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오지 않는 해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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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4월 11일에 개봉한 영화로 빨간 마후라와 함께 60년대 한국 전쟁영화의 양대 산맥이다. 당시 배달의 기수식의 국군 미화영화가 판치던 때였으나, 그중에서 군계일학적으로 돋보이는 수작. 현재 기준으로 봐도 이 영화는 이념을 떠나 전쟁의 비극과 위기에서 보여지는 인간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감독은 이만희로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자주 언급된다. 제1회 청룡영화제 감독상 수상. 주연은 장동휘, 최무룡, 구봉서, 이대엽, 독고성. 나중에 출연 배우 중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두 명이나 나왔다.
한국전쟁 당시의 대한민국 해병대의 활동을 중심으로 한 영화. 제1해병사단으로 추정되는(정확히는 제1해병연대전투단) 해병대의 한 소대의 이야기를, 소속 1개 분대원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이끌어 나간다.
전체적인 이야기는 인천(또는 서울) 탈환을 위한 시가전[2] 중 인민군에 의하여 희생당한 가족의 생존자인 영희[3] 를 해병들이 구조하게 되고 해병들이 혼란스러운 국내상황을 고려하여 몰래 키우게 된다.[4] 그러던 중 결국 대대장이 그걸 발견하지만, 대대장이 융통성있게 처리하여 영희는 오히려 분대의 마스코트로 승격되며, 후반에 최후의 작전 때는 같이 가겠다는 것을 말리느라 대대장실에 감금하기도 한다.
그 후 잘 지내다가 사천강 전투 때[5]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인하여 퇴각이 여의치 않게 된 대대에서 가장 잘 싸우는 주인공들의 중대를 퇴각할 시간을 벌기 위한 후위부대로 두고 떠난다.
그리고 분명히 소대가 있었을텐데 1개 분대만 골짜기 정중앙에 참호를 파고 끝까지 항전하다가 1명은 구조를 위한 전령으로 띄우고 나머지는 죽은 척하며 적 후방으로 들어가 숨는다는 작전을 구사하기로 했으나, 어떤 칠칠치 못한 녀석이 쏘는 바람에 중공군 후발대가 이들을 발견하고 교전, 결국 격전 끝에 두 해병만이 살아서 귀환한다는 이야기. 전령 또한 살아남았으니 정확히는 3명.
결국 엔딩에서는 영희와 얼싸안고 우는 전령 아저씨와 후방이 된 참호에서 엉엉 울면서 걸어나오는 두 해병이 나오면서 끝난다. 제목 그대로 '''돌아오지 않는 해병'''이 되었다.
촬영 당시 국내에서는 가짜 총보다 진짜 총을 구하기가 더 쉬워서 공포탄도 아닌 '''실탄을 써서 영화를 찍었다고 한다'''.[6] 이 때문에 촬영 당시 엑스트라 한 사람이 진짜 폭발에 휘말려 다리를 하나 잃었다고 한다. 이 보상금으로 강남 지역 농지 7마지기[7] 를 주었다고 하는데, 세월이 훨씬 지난 뒤에 강남 개발 당시 엄청난 값으로 팔려 그 엑스트라는 거액을 벌었다는 후문이 있다.(씨네21 참고) 물론 이건 카더라다. 덕분에 사격 장면들 하나는 정말 실감난다. 공포탄을 쏘는 요즘 영화들과는 달리 총 쏘면서 반동을 받는 게 확실히 보인다.
그러나 중공군의 인해전술신을 보면 당시 방한복을 비슷하게 맞춰서 입혀놓고 아무 무장도 없이 맨손(!)으로 공격해온다. 아무래도 적성국 무기는 구하기 어려운데다 예산마저 열악했을 당시 사정상 그 많은 중공군 엑스트라들에게 총을 들려줄 여유까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인 듯. 다만 보통 총 쏠 일이 없는 엑스트라들에게는 목총이라도 만들어 들려주거나 하는데, 딱히 총 쏘는 장면이 없고 멀리서 잡아주어 목총이 티가 안 날 법한 장면에서도 역시 엑스트라들이 총 없이 나오는 걸 보면 예산이 워낙 열악하긴 했던 모양.[8]
권선징악과 반공 이데올로기가 주제였던 당시의 한국 전쟁영화와는 달리 전쟁의 속에서 발휘되는 인간애와 전우애를 내용으로 담고 있다. 특히 영화 말미에 분대장(장동휘 분)이 살아남은 두 명의 해병에게 남긴 말이 영화의 주제를 함축하고 있다.
1970년에 나온 특공대와 돌아오지 않는 해병은 이 영화와 아무 연관이 없다. 단지 장동휘가 나왔다는 공통점이 있을 뿐.
DVD는 처음에 레터박스가 들어간 비 아나몰픽 포맷의 열악한 화질로 출시되었는데, 2010년에 이만희 컬렉션 DVD 박스셋에 포함되어 재발매 된 것은 제대로 된 아나몰픽 DVD이며 화질이 많이 좋아졌다. Blu-Ray는 출시되지 않았지만 TV에서 HD급으로 방송된 적이 있다. 대륙의 p2p에서도 가끔 발견할 수 있다.
여담으로 김은식 작가가 고 임수혁을 추모하는 '돌아오지 않는 2루주자'라는 칼럼을 쓴 적이 있는데, 아마 제목의 모티브를 여기서 따온 듯하다. 후에 동명의 책도 출간되었다. 전작 야구의 추억의 후속작 쯤 된다고 보면 되겠다.
축구 경기에서 수비수가 공격에 가담하다 역습 상황에서 돌아오지 않을 때 '돌아오지 않는 윙백', '돌아오지 않는 센터백' 등으로 비꼬기도 한다.
90년대 중반 한국 케이블TV의 초창기에 컨텐츠 부족으로 같은 영화/방송을 수십 차례 재방송하는 일이 많았는데 당시 이 영화도 엄청나게 재방송되자 견디다 못한 한 시청자가 케이블 방송사에 전화를 걸어 "돌아오지 않는 해병이 돌아오지 않게 해 주세요."라고 했다는 전설이 있다.
한국 영화 역사상 별난 기록이 하나 있는데 바로 '''엉덩이 노출'''이 나온 최초의 한국 영화라는 것(...) 그 주인공은 구봉서 선생 되시겠다. 다만 의외로 워낙 코믹한 남성 캐릭터의 노출이다 보니 보수적인 당시 사람들도 웃고 넘어갔다.
1. 개요
1963년 4월 11일에 개봉한 영화로 빨간 마후라와 함께 60년대 한국 전쟁영화의 양대 산맥이다. 당시 배달의 기수식의 국군 미화영화가 판치던 때였으나, 그중에서 군계일학적으로 돋보이는 수작. 현재 기준으로 봐도 이 영화는 이념을 떠나 전쟁의 비극과 위기에서 보여지는 인간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감독은 이만희로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자주 언급된다. 제1회 청룡영화제 감독상 수상. 주연은 장동휘, 최무룡, 구봉서, 이대엽, 독고성. 나중에 출연 배우 중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두 명이나 나왔다.
2. 줄거리
한국전쟁 당시의 대한민국 해병대의 활동을 중심으로 한 영화. 제1해병사단으로 추정되는(정확히는 제1해병연대전투단) 해병대의 한 소대의 이야기를, 소속 1개 분대원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이끌어 나간다.
전체적인 이야기는 인천(또는 서울) 탈환을 위한 시가전[2] 중 인민군에 의하여 희생당한 가족의 생존자인 영희[3] 를 해병들이 구조하게 되고 해병들이 혼란스러운 국내상황을 고려하여 몰래 키우게 된다.[4] 그러던 중 결국 대대장이 그걸 발견하지만, 대대장이 융통성있게 처리하여 영희는 오히려 분대의 마스코트로 승격되며, 후반에 최후의 작전 때는 같이 가겠다는 것을 말리느라 대대장실에 감금하기도 한다.
그 후 잘 지내다가 사천강 전투 때[5]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인하여 퇴각이 여의치 않게 된 대대에서 가장 잘 싸우는 주인공들의 중대를 퇴각할 시간을 벌기 위한 후위부대로 두고 떠난다.
그리고 분명히 소대가 있었을텐데 1개 분대만 골짜기 정중앙에 참호를 파고 끝까지 항전하다가 1명은 구조를 위한 전령으로 띄우고 나머지는 죽은 척하며 적 후방으로 들어가 숨는다는 작전을 구사하기로 했으나, 어떤 칠칠치 못한 녀석이 쏘는 바람에 중공군 후발대가 이들을 발견하고 교전, 결국 격전 끝에 두 해병만이 살아서 귀환한다는 이야기. 전령 또한 살아남았으니 정확히는 3명.
결국 엔딩에서는 영희와 얼싸안고 우는 전령 아저씨와 후방이 된 참호에서 엉엉 울면서 걸어나오는 두 해병이 나오면서 끝난다. 제목 그대로 '''돌아오지 않는 해병'''이 되었다.
3. 기타
촬영 당시 국내에서는 가짜 총보다 진짜 총을 구하기가 더 쉬워서 공포탄도 아닌 '''실탄을 써서 영화를 찍었다고 한다'''.[6] 이 때문에 촬영 당시 엑스트라 한 사람이 진짜 폭발에 휘말려 다리를 하나 잃었다고 한다. 이 보상금으로 강남 지역 농지 7마지기[7] 를 주었다고 하는데, 세월이 훨씬 지난 뒤에 강남 개발 당시 엄청난 값으로 팔려 그 엑스트라는 거액을 벌었다는 후문이 있다.(씨네21 참고) 물론 이건 카더라다. 덕분에 사격 장면들 하나는 정말 실감난다. 공포탄을 쏘는 요즘 영화들과는 달리 총 쏘면서 반동을 받는 게 확실히 보인다.
그러나 중공군의 인해전술신을 보면 당시 방한복을 비슷하게 맞춰서 입혀놓고 아무 무장도 없이 맨손(!)으로 공격해온다. 아무래도 적성국 무기는 구하기 어려운데다 예산마저 열악했을 당시 사정상 그 많은 중공군 엑스트라들에게 총을 들려줄 여유까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인 듯. 다만 보통 총 쏠 일이 없는 엑스트라들에게는 목총이라도 만들어 들려주거나 하는데, 딱히 총 쏘는 장면이 없고 멀리서 잡아주어 목총이 티가 안 날 법한 장면에서도 역시 엑스트라들이 총 없이 나오는 걸 보면 예산이 워낙 열악하긴 했던 모양.[8]
권선징악과 반공 이데올로기가 주제였던 당시의 한국 전쟁영화와는 달리 전쟁의 속에서 발휘되는 인간애와 전우애를 내용으로 담고 있다. 특히 영화 말미에 분대장(장동휘 분)이 살아남은 두 명의 해병에게 남긴 말이 영화의 주제를 함축하고 있다.
또한 이 뿐만 아니라 영희가 작전에 같이 가겠다고 하는걸 못가게하고 끝까지 가겠다고 하자 연대장 방에 가둬놓고 가는데 지금 현재 전쟁터에서 영희 만한 아이들을 강제로 징집해 총들려주고 전쟁터로 내모는 현실을 생각하면 이 영화의 의미를 알수 있다.너희 둘만은 꼭 살아 돌아가서 증인이 돼라.
수 많은 사람이 수 많은 사람을 죽이고 죽었다고.
'''인간은 반드시 전쟁이 필요한지 물어봐라.'''
1970년에 나온 특공대와 돌아오지 않는 해병은 이 영화와 아무 연관이 없다. 단지 장동휘가 나왔다는 공통점이 있을 뿐.
DVD는 처음에 레터박스가 들어간 비 아나몰픽 포맷의 열악한 화질로 출시되었는데, 2010년에 이만희 컬렉션 DVD 박스셋에 포함되어 재발매 된 것은 제대로 된 아나몰픽 DVD이며 화질이 많이 좋아졌다. Blu-Ray는 출시되지 않았지만 TV에서 HD급으로 방송된 적이 있다. 대륙의 p2p에서도 가끔 발견할 수 있다.
여담으로 김은식 작가가 고 임수혁을 추모하는 '돌아오지 않는 2루주자'라는 칼럼을 쓴 적이 있는데, 아마 제목의 모티브를 여기서 따온 듯하다. 후에 동명의 책도 출간되었다. 전작 야구의 추억의 후속작 쯤 된다고 보면 되겠다.
축구 경기에서 수비수가 공격에 가담하다 역습 상황에서 돌아오지 않을 때 '돌아오지 않는 윙백', '돌아오지 않는 센터백' 등으로 비꼬기도 한다.
90년대 중반 한국 케이블TV의 초창기에 컨텐츠 부족으로 같은 영화/방송을 수십 차례 재방송하는 일이 많았는데 당시 이 영화도 엄청나게 재방송되자 견디다 못한 한 시청자가 케이블 방송사에 전화를 걸어 "돌아오지 않는 해병이 돌아오지 않게 해 주세요."라고 했다는 전설이 있다.
한국 영화 역사상 별난 기록이 하나 있는데 바로 '''엉덩이 노출'''이 나온 최초의 한국 영화라는 것(...) 그 주인공은 구봉서 선생 되시겠다. 다만 의외로 워낙 코믹한 남성 캐릭터의 노출이다 보니 보수적인 당시 사람들도 웃고 넘어갔다.
4. 사회상
- 양공주: 미군에게 단순히 매춘을 하는 사람을 깎아 내리는 단어로 인식되어 있지만 실상은 한국 정부에 의해 관리되고 충원되었다. 그러나 실상을 모르던 일반인들에게 당시 양공주는 '코쟁이한테 아랫도리나 돌리는 년'일 뿐이었다.[9] 미군만 상대하는 윤락업소에서 국군은 상대 안 한다고 하자 다 부숴버린 후에 파손된 기물의 몇배가 되는 돈을 주고 하려 하지만 옷벗는 와중에 소집 떨어지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코미디언 구봉서와 옥신각신 하는 성깔 있는 접대부 역을 가수 김혜림의 어머니인 원로 가수 나애심이 맡았다.
- 트위스트: 영화가 제작된 60년대에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트위스트가 51년도에 한 해병에 의해서 "잘 봐, 앞으론 이게 대세가 될 거야."라며 다같이 춘다. 참고로 그 해병역은 원로 코미디언 구봉서.
- 간첩: 후방에서 훈련 도중 간첩이 나타나는데 위 이야기에 나오는 해병이 똥싸다 발견한다. 이 똥싸던 해병도 역시 감초 역할인 구봉서. 인솔자인 분대장이 저격 수준의 사격 실력으로 폼나게 팔과 다리를 쏴 생포하고 포상을 받는다.
- 마을 간의 반목: 당시 인민재판이나 여러 사상적 갈등으로 한 마을이 쑥대밭이 되고 한 가족이 풍비박산 나는 유명한 이야기가 여기서도 나온다. 영희가 오빠라고 부르는 해병이 새로온 해병과 바로 멱살잡게 되는 장면이 나오는데, 알고 보니 가족이 이념의 갈등을 겪은 케이스.
- 민둥산: 신경 쓰고 보면 극중의 야외 풍경에 민둥산이 참 많이 나온다는 걸 알 수 있다. 나무라고 해 봐야 키작은 소나무 정도가 대부분이다. 옛날에는 생활 전반에 목재가 필요했으므로 남벌이 일상적이었고, 전쟁을 겪으면서 각종 폭격과 전투에 많은 산이 황폐화 됐으며, 그나마 남아있던 숲들도 전후 복구사업을 위한 목재 채취에 탈탈 털려야 했다. 영화가 제작된 60년대 초반은 이런 모든 악조건들이 갖춰진 그야말로 민둥산의 절정기였다. 심지어 지리산에 남아있는 산림을 '도벌'하다 적발되는 것이 신문 사회면에 대서특필될 정도. 지금은 웬만큼 높이가 있는 산이라면 숲이 울창하게 우거진 것이 당연시 되지만 80년대까지만 해도 황량한 민둥산들이 꽤 많았다. 다행히 60년대부터 시작된 녹화사업과 사회상의 변화를 겪으면서 30년 후에는 푸른 숲들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런 점은 북한도 비슷했는데, 남한과는 달리 여기는 21세기까지도 민둥산이다. 게다가 식량을 더 많이 생산하려고 다락논까지 만들었다. 중국 쪽에서 보면 숫제 나무를 찾아보기가 힘들다. 여름마다 심해지는 풍수해는 덤.
- 중공군: 의도했는지 모르겠지만 연출적인 면에서 신의 한 수. 주적이 북한군이었다면 같은 언어를 쓰는 고로 당시 반공 분위기 상 악랄한 인민군 묘사가 나올 것이 당연히 요구될 것이고 이렇게 외부에서 연출에 개입하다 망한 영화가 한둘이 아님은 숱한 망작들이 증명한다. 여기선 아예 외국국인 중공군을 등장시켜 달려드는 적군 이상의 역할을 주지 않게 했다.
[1] 신성일, 엄앵란 주연의 맨발의 청춘이라는 설도 있다.[2] 당시 미국을 중심으로 한 2차대전에 관한 영화를 봐도 당시 국군이 가진 한국전쟁시 장비들이 모두 현용, 배우가 모두 군필자라는 한국의 특수성이 부합하여 액션씬은 여느 외국 영화 못지 않다. 요즘의 태극기 휘날리며 이상.[3]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옥희 역을 비롯해서 아역 스타로 인기 절정이던 전영선 양이 깜찍한 연기를 선보인다.[4] 행군 중엔 마대자루에 담아서 둘이 지고 다닌다.[5] 52년 도에 있었던 전투, 판문점에서 한강 하구로 흐르는 강이다.[6] 80년대 최무룡이 모 스포츠지에 연재했던 회고담에 따르면, 한창 촬영하는데 지프를 타고 지나가던 미군 장교가 실탄을 쓰는 촬영 광경을 보고 기겁을 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당시에 촬영 협조를 하던 군 당국에서도 사고 우려 때문에 크게 고민한 듯. 결국 특등사수들을 전 군에서 차출한 후에 모두 '''의도적인 오조준을 해서''' "절대 맞히지 말라"고 주문했다고 한다. 말이 쉽지 상륙씬에서 그게 되다니...[7] 마지기는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그래도 경기도 및 서울에서는 1마지기가 150평 정도라고 하니 7마지기는 1000평이 넘는다. 상당한 거액을 벌만했다... [8] 하지만 실제로도 많은 수의 중공군에 비해 무기가 부족해 무기 없이 전투를 치르는 중공군들도 있었다고 한다. 주로 꽹과리나 대나무창 등이 쥐어지기도 했다.[9] 실제로 당시 청소년기를 보낸 사람들의 증언이 그렇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 인식의 한계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