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방가르드

 

전위
Avant-Garde
vanguard(advance guard)
1. 예술 개념
1.1. 무엇이 아방가르드 예술인가?
1.2. 관점에 따른 해석 차이
1.2.1. 후기구조주의 철학을 따르는 사람들의 입장
1.2.2. 현실적인 해석을 따르는 사람들의 입장
1.3. 오늘날의 아방가르드
1.4. 대한민국의 아방가르드
1.5. 아방가르드와 관련된 것들
1.5.1. 예술 분야
1.5.2. 예술가
1.5.3. 아방가르디스트와 관련된 브랜드
1.6. 참고 자료
3. 러시아의 극초음속 활공 미사일
4. Roselia의 곡


1. 예술 개념


주로 예술에 있어서 새로운 것, 혁신을 추구하는 경향, 혹은 그런 인물을 지칭하는 개념.
아방가르드는 원래 프랑스어 Avant-Garde(영어로는 Vanguard)로, 본래 의미는 근대 이전의 회전 전투에서 가장 앞 열을 맡는 부대인 전위대를 뜻하는 군대 용어였다. 프랑스 혁명 이후에는 정치나 사회혁명의 급진파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된다.[1] 19세기 말 예술계에서는 전통과 관습 등 고정관념의 해체를 목표로 하는 전위적이고 급진적인 예술의 사조를 혁명기의 급진파에 빗대 아방가르드 예술이라고 불렀다. 아방가르드 예술을 '전위' 예술이라고 번역하는 것도 이런 어원에서 나온 것이다.
아방가르드는 구시대의 예술과 사회를 거부하고 단절하려고 한다는 측면에서 비슷한 시기의 모더니즘과 성격이 유사하였기 때문에 20세기 초의 아방가르드는 모더니즘과 동일시된 측면이 있다.
아방가르드 예술은 기존의 정형미, 서사를 부정하는 것에서 시작되므로 아방가르드 그림이나 패션 디자인은 매우 기괴하고 아방가르드 문학, 영화의 경우엔 장면과 장면이 연결이 안 되고 기괴한 영상이 흐르며 스토리가 거의 없다시피한 경우가 많다. 음악의 경우엔 소음에 가깝기도 한다. 그래서 거부감을 가지는 사람들도 있다. 반면 이러한 것에 기대지 않고도 사람의 감성을 자극하는 것에 중심을 두므로 감상의 주안점을 이해하는 것이 아닌 느끼는 것에 둬야한다. 아방가르드 예술계에서는 언어와 정형미 외의 방법으로 사람의 뇌와 감정을 자극하는 수단을 여러가지로 연구하고 있다. 잘 만들어진 아방가르드 작품은 '뭔가 기괴하고 이해가 안 되는데 멋있다' 라는 느낌이 들거나 '그림을 봤는데 갑자기 눈물이 났다' 같은 현상을 일으킬 수 있다.[2]

1.1. 무엇이 아방가르드 예술인가?


모더니즘 시기에는 모더니스트들이 자신들을 아방가르디스트로 자처하며 위세를 떨쳤으나, 현재 이 시기의 자칭 아방가르디스트들은 전위적으로 여겨지지도 않고 영향력도 적다.[3] 오늘날의 경우 아방가르드를 자처하는 예술가들은 많을지 모르나, 평론이나 창작 두 측면 모두 모더니즘 시절같지 않다. 대표적인 이유로 많이 붙는 게, '''전위예술(前衛藝術)답지 않게 진부하다'''는 것이다. '기존 예술에 저항하는 예술'인 아방가르드가 지나치게 빨리 미술관에 걸리고, 평론가들의 찬사를 받는 '기존 예술'이 돼버려서 그 힘을 상실해버리는 일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모더니즘 미술은 사실상 이 꼴이 됐다. 근데 그건 지금 한창 잘나가는 다른 예술가들도 마찬가지다. 지금 예술가들은 이후에 안 식상해질 것 같은가?
쉽게 설명하기 위해, 우리가 예술이라 생각하는 것들을 다음과 같이 가상의 4개 기준으로 나눠보자.[4]
1) 전통적, 보수적 예술
2) 상업화, 자본화된 예술.
3) 새로운 시대에 맞는 예술을 하길 추구했던 예술. 우리가 흔히 아는 모더니즘 예술.
4) 1번의 시대착오성, 2번의 천민자본주의 속성, 3번의 폐쇄성과 기성세력화됨을 비판하는 예술. '''(아방가르드 예술)'''
오늘날 21세기 초의 기준으로 보면, 1번 예술은 우리가 흔히 아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렘브란트의 그림, 2번 예술은 우리가 흔히 일상에서 보는 디자인 용품들이나 아파트 같은 모더니즘 건축, 3번은 마네나 피카소 같은 모더니즘 화가들의 그림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순수예술이라 부르는건 3번과 4번 영역인데, 이는 시간이 지나면 1번이나 2번 미술이 되기도 한다. (대개는 4->3->2->1 순으로 되어간다.) 20세기 초반만해도 피카소 같은 인물은 4번의 위치에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3번의 위치에 있고, 한창 2번의 위치에서 상품으로 팔려나가고 있기도 하며(피카소 관련 상품들), 어쩌면 한참 뒤에는 1번의 위치로 갈지도 모른다. 의외로 아방가르드 예술 중에는 제도권(1,2,3번 예술)으로 흡수된 경우가 적지 않다. 한 예로 MTV의 뮤직비디오 스타일은 1930년대 아방가르드 추상 애니메이션을 상업적(2번 예술)으로 변형시킨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금은 2번에 있는 예술인 일본 만화나 애니메이션이, 이후에는 3번이나 1번으로 갈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중 극히 일부는 이건 옛날에는 아방가르드 예술(4번 예술)이었다 여겨질지도 모르고.
여기서 전위예술은 4번에 해당한다. 즉, 피카소도 과거에는 전위예술을 한 사람이지만, 오늘날 기준으로는 전위예술가가 아니다. 사실 전위라는 말 자체 뜻이 그렇 듯, 누구보다 빠르게 앞서나가 새로운것을 선보일때만 전위라고 불릴 수 있다. 상업화되어 늘상 보는 것이 되면 더 이상 '새롭다'는 느낌을 받지 못하게 되고, 그러면 더 이상 아방가르드라 부르기 어려워진다.
이것이 아방가르드의 딜레마다. 사실 생물학적으로 생각해봐도 당연한게, '''인간은 뭐든 시간이 지나면 질리게 되어있다'''. 이 때문에 아방가르드는 딱히 정해진 개념이 아니다. 아방가르드 정신이 '발전'되고 '계승'된다고 주장하는건 말이 안 되는 소리다. 과거의 전위적 예술가들의 유전자를 받았거나 그들의 예술()을 접하지 않았어도, 얼마든지 후대에 전위적인 예술가나 예술작업이 '등장'할 수 있다. 오늘날 예술은 이전 예술을 '계승'하고 '발전'하는 개념으로 파악하는 것보다, '영향'을 주고받고 '변화'하는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옳다. 오늘날 예술가들에게 이전 예술은 참고의 대상일 뿐 빠지면 안 될 필수요소 같은 게 아니다.

1.2. 관점에 따른 해석 차이


일단 위의 서술은 개괄적으로 뭉뚱그린 설명이다. 영원히 전위적인 예술을 하는 예술가는 사실상 없다는 걸 유념하자. 시간이 지나면 아무리 전위적인 예술이라도 익숙하게 받아들여지고 그 새로움을 추구하는 활력이 약해지게 된다. 당연한 실제 역사에서는 저렇게 1,2,3,4 단계가 딱 나눠져 돌아가지 않는다. 저런 분류도 어디까지나 개인의 의견일 뿐이다. 일례로 누군가는 아직도 피카소가 전위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5] 때문에 '아방가르드란 무엇인가?', '아방가르드란 무엇이었나?', '아방가르드는 앞으로도 나올 것인가?', '앞으로 나오는 아방가르드'적인' 예술도 아방가르드라고 부를 수 있는가?', '애초에 아방가르드 담론 자체가 의미가 있는 담론인가?' 등과 같은 세부적인 문제에 대해선 입장 차이가 존재한다. 그냥 예술계 각자의 의견 차이라고 받아들이고 넘어가자.

1.2.1. 후기구조주의 철학을 따르는 사람들의 입장


가령 포스트모더니즘 중 후기구조주의(또는 탈구조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위의 설명을 듣고 이렇게 반론할 수 있다.[6]
아방가르드는 모더니즘 특유의 예술, 문화 사조로써, 단순히 시대에서의 반항적, 저항적 예술성향을 나타내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정의 될 수 없다. 만약 이것이 옳다고 한다면, 언젠가는 르네상스는 그저 '고대'로 묶여야 하고, 포스트 모더니즘은 싸그리 '근대'로 묶여야 한다. 르네상스의 특징은 다각적 사물 분석에 있다. 문화, 예술, 철학, 종교 등 거의 모든 인간의 사상 분야에 있어서의 새로운 관점들을 고민하고 파악한 시도에 그 가치가 있다. 또한 포스트 모더니즘은 모더니즘 시대의 구조주의적 현상에서 벗어난 탈-구조주의(단지 이것만으로 포스트 모더니즘을 설명하는 것은 옳지 않지만 여기서는 대략적인 개관만을 논한다)의 형성에 그 가치가 있다. 이것이 단지 시간의 흐름에 따른 순차적 명명이라고 한다면, 인간의 사조는 매번 같은 자리만 돌고 있을 뿐 전혀 발전이 없는 것이 된다. 이런 관점에서 위의 설명은 철학의 철 자도 모르고 예술의 예 자도 모르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 헛소리다.
아방가르드의 정신은 포스트모더니즘에서도 계승되고 있고, 그 용어의 사용이나 표현방식이 변화되었을 뿐이다. 현대를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대로 볼 수 있는가 하는 논의는 있을 수 있지만, 아방가르드가 사라졌는가 하는 논의에 있어서는 르네상스가 끝난 것이 아니라 변화되고 발전되어 계승되었다고 하는 것이 더 옳듯, 이 역시 현대에서도 계승, 발전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전위예술의 경우 현대에 있어서는 아방가르드라는 용어를 더 이상 즐겨 사용하지 않는데, 왜 그런가 하면 이는 탈-구조화의 포스트 모더니즘과의 연계성 때문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에서의 주체는 이데올로기나 거대담론, 지식인이 아니라 '개인' 이다. 이런 이해에서의 아방가르드는 예술의 행위를 제한하는 역효과를 낼 수 있게 된다. 실제로도 예술계에서는 아방가르드의 범주를 놓고 많은 논란이 있었다. 쉽게 말 해, 너는 아방가르드 아니고 나는 아방가르든데 쟤도 아방가르드 아니야 라는 식으로 분란이 일어난 것이다. 이런 식으로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기 위한 움직임이었던 아방가르드가 세속화 되고 헤게모니가 된 것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가장 독특한 특색이라고 한다면 바로 해체주의라고 할 수 있는데, 이 해체주의의 세례를 받은 현대의 예술가들은 자신들을 어딘가의 구조 속에 포함시키기를 거부한다. 그래서 아방가르드의 정신은 계승 될지라도, 그것만의 특색 있는 '구조' 와 '틀'은 모두 버리고 자신만의 색으로 저항과 반항을 표현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현대의 아방가르드다.
전통, 보수적 예술가는 현대에서도 여전히 등장하고 있으며, 세속화 되지 않은 예술가들도 많다(그것이 자의든 실력이 부족한 타의든). 시간순으로 예술의 가치가 나눠지고 평가된다는 것은 정말로 단순하며 단편적 예술 이해다.
요약하면, 아방가르드는 단순히 반항적, 저항적 예술성향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현대의 아방가르드는 자신만의 색으로 저항과 반항을 표현하기 시작한 것이다.

1.2.2. 현실적인 해석을 따르는 사람들의 입장


반면 이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당연히 있다. 한 작성자가 써놓은 글을 보자.
위의 글에서 주장한 내용은 잘 읽어보면 개요에서 한 이야기와 별반 다를게 없다.(...) 결국 이전 예술가들이 세속화되고 식상해지면, 이후 예술가들은 다시 새로운 걸 시도한다는 이야기를 좀 다르게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르네상스도 포스트모더니즘도 언젠가는 고대의 일이 된다. 새로운 관점들을 고민하고 파악한 시도가 굳이 르네상스나 포스트모더니즘에만 있던 일은 아니다. 애초에 중세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그 시절에도 나름 학자들은 새로운 관점에서 고민했다. 그 대상이 신에 대한 해석에 머물러서 그렇지. 게다가 이렇게 따지면 탈구조주의라고 하면서 도리어 포스트모더니스트 스스로 그 '탈구조화해야 한다는 믿음'을 '구조화' 하진 않았는지도 역으로 따져봐야 한다. 이런 식의 오류를 범하는 사람들은 전형적인 선형적 발전론을 믿는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거시적인 의미에서는 비슷한 양상이 반복될 수 있지만, 세부적인 모습에서는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한 예로 공황은 계속 주기적으로 반복되어 왔지만, 당연히 시대에 따라 세부적인 사건 면에서는 다르다. 그리고 그런 거시적인 양상 반복을 보고 발전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각 시대에는 그 시대 나름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시간의 흐름에 따른 순차적 망명' 같은 식의 용어를 사용해 비판하는 것은 현상을 이론화, 일반화해서 파악하는 데서 벌어지는 오류다.
아방가르드의 정신이 딱 정해져 있고, 그게 유전자마냥 전수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상식적으로 과거의 전위적 행위들을 후대 사람들이 다 경험하고 그것을 그대로 따르는가? 그렇지 않다. 아방가르드 같은 움직임은 계승이나 발전 같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그냥 변화하고 발생하는 것일 뿐이다. 예를 들어 요즘의 일렉트로니카 음악을 이전 음악의 계승으로 보는 사람은 없지 않는가? 예술가들은 그냥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만들고 인정받을 뿐이다. 도리어 이렇게 계승, 발전 운운하는 것 자체가 소위 이전 '이데올로기', '거대담론'의 반복일 뿐이다.
그러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한번 벌어진 사건은 변하지 않고 흔적으로 남는다. 그중 일부는 인간에 의해 기록되고 역사에 남는다. 그냥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만들고 인정받을 뿐이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 중에서도 누군가는 인정받고 되려 주류가 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저 반론의 주장대로면 유명한 예술가들은 나오지 않아야 한다. 말 그대로 가치기준이 해체되어 탈구조화되어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여전히 유명한 예술가는 나온다는 점에서 이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걸 알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을 탈구조화나 해체로 이해하는 사람은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들의 주장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들은 다원화된 기준을 주장한 것이지 아예 가치기준이 소멸해버렸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다. '기준없음'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기준이 다양함'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7]
사실 일반인들 입장에서는 위의 포스트모더니즘을 따른 설명보다 개요의 설명을 더 쉽게 받아들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방가르드를 "특이한 시도를 했던 예술가" 정도로 이해한다고 봐도 사실상 무방하다. 그리고 실제로도 상당수 아방가르드는 당시에는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것을 시도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이해해도 무방하다.

1.3. 오늘날의 아방가르드


사실 오늘날에는 아방가르드라고 자처하는 일 자체를 피하는 경우가 많다. 모더니즘 시기에 유행한 명칭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안전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방가르드'적인' 예술이 없다고도 할 수 없다. 위의 입장들도 모두 세부 내용에서는 다른 견해를 보이긴 하지만, 아방가르드적인 예술이 계속 등장할 거라는 데에는 의견을 같이한다.
세계화, 정보화된 오늘날 시대에는 전위예술이 등장할 가능성이 높아지기도 했지만, 동시에 위협받고 있기도 하다. 오늘날 예술은 과거와는 달리 단일한 기준이란게 없어졌다. 과거에는 얼마나 사실적으로 그리느냐(리얼리즘)를 기준으로 따졌다면, 오늘날에는 그런 단일한 평가기준이 없어졌다. 단지 '다양한 것을 시도한다'는 원칙만이 있을 뿐이다. 때문에 아방가르드적인 작업이 나올 가능성도 높아졌다고 할 수 있다.
반대로 뭐든지 상업화되는 경제구조는 이런 아방가르드적 작업을 방해하는 요소다. 다양한게 만들어져도 결국 잘 팔리는 것만 소비되고, 엄청나게 빨리 식상해지는 사회라면 사실 아방가르드적인 작업을 하기가 어렵다. 특히 저작권이 발달한 오늘날에는 이런 경향이 더 심해졌다. 요즘 예술가들이 작업하기 힘들어하는 이유기도 하다.

1.4. 대한민국의 아방가르드


거의 불모지라 할 정도로 처참하다. 대한민국의 심각한 검열이 유독 훼방을 놓던 것이 아방가르드 예술이었다. 이들은 아방가르드 작품을 '개연성이 없고 배울 것이 없다' 라는 이유로 검열하였고 수많은 아방가르드 영화 들이 한국엔 수입조차 되지 못했다. 전위 예술가, 행위 예술가들은 언론에선 그저 기행을 하는 사람으로 보도하는 경우가 많았다. 국어 교과서에선 아방가르드 문학 작품을 작위적인 하나의 해석만 이끌어내 주입식으로 가르치는 경우가 다발했다. 정답이 없는 아방가르드 작품을 수능 시험에 내놓고는 정답을 맞추라고 하는 코미디 같은 상황은 오늘날까지도 벌어지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에서 한국에 사는 사람이 아방가르드를 접할 기회는 상실되었다. 1990년대 출생자들까지도 대부분 아방가르드가 무엇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이러다보니 전위 예술 작품에 개연성핍진성에 근거한 해석을 들이밀고 "개연성이 없으니 졸작", "이해하기 힘드니 망작"이라고 하는 평론을 하는 사람도 매우 많은 것이 현실이다. 데이비드 린치 같은 사람들도 한국에선 욕을 먹을 정도이니 더 할 말이 없을 지경. 나무위키에도 이러한 비판이 매우 많다. 그런 걸 해체하려고 하는 사람들한테 그런 걸 왜 안 하냐고 하는 것 부터가 잘못된 비판이다. 아방가르드 예술 작품을 두고 이 작품엔 뭔가 숨겨진 서사가 있을 것이라며 집요하게 파고 연구하는 사람들도 한국에서 유독 많이 보이는 경우다.
한국에서 배출된 유명한 전위 예술가로는 이상, 백남준, 앙드레 김, 문정규, 이건용 등이 있다. 이런 사람들 대부분이 외국에서 먼저 인정받았다. 회화나 디자인 쪽에선 오랜 노력으로 전위 예술이 자리를 잡았으나 영화 쪽에선 1990년대에 검열이 완화되면서 아방가르드 작품이 종종 나왔으나 흥행에서 크게 실패하며 명맥이 끊어졌다. 장선우김기덕이 이쪽에선 인정을 받은 감독이었는데[8] 그마저도 장선우는 영화계를 떠났고 김기덕은 사망해서 더이상 제작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반면 의외로 만화 쪽에서는 아방가르드 기법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한국 만화계의 주류로 자리잡은 병맛도 일종의 아방가르드라 볼 수 있다.
일본도 한국과 비슷한 상황이다. 한국의 교육 제도나 검열은 일본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이라 일본도 별 다를 것이 없다.

1.5. 아방가르드와 관련된 것들


사실상 위의 의견들보다 더 중요한 부분. 의견보다 중요한 건 실제 사례다. 아방가르드는 보고 듣고 느끼는 것에 중점을 두므로 백날 해석을 보느니 직접 접하는 게 가장 확실하다.

1.5.1. 예술 분야



1.5.2. 예술가



1.5.3. 아방가르디스트와 관련된 브랜드



1.6. 참고 자료


페터 뷔르거, '아방가르드의 이론'
에릭 홉스봄, 아방가르드의 쇠퇴와 몰락
노명우, 아방가르드
마이클 오프레이, 아방가르드 영화

2. 스타크래프트 맵


아방가르드(스타크래프트) 참고

3. 러시아의 극초음속 활공 미사일


아방가르드(미사일) 참고

4. Roselia의 곡


Avant-garde HISTORY 참고

[1] 일례로 공산당에서 자기네 정치 깡패를 전위대라고 불렀고 대표적인 사례가 미군정기 남조선로동당에서 조선청년전위대[2] 기괴하다고 해서 아방가르드라는 것은 아니다. 기괴한 것만 보여주고 공포감만 준다면 그것은 호러라고 하지 아방가르드로 분류하지 않는다. 다른 감정도 이끌어내야 아방가르드 예술로 인정을 받을 수 있다.[3] 대표적인게 추상미술. 70년대 이후로 추상미술은 줄어들고 다시 '형상의 귀환'이 일어났다.[4] 물론 실제 현실에서는 저렇게 1,2,3,4로 단계가 딱 나눠지는 게 아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비슷한 예술 사조가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는 소리다! 단지 거시적으로는 비슷한 양상이 반복될 수 있다는 점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기존 예술가들이 식상해지고, 새로운 예술가들이 등장하는 과정이 바로 여기서 말하는 거시적인 양상이다. 미시적인 모습은 당연히 각 예술가들이 다 다를 것이다. 또한 미래에는 아방가르드적인 예술을 아방가르드라고 부르지 않고 다른 이름으로 부를 수도 있다.[5] 일반인들 입장에서는 그렇다. 물론 상당수 현대미술 종사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6] 이전에 삭제된 의견을 다시 복구한 것이다.[7] 이 작성자는 포스트모더니즘 특유의 만연체 때문에 거부감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만연체는 그 특성상 주장하는 바가 불분명하고 중언부언하는 것처럼 보이는 단점이 있다. 물론 내공이 쌓인 철학자가 쓰는 만연체와 어중이떠중이의 만연체는 차원이 다르지만 말이다. 일단 앞서 익명의 작성자가 써놓은 위의 글은 모순되는 주장을 담고 있다. 앞서의 글에서 "아방가르드는 단순히 반항적, 저항적 예술성향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고 해놓고, 뒤에서 "현대의 아방가르드는 자신만의 색으로 저항과 반항을 표현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해놨다. 포스트모더니즘을 따르는 작성자 스스로도 아방가르드에 저항과 반항 요소가 중요함을 인정하고 있는 것. 게다가 위의 개요에서는 '인간의 사조는 매번 같은 자리만 돌고 있을 뿐 전혀 발전이 없는 것', '시간순으로 예술의 가치가 나눠지고 평가되는 것'이라는 식으로 아방가르드를 주장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같은 '양상'이 또 나타나는 것과 완전히 똑같고 식상한 현상이 반복되는건 전혀 다른 이야기다. 게다가 "철학의 철 자도 모르고 예술의 예 자도 모르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 헛소리"라는 표현은 기본적인 예의조차 지키지 않은 일방적인 주장이다. 이런 '나 잘났고 넌 무식해'식의 마인드를 가진 사람들이 현대예술을 점점 더 고립무원으로 만드는 데 일조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8] 김기덕도 정통 아방가르드 작가라 보긴 힘들다. 김기덕도 한국 관객들의 요구 때문에 서사를 포함한 작품을 많이 만들고 연출만 아방가르드 식으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