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식투쟁
1. 개요
'''단식투쟁'''(斷食鬪爭, Hunger Strike)은 단식으로 하는 시위를 말한다. 보통은 물은 마시되 다른 음식은 일절 입에 대지 않고 특정한 사안에 대해 시위하는 것을 말한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물을 마시는 경우도 있고 약간의 무엇인가를 더 먹는다. 왜냐하면, 나트륨을 섭취하지 않으면 사람의 몸이 며칠도 버틸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은 소금이나 간장을 섭취한다고 한다.
정상적인 생활을 지속해온 사람이라면 단 3일만 음식물을 입에 대지 않아도 건강이 위태로워진다. 즉, 단식투쟁은 '''나 굶어죽는 꼴 보기 싫으면 내 말 들어라''''라는 무언의 행동이다. 사회에서 존경받거나 인지도가 있는 사람일수록, 단식투쟁을 하면 여파가 크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물 없이 3일밖에 살 수 없고 공기 없이 3분, 음식 없이 3주밖에 살지 못한다고 한다.[3] 만약, 그 이후에도 정상인과 동일하게 행동할 수 있는 체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진위성을 의심받기도 한다. 애초에 단식 4주 넘기면 몸이 안 망가지는 게 이상하니깐.
물론 단식투쟁을 하다가 진짜로 아사한 사람도 있고, 아사하기 직전 투쟁을 철회하거나 요구가 받아들여짐으로써 겨우겨우 살아난 사람들도 있다. 예에서 알 수 있듯이 매우 극단적인 시위 방법이기 때문에, 웬만큼 중대한 사항이 아닌 이상 잘 실행하지는 않는 투쟁이다.
그러나 강력한 의지를 나타낼 방법이 별로 없는 약자, 소외된 사람들, 종교적, 정치적 소수자들이 행할 수 있는 강력한 투쟁방식 중 하나이고, 실제로 어떠한 사안으로 분쟁이 일어났을 때, 누구 한명이 단식투쟁에 들어가면 바로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된다. 단식 기간이 길어질수록 그 효과는 커진다.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안타깝게 보이기도 하고 간절해 보이기도 하지만, 반대급부로 "어린애마냥 뭐하는 짓이냐"라며 비판을 듣기도 한다. 이는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위해, 어떻게 단식 투쟁을 하느냐에 따라 갈린다.
사실 90년대 후반까지도 꽤 무게감 있는 정치 투쟁의 방식으로 평가받았으나, 2000년대 이후 점차 '인권'이나 '민주화' 같은 보편적인 가치보다는 그저 개인이나 정치 세력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어필 수단으로 전락하면서 "'''그냥 굶어 죽어라'''" 라는 등의 조롱이나 들으며 안 하느니만도 못하게 되는 경우도 많아졌다. 단식투쟁을 시작했다가 반응이 생각했던 대로 나오지 않아 슬쩍 그만두는 경우도 잦아 이런 인식이 더 늘어났다. 일베저장소의 폭식투쟁 같은 것도 이런 조롱의 일환이지만 이런 경우에는 욕이나 배불리 먹는다.
"어린애 마냥"이라는 말이 나오는 걸 보면 알듯이, 적지않은 사람들이 어릴적 '''부모님을 상대로(...)''' 짧게나마 해본 투쟁이기도 하다. 이는 단식이 어린 나이에도 간단하게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자해 행위이자, 그에 비례해 대상자에게 확실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다만 몇몇 부모들은 아예 단식 자체를 막기도 한다.
2. 역사
전근대에도 간혹 있었지만, 그때는 평등사회도 아닐뿐더러 먹을게 부족하다보니 평범한 사람이 '''일부러''' 단식을 한다는 개념자체가 없었고, 단식투쟁을 한다는건 그냥 혼자 조용히 굶어죽을테니 아무도 신경쓰지 말라는 의미와 상통했다. 그러다보니 주로 시전자는 왕이나 성직자 등, 단식으로 건강을 해치거나 사망에 이르는게 사회적 영향력이 컸던 사람들이였다.
고대 아일랜드에는 다른 사람과의 분쟁이 있을 때 억울함을 알리기 위해 그 사람 집 앞에서 단식하는 풍습이 있었다. 한국 역사에도 종종 왕의 폐위에 반대해 식음을 전폐하다가 사망했다는 둥, 충격을 받아 식음을 전폐하다가 사망했다는 둥의 기록이 많이 나온다. 또한 조선의 왕, 왕비. 대비들이 정치적 싸움의 방법으로 수라와 탕약을 거부하는 단식을 행한 기록이 종종 나온다. 특히 신하들로선 왕/왕비의 건강을 해치게 만드는 건 어마어마한 불충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현대적인 의미의 단식투쟁은 녹색혁명으로 인류가 만성 식량부족으로부터 탈피하고, 인권과 평등이라는 권리가 확실하게 자리잡은 이후부터, 즉 국가입장에서 국민이 한명이라도 아사를 하게되면 곤란하게 된 시점부터 본격적으로 세계 곳곳에서 써먹기 시작한 투쟁 방식이다. 대표적 사례로 인도의 성웅 마하트마 간디는 '''75세'''의 나이로 옥중에서 3주간이나 단식을 한 바 있다. 첨언하자면 단식 투쟁은 본래 부당한 권력에 구금된 수감자들이 주로 행한 투쟁방식이다. 우리나라 역사에는 식음을 전폐하는 사례가 있어 적합성이 떨어지지만, 현대에 행하는 물을 마시면서 유지하는 단식은 서구권에서 행하던 재소자들의 유일한 투쟁방식으로서 행해지던 것들이다.
재소자들은 신체를 구금당한, 즉 자유를 빼앗긴 몸이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남은 자유가 신체 유지를 위한 행동 밖에 없기 때문에 이를 인질로 삼아 인질극을 벌이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구금이란 살아서 자유를 박탈하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처벌의 대상이 살아있지 않으면 성립하지 않는다. 즉, 수감자들은 자신의 생존을 포기함으로서, 그리고 그 생존을 포기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권력의 비인도적 행위(재소자가 아사하는 것은 권력의 도덕성에 영향을 준다)라는 타격을 입히기 위해 하는 것이다.
물론 보복도 만만치 않았는데, 교도소 측은 이들의 단식투쟁을 저지키 위해 묽은 죽을 담은 호스를 목구멍에 마구잡이로 꽂아 '강제급식'을 실시했다. 대표적인 예로 1909~1913년까지 영국 여성참정권 운동가들이 옥중에서 단식투쟁을 하다 강제급식을 당했고, 아일랜드 독립운동가 토마스 애쉬도 더블린 감옥에서 투쟁 도중 강제급식으로 숨졌다. 한국에서도 비전향 장기수 손윤규, 김용성, 변형만 등과 같이 단식투쟁을 하다 강제급식으로 숨을 거둔 사례도 있다. 이러한 행위는 뉘른베르크 선언 및 헬싱키 선언에서 규정한 인간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행위로 규정되어 1975년 '도쿄 선언'에서 금지하고 있다.
1981년 아일랜드 단식투쟁은 위에서 언급한 사례 중 최대규모로 이루어진 사례이며, 이를 바탕으로 의학자들은 단식의 최대시한을 알아낼 수 있었다.[4] 아일랜드인 단식투쟁 사례에서 사망은 55-75일 사이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최초의 사망은 46일에 발생 했으나, 이는 급성 영양실조로 인한 수분 흡수 장애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의학자들이 정의한 단식에 부합하지 않아 빠지게 되었다. 이 사례를 바탕으로 의학계에서는 단식의 정의를 단식 후 공복통이 사라지는 72시간 부터 사망에 이를 수 있는 72일 까지로 정의하고 있다. 단식 후 72시간이 단식으로 계산되는 첫날인 이유는 이 시점이 되어야 체내에 저장된 모든 당이 소모되기 때문이다.
즉, 단식투쟁은 '''신체의 자유가 부당하게 박탈된 이들이 고안한, 그 끝과 한계가 명확한 투쟁 방식'''이라 할 수 있다.
3. 예외
식음(食飮)을 전폐한다는 표현을 자주 쓰지만 실제로는 물은 마시므로 식음에서 음(飮)이 빠진다. 물을 허용하는 이유는 0kcal이며, 투쟁목적이 이슈화가 되기도 전에 죽어버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물이 없으면 인간의 생존시간은 극단적으로 짧아진다. 같은 이유로 소금 역시 허용하곤 한다. 뿐만 아니라 일부 세력의 경우 자신의 정치적 성향과 일치하는 사람들이 단식투쟁을 하는 경우 단식의 의미를 200kcal 이하 섭취로 느슨하게 규정하며 각종 부식물의 취식을 긍정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일반적으로 단식이라 불리지는 못한다.
4. 기한
보통 단식의 경우 7일을 넘기면 적신호가 오고 10~14일을 넘기면 정말로 아사할 수 있으므로 매우 신중해야 하는 선택이다. 인체의 한계점이 72일, 기적을 바란다고 해도 75일이 확인된 한계이기 때문에 그 기간은 명확히 72-72법칙에 의해 정해진다. 그러나 현대에 이루어지는 자발적인 단식투쟁의 경우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므로, 스스로 잠정기한을 일주일 정도로 잡고 이후 대안을 모색한다든가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릴레이 단식''' 이라고 해서 여러명이 한끼 혹은 하루 단위로 돌아가면서 단식하는 경우도 있다. 주로 장기 단식하는 사람에 대한 동조의 의미로, 혹은 퍼포먼스에 가까운 형식으로 진행할 때 사용된다. 이런 경우는 단식이 아니라고 보기도 한다, 위에도 썼듯 72시간은 해야 의학적으로 단식으로 인정되기 때문.
아래에 기술된 단식에 따른 건강상의 문제가 심각하기 때문에, 장기간 단식이 행해지는 상황에서는 여차하면 병원으로 이송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실제 사례에서 보자면, 단식 중에 물이 허용되는 것을 이용해 물을 이용해 포도당 섭취를 꾀하며 눈을 속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겉으로 보기에만 단식일 뿐 의학적으로는 단식이 되지 않는다. 의학적인 단식의 기준은 체내 포도당을 모두 사용한 72시간뒤 신체가 기아상태를 인지하고 체내의 케톤기를 분해하려 하는 시점부터가 단식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위의 눈속임 사례의 경우 시행자의 목숨에는 지장이 없지만, 영향불균형으로 인한 질병과 후유증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으므로 시위방식으로는 적합하다. 오히려 의학적으로나 신체적으로 기아상태를 인지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공복통은 계속된다. 즉, 72시간 이후 오는 평화로운 죽음으로의 길이 막혀버리는 셈이다.
5. 건강
의학적으로 보면 오랜 단식은 특히 칼슘 손실을 가중시켜 뼈와 치아에 치명적이라고 하는데, 실제로 단식투쟁을 '제대로' 한 사람들 중에는 그냥 넘어져도 쉽게 골절상을 입거나 치아가 우수수 빠지는 등 상당한 후유증을 안고 사는 이들이 많다.
꼭 단식투쟁이 아니더라도, 강제수용소 등 영양 조건이 매우 불량한 곳에서 오랫동안 생활한 사람들 중에는 출소 후에도 골다공증이나 치주질환 등으로 고생하는 이들이 상당히 많다. 황석영의 경우 무허가 방북으로 인해 수감 생활을 하던 중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했다고 하는데, 그 결과 성한 치아가 거의 없다고 한다.
단식의 경우 굶는 것도 문제지만 굶고 나서도 문제다. 오랜 단식의 경우 체내 신체대사에 문제를 반드시 일으킨다. 신체대사 체계가 오랜 기아상태에 적응하도록 변화되어있는데 갑자기 과량의 음식을 섭취하게 되면 이러한 신체대사에 이상이 생기고 이러한 이상이 반드시 심장에 문제를 일으키고 이로 인해 죽기 마련이다. 그런 이유로 오랜 단식 후에는 묽은 죽부터 시작해서 단계적으로 평범한 식사로 향하는 게 정석이다. 원해서 한 단식은 아니긴 하지만, 2차대전 종전 후 수용소의 포로들을 발견한 군인 중 일부는 너무 야윈 포로들이 안쓰러웠는지 빵이나 고기같은 것들을 마구 제공했고 때문에 죽은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사실 이러한 일때문에 많이 밝혀진 사실들이 많다. 조선왕조실록에도 너무 굶은 사람에게 갑자기 밥을 주면 죽으니 죽부터 천천히 주라는 말이 나온다. 의학/과학적으로 다루어진 것은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때에 이르러서였다.
심지어 교정기관 측도 만에 하나 있을 옥중 단식투쟁으로 인한 불상사를 막기 위해 형집행법 40조 1~2항에 따라 먼저 의무관에게 먼저 관찰, 조언, 설득을 하도록 하고, 수용자가 이를 거부할 시 의무관에게 적절한 영양보급 조치를 취하도록 규정하고 있다.[5]
영화 '이장과 군수'에서 이장 차승원이 방폐장 반대 단식투쟁 3일째에 몰래 음식을 먹었다가 배탈나는 장면이 있다, 모 인기가수가 단식 도중 치킨을 몰래 먹었다가 설사가 난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 기인한다. 한편, 본인은 설사로 하루 고생했으니 그 기간도 단식한 걸로 퉁치자는 기상천외한 개드립을 날리기도 했는데, 일부 언론은 그 뜻을 받아들여 연속된 기간으로 인정해줬다.(...)
6. 사례
6.1. 정치인
- 김대중: 1977년 진주 교도소에서 면회 및 변호사 접견 제한에 항의하며 6일간의 단식 투쟁을 하였다. 1990년에는 내각제 반대와 지방자치제 실현을 주장하며 13일간의 단식을 하였다.해당기사
- 김성태: 2018년 5월 3일 조건 없는 드루킹 특검을 요구하며 단식을 선언하였다. 단식 도중 판문점 선언 비준을 야당이 안해준다며 불만을 품은 30대에게 폭행을 당하고 병원을 수차례 들락날락거렸다. 결국 의사의 조언과 당내의견을 받아들여 9일만에 단식을 중단했다. 드루킹 특검은 결국 이뤄지게 되어 소기의 성과는 달성했다. 다만 본인은 단식을 쉽게 생각했는지 시작한지 며칠도 안가 힘들다는 투를 보였다고...
- 김영삼: 1983년 전두환에 의해 가택연금 당시 민주화 5개항(언론통제 전면 해제, 정치범 석방, 해직 인사 복직, 정치활동 규제 해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며 무려 23일간 단식을 이어가다 주변의 설득으로 중단하였다.
-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 인도의 독립을 영국에 청원하기 위해 단식을 하였으며, 말년에는 힌두교vs이슬람교 갈등으로 인도에서 갈등을 빚던 파키스탄의 분리를 반대하며 이런 대립을 막기 위해 단식을 하다 힌두교 급진 청년에게 살해당하였다.
- 우상호: 1987년 6월항쟁 당시 호헌조치에 항의하는 의미로 단식과 삭발 중 골라야했는데 같이 투쟁하던 배우 우현이 자신은 못 굶는다고 해서 우현은 삭발은 자신은 단식을 했다고 하였다.
- 이재명: 2016년 6월 중앙정부의 지방재정 개편법에 반대해 단식투쟁을 한 바 있다. 이후 이재명 시장은 당시 김종인 대표가 당 차원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명분을 주셨기 때문에 자기가 단식을 중단할 수 있었다며 단식투쟁은 출구전략도 중요하다는 우스갯소리[6] 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해당 단식투쟁의 취지에 대해 많은 이들이 공감하면서 이재명 시장은 지지기반을 늘려나가게 된다. 더불어 후술된 이정현 대표와 달리 공원 중앙에서 단식을 공개적으로 했다는 점이 비교되기도 했다.
- 이정현: 2016년 10월 정세균 국회의장의 사퇴를 촉구하며 단식을 진행한 적이 있는데, 재미있는 점은 이때 단식을 한 장소가 국회 당대표실로 문을 걸어잠그고 누워서 하는 비공개 단식이었다는 점이다. 다만 단식과정은 촬영했다고 한다. 단식 초기부터 최순실 관련해 당시 코너에 몰려있던 박근혜 대통령을 지키기 위해 국정감사를 회피하려는 꼼수용 단식 아니냔 부정적인 시선을 받았고, 비공개 단식 논란으로 더 동력을 잃으면서 단식은 본인의 건강 문제라는 명분으로 7일만에 종료되었다. 이로 인해 1주일간 국정감사는 피했다.
- 이준석 등 원외 소장파: 아이러니하게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2016년 11월, 박근혜 대통령을 싸고 도는 듯한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의 태도에 화가 난 이준석 전 비대위원, 김상민 전 국회의원 등 원외 새누리당 당협위원장들이 이정현 대표의 사퇴를 요구하며 국회 당대표실 바로 옆에서 단식농성을 했다. 결국 이정현 대표가 12월 당 대표를 사임하면서 농성은 일단락되었다.
- 자유한국당 의원들: 2019년 1월 25일 조해주 중앙선관위원 임명에 반발하며 '좌파독재 및 초권력형 비리 규탄 릴레이 단식 계획'을 내놓았는데 놀랍게도 오전조, 오후조를 짜서 5시간 반씩 안먹는 방식이었다. 이것은 굶는것도아니고 그냥 식사 간격이 5시간 반 뿐인것이라 조롱을 당하였다. # 결국 빗발치는 조롱에 이름을 단식에서 릴레이 농성으로 바꾸었고, 그나마도 얼마 못 가 슬며시 그만두면서 끝났다.
- 전두환: 5.18 특별법으로 수감된 것에 항의하는 의미로 감옥에서 단식투쟁을 했고, 당시 교도소 측은 강제급식까지 생각했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 단식 중 쓰러져 병원에 이송되어 죽을 먹고 식중독에 걸려 단식을 중단하게 되었다.
- 정청래: 문재인 의원과 같이 세월호 특별법 지정문제로 단식. 총 24일을 버텼다.
- 정태근: 2011년 한미 FTA 합의 비준을 요구하며 단식을 하였다.
- 조원진: 2017년 10월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구속 연장에 반대하며 단식투쟁에 들어갔으나, 결국 구속 연장이 결정되었다. 총 14일 만에 포기했다.
- 천정배: 2007년 민노당의 문성현 의원과 함께 2007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을 반대하며 25일간 단식을 하였다.
- 최병렬: 당시 한나라당 대표로 2003년 11월 26일부터 12월 5일, 총 열흘간 단식을 벌였다. 참여정부 인사의 비리 의혹에 대해 특검을 하자고 주장했으나, 대통령이 일부 사항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자 이에 반발해 단식 투쟁을 벌였다. 도중에 곰국이나 죽을 먹었다는 보도도 있었지만 쌀뜨물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사실, 단식농성을 할 때 물까지 안 마시는 것은 아니다.
- 현애자: 전 민주노동당 의원으로 2007년 제주 군사기지 건설에 반대하며 27일간 단식을 하였다.
- 황교안: 자유한국당의 대표로서 영수회담을 제안하며 단식 농성을 벌였다.[7] 요구사항은 지소미아를 계속 유지할 것,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 반대, 선거법개정안 반대 등 3개이다. 그 중 지소미아 부분은 단식 3일째 날 한국과 일본이 극적으로 합의하면서 "조건부 종료유예"라는 이름으로 사실상 이루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모든 제안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기 때문에 단식을 이어갔다. # 그리고 단식 8일차가 되자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의식을 잃어 병원으로 후송됨으로 자연스레 그만두게 된다. #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의식을 잃은 것에 대해서 8일 단식하고 의식 잃어 병원 실려가는 건 또 처음 본다거나 세월호 유가족의 예시를 들어 황대표를 반대하는 일부 네티즌들이 비난하였다. # 하지만 황교안 대표는 다른 사례들과 달리 소금물조차 거부하여 복합 탈수 증세로 단백뇨가 나오기도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음식 섭취를 끊어도 물만 마시면 한 달 정도는 버틸 수 있지만 수분 흡수가 부족하면 누구도 일주일을 못버티고 특히 추위 속에서는 훨씬 더 빨리 한계를 맞기때문에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6.2. 비정치인
- 강의석: 사립학교 종교 교육에 반대하여 46일 동안 단식 투쟁을 벌였다. 그에 대한 호불호와는 별개로 진정한 단식 투쟁 사례로서 자주 언급되는 인물인데, 당시 사진을 보면 정말로 뼈와 가죽만 남아서 해골 직전 상태가 된 것을 볼 수 있다.#
- 신재용 :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으로 비위사실이 확인되었음에도 합당한 징계가 안내려진, 권력형 성폭력을 저지른 H교수를 파면하라는 요구를 하며 단식 투쟁을 진행했다.
- 김건중: 동국대학교 부총학생회장으로 종단 개입을 반대하면서 단식 투쟁을 진행했다. 김건중 부총학생회장은 단식투쟁 50일째 되는 2015년 12월 3일에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 세월호 특별법이 지지부진하자, 제정을 위해 단식투쟁을 했다. 특히 이들 중 가장 유명한 김영오는 무려 46일 간이나 단식을 이어갔다. 중단 및 입원했을 때, 의사들도 46일이나 단식한 사람의 데이터가 거의 없어 치료와 회복시키는 데에 애를 먹을 정도였다고. 그 와중에 유가족들 근처에서 세월호 특별법에 반대하는 이들이 폭식투쟁을 한답시고 가족 잃은 피해자들이 최후의 수단으로 굶고 있는 와중에 온갖 것을 먹어대는 식으로 조롱을 하는 만행을 벌여 빈축을 샀다.
- 신상옥: 북한에 납치되었던 신상옥 감독이 2번째 투옥 때 이자들이 자신을 정말로 죽이려는 것인지 아닌지 시험하기 위해 며칠간 단식을 했었다고 수기에 적혀 있다. 처음엔 간수들이 조금 있으면 밥 달라고 빌 것이라고 비웃다가 신상옥 감독이 쓰러지자 인민무력부 간부가 내려와서 저 사람 죽으면 너네도 죽는다고 날뛰어서 대접이 좋아졌다고.
- 안내상: 학생운동으로 구속되었을때 교도소 내에서 단식투쟁을 했다고 한다.
- 김장훈: 영화인들과 함께 세월호 사건 당시 사실관계 확인, 특별법 제정, 박근혜 당시 대통령의 방문 등을 요구하며 단식을 감행했다. 그러나 3일째에 치킨을 먹고 SNS에 올린 글 때문에 논란이 되었다. 이후 유가족들과 함께 버티다가 건강상의 이유로 그만두었다.
- LG 씨름단 선수들: LG투자증권이 우리금융그룹으로 매각될 당시 우리금융그룹이 씨름단 운영을 하지 않겠다고 나서자 장충체육관 내 씨름연맹 사무실에서 2004년 11월 30일부터 12월 1일까지 이틀간 단식투쟁을 벌였다. 특히 당시 이 팀의 간판 스타였던 최홍만과 천하장사 출신 김경수도 단식에 참여했다. 씨름선수는 일반인들과 달리 평소 식사량이 엄청난데다 한 끼만 굶어도 선수로서의 역량이 크게 좌우되는 만큼 음식을 끊는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때문에 짧은 단식이었지만 이들의 외침은 강렬했다. 그러나 이들의 단식투쟁에도 우리금융그룹은 씨름단 인수를 거부했고 결국 씨름단은 해체돼 선수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1] 전두환 정권에 대항하여 민주회복, 정치복원 등 민주화를 위한 전제조건을 걸고 단식 투쟁을 하였다.[2] 파키스탄의 분리를 반대하고 이슬람-힌두교와의 화합과 통일을 위해 단식 투쟁을 하였다.[3] 이 333법칙이 통설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 생존시간은 이보다 더 길다. 아래에 나오는 단식기록들이나 재해로 고립된 상태에서의 생존 사례 등이 극한 상황에서의 인간의 생명력이나 인내력이 얼마나 질긴지 보여준다. '''물론 개인차가 있는 것이라 저 333의 시한이 되기도 전에 죽을 수도 있다.''' [4] 이 단식투쟁을 주제로 만든 대표적인 영화가 어느 어머니의 아들과 헝거[5] 간단히 말해, 묶어 놓고 링거 꽂는다는 뜻이다. 옥중 사례는 확인할 수 없었으나, 정신질환자를 대상으로 시술하는 경우는 의외로 흔하다.[6] 하다가 진짜 죽을 수도 있으므로 틀린 말은 아니다.[7] 그런데 농성장소가 청와대 앞이었고, 여기서 천막을 치는 건 불법이라 비난을 받았다. 철거 요구를 받았는데도 듣지 않았고 오히려 점점 더 큰 천막을 쳤기 때문. 당직자들이 교대로 지키게 하며 근무표까지 짰고 이 중에 임산부들 3명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것도 '황제단식, 의전단식, 갑질단식'(민주당 논평의 표현)이라며 비판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