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덕영
1. 음성군 출신 독립운동가, 신덕영
신덕영은 1890년 11월 25일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면 읍내리에서 신병선(申炳善)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 한학을 익혔고, 1910년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졸업한 뒤 한일병합 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1914년 통화현의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여 이듬해 졸업했다. 이후 1916년 간도의 교포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후진 양성에 힘썼고, 1917년 북만주 동녕현에 호분중학교(虎賁中學校)를 설립하고 학감으로 재직하며 군사교육을 전담하였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만주에서 일시적으로 '조선독립단'에 간여했다고 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반인 이동녕, 박은식의 지시를 받고 국내로 귀국했다고 한다. 이후 서울에 거주하면서 자신의 집에 머물고 있던 최양옥과 깊은 교류를 맺다가 얼마 후 대동단 단장 김가진이 통제하는 대동단 조선지부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그가 김가진과 인연을 맺게 된 배경과 계기는 분졍하지 않으나, 그 시기는 1919년 음력 7월 직전인 것으로 보인다.
1919년 음력 7월경, 신덕영은 김진규(金晉圭)와 접촉한 후 그의 소개장을 받아 경북 문경의 정인옥을 찾아간 뒤 <독립선언서>와 <독립신문> 및 권총과 탄환을 제공하고 그로 하여금 독립운동자금을 수집하게 했다. 그는 정인옥이 수집한 자금을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또한 그해 음력 11월에 최양옥을 설득해 대동단 단원으로 가입시켰고, 그로부터 독립운동자금 모집에 참여한다는 답변을 받아냈다.
1920년 음력 4월, 최양옥은 인천으로 가서 노형규를 동지로 삼았다. 그리고 경성부 익선동에 거주하는 자신의 첩 정수현을 대동단 단원으로 포섭했다. 1920년 음력 7월, 신덕영은 최양옥, 노형규, 노석중 등과 함께 자신의 집에 모여 만주농림주식회사(滿洲農林株式會社)를 조직했다. 그리고 이들을 주식모집원으로 가장하였고, 최양옥으로 하여금 광주로 가서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게 했다.
이후 자신도 유선주와 함께 광주로 내려와 독립운동자금의 모집을 독려했다. 그는 광주에서 조직을 정비하고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는 데 매진했으며, 지금까지 그가 관장했던 경상도, 충청도, 강원도, 전라북도 지역의 책임자 정인옥에 대한 관리는 이광세(李光世)에게 넘겼다.
1920년 음력 8월 27일, 신덕영은 광주에 거주하며 독립운동자금 모집에 협조하던 노석정을 단원으로 가입시켰다. 이후 여러 인사들을 단원으로 가답시킨 그는 자금 마련을 위해 총기 1정을 마련하여 소지했다. 또한 그의 첩 정수현은 경성에서 모형 권총 2정을 구입하고 일제 관헌의 눈을 피해 전남 광주에서 독립운동자금에 분주하던 그에게 전달했다. <매일신보> 1920년 12월 21일자 보도에 따르면, 신덕영은 정수현으로부터 모형 권총을 전달받은 뒤 이를 동지에게 전달하였고, 동지들은 이 모형권총을 활용하여 수백 환의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는데 성공했다”고 한다.[1]
1920년 8월 하순, 신덕영은 신종선(申鍾善)으로부터 대동단 명의의 군자금 모금에 관한 권유문을 받아서 광주에 내려가, 노형규가 지명한 정인채(鄭麟采)·양사형(梁士亨) 등 여러 사람으로부터 군자금을 받아낸 뒤상경하였다. 그 후 대동단 총재 김가진 명의의 포고문과 조선총지단(朝鮮總支團) 부장 한부(韓扶)의 이름으로 된 경고문을 전라남도 부호인 노종승(盧鍾升)·정해붕(鄭海鵬)·양재국(梁在國)·국채웅(鞠採雄) 등에게 발송하였다.
또한 군자금 모금원을 여러 반으로 나누어 1반은 박일봉(朴日鳳)·이윤호(李允鎬)로 편성해 화순군과 나주군 방면을 맡겼고, 2반은 자신과 최양옥, 노석정으로 편성해 담양과 곡성 방면을 맡겨서 많은 군자금을 모았다. 또한 임시정부의 특파원 한준호(韓俊鎬)·박문용(朴文容)·정용택(鄭容澤) 등과 연락을 취하면서 군자금 모금에 진력했다. 그러나 1920년 11월 최양옥, 노석정이 체포되면서 대동단의 활동이 발각되고 말았고, 결국 그는 1920년 11월 말 광주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1921년 5월 31일, 신덕영은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8년을 선고받고 광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1923년 5월 5일 늑막염을 앓아 보석으로 출옥했다. 그는 연세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퇴원한 직후 중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중국 베이징, 하북성 석가장 등지에서 생활했으며, 1928년 초에는 석가장에서 고물장사를 표방하면서 비밀리에 아편 장사를 했다. 그러던 1928년경 그의 아내 오씨로부터 최양옥이 출옥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최양옥에게 연락하여 곧 중국으로 오라고 했다. 그 후 그는 최양옥을 만나기 위해 베이징으로 가려 했지만 그러지 못하고 산시성 태원으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최양옥을 만났다.
이후 신덕영은 최양옥과 함께 석가장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고, 그곳을 본거로 정하고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고물장사와 아편장사를 했다. 그러다가 1928년 음력 6월에 석가장에서 태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마침 태원에는 비행기 조종사로 활동하다가 독립운동전선에 뛰어든 안창남이 거주하고 있었다. 세 사람은 1928년 음력 6월에서 9월 사이 태원에서 대한독립공명단을 조직했다. 공명단은 단장, 부단장 외에 군사부, 재정부, 정치부를 두고 있었는데, 이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은 군자금 모금의 임무를 담당한 재정부였다.
공명단의 단장은 50대의 황해도 출신이며 하와이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라고 전해지나, 그가 누구인지는 현재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신덕영은 부단장을 맡았고, 재정부의 부장으로 이영(李英)을 추대했고 최양옥과 김정련(金正連)이 재정부 부원으로 활동했다. 이외에도 여러 인사들을 포섭한 대학독립공명단은 독립을 도모하기 위해 중국의 장제스, 옌시산 등의 원조를 받고 국내 유지로부터 지원을 받아 약 150만원 가량의 자금을 마련하고 중국의 난징, 산시성, 바오터우 3곳에 무관학교를 세우고 청년장교를 교육시켜 5개 사단 75,000여명의 병사를 양성하려고 하였다.
예상대로 군인이 양성되면, 40,000명의 병력은 함경북도로, 35,000여명의 병력은 평안북도 방향으로 침입시켜 일본과의 전면전을 일으킨 후 독립군이 중국․소련 지역으로 도피하여 일본군이 추적케 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일본과 중국․소련과의 전쟁을 유도하려고 하였다. 또한 이러한 침입에 호응하여 국내에서 독립만세시위를 일으키면 자연스럽게 한국의 독립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공명단은 이 계획을 실현하는 데 10년에서 20년이 걸릴 지라도 계속 수행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1928년 음력 9월 하순, 신덕영은 안창남, 최양옥, 김정련 등과 만나 국내에 사람을 파견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국내에 사람을 파견하기로 했다. 이때 최양옥이 경춘가도의 우편차량을 탈취하여 한 번에 20~30만원 정도의 자금을 마련하자고 주장했다. 이에 안창남은 한 번에 만원 이상의 거액의 자금을 마련할 수 있는지 확인한 뒤 이를 실행하자고 제안했고, 신덕영은 수락했다. 국내에 파견할 모연대원으로는 최양옥과 김정련이 선정되었다. 안창남은 최양옥에게 콜트식 권총 1자루와 탄환 14발, 모젤 권총 1자루와 탄환 10발을 주었으며, 김정련에게 로얄 자동권총 1자루와 탄환 12발을 주었다. 그리고 결행시기 등은 후일 결정하기로 했다.
1928년 말, 최양옥은 이듬해 5월 서울에서 산업박람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에 그는 서울로 몰래 잠입하여 박람회에 참석할 일본의 고관과 관헌을 살해하려는 계획도 세웠다. 그는 안창남으로부터 600원을 받은 뒤 1928년 음력 12월 1일 신덕영에게 작별 인사를 건내고 석가장으로 가서 김정련과 합세하려 했다. 그러나 김정련은 1928년 말 중국 관헌에게 체포되어 천진의 일본총영사관 경찰서에 인계된 뒤 1주일간 유치되었다가 훈방 조치된 뒤 1928년 12월 하순 고향인 용천군으로 돌아갔고, 이 때문에 최양옥은 김정련을 만나지 못했다.
나중에 이 소식을 알게 된 최양옥은 안동현에서 김정련과 만나려 했지만 중도에서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천진의 일본총영사관에 압송되었다. 그 후 몇달간 조사를 받은 끝에 출옥한 그는 1929년 3월 7일 안동현에서 김정련과 재회했다. 그들은 3월 9일 신의주에 거주하던 이선구(李善九)를 포섭한 뒤 국내로 잠입하였고, 그해 4월 18일 양주군 미금면과 화도면의 경계인 마치고개에서 대기하다가 서울에서 춘천으로 가는 일본 우편물 수송차를 급습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그 수송차에는 현금이 없었고, 대신 승객과 지나가던 차량으로부터 53여 원을 받아낸 뒤 강원도 방면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이들의 행적은 곧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었고, 최양옥, 김정련, 이선구는 4월 20일에서 21일 사이에 잇달아 체포되었다. 이들의 체포로 대한독립공명단의 활동은 위축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안창남이 1930년 중국 산시성 태원천지단의 산서비행학교 앞에서 비행기 조종 도중 추락사하고 말았고, 결국 대한독립공명단의 비행학교 설립 계획을 중지되었다. 이후 신덕영은 각처를 전전하다가 1932년 6월 하얼빈에게 일제 경찰에게 체포된 뒤 대전형무소에서 남은 형기를 마치고 1934년 10월 출옥했다.
그 후 만주에서 조용히 지내던 그는 1945년 8.15 광복 후 한국으로 귀환한 후 서울에서 재외이재동포원호회(在外罹災同胞援護會)를 설립하고 독립투사들의 원호사업에 힘썼으며, 광복단(光復團)을 부활시켜 광복단중앙총본부 단장, 대한독립운동자동맹의 대표로서 건국사업에 노력하였다. 이후 서울에서 조용히 지내다 1968년 5월 2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신덕영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1970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2. 양평군 출신 독립운동가, 신덕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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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덕영은 1912년 12월 17일 경기도 양평군 강화면 정수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43년 북경대학 지하공작대에 가담해 일본군의 후방에서 공작 활동을 수행하다가 1943년 광복군에 입대하여 복군 제2지대 제3전구에서 활동했다. 그는 「조국 행진곡」을 작사하여 광복군이 조국광복에의 염원을 불러일으키도록 하였다. 1945년에는 한미합작훈련인 OSS훈련 정보파괴반에서 훈련교육을 받고, 국내 정진군 제1지구 황해도반에 편성되어 국내 진입작전 개시를 준비하다가 8.15 광복을 맞이했다.
광복 후 서울로 이주하여 평범하게 살아가다가 알츠하이머 병에 걸려 보훈병원에서 치료를 받다 2014년 4월 24일에 사망했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았고, 사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1] 정수현은 모형 권총을 남편에게 전달한 직후 체포되었는데, 취조 과정에서 임신 6개월이라는 사실이 밝혀져 세상을 놀라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