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매 협정

 

'''何梅協定'''
He–Umezu Agreement
1. 개요
2. 배경
3. 전개
3.1. 일본의 무리한 요구
3.1.1. 1차 회담
3.1.2. 허잉친의 보고
3.2. 국민정부의 양보
3.2.1. 일본군의 무력시위
3.2.2. 외교 교섭 수단의 차단
3.2.3. 2차 회담
3.3. 계속되는 일본의 위협
3.3.1. 육군성의 훈령
3.3.2. 3차 회담
3.3.3. 중국의 수용과 4차 회담
3.4. 협정의 체결
3.4.1. 일본의 각서 요구
3.4.2. 통지의 발송
4. 결과
4.1. 중국
4.2. 일본
5. 여담
6. 참고문헌
7. 관련문서


1. 개요


1935년 6월 10일, 일본군의 화북주둔군 사령관 우메즈 요시지로(梅津美治郎, 매진미치랑)와 군사위원회 베이핑 분회 대리 위원장 허잉친 사이의 '''비공식적 합의'''. 일본 제국국민정부 양측 모두의 승인을 받은 바가 없는 사적인 합의 정도에 불과하지만 일본 제국은 이를 공식적인 외교협정인양 들먹이면서 중화민국을 압박했다.
허잉친-우메즈 협정이라고도 한다.

2. 배경


만주사변열하사변을 일으켜 동북삼성과 열하성을 병탄하고 만주국을 수립한 관동군은 만주에 이어 화북의 5성을 장악하여 괴뢰국화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이를 위해 관동군은 소위 화북분리공작이라 하는 화북의 자치운동을 전개하여 화북을 국민정부의 통제 아래에서 이탈시키고자 했다.
그러던 중 1935년 5월 2일, 톈진의 일본 조계지에서 국권보 사장 호은부와 진보 사장 겸 만주국 중앙통신사 기자 백유환이 암살당하는 하북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은 관동군의 사주를 받고 화북의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친일파들로 호은부는 북양반점에서 숙박 중 권총에 맞아 사망했고 백유환은 자택에서 취침 중 살해되었다.[1]
이어 열하사변 이후 열하성에서 활동하던 손영근의 3천명 규모의 동북의용군이 난주 동쪽에 진주하자 관동군은 이들을 비적으로 간주하여 1개 혼성여단을 파견하여 공격했다. 손영근은 당고정전협정에 따라 설정된 장성 이남의 비무장지대로 퇴각했다. 손영근은 준화현장 하효이에게 탄약 보급을 요청했으나 하효이는 당고정전협정에 의거하여 이를 거절했고 결국 손영근 부대는 전멸했다. 그리고 화북주둔군 참모장 사카이 타카시 대좌는 화북의 이러한 정황이 화북을 장악하기 위한 절호의 기회라 여기고 중국에 대한 압박에 들어갔다.

3. 전개



3.1. 일본의 무리한 요구



3.1.1. 1차 회담


일본의 항의가 연일 이어지던 중 5월 25일, 스기야마 하지메 참모차장에게 중국 측에 모종의 통지를 보낼 것을 보고한 화북 주둔군 참모장 사카이 타카시 대좌와 주중국 대사관 무관 타카하시 탄 소좌가 5월 29일, 각각 관동군과 화북주둔군 대표의 신분으로 베이핑 정정회 비서장 유가기와 군사위원회 베이핑 분회 대리위원장 허잉친을 방문, 장제스가 겉으로만 친일인 척하며 뒤로 항일을 하는 이중외교를 펼치고 있다고 비난하며 하북 사건이 남의사의 소행이라는 증거를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한 다음에 2가지 경고를 제출하였다.
  • 1. 중국 측 관헌들은 주동적으로 만주국에 대해 음모를 시행하고 장성 부근의 중국 의용군에게 원조함과 동시에 일본에 대해 공포주의를 시행하는 것은 정전 협정을 파괴하는 행위이며 그 도발의 근거지는 바로 베이핑, 톈진이다. 일본은 이를 신축조약 및 당고정전협정을 파기하는 것으로 간주, 따라서 일본군은 재차 장성을 넘어 전구에 진입할 필요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실로 베이핑, 톈진을 정전 지구로 구획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 2. 호은부, 백유환의 피살 사건은 명백한 배외 운동일 뿐만 아니라 실로 일본에 대한 도발이기도 하다. 배외 운동을 행한 그 결과의 엄중성에 대해서는 경자 사건만주사변을 보면 곧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이같은 행위가 발생하거나 혹은 발생할 것을 미리 알았을 때에 일본군은 조약의 권한에 의거하여 자위의 필요성이 인정된다면 곧 행동을 취할 것이다. 또한 이로 말미암아 발생한 사건에 대해서는 일본군은 전혀 책임을 지지 않을 것이다.
이어 사카이와 타카하시는 다음과 같은 요구 조건을 전달했다.
  • 1. 장제스는 일본에 대한 이중정책을 포기할 것.
  • 2. 최소한 상술한 실행기관, 즉 헌병 제3단 및 유사 단체, 군사위원회 정치 훈련처, 국민당 당부 및 남의사를 화북으로 철수시킬 것.
  • 3. 상술한 각 기관의 배경인 제2사, 제25사를 철수시킬 것.
  • 4. 사건의 직접 간접 당사자인 장샤오셴[2], 정정[3], 증확정[4], 하일비[5]를 파면할 것.
  • 5. 우학충[6]을 파면시킬 것.
유가기는 회답 후 즉각 황푸에게 일본 측의 요구에 대해 보고했다. 허잉친은 장제스의 이중정책이나 남의사같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반박하며 파면 당사자에 대해서는 자시의 권한 범위 내에서 힘껏 처리할 것이며 그외는 조사한 후에 중일 관계 개선에 도움이 되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표명했다. 하지만 허잉친은 자신이 군분회 권한 내의 것은 노력하여 처리하겠지만 그 외에는 중앙의 지시를 받아야 한다고 답변했다. 이에 대해 사카이, 타카하시는 매우 불만족스러워하며 다음과 같이 경고한 후 돌아갔다.

"허잉친의 권한 내 뿐만 아니라 반드시 화북에서 신속히 장제스의 이중 정책이 포기되어야 할 것이다. (...) 오늘은 상의하러 온 것이 아니라 우리 군의 결심을 통고하러 온 것이다!"

관동군은 마침 만주국에 출장 중이던 하야시 센주로 육군대신에게 사카이와 타카하시가 허잉친에게 전달한 요구를 보고하며 "관동군으로서는 끝까지 톈진군을 지지하고 그 요망사항의 달성에 협력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고, 이를 위하여 지금 바로 병력을 행사하는 것은 예기할 수 없지만 집요하게 요구를 반복하는 것을 요한다는 방침."이라고 보고했다. 이에 하야시 육상은 "중앙으로서는 이 교섭의 내용 및 방법에 대해서는 다소 이견이 있지만 이미 화살이 활을 떠났다면 이를 지지한다."라며 승낙의 뜻을 보였다.

3.1.2. 허잉친의 보고


5월 29일, 밤 허잉친은 장제스, 왕징웨이, 황푸에게 사카이와 타카하시가 제출한 경고와 요구를 보고했다. 보고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갑)
  • 1. 평진은 현재 일본과 만주국을 어지럽히는 근거지가 되었는데 중국 정부는 그 사정을 아는가?
  • 2. 톈진에서 발생한 호은부, 백유환 암살 사건을 조사하니 중국 관청과 확실히 관계가 있는데 정부는 그 사정을 아는가?
  • 3. 중만 국경은 여전히 중국 관청의 원조를 받고 있으며, 근자에는 손영근이 준화현의 도움과 도주 경로를 지시받았는데 정부는 아는가?
(을) 따라서 이하의 질문을 제출한다.
  • 1. 반일집단은 장 위원장에 의해서 지도되는가? 혹은 허잉친 부장, 혹은 중국 정부에 의해서 지도되는가?
  • 2. 이러한 책임은 결국 누가 지는가?
(병) 특히 미리 중국에 두 가지 점을 통고하고자 하니 중국 측은 주의해주기 바란다.
  • 1. 평진을 근거지로 하여 계속 일본과 만주국에 대해 소란 행위를 발생시킨 것에 대해 일본측은 이것을 정전협정과 신축조약의 파괴행위로 여기고 정전구역을 평진으로 확대하려고 한다.
  • 2. 백유환, 호은부의 암살 사건은 중국의 배외 운동 및 주둔군을 향한 도발 행위로서 장래 이와 유사한 사건이 발생하거나 미리 알려질 경우 일본군은 자위상 단호한 조치를 취할 것이며 혹은 다시 경자사건 또는 9.18 사건이 발생할지도 알 수 없다. 또한 정전 협정에 따르면 중국 측에서 일만에 대한 소요 행위가 발생하면 일본군은 수시로 다시 전구에 드나들 수 있음을 중국 측도 알 것이다.
(정) 사카이의 개인 의견:
  • 1. 장 위원장의 일본에 대한 이중정책 즉 일본에 대해 표면적으로는 친선을 보이면서 속으로는 여전히 여러 가지 항일을 준비하는 정책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고 이후에 어느 정도까지 발전할지 전혀 알 수 없다.
  • 2. 우학충은 을 교란하는 실행자이고 장한경은 그 하수인인데 바오딩으로 옮긴 것은 양국 정부에 도움이 되지 않으니 중국 정부는 스스로 전근시켜야 한다.
  • 3. 헌병 제3단, 하북성 당부, 군분회 정훈처, 남의사는 철수시키는게 마땅하다.
  • 4. 중앙군을 다른 지역으로 이동시키는 게 최선이다. 이상의 여러 가지 점을 처리할 수 있다면 중일관계는 혹 호전될 수 있을 것이다.
허잉친은 보고 말미에 "도대체 어떻게 처리를 해야 할 것인지 속히 시사해 주기 바란다."라고 급히 지침을 내려줄 것을 요청했다.

3.2. 국민정부의 양보



3.2.1. 일본군의 무력시위


5월 30일, 톈진의 일본군 1개 중대가 장갑, 기관총, 경포로 무장하고 대열을 지어 하북성 정부 문 앞에서 무력시위를 벌였으며 베이핑과 톈진 상공에서는 일본군 비행기가 초저공으로 선회하며 위협했다. 5월 31일, 톈진 총영사 가와고에 시게루는 하북성 정부 주석 우학충에게 서면 항의를 제출하여 군부의 행패에 발맞추어 다음과 같이 하북성 정부를 압박했다.

"줄곧 화북지구에서는 특수한 정치적 사명을 받은 귀국측의 각종 폭력 단체 및 비밀 결사가 존재하여 지극히 교묘한 방법으로 간악하고 잔혹한 직접행동을 취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에 대해 먼저 해당 지역의 평화를 끊임없이 생각하는 우리로서는 놀라움을 감당할 수 없다. 화북 사회의 인심이 불안한 근본 원인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아울러 이번에 그들이 앞에 서술한 바와 같이 일본 조계의 행정권과 치안을 어지럽힌다면 우리는 결단코 추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해 본관은 주석에게 가까운 시기에 신속히 이들 폭력 단체 및 비밀 결사를 본 지역에서 깨끗이 소탕하고 유효 적절한 수단을 강구하여 조계의 안전 및 화북 인심의 안정을 보장할 것을 요구한다. (...) 만일 주석의 조치가 철저하지 못하고 금후에도 이들 폭력 단체 및 비밀 결사의 음모 활동이 의연히 일본 조계의 치안을 위협한다고 느껴 자위상의 행동이 긴급히 필요하다고 인정되면 상술 단체, 결사 종류의 여하와 그 일이 누구의 부하임을 불문하고 우리 측은 스스로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행동을 취할 것이다. 이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결과에 대해 귀하 측이 책임져야 할 것이다."

이날 텐진의 일본군이 계속해서 하북성 정부 앞에서 난동을 부렸으며 100여명이 톈진시 공안국에 난입하여 행패를 부렸다. 또한 상하이 일본 영사관 무관 이소가이 렌스케(磯谷廉介) 소장이 5월 30일, 황푸와 회견하여 압박하였고 5월 31일과 6월 3일에는 난징의 대사관 무관 아메노미야 타츠미(雨宮巽)가 외교차장 탕유런을 방문하여 국민정부가 일본의 요구를 수용할 것을 요구하며 압력을 넣었다.
5월 30일, 사태가 심각한 것을 깨달은 허잉친은 다시 황푸에게 전보를 타전하여 대책을 상의하며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일본 측이 제출한 각 사항은 해야할 것이다. 내가 만약 가능한 범위 내에서 여러 사항을 처리하지 않고 시일만 늦춘다면 의외로 심각한 사태가 야기될 것이다. 재삼 숙고하여 현재 벌어진 일의 가부 여하를 직접 판단해 보았는데 그것은 이하 세가지다이다.

1. 우학충, 장연악을 다른 지역으로 전근시키고, 톈진시 공안국장 이준양(李俊襄)을 면직시킨다.

2. 분회정훈처장 증확정, 헌병 제3단장 장샤오셴, 부단장 정정을 즉시 전근시킨다.

3, 하북성 당부는 금후로는 내부 공작에만 전념하고 외부 활동은 정지한다.

5월 31일, 국민정부는 7월 1일로 예정되어 있던 하북성 정부의 이전을 앞당겨 6월 1일에 행한다고 발표하고 허잉친에게 일본이 요구하는대로 알맞게 처리하라고 지시했다.

3.2.2. 외교 교섭 수단의 차단


5월 31일, 주일 중국대사 장작빈이 일본 외상 히로타 고키를 만나 3가지 항목에 대해 설명했다.
  • 1. 우학충 파면의 일은 내정 문제에 속한 것임으로 가까운 기일에 해결하기로 결정하였다.
  • 2. 당부 및 남의사를 화북으로부터 철수시키는 것에 대해서 당부를 성정부와 함께 바오딩으로 이동시키고자 하며, 단 남의사는 중국 측에서 그 존재를 부인하고 있다.
  • 3. 평진 지구를 정전 지구로 편입시킨다는 것은 도저히 승인하기 어렵다.
장작빈은 히로타에게 일본군의 요구를 완화시켜달라고 중재를 요청했다. 이에 히로타는 중국 정부의 뜻을 군부에 전달하겠다고 답하고 면담을 종료했다. 다음날인 6월 1일, 히로타는 외무성 동아국장 쿠와시마(桑島)를 파견하여 참모본부 제2부장 오카무라 야스지에게 장작빈의 제의를 전달하고 타협할 것을 청했다. 이에 일본 군부는 이 일이 외교부를 통해 처리될 일이 아니란 입장을 밝혔다.

"31일 주일 장 대사가 외무성을 통해 제시한 사항은 1일 쿠와시마 국장을 통해 알았지만 육군 당국은 본 문제를 정전 협정에 관한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이것은 군사령관의 통수 사항에 속한 것이지 외교 사항이 아니기 때문에 외교 교섭으로 이첩될 수 없으며 마땅히 주재 군부가 처리해야 한다."

이에 6월 1일, 히로타 외상도 꼬리를 내리고 장작빈에게 "육군측과 협상한 결과 이 일은 외교 교섭을 통해 해결될 성질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라고 발을 빼버렸다. 장작빈은 즉각 난징에 전보를 보내 회담 결과를 보고했다. 이날 난징 총영사 슈마 야키치로가 외교차장 탕유런을 방문하여 외무성은 화북 문제에 대해 알선할 수 없으며 마땅히 현지 일본 군부와 교섭을 진행시켜야 한다는 뜻을 전달했다. 6월 1일, 국민정부는 장샤오셴과 증확정을 면직시키고 6월 3일, 한커우에 있던 장쉐량을 소환하여 그와 직접 하북성 정부 개조, 우학충 전근에 대해 논의하면서 일본에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다.

3.2.3. 2차 회담


6월 4일, 사카이와 타카하시가 거인당에서 허잉친과 두번째 만남을 가지고 일본측이 요구한 것에 대한 시행 상황을 문의했다. 이에 허잉친은 이미 처리되었다고 대답하며 다음과 같은 답변을 제시했다.
  • 1. 하북성 정부 및 톈진시 정부로 하여금 공동으로 범인을 체포하라고 명령하였다.
  • 2. 우학충에게서 현장, 민단 등이 비적을 원조한 것에 대해 조사하라고 명령하였다.
  • 3. 장샤오셴, 정정, 증확정 3인은 이미 6월 1일 명령을 내려 파면시켰다.
  • 4. 헌병 제3단 특무처를 해산하였다.
  • 5. 우학충 및 장정악을 파면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 6. 톈진시 당부의 해산과 성당부의 대외활동을 정지할 것을 건의하였으며, 특무 인원을 파면시켰다.
  • 7. 제25사 학생 훈련반을 해산하였다.
허잉친은 "중일간의 친선제휴는 우리 중앙의 기정방침이 되고 있으며 나 개인도 이 방침에 따라 노력했다. 만약 과거에 제대로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면 마땅히 개선하여 중일 강늬 국교가 더욱더 근접할 수 있도록 힘쓰겠다."라고 하였다. 하지만 사카이와 타카하시는 허잉친의 회답에 만족하지 못하고 새로운 요구를 제출했다.
  • 1. 우학충, 장정악을 반드시 면직시킬 것.
  • 2. 톈진으로부터 국민정부 하북성 당부를 철수시키고, 톈진시 당부를 폐지시킬 것.
  • 3. 베이핑에 주둔하고 있든 헌병 제3단을 철수시키고, 베이핑 군분회 정훈처를 폐지시킬 것.
  • 4. 항일 단체를 해산시킬 것.
  • 5. 평진에 주둔하고 있는 51군을 철수시킬 것.
이에 허잉친은 1,4항은 이미 처리했으며 2,3,5항은 다시 고려하겠다고 답변했다. 6월 4일, 국민정부 행정원 회의는 톈진시를 행정원 직속으로 변경하고 왕커민을 시장으로, 상진을 경비사령으로 임명했다.
6월 4일, 만주국의 미나미 대사는 히로타 외상에게 533호와 544호 통전을 보내 육군 중앙이 관동군의 행위를 승인했다는 것을 알렸다. 6월 5일, 도쿄에서 주일대사 장작빈이 다시 히로타에게 화북문제를 성심성의껏 항의하여 해결한다고 원한다는 의사를 전달했으나 히로타는 여전히 군사당국이 현지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날 전 주중 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라가 신임 주중 일본대사에 취임하기 위해 도쿄에서 차를 타고 쿄토로 이동, 차안에서 담화를 발표하여 다음과 같이 표명했다.

"화북 사건은 심히 유감스러운 일로서 중국 측에서 속히 일본의 태도를 양해하여 해결해주었으면 하는 생각이다. 정전 협정을 확대한다는 항목에 대해 들은 바는 있으나 실제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정전 협정 구역의 신축은 결코 간단한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귀임한 후 14일에 신임장을 제출할 예정이며 하북에 갈지의 여부는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 중일관계는 이미 조정되고 있으며 화북문제가 빠른 시일 내에 해결되었으면 가장 좋겠다. (...) 외무와 군부 간의 의견 불일치라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일본의 대중국 방침을 이미 결정되었으며 중일 양국은 응당 공동으로 동아시아의 평화를 책임져야 한다. 만약 여기에 주목한다면 앞날은 저절로 판명될 것이다. 중국 측도 역시 마땅히 대국적인 견지에서 이후의 문제를 처리해야 한다."

6월 6일, 국민정부는 우학충을 하북성 주석에서 파면하여 천선감변구 초비총사령으로 전근시켰으며 하북성 민정청장 장후완(張厚琬)이 대리하게 하였다. 또한 6월 7일, 하북성 당부를 바오딩으로 이전하였으며 톈진시 당부와 베이핑 군부회 정훈처를 폐지하고 헌병 3단을 베이핑에서 철수시켰다. 또한 준화현 현장 하효이도 사직시켰다. 6월 8일, 국민당 임시 중앙정치회의는 우학충의 51군과 중앙군을 하북성 밖으로 이동시키기로 결정했다.
6월 8일 오후 4시, 허잉친은 아사히 신문 기자를 접견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채택한 조치들은 오늘에서야 일단락 지었는데 가히 당신측이 희망하는 바대로 했다고 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사실이 증명할 것이다. (...) 장위원장의 근본방침은 중일 간의 친선제휴를 이루어 서로 동아시아의 평화를 도모하는 것이다. (...) 중일 양국 간의 국교에 장애가 되는 일은 모두 개선하여 중일 간에 친선제휴를 이루어야 한다."

또한 허잉친은 명령을 내려 "국가 간에 서로 이웃이 되는 길은 우선 친목을 중시하는 것이다. 평진 양 시는 각국인사들이 모이는 곳으로 마땅히 중외 간의 감정을 좋게하여 중외 간의 국교를 증진시켜야 한다. 즉시 평진 양 시장, 평진 위술사령, 베이핑 헌병사령에게 엄령을 내려 주의를 기울여 조사케 하고, 만약 국교를 해치는 비밀결사 및 비밀단체가 있으면 엄격히 단속하도록 하라. 힘써 따르고 상황을 처리하여 보고하도록 하라."라고 지시했다.

3.3. 계속되는 일본의 위협



3.3.1. 육군성의 훈령


중화민국의 유화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요구는 더욱 강경해졌다. 6월 5일, 일본 군부는 <화북교섭문제처리요강>을 제출하여 이를 수정한 끝에 외무성에 "적당한 조치를 채택하고 이번 교섭 기회를 이용하여 중국 측에게 전 중국의 배일 행위에 대해 반성을 촉구케 하고 배일 제단체의 해결을 촉진케 하여 중국측으로 하여금 실질적으로 전환케 함으로써 일중간의 현안을 해결하는데 유리한 상황을 조성하도록 희망하는 한편 6월 7일 "화북 정권을 대상으로 지방 교섭을 촉진하여 빠른 시일 내에 해결하기를 바란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그리고 화북 주둔군과 베이핑 무관부에 3가지 일을 처리할 것을 지시하며 중국 각지의 무관은 상술한 교섭에 대해 협조할 것을 지령했다..
  • 1. 중국 측에서 평진에서 헌병 제3단, 북평 군분회 정훈처, 국민당 당부 및 배일단체를 철수시키고, 이들 단체의 책임자를 파면하고, 하북성 주석 우학충을 파면시킬 것을 요구한다.
  • 2. 중국 측에게 기일 내에 상술한 요구의 가부 여부에 대해 회답할 것을 요구한다. 회답의 기한은 화북 주둔군의 방어 교대 부대가 상륙하는 시간을 고려하여 결정할 수 있다.
  • 3. 중국 측에 아래의 사항을 회답하라고 촉구한다. (1). 평진에 주둔하고 있는 51군과 중앙군을 바오딩 이남으로 이동시킨다. (2). 평진 지구의 국민당 당부, 남의사 및 기타 닽체의 반만항일에 대한 모든 활동을 근절시킨다. 금후에 이같은 음모활동의 사실이 발각되었을 때에는 일본군은 수시로 적당한 조치를 취할수 있음을 승인한다.
6월 7일, 일본 화북주둔군 사령부는 우메즈 요시지로의 주재로 확대 군사회의를 개최하였다. 이날 회의는 국무국장 나카타, 참모 사카이, 타카하시, 이소가이, 고급참모 이시이, 기가, 만주국 총무청 톈진 특무기관장 아오키, 헌병대장 이케가미 등이 참석했다. 회의에서 우메즈는 "화북주둔군은 응당 단호한 수단을 채택할 조치와 필요한 준비를 해야 한다."는 육군성 훈령을 낭독한 후 대화북 교섭 방식과 평진 점령을 위한 군사작전 준비에 관한 결의를 도출했다. 이 회의에 따라 톈진, 탕산 주둔군에서 1개 중대 씩을 차출하고, 관동군 1개 보병대대, 기병여단 일부를 산해관에 전진배치하며 독립 제11혼성여단을 고북구에, 그리고 2개 비행중대를 진저우에 집결시켜 기동 비무장 구역 진입을 준비시켰다.
이에 따라 관동군 혼성 11여단이 고북구에, 16사단 1대대와 기병 4여단이 산해관에 집결했으며 톈진주둔군의 새 교체부대가 12일 톈진으로 800명이, 14일 진황도로 800명이 도착할 예정이었다.

3.3.2. 3차 회담


군사 배치가 마무리되자 사카이와 타카하시는 6월 9일, 거인당에서 허잉친과 세번째 회담을 가졌다. 허잉친은 사카이 등에게 먼저 "일본 측이 희망하는 점은 어제에 이르러 이미 완전히 처리되었다."면서 답변을 제출했다.
  • 1. 우학충, 장정악의 면직.
  • 2. 군분회 정훈처는 이미 폐지되었으며, 헌3단도 이미 전근시켰다.
  • 3. 하북성 당부는 이미 바오딩으로 이동시켰으며, 톈진시 당부는 이미 페지시켰다.
  • 4. 일본측이 양국 국교에 장애가 된다고 여기는 단체를 이미 폐지시켰으며, 또한 평진 지방 당국에게 엄명을 내려 일체의 모든 국교를 해치는 비밀 조직에 대한 단속에 책임지도록 하였다.
  • 5. 51군은 이미 이주할 것을 결정하였다.
허잉친은 또한 이렇게 말하였다.

"장 위원장이 갖고 있던 중일문제에 대한 견해는 금년 2월 14일, 오사카 아사히신문과의 담화에서 알수 있다. 중일간에 반드시 친선제휴해야 동아시아의 평화를 유지해나갈 수 있는 것이며, 이것이 곧 우리 중앙의 기정방침인 동시에 장 위원장의 방침이기도 하다. 그리고 지금까지 결코 변경된 적이 없었다. 이러한 곳은 모두 사실로써 증명할 수 있으며 말로 속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사카이 등은 오히려 분노하며 우학충이 섬감천변구 초비총사령으로 전근된 것은 승진이지 처벌이 아니며 중앙군이 철수하지 않은 것은 중국 정부의 무성의를 설명하는 것이라고 항의했다. 이어 사카이는 새롭게 요구를 제시했다.
  • 1. 하북성 내의 모든 당부를 완전히 취소할 것.(철도당부도 포함, 평진지방에서의 책동 금지)
  • 2. 51군을 철수시킬 것.(바오딩 이남으로 이주)
  • 3. 중앙군은 하북성 경계를 반드시 떠날 것.(바오딩 이남으로 이주)
  • 4. 전국의 배외, 배일행위를 금지시킬 것.
사카이는 "이 요구를 즉시 받아들여 처리하지 않으면 일본군은 자유행동을 한다. 1,2,3 항목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다. 12일 정오까지 회답하라."라고 최후통첩을 날리고 일본어로 필사한 3페이지 짜리 서류 한부를 허잉친에게 건네주고 나가버렸다. 이 서류는 총 17개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8개 항목은 이미 중국 측이 승낙한 것이고 4개 항은 위에 나온 내용으로 일본이 기한 내에 답변을 요구한 것이었다. 잠시 후 사카이는 다시 돌아와 "중앙군을 하북에서 철수시키고자 하는 것은 일본군의 결의에 속하는 것으로 결코 변하기 어려운 것이다."라고 난폭하게 말하고 다시 떠났다. 이어 일본군은 고북구와 산해관에서 항공기, 기병, 보병부대를 증강하여 무력시위를 하였다.

3.3.3. 중국의 수용과 4차 회담


6월 9일, 허잉친은 일본의 요구에 대해 난징에 전보로 알렸다. 청두에서 초공작전을 지휘하고 있던 장제스는 중앙군을 남하시키는 것은 베이핑과 톈진을 방기하는 것이고 전 화북을 상실하는 것이라고 우려하였으며 왕징웨이에게 이미 일본은 서남 지방, 내몽골, 동 차하얼에서도 같은 짓을 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일본의 목적은 중앙정부를 전복하고 중국을 해체하는 것에 있다."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일본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은 나쁜 선례를 만들어 서남에 내전의 구실을 준다고 경고하였다. 펑위샹도 결사항전을 주장하며 중앙군 철수에 반대하였다. 하지만 왕징웨이는 베이핑과 톈진의 중앙군을 남하시켜 일본에게 구실을 주어선 안된다고 주장하며 만약 중국이 지연하면 일본군이 곧바로 공격할 것이라 주장했다. 허잉친 역시 만약 일본군이 중앙군이 공격하면 동시에 장강 하류에서 교전이 벌어질 것인데 중국인 군사적, 외교적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순시각에 베이핑, 톈진이 함락도리 것이고 난징, 상하이도 붕괴될 것이며 대일전 준비를 위해선 시간을 벌어야 한다고 강력 주장했다.
6월 10일, 국민당 중앙은 행정원장 왕징웨이의 주재 하에 긴급회의를 개최하였다. 위원들은 왕징웨이나 허잉친의 주장에 대해 반대하였고 장제스에게 연락하여 중국이 결단하여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왕징웨이는 자신이 비상시에 책임을 지겠다고 장제스에게 이미 전했으며 허잉친도 왕징웨이를 지지했다. 결국 장제스가 왕징웨이와 허잉친의 요구에 동의함에 따라 국민당 중앙은 일본의 요구를 수용하기로 결정하고 허잉친에게 전보를 보냈다.
오늘 긴급회의에서 하북성 내 당부에 대해 이미 결의가 있어, 비서처가 전송했다. 전국의 배외 배일의 금지에 대해서도 이미 국부에서 거듭 명령을 밝혔다. 51군 및 중앙군의 철수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의가 없다.
또한 국민당 중앙 집행위원회 비서처는 허잉친에게 전보를 보내 하북성 각 당부를 당일부터 모두 철시키라고 지시했다. 하븍성 국민당부를 폐쇄하고 황걸의 2사단과 관인징의 25사단을 섬서, 하남, 안휘로 철수시켰다. 허잉친은 중앙의 결정에 따라 10일 오후 6시, 거인당에서 다카하시와 네번쨰로 만나 구두로 회답을 제시했다.
  • 1. 하북성 내의 국민당부는 즉일 철수를 개시함.
  • 2. 51군은 6월 25일까지 하북성 밖으로 철수함.
  • 3. 2사단과 25사단은 하북성 밖으로 옮김.
이에 타카하시는 만족을 표시했다. 주중 일본 대사관 참사관 와카스키 카나메(若杉要)는 히로타 외상에게 전보를 보내 "이달 10일 오후, 허잉친은 다카하시 보좌간에게 회답하였다. 중앙 훈령에 의거하여 우리 군측의 요구 전부를 접수하였다."라고 보고했다. 주중 일본 대사관 무관실은 성명을 발표, "중국측은 이미 이날 허잉친씨로 하여금 회답케 하여 말하기를 일본 측의 요구를 수용하여 이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를 원한다고 하였다."라고 했다.
6월 11일, 51군은 바오딩을 거쳐 섬서성으로 이동하기 시작했고 베이핑 군분회도 중앙군 2사단 황걸의 부대를 예환변구로, 25사단을 섬서성으로 이동시켰으며 평진을 포함한 하북성 내부에서 국민당의 활동을 정지시켰다. 이날 국민정부는 전날 결정한 <인접국과의 돈독에 관한 령>, 소위 돈목방교령을 발표했다. 6월 11일, 타카하시는 참모차장 스기야마 하지메에게 전보를 보내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이달 10일 오후 6시의 허잉친의 회답은 아래와 같다.
(1) 중앙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훈령을 받았다.
1. 10일의 명령에 의거하여 하북성 내 당부는 당일부터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2. 제51군은 내일 11일부터 하북성 밖으로 철수하기 시작할 것이며 철도로 수송함으로써 25일 완료를 예정하고 있다. 단 차량의 부족 혹은 고장으로 인해 며칠 지연될 수도 있다.
3. 제2사, 제25사를 하북성 밖으로 이주할 것을 결정하였다.
4. 국민정부는 최근에 전국에 배외배일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릴 것을 결정하였다.
(2) 이상의 각 항에 대해 허잉친의 부언은 이하와 같다.
1. 제51군은 대략 4일 내에 북녕로로부터 철수할 것이며, 아울러 일본에 대해 불법 행위를 하지 말 것을 엄격히 훈계하였다.
2. 중앙군은 수일 내에 베이핑 부근에서 철수할 것이며, 먼저 장신점 부근으로 이동한 후 신속히 방어 진지를 옮길 것이다. 단 51군의 수송 관계로 약 1개월이 예정될 것이니 양해해 주기 바란다.
3. 이전에 약속한 기타 각 항도 확실히 이행할 것이다.

3.4. 협정의 체결



3.4.1. 일본의 각서 요구


일본은 목적을 모두 달성하였지만 6월 11일, 타카하시는 갑자기 화북 주둔군 사령관 우메즈 요시지로가 서명한 비망록 한부를 가지고 군사위원회 베이핑 분회를 방문하였다, 타카하시는 군분회 판공청 조장 주식근(朱式勤)에게 비망록을 전달, 중국 측에 비망록을 한부 베끼게 하고 허잉친에게 이를 서명하여 우메즈에게 제시할 것을 강요하였다. 비망록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우메즈가 허잉친에게 보내는 비망록.
1. 중국측이 일본군에 대해 일찍이 승인하여 시행한 사항은 아래와 같다.
(1) 우학충 및 장정악 일파의 파면.
(2) 장샤오셴, 정정, 증확정, 하일비의 파면.
(3) 헌병 제3단의 철거.
(4) 군분회 정치 훈련처 및 베이핑 군사 잡지사의 해산.
(5) 중국 측은 소위 남의사, 복흥사 등 중일 양국 국교를 해치는 유해한 비밀 기관을 단속하고 아울러 그 존재를 용납하지 않는다.
(6) 하북성 내 모든 당부를 철수시키고 여지사(勵志社) 베이핑 지부를 철폐한다.
(7) 제51군을 하북성 밖으로 철수시킨다.
(8) 제25사를 하북성 밖으로 철수시키고 제25사 학생 훈련반을 해산시킨다.
(9) 중국내 배외배일을 금지시킨다.
2. 이상의 여러 사항의 시행에 관해 아울러 아래에 기록한 부대 사항을 승인한다.
(1) 일본측과 약속한 사항과 더불어 반드시 약속한 기한 내에 완전히 시행하고 더욱이 중일관계에 좋지 못한 인원 및 기관에 대해서는 재기용을 하지 않는다.
(2) 성, 시 지원을 임명할 때 중일관계에 좋지 못한 인물을 기용하지 않도록 일본측의 인선 희망을 수용해주기 바란다.
(3) 약속 사항의 실시에 관해 일본측은 감시 및 규찰 수단을 채택한다.
이상을 잊지 않도록 특별히 필기하여 보내는 것이다. 이상.
허잉친 각하.
쇼와 16년 6월 9일.
화북 주둔군 사령관 우메즈 요시지로
하북에 대한 주권을 강탈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는 무리한 요구에 허잉친은 톈진으로 돌아가고 있던 타카하시에게 주식근을 파견하여 문서에 의한 표시는 필요없다고 거절의 의사를 밝힌 후 타카하시의 요구를 중앙에 보고하였다. 6월 12일 난징에서 개최된 중앙정치회의와 국방회의에 참석한 위원들은 격노하였다. 행정원 부원장 쿵샹시는 "하북성시의 인선은 모두 일본의 승인을 거쳐, 일본의 지휘를 받는 것이 된다. 지방관은 모두 한간이 될 것이다."라고 발언하였고 국민당 중앙은 허잉친에게 각서에 날인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허잉친은 베이핑 군분회 의원 회의를 소집하여 사무처 주임 포문월(鮑文樾)에게 자신의 직무를 대행하게 하였으며 베이핑의 치안은 베이핑 시장 원량에게 맡겼다. 허잉친은 6월 13일 새벽 3시, 날인을 거부하고 소수의 수행원만 대동한 체 평한철로를 타고 베이핑을 떠나 남하하여 15일 오전 6시, 포구에 도착하였다. 허잉친이 베이핑을 떠나자 6월 14일, 서무처장 포문월은 위원장 대리 자격으로 다카하시를 방문하여 허잉친이 남하하였음을 통보하고 허잉친은 남하하였으나 그가 승낙한 일에 대해서 자신이 하나하나 실현하겠다고 하였다. 허잉친은 6월 15일, 전용차를 타고 난징에 도착하여 국방회의에서 하북 사건의 교섭 경과를 보고하였다. 이날 국방회의는 다음과 같이 결의하였다.
이번 일은 시종 구두로 교섭하였고, 또한 사카이 참모장, 타카하시 무관도 거듭하여 중국이 스스로 처리하라고 성명하였다. 지금 중국이 이미 모두 스스로 처리하였고 또한 기한 내에 잘 처리할 수 있는데 이는 일본 측의 의견이 완전히 달성된 것이므로 실로 문자 규정의 필요성이 없다. 따라서 우리 측은 그대로 처리하기 어렵다. 응당 일본측이 양해를 해야 한다.
장제스는 이를 비준하였고 허잉친은 베이핑 군분회 사무청에 국방회의 결의안을 보내 타카하시의 회답을 구하였다. 6월 16일, 포문월, 왕수상, 만복린의 밀사가 사카이 참모장을 방문하여 허잉친이 남하하여 돌아오지 않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 7인의 위원들이 하북독립을 기획하고 있으니 일본이 원조할 수 있는지를 문의하였지만 사카이는 목하 북지의 치안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을 것이라며 거절했다.

3.4.2. 통지의 발송


허잉친의 잠적에 당황한 사카이는 6월 14일 외교부 특파원 정석경에게 면담을 요구하여 "일본군은 중국이 사안을 거부하는 경우 발생될 중대한 사태에 직면해 있다"고 위협했다. 하지만 날인을 할 허잉친이 사라진 상태라서 다카하시는 각서는 포기하고 일본이 추가한 부대조항을 제외한 요구에 대한 승낙 통지라도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6월 21일, 타카하시는 군분회를 방문, 포문월에게 허잉친이 서명하여 우메즈에게 보내는 통지 하나를 건네며 포문월에게 허잉친의 서명을 받아올 것을 요구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베이핑 군분회 허 위원장이 우메즈 사령관에게 보내는 통고:
6월 9일 사카이 타카시 참모장이 제시한 약속 사항과 이들 사항의 실시에 관한 부대 사항을 모두 승낙한다. 아울러 스스로 그것을 실현할 것을 특별히 통고한다.
허나 통지에 언급된 '부대사항'에 대해서는 우메즈의 비망록에 없던 것이었기 때문에 허잉친은 사카이의 요구에 회답하지 않았다. 이에 난징 무관 아메노미야 무관이 탕유런에게 압력을 넣었으나 국방회의는 통지를 보낼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러자 7월 1일, 사카이는 입장을 완화하여 다시 3차례 수정한 원고를 베이핑 군분회의 포문월에게 보내 다시 허잉친의 서명을 받아올 것을 요구했다. 수정된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6월 9일 사카이 참모장이 제시한 각 사항을 모두 수차례 승낙하였으므로 자동적으로 실시할 것을 기대한다. 이에 특별히 통지하는 바이다.
우메즈 사령관 각하.
허잉친
허잉친은 수정원고를 받은 7월 4일, 상하이에 있는 왕징웨이에게 전보를 보내 타카하시가 보내온 편지에 서명해도 되는지 여부를 문의하였다. 7월 5일, 왕징웨이는 허잉친에게 회답전보를 보내 동의하여 보내라고 지시했다. 왕징웨이의 비준을 받은 허잉친은 1935년 7월 6일 타카하시가 요구한 내용의 통지를 타이핑한 후 그것에 서명하여 포문월에게 보내며 이것을 우메즈에게 전하라고 했다. 허잉친이 최종적으로 서명한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존경하는 분께, 6월 9일 사카이 참모장이 제시한 각 사항을 모두 승낙하였습니다. 아울러 자주적으로 그 수행을 기대하십시오. 특히 이에 통지하는 바입니다. 이상.
우메즈 사령관 각하.
허잉친.
민국 24년 7월 6일.
포문월은 주영업(周永業) 조장을 파견하여 타카하시에게 건넸고 타카하시는 매우 만족해했다고 한다. 나카하시는 7월 9일, 사카이에게 허잉친의 서간을 제출하였다.

4. 결과



4.1. 중국


합의에 따라 하북성 주석 우학충은 천선감 변구 초비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51군을 통솔하고 섬서, 감숙으로 철수했으며 2사단과 25사단도 섬서성의 마오쩌둥 견제를 위해 이동했다. 헌병 3단과 군사위원회 분회 정치훈련소 등도 모두 철수했다. 직후 일본은 차하얼에서 비슷한 과정을 거쳐 진토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에 대해 여론은 물론 정부 내부에서도 분노가 들끓었다. 1935년 8월 7일, 국민당 중앙정치회의는 하매 협정의 책임을 추궁하여 외교부 불신임을 주장하였고 왕징웨이는 외교부장에서 사퇴하였다. 이에 행정원 각 부장들도 모두 사표를 내었으며 왕징웨이는 칭다오로 잠적했다. 왕징웨이와 협력 관계였던 장제스는 왕징웨이 유임 결의를 주장하여 8월 23일, 국민당 중앙정치회의, 중앙상무위원회 회의에서 왕징웨이 유임 결의안을 이끌어냈고 왕징웨이는 8월 23일 복직했다.
이후 일본은 이를 정식협정인양 선전하며 화북분리공작을 강화했고 이에 대해 장제스는 1936년 1월 전국 중등 이상 학교장 및 학생대표에 대해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여 일본의 주장을 부정했다.
나는 일본이 선전하는 하매 협정과 같은 협정이 존재하지 않음을 단언하는 바이다. 그러면 어찌해서 이런 말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 것일까. 일본은 허잉친 군정부장에 대해 중국의 하북성 안의 중앙군 철수, 평진, 하북, 차하얼 당부의 철수 및 특무기관의 철폐를 요구해왔다. 허잉친 부장은 이에 대해 극히 간단한 회답을 보내, 이는 일본 측의 요구를 기다릴 것도 없이 우리 중국 측이 자발적으로 조치했다고 하였다. 편지에는 이러한 몇마디 말 뿐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이 편지에 의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처럼 하매 협정이 성립되었다고 과대선전을 퍼뜨리고 있는 것이다.

4.2. 일본


하매 협정에서 보인 일본군의 막장성은 이미 일본 정부가 휘하 부대 통제가 불가능하며 일본군이 얼마나 무모한 영웅심리에 빠져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일본 정부가 현지 군부대의 폭주를 제어할 수 없던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오히려 일선 군부대 지휘관들의 막장 행동에 대해 적극적으로 사후 승인을 해주어 부추겼으며 심지어 화북주둔군 내부에서조차 참모장 사카이가 사령관 우메즈와 상의 없이 중국에 대한 협박을 지휘했다.
일개 참모장, 일개 무관보좌관이 외무당국을 무시하고 중일 외교관계가 대사급으로 막 승격되려는 중요한 순간에 멋대로 일을 자행한 것에 대해 일본 정계에서도 불만이 터져나왔다. 이에 대해서 톈진에 주둔한 화북주둔군이 논공행상에서 냉대 받은 울분을 풀려고 했다거나[7] 히로타 외상의 대중 유화외교에 반대하여 저지른 짓이라는 추측이 난무했다. 6월 20일, 일본 정계의 원로인 사이온지 긴모치는 내대신 마키노에게 어전회의를 열어 확실한 방침을 정하는 것이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건의했지만 오카다 수상도 마키노 내대신도 어전회의 소집에는 소극적 반응을 보였다.
6월 20일, 히로히토 덴노는 장작빈 대사에게 신임장을 수여하며 "북지의 사건은 진실로 유감이지만, 장제스, 왕징웨이의 친일태도에 의하여 원만하게 해결된 것은 진실로 다행이었다."라고 입장을 표명했다. 이러한 일본군의 폭주는 훗날 루거우차오 사건에서 폭발하여 중일전쟁으로 이어진다.

5. 여담


헌병 3단 단장 장샤오셴은 이후 장제스의 시종이 되었다가 1936년 서안 사건양후청의 부하들에게 살해되었다. 우학충 역시 서북 초비 부사령관 장쉐량 휘하에 들어갔다가 서안 사건에 연루되고 만다.

6. 참고문헌


  • 일제의 대륙침략사, 소운서, 이문영, 고려원.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중일전쟁, 권성욱, 미지북스.
  • 일본군사사 상, 후지와라 아키라, 제이앤씨.
  • 서안사변, 나가노 히로무, 일월서각.
  • 히로히토 평전, 허버트 빅스, 삼인.
  • 일본 근현대사 시리즈 5권 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으로, 가토 요코, 어문학사.
  • 중국 근현대사 3권 혁명과 내셔널리즘(1925~1945), 이시카와 요시히로, 삼천리.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3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7. 관련문서



[1] 이 사건의 범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사카이 대좌가 사주한 자작극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2] 헌병 제3단 단장.[3] 헌병 제3단 부단장.[4] 정치 훈련처장.[5] 남의사 평진 사무처장.[6] 하북성 정부주석 겸 51군 군장.[7] 사카이 참모장은 도쿄에 있던 시절 군중앙부에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욕설을 퍼부어 일본 정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적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