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화점

 



월금으로 연주한 쌍화점
1. 개요
2. 전문
3. 당시 사회 배경 추측


1. 개요


雙花店
고려가요 중 하나. 조선시대에는 남녀상열지사로 비판받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작자 미상이나, 고려사에 삼장이라는 글로 2절이 나온 것이 쌍화점과 같다. 이 때문에 삼장을 지었다는 오잠의 창작물로 보는 설, 당시 원나라 풍속에 익숙했던 충렬왕의 취향에 맞춰서 연극 형태로 만들어진 각본의 일부라는 설, 원래는 고려속요로 민간에 돌았던 것이고 오잠은 채록한 다음에 이를 약간 편곡만 했을 뿐이라는 설로 나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쌍화점 문서는 마지막 설을 취하고 있다.
《대악후보》와 《시용향악보》에 악보가 남아있기 때문에 선율은 어느 정도 복원해서 연주할 수 있으며 복원도 되어있지만, 이상하게도 원곡을 재현해 연주한 음원은 매우 찾아보기 힘들다. 대부분 쌍화점(영화) OST에 실린 창작국악 버전만 뜨는 경우가 많다. 음원사이트에 검색하면 복원본이 가끔 뜨기도 한다.
'쌍화점'은 고려시대 당시 쌍화를 파는 가게를 가리키는 낱말. 만두의 모양이 쌍화(인동초)로 보여 쌍화라고 불렀다고 한다. 쌍화가 무엇인지는 해당 항목 참조.

2. 전문


고려가요 특유의 후렴구 및 여음구를 생략하고 표기한 1절은 다음과 같다.

'''雙花店쌍화점에 雙花쌍화 사라 가고신댄'''

만두가게에 만두 사러 갔더니

'''回回회회아비 내 손모글 주여이다.'''

회회아비가 내 손목을 쥐었더라[1]

.

'''이 말싸미 이 점店밧긔 나명들명'''

이런 말이 이 가게 밖에 드나들면[2]

'''죠고맛감 삿기 광대 네 마리라 호리라.'''

조그만 새끼 광대야, 네가 말한 것이라 하리라.

'''긔 자리예 나도 자라 가리라'''

그 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그 잔 데같이 덤거츠니 없다'''

그 둘이 잔 데같이 뒤엉켜진 데가 없다.

전문 보기, 해석
<쌍화>에 대한 다른 해석의 블로그기사, 아라비아 상인의 세공품
전문을 보면 알겠지만, 이 노래는 고려 여인이 간 곳, 손목을 잡은 남자, 소문을 퍼뜨린 대상 셋만 바뀌면서 변주되는 노래이다. 이 여인은 1절에서 만두가게 서역인부터 시작해서 스님, 술집 아저씨, 심지어 우물가에 갔다가 환상종에게도 손목을 잡힌다. 이때 용은 왕족의 은유라는 설이 있다.

3. 당시 사회 배경 추측


고려 역사를 웬만큼 공부해 본 사람이라면 <쌍화점>을 보아도 당시 사회 배경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쌍화점은 국문학 작품성보다도 사회상을 담고 있는 것에 더 가치가 있다.
  • 첫 번째의 '회회 아비'는 이슬람교를 믿는 '위구르족'이다. 위구르족은 색목인에 속하는 계층으로 보인다. 당시 위구르족은 상인 활동을 하고 있었다.
  • 2번째의 '삼장사의 주지'는 당시 타락한 불교를 상징한다. 고려는 국교가 불교였고 그에 따라 엄청난 수의 들이 창건되었다. 문제는 이러한 불교가 여러 세월을 거치며 점점 타락하기 시작했고,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도 절에서 을 빚어 마시며 놀고, 세금도 면제 받으며 노비까지 하사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원래 고려 초기부터 불교의 권력이 강해져 타락하여 갔지만, 쌍화점에 청렴의 상징인 불교도까지 타락했다고 하는 것은 고려시대의 타락함을 나타낸다. 참고로 삼장사는 개경에 실제로 있었던 절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 3번째의 '우물가의 용'은 당시 고려의 왕과 왕족을 뜻한다. 지금도 마찬가지고 왕이나 대통령은 어딜 가나 욕을 먹듯이 이때도 다른 것은 아니다. 상식적으로 용은 보통 강이나 바다에 사는 존재로 여겨진다. 우물이라는 것은 당시 왕의 거처를 뜻하는데 금기시되어 있는 곳을 가사로 표현하였다. 즉, 용이 강이나 바다도 아니고 초라한 동네 우물에서 나왔다는 말은 그만큼 왕과 왕족의 권위가 추락했음을 나타내는 것.

[1] 고려도경에서도 나오듯이, 고려 시대 여인들은 손톱을 내보이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서 한삼(汗衫)이라는 붉고 긴 옷소매를 덧대서 손을 가리고 다녔다. 그 소매 안에 있는 손목을 잡았다는 건 요즘으로 치면 대놓고 성희롱에 해당하는 행동이었을 것이다.[2] 회회아비가 내 손모글 주였다는 소문이 이 가게 밖에까지 퍼지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