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슈라 축제

 

1. 개요
2. 상세
3. 아슈라와 자해


1. 개요


이슬람 시아파에서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의 둘째 아들인 후세인 이븐 알리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시작한 종교 축제이며, '''자해''' 의식으로도 유명하다.

2. 상세


정통 칼리파 시대의 4대 칼리파였던 알리가 무아위야 1세와의 협상을 하지만, 알리의 추종자 일부가 이탈해 구성한 하리지파에게 살해당하자 무야위야는 알리의 장남 하산 이븐 알리[1]를 칼리프 선거에 출마하지 못하게 막고 칼리프가 되었다.
680년에 무아위야 1세가 죽자 후계자가 된 사람은 그의 아들인 야지드 1세였는데, 무아위야는 선거제였던 관례를 깨고 야지드를 후계자로 지목해 칼리프위를 세습했던 것이다. 이에 알리를 지지한 시아파들은 알리의 둘째 아들인 후세인 이븐 알리를 칼리파로 추대하기 위해 이라크의 쿠파로 초청했지만, 야지드가 보낸 군대에 의해 후세인과 그를 따르던 지지자들이 쿠파 근처인 카르발라에서 살해당하자 시아파는 후세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의미를 담아 매년 이슬람력의 첫 달인 무아람[2]에 아슈라를 거행한다.
아슈라 때는 카르발라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구전으로 전해진 후사인의 최후를 재현하는 연극 타지예(ta'ziyeh, 수난극)을 공연하며, 시아 무슬림들은 스스로 가슴을 치며 호세인[3]과 함께 순교한 사람들을 애도한다. 또한 인원이 많이 모이는 행사여서 시사 이슈에 따라 시위가 벌어지기도 하는데, 이란에서는 팔라비 왕조 때 군주제 반대 진영에서 팔라비와 서구를 현대판 야지드라 비난했고 이란-이라크 전쟁 때는 사담 후세인이 야지드와 맞먹는 악당으로 불렸다.
특히 시아파 인구가 많은 이란이나 이라크카르발라(후세인 순교지), 쿠파, 나자프, 마슈하드(이란)와 같은 시아파 성지에서는 남자들이 웃옷을 벗고 단체로 음악 박자에 맞춰 쇠채찍으로 자기 몸을 때리기도 한다(잔지르자니). 이 아슈라 행사의 마탐(matam) 의식이 비무슬림, 수니파들 사이에선 비판과 논란이 상당한데, 그냥 자기를 때리는 수준에서부터 심하면 '''칼로 머리 피부를 째거나, 과도한 채찍질, 칼질로 몸에 피가 철철 흘러넘칠 때까지 잔인한 자해를 하는 경우가 매우 많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우는 '''어린아이의 머리 피부까지 칼로 베어서 피를 나오게 만들기도 한다.''' 적지않게 충격적이고 인권문제도 심각하기 때문에 매우 미개하고 야만적인 행위라고 비판받기도 한다.
터키의 경우 수니파가 주류이고, 세속국가이기 때문에 종교의 영향력이 크지 않지만 오랫동안 시아파가 많은 이란과 문화적 영향을 받고있었고 터키 내에도 알레비파라는 시아계열의 종파가 꽤 크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아슈라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전통이 있다. 알레비파는 타지예와 이맘 알리와 이맘 후세인을 추모하는 기도회 같은것이 있고 아슈레(aşure)라고 불리는 일종의 푸딩을 돌리는 풍습 정도만 있고 자해는 다른 수니파와 마찬가지로 하람, 혹은 비이성적인 폭력행위로 여기며 혐오한다.
시아파와 수니파는 알리 때부터 견원지간이어서 아슈라 기간을 노리고 수니파가 시아파에게 테러를 가하기도 한다.참고 기사
2004년에 EBS에서 제작한 연작 다큐멘터리인 <이슬람 문화기행> 3편 '시아 무슬림, 1400년 동안의 눈물'에서 아슈라와 시아파의 역사를 다뤘다.

3. 아슈라와 자해


아슈라 때 남자들은 거리 행진에 참여해서 자기 가슴을 주먹으로 치거나 쇠채찍이나 칼로 자해하는데[4], 비무슬림들은 야만스럽다고 싫어하며 무슬림 내부에서도 자해 의식을 시아파라도 모두 좋아하진 않는 편이다.
그래서 웬만큼 광신자가 아니고서는 이제는 피를 낭비하지 않고 가슴을 때리는 선에서 자해는 마무리하고 다 같이 헌혈을 하는 건전한 의식으로 바꾸자는 움직임이 있다. 일부는 굳이 피를 보는 경우는 작게는 손가락을 바늘이나 못으로 찌른다던가 칼질하며 피를 보겠다면서 살짝 커터칼로 손가락 하나를 살짝 베는정도 수준에서 피를 보는 것으로 자해를 마무리하고 헌혈을 하는 경우도 있다.[5][6]
이렇게 자해를 하는 풍습이 하람이고 현대 사회에 맞지 않는 시대 착오적 악습이라는 비판이 시아파에서도 제기되어, 오늘날 이란을 비롯한 시아파 국가에서는 칼질하며 피 보는 대신 피를 보려거든 피를 자해 등으로 낭비하지 말고 '''지역 사회와 환자를 위해 헌혈'''을 하자는 운동도 벌어지고 있다.
이란에서는 1994년에 하메네이가 아슈라 때 피를 흘리며 자해하는 의식을 금지하는 파트와를 반포했고, 이게 호응이 매우 좋아서 아제르바이잔에서는 하루만에 전국에서 1500리터나 모였다는 보도도 나올 정도로 헌혈 캠페인은 아슈라의 양상을 바꿔놓는 중이며, 특히 영국 등 비이슬람권 국가에서도 시아파뿐만이 아닌 전 무슬림들을 대상으로 이런 캠페인을 펼치곤 한다.

[1] 하산의 아들인 카심(거셈)은 후세인의 이복동생인 아바스(알리 셋째부인의 아들)와 함께 카르발라에서 후세인을 지키다가 죽었다. 당시 카심은 13세였고 약혼도 했으나, 후세인 일행이 우마이야 군대에 숫적으로 밀려 열세에 빠지자 아바스와 함께 싸우길 자청했다고 한다(EBS 다큐 이슬람 문화기행 3편 참조)[2] 2020년에는 8월 말이 무아람이었다.[3] 후세인의 페르시아어 발음.[4] 이슬람 문화기행에 따르면 여자들은 거리 행진에 참가하진 않는다.[5] 하지만 이렇게 상처를 내고 헌혈을 하는 것은 절대 유익한 일이 아니다. 만약 바늘, 못, 커터칼로 상처를 내는 과정에서 감염이 되고 나서 헌혈을 한다면 위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정상적인 환경이라면 그런 피는 수혈자에게 가지 못하도록 혈액검사가 이루어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부러 저런 행동을 하고 헌혈을 하는 것을 좋게 볼 수는 없다.[6] 한국 기준으로 헌혈 전 문진단계에서 철분 검사를 위해 채혈침으로 손을 따 한 방울 정도 채혈을 한다. 즉 헌혈의 집에 가기만 하면 소기의 목적은 달성할 수 있는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