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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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기영의 캐리커쳐'''
1900년 1월 9일 ~ 1980년 8월 20일
성악가(테너)이자 작곡가. 충청남도 청양군 출생.
학교법인 중동학원의 교가, 이화여자전문학교의 교가 등 현 강남 8학군의 많은 학교들의 교가를 써냄.
공주시 영명학교와 배재학당을 다녔고, 배재학당에서 악보 읽는 법과 코르넷 연주법을 배우면서 음악에 입문했다. 1917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 재학 중 선교사로부터 음악적 재질을 인정받아 미국 유학의 행운을 얻었다.
1919년 연희전문학교를 다니던 중 3.1 운동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퇴학을 당한다. 그해 5월에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중국에 건너가 동북지방의 류하현에 있던 신흥학교와 광저우에 있는 예비군관학교에 다녔으며, 난징대학에서 고학 하고, 상하이에 있는 독립신문사에서 사무원도 했다.
1923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조교를 지내다가 1926년 미국으로 건너가 음악학교에서 정식으로 음악공부를 하였고, 1928년 귀국해 1932년까지 이화여전 성악과 교수로 재직했다. 이때 이화여전 합창단 지도를 맡아 교내 발표와 전국순회연주활동을 했다. 그리고 재직 시절에 이화여전 교가를 작곡하였다. 이화여자대학교는 이 노래를 현재 교가로 사용 중.#
데뷔작으로 <그리운 강남>(1928)을 작곡해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수십편의 가요와 동요를 작곡하였다. 가요 <작별>(일명 "오 내사랑 오 내사랑",1933)과 동요 <조선의 꽃>은 이 시기 그가 쓴 대표적인 곡들. 어린이날 노래를 작곡하기도 했는데, 보통 사람들에게 알려져있는 어린이날 노래와 곡조가 다르지만 윤극영 작곡 노래보다 1년 앞서 발표되었다.#
1931년에는 전통민요를 합창으로 편곡한 <조선민요합창곡집>을 발간하였으며, 같은 해 콜롬비아 레코드사에서 민요합창곡을 들여왔다. 그리고 1940년대에는 민요를 바탕으로 <콩쥐팥쥐>(1941), <견우직녀>(1942), <은하수>(1943), <에밀레종>, <장화홍련전> 등과 같은 새로운 종류의 음악극을 만들었다.
8.15 광복 직후에는 서울특별시에서 음악건설본부 작곡부장, 조선음악가동맹 부위원장을 역임하면서 <해방전사의 노래> 외 수 편의 노래를 썼다. 1947년 7월 근로인민당의 음악부장을 하였는데 당수 여운형암살되자 추도곡을 작곡해 지휘했다는 이유로 음악 활동을 중지당했다.
1950년 월북하여 국립예술극장 작곡가로, 평양음악대학 성악 교수로 있으면서 후진양성 사업과 창작활동을 했다. 음대 교수로 1957년에 예술가 급수 1급을 받았다.
사생활에서 간통이라는 흑역사가 있다. 이화여전 음악과 교수로 재직하던 중 제자인 김현순과 바람이 나서, 임신 중인 본처 이성규와 어린 두 딸을 버리고 김현순과 북한으로 월북해 버렸다(...) 그는 당시 성악가로도 유명했기 때문에 당연히 세간에 큰 이슈가 되었고, 안기영의 공주영명학교 동창[1]인 소설가 방인근은 이 사건에서 영감을 얻어 《방랑의 가인》이라는 소설을 집필하기도 했다.
안기영과 김현순 사이에서 태어난 딸 안남식은, 북한에서 '공훈배우' 칭호를 받는 등 이름난 피아니스트라고 한다.
[1] 게다가 방인근도 배재고보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