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레산드로 스트라델라

 


[image]
'''Alessandro Stradella'''
'''출생'''
1639년 4월 3일 [image] 교황령 네피
'''사망'''
1682년 2월 25일(43세) [image] 제노바 공화국 제노바
'''직업'''
작곡가, 가수
1. 소개
2. 생애
2.1. 초기와 로마시절
2.2. 베니스에서의 애정행각
2.3. 제노바에서의 최후
3. 평가
3.1. 음악
3.2. 후대의 이미지
4. 주요 작품


1. 소개


알레산드로 스트라델라(Alessandro Stradella, 1639-1682)[1]이탈리아 출신의 음악가로 바로크 중기의 가장 중요한 작곡가 중 한 사람이다. 오페라나 오라토리오를 비롯한 성악곡을 주로 작곡했지만, 기악음악 분야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작품들을 남겼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음악보다도 후술되는 방탕하고 극적인 삶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2. 생애



2.1. 초기와 로마시절


출생연도가 불확실한 것만 봐도 알 수도 있듯이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현재까지 확인된 사항은 그가 일반적인 음악가들과 달리 투스카나의 귀족 집안 출신이었다는 것과 볼로냐에서 교육을 받았다는 것 정도이다. 음악 교육을 어떻게 받았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대략 20세 무렵에는 이미 재능 있는 음악가로 나름 알려져 있는 상태였다. 음악경력 초기에 그는 성악가로 활동했는데, 한동안 그의 성악가로서 능력이나 명성이 당대 최고의 수준이었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스트라델라가 살던 시절에는 카스트라토 가수들이 득세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이런 평가는 많이 과장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1665년 경부터 본격적인 전업작곡가 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1667년 로마로 이주하였다. 로마에서 스트라델라는 스웨덴 여왕 크리스티나[2]의 전속 작곡가로 활동하면서 주로 종교음악을 많이 작곡하였다.
여왕의 전속 작곡가로 활동하는 것 외에도 그는 가수로 오페라 무대에 오르기도 했고[3] 1671년에는 현존하는 그의 최초의 오페라 라우린다 또는 비안테(La Laurinda ovvero Il Biante)가 작곡 및 공연되었다. 1676년에는 그의 대표작인 오라토리오 세례 요한(San Giovanni Battista)이 공연되었다.[4]
한편 그가 로마에 오면서 음악적 재능과 함께 '''방탕한 기질'''도 본격적으로 포텐이 터졌는데, 처녀 유부녀 가리지 않고 여러 여자들과 애정행각을 벌인 탓에 평이 매우 좋지 않았다. 1669년경 그는 동료 음악가였던 카를로 로나티(Carlo Ambrogio Lonati)와 공모하여 로마 대성당에서 돈을 훔쳤다가 발각되는 바람에 한동안 로마에서 도망쳐서 이곳 저곳을 전전해야 했다. 이후 분위기가 잠잠해지자 로마로 돌아왔으나 이번에는 나이 많은 여자에게 돈을 받고 당시 추기경이었던 치보(Cibo)의 조카뻘 되는 사람을 중매시켜주었다가 추기경을 분노를 사서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또 로마에서 도망쳐야 했다. 어렵게 로마에 돌아온 이후에도 바람둥이 기질을 고치지 못한 그는 많은 로마 귀족들의 미움을 샀고, 음악가로서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얻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그는 1677년에 이런저런 이유로 로마를 완전히 떠나야 했다.

2.2. 베니스에서의 애정행각


사실상 로마에서 추방당한 스트라델라는 이번에는 베니스로 갔다. 베니스의 유력자였던 알비제 콘타리니(Alvise Contarini)는 스트라델라를 자신의 정부(情婦)인 아그네제 반 유펠레(Agnese Van Uffele)의 음악교사로 삼고 그녀에게 음악을 가르치도록 했다. 그런데 이 의뢰는 말 그대로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긴 격(…)으로, 다들 예상하다시피 스트라델라와 아그네제는 그대로 눈이 맞아서 토리노(Turin)로 사랑의 도피를 해버렸다. 당시 콘타리니가 스트라델라의 방탕한 기질을 알고도 자기 애인에게 음악을 가르쳐 달라고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여튼 제대로 바보짓을 한 것이다.
콘타리니는 바람난 자신의 애인을 뒤쫓아 토리노에 왔는데, 당시 토리노가 속해 있던 사보이 공국의 섭정자 마리 쟝 밥티스트(Marie Jeanne Baptiste of Savoy)는 두 사람을 인도해 달라는 콘타리니의 요청을 거부하였다. 콘타리니는 포기하지 않고 토리노의 대주교에게 스트라델라와 아그네제를 결혼시키거나 아그네제를 수녀원으로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에 두 사람은 결혼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혼인서약서에 사인을 하던 날 밤, 결혼 관련 절차를 마치고 성당에서 나온 스트라델라는 갑자기 뒤에서 덥친 두 명의 괴한에게 칼에 찔려서 쓰러진다. 이 두 괴한은 앙심을 품은 콘타리니가 고용한 청부업자들로 스트라델라가 쓰러지자 죽은 것으로 생각하고 바로 프랑스 대사관으로 도망쳤다. 그런데 스트라델라는 큰 상처를 입었지만 다행히 죽지는 않았고 모처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다. 사보이의 섭정 마리 쟝 밥티스트는 자객을 숨겨준 프랑스 대사관과 당시 프랑스 왕 루이 14세에게 이 사태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했고, 이어진 지루한 협상 끝에 스트라델라는 안전을 보장받고 토리노를 떠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이에 스트라델라는 부상에서 회복하고 이듬해(1678) 제노바로 떠난다.[5]

2.3. 제노바에서의 최후


제노바에서 그는 자신의 음악 동료였던 카를로 로나티를 다시 만났으며 그의 주선으로 제노바의 귀족들과 극장에 음악을 써주고 돈을 벌었다. 제노바에서 안정을 찾은 그는 이 시기에 중요한 작품을 많이 남겼는데, 그의 현존하는 오페라 6곡 중 4곡이 제노바에서 작곡된 것이다.
이처럼 제노바에서 그나마 마음 잡고 조용히 사는가 싶었는데, 1682년 스트라델라는 반치 광장(Piazza Banchi)에서 칼에 찔려 피살된 채로 발견된다. 그를 죽인 사람(들)의 신원은 끝내 알려지지 않았는데, 이 암살을 사주한 주체는 당시 제노바의 유력가문이었던 롬멜리니(Lomellini) 집안이 확실시되고 있다. 당시 스트라델라는 죽을 고비까지 넘겼음에도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롬멜리니 가문의 딸과 염문을 뿌리고 있었는데 그녀의 오빠들이 이에 대해 크게 분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3. 평가



3.1. 음악


결코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는 그의 삶과 별도로 음악적으로는 상당히 중요한 작곡가이다. 그의 음악적 능력은 당시부터 유명했으며 그 덕분에 사생활에서 온갖 잡음을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죽을 때까지 일자리와 후원이 끊기지 않았다. 바로크의 모든 음악가들이 그렇듯 그의 작품도 상당수가 유실되거나 불완전하게 남아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300여곡의 작품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6]

《12곡의 신포니아》 中 2번
그는 후기 바로크 협주곡의 기본 양식이 된 합주 협주곡, 즉 '''콘체르토 그로소(concerto grosso)'''의 선구적인 작품들을 남기고 있다. 스트라델라의 '신포니아'라고 이름 붙여진 소나타 같은 작품을 들어보면 빠른 악장과 느린 악장의 교대 배치나 각 악기간 화성적인 어울림을 추구하는 등의 후대 합주 협주곡에서 볼 수 있는 기본적인 특징들이 나타나고 있으며, 이러한 실내악 뿐 아니라 성악곡의 반주로도 콘체르티노와 콘체르토 그로소의 두 그룹으로 이루어진 악기 편성을 사용하고 있다. 또한 당시에는 시도되지 않았던 대담한 화성법을 자주 도입하였는데, 당대 사람들에게는 그가 들려주는 새로운 음향이 상당히 인상적이었을 것이다.
또한 스트라델라는 오페라나 오라토리오 분야에서도 후기 바로크시기에 꽃을 피운 바로크 극음악의 산파 역할을 한 작곡가로 평가받고 있다. 현재 그가 작곡한 오페라 6곡과 오라토리오 6곡의 악보가 남아 있는데, 당시 작곡가들과 비교하면 작품 수가 상당히 적은 편이다. 그나마도 일부는 미완성이거나 후대의 가필이 의심되는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들의 영향력은 대단해서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 등 다음 세대의 쟁쟁한 후배 작곡가들이 그가 남긴 각종 음악적 성과를 수용하고 체계화시켰으며 자신들의 음악에 스트라델라의 음악을 자주 인용했다.[7]
자코모 카리시미가 쓴 성악 + 통주저음 편성에서 오페라 비슷한 더 웅장해진 오라토리오의 원조가 조반니 레그렌치와 바로 스트라델라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스트라델라는 극음악 반주에 합주음악의 편성을 본격적으로 채용하였고, 곡 중간에 '리토르넬로'[8] 또한 아리아와 레치타티보를 분리시켰는데, 이러한 수법들은 바로크 중기부터 후기까지, 더 나아가 현대의 오라토리오의 중요한 양식적 특징이기도 하다.
또한 스트라델라의 170여곡에 달하는 칸타타를 비롯한 다수의 성악곡에 포함된 중창이나 합창에서 대위법적인 처리가 자주 나타난다. 전술한 그의 대표작인 오라토리오 '세례 요한'의 듀엣이나 중창을 들어보면 각 가수들이 독립적으로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합창의 한 성부를 맡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데, 이런 대위법적인 특성은 후대의 바흐헨델의 합창음악을 예견하게 한다.

3.2. 후대의 이미지


이렇게 중요한 작곡가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오늘날에는 음악보다 그의 극적인 인생사가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음악가로서 명성이 높았던 탓인지 스트라델라 당대에도 그의 굴곡많은 인생은 상당한 화제거리가 되었는데, 프랑스의 의사이자 아마추어 철학자/작가였던 피에르 부드로(Pierre Bourdelot, 1610-1685)는 자신의 책 '음악의 역사(Histoire de la musique)'[9]에서 스트라델라의 행적에 대해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스트라델라의 실제 인생사에 대해 알려진 것이 많지 않았던 탓에 부드로의 기록은 이후에 거의 정설로 굳어졌으며 오늘날까지도 인용되는 그의 여러 일화와 전설이 고착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 결과 부드로가 기록한 스트라델라의 전기는 지나치게 낭만적으로 덧칠된 것으로 사실상 스트라델라를 모티브로 한 소설에 가까운 수준이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도 콘타리니가 보낸 암살자들이 스트라델라가 작곡한 오라토리오를 듣고 감동받는 바람에 그를 죽이지 않고 오히려 도망치라고 조언을 했다던가 사랑하는 여인과 도피행각을 벌이다 최후에 두 사람이 같이 암살되었다던가 하는 일화들이 회자되고 있는데, 이는 모두 부드로의 '음악의 역사'에 나오는 이야기들로 실질적인 근거는 없다.
여튼 이 부드로가 기록한 그의 행적이 워낙 인상적이었던 탓에 이를 모티브로 한 예술 작품도 많이 창작되었는데, 대표적인 작품이 1837년 프랑스 파리에서 공연된 루이 니더마이어(Louis Niedermeyer)의 오페라 스트라델라(Stradella)와 1844년 함부르크에서 공연된 프리드리히 폰 플루토우(Friedrich von Flotow)의 오페라 알레산드로 스트라델라(Alessandro Stradella)이다. 이 둘보다는 덜 알려져 있는 작품으로 주세페 시니코(Giuseppe Sinico)가 1863년에 작곡한 오페라 '알레산드로 스트라델라'가 있다.
세자르 프랑크도 20세 무렵에 오페라 스트라델라(Stradella)를 작곡하였는데 피아노 악보(2대의 피아노 버전)만 완성된 채로 중단되었기 때문에 프랑크 당대에는 이 작품이 상연되지 않았다가 1983년에야 이 악보의 오케스트레이션이 완료되어 공연이 성사되었다. 현재는 음반도 나와있다.
미국의 소설가 매리언 크로포드(Marion Crawford)는 베니스에서 벌어졌던 그의 연애사를 낭만적으로 각색한 소설 스트라델라(Stradella)를 1909년에 출판하기도 했다.
이처럼 스트라델라는 음악 못지 않게 자신의 삶 자체도(비록 각색된 것이긴 하지만) 후대에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오늘날에도 부드로에 의해 각색된 스트라델라의 일화들이 음악 에세이집이나 클래식 소개 책자 등에 많이 실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4. 주요 작품


스트라델라의 작품성향은 기본적으로 바로크 중기와 후기의 과도기에 위치하고 있으나 그의 음악이 결코 개척자나 과도기 작품의 의미만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작품 상당수는 오늘날에도 감상할 가치가 충분한 음악성을 갖고 있다. 베토벤이 고전기와 낭만파 시기의 과도기에 살았다는 이유로 그의 작품이 과도기 작품이라는 의미만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 오페라
1. 라우린다 또는 비안테(La Laurinda ovvero Il Biante,1671)
2. 코리스페로(Il Corispero, 미완성 작품으로 1677경 작곡)
3. 부성의 힘(La forza dell'amor paterno,1678)
4. 트레스폴로 선생(Il Trespolo tutore,1679)[10]
5. 영웅적인 사랑의 경쟁(Le gare dell'amor eroico, 1679)
6. 사랑을 위한 죽음(Moro per amore,1681)
  • 오라토리오
1. 에스더(Ester, 1670 or 1673)
2. 세례 요한(San Giovanni Battista, libretto di Ansaldo Ansaldi,1675)
3.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San Giovanni Grisostomo,1676)
4. 성 펠라자(Santa Pelagia, 1677)
5. 수잔나(La Susanna, 1681)
6. 성 에디타(Santa Editta, vergine e monaca, regina d'Inghilterra, 작곡연대 불명)
  • 칸타타
- 별의 힘 또는 다모네(La forza delle stelle ovvero Il Damone, 1673)[11]
  • 기악 작품
1. 소나타 1집 - 12곡으로 바이올린 & 지속저음(basso continuo) 편성[12]
2. 소나타 2집 - 2곡으로 바이올린과 류트(또는 비올론첼로) & 지속저음 편성
3. 소나타 3집 - 9곡으로 바이올린 2대 & 지속저음 편성
4. 대 오르간 소나타(Sonate per organici grandi) - 3곡으로 현악합주와 오르간 지속저음 편성[13]
기타: 몇곡의 신포니아

[1] 한동안 그가 1642년에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현재는 1639년에 태어났다는 것이 통설이다. 이외에 그가 1643년이나 1644년에 태어났다는 설도 있다.[2] 스웨덴은 신교국가였는데 당시 크리스티나 여왕은 카톨릭으로 개종하는 바람에 스웨덴에서 추방 명령을 받은 상태였다. 추방된 이후 그녀는 교황청의 배려 속에 프랑스와 이태리 이곳 저곳으로 옮겨다녔는데 1667년 당시에는 로마에 머무르고 있었다.[3] 현재 4개의 오페라에서 그가 가수로 무대에 섰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4] 작곡자 스스로도 이 오라토리오를 자신이 쓴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생각했다. 오늘날의 평가도 크게 다르지 않다.[5] 그와 사랑의 도피를 벌인 아그네제의 운명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수녀원에 들어갔을 수도 있고 콘타리니가 데려갔을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스트라델라가 제노바에 갈 때에는 그녀와 헤어지고 혼자 갔다는 것이다.[6] 그의 작품이 당대 다른 작곡가들에비해 상대적으로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은 그만큼 후배 음악가들이 그의 작품을 많이 참고하고 연주했다는 뜻이다. 당시만 해도 유명하지 않거나, 종교적 음악이 아닌 작품들은 그대로 유실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7] 말이 좋아서 인용이지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표절이다. 저작권 개념이 없던 당시에는 선배 작곡가들이 사용한 주제나, 춤곡의 모티브를 돌려쓰기 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심지어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은 자신의 오라토리오 이집트의 이스라엘인《Israel in Egypt》 (HWV 54) 중 다섯 개의 합창 '그분께서 말씀하시자(he spake the word)', '비 대신 우박을(he gave them hailstones)', '당신 백성을(but as for his people)', '주님을 경외하고(And believed the Lord)', '그들은 들으리(The People Shall Hear)'에서 스트라델라의 세레나타 Qual prodigio è ch'io miri(내가 명예롭게 생각하는 것)를 그냥 베꼈다 봐도 좋을 정도로(...) '인용'했다. 스트라델라의 Qual prodigio e ch'io miri? 가운데 신포니아와 헨델의 이집트의 이스라엘인 가운데 He Spake the Word 를 비교해서 들어보자.[8] 여기서는 단순히 극 중간에 삽입되는 짧은 기악음악을 가르킨다.[9] 사실 이 책은 그의 유고집으로 그의 사후 그의 조카에 의해 1715년에 파리에서 출판되었다.[10] 희극 오페라로 오페라부파의 선구적인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11] 그의 세속칸타타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12] 11번 곡은 주제와 24개의 변주곡으로 구성되어 있다.[13] 3번 소나타에는 트럼펫이 추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