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레이 사하로프

 



<color=black> '''안드레이 사하로프
Andrei Sakharov'''

<colcolor=black><colbgcolor=black> '''이름'''
안드레이 드미트리예비치 사하로프
Андре́й Дми́триевич Са́харов
'''출생'''
1921년 5월 21일
소비에트 연방 모스크바
'''사망'''
1989년 12월 14일 (향년 68세)
소비에트 연방 모스크바
'''국적'''
[image] 소비에트 연방
'''직업'''
핵물리학자, 반체제 인사, 인권 운동가
'''학력'''
모스크바 대학교 중퇴
'''배우자'''
클라브디야 비히레바 (1943년–1969년) 옐레나 본네르 (1972년–1989년)
1. 개요
2. 핵물리학자
3. 인권운동가
4. 정치인
5. 평가


1. 개요


소련의 핵물리학자이자 인권운동가, 정치인. 이고르 쿠르차토프와 함께 소련의 핵개발를 주도해서 '''소련 최초의 수소폭탄'''을 개발했고 토카막 같은 핵융합 발전 주요부품을 개발해 핵물리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1960년대 들어서는 무기개발에 회의감을 느끼고 인권운동에 뛰어들어서 한때 모든 명예를 박탈당하고 가택연금에 처해지기도 하였다. 1975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고르바초프의 집권으로 개혁개방의 시대가 도래하자 다시 인권운동을 재개하였으며 1989년 소비에트 최고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장래가 촉망받는 핵물리학자'''와 '''국가의 미움을 받는 반체제인사'''라는 두 가지 삶을 살며 소련 핵개발과 인권운동 두 영역에 걸쳐 족적을 남긴 거장이다.

2. 핵물리학자


안드레이 사하로프는 1921년 5월 14일 모스크바에서 출생했다. 사하로프는 1938년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물리학부에 입학, 1942년 졸업했다. 그는 1944년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우수한 실력으로 당시 소련 과학의 거물이었던 이고르 탐 교수[1]에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후 1947년 대학원을 졸업하면서 그의 추천을 받아 모스크바 에너지 연구소(МЭИ)에 들어갔다.
1948년부터 1968년까지 약 20년 동안 수소폭탄 개발에 착수했고, 이고르 쿠르차토프 등과 함께 소련 핵무기 계획에 참여, '''소련 최초의 수소폭탄'''(РДС-6с)을 설계했다.
당시 그가 핵개발에 끼친 공로는 지대해서, 소련 입장에서 그는 미국의 오펜하이머와 비견되는 인물이었다. 이러한 그의 성과에 대한 보상으로 소련은 그에게 사회주의노력영웅 훈장을 3차례나 수여했고, 이 밖에도 스탈린상과 레닌상, 레닌훈장까지 수여했다. 이는 당시 소련에서 그가 얼마나 아끼는 인재였는지 알 수 있다.
이때만 해도 상대 진영의 라이벌격인 에드워드 텔러와 비슷한 매드 사이언티스트 기질이 있었는지,[2] '100메가톤 수소폭탄을 장착하고 적 항구로 돌입하여 폭발해 적 함대와 항구, 인근 해역을 동시에 날려버리는 원자력 추진 순항핵어뢰'를 만들자고 해군 제독에게 주장했다가 '그건 너무 무자비한 대량학살무기'라는 비판을 들었다는 일화가 있다.# 그러나 2015년 러시아가 실제로 원자력 추진 순항핵어뢰를 개발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2019년 실전배치되었다. 핵 수중드론 포세이돈 항목 참조.
현재 핵융합 발전을 위한 장치로 많이 연구되고 있는 토카막 또한 사하로프와 이고르 탐 박사가 최초로 고안하였다.

3. 인권운동가


이렇듯 마음만 먹으면 부와 명예를 가지고 당시 소련에서 그누구보다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었던 그가 택한 것은 다름아닌 '''인권운동'''이었다.
1950년대 말부터 서서히 반체제 성향을 드러내기 시작한 그는 1955년 소련 아카데미에서 트로핌 리센코의 횡포에 반대하는 300인의 편지(Письмо трёхсот), 1966년 스탈린의 재평가를 비판하는 25인의 편지(Письмо двадцати пяти)에 서명하면서 대대적으로 정부에 반기를 들었고, 1960년대 말 즈음에는 소련 인권운동의 주요 지도자가 되어있었다.
당연히 소련 입장에서는 국가의 핵개발에 지대한 공헌을 한 과학자가 반체제 운동의 거물이 되버린 대단히 난감한 상황이었다. 만약 그가 다른 반체제 인사였다면 조용히 굴라그로 보내거나, 지명도가 있으면 눈치껏 서방으로 출국하도록 허락해주었겠지만, 수용소에 보내자니 소련 최초의 핵폭탄을 만든 영웅을 감옥에 보내버리는 꼴이었고, 그렇다고 소련 핵무기를 누구보다 더 잘 알고있을 과학자가 서방으로 망명하는 건 도저히 허용할 수 없었다. 결국 소련 정부가 국가를 망신시키지 않는 선에서 할 수 있었던 일은 기껏해야 그를 신문에서 비난하거나 사적으로 경고를 주는 것 밖에 없었다.
하지만 소련 입장에서는 참으로 골치아프게도, 그는 이러한 지위 때문에 오히려 과학자만큼이나 중요한 '''반체제 인사'''가 되어버렸고, 1970년 다른 반체제인사들과 함께 '모스크바 인권위원회'라는 인권단체를 설립하고, 1974년에는 소련 정치범의 날 선언, 1977년 소련 내 사형제 폐지를 주장하며 인권활동을 이어갔다. 특히, 1975년 사하로프가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자, 소련 정부는 이제는 인권운동의 상징이자 반체제 인사들의 거물이 된 그를 더 이상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결국 1980년, 그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며 소련정부를 비난하자 소련정부는 그를 1980년 1월 22일, 재판없이 고리키 시[3]의 한 아파트로 유형보내 그의 가족을 가택연금시켰다.[4] 같은 해, 소련 최고회의에서는 그가 받은 상을 '''전부 박탈해버렸다.'''
당시 한 신문에서 낸 평가는 그가 소련 정부에게 얼마나 미움받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정신박약아이자, 선동꾼인 사하로프는 자신의 모든 반역행위로써 자신을 인민과 국가의 반역자로 몰아넣었다.'''
-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 1980년 2월 15일
그렇게 한 때 조국의 핵개발을 성공시킨 미래가 촉망받던 '''사회주의노력영웅'''은 '''인민의 반역자'''로 그동안 누리던 모든 영예와 명성을 박탈당해야 했다.

4. 정치인


그럼에도 사하로프는 이에 굴하지 않고 1981년과 1984년 두 차례에 걸쳐 단식투쟁을 벌였다. 많은 국가에서는 그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가 열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정부는 그에게 오는 편지도 차단해버리면서 그를 아예 사회에서 배제시켰다.
이렇게 외로운 투쟁을 계속하던 도중, 1986년 12월 16일 모스크바로부터 전화가 한 통 걸려온다. 바로 고르바초프가 그에게 사면을 내린 것이었다. 당시 서방과 유화정책을 결심한 고르바초프는 그를 사면시키면서 개혁의지를 보여주고자 했고, 글라스노스트의 일환으로써 그를 사면시켰다. 유형에서 석방된 이후 1989년에 소련 인민대표회의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첫 인민대표회의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는 회의에서 당시 소련에서 뜨거운 이슈 중 하나였던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소련군이 자행한 전쟁범죄를 비난했다. 그러자...

'''수많은 의원들은 그에게 온갖 야유와 비난을 퍼부으며 그의 연설을 중단시켰다.'''
당시 이 영상은 텔레비전으로 '''소련 전역에 생중계'''되었고, 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이를 보다 못한 인민대표 중 한 사람이자 모스크바 역사기록연구소 총장이었던 유리 아파나시예프(Юрий Афанасьев)가 회의장에서 '공격적인 청취대중'이라는 단어로 인민대표들이 체제와 반대되는 의견을 야만적으로 침묵시키려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비난했다.
이후 그는 의원으로 활동하면서 개혁파 의원들과 함께 인권, 느슨한 연방제에 관한 내용을 담은 헌법을 기획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랜 유형생활과 정치활동에서 얻은 스트레스가 악화되었는지, 결국 정치활동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1989년 12월 14일 별세해 보스트랴코보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image]
사하로프의 장례식.

5. 평가


사하로프의 삶은 과학자로써와 인권운동가 모두로써 흔치않은 삶이자, 당대 어느 누구도 흉내내기 어려운 삶이었다. 핵개발을 주도한 과학자로써 부와 명예를 누리며 국가에 순종적으로 살 수 있었지만, 이를 거부하고 자신의 신념에 따라 인권활동을 개진했으며, 당국의 압력이 심해졌을 때도 당국과 대립을 포기하고 침묵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1980년 유형당하기까지 소련의 인권을 위해 투쟁했다. 이는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과학자로 세운 업적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안겨 준 국가로부터 탄압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과학자로써 양심을 지키며, 조국의 탄압받는 인권을 생각한 몇 안되는 영웅일 것이다.
오늘날 그는 소련 및 러시아 인권운동의 상징이 되었고, 유럽의회에서는 1988년 그의 이름을 딴 사하로프상을 제정해 넬슨 만델라, 아웅산 수지, 말랄라 유사프자이 등 수많은 인권운동가에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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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트 사이드 갤러리에 그려진 그의 초상화.


[1] 훗날 함께 토카막 장치를 제안하기도 했다.[2] 그나마 나중에 평화운동으로 전향한 사하로프와는 달리, 텔러는 일생동안 줄곧 핵무기를 비롯한 군비 증강을 옹호했다. 1980년대에는 레이건 당시 미 대통령이 주창한 전략방위구상(SDI. 일명 '스타워즈')도 공개 지지했다.[3] 오늘날의 니즈니 노브고로드[4] 고르바초프는 이것이 안드로포프의 뜻임을 암시하는 내용을 자서전에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