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찌푸리지 말아요
1. 개요
민중가요였으나 현재는 대중가요, 혹은 동요로서 더 잘 알려져 있다. 실제로 유튜브 등에서 검색하면 동요만 잔뜩 나오고 민중가요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1] 동요로서 이 노래를 알고 있었다면 모종의 경로로 원곡인 민중가요 버전을 생각 없이 듣다가 '''동지'''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내가 알던 그 노래인가 화들짝 놀라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한편, 하이라이트도 같은 제목의 다른 노래를 불렀기 때문에, 더욱 더 혼동이 심하다.
최창언이 작사, 작곡하고 민중가요 노래패인 꽃다지, 개그 그룹 컬투 등이 불렀다. 컬투 멤버들이 운동권 강경 세력중 하나였다. 가사가 바위처럼 못지않게 간단하고 밝은 느낌을 주고, 노래에 가끔 붙는 율동도 '''굉장히''' 간단한 편이라서[2] , 각종 노동 운동이나 투쟁하는 곳에서 많이 나오는 노래다. 현재는 노동가수 지민주의 2집 앨범 <길_그 끝에 서서> 보너스 트랙의 편곡이 최근 버전 중 유명하다. 줄여서 '얼찌'라고 부르기도 한다.
2. 가사
2.1. 민중가요 버전
-민중가요-
2.2. 동요 버전
-동요(혹은 대중가요)-
3. 역사
이 노래는 충격적인 가사와 함께 매우 오그라드는 코러스로 많은 운동권에게 충격과 공포를 선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희망 찬 가사와 비교적 빠른 템포의 밝은 멜로디로 많은 인기를 구가하였다.[5]
그러던 와중 90년대 학번으로 학생운동을 했던 컬트 트리플의 멤버 정성한이 여기저기 운동권 행사에서 사회를 보며 이 노래를 많이 불렀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정성한이 이 노래를 유행시키는 것에 크게 일조한 셈이다.) 정성한은 이 노래가 정말 좋았는지 컬트 트리플로 데뷔하며 약간의 개사를 거쳐 대중가요계로 끌고 나와 히트를 치고 '''동요집에도 실린다.''' 컬투쇼 게시판에 다시 듣기로 올라와 있는 2007년 2월쯤의 사연진품명품을 들어보면 "제일 성공한 노래지만 작곡가가 따로 있는 걸 가사만 바꾼 것이라 수입에 도움은 안 된다."는 말을 한다. 그리고 원래 운동권 노래라며 저 위의 가사를 소개한 적도 있다. 2008년 사연진품명품에서는 '이 노래를 동요로 아는 사람도 많지만 우리가 부른 노래다. 그런데 제목을 헷갈리는 사람이 많다'로 이야기했는데, 하필 컬투가 이 대목에서 (가끔 그러는 것처럼)필을 받아버려서 온갖 패러디가 속출했다. (최재훈도 거들었다.) '얼굴 찡그리지 말아요' '얼굴 짜부리지 말아요' '얼굴 찌그리지 말아요' 등... 2009년 6월 14일자 방송을 들어보면 "최창언이라는 친구가 쓴 건데, 잘 아는 동생이라서 받아다 썼어요. 저작권은 그 친구가 다 먹고요. 다른 곡은 다 우리가 작사했는데, 그것만 뜨고. 에이씨."하는 말이 나온다.
그리고 2012년 10월 모일, 곡을 편곡한 바로 그 그룹(당사자는 빠졌지만)이 진행하는 두시탈출 컬투쇼에 율동을 만들었다는 사람이 등장했다.
4. 기타
중학교 음악 교과서에도 등장하며 심지어 국방부에서 발행한 가톨릭 군인 성가에도[6] 등장했었다. 물론 대중가요 버전 가사로.
1998년에는 컬투 버전이 MBC 도전 구두쇠왕의 오프닝으로 쓰였다.
한때 롯데마트에서 BGM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컬투 버전의 경우에는 저음이 무지막지하게 강하다.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 새누리당 수원시 무 후보로 출마한 정미경의 선거송으로도 사용되었으며, 심지어 컬투가 직접 불렀다.# 정미경의 남동생과 정찬우가 친한 관계이기 때문. 하지만 정미경은 물론, 새누리당은 수원에서 '''전멸했다'''.
동명의 곡인 아이돌 그룹 하이라이트의[7] 데뷔앨범 타이틀곡 얼굴 찌푸리지 말아요가 있다.
NC 다이노스의 이상호의 응원가로도 쓰였다.
[1] 유튜브에서 원곡을 듣기 위해서는 얼굴 찌푸리지 말아요 민중가요 라고 검색해야 한다.[2] 주로 가사를 그대로 따라가는 '''단순한''' 손 율동이 사용된다. 예를 들어 '힘들잖아요' 부분은 땀을 닦는 동작이다.[3] 하지만이라고 알려지기도 했다.[4] 이 부분을 2000년대 초에 전교조 교사들로부터 학교에서 배운 사람들은 '''사랑 넘칠 그날까지 우리 함! 께! 함께 가자!'''로 배우기도 했다.[5] 사실 노래 자체가 나쁘지 않은 부분도 있으나 바위처럼류의 밝은 노래가 흔치 않던 시기였기에 그에 목 말라했던 운동권의 요구도 뒷받침되었다.[6] 바위처럼,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도 수록되어 있었다.[7] 前 비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