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국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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楊國鎭
1916년 ~ 1981년
1938년 봉천군관학교를 제6기로 졸업하고, 이어 신경의 육군군수학교를 제2기로 졸업 후, 만주군에서 군수 및 경리 장교로 복무하였다.
1945년 8월 17일 간노 히로시(菅野弘)[2] 의 도움으로 박승환, 최창륜, 방원철 등 조선인 장교 7명이 함께 비행기로 귀국했다.
귀국 후 잠시 경찰에 몸담았으나, 1946년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하여 국방경비대 부위(중위)로 임관하여 조선경비대총사령부 군수조달과장과 미군정청 통위부 감찰총감을 거쳐 육군본부 군수국장을 역임했다.
1949년 백범 김구 암살사건이 일어나자 안두희에 대한 군법회의에서 배심심판관으로 참여했다.
1960년 제3군단장 재임 중 부정축재 혐의로 구속되면서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1961년 5.16 군사정변 후 다시 부정축재 혐의로 체포됐다.
이후 대한종합식품회사[3] 사장을 지냈고, 1981년 2월 28일 사망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군 부문에 등재되었다.
楊國鎭
1916년 ~ 1981년
- 창씨명: 中原國鎭
1938년 봉천군관학교를 제6기로 졸업하고, 이어 신경의 육군군수학교를 제2기로 졸업 후, 만주군에서 군수 및 경리 장교로 복무하였다.
1945년 8월 17일 간노 히로시(菅野弘)[2] 의 도움으로 박승환, 최창륜, 방원철 등 조선인 장교 7명이 함께 비행기로 귀국했다.
귀국 후 잠시 경찰에 몸담았으나, 1946년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하여 국방경비대 부위(중위)로 임관하여 조선경비대총사령부 군수조달과장과 미군정청 통위부 감찰총감을 거쳐 육군본부 군수국장을 역임했다.
1949년 백범 김구 암살사건이 일어나자 안두희에 대한 군법회의에서 배심심판관으로 참여했다.
1960년 제3군단장 재임 중 부정축재 혐의로 구속되면서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1961년 5.16 군사정변 후 다시 부정축재 혐의로 체포됐다.
이후 대한종합식품회사[3] 사장을 지냈고, 1981년 2월 28일 사망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군 부문에 등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