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정배

 


'''역임한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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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회 국회운영위원장'''
제16대 후반기
유용태

'''제17대 전반기
천정배'''

제17대 전반기
정세균

'''대한민국 국회의원 (경기 안산시 을)'''
''선거구 분리''
장경우[35]

'''제15·16대
천정배'''

''선거구 개편''
'''천정배'''[A]
제종길[36]
'''대한민국 국회의원 (경기 안산시 단원구 갑)'''
''선거구 개편''
'''천정배'''[A]

'''제17·18대
천정배'''

제19·20대
김명연
'''대한민국 국회의원 (광주 서구 을)'''
제19대
오병윤[37]

'''제19·20대
천정배'''

제21대
양향자


'''대한민국 제57대 법무부 장관
천정배
千正培 | Chun Jung-bae
'''
<colbgcolor=#003764><colcolor=#ffffff> '''출생'''
1954년 12월 12일 (69세)
전라남도 무안군 암태면 신석리 구석마을#
(現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면 신석리 구석마을)[1]
'''본관'''
영양 천씨
'''재임기간'''
제57대 법무부 장관
2005년 6월 29일 ~ 2006년 7월 26일
'''외부링크'''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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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764><colcolor=#ffffff> '''부모'''
아버지 천득린
'''형제자매'''
2남 3녀 중 장남
'''배우자'''
서의숙
'''자녀'''
딸 천지성, 천미성
'''학력'''
서울대학교 (법학 / 학사)
서울대학교 법학대학원 (조세법전공 / 석사)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교육학 / 학사)
'''병역'''
공군 대위 만기전역[38]
'''종교'''
개신교(출처)
'''신체'''
A형
'''소속 정당'''

'''의원 선수'''
'''6'''
'''의원 대수'''
'''15''', '''16''', '''17''', '''18''', '''19''', '''20'''
'''경력'''
김앤장 법률사무소 변호사
민변국제인권위원장
새정치국민회의 총재 특별보좌관
제15대 국회의원(경기 안산시 을)
제16대 국회의원(경기 안산시 을)
새천년민주당 정책위원회 부의장
제17대 국회의원(경기 안산시 단원구 갑)
열린우리당 원내대표
제17대 국회 전반기 국회운영위원회 위원장
제57대 법무부장관
민주당 최고위원
제19대 국회의원(광주 서구 을)
국민의당 공동대표
제20대 국회의원(광주 서구 을)
국민의당 선대위 공동위원장
대안신당 인재영입위원장

1. 개요
2. 생애
2.1. 정계 입문 전
2.2. 변호사 활동
2.3. 정치 활동
2.3.1. 새정치국민회의~새천년민주당 시절
2.3.2. 열린우리당 시절
2.3.3. 대통합민주신당~민주통합당 시절
2.3.4. 호남정치의 복원작업
2.3.5. 국민의당 시절
2.3.6. 민주평화당 시절
2.3.7. 대안정치연대 ~ 대안신당 ~ 민생당
3. 천정배계
4. 가족관계
5. 선거 이력
6. 소속 정당
7. 기타
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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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법조인이자 정치인. '''제15대에서 20대까지 무려 6선을 지낸 중진 국회의원'''이며, '''법무부 장관'''을 지냈다.
사법고시에 합격해 연수원을 3위로 수료하였지만, 전두환 신군부에 맞서 법관 임용을 단호하게 거부했으며,
대통령 경선에 나선 노무현의 진가를 깨닫고 먼저 합류한 동료 이낙연[2] 민주당 대변인과 함께 노무현 캠프에 합류, 법률분야 의견을 내는 한 편, 호남 지역에서 노무현 후보 지지를 확보하는데 진력해 노무현 정권 탄생 1등 공신 중 한 사람이 되었으며, 법무부장관으로 중용되었다.
여전히 옛 모습을 띠는 동교동계공천 방식을 바꿔보고자 '정풍 운동'을 주도하였으며, 국민경선제와 상향식 공천제의 도입을 주도하였다. 이후 대연정 제안 등 '''"(주류)언론에 의해'''", 정부의 시책에 부정적인 색채가 '''끊임없이'''[3] 칠해져 대통령 선거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자, 몇몇 정부 인사들이 '좌측 깜빡이 켜고 우회전 한다'며 부화뇌동하려는 움직임을 보일 때, 만신창이가 된 열린우리당의 쇄신을 외치며, 대통합민주신당으로의 재창당을 이끌기도 했다.

2. 생애



2.1. 정계 입문 전


1954년 12월 12일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면[4][5] 신석리 구석마을에서 천득린의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목포시의 공무원이었기에, 초등학교 시절까지는 전남 신안의 조부모 슬하에서 자랐다.
그러다가 목포중학교[6]에 진학하면서 목포시에서 부모와 살게 됐다. 목포중학교 재학 중에 전라남도 학술 경시 대회에서 1등을 하는 등 일찍부터 공부에 소질을 보였다.[7] 중학교 졸업 후 명문 목포고등학교(21회)에 수석 입학, 수석 졸업하였다.[8]그리고 그해 대학예비고사에서 인문계 전국 수석을[9] 차지하였으며,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수석으로 입학하는 등 이때부터 '목포 3대 천재' 라는 타이틀을 얻었다.[10]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재학 중인 1976년 제18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그 뒤 사법연수원을 3등으로 수료하였으며, 군 복무는 공군 군법무관으로 대위로 전역하였다. 통상적으로는 판검사를 받을 수 있는 성적이었지만, 군 복무 중 5.18 민주화운동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전두환 정권하에서 법관 임용을 거부하고 인권 변호사의 길을 걸었다.

2.2. 변호사 활동


대표적인 인권변호사 중 1인으로 활동하였다. 1993년 법무법인 해마루를 설립했고[11], 거기에 노무현전해철 등을 참여시켰다. 그 후 법조계에서 인권문제와 노동문제 등에 관해 두각을 나타냈다.
또한 음반 사전심의제를 위헌이라 규정한 94헌가6 재판의 담당변호사로 활약한 전적이 있다.
전 법무부장관인 조국사노맹 사건에 연루되었을 때 조국의 변호인을 맡은 바 있다. #

2.3. 정치 활동



2.3.1. 새정치국민회의~새천년민주당 시절


김대중의 권유로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여 본격적인 정계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경기도 안산시 을 지역구로 당선되었고 이래 같은 지역구(안산시 을, 안산시 단원구 갑)로 4선을 기록하였다.[12] 정동영, 신기남과 더불어 새천년민주당 정풍운동을 주도, 정권 실세였던 권노갑의 2선 후퇴를 주장하는 등, 당내 소장파 의원으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당시 국민의 정부와 핵심 지지층이 갖고 있던 고민 중 하나가 마땅한 후계자가 없다는 것이었고,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호남 출신 대권 주자가 부재하다는 것이었는데,[13] 정동영, 신기남 등과 더불어 지금 당장의 중량감은 떨어지더라도 잘 성장하면 호남권 대권 주자, 즉 뉴 DJ가 될 수 있으리라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정치 개혁에 대한 열망이 강했던 젊은 지지층에 천정배가 갖고 있던 스마트하면서도 강력한 개혁적 성향은 상당히 매력적으로 다가온 면이 있다.
2001년 7월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한 해 앞둔 시점에서 노무현에 대한 깜짝 지지 의사를 밝혀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민주당 내에서 노무현을 지지하는 현역 국회의원은 천정배 의원 외에 아무도 없었는데, 얼마 안 가서 노무현이 급격히 세를 불려가며 민주당 대선후보로 지명되고, 대선 승리까지 이루어내자, 그의 혜안을 많은 사람들이 다시 보게 되었다. 2002년 중반에는 노무현이 민주당 내에서 사실상 지도력을 상실하고 후단협에 의해 흔들리는 등 위기를 겪었지만, 그때에도 조금의 흔들림조차 없이 노무현을 계속 도와줘서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에 크게 기여하였다.
2003년 새천년민주당 분당 국면에서는 기존의 지역구도를 타파하고 전국 정당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열린우리당 창당에 앞장섰다.[14] 민주당 내에서 지역구도에 기생하며 점차 보수화, 기득권화하고 있는 동교동계에 맞서서 새로운 세력을 중심으로 깨끗한 진보정치를 실현하겠다는 그의 구상은 진보층의 지지를 얻었다.

2.3.2. 열린우리당 시절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이 탄핵열풍을 타고 국회에서 단독 과반을 차지하자, 천정배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그 기세를 몰아 3선이었던 그는 열린우리당 원내대표 경선에서 5선의 이해찬을 꺾고 승리하며 17대 국회 첫 열린우리당 원내대표가 되었다. 단독 과반을 차지한 집권여당 원내대표가 된 이 시절이 천정배 정치인생의 절정이었다.
그러나 천정배는 열린우리당 원내대표라는 절정에서 정작 정치인으로서의 역량에 한계를 드러내며 급격히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제17대 국회가 시작하자마자 국가보안법 폐지, 사학법 개정, 과거사청산법 제정, 언론개혁법 제정을 밀어붙인 것이 여론의 역풍을 맞았다. 당시 한나라당4대 개혁 입법을 가리켜 '''4대 국론 분열법'''으로 규정하고 격렬하게 저항했으며, 조중동을 비롯한 언론들의 비판을 받았다.

당시 열린우리당 내에서도 군 출신, 관료 출신의 보수성향 인사들이 4대 개혁입법에 협조를 해주지 않는 등 자중지란 콩가루 상황이 벌어졌다.
결국 4대 개혁 입법은 여야간에 적당히 타협되어 ‘누더기 법’으로 전락했다. 예를 들어 시장 지배적 사업자에 대한 공정거래법상 규제를 도입하는 것을 뼈대로 한 신문법은 1개 일간지의 시장점유율이 30% 이상이거나 3개 일간지의 점유율이 60%를 초과할시 규제를 가한다는 규정[15], 신문지면에서 광고 비율이 50%를 넘지 않도록 규제한다는 규정이 삭제된 채 통과되었다. 이 정도면 사실상 언론개혁은 좌절된 것이나 마찬가지.
그나마 국가보안법은 독소조항만 제거하는 식으로 적당히 타협하는 게 좋았을 텐데, 강성 의원들[16]이 "완전 폐지가 안 될 바엔 차라리 그냥 두는 게 낫다"고 주장하여 그대로 존치해버리고 말았다. 거기에 과거사청산법의 통과도 무산되었다. 열린우리당 일각에서는 이런 소모적인 이념논쟁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일단은 민생법안을 통과시키는 데 주력하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천정배 원내대표가 당내 강성 의원들에게 밀려 4대 개혁입법에 올인하는 바람에 묻히고 말았다.
결국 4대 개혁입법 제정에 실패하고, 당내 리더십도 상실하자, 2005년 1월 1일 원내대표 직에서 사퇴하였다. 열린우리당이 보수층에서 비판을 받는 것 이외에 진보층과 중도층에서도 지지를 상실하기 시작한 시점이 바로 이때쯤부터였다.
2005년 6월에는 법무부 장관에 취임했다. 그런데 2005년 10월에 동국대학교 강정구 교수의 국가보안법 위반 수사를 두고 검찰과 대립한다. 강정구가 한국전쟁을 통일전쟁으로 표현한 것과 관련해 검찰이 구속수사를 시도하자 천정배는 헌정사상 최초로 검찰청법 8조에 근거해 수사지휘권을 행사하여 불구속수사 지시를 내렸다.[17] 김종빈 검찰총장은 수사지휘권 행사에 항의하여 총장직을 사퇴했다. 보수층을 중심으로 민심 또한 급격하게 악화됐다. 과거 검찰의 독립을 위해 법무부장관의 검찰에 대한 지휘권을 삭제하는 내용의 검찰청법 개정안을 제안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정작 자기가 법무부 장관이 되자 소신이 바뀌었다는 비판을 들었다. 다만 천정배는 법리상 구속수사를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검찰의 정치적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김종빈과 합의 하에 수사지휘권을 행사했는데, 돌연 검찰이 조직적으로 저항했다고 주장했다.
그 후 노무현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실망과 염증이 가속화되고, 열린우리당 역시 집권 동력이 상실되며 호남에서조차 비토되는 상황에 이르자, 2007년 1월 열린우리당 탈당을 선언하였다. 탈당 후 김근태와 더불어 한미 FTA 반대 단식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법무장관 시절에는 FTA 비준 합동담화문에 서명한 적이 있어, 이후 2011년 FTA 정국에서 한나라당에 비판 받기도 했다.

2.3.3. 대통합민주신당~민주통합당 시절


이후 대통합민주신당이 출범한 뒤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했으나 컷오프 되었다. 대선 과정에서는 문국현과의 정책 연대를 구상하는 등, 반한나라당 통합을 시도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2008년 총선에서 4선 국회의원이 되었고, 주로 이명박 정부의 언론 정책에 반대하는 활동을 펼쳤다.
2009년 미디어법이 한나라당에 의해 날치기로 강행 처리되자, 장외 활동에 앞장 섰다. 이 기간에 쌓인 1억 2천만 원의 세비 수령을 미련 없이 거절하여, 많은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그 후 2010년 민주당 전당대회 지도부 경선에서 5위를 차지, 최고위원이 되었다.
2011년 오세훈 서울시장이 무상급식 찬반 주민투표의 결과로 사퇴, 서울시장이 공석이 되자 후보 경선에 출마했다. 그러나 박영선 의원에게 패하며 후보가 되진 못했다.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특별시 송파구 을에 출마해서 '''단 3% 차이'''로 낙선했다.[18]

2.3.4. 호남정치의 복원작업


2015년 새정치민주연합을 탈당했다. 이후 2015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서 광주 서구 을에 출마하여 새정치민주연합 조영택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탈당 후 천정배가 내세우는 것을 요약한다면 야권 내 '영남패권주의' 타파를 통한 '호남정치의 복원'인데, 이 '호남정치'의 파괴 원인으로 지목 받는 게 천정배가 주도한 바 있는 열린우리당 창당이었던 점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부분이 있다. 또한 이를 두고 호남 지역주의로 비판하는 시각이 있기도 한 상태.[19] 현실론적 시각에서 이전에 비해 호남권의 인구가 충청권보다 적어진 현실에서 호남으로 영남을 견제한다는 논리가 성립 가능한가 하는 비판도 있다.
이후 국민회의를 창당했고, 국민의당과 합당하며 손을 잡았다. 국민의당 창당대회에서 안철수와 함께 공동대표에 취임했다.
참고 문서

2.3.5. 국민의당 시절


2016년 2월 1일 국민의당 공동대표로 선임되었다. 3월 더불어민주당김종인 대표가 야권 표 분산으로 새누리당이 어부지리를 얻어 4.13 총선에서 압승하는 일이 일어나는 걸 막기 위해 '야권 통합론'을 제시하자 이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안철수 상임대표가 야권 통합에 완강한 반대 의사를 보이자 잠시 안 대표의 뜻에 따라가는 듯한 모습을 보이다가 다시 현 야권이 하나로 뭉쳐야 한다는 쪽으로 입장을 정했다. 3월 10일에는 야권 연대에 대한 논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지 않는다면 '중대 결심'을 내리겠다며 국민의당 탈당을 불사할 뜻도 있다는 생각을 드러내 배수진을 쳤다.
그렇게 한동안 당무를 거부하기까지 하면서 안철수 상임대표와 줄다리기를 하다가 결국에는 뜻을 접고 안철수와 손을 잡았다. 이에 천정배 의원이 창당했었던 국민회의의 탄생에 적극 일조했었던 천 의원의 외곽 조직인 '새로운 길'은 천정배 의원과 결별하겠다고 선언했다.#
4월 13일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 양향자의 강력한 도전을 뿌리치고 광주 서구 을에서 무난히 당선되었다.
6월 29일 안철수 공동대표와 함께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김수민·박선숙 의원과 왕주현 사무부총장 등이 연루된 4·13 총선 홍보비 리베이트 수수 의혹에 책임을 지고 물러난 것이다.[20] 그의 대표직 사퇴는 사실 대단히 큰 결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안철수에 비해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해 안습이라는 평가를 받았다.관련 기사
특히 국민의당을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천정배 의원이 장관까지 지낸 중진급의 정치인인데도 불구하고 안철수 대표에게 눌려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하는 걸 두고 '국민의당 대표는 안철수 한 명 아니냐', '안철수 옆에 앉아 있는 건 천정배가 아니라 천정배 모양으로 깎은 나무 토막 아니냐'며 조롱하기도 했다.
2016년 12월 27일 19대 대선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당내 경선이 안철수 전 대표와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를 중심으로 돌아가자 2017년 3월 14일 불출마로 결정했다. #
국민의당이 대선에서 패배하고, 대선 공작 사건으로 심각한 치명상을 입은 가운데, 7월 12일 국민의당 당대표 경선에 출마하기로 마음을 굳혔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 그리고 8월 1일 대전광역시 충무체육관에서 정식으로 당대표 경선 출마 선언을 했다. # 그러나 8월 27일 전당대회에서 16.60%를 득표해 3위에 그쳤다.

2.3.6. 민주평화당 시절


민주평화당 창당 이후, 당 원내대표로 점 찍어진 모양. 다른 의원이나 당원들은 밀어주는 추세인데, 장본인이 꺼려하고 있다.# 결국 원내대표는 유성엽 의원으로 결정.
2019년 8월 12일, 대안정치연대 구성을 명분으로 전격 민주평화당을 탈당하였다.

2.3.7. 대안정치연대 ~ 대안신당 ~ 민생당


2019년 9월 18일, 외교관 딸에게 "국정감사 때, 가까운 친구가 있으면 도와주겠다" 라고 문자를 보낸 것이 논란이 되고 있다. #
2019년 연말, 4+1 회담에 대안신당 협상 대표로 참여하며 검찰 개혁 법안을 검사 사위의 로비 때문에 반대한다는 음모론이 돌았다.본인은 적극적으로 부정했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부분 도입한 공직선거법 개정안에 대해서는 당내에서 유일하게 기권표를 던졌으나, 정의당 윤소하 의원이 발의한 공수처법 개정안에 대해서는 찬성표를 던졌다.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광주 서구 을 민생당 후보로 출마하여 7선을 노렸으나 19.5% 라는 저조한 득표율에 그치며 75.8%를 얻은 더불어민주당 양향자 후보에게 거의 쿼드러플 스코어로(...) 대패하며 낙선했다. 그때문에 정치적 생명이 끝날 위기에 처했는데, 그나마 같은 호남계 중진인 정동영, 박지원 의원 등이 같이 낙선했으나 30%대 득표율을 올린거에 비교해도 너무 크게 패배했기 때문. 박지원, 정동영 후보에 비해 대패한 이유는 인지도도 좀 부족하지만 원래 경기도 안산시에서만 4선을 한 정치인이고 학연도 없는 편이라[21] 지역기반이 보다 부족했기 때문이다.
2020년 6월 20일, 국회 마지막 급여 850만원을 서구에 기탁했다.

3. 천정배계


민생당 내의 천정배의 이념과 정치관을 따르는 세력을 말한다. 천정배계를 따르는 대표적인 인물로는 민생당 소속이었던 부좌현 전 의원이 있으며[22] 비례대표 의원인 장정숙 의원이 있다.

4. 가족관계


[image]
슬하에 딸만 둘을 두었다. 아들은 없다. 첫째 딸 천지성(1978년생: 아래 사진 왼쪽) 씨는 대원외고 -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2003년 제 45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현재 서울중앙지법에 근무하고 있으며, 최병렬 전 '''한나라당''' 대표의 조카인 최재만 검사와 결혼하였다고 한다.[23] 둘째 딸 천미성(1980년생: 아래 사진 오른쪽) 씨는 서울과학고 -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외무고시에 합격하여, 현재 주 이란 한국 대사관에서 근무 중이다. 공부 실력 하나는 타고난 집안인 듯.
남동생 천방훈씨는 삼성전자 전무로 재직 중이며, 여동생 천진희씨는 목포마리아회고등학교 한국사 교사로 재직 중이다. 사촌동생은 천경배인데, 이 사람은 사촌형과 달리 더불어민주당에 잔류하여 당직자로 일하다가, 신안군수 공천을 받아 출마했지만 무소속 박우량 전 군수에게 패해서 낙선했다. 그것도 민주당적으로 고작 14%(...)밖에 못 받아 선거비용도 반밖에 못 받은 초라한 성적으로.[24]

5.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안산 을

'''36,902 (38.80%)'''
'''당선 (1위)'''
'''초선'''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37,523 (49.45%)'''
'''재선'''[25]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안산 단원 갑

'''32,094 (58.21%)'''
'''3선'''
2008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23,044 (49.12%)'''
'''4선'''
2012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송파 을

46,010 (46.02%)
낙선 (2위)

2015
상반기 재보궐선거
광주 서 을

'''26,256 (52.37%)'''
'''당선 (1위)'''
'''5선'''[26]
2016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42,599 (54.52%)'''
'''6선'''[27]
2020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15,754 (19.49%)
낙선 (2위)


6.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1996 - 2000
정계 입문

2000 - 2003
합당[28]

2003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2003 - 2007
창당

2007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2007 - 2008
창당

2008
합당[29]

2008 - 2011
당명 변경

2011 - 2013
합당[30]

2013 - 2014
당명 변경

2014 - 2015
합당[31]

2015 - 2016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2016
창당

2016 - 2018
합당[32]

2018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2018 - 2019
창당

2019 - 2020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2020
창당

2020
합당[33]

7. 기타


  • 안철수 전 공동대표와 함께 공동대표 시절에 공군 10전투비행단을 방문한 적이 있다. 천정배는 정계 입문 전에서 기술했던 것처럼 공군 법무관 출신이었으므로 국군 전체로 보자면 안철수의 전우이자 선배이기도 하다.[34]
  • 조국 전 법무부장관과의 인연이 남다른데, 과거 조국의 사노맹 사건 변호인이었으며, 노무현 정권 시기 법무부장관을 맡아 검찰개혁을 추진한 바 있다. 그러나 조국 사태 발생 이후, "사법개혁의 적임자라는 말에는 동의하기 어렵다"고 평가하였다. 검찰 사무의 최고 감독자이자 인사권을 들고 있는 사람이 한편으로는 수사를 받는 상황이 '이해관계 충돌'에 해당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조국 수사를 '정치 보복, 모욕 주기식'이라며 노무현 수사와 연결짓는 여당 측 주장에 대해, 조국 수사와 노무현 수사는 다르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청와대와 정부, 여당의 핵심인사들이 검찰을 극단적 표현으로 비난한다"며 "개혁의 진정성을 국민에게 인정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 #
  • 소설과 천승세와는 9촌관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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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양 천씨 집성촌이다.#[2] 본래 동아일보 기자로 동교동에 출입하면서 DJ를 취재하다가 정계로 입문하였다. 당시 민주당 주요 인사들 중 제일 먼저 노무현 캠프를 방문한 사람이었으며, 문재인의 집권 후에는 국무총리로 발탁, 최장수 재임 총리가 된다[3] 그전까지만 해도 신정부 출범 후 대개 100일 동안은 정부-언론 관계가 부드러운 소위 허니문 기간을 거치는 게 불문율이었는데, 유독 노무현 정권은 대통령 '''취임 후 발표한 첫 개각부터''' 곧바로 코드인사라 비판적인 보도가 나와 주류 언론들과 대립각을 세우기 시작한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선친 김홍조옹이 별세할 때즈음 정계 인사가 회고한 바에 따르면, 김대중 정부 시절까지는 박지원처럼 언론인들과 자리를 마련해 관계를 부드럽게 하고자 노력하는 이른바 '''"기름칠"''' 담당 인사가 정권마다 한두 사람씩 있었다고 한다. 노무현 정부 때는 그런 인사가 도통 보이지 않더라고.[4] 일본강점기 시절, 암태도 소작쟁의가 발생한 곳이다. 천정배의 큰할아버지뻘 되는 사람이 신석리 지역의 지주였지만 항목에 나와있다시피, 이쪽은 소작쟁의의 원인과는 거리가 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6.25 때 공산군이 자행한 집단 처형 여파는 피하지 못해, 당시 지주집안이었던 천씨 집안에서도 피해자가 나왔다고.[5] 6.25 때 살아남은 암태도의 어느 임산부 경험담에 따르면, 전화선으로 사람 손을 묶어 굴비엮듯 한 후에, 배를 타고 가 바닷속으로 밀어넣더란다. 임산부도 어린애를 등에 업은 상태서 바다에 빠졌는데, 웬일인지 줄이 풀렸다고 한다. 자신을 묶던 사람이 웬지 측은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듯 했는데, 줄을 약하게 묶었던 것 같다고. 아무튼 물에 뜬 상태서 고개를 우측으로 돌리면 바닷쪽으로, 좌측으로 돌리면 섬쪽으로 향하는 듯 해 계속 고개를 좌측으로 하여 귀향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동안 등에 업힌 아이는 죽고, 뱃속의 아이를 낳아 여생을 보내셨다는 후문.[6] [7] 다만 공부를 잘 한 것에 비해 리더십은 별로 없는 편이어서, 학창시절 12년 동안 반장은 한 번도 못 했다고 한다.[8] 유선호 전 국회의원과 고교 동기 - 대학 과 동기이다.[9] 이외에도 천정배가 재학 중일 때는 광주 서중-일고 학생들이 시험, 경시대회에서 목포고에 밀리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10] 그런데 김어준으로부터' 그러면 나머지 두 천재는 누구냐'라는 질문을 받고서는 자기도 '목포 3대 천재'가 대체 누구를 지칭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대답한 바 있다.# 보통은 김지하 시인, 조훈현 9단이나 김대중 전 대통령, 신승남 전 검찰총장을 같이 거론하는데... 아예 이 사람들을 통째로 묶어 목포 5대 천재라고 거론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기사에도 어느 정도 나오듯 천정배 본인은 천재라는 표현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11] 전현직 국회의원 4명을 배출했고, 이 중 1명의 대통령이 나왔다.[12] 상술한 법무법인 해마루가 안산시에 사무소를 두고 있으며 천정배가 공동 창립자이자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안산시를 지역구로 선택한 것도 이 때문. 법무법인 해마루의 공동 창립자 임종인이나 나중에 들어온 전해철 또한 안산시에서 정치 활동을 하게 된다. 또다른 공동 창립자인 '''노무현''' 또한 자서전 <여보, 나 좀 도와줘>에서 자신이 안산시에 출마할 것으로 거론되었지만, 부산 출마를 택했다고 살짝 언급한다.[13] 입지가 굳건했던 이인제는 당시 시점에서는 지역색이 짙지 않은 경기-충청권 인사였고, 결국 대통령이 된 노무현은 PK 인사에, 나머지는 대권 주자로는 좀 아쉽거나 고만고만한 수준이라는 게 세간의 인식이었다.[14] 사실 이 분당 국면도 구도로 본다면 호남을 중심으로 뭉쳐야 한다는 구 주류와 호남에서 안주하지 말고 PK 등과도 연합해야 한다는 탈당파 간 대결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후 총선에서 탈당파가 창당한 열린우리당이 호남 지역구까지 상당 부분 잠식한 것은 제법 많은 유권자들이 천신정을 믿고 따라간 결과가 어느 정도 반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15] 누가봐도 노무현 정권에 비판적이었던 조선일보를 포함한 조중동을 겨냥한 규정이다. 합법의 테두리 안에서 보수 언론들을 제갈물리자는 것으로, 언론개혁의 진정성이 의심받을만한 규정이다.[16] 대표적으로 유시민[17] 참고로 2020년 7월 기준, 지금까지 검찰청법 8조에 의해 수사지휘권을 행사한 것은 헌정사상 2번밖에 없다. 첫 번째가 천 장관의 사례이고, 두 번째 사례는 2020년 7월 추미애 법무부장관이 윤석열 검찰총장에게 채널A 사건과 관련해 전문수사자문단 소집을 중지하고 서울중앙지검 수사팀의 독립성을 보장할 것을 지휘한 것이다. 적어도 천정배 장관의 사례는 논란이 많아도 구속/불구속 여부가 개인의 신체적 자유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에 법무장관으로서 할 수 있는 지시로 볼 여지가 있지만, 추미애 장관의 사례는 검찰청법 12조 2항에 의거한 검찰총장의 지휘감독권을 박탈하는 것이기 때문에 천정배 장관의 사례보다 더한 논란을 일으켰다.[18] 송파구 을은 부유한 동네가 많기 때문에 새누리당이 강세인 지역이다. 게다가 박근혜 후보에게 70%를 준 '''문정2동'''도 이 지역구다. 다만 천정배가 생각보다 선전한 이유는 박계동국민생각 후보로 출마해서 여권 표가 어느 정도 분산되었기 때문이다.[19] 주로 친노계 정치인 혹은 지역주의 정치에 심리적으로 거리감이 있거나 비판적인 영남출신 친노 젊은 층에서.[20] 굳이 책임여부를 따지자면 국민의당 리베이트 사건은 안철수 공동대표의 핵심 측근들이 연루되었던 사건임으로 천정배 전 공동대표의 경우 책임이 덜하다.[21] 목포고등학교 졸업[22] 부좌현 전 의원은 총선 앞두고 민생당을 탈당해 자신의 지역구였던 안산시 단원구 을김남국 더불어민주당 후보를 지지하며 다시 더불어민주당에 복당하였다.[23] 국내외 정치계에서 성향이 다른 두 정치인 가문 간의 결혼은 간간히 존재하는 편이다. 예를 들면 미국 공화당 소속인 도널드 트럼프의 딸인 이반카 트럼프가 '''미국 민주당''' 소속의 사위인 재러드 쿠슈너와 결혼한 일을 들 수 있다.[24] 단 박우량은 원래 민주당이었으며 현재 복당한 상황.[25] 2003년 열린우리당으로 당적변경[26] 전임자 오병윤 통합진보당 해산으로 의원직 상실[27] 2018.02.05 국민의당 탈당
2018.02.06 민주평화당 창당
2019.08.12 민주평화당 탈당
2020.01.12 대안신당 창당
2020.02.24 민생당 합당
[28] 새천년민주당에 흡수 합당[29] 민주당(2007년)과 신설 합당[30] 시민통합당과 신설 합당[31] 새정치민주연합에 흡수 합당[32] 국민의당(2016년)에 흡수 합당[33] 민주평화당, 대안신당과 신설 합당[34] 참고로 안철수는 해군 군의관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