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이라크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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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당시 이란과 이라크의 국경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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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독면을 쓰고 화학전을 치르는 이란군 병사.

이란측에서 전투 상황을 생생히 촬영하여 제작되었던 기록 영상.
(페르시아어) جنگ تحمیلی ,جنگ عراق با ایران ,جنگ ایران و عراق
(아랍어) الحرب العراقية الإيرانية ,حرب الخليج الأولى
Iran-Iraq War (영어)
La guerre Iran-Irak (프랑스어)
1. 개요
2. 배경
3. 경과
3.1. 이라크의 기습적인 개전(1980년 9월)
3.2. 이란의 반격 (1980년 말 ~ 1983년 초)
3.3. 끝없는 소모전 (1983년 ~ 1988년)
4. 뒷이야기
4.1. 전쟁 당사국들
4.2. 국제적 여파
4.3. 한국에 미친 영향
4.4. 대중 문화


1. 개요


이란-이라크 전쟁(혹은 이라크-이란 전쟁)은 1980년 9월 22일 이라크의 침공으로 시작되어 이란의 반격으로 부터 장기화되어 1988년 8월 20일에야 UN의 중재로 휴전이라는 형태로 끝났다. 80년대를 관통하며 '''8년에 걸쳐 쉬지 않고''' 이란이라크 사이에서 이어진 전쟁으로, 오늘날까지 마지막 국가간 총력전으로 남아있다.
이라크 군은 전쟁 시작시 20만, 이란군은 11~15만이었으나 이후 총동원을 내려 전쟁 말기에 가면 이라크군은 150만명을 동원했고 이란군은 6~70만 명을 동원했다. 양측의 사상자는 군인과 민간인 피해가 사망자만 50만~100만 이상이고 부상자 역시 100~200만에 달하며 경제적 피해는 양측이 모두 5천억 달러 이상이다.
이후 걸프 전쟁이라크 전쟁을 거쳐 2003년 사담 후세인 정권이 붕괴되면서 마무리가 되었으나 지금도 중동권의 불씨로 남아있다.

2. 배경


이란과 이라크는 페르시아 - 아랍이라는 민족 문제도 있고,이슬람 이전부터 '''바빌론-페르시아'''라는 오랜 앙숙으로서 정치적으로 바람 잘 날이 없었으나 모두 소규모 국경분쟁에 지나지 않았다. 1975년에는 OPEC 정상회담이 열리던 알제에서 팔레비 2세와 당시 부통령이던 사담 후세인이 회동, 사트 알 아랍 수로를 비롯한 국경 문제에 합의를 도출하고 충돌을 일단락함으로써 우호적인 관계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란에서 1979년 민중혁명으로 팔라비 왕조가 무너지고, 호메이니의 이슬람 시아파 신정 체제가 등장하자 상황이 일변하였다. 이라크 내부의 시아파들은 사담 후세인의 경제 발전[1]과 이라크 국가주의 교육의 실시로 종파별 정체성을 점차 잃어가고 있었는데 호메이니가 이라크 내부의 시아파들에게 반란을 촉구하며 아랍 전체에 이슬람 혁명을 수출하고자 하는 공작을 개시했던 것이다. 이때의 사건으로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시아파 국민과 순례자들이 폭동을 일으켜 유혈사태가 발발하고, 이라크 남부의 시아파 지역에서도 소요사태가 벌어졌으며, 이란은 샤트 알 아랍 강을 비롯한 군사적, 정치적 합의를 모조리 일방적으로 깨버렸다.
사담 후세인을 비롯한 아랍 지도자들은 이러한 시아파 준동을 극적인 위협으로 받아들였으며, 그 배경인 이란을 격파하면 시아파의 준동을 막고 군사정치적 위협을 배제할 수 있다고 여겼다.[2] 특히 사담 후세인은 이라크를 근대 국가로 건설하기 위해 쿠르드족, 수니파, 시아파 갈등을 통합해 이라크 국민으로서 의식을 재편하는 작업에 매진하고 있었으므로[3] 오랜 숙원을 망가뜨리는 호메이니의 준동을 간과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또한 후세인은 사트 알 아랍 강 국경 분쟁에 더불어 바르드 알딘 하산, 시트 알 후슨 섬과 이란의 아랍인 거주구역인 후제스탄을 '아라비스탄', 호람샤르를 '모하마라'라 탐내면서 이라크의 영토라고 주장했다.
이런 문제와 더불어 이란 내부의 문제도 전쟁 발발에 한몫을 하였는데, 이란은 팔라비 왕조 시절 친미, 친서방 국가로서 중동 최대의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호메이니의 이슬람 정부는 국내의 다양한 정치 세력을 모조리 숙청함과 동시에 군부 내의 미국 유학파 장교, 서방제 무기 조종사들을 모두 친미세력으로 보고 숙청했다. 그 공백을 민병대 수준에 불과한 혁명수비대로 채우면서 자연히 이란의 군사력은 심각하게 저하되었다.
더불어 사담 후세인은 일명 6일 전쟁으로도 불리던 제3차 중동전쟁에서 속전속결로 크게 이긴 이스라엘군의 전략에 큰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비록 이라크의 국력이 이란보다 뒤떨어지더라도 이란의 군사적 문제점과 전성기를 달리던 이라크의 군사 수준을 고려하면 전격전을 통해 속전속결로 승부를 지어 이란을 자연히 협상 테이블로 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즉, 시아파 준동의 배경인 이란의 위협을 소멸시키고 이란과의 장기전이라는 위험요소를 떠안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또한 사담 후세인은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을 롤모델로 삼았다. 소비에트 폴란드 전쟁은 러시아 혁명과 뒤이어 벌어진 러시아 내전(적백내전)으로 혼란했던 러시아, 제1차 세계 대전을 막 끝내고 독일 제국으로부터 독립했던 폴란드 제2공화국과 독일-러시아 사이에 갑자기 생겨난 수많은 소국들(발트 3국,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등)이 혼란한 시점에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진 내부 충돌이 폴란드러시아가 개입하면서 정면 충돌로 발전했고, 결국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서구 열강의 지원을 받은 폴란드가 승리하여 폴란드 제2공화국소련의 공산주의 블록 확산을 저지하고 영토를 확장하였다. 사담 후세인은 폴란드 제2공화국을 승전으로 이끈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의 전략, 전술 운용에 감화를 느꼈다. 이란 혁명으로 혼란한 이란이 시아파 신정혁명을 중동 각국으로 수출하겠다고 덤비던 시점에, 이란의 길목인 이라크폴란드 제2공화국처럼 이란의 혁명 수출 기도를 눈앞에서 저지한다면 이라크중동 이슬람 국가들 사이에서 발언권이 커질 가능성이 높다. 사담 후세인은 이런 효과를 노리고 이란을 선제 공격한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토대로 이란에 대해 사담 후세인은 비슷한 입장이던 사우디아라비아, 요르단 등의 아랍 국가에게 지원 약속을 받아내고 이란-이라크전의 개전을 결정했다. 이슬람 원리주의에 의해 왕조가 무너지는 모습을 본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UAE 등 걸프만 주변의 수니파 왕정국가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이라크를 지원하였다. 특히 사우디와 쿠웨이트는 아예 무기를 새로 사다가 이라크에 대여해 주면서까지 이란을 박살내려고 노력했다.[4] 이라크가 아랍연맹 가맹국들에 빌린 돈이 당시 기준으로 무려 1,000억 달러를 넘었다. 물론 1980년 당시가 고유가의 절정을 달리던 시기였기 때문에 이라크가 그 만큼 여력이 되었기도 했지만 말이다. 개전 직전 이라크는 이란 정부에 대항하던 아라비스탄 해방전선을 지원해줘서 주 영국 이란대사관 인질극의 밑밥을 깔아주기도 했다.

3. 경과



3.1. 이라크의 기습적인 개전(1980년 9월)


전쟁은 이라크 측의 선전 포고 없는 기습 공격으로 시작되었다. 정확히는 11일 전까지만 해도 "이란의 파괴나 점령을 바라지 않는다." 고 했다가 1980년 9월 17일 조약의 파기를 선언했고 9월 22일부터 공격을 시작했다. 표면적 목적은 1950년대부터 영유권 분쟁을 계속해온 샤트 알 아랍 강의 회복이었다. 여기에 시아파의 확산을 우려하는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카타르, 바레인 등 걸프만 연안의 수니파 아랍 왕정국가들의 지원이 더해졌다.
한편 호메이니는 구 팔라비 왕조에 충성하던 장성들이 쿠데타를 준비하다가 들통나자 고급 장교와 서방제 무기를 점검하던 엔지니어들까지 이단이라며 모조리 감옥에 처넣었다. 그 결과 소령부터 대령까지의 절반에 해당하는 1만 2000명이 살해되거나 감옥에 있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란 전력의 상당수는 이슬람 광신에 가득찼지만 전투 능력은 매우 떨어지는 자원병 및 혁명수비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렇듯 숙청으로 약화되어 있던 이란군은 전쟁 초반에 패배를 거듭했고 이라크군의 대규모 공세가 있을 때마다 수천 단위로 전사자가 발생했다. 따라서 전쟁은 일방적으로 끝나리라 예상되었다. 특히 이란은 조종사가 없어서 알토란 같은 항공전력을 놀릴 수밖에 없었다. 이라크는 순식간에 호람샤르와 아바단을 비롯한 이란의 주요 공업도시들을 함락시키는 기염을 토했다.

3.2. 이란의 반격 (1980년 말 ~ 1983년 초)


그러나 이라크군 또한 이란군의 약화만을 믿고 즉흥적으로 시작한 싸움이었기에 1980년 말부터 바로 한계를 드러내었다. 후세인은 애초에 "히트 앤드 런"[5]을 목표로 하고 있었기에 유엔 안보리의 중재를 바로 받아들이고자 하였다. 하지만 호메이니는 먼저 침략을 당한 입장이고 이란의 국력이 압도적인 상황에서[6] 휴전을 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기에 장기전으로 이라크를 굴복시키는 방침을 정한 상황이었다.
심지어 전쟁 발발 한달만인 1980년 10월에 석유 산업의 중심지로 전략적 요충지인 아바단에서 이라크군은 2만 병력에 전차 600대를 동원하고도 5천명에도 못 미치는 이란 혁명수비대의 반격에 패주하는 추태를 보이기까지 했다. 후세인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처럼 당하는 걸 꺼렸기 때문에 도리어 우월한 전력을 가지고도 함락하지 못한 것이다. 호메이니는 광신적인 소년병들을 대대적으로 동원하여 이라크 육군의 진격을 저지했고 후세인은 소대 단위 전술까지 일일히 다 간섭하며 작전마다 어깃장을 두면서 전선은 고착화되었다. 거기에 후세인이 자신의 간섭으로 인한 패배를 장군들의 잘못으로 돌려서 닥치는 대로 총살해대느라 이라크군은 사기가 바닥을 쳤다.[7]
이라크가 이렇게 우왕좌왕하는 사이 호메이니는 11월부터 반격에 나섰다. 금지되었던 팔라비 왕조의 국가(國歌)를 다시 허용하면서 애국심과 단결을 고양했고 숙청당했던 인력들을 복귀하자 힘을 되찾은 이란군 앞에서 이라크군은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된다. 물론 이란은 서방과 소련, 아랍 국가들의 경제 제재로 가동률이 바닥으로 떨어진 상태였지만 그렇다 해도 팔라비 왕조가 쌓아왔던 견실한 기술력, 경제력이 어디 가지는 않았다. 결국 팔라비 왕조를 타도했던 혁명 세력의 광신적 투지에 처음부터 게임이 안 되던 국력의 차이가 더해지자 전쟁은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특히 국가를 다시 허용하고 구 왕조의 군인들을 사면한 것이 의외의 전과를 올렸는데 호메이니의 정부보단 차라리 사담 후세인이 낫다며 감옥에 있길 고집하던 공군 조종사들이 사면받자마자 대거 군으로 복귀한 것이다.
또한 조종사들이 복귀한 이란 공군은 제공권을 확고하게 잡아서 오히려 이란 공군이 수도 바그다드를 포함한 이라크를 공습하였다. 1981년 4월 3일에는 747 조기경보통제기, 707 공중급유기, F-4, F-14를 총망라한 '''스트라이크 패키지'''를 구성하여[8] 시리아 국경에 인접한 이라크의 H-3 비행장을 공습하여 30~50기의 전투기를 파괴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게다가 1981년 6월 7일에 있었던 이스라엘 공군의 이라크 오시라크의 타무즈 원자로 폭격사건에 놀란 후세인이 공군 주력을 빼서 이스라엘 국경 방어에 돌리는 바람에 이라크군의 사기는 더욱 떨어졌다.
격전지 중의 격전지였던 호람샤르 시를 네번째로 점령했다가 다시 빼앗긴 이라크는 평화회담을 제안했고 사우디아라비아도 호람샤르 시를 비롯한 이란의 피해를 재건하는데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구슬렸지만 이란은 완강했다. 이란은 시아파의 메카라고 할 수 있는 '카르발라'를 비롯한 이라크의 시아파 성지들을 죄다 점령하기 전까진 '거짓된 평화'를 수용하지 않겠다고 버텼다. '''한마디로 이라크의 남동부 절반 시아파 지역을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참다 못한 후세인은 레바논 내전에 개입한 이스라엘이 사브라 샤틸라 팔레스타인 난민촌 학살 사건을 일으키자 같은 무슬림들끼리 싸워서 되겠냐면서 전쟁을 멈추고 이스라엘을 치자고 제안했으나 호메이니는 이라크와의 전쟁에서 승전 한 다음 이스라엘까지 진군하겠다며 거부해버렸다. 사실 이스라엘은 이란 입장에서 정말 몇 안되던 우방국으로 1987년 미국의 요청으로 중단하기 전까지 이란에 F-4전투기 부품을 비롯하여 1억 달러에 달하는 무기를 제공하던 상황이었다. 정작 1982년 이라크 송유관 폐쇄를 통해 이란을 지원한 시리아는 이스라엘에 맞서기 위해 이란의 힘을 빌리려 했다는 점 아이러니하다.

3.3. 끝없는 소모전 (1983년 ~ 1988년)


그러나 팔라비 왕조의 우월한 서방제 무기들도 잦은 전투로 파괴되고 관리가 힘들어져 갈수록 도태되기 시작했다. 서방제 치프틴 전차의 업그레이드형이었던 전차가 소련제 T-62와 각각 250대씩 펼친 대규모 기갑전에서 무참하게 참패하거나, F-14 톰캣 10대가 MiG-21미라주에 의해 손실되는 피해를 입었다. 그 밖에도 이 전쟁에선 이란의 AH-1J 코브라 헬기가 이라크의 MiG-21 한 대를 격추시켰다거나, 이라크의 Mi-24 하인드 헬기가 이란의 F-4E 팬텀을 격추시켰다거나 하는 괴이한 기록들이 많다. 심지어 이란군 톰캣이 AIM-54 한 발로 이라크군 MiG-23 3대를 격추시켰다는 기록도 있다.
하지만 두 나라 모두 열악한 경제 사정으로 항공 및 해상 전력까지 장기간 동원할 여력은 없었으므로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공군과 해군은 꼭 필요할 때만 출격하게 되었다. 심지어 전차조차 함부로 놀리지 못해서 지상전도 보병 위주로만 굴리면서 전쟁은 전차와 비행기를 찾아보기 힘들고 그저 소총만 Gew98에서 AKM[9]으로 바뀐 제1차 세계 대전과 비슷한 양상으로 흘러가기 시작했고, 이 때문에 참호전과 고전적인 인해전술까지 동원되었다.[10] 본래대로라면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에 나선 이란이 제압해야 정상이지만 호메이니 정권을 싫어하는 미국과 아랍권 국가들이 이라크를 지원했기에[11] 이라크는 이란의 공세에도 쉽사리 꺾이지 않았고 전쟁은 지루한 소모전을 반복하는 교착 상태로 빠지게 되었다. 골때리는 건 소련마저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때문에 은근슬쩍 이라크를 편들던 상황이라 이란은 정말 사방팔방이 적으로 깔린 상황이었다.
어쨌든 조금씩 밀리던 이라크는 점령지에서 쫓겨나는 것도 모자라 강을 건너 이라크 본토까지 쳐들어온 이란에게 누르 알 딘 알리 및 아니스 알 쟈리스 섬과도 같은 자국 영토까지 뺏기는 수모를 겪었으며 기세등등해진 이란은 '''후세인 정권 축출'''을 외치며 이라크의 석유 파이프 라인과 항구를 봉쇄했다. 다급해진 이라크는 이란군에게 독가스를 사용했으나 그다지 효과를 보지 못하자 스커드 미사일로 이란군과 이란의 민간인 지역을 공격해 피해를 입혔다. 이에 이란도 그 보복으로 중국북한제 스커드를 수입해 쏴대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북한은 이란과 비밀리에 군사 관계를 맺고 이란을 지원하는 대가로 이라크군이 날린 미사일의 잔해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소련에 그토록 요구했으나 거절당한 스커드 C형을 개발하는데 성공한다.
전쟁은 점차 피에 피를 부르는 보복전으로 확대되었다. 처음에는 상대방의 유전들이 우선 공격 목표가 되었다가 출항하는 유조선들이 무차별적인 공격을 받았고 1984년에 들어서는 주변국 항구를 출발하는 유조선까지 공격받았다. 나중에는 기뢰까지 닥치는대로 뿌려대는 통에 페르시아 만은 물반 기뢰반이 되어갔다. 이에 미 해군 함대가 해로 수호를 명목으로 페르시아 만에 고정 배치되었고 결국 USS 빈센스 함 사건 같은 비극을 낳기도 했다.
한편 이라크가 이란 내 반이슬람 정권 인사들을 상대로 한 선전 활동으로 팔라비 왕조 출신 이란 파일럿들 항공기 8대와 함께 투항하기도 했다. 그러자 이란도 가만히 있지 않고 이라크내 쿠르드족의 독립을 지지하며 이라크에 내전을 일으키려 했다.[12] 격분한 후세인은 1987년 사촌인 알리 하산 알 마지드를[13] 시켜 화학무기로 수천 명의 쿠르드족 민간인을 학살하고 50만 명을 강제로 수용소에 수감시켜 진압했다. [14]
그러던 이라크군은 브라질 등 여러 나라에서 잡다한 EE9, PT-76[15] 등의 기갑 장비들을 수입해 초유의 반격을 성공시키며 여러 영토를 탈환하고 다시 이란의 주요 요충지 점령에 성공하였다.[16] 주고받는 장기전 앞에 이라크나 이란이나 이득 본 것은 하나도 없고 국력만 피폐해졌다. 게다가 천문학적인 전비를 감당 못해 이라크 측 스폰서인 사우디와 쿠웨이트마저 발을 뺐다. 국력이 압도적이던 이란은 이제 승리가 멀지 않았다는 생각에 얼씨구나 하며 좋아했지만 쪽박을 차게 된 이라크는 사우디와 외교까지 단절해버렸다.
1988년 2월부터 이라크군은 "도시 전쟁 작전"으로 반격에 나섰다. 스커드B 미사일 폭격을 2개월 동안 150회 감행해 테헤란을 쑥밭으로 만들고[17] 1988년 5월 이란에 다시 쳐들어가는 등 마지막 발악으로 이란에 상당한 타격을 주었다. 이란이 탄도미사일 개발에 집착하는 이유가 이때 당시 트라우마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전쟁의 마지막 공세가 바로 알파우 반도 및 마즈눈 군도에서 이루어졌는데, 여기서 이라크군이 승리를 거둔다. 이라크군의 역량을 우습게 본 이란군은 다시금 큰 피해를 입고 이라크 영토에서 쫓겨났다. 국제적으로 고립된 상황에서 막심한 피해를 보았던 이란은 결국 이라크와 전쟁 전 상태로 돌아가는 정전협정을 맺었다.
8년간의 전쟁으로 인한 사망, 실종자 수는 군인들만 따져 이란 25만, 이라크 10만이고 민간인을 합치면 이란 30만~80만, 이라크 20만~50만 정도로 추정된다. 부상자는 최소 100만에서 최대 200만에 이른다. 또한 이란과 이라크 각각 5,000억$ 이상의 경제적 손실을 입은 것으로 추정되어 한동안 경제발전이 지체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라크는 걸프전과 이라크전, 그리고 IS와의 내전을 걸쳐 후진국으로 추락했고 이란은 전쟁 피해를 복구하긴 했으나 신정 정치의 한계에 국제 제재에 시달리며 중진국에 머물고 있다. 현대전에서 마지막 규모와 역량있는 지역 강국들끼리 벌인 총력전이자 전면전에서 수십만 단위로 죽고, 백만 단위로 다치고, 경제 기반은 말아먹고, 사회 분위기와 외교적 입지는 만신창이로 몰아가면서 서로 막상 얻어낸거, 눈에 띄는 영토 변화는 하나도 없다는 얘기다.
특히 이란은 최근에 경제난과 물 부족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이란은 수원지 자체가 극히 부족하기 때문에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호메이니티그리스 강을 반드시 손에 넣겠다는 각오였지만 전쟁 전 국경으로 돌아가면서 '''티그리스 강은 이라크가 영유하게 된다.''' 이라크는 수자원의 중요성을 알고 이라크 전쟁 이후 미국의 지원을 받아 티그리스 강 일대에 댐과 저수지를 대량 확충하고 한국, 영국 등에서 해수 담수화 설비를 대량으로 도입했다. 그리고 이란으로 들어가는 물의 양을 이라크가 마음대로 조절하면서 이란은 석유를 판 돈으로 물을 사 오고 있다.

4. 뒷이야기



4.1. 전쟁 당사국들


이란은 더 이상 전쟁에 휘말리지 않은 채 피해를 빠르게 복구했으나 정권의 기본적인 속성은 변하지 않은데다 핵개발까지 추진하면서 국제적인 제재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현재까지 개발도상국을 유지하는 정도에 머물고 있다. 다만 북한처럼 핵 선제타격 권리니 핵탄두 소형화니 하는 소리는 하지 않고 대외적으로는 평화적 이용을 내세운다. 괜히 드러내놓고 추진해봐야 미국이 전면 개입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전쟁에서 악명이 높았던 이란의 광신적인 시아파와 소년병 문제도 국제 사회에 충격을 주었다. 이란에서 동원된 소년병들은 대부분 가난한 시골 지역 출신으로 '''9살에서 12살''' 정도의 어린 아이들이 많았다. 처음엔 신앙심이라는 이름으로 가족들에 의해 혹은 스스로 지원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전쟁 말기에 이란군의 병력 부족이 심각해지자 강제로 징집되었다. 심지어 도망을 막는답시고 줄로 묶어 전방으로 내몰렸고, 머리에는 순교자를 상징하는 흰 옷과 붉은 띠를 두르고 목에는 천국의 열쇠를 걸고 다녔다. 거의 무장조차 없는 소년병들은 사실상 정규군이나 혁명수비대 진격 전에 알라후 아크바르를 외치며 앞장서서 돌진하는 '''인간 지뢰제거기(!)''' 역할을 떠맡았다.[18] 때문에 전투가 끝난 곳마다 전장은 이란 아이들의 시체로 가득했고, 이 모습을 보고 경악한 이라크군 장교들도 많았다. 이란 이슬람 정권의 이런 악랄한 인권 탄압과 소년병 동원은 만화 페르세폴리스로도 고발되었다.
군비를 지원한 아르메니아계 부유층들은 이후 이란에서 더 큰 여러 경제적 이권을 차지하게 된다. 또한 이전과 달리 자국 내 소수 종교에 관대한 태도를 취하고 어느 정도는 이슬람 근본주의를 완화하여 국민여론을 달래는 등 최소한의 개혁도 수행하였다. 물론 진정한 의미로 관대한 것은 아니며 조로아스터교와 기독교는 의회 지분 보장 같은 '''보여주기용''' 관용을 받지만 현실은 은연중에 그리고 공개적으로 박해하는 무슬림들을 제지하지 않는 식으로 차별당하고 있다. 한술 더떠서 아예 '''모르몬 급 이단'''으로 인식하는 바하이교와 좌파 무신론자들은 아예 공개적으로 투옥과 학살의 대상이 되어 1988년 정치범 대학살로 큰 피해를 입었다.
이란의 산아 제한 정책도 이 시기에 시행되었다. 1970년대 6명대를 기록한 이란은 자연히 인구가 폭증하였다. 그렇지만 당시 세속화된 이라크나 요르단 같은 국가들도 사정이 다른건 아니긴 하다. 그런데 전쟁으로 인해 병원이 부족해지자 뒤늦게 심각성을 깨달은 이란 정부에서 산아 제한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덕택에 출산율이 빠른 속도로 하락하여 2000년대 들어서 1.8명대로 진입했다. 이란의 출산율 하락은 세계 역사에서 가장 빨랐다. 그 결과 2010년대 들어서는 오히려 출산 장려 정책을 펴고 있다.
승리를 자신하던 호메이니는 예상이 빗나가 막대한 피해만 입고 이라크 점령도 실패한 탓에 권위가 상당히 실추되었다. 게다가 반대파와 정적들의 공세에 지병까지 악화되어 은퇴를 고려할 정도로 실의에 빠졌고 결국 1989년에 사망했다. 물론 전쟁 중에 실용적인 관점에서 근본주의 정책을 완화시킨 것과는 별개로, 1988년에는 팔레비 왕정 시절에는 같이 콩밥 먹다가 혁명 과도기에는 대학가, 도시 노동자 사회 중심으로 넘버 원 정적으로 싸웠던 인민 무자헤딘, 투데 당, 인민 페다인 등 3만 명에 이르는 각종 정치범을 비밀리에 암매장하는건 잊지 않았다. 만화 페르세폴리스에서 '''이슬람 율법상 미혼 처녀는 사형에 처할 수 없으니 강제 결혼이란 명목으로 간수, 병사에게 강간 당한 뒤 처형 당한''' 여성 정치범들을 언급하는 대목이 있는데 이 때 벌어진 일이다. 교조주의적인 신정 독재자의 권력욕과 집단적 광기에 물든 혁명과 비인간적인 총력전이 빚어낸 참혹한 모습이다.
뿐만 아니라 실제 권력은 쥐뿔도 없었던 이집트 무슬림 형제단의 백면서생 사이드 쿠트브가 이슬람 근본주의의 사상적 기초를 깔았다면, 중동 국가들이 그나마 립서비스로라도 추구하던 세속주의적 보편 국가의 건설이란 명제에 실제 정치적 세력으로 시아파, 수니파, 알레비파, 마론파, 정교회, 쿠르드족 하는 식으로 잘개 쪼개진 종교-민족 집단들이 새로운 정치 단위가 되어 근대 국가를 해체하는 가능성을 구현한 호메이니와 이란의 이슬람 혁명과 이 전쟁의 그림자는 2010년대 후반에 와서도 충분히 현재진행형이다.
한편 이 전쟁에서 전비를 낭비한 사담 후세인은 막판에 지원을 끊고 이라크에 꾸준히 딴지를 놓던 쿠웨이트를 침공하게 되었다. 한때 후세인의 비공식 후원자였던 미국이 걸프전과 이라크전으로 이라크를 무너뜨리고 후세인을 처형한 것이 지금 보면 아이러니하다.

4.2. 국제적 여파


전쟁이 장기화되자 온갖 국가들이 갖가지 이유로 개입하면서 국제적인 대리전 양상으로 번져갔다.
우선 위에서 설명한 대로 이란의 이슬람 원리주의 혁명에 놀란 걸프만의 수니파 왕정국가들이 이라크를 후원하고 나섰다. 그리고 중동에서 가장 강력했던 친미동맹 팔라비 왕조를 상실한 미국은 당연히 이라크 편에 섰다. 다만 훗날 이란-콘트라 사건에서 드러나듯이 실제로는 어느 정도 양다리를 걸쳤다. 여기에 중동 지역에서 영향력 확대를 기도하던 소련도 이라크의 편에 섰다.[19] 그러자 소련에 대한 경쟁심을 불태우던 중국은 이란에 붙어서 스커드 미사일과 각종 군수품을 팔았으나 실제로는 중국도 이라크에 69식 전차만 2천대나 팔아먹는 등 양다리를 걸쳤다.[20]
1977년에 이스라엘과 평화 협정을 체결하면서 아랍 연맹 국가들과 멀어졌던 이집트는 관계 개선을 위해서 이라크를 지지했다. 그리고 반미, 반서방, 반터키, 반이스라엘을 외치는 새로운 시아파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이 나타나자 불안해진 이스라엘과 터키도 전쟁에 끼어들었다. 또한 1979년 이란 혁명으로 중동에서 미국의 위상이 실추된 자리를 차지하려던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유럽 국가들도 욕심을 내기 시작했다. 특히 영국과 프랑스는 이라크에 어마어마한 양의 무기와 군수물자를 팔아서 돈을 두둑히 챙겼다. 그냥 돈이 벌고 싶었던 브라질, 덴마크,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등도 끼어들었다. 카네이션 혁명을 겪으며 민주 정권이 들어선 포르투갈도 아프리카 앙골라, 기니비사우, 모잠비크에서의 식민지 독립 전쟁 종전 이후 남아도는 무기와 군수품들을 이란에 수출하며 이득을 남겼다.
여기에 반미, 반서방 정권의 탄생에 북한리비아가 쌍수를 들고 환영하면서 이란을 지원했고, 토건회사들이 철수하여 블루오션이 생성되자 한국까지 전쟁에 한 발 걸치는 등 그야말로 동네방네 다 끼어들면서 전쟁은 각국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국제적인 대리전'''이 되었다.
그런데 국제적인 대리전이라고 해도 중국, 북한, 시리아, 리비아, 포르투갈을 빼곤 '''이란 편이 없었다.''' 그나마 포르투갈조차 옆에 스페인이 이라크 편을 드는 바람에 유럽에서 찍혀가지고 이란 지원을 못했다.
미국, 소련, 유럽, 터키, 이집트, 사우디, 기타 걸프만의 아랍 국가들이 한마음으로 이라크를 지원했기 때문에 이란은 국제적으로 고립된 상황이었다. 이것은 이란 혁명으로 집권한 이슬람 정권이 극단적인 이슬람 근본주의, 반미/반소 노선을 걸으면서 스스로 국제적 고립을 자초한 결과였다. 혁명과 동시에 주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으로 미국 및 서방 국가들과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고, 이란의 문화와 제도를 중세 이전으로 되돌려 놓으려 하면서 국제적인 비난이 쏟아졌다. 또한 시아파 성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이슬람 혁명 수출을 공공연히 떠벌이니 여타 수니파 국가들과도 불편한 관계가 되었다. 이 때문에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도 개입하여 무자헤딘 세력을 호메이니가 지원하니 소련과 이란의 관계는 파탄나버렸다. 당시에는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이 소련에 병합된 상태였으므로 이란 북쪽에 소련과 국경을 맞댄 상태였다. 이 상황에서 호메이니는 소련-아프간 전쟁에서 아프간 무장세력을 지원했고 소련과 척을 지게 되었다. 안 그래도 서쪽에서는 이라크와 전쟁중인데 북쪽에서는 소련과 척을 졌으니 이란은 서쪽과 북쪽에 군대를 깔아야 하는 양면전선이 형성됐다.
또한 외세는 다 필요없다는 호메이니의 기적의 외교술도 한몫하였다. 다른 주변국들은 당시 혁명 구호를 기존 정권을 전복시켜 시아파가 주도권을 잡은 신정부를 수립하고 이란의 위성국으로 삼는다는 식으로 이해하는 게 당연했다. 그리고 실제로 호메이니의 의도도 주변 이슬람 국가들을 시아파 신정 국가로 채워서 '''사실상 이란의 괴뢰국화를 하는 것이었다'''. 2010년대에는 수니파 극단주의를 표방하는 IS를 사우디가 지원한다는 소문이 나돌고, 이라크에 시아파 정부가 서고, 시리아 내전에서 시아파 정부가 수성에 성공하면서 이란이 주변국에 혁명수비대를 지원하며 영향력을 키워 지역 맹주로 다시 올라선 것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은 '''이라크의 민간인 학살과 화학무기 사용도''' 묵인하다가 후세인이 몰락한 뒤에야 갑자기 불쌍한 시아파 쿠르드족 운운하며 입 싹 닫고 후세인만 천하의 개쌍놈으로 만들어버렸다. 물론 후세인은 민간인을 상대로 사린, 타분, VX 등을 사용하여 '''최소 5,000여명의 사망자를 냈으며''' 약 7,000~10,000여 명의 중독자에게 영구적인 장애를 야기했다.[21] 또한 쿠르드족에게도 화학무기를 사용하여 약 30,000명의 사상자를 내기도 하였다. 서방은 당시 이란의 이미지 때문에 이 모두를 묵인했다.[22] 이놈이나 저놈이나 10살짜리 아이들이 인간 지뢰제거기로 '순교'하는 중 돈계산이나 하고 있었다는 전형적인 전쟁사의 파파괴스런 일면이다.
이 전쟁으로 이득을 본 건 미국, 한국, 유럽과 이집트, 브라질, 그리고 몇몇 아랍 부국 등이었다. 이들은 피묻은 돈으로 배를 불렸음에도 이 전쟁에 대한 책임은 전혀 지지 않았다. 특히 프랑스는 이라크에 원자로를 시작으로 쉬페르 에탕다르 전폭기와 엑조세 대함 미사일, 헬리콥터, 자주포 등 소련 다음으로 많은 양의 무기를 팔아먹어[23] 피묻은 돈과 석유로 배를 불렸으면서도 나중에 악역은 미국에게 떠맡길 수 있었기에 이 전쟁의 최대 수혜자로 손꼽힌다. 이탈리아는 대금은 받았으면서 전쟁을 핑계로 이라크에서 주문한 호위함 5대를 인도하지 않고[24] 자국 해군에 편입시켰다. 독일(서독동독 둘 다)과 이집트, 스위스H&K MP5나 잉여 Mi-8같은 자국 총기와 헬기를 엄청 팔아먹었고, 덴마크터키도 이라크에 의약품과 무기류를 팔았다. 아르헨티나는 이란과 우라늄을 거래하기도 하였다. 가장 큰 스폰서였던 사우디아라비아쿠웨이트는 말할 것도 없다. 소련중국, 브라질도 무기를 팔아서 두둑하게 챙겼다. 영국페니실린 판매로 짭짤한 수입을 올렸는데, 이라크의 부정부패로 유통기한이 지난 페니실린을 수입해 수십명이 죽어버리는 사건이 벌어졌다. 격분한 후세인은 1982년 3월 각료회의 도중 보건장관 리야드 이브라힘을 직접 총살하였다.
이 때 이란을 크게 지원한 국가 중 하나가 이스라엘이다. 이라크를 가장 큰 위협으로 느끼던 이스라엘은 전쟁 중에 오시라크 원자로 공습을 실시하기도 했다. 또한 이츠하크 라빈의 동의하에 F-4E와 호크 미사일의 부품과 관련 기술고문단을 비롯하여 토우와 사이드와인더 등의 유도무기를 은밀히 제공하였다. 더불어 이스라엘 업자들이 이란 공군의 F-14의 부품 밀수에 관여하기도 하였다.
네덜란드도 이란 해군에 비무장 선박들을 계속 팔았다. 혁명 이전에 팔레비가 네덜란드에 발주한 물량들도 상당히 많아서였는데 어차피 비무장 선박이었으므로 수출 면허는 필요하지 않았다. 네덜란드의 다멘 조선소는 지원선과 예인선, 급수선들을 이란 해군에 팔았고 이란 해군은 이를 요긴하게 쓴다. 현재 이란 해군은 네덜란드제 지원선에 대함미사일을 장착해 대함미사일 투발 플랫폼으로 쓰고 있다.
또한 상대 국가의 유전을 전략적으로 파괴함에 따라 해양 오염도 심각했다.
보통 중동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유가가 폭등하기 마련인데, 이 전쟁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초기에는 이란과 이라크의 원유 공급 중단으로 석유시장이 요동쳤으나, 다른 OPEC 국가들의 공급 여력이 충분하여 금새 안정세로 돌아섰다. 오히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재정난에 시달리던 이란과 이라크가 석유를 헐값에 팔아 유가가 오히려 폭락하였다. 이는 두 나라 재정에 더욱 악영향을 미쳤고 특히 상대적으로 국력이 부실했던 이라크의 타격이 더 컸다.
한편 OPEC의 유가 합의가 무너지고 저유가가 계속되자 이것이 대한민국 경제에 큰 호재로 작용하였다. 당시 저유가에 저달러, 저금리까지 맞물리면서 단군 이래 최고라던 대한민국의 '''3저호황'''이 시작된 것이다.

4.3. 한국에 미친 영향


대한민국 또한 양다리를 걸쳐 이라크에선 건설 공사를 하면서, 이란에는 전투기 부품, 차량, KH-179 곡사포 등을 팔았다.[25] 중동 석유에 국가의 생존이 달려있기 때문에 산유국인 두 나라 모두와 우호적인 관계를 원했기 때문이다. 특히 이란군은 1979년 이슬람 혁명 이후 반미 노선으로 팔라비 왕조 시절 사용하던 미제 장비를 운용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반미, 반서방 외교를 표방하니 대부분의 친미국가들은 대이란 무기 금수 조치를 취했는데, 유일하게 한국만이 '이란의 석유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무역을 계속한 것이다. 특히 전쟁 기간 내내 중계 무역으로 상당한 이득을 취했으며 미국도 이를 특별히 막지 않았다.[26] 동시에 이라크에서는 다른 나라 기업들이 모두 철수하는 와중에 끝까지 버티면서 건설공사를 진행했다. 물론 당대에도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국내의 건설업체와 석유업체는 당장의 돈과 석유 앞에서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정부에서도 외화 때문에 그냥 쉬쉬했고, 언론도 마찬가지로 난리통에도 작업을 끝까지 진행하는 근로자들의 미담(?)만을 전할 뿐이었다. 이것이 이란에 엄청난 임팩트를 남긴 덕분에 이후에도 한국과 이란은 경제적으로 우호 관계를 맺고 있다. 당시 안기부국군정보사령부에서 이를 이용해 북한의 장사정포와 각종 무기를 비밀리에 입수하여 국방과학연구소에서 분석했다.
한국과 이란의 이런 관계는 미국1984년까지 사실상 이란-이라크 전쟁에 개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당시 로널드 레이건 정권은 레바논에서 베이루트 해병대 막사 폭파사건이 터진 데다 이란에 약점 잡힌 상태이기도 한 탓에 겨우 애꿏은 그레나다에나 화풀이할 정도였고, 레이건은 호메이니보다는 리비아무아마르 알 카다피를 더욱 미워했다.
전쟁 당시 한국은 교전 지역에서 아래와 같은 피해를 입었다.
  • 1982년 8월 9일 이란 호메이니 항에서 화물을 내려놓고 출항하던 삼보 베너 호가 이라크군의 함포 사격에 침몰, 9명의 선원이 사망 혹은 실종되었다.
  • 1984년 7월 1일 같은 장소에서 입항하던 원진 호가 이라크군 공습을 받아 침몰하였지만 다행히 사망자는 없었다.
  • 1984년 9월 16일에는 쿠웨이트를 출발한 유조선 로열 콜롬보 호가 스틱스 대함 미사일 공격을 받았으나, 다행히 불발이라 선교에 미그기 만한 불발탄이 박힌 채로 귀환하였다.
  • 1988년 7월 1일에는 이란 캉간에서 가스 정유소를 건설하던 한국 대림산업 공사 현장이 이라크군 전투기의 공습을 받아 한국인 근로자 13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있었다. 정부에서는 조사단을 파견하는 등의 대책을 펼쳤지만 전쟁 중인 국가에서는 감수해야 할 리스크일 뿐이라는 결론만을 얻었다.
당시나 지금이나 화물선, 유조선 등은 조세회피 등의 목적으로 국적을 라이베리아같은 나라에 등록해놓는 경우가 많은데,[27] 이런 식으로 해외 국적의 배에 탑승했다가 봉변당한 한국인 선원들도 꽤 있었다. 이들의 경우 한국 국적이 아닌 배에 탔던지라 위의 사례들처럼 명확하게 기록되지를 않아서 정식 기록에는 없고 당사자끼리 알음알음 아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김포국제공항엔 '''민항기'''인 이란 항공 보잉 747 카고가 거의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와서 부품(주로 F-4 팬텀 부품)을 담고 이란으로 돌아갔다. 이러한 일은 아무래도 미국의 방조도 있었지만, 북한이 이란에 무기 판매를 시도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를 막기 위해 청와대가 나선 것도 있다.[28] 당시 판 무기가 꽤 많았는데 2011년에는 이란이 KH179 155mm 곡사포로 차륜형 자주포를 만든 것까지 확인되었다. 또 한국의 K-111 ¼톤 트럭을 대량으로 수출하기도 했다. 수출한 분량이 대략 1만4천대 가량인데 당시 산업 합리화라는 명분의 자동차공업 통합조치 정책으로 인해 위기에 처해있던 기아자동차가 위기를 넘기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전쟁으로 다른 국가의 건설 회사들은 안전에 대한 우려로 모조리 철수하는 상황에서 국내 건설 회사들은 악으로 깡으로 버텼으며, 그 결과 1988년 위에 기록한 인명피해가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공사를 완료했다. 폭탄을 맞아가면서도 버티는 한국 건설회사들을 보며 이란 지도부가 감동받아 이후로도 거래를 계속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5공 초기의 경제 안정에 크게 기여했다. 1979년 일어난 제2차 오일 쇼크의 영향으로 당시 한국은 커다란 경제 위기에 봉착했고, 1979년~1981년의 커다란 정치적 변혁으로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건설과 수출을 통한 경제 발전과 석유의 안정적 공급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이란-이라크전으로 잡을 수 있었다. 전쟁 당시의 우호적 관계 덕분에 이란의 한국에 대한 인식은 지금도 좋은 편이어서, 호메이니가 치를 떠는 왕조 시대에 명명된 테헤란의 서울로는 이슬람 공화국인 지금까지도 존속되고 있다.
그리고 이라크와도 교역을 정상적으로 지속했으며, 전쟁 와중인 1982년에 방콕, 쿠웨이트를 경유하는 바그다드-김포 노선을 대한항공에서 취항했다.[29] 바스라에서 현대건설 직원들이 말 그대로 공사 현장에 포탄이 떨어지기 직전까지 작업을 하다가 대피한 사례까지 있었다. 다만 이라크가 황폐화되면서 현대건설이 건설 대금을 받지 못하는 바람에 결국 부도까지 갔다는 후문도 있다.
북한은 이 전쟁 때 이란천마호, 곡산 자주포를 판매하고 군사적으로 지원함으로서 긴밀한 관계를 맺는 계기가 된 반면 1968년부터 북한과 단독 수교를 맺어왔던 이라크는 북한이 적대국인 이란을 지원하였다는 이유를 들어 1980년 북한과 단교하였다.

4.4. 대중 문화


축구판에서 더비 매치가 대부분 그렇겠지만 이란 VS 이라크의 A매치는 서아시아권을 대표하는 더비로도 유명하다. 바빌론 VS 페르시아 구도로 5000년 넘게 해묵었을 정도로 갈등이 오래되었기 때문에 '''한일전 따위는''' 우습게 보일 정도로 늘상 치열한 난투극같은 혈투가 일상적으로 벌어진다. 2015년 아시안컵 8강전 경기처럼 집단적으로 모여서 크게 언쟁을 하면서 강하게 서로 밀치기도 하는 정도면 심하다. A매치 중에서도 꽤 권위있는 아시안컵에서 이 정도 수준의 벤치클리어링이라면 정말 보기 힘든 상황이다. 아니나다를까, 2019년 아시안컵에서도 같은 조로 만났고 이번에도 여지없이 집단으로 난투극을 벌였다.
팝 메탈 밴드인 화이트 라이온은 이 전쟁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은 When the Children Cry라는 곡을 발표하여 더블 플래티넘을 기록하기도 했다. 팝 메탈 및 LA 메탈이 항상 놀자판이고 사회적인 성찰이 없다는 의견에 반론으로 제시되는 곡 중 하나이기도 하다.
[1] 1980년 당시 이라크의 1인당 국민소득은 3900달러로 한국의 두배를 훌쩍 뛰어넘었고 스페인과 비슷했다.[2] 그때나 지금이나 이라크는 국민 투표에서 바로 시아파 정권이 설 정도로 시아파가 다수다. 시리아는 정반대로 아사드 정권은 시아파 계열의 알라위파지만 다수는 수니파다. 그래서 IS는 물론이고 반군 대부분이 수니파.[3] 이것이 중동 세속주의 군사 독재 정부들의 공통점이었고, 은근히 평가가 나쁘지 않았던 이유기도 하다. 샤리아에 기반한 신정이나 왕정보다는 군사 독재라도 정치 체제로서는 진보한 형태라고 보기 때문이다.[4] 이때 이라크군은 중동에서 10위권 내에 들만큼 강력한 군사력을 자랑했다.[5]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 제국의 생각과 똑같다. "우리가 상대방 뺨싸다구를 맛깔나게 후리면 저쪽이 협상에 나올테고 적절히 삥뜯고 마무리하면 된다."는 생각이다. 미국이나 이란이나 똑같이 협상을 받을 생각이 1도 없었다는 게 문제.[6] 이란 영토는 이라크의 4배이고 1980년 개전 당시 인구는 1300만 대 3900만으로 3배였다.[7] 참고로 후세인은 젊은 시절 군부 고위층과의 인맥을 발판으로 경력을 쌓아올렸지만, 정작 군 복무 경험은 전혀 없고 정보기관의 수장으로 국내 반체제 세력 탄압에 큰 공을 세워서 출세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일일히 작전에 관여했으니, 전쟁이 엉망진창이 된 건 당연지사. [8] 이란 공군이 이런 스트라이크 패키지를 통해서 장거리 폭격을 성사시킨 것은 팔라비 왕조 시절 미국이 훈련시켜 준 장교, 조종사, 지원 인력들의 수준이 상당히 높았다는 증거이다.[9] 다만 이란군은 이때 HK G3MG3가 제식 무기였다.[10] 심지어 이란은 고아나 정치범과 그 식구들까지 지뢰 제거에 썼다. 물론 이라크도 쿠르드족 포로들이나 정치범을 똑같이 써먹었기에 둘 다 국제적으로 욕 먹었다.[11] 물론 미국은 팔라비 왕조 전복으로 이란을 증오하고는 있었다. 그러나 이란-콘트라 사건이나 동맹국과 이란의 무역을 막지 않은 것을 보면 이라크를 전폭적으로 지원한 것은 또 아니다. 이란-콘트라 사건 등.. 2010년대의 중동 전쟁판을 보아도 종교와 정치와 민족주의가 다 버무려져 있지만 직접 피흘리고 싸우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한쪽을 편들고 지원하는 이들은 그렇게 '필사적'이지는 않고 각자 주판알을 굴리는 모양새다.[12] 물론 이란의 쿠르드족은 독립을 절대 인정하지 않고 탄압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로 2017년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IS와의 전쟁이 마무리되어갈 때 이라크에서 쿠르드족이 자치 정부의 주도 아래 주민 투표를 실시하고 분리 독립을 시도하자 이란, 터키, 시리아,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모로코 등 중동 국가들 대부분이 중동 지역 내 안정을 해친다는 명목으로 반대하며 이라크 내 쿠르드 지역을 봉쇄하고 제재 조치를 단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르드족이 독립을 철회하지 않자 이라크는 2017년 10월 키르쿠크 등 쿠르드 자치구 일부를 공격하여 독립 시도를 무력으로 저지했다.[13] 그 유명한 케미컬 알리[14] 영국 드라마 하우스 오브 사담에서 종전 이후에 이 사건을 얘기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부총리 겸 외무장관인 타리크 아지즈가 "국제연합에서 우리가 쿠르드족을 학살한 것을 가지고 말이 많다."고 넌지시 경고하자 알리 하산 알 마지드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전쟁 중에 뭘 바란 거요? 우리가 놈들에게 꽃이라도 보내줄 줄 알았나?"라며 코웃음을 친다. 그리고 20여년 뒤 교수대로 끌려갔다. 사담 후세인과 케미컬 알리는 교수대에서 생을 마감했지만, 아지즈는 사형 선고를 받았을 때 70세가 넘어 아랍 풍습에 따라 무기수로 살다가 2015년에 '그나마' 평안하게 옥사했다. 게다가 알리는 한 술 더 떠서 교수형 과정이 심각하게 잘못되어 '''목이 잘려나가버렸다.'''[15] 심지어 2차 대전에서 쓰이다 몇몇 국가에 치장 물자로 남아있었던 유물급 M36 잭슨, M36B1, T-34-85, M4 셔먼, 처칠 전차 이탈리아제 소형 전차 L3 탱캣 등까지 관리하고 있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2005년 10월 31일 이라크 전쟁 중 티크리트 인근에서 미군에게 버려진 이들 구형 전차가 발견되었다. 이 장비들은 대부분 신용거래로 사온 것으로 이라크 경제가 더욱 피폐해져 다시 쿠웨이트에 눈을 돌리게 된다.[16] 이 때 활약한 군이 후에 공화국 수비대가 되어 후세인의 친위대 역할을 하였다.[17] 이 공격을 기점으로 이란 호전파들의 입지가 크게 위축된다. 이들은 안전한 후방에서 전쟁의 당위성을 주장하며 정전에 반대했으나 테헤란이 미사일 공격의 대상이 됨으로써 호전 여론은 급속도로 위축되었다. 당시 이란 노인층의 호전 여론은 '전쟁은 노인이 일으키고 전쟁터에서 죽는건 젊은이다'라는 속설의 실제 사례로 꼽힌다.[18] 조셉 커민스, <The War Chronicles> 2권, 409P.[19] 다만 소련도 양다리를 걸쳤다는 주장이 있다. 이란에 비밀리에 군수품과 무기기술을 제공하고 이란이 보유하고 있던 F-14와 피닉스 미사일 같은 최첨단 미국제 무기를 넘겨받아서 분석했다는 썰이다. 이란은 미국의 군수지원이 끊어졌음에도 부품을 자가복제하면서 F-14를 30년 넘게 굴리고 있는데, 여기에 소련의 지원이 있었다는 추정. 하지만 소련 붕괴 이후에도 관련 자료들이 나오지 않은 점을 들어서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가 다수다.[20] 이 69식 전차 중 상당수는 몇 년 후 걸프전에서 다국적군 기갑부대에게 거의 사격 표적에 가깝게 박살나서 중국군에 큰 충격을 주었다. 중국군 기갑전력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69식과 그 개량형 전차들이 서방측 3세대 전차인 M1 에이람스와 챌린저1에게 일방적으로 박살난 것이기 때문이다.[21] 이 세 화학무기는 모두 신호 전달 매개물의 억제 효소인 아세틸콜린 에스테라제의 활성을 억제하며 최종적으로 호흡근육 마비에 의한 사망을 야기한다.[22] 출처 : John Pitchel, Terrorism and WMD, p.46[23] 후세인은 중동전쟁 경험으로 소련제 항공기에 대한 불신감이 강했기 때문에 미국의 개입 이전부터 유럽제 항공기를 사들였다. 이란은 프랑스가 이라크에 무기를 공급할 경우 유럽 원유 수송로의 중추인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할 것이라고 선언했고 이에 맞서 이라크는 이란의 항만 지역에 기뢰를 부설했다. 위에서 언급된 기뢰가 이 때 나온 이야기다.[24] 군함 거래에서는 전쟁 전 구매를 결정했으되 인도되지 않은 물건은 전쟁중에는 안 넘기는 것이 관행이다.[25] 당시 한국이 이란에 제공한 호크 지대공 미사일 일부는 공대공 미사일로 개조되어 F-14에 탑재되기도 하였다.[26] 나중에 이란-콘트라 사건으로 드러나지만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정권도 이란과 뒷거래를 하고 있었다.[27] 이란-이라크 전쟁 후반기에 이란과 이라크 양국 모두가 서로의 보급을 끊기 위해 호르무즈 해협을 지나가는 배를 국적과 상관없이 무차별적으로 공격해 격침시키곤 했는데, 이를 영어로 tanker war, 즉 화물선 전쟁이라고 부른다. 이때 격침당한 배의 국적도 찾아보면 위에서 언급한 이유 탓에 라이베리아 국적의 배가 가장 많았다.[28]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남북한은 제 3세계에 대한 외교 경쟁 또한 치열하게 전개했다.[29] 그 유명한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도 이 노선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