 지점 및 시간이 확실하지 않으며, 일본군 비행기에 의한 철수 감시는 중국의 영공권을 침범하는 것으로 보호와 편의를 제공해야 하는 가혹한 조건이다. 또한 관동군 사령관 겸 주 만주국 대사를 상대로 조약을 체결하는 것은 만주국 승인의 혐의가 있다."

주영 중국공사 궈타이치

결국 외교부장 뤄원간은 정전협정에 불만을 표시하면서 외교부장에서 사임했다. 외교부는 일본과의 중요 교섭에서 배제된 것에 대해서 크게 불만을 토로했다. 그는 신장으로 떠났고 8월 18일 행정원장 왕징웨이가 외교부장을 겸임하여 일본과 적극적인 타협 정책을 실시했다. 그는 중국을 병자라고 부르면서 중국이 일본과 맞서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비관하고 있었다.
강서의 중국 공산당은 산해관 사건 이후 1. 홍색구역에 대한 군사적 공격 중지, 2. 민중의 민주적 제 권리 보장, 3. 즉각적인 민중의 무장화와 무장한 의용군 창설이라는 세가지 조건을 들어준다면 어떤 무장부대와도 일제에 맞선 공조를 하겠다고 제의해왔다. 그리고 소위 1월 서한이라 불리는 <만주의 각급 당부와 전체 당원에 보내는 서한>을 통해 '일본제국주의와 그 주구'와 맞서기 위해 전 민족적 반제통일전선을 결성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중국 공산당은 반장항일이라는 종전의 입장을 벗지 않았으며 계급투쟁을 지상과제로 내세우는 모습을 보여 실질적으로 합작이 불가능하였다. 공산당은 1936년이 되어서야 반장항일의 구호를 버리고 핍장항일로 전환, 장제스와의 연대를 추구하게 된다.

4.3. 동북군의 몰락


유럽에서 돌아온 장쉐량은 완전히 찬밥 신세가 되었고 이후 산시에서의 공산당 토벌에서 연이어 무능함을 드러냈는데 그래서 일어난 일이(...)

5. 참고 문헌


  • 중일전쟁, 권성욱, 미지북스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서문당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2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일본 군사사 상권, 후지와라 아키라, 제이앤씨.
  • 히로히토 평전, 허버트 빅스, 삼인.
  • 만주사변기 중일외교사, 유신순, 고려원.
  • 일본 근현대사 시리즈 5권 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으로, 가토 요코, 어문학사.
  • 일본의 만주침략과 태평양전쟁으로 가는 길, 최문형, 지식산업사.
  • 塘沽停戰協定 이후 국제정세와 職業外交官의 항전 입장, 석미자, 중국학연구 83권, 중국사학회.
  • 滿洲事變 以後 南京國民政府 職業外交官의 부상에 대한 硏究, 석미자, 중국학연구 89권, 중국사학회.
  • 滿洲事變 以後 職業外交官의 對日 强硬態度와 國內活動 硏究, 석미자, 중국학연구 95권, 중국사학회.
  • 장성항전 시기 만주국 불승인을 위한 외교관의 국외활동 연구, 석미자, 고려대학교.

6. 관련 문서



[1] 이중에서 탕위린 휘하 병력 2만.[2] 따지자면 허베이 일부도 그의 영토였지만 화북 군벌들의 공세로 인해 위태로웠다.[3] 이 유물들이 나중에 타이완으로 건너가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관을 빛내게 된다. 2월 6일에 한꺼번에 나른 것은 아니고 5월 중순까지 2천상자씩 나누어 소개시켰다.[4] 에드바르트 베네시는 열하사변 당시에는 외무장관이었고, 1936년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직에 올라갔다. 그러나 베네시는 만주보다 더한 굴욕을 겪게 된다. 1938년 나치 독일한테 체코슬로바키아의 의사는 전혀 무시당하고, '''연합국에 의해 자국이 독일한테 멸망당하는 것을 힘없이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5] 미국, 소련을 말한다.[6] 당연히 일본.[7] 태국.[8] 항일에 앞장선 공산당 운운하지만 최소한 강서시대 공산당의 항일구호는 실체가 없는 공허한 언론플레이에 불과했으며 공산당이 항일을 하긴 커녕 항일을 위해 차출되는 국민당군을 습격하고 후방을 공격하는 등 오히려 항일에 방해만 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9] 88사단은 장제스의 직계 부대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정예부대로 1차 상하이 사변에서도 활동한 전력이 있는 부대였다.[10] 범행 주체를 두고 단순한 애국청년이라고 표현하는 경우도 있고 국민당 밀정의 소행이라고 보는 경우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