궈타이치
[clearfix]
1. 개요
중화민국의 외교관. 중화민국 외교부장, 주영 중국대사 등을 지냈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1890년 호북성 광제현에서 태어났다. 과거시험에 응시하여 수재가 되었으며 1902년 장지동이 설립한 무창 중학교에 입학했다. 1904년 무창 중학교를 졸업한 이후 정부의 지원을 받아 미국 펜실베니아 대학교에 유학하여 1911년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대학 신문기자로 활동하다가 1912년 귀국 후 국민당에 가입하여 1916년 리위안훙 총통의 총통부 영문비서, 총통부 고등고문, 외교부 참사를 지냈다. 1917년 호법전쟁이 발발하자 북양정부를 이탈하여 호법정부에 참여, 호법정부 참사, 외교부 차장 등을 역임하였고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 참여, 중국 대표단 전문위원회 위원을 맡았다.
1920년 쑨원이 2차 호법운동을 전개하자 참여했으며 1921년 쑨원이 비상대총통에 취임하자 그를 보좌했다. 1927년 8월 6일 국민정부 외교차장에 임명되어 1928년 3월 6일까지 재직했다. 한국에 이름이 잘 알려져 있지 않아서 그렇지 호법운동, 국민혁명 기간 내내 중국 국민당 산하에서 일해온 나름 원로 혁명가였다.
2.2. 만주사변에서 당고정전협정까지
1932년 1월 28일, 만주사변에 대응하기 위한 특별외교위원회가 성립되자 뤄원간, 구웨이쥔, 왕정팅, 우톄청, 다이지타오, 천궁보 등과 함께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32년 1월 31일, 외교부 정무차장에 임명되면서 다시 외교부 차장을 맡아 외교부장 뤄원간과 함께 항일외교를 지휘, 만주사변과 제1차 상하이 사변을 묶어 처리해야 한다는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1932년, 구웨이쥔, 뤄원간과 함께 중국 대표로 송호정전협정 체결에 참여, 상하이 사변을 우선적으로 해결하자는 영국의 제안에 강경히 반대했다. 다른 대표들과 함께 상하이 사변 기간 동안 상하이 조계지에 상주하며 해결방침을 조율한 결과 5월 5일 송호정전협정을 체결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에게 유화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오해를 받아 항일학생들에게 구타당해 입원하기도 했다.
1932년 5월 14일, 주영 중국공사로 임명되었으며 1932년 6월 25일 외교차장을 퇴직하였다. 영국공사 재직 기간동안 1932년 9월 16일부터 국제연맹 중국 대표를 겸임하여 1932년 국제연맹 13차 대회와 1933년 특별대회, 1933년 14차 대회에서 구웨이쥔, 옌후이칭과 함께 중국 대표단의 일원으로 출석했으며 1934년 15차 대회에는 라충이, 김무사 등과 함께 대표로 출석했으며 만주국 불승인을 비롯한 항일외교를 전개하였다. 1935년 5월 대사로 승격되면서 초대 주영 영국대사가 되었고 1941년 5월 9일까지 대사로 재직했다. 1933년 당고정전협정이 체결될 때 크게 반대했다.
2.3. 중일전쟁과 말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외교관으로 재직하며 중국의 항전을 원조하였으며 1941년 4월 10일 왕충후이의 뒤를 이어 외교부장에 임명, 1941년 12월 27일까지 재직하다가 쑹쯔원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1942년 국방최고위원회 위원 겸 외교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으며 항일전쟁 승리 이후 1946년 국제연합이 형성되자 1947년 7월 21일 UN 안보리 중국 대표에 임명되었다. 1947년 12월 브라질 대사에도 임명되었으나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함에 따라 사직했으며 또한 UN대사직에서도 사퇴했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 궈타이치의 귀국을 종용하였지만 병환 치료를 위해 따르지 않고 미국으로 이주하여 1952년 캘리포니아주 산타바바라에서 62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3. 여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후원하여 한국독립운동을 지원한 공이 인정되어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4. 주요경력
5. 참고문헌
- 만주사변기 중일외교사, 유신순, 고려원.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塘沽停戰協定 이후 국제정세와 職業外交官의 항전 입장, 중국사연구 83권, 중국사학회.
- 滿洲事變 以後 南京國民政府 職業外交官의 부상에 대한 硏究, 석미자, 중국사연구 89권, 중국사학회.
- 滿洲事變 以後 職業外交官의 對日 强硬態度와 國內活動 硏究, 석미자, 중국사연구 95권, 중국사학회.
- 만주사변 이후 남경국민정부 직업 외교관의 역할 연구 : 1931-1936, 석미자,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 위키백과나 두산백과는 1888년생으로 기재하고 있으나 석미자 교수의 논문에 1890년생으로 기재되어 있는 관계로 논문 자료를 따랐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