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기번
[image]
'''Edward Gibbon'''
(1737.5.18.-1794.1.16)
1. 개요
영국의 역사가. 문필가. <로마 제국 쇠망사>의 저자로 유명하다.
2. 생애
1737년 런던에서 태어났다. 기번의 할아버지 역시 이름이 에드워드였는데 빠삭한 군납업자였고 막대한 재산을 모았다. 그러나 기번의 할아버지는 영국 사회를 뒤흔든 남해회사 사기 사건에 연루되는 바람에 의회의 결의에 따라 10만 6,500파운드의 재산 중 1만 파운드만 남기고 모조리 몰수당하고 말았다. 물론 교묘한 그는 죽기 전에 대부분의 재산을 되찾았다고 한다. 그러나 기번의 아버지는 할아버지처럼 능수능란하지 못해서 점점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기번의 어린 시절은 불우 그 자체라고 할만했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기번 자신도 허약한 체질에 병까지 겹쳐서 의사를 찾아 병원들을 전전해야 했다. 그렇지만 의사의 잘못된 치료 때문에 흉터만 남기게 된 기번은 일생 동안 의사와 의료 행위에 심한 거부감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가운데 고모 캐서린 포튼의 보살핌으로 겨우 목숨을 연명할 수 있었던 기번은 어린 시절부터 독서에 취미를 붙여 방대한 독서로 많은 지식을 쌓게 되었다. 1752년, 옥스포드 대학의 모들린 칼리지에 입학했지만 기번의 지적 수준이 너무 높은 탓에 박사조차도 쩔쩔 맬 정도였다고 한다. 결국 이 높은 지적 수준의 학생을 가르칠 교수나 학생이 아무도 없었고, 기번은 대학을 다니면서 종교 서적을 많이 읽었고 결국 성공회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해 버렸다.
기번의 개종은 개혁교회와 보편교회라는 정체성을 동시에 추구하던 성공회[1] 의 스탠스에서 나온 고민 때문이었다. 쉽게 말해서 기번 입장에서는 '보편 교회를 계속 강조할 거면 차라리 진짜 원조 보편 교회인 가톨릭이 더 맞는 거 아냐?'라고 생각하게 된 것. 그러나 당시 영국은 아직 가톨릭 교도에 대한 차별이 완전히 폐지되지 않은 시점이었기 때문에 가톨릭으로의 개종은 그의 커리어에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기번의 아버지는 격노해서 아들을 개종시킨 자가 누구인지 대라고 윽박질렀지만 소용 없자 아들을 스위스 로잔으로 보내버렸다.
로잔에서 기번은 칼뱅파 목사인 파비야르의 집에서 지내면서 학문의 방법론을 익혔고 결국 5년 만에 가톨릭에서 다시 개신교로 전향했다. 물론 독실한 신앙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2] 정확히 표현하면 개신교-가톨릭-다시 개신교-회의주의 노선. 그래서 마녀사냥이라든지 미신적인 면을 매우 싫어했다. 영국 일부 시골에서 고양이를 태워 죽여 마녀사냥 액땜을 하자 무지한 중세 야만인들의 동물 학살이라며 처벌을 요구하고 이런 미신 행위를 없애야 한다고 분노했다. 또한 이슬람에 대하여 견제하면서도 역사적으로 기독교가 저지른 더러운 짓을 이슬람에게만 덮어씌우는 건 더 더러운 짓이라며 비난했기에 로마제국 쇠망사에서도 로마 제국 유적을 이슬람 측이 우상숭배라고 부순 걸 기독교 측이 사돈 남말할게 아니라고 깠다.
이후 본격적으로 기번은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들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이 시기에는 아직 뚜렷한 성과를 낸 것은 아니었다. 유럽과 영국을 오가면서 지내던 중 1764년 로마에 도착한 기번은 《로마제국 쇠망사》를 집필할 구상을 하게 된다.
1770년, 그의 아버지가 사망하고 재산 문제를 정리한 후 기번은 본격적으로 《로마제국 쇠망사》를 집필하기 시작해 제1권을 완성했다. 한편으로는 1774년, 돈 많은 사촌의 도움으로 국회의원이 되어 8년 동안 의회에서 연설 한 번 없이 의석을 지켰다. 당시 미국 독립전쟁 문제가 불거지자 기번은 은근슬쩍 식민지 편을 지지하는 뉘앙스를 풍기기도 했다. 그러나 무역식민부에 관직을 얻게 되자 침묵해 버렸다.(…). 이러는 와중에도 《로마제국 쇠망사》의 집필은 계속되어서 1781년에 2, 3권을, 4, 5, 6권은 1788년에 출판되었다. 집필은 이미 1787년에 끝나 있었다. 《로마제국 쇠망사》는 기번을 명사로 만들어 주었고 전 유럽에 큰 화제거리가 되었다.
《로마제국 쇠망사》를 완성한 후, 기번은 의욕상실에 걸렸다(…) . 1789년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한때 흥분하기도 했지만, 결국 말년에 건강이 나빠져 고생하다가 1794년 1월 런던에서 56세로 사망하게 된다.
[image]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는 영국 역사상 뛰어난 역사책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아무래도 시대가 시대인지라 현대 역사학적으로 보면 기번의 관점은 많이 낡은 편이다(예를 들면 동로마 제국에 대한 관점이라든지).[3] 그러나 기번의 문장은 명문장으로 꼽히며 영국 역사상 많은 명사들이 《로마제국 쇠망사》를 읽었다. 윈스턴 처칠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여러 번 《로마제국 쇠망사》를 통독했으며, 클레멘트 애틀리도 북아일랜드 분리 독립 문제라는 난제를 놓고 《로마제국 쇠망사》를 두 번 통독하고 결론을 얻었다고 할 정도다. 아이작 아시모프도 파운데이션을 쓸 때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로마제국 쇠망사》의 문장은 만연체이다. 기번은 문장을 지으면서 화려한 수식어를 덧붙이기를 즐겨했는데, 이는 고전 라틴어 문장을 영어에 적용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대개 어떤 언어의 문장에 다른 언어의 문장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대입시키면 괴상한 문체가 나오기 십상인데, 기번은 그런 것을 극복하고 기번체라고 불러도 무방한 그만의 독특한 문체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이런 점에서 기번을 괴수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다만 실수나 억측이 없는 건 아니다. 콤모두스가 하렘을 거느렸다느니 같은 억측을 하는가 하면 3세기 인물인 성 제오르지오(게오르기우스)를 4세기의 아리우스파 신도로 소아시아에서 온갖 패악질을 한 게오르기우스와 착각해서, 패악질 부리다 죽은 사람이 영국의 수호성인이 되었다고 비꼬기도 하는 등의 오류가 종종 보인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로마제국 쇠망사》의 내용보다는 기번의 훌륭한 문장에 더 집중하라고 조언할 정도(...). 사실 오류도 오류지만, 일반적으로 역사학계에서 출간된 책은 10년만 지나도 매우 낡은 것으로 간주된다.[4] 연구사 정리할 때나 참고하는 정도. 그런데 300년이나 된 기번의 책을 로마사를 공부하는 사료로 쓴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 게다가 기번의 책은 심지어 근대 역사학 연구방법론이 정립되기도 한참 이전에 쓰인 책이다. 지금 기번의 책은 문학적 가치로 인정받는 고전이지, 로마사의 사료로서가 아니다. 한국에서는 유독 이상하게 기번의 책을 읽고 로마사를 마스터했다고 생각하는 풍조가 있을 뿐.
[1] 현재까지도 성공회의 모토 중에 하나가 '개혁된 보편교회'(reformed catholic)이다. 일반적으로 성공회를 가르켜 '가톨릭 전통을 유지하는 개신교'라고 설명하기도 한다.[2] 그 보기로 기번은 고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불태운 게 이슬람 세력 탓이라던 종전 유럽 역사학계에 대하여 비아냥거리며 기독교 세력이 저지른 더러운 짓은 죄다 이슬람 탓한다고 까던 사람이다.[3] 일단 18세기에 쓰인 책이라 특히 로마 제국 후기 유목민들을 잘 모르는 안습함을 보인다.(...)[4] 비단 역사학계뿐만은 아니다. 보통 학계에서는 연구 성과가 계속 축적됨에 따라 불과 10여 년 전에 출간된 책들도 금세 잊혀지는 경향이 많다. 물론 고전으로서의 가치는 남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