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사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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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pendium maleficarum(마녀 전서), 1626년, Francesco Maria Guazzo. 마녀가 악마에게 세례를 받는다고 묘사되어있다. 당대 유럽인들은 마녀들이 '조직적'이고 '의례적'인 반교회라고 상상하곤 했다. 또한 이 그림에서 보듯이, 마녀사냥의 배경에는 음모론적 공포도 있음을 알 수 있다.
  • 영어: Witch-hunt
  • 프랑스어: Chasse aux sorcières[1]
  • 독일어: Hexenverfolgung[2]
1. 개요
2. 시기별 마녀사냥
2.1. 근세 이전
2.2. 근세: 마녀 사냥의 절정기
2.2.1. 마녀사냥의 경제
2.2.2. 마녀사냥의 또 다른 실체
2.2.3. 마녀사냥의 희생자들
2.3. 마녀사냥의 종료
3. 마녀 감별 방법
3.1. 지역별 마녀사냥
4. 그 밖의 이야기
5. 마녀사냥이 등장하는 창작물
6. 비유적 의미에서의 마녀사냥
6.1. 마녀사냥이 묘사된 창작물
6.2. 실제 마녀사냥 사례


1. 개요


Suffer not the witch to live
(마녀를 살려 두지 말지니라.)
[3]

탈출기 22장 18절


우리 교회는 유태인 차별, 과학 탄압, 이단 심문, 이민족 탄압 그리고 마녀사냥 같은 인류에게 저지른 죄악에 수치심을 갖고 반성해야 합니다. 또한 마녀사냥 희생자들은 악마의 종이 아닌 무고한 피해자임을 인정합니다.

제 264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16~17세기 종교개혁기에 유럽에서 벌어진 학살로 총 Peter Marshall의 저서 「종교개혁」에 의하면 약 10만 명이 고발당해 총 4만명이 사망했다고 추정된다.[4] 이 수치는 같은 기간에 종교적 비정통 혐의, 다시말해 상대 종파를 믿었다는 이유로 처형당한 숫자보다 훨씬 많다. 이 학살 대상이 되는 마녀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버리고 악마와 계약을 맺어 악마를 섬기고, 그 대가로 부여되는 마력을 사용하며, 공중을 날아다니며 마녀 집회에 참석하여 악마와 교접을 하는 자'로 '그 몸뚱이에는 악마의 손톱자국이 늘 있었다'고 전한다. 주로 희생자들이 화형 당하는 이미지로 널리 알려졌지만 주로 유명인이나 돈이 많은 피해자를 살해할 때 쓰던 방법으로, 장작값이 부족한 경우 화형 대신 목을 매달거나 물에 빠뜨려 죽이는 등 온갖 사형 방법이 사용되었다.
서양 역사에서 있었던 통칭 '마녀 재판'은 사실 마녀재판이란 번역이 적절치 않으며 '특별 재판'이 적절하다. 흔히 이단 심판, 마녀 재판으로 번역하는 라틴어 'inquisitio'는 교회법으로 어떤 특정한 사항이 발생했을 때 임시로 개설하는 '비상설 특별 재판'이기 때문이다. 즉 'inquisitio'는 꼭 마녀나 이단만을 다루던 재판이 아니다. 하지만 마녀 재판이란 단어가 워낙 한국어 언중에게 깊이 들어왔기 때문에 이 문서에서도 그대로 마녀 재판이라는 단어를 쓰도록 한다.
또한 용어상의 구분뿐만이 아니라, 해당 재판이 실제로 이단(혹은 이교) 혐의에 대한 재판이였는지(흔히 말하는 이단심문), 혹은 마녀 혐의에 대한 재판이었는지(마녀 재판)도 엄밀한 구분이 필요하다. 후자는 넓은 의미의 전자에 포함되지만, 후자와 전자와 똑같은 의미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스페인의 이단심문은 콘베르소(Converso, 유대인 출신의 개종자)와 모리스코(Morisco, 무슬림 출신의 개종자)가 주된 대상이였으며, 스페인 종교재판소는 마녀들이 저지른다는 소행에 회의적이었다. 마녀 혐의로 인한 주된 희생자는 주로 가톨릭에서는 독일권, 개신교에서는 스코틀랜드에서 나왔다.

2. 시기별 마녀사냥


흔히 마녀사냥은 중세시대에 가장 많이 벌어졌을 것으로 여겨지지만, 마녀사냥이 가장 극심하게 벌어진 시대는 근세로서, 대표적으로 30년전쟁 기간 독일에서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마녀사냥이 벌어진 주요 원인이 종교개혁(가톨릭의 자체적 쇄신운동 포함)으로 교파화 사회가 도래하였기 때문이다.(자세한 원인은 후술.) 그리고 한 번 몰아치기 시작한 광풍이 그렇게 쉽게 가라앉을 리 없었다. 결국 근세에 정점을 찍은 뒤 가라앉기 시작했다.

2.1. 근세 이전


근세 이전에도 마녀사냥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중세시대 초중반까지는 마녀를 처벌하려면 피해자가 있어야 했다. 무슨 말인고 하니 12세기에 로마법에 대한 연구가 다시 시작되면서 그 전에 있었던 게르만족 풍습에 의한 살리카 법전의 사용빈도가 적어지고 새로운 로마법에 기초한 법전 체계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12세기 이전에는 게르만족 풍습에 의해서 피해자가 있어야만 고소가 가능했었다. 즉 마녀에게 피해를 받은 사람이 있어야만 마녀를 고소할 수 있었다. 물론 진짜로 마녀에게 피해를 받은 사람이 있었을 리 없으니 어차피 거짓 신고거나 착각이란 뜻인데, 결국 엉망진창인 건 마찬가지더라도 최소한 지나치게 손쉽게 고소를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또한 기독교의 마녀의 존재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오히려 마녀사냥을 막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했다. 마녀와 마법의 존재와 효능을 부인하면서 마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무고한 사람을 마녀로 모는 마녀 사냥꾼이야말로 마녀를 인정하는 악인'이란 인식이 생긴 것이다. 한 예로 카롤루스 대제가 785년 발표한 파더보른 공의회(Council of Paderborn)에선 '악마에게 홀린 자, 그리고 이교의 믿음을 가진 자로서 사람을 마녀라고 믿고, 마녀라고 의심받은 사람을 불태워 죽이고 그 살점을 먹거나 남에게 먹인 사람은 사형에 처한다'라는 내용(6항)이 있다.
그에 비하여 12세기 이후에는 피해자의 신고 없이도 마녀의 고소 색출이 가능했다. 소위 황제 시해 음모 이론에 따른 것인데 "황제를 시해하려는 음모만으로도 반역죄에 해당하며 이는 사형으로 다스린다"라는 로마법 구절을 인용하여 누군가의 신고 없이도 바로 재판이 가능하게 되었다.[5]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세에는 마녀라는 혐의로 처형당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잔 다르크에 대한 재판이 눈에 띄는 예외였긴 했지만 이도 당시 기준으로 억지 재판이라는 평가를 받고 사후 사면되었다. 중세 시대에 이단심문[6]의 장소는 거의가 남부 프랑스 및 북이탈리아로 한정되었고, 주된 대상은 마녀가 아닌 이단, 특히 알비파였다.[7] 마녀는 본래적 의미가 '동네 무당'에 가까운 의미였고, 원칙적으로는 불허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사회의 구석에서 묵인되는 존재였다. 현대 사회에서 굳이 비슷한 직업을 꼽자면, 마치 매춘부가 법적으로 불허되지만 사회적으로 묵인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2.2. 근세: 마녀 사냥의 절정기


마녀를 가장 맹렬하게 박해한 1570~1630년은 신교 국가들과 가톨릭 국가들이 교파화되고 이데올로기 전쟁이 가장 격렬하게 벌어진 기간이기도 했다. (중략) 가톨릭교도들과 신교도들 중에 어느 쪽이 박해에 더 열을 올렸느냐는 것은 이견이 분분한 문제다. 박해자들 중에서도 최악은 대게 독일의 작은 영역을 통치한 가톨릭 주교들이었다. 일례로 뷔르츠부르크의 주교 율리우스 에히터 폰 메스펠브루니(Julius Echter von Mespelbrünn)은 가톨릭 개혁의 강경파로서 1616~1617년에 마녀를 300명 넘게 화형시켰다. 그러나 가톨릭 남유럽은 처형률이 가장 낮은 축에 들었고, 에스파냐 종교재판소는[8]

로마 종교재판소와 마찬가지로 마녀들이 저지른다는 소행에 회의적이었다. 칼뱅의 제네바에서는 화형당한 마녀가 거의 없었고, 신교권 네덜란드와 칼뱅파 팔츠에서는 사실상 마녀 재판이 열리지 않았다. 그러나 스코틀랜드를 비롯한 다른 칼뱅파 지역들은 1660년대까지 계속하여 마녀를 가장 혹독하게 박해했다. 17세기 중반부터 전반적으로 마녀 재판이 줄어들었지만, 잉글랜드 이스트앵글리아에서 내전 막바지에, 루터파 스웨덴에서 1668~1676년에, 그리고 유명한 사례로서 미국으로 건너가 메사추세츠 주 세일럼에 정착한 청교도 공동체에서 1692년에 추악한 마녀 재판이 발생했다. 마녀 재판을 종식하는 데는 다수 요인들이 함께 작용했다. 다양한 법률 체계들이 도입된 더욱 엄격한 증거 기준, 고문 제한, 과학적 회의주의, 비열한 마을 주민이 광분해서 제기하는 고발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를 꺼리는 엘리트주의적 태도 등이 그런 요인들이었다. 그러나 더 넓게 보면 이 이야기의 중요한 부분들은 종교 전쟁의 종결과, 다원주의를 향해 절뚝거리며 나아간 발걸음이었다. 유럽 사회들이 실제 "타자들"을 마지못해 받아들이고 통합함에 따라 상상 속 타자들은 더이상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게 되었다. 이것은 종교개혁이 엄밀하게 균일한 기독교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데 실패하고 다른 무언가를 우연히 낳아주는 데 성공했음을 말해주는 또 다른 증거다.

「종교개혁」, Peter Marshall[9]

가톨릭교와 신교는 과격한 종교적 수사법을 곧잘 구사하면서도 좀처럼 서로를 마녀술 혐의로 고발하지 않았다. 마녀들의 주된 죄목과 종교개혁의 주요 논쟁 사이에 직접적 연관성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예전부터 마을 주민들은 반사회적인 늙은 여자들이 주술을 걸고 고약한 저주를 내린다고 항상 의심했지만, 공식 박해에 시동을 건 동력은 마녀들이 악마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악마의 명령에 따라 기독교 사회와 전쟁을 벌이는 대규모 배교자 군단이라는 의심을 굳혀간 신학자들의 확신이었다.

「종교개혁」, Peter Marshall

1484년 도미니코회 수도자 하인리히 크라머, 야코프 슈프렝거가 인노첸시오 8세로부터 마녀재판의 권한에 해당하는 권력을 수여받았다. 그런데 2년 후 마녀의 망치라는 책을 출간하여 마녀사냥에 대한 여러 지침(?)을 전파했는데 이 책은 곧 교황청에 의해 출판 금지를 받았고 저자 크라머는 교황에게서 단죄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녀의 망치는 1517년 종교개혁 이전까지 20쇄 이상이 인쇄되어 상당히 광범위하게 퍼지게 된다.
1532년 신성로마제국에서는 르네상스와 인문주의 영향으로 카를 5세의 카롤리나 법전이 공포되어 실질적인 위해를 가한 것으로 인정될 때만 기소되며 의심만으로는 처벌하지 못하게 규정했지만 역시나 이 시기 종교적 갈등 때문에 별로 준수되지 못했다. 오히려 이 시기부터 종교갈등이 성행하여 마녀재판이 성행하게 된다.
16세기부터 마녀사냥은 기존의 방식과 달리 종교재판의 형식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마녀사냥은 가톨릭권에서는 남독일, 개신교권에서는 스코틀랜드에서[10] 가장 심했다. 또한 프랑슈콩테에서도 마녀사냥이 많이 이루어졌다. 독일의 개신교 지역에서도 남독일보다는 덜 하지만 마녀사냥 풍속이 남아있었고[11] 청교도들이 이주한 북아메리카에서도 한때 마녀사냥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개신교 중 영국 국교회(성공회)가 정착한 잉글랜드와 루터주의가 자리잡은 북독일에서는 상대적으로 마녀사냥이 성행하지 않았고,[12] 가톨릭에서는 이베리아 반도와 이탈리아 반도에서 마녀사냥이 성행하지 않았다.[13]
마녀사냥과는 별개로 가톨릭권의 스페인, 개신교권의 잉글랜드에서는 상대종파 신자에 대한 박해가 있었고, 네덜란드에서는 가톨릭과 개신교 양쪽 모두가 상대방을 박해했다. 특히나 합스부르크가의 펠리페 2세는 종교재판으로도 악명이 높았지만 마녀나 마법에도 관심이 많아 '"마법은 인류의 골치거리'''라는 선언으로 저지대에서의 마녀사냥이 대폭 강화되었다. 그런데 정작 스페인 본토는 마녀재판이 적었다.

2.2.1. 마녀사냥의 경제


사실 이것은 마녀사냥이 아니라 마녀사이었다. 즉 종교의 이름을 팔아 부정한 재산 축적과 정적 제거, 당시 사회에 퍼져있던 다양한 재앙들로 인한 피지배층 불만 다른 곳으로 돌리기, 공포조장을 통한 사회통제강화, 개인적인 원한이나 경쟁자 제거 등을 합법화시킨 사업이었다. 심리학에서는 집단 히스테리의 산물로 보고 있다.
마녀 혐의로 기소된 사람들이 무죄가 되는 경우가 거의 없었던 이유는, 마녀라고 자백만 하면 규정에 따라 그 사람의 재산을 몰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죽기 직전까지 고문을 해서라도 자백을 받아내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처형된 마녀의 재산은 몰수되어 영주·주교·이단심문관 등이 배분하였기 때문에 ‘마녀사냥’은 수지 맞는 장사였다. 뿐만 아니라 체포되어 처형되기까지의 모든 비용도 수감자와 그 집안의 부담이었다. 그렇기에 자신이 마녀를 감별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마녀 감별사들이 돌아 다녔다.
마녀 혐의자를 체포하고 마녀재판에 회부한 뒤 재판을 통해 고문을 가해서 자백을 얻어낸 후 화형에 처한다. 그리고 마녀 용의자가 사망하면 최후에는 전재산 몰수형에 처한다.
결국 애꿎은 사람을 마녀로 몰아서 돈 뜯어내려고 살인을 한 것이다. 그래서 마녀사냥이 마녀사인 것이다. 당연히 주 타겟은 부잣집 과부였다. 가족은 없고 가진 것이라고는 엄청나게 많은 돈밖에 없는 나이 많은 여자들이 희생자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다른 경우로는 의사와 성직자가 라이벌 관계였던 산파나 혹은 약초지식을 알고 있던 자들을 제거하여 수입을 늘리고자 고발하는 경우도 있었다.
바늘로 찌르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자 가운데는 '찌르면 바늘 끝이 뒤로 밀려나게 하는 장치'를 만들어 사용함으로서[14] 많은 마녀를 억지로 만들어 고액의 수입을 올리는 자도 있었다고 한다.
또 한편으로는 마녀사냥은 사람들의 오락물이었다. 인권 의식이 없던 당시에는 공개고문과 공개처형은 재미있는 구경거리였고 고대 로마 콜로세움에서 검투사들이 서로 죽이거나 맹수의 밥이 되는 것을 환호한 로마처럼 사람들은 고문으로 인한 희생자의 고통과 잔인한 처형을 낄낄거리면서 즐기고 환호하는 잔인함을 보여주었다.[15] 현대 사람들의 인권 의식으로는 그런 건 사이코패스나 가능하다고 오인할 수 있지만, 당시의 인권은 집행인이 미숙하게 목을 자르거나 죽이면 밑의 시민들이 쌍욕하고 물건을 집어던지는 것이 당연했다.

2.2.2. 마녀사냥의 또 다른 실체


단순히 종교적 광기로 보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 이걸 종교적 광기로만 볼 수 없다고 한다. 다양한 이해관계에 종교가 대표되어 벌어진 사건인데 종교만 기억에 남는 십자군 전쟁과 비슷한 사건이다. 또한 현재의 생각과 같이 굉장히 무식하고 줏대 없이 시행했을 것 같지만 이러한 예상과 달리 당시 지식인인 종교인과 정치가, 행정가, 판사들이 뭉쳐서 굉장히 체계적이게 일을 처리했다.
원인으로 지목할 것이 많아 무엇이 정확한 원인이라고 하기에는 굉장히 애매하다.[16] 또한 지역이 방대하다 보니 원인들 중에 지역에 따라 적용되는 것과 안되는 것도 나뉜다. 먼저,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히는 것은 대기근과 흑사병 문제이다. 당시 16세기에서 17세기 소빙기[17]였다는 점(17세기 위기론), 그로 인한 대기근, 대기근으로 인한 경제와 식량 사정악화 , 그 전부터 맹위를 떨치던 흑사병과 가축들의 전염병,[18] 개신교 등장으로 인한 다양한 종파등장과 사회적 불안, 개신교 등장과 30년 전쟁 이후 약해지기 시작한 교황의 세속 권력, 지방권력의 약화 시작[19], 30년 전쟁(1618∼1648)과 가톨릭 국가들의 패배와 가톨릭으로부터 해방된 개신교 국가들, 각종 반란이 당시에 일어났고 사람들은 연속된 불행에 대한 납득할 만한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특히 1970년대 이래 흔히 학계에서 '교파화( confessionalizaion)'라고 부르는 용어를 유의해야 한다. 종교개혁괴 가톨릭의 자체적 쇄신운동은 최종적으로는 사회의 세속화라는(당사자들마저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불러왔으나, 당사자들이 개혁하고자 한 것은 개개인의 신앙 뿐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신앙이었다. 이 시기의 성직자들과 목회자들은 대체로 세속권력에 호의적이였으며[20] 군주들은 자신의 왕국과 교회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해서 생각하지 않았고, 군주이든 교황이든 점점 더 '중앙집권화된' 교회조직을 원했다. 가톨릭은 근대적 의미의 신학교를 통해 성직자 양성시스템을 혁신했고, 이들은 마치 근대국가의 '사관학교'처럼 국가를 중앙집권화시켰다.[21] 개신교에서도 '애국자'와 '신실한 그리스도인'은 둘이 아니라 하나였으며, 칼뱅주의자들이 극찬하던 도시국가인 제네바 역시도 교회와 국가는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지지 않았다. 종교개혁 시대의 유럽인들에게 국가란 결코 각자의 생각에 따라 따로따로 살아가는 개인들의 집단이 아니었다. 종교개혁의 대상은 사회 전체였다. 다양한 종파의 등장으로 인한 기본질서의 혼란, 계속된 사회 혼란(기근, 흑사병, 전쟁, 흑사병으로 인한 장원의 약화) 등등 사회는 각 부분에서 혼란이었고 그 혼란을 직격으로 맞는 것은 대중들일 수밖에 없었다. 초기에는 버티려고 노력했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분노는 커질 수밖에 없었고 결과적으로 대중들의 분노는 한계를 넘어가기 시작했다. 각 사회의 수장들 역시 이 사회의 혼동을 묵인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유럽인들은 혼란스러운 사회를 쇄신하기 위하여 불순분자들을 걸러낼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처음으로 후보에 오른 것은 오랜 종교적 전통상 '악마'였지만(그 실체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겠지만) 사람 눈에 보이는 존재도 아니었으니 이에 대한 처벌을 할 수가 없었다. 즉 군중들이 '사회 쇄신'의 거름으로 삼고 박해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친숙하고, 물리적으로 폭행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찾아낸 것이 더 실체가 명확한 마법사와 마녀였다. 마법사와 마녀는 악마의 하수인으로 인정받았고, 결국 마녀사냥으로 마녀와 마법사를 죽여 혼란의 원인을 차단했으니 우린 이제 안전하다라는 안정감과 사회를 하나로 통합하는 역할을 해 주었다.
사회를 혼란스럽게 한 다양한 원인들이 있었고 그 원인들이 통합적으로 작용했다. 그 해결과정에서 각 계층은 순수하지 못했고 자신들만의 손익계산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국민들은 자신들의 억울함과 고통에 대한 원인과 호소의 대상이 필요하였고, 각 종파는 혼란스러운 사회 현상 속에서 쇄신된 신앙을 바탕으로 사회를 개혁하려고 했고, 국가는 이 신앙들을 바탕으로 지방권력을 누르고 중앙권력을 강화하려 했으며, 왕의 입지를 강화해보고자 하였고, 사회의 불안정으로 인해 혼란이 지속되고, 결정적으로 교회와 국가는 이분법적으로 취급되지 않았다. 현대에 들어서 가장 유사한 사례를 꼽자면 바로 냉전시대의 환경일 것이다. 실제로 냉전시대이든 종교개혁 시대이든, 당사자들은 자신들이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경건한', 혹은 '애국적인' 모두를 위한 행동을 한다고 진심으로 믿었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하지만 마녀사냥의 혼란스러움과 상황통제의 어려움이 오히려 병폐로 지적되기 시작했고, 재판 과정도 너무 막나가는 거 아니냐는 이의제기가 있었다. 마녀재판이 너무 심해지면서 도리어 지역 공동체가 극도로 분열, 나중에는 마녀재판 그 자체가 악마의 농간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가 되기도 했다. 미국 세일럼 마녀 재판이 그 대표적인 예로, 이 정도쯤 되면 이단심판관들에게 마을 사람들이 공공연히 적대감을 보일 정도였다. 그리하여 각 나라들은 사법개혁을 통해 마녀사냥을 금지하기 시작했고 끝내 마녀사냥은 자취를 서서히 감추게 된다.

2.2.3. 마녀사냥의 희생자들


주요 타깃은 지위가 낮은 여성이었으며, 여성은 남성보다 우둔하고 변덕스러우며 성적으로 방종하다는 성차별적 사회풍조가 한 몫을 했다. 통계에 의하면 프랑스, 독일 등 서유럽 지역은 80~90%의 희생자가 여성이었다. 그리고 여자만이 아니라 남자도 사탄의 제자 혹은 하수인, 마귀 등으로 불리며 희생된 경우도 많이 있었다. 그러므로 번역어인 마녀(魔女)는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어떤 책에서는 여성 마녀, 남성 마귀로 번역하였다.
일단 명목은 마녀사냥이지만 실제 마녀사냥에 희생당한 사람들은 주로 권력싸움에서 밀려난 자들이나, 종교에서 아무런 득을 입지 못하고 민간 신앙에 기댔을 뿐인 못 먹고 못 살던 하층민들이었다. 심지어 유명한 천문학자 케플러의 모친도 마녀로 몰렸다.[22]
특히 재산이 많은 과부들이 주로 타겟이 되었는데, 당시 여성의 지위도 별 볼일 없었고 남편이 없으니 '악마와 간통했다' 는 식으로 덮어씌우기 편했던 데다 무엇보다도 당시 독일법상 마녀재판으로 몰수된 재산의 일부는 마녀로 누군가를 지목한 사람의 몫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독일에서는 마녀의 재산을 가지지 못하게 했더니 신고율이 급감했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아름다운' 과부는 어떻게 뜻대로 해보려다 거절당해 앙심을 품은 남성들이나 질투한 여성들이 신고하는 사례가 많았다고 한다.
의학적 지식을 가진 산파나 민간요법에 통달한 자들도 주술을 부린다는 명목으로 희생되었다. 의사들이 이들을 경쟁자로 여겨 고의로 고발하기도 했다고 한다. 평소에 원한을 가지고 있던 자를 제거하기 위해 살인사건이나 질병의 원인으로 고발하기도 했다.
나이가 많은 여성일수록 마녀로 몰려 죽는 경향이 심했다. 젊은 가임기 여성은 인구 수, 즉 세수를 늘리기 위해 필요했으므로 무죄방면한 사례가 있다. 소위 마녀라 하면 떠올리는 '심술궂게 생긴 노파'의 이미지를 여기서 찾는 경우도 많다.
한편 어머니가 마녀인 경우 아이들까지 악마의 자식으로 몰려 함께 처형당하기도 했다. 기록에 의하면 어린아이도 마녀라면 죽여야 하며, 나이를 감안해 목 졸라 죽인 후[23] 불에 태우라는 내용이 있다.
동성애자들도 함께 마녀로 몰려 처형되기도 했는데, 보통 마녀사냥에서의 화형은 잘 알려진대로 희생자를 장작 위에 새운 말뚝에다가 묶고 불로 태우는 방법인데 반해, 동성애자들은 아예 사람 취급을 안 해 말뚝에 묶이는 것도 아깝다고 여겨 다른 장작들과 같이 묶어서 그냥 불에 던져졌다고 한다. 영어 욕설 중 남자 동성애자를 비하하는 말로 "Faggot"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 단어는 원래 묶어놓은 장작 더미를 일컫는 말이었다가 게이를 향한 욕설로 쓰이게 된 것은 여기에서 출발했다는 가설이 있다.
이 마녀사냥으로 인해 기독교 전파 이전의 토착 민속 신앙은 말 그대로 박살이 나버리고 기록으로만 남게 되었으며, 마찬가지로 민간에서 전승해 오던 전통 약초학도 일부 기록만 남긴 채 사실상 소멸했다.

2.3. 마녀사냥의 종료


당연히 실제 희생자가 얼마나 되는지 이제와서는 정확히 알지도 못하고, 알 방법도 없다. 하지만 수십년에 걸친 학계의 연구 끝에, 그나마 대략적인 숫자는 파악이 되고 있다. 학자들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처형된 총 희생자 수는 대체로 약 4만~6만 명 정도로 여겨진다.247페이지 그나마도 공식적인 판결을 통해 희생된 사례만을 포함시킨 것이고, 수감 중에 사망하거나 비공식적인 린치에 의한 피해자들은 포함되지 않은 숫자다.
이러한 정신나간 마녀사냥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시작했고 통제가 안된다는 것을 안 정부와 당시 마녀사냥에 회의를 느낀 사람들의 시도로 대규모 사법개혁을 했고 강력하게 규제를 시작하자 18세기 말부터 사라졌으며, 2003년 요한 바오로 2세가 마녀사냥을 교회의 잘못으로 인정하였다.
이 마녀사냥의 끔찍한 경험 때문에 현대의 유럽 지역에서는 '작은 사회'에 대해 의외로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다.

3. 마녀 감별 방법


마녀를 찾아내는 데에는 전술한 마녀의 망치라는 책이 사용되었는데, 이 책은 그 이전까지 마녀에 대해 떠돌던 온갖 전설과 민간신앙을 정리하고 집대성한 매뉴얼이다.[24]
이 책은 비록 가톨릭 수도자들이 썼지만 그 이전까지 전해오던 모든 이미지를 종합한 것이기 때문에 개신교권에서도 참고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자기들이 보기에도 친숙한 이야기들만 나오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영국에서는 그 영향력이 크지 않았다. 영국은 섬나라라 대륙의 전통을 집대성한 말레우스 말레피카룸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 마녀 혐의로 기소된 희생자는 우선 몸에서 악마의 흔적을 찾아내기 위하여 (사실상 수치심을 주기 위하여) 전신의 체모(體毛)를 깎이고, 특히 음부(陰部) 등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곳을 많은 사람이 모인 곳에서 검사받는가 하면, 그 "악마의 흔적"에 바늘을 찔러서 아프지 않고 피가 나지 않으면 마녀라고 하기도 했다.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는게, 살아가면서 흉터건 반점이건 굳은 살이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물론 그런곳이라고 바늘로 찔리면 아프지 않고 피가 나지 않을리가 없으니 상관없지 않나 생각할 수 있지만, 마녀 사냥꾼들이 가지고 다니는 바늘은 찌르면 속이 빈 통 안에 바늘 끝이 들어가 사실상 교묘하게 "찌르는 척"만 하는 그런 물건이였다는게 문제. 심지어는 평범한 바늘끝과 뭉툭한 바늘끝을 남 모르게 교체할 수 있는 그런 바늘을 들고와 일단 평범한 바늘로 맨살을 찔러 실제 바늘임을 남에게 보여주고 "악마의 흔적"은 뭉툭한 바늘끝으로 찌르는 시늉을 해 피가 안 나오게 하는 전문 마녀사냥꾼용 도구도 있었다고.
  • 체포 후 자백을 하지 않은 사람은 손발을 묶어 물 속에 던져 가라앉으면 무죄이고 떠오르면 유죄라는 감별법이 사용되기도 하였다. 일명 물의 길. 돌에 묶어서 빠뜨리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알다시피 사람은 기본적으로 물에 살짝 뜬다. 그러므로 대다수의 경우는 이런 식으로 물고문 당하고 끌려나와서 화형.
  • 또 다른 감별법인 일명 불의 길의 경우 달궈놓은 쇠판을 걷게 하여 사망하면 무죄, 살아나면 마녀로 보아 화형이라는, 어찌되었건 죽는 그런 재판도 있었다. 이렇게 한 이유는 간단한데 정말로 악마의 종복이라면 자연물도 그 자를 거부할 터인즉 불에 닿아도 타지 않고 물에 빠져도 익사하지 않으리란 것이었다. 문제는 이런 식으로 따지면 자연물도 거부한다면 화형으로 죽지도 않을 것이라는 모순이 생긴다는 것인데, 그걸 상식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애초에 마녀사냥 따위를 했을 리가 없다. 또한 그런 판단이 가능한 이가 있었다고 해도 그걸 입밖으로 꺼냈다간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 이런 즉각적인 감별법 외에도, 희생자에게서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각종 고문을 가했는데, 기록으로 남아 있는 고문 묘사를 보면 쏘우 저리가라 할 정도로 사람을 고깃덩이마냥 취급했다는걸 알 수 있다. 신체 위에 몇백 kg에 달하는 무게추를 올려놓거나, 목구멍에 깔때기를 꽂고 계속 물을 퍼붓거나, 사지를 죄거나, 가시투성이 의자에 앉히거나, 등 뒤로 손을 묶은 다음 높은 곳에 매다는 등... 끝끝내 스스로의 결백을 주장하는 사람은, 풀려날 만한 사건이 생기거나, 자백을 할 때까지 몇 달이건 붙잡혀 고문을 당하곤 했는데, 연이은 고문으로 고통스러워하던 사람을 보다 못한 감옥 간수가, 차라리 없는 사실을 날조를 해서라도 빨리 인정하고 고통에서 해방되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고 권유했다는 기록도 있다.
보통 마녀임이 인정되면 즉시 화형당할 것을 알기 때문에 희생자는 극렬하게 자신이 마녀임을 부정하는데, 생살이 갈리는 고문을 받고 나면 결국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없는 말을 지어내 거짓 자백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한 가톨릭 신부가 이걸 우연히 보고나서 충격으로 시름시름 앓았다고 한다. 결국 일단 한 번 마녀 혐의로 기소된 사람의 최후는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고, 다만 얼마나 빠르게 마녀임을 인정하느냐에 따라서 얼마나 고통을 당하고 죽을 것인지가 정해지는 셈이었다.
때때로 마녀사냥에서 기적적으로 풀려나는 경우도 있었는데, 자진해서 재산을 헌납하거나, 권력층에 연줄이 있는 경우거나, 지역에 따라서는 '가임기 여성'인 경우에 방면되는 경우도 있었다. 대개 마녀 행위의 주도자를 많이 밀고한 사람이 방면되기도 했는데, 이 경우는 '마녀들의 집회에 참석한 다른 마녀를 대라.'라는 질문에 살기 위해 자기가 아는 사람 이름을 줄줄이 읊는 것이다.
실제로 한 할머니가 길을 잃고 인근 숲을 헤매다가 마녀로 찍혀 고문을 받던 중 '또 다른 마녀'로 한 남자를 지목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이 남자는 할머니가 길을 잃고 헤매다가 우연히 지나친 무고한 시골 총각이었다.[25] 영문도 모르고 마녀로 지목당해 끌려가는 총각이 억울해하자 할머니 왈,

"나도 자네가 마녀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네. 자네가 나와 아무 상관없는 사람인 것도 알고 있지. 나를 용서하게. 그러나 만약 또 그 고문을 받게 된다면 난 또 다시 자네의 이름을 댈 수 밖에 없을 걸세."

이 사례만 들어봐도 마녀사냥의 희생자가 어떻게 나왔는지 안 봐도 뻔하다. 동시에 마녀사냥이 피해자에게 얼마나 끔찍한 일이었는지 알 수 있다.

3.1. 지역별 마녀사냥


마녀사냥은 사실 유럽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기록을 보면 상당수의 고대 사회에서 소위 '마법사'들이 탄압받으며 죽는 이야기가 나오고[26] 이와 같은 악습은 아프리카인도, 파푸아뉴기니의 오지에서는 아직까지 일어나고 있다. 당장 구글신에서 검색만 좀 돌려봐도 마을 주민들에게 몇몇 사람들이 마법사라고 구타받는 비디오가 나돌 정도니...
마녀사냥이 이처럼 시대를 초월하는 글로벌한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인류학자들은 마녀사냥이 단순히 유럽에서만 일어난 종교적,역사적인 이벤트이기보다는 인간의 집단 폭력성을 배출하는 방식 중 하나라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27]
유럽사에서의 마녀재판은 지역마다 워낙 양상이 다양해서 연구자들이 머리칼을 쥐어뜯는 주제 중 하나다.
  • 독일은 마녀사냥이 가장 심한 곳이었는데 그마저도 지역마다 서로 대단히 달랐다. 해당 지역을 통치하는 권력자의 성향에 따라 강하게 영향을 받은 듯하다. 가끔 어떤 재판은 10년이 넘게 계속 됐으며, 혐의자가 석방되어 집행유예를 받았다가 다시 체포되어 심문받고, 다시 훈방 조치되고를 반복하기도 했다. 이러한 마녀사냥은 도시처럼 번화한 곳보다 시골에서 더 잔인하게 시행된 경우가 많았다. 도시에서는 고문을 하더라도 법대로 하라고 따질 사람이 많지만 시골에서는 법에서 정한 제한 따위 다 무시하는 경향이 많아서 그렇다. 또한 마녀라고 해서 여자만 잡은 게 아니었다. 기회만 되면 마녀라고 몰아갈 수 있을 만한 독거 노인을 몰아서 잡았는데 그 중에는 남자도 상당했다고 한다. 물론 전체적인 비중으로 따지면 여성 희생자가 더 많지만 모스크바의 경우 희생자의 70% 이상이 남성이였다. 독일에서는 17세기 중엽의 10년 동안에 2살 난 어린이를 포함하여 1,000여 명이 처형된 데 비해, 영국의 경우 알려진 것과 달리 마녀사냥은 적은 편이였으며 처형당한 숫자는 지나치게 과장된 것일 뿐 실제로는 마녀로 고발되어도 무죄로 풀려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독일과는 반대로 마녀를 처형하는 것이 죽인 마녀에게서 압수한 것보다 돈이 더 드는 데다가 마녀사냥이 미신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또 독일 등 다른 나라와는 달리 영국은 마녀를 사형에 처할 때 때 화형이 아닌 교수형에 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다만 교수형에 처한 뒤 시체를 불로 태웠다.

  • 개신교 국가에서도 마녀사냥은 많이 이뤄졌다고 한다. 마녀가 종교적·사회적으로 위험시되지 않게 된 18세기에 와서는 박해가 격감하여 병리학적으로 다루어지게 되었지만 개신교 신자들이 이주한 미국에서는 꽤 근대까지 자행되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세일럼 재판으로 이때 이 재판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유명한 작가 너새니얼 호손[28]의 조상이었는데 그 사실을 알게 된 호손은 자기 성을 'Hathorne' 에서 'Hawthorne' 으로 바꿔버렸다고 한다. 세일럼 재판은 당시에도 말이 많았는데 완전 무죄는 거의 2000년대에 되어서야 이루어졌다. 아서 밀러가 이 사건을 걸작 희곡 크루서블로 남겼고 영화화도 되었다. 아서 밀러는 매카시즘의 희생양이었기 때문에 무엇을 풍자했는지는 상상 가능한 일이다.

4. 그 밖의 이야기


  •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국가에서 나서서 '마법 사용자'들을 처벌한다. 물론 실제 마법 사용자는 없으니까 유럽의 마녀사냥처럼 정적이나 껄끄러운 인사들 제거를 위해 사용된다는 의견이 지배적.
  • 1594년 독일 뇌르틀링겐에서는 11달동안 약 56번에 걸친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도 끝까지 마녀가 아니라고 뜻을 굽히지 않다가 결국엔 고향인 울름의 도움으로 풀려났다는 마리아 홀린(Maria Hollin)이라는 이름의 강철의 여인이 있었다고 한다. 56번 정도 고문을 당했는데도 마녀라는 자백을 얻지 못하면 풀어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마녀사냥은 경제적 갈취가 목적인데 이 당시 고문은 사형집행관이 했는데 이들은 고문을 하거나 사형을 집행할 때마다 돈받고 일했다. 그런데 한 일로 56번이나 고문을 했다는 건 그만큼 고문하는 측에서 돈이 줄줄 샜다는 얘기가 된다. 56번이나 고문했는데도 굴하지 않았으니 한번 더 한다고 자백을 받아낼 수 있을지 의문이며 설령 자백을 받아냈다 쳐도 이미 56번이나 고문했던터라 이문도 (보통 상황에 비해서) 별로 남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느니 차라리 다른 사람을 잡아와 고문해서 자백받아내는게 더 이득이었을지도 모른다. 담당자들 심리에서도 생각해보면 저 질긴 여인을 계속 고문하는 것도 못할 짓일테고...
  • 2000년대 케냐에서 마녀사냥으로 인해 성공한 사업가와 그 가족들이 마을 사람들에게 단체로 화형당해 세계에 충격을 주었는데 이를 조사한 경찰발표에 따르면 부자가 된 사업가의 재산을 노린 친척들이 마을 주술사와 짜고 마을 사람들을 선동하여 사업가와 그 가족들을 죽이고 재산을 강탈한 것으로 밝혀졌다.
  • 잔 다르크도 마녀라는 죄목으로 기소당했다. 다른 마녀사냥들과 마찬가지로 잘 살펴보면 다른 내막이 있으니, 정치적 거래의 희생자로 잉글랜드와 프랑스, 친영국파 가톨릭 교회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면서 희생양이 된 경우이다. 잉글랜드 측에서는 백년전쟁 말기의 잉글랜드군을 무찌른 잔 다르크를 제거하기를 원했고, 프랑스는 국왕보다 인기가 높아지는 잔 다르크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이에 잉글랜드는 부르고뉴파의 도움으로 잔 다르크의 신병을 양도받았고 프랑스 국왕은 잉글랜드로부터 적절한 뒷돈을 받으면서 그것을 묵인했다. 친영파 가톨릭 교회는 이미 짜여진 각본대로 잔 다르크의 이단 혐의를 입증했으며 이를 문서화시킨 뒤에 잉글랜드 국왕에게 넘겨버렸다.
잔 다르크가 서명한 자백서에는 '자신은 자신의 이단 행위를 회개하며 다시는 정통된 신앙에 도전하지 않겠다' 는 내용이 적혀있었으며 동시에 '이와 같은 일이 또 발생시 어떤 벌도 달게 받겠다'고 했다. 이때 문맹이었던 잔 다르크는 자신이 어떤 문서에 서명했는지 전혀 알지 못했으나 그 뒤에 잉글랜드에서 다시 한 번 잔 다르크를 마녀로 기소하면서 어쩔 수 없이 잔 다르크는 화형대로 올라갔다.
  • 로텐부르크의 고문 박물관에는 마녀재판을 체험해볼수 있는 기계가 있다. AB 선택지를 고르는 식으로 진행되나 애석하게도 결론은 하나로 정해져 있다.
  • 한겨울에 기온이 너무 낮아서 주석으로 만든 물건들이 회색으로 변색되었다 바스라졌는데[29], 성당의 주석제 성물들까지 바스라지는 바람에 1850년대의 러시아에서는 겨울마다 마녀사냥이 종종 시행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이 동소체 구조 변화때문에 발생했다는 것이 입증된 건 수십년 뒤였다.
  • 초대 기독교인들도 로마 대화재 때 흑마술을 사용해 재난을 퍼뜨렸다는 이유로 고문 및 사형을 당한 적 있다.
  • 마녀사냥의 역사로 인해 기독교권에선 여성을 보고 마녀라고 하는 건 아주 심한 욕이 된다.


5. 마녀사냥이 등장하는 창작물


  • (Mario) The Music Box -ARC-
  • 파리의 노트르담
  • 더 헌트
  • 레이튼 교수 VS 역전재판
  • 변옥의 슈베스터 - 마녀로 간주되어 화형당한 유족의 딸들을 수도원에서 데려가 3년간 수녀로 생활하게 하며 수도원을 탈출하려고 하거나 수도원의 비밀을 알게되면 죽임을 당한다. 수도회의 마녀사냥으로 인해 주인공은 자신의 어머니를 마녀로 몰아 죽이도록 명령한 수도회 총장에게 복수를 결심한다.
  • 뱀파이어 더 마스커레이드 - 중세시대 일반인들이 벌인 마녀사냥에서 운나쁘게 마녀사냥에 걸린 일부 뱀파이어들이 죽음을 당하자 이에 깜짝 놀란 뱀파이어들은 지금까지 인간 사이에서 노골적으로 정체를 드러내며 활동하던 노선을 바꾸어 인간 사회에 숨어들어가 이른바 마스커레이드를 시작하게 된다. 사실 더 큰 진짜 이유는 트레디션과의 전쟁에서 승기를 거머쥔 오더 오브 리즌이 그 동안 가만히 두었던 초자연체들을 대대적으로 사냥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미 평범한 인간들이 일으킨 마녀사냥에도 부담을 느끼고 있던 뱀파이어들은 수천 명의 계몽된 자들의 지휘를 받고 각종 과학병기로 무장한 수만 명에 이르는 오더 오브 리즌의 군대를 도저히 당해낼 재간이 없었고 그로 인해 인간들 사이로 숨어들어가는 일이 가속화된다.
  • 마녀, 소녀: 위의 마녀사냥도 나오기는 하지만 아래의 마녀사냥이 주로 다뤄진다.
  • 마녀에게 내리는 철퇴 - 마녀로 몰려 참혹하게 고문당하고 처형된 소녀들이 악마와 계약하고 마녀가 되어 고문당하고 처형당하며 쌓인 원한을 마력의 원천 삼아 자신을 죽인 고문 도구, 혹은 처형법을 마법으로 연성해내 교회와 전면전쟁을 벌인다는 내용.
  • 마녀의 속죄 - 에로게인지라 화형이나 고문은 검열삭제(작 중에서는 속죄의 의식으로 표현)로 대체된다.
  • 멋진 징조들 - 작중 주인공의 조상인 예언가 아그네스 너터가 마녀로 몰려 화형당하는데 예언가 답게 그것을 알고 있었고 치마 속에 수십킬로그램의 화약과 못조각을 숨겨둔 체로 화형을 당했다고, 그리고 너터의 화형을 계기로 영국에서 마녀사냥이 끝나게 되었다고 한다
  • 몬티 파이튼의 성배 - 베디비어 문서로.
  • 바카노! - 1700년대 편에서 다뤄진다.
  • 백조 왕자
  • 베르세르크 단죄편
  • 아이반호 - 유대인 처녀 레베카가 성전기사단에 의해 마녀로 고발되고, 재판을 맡은 주교는 결투 재판을 통해 유죄 여부를 가리고자 한다. 주인공인 아이반호는 부상에도 불구하고 상대 기사와 마상 시합을 벌였다가 낙마하지만 기이하게도 상대는 주인공의 창이 살짝 닿기만 했는데 목숨을 잃었다. 정말로 신의 심판이 이루어진듯.
  • 사형집행인의 딸 - 마을 아이들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친하게 지내던 산파가 마녀로 몰린다. 산파의 무고함을 알고있는 사형집행인과 그의 딸, 의사의 아들이 진실을 추적해 무죄를 입증한다.
  • 신세계에서 - 배경 설정으로만 언급되는 수준. 초능력자들이 세계 곳곳에서 발현되면서 초능력자들의 범죄와 일탈이 문제가 되자 미국을 위시한 일반인 세력들이 마녀사냥과 비슷한 초능력자 사냥을 벌이고 이에 초능력자들이 반격하여 세계는 멸망하고 만다. 후반부에 초능력자를 단번에 죽여버리는 세균 병기인 '사이코 버스터'가 나오는데 거기에 동봉된 설명서를 보면 초능력자를 악마라고 부르며 과거의 마녀사냥도 초능력자들의 존재를 어렴풋히 눈치챈 선조들의 지혜라는 언급이 등장한다. 당시 초능력자들에게 일반인이 느낀 공포가 얼마나 컸는지 가늠할 수 있는 부분. 사실 이렇게 취급받아도 할 말없는 짓을 초능력자들이 저지르긴 했다. 초능력자들이 처음 등장하고 나서 한 일이 선행이 아니라 강간살인 같은 범죄였는데다가 몇 명이서 대도시 내의 수천만명을 깡그리 몰살시켰고 전쟁 후 초능력자들 세상이 된 후에도 온갖 나쁜 짓은 다 했다.
  • 어떤 마술의 금서목록 - 프로일라인 크로이투네
  • 음마요녀 - 4번째 에피소드
  • 위쳐 시리즈 - 이쪽은 마법사나 마녀가 원래 가진 능력을 활용해 사회 상류층으로 살았고, 일반인이라도 원한을 품었거나 특정한 주술적 의식을 행한다거나 하면 상대방에게 저주를 걸거나 죽었어도 유령으로 되살아나거나 하는 게 가능하다. 중세 유럽의 미신이나 주술, 설화가 정말로 사실인 세상이 배경이기 때문. 그러나 인류 사이에서 이터널 파이어 교단이 득세하면서 마법사와 마녀, 엘프나 드워프 등의 이종족, 주술 사용자 및 신봉자, 약초사, 연금술사들을 마구잡이로 화형시키고 있다. 이쪽 세계 마녀는 곱게 죽어주지 않기 때문에 칼과 마법 무효화 수갑으로 무장한 전문 마녀사냥꾼도 존재한다.
  • 애스커 - 캐릭터 중 템페스트가 튜토리얼에서 마녀사냥으로 불태워지려다 간신히 살아남아 도망친다.
  • 장미의 이름(영화판)
  • 제로에서 시작하는 마법의 서
  • 크루서블
  • 해리 포터 시리즈 - 대개 역사적인 사건으로만 언급되지만 목이 달랑달랑한 닉이 희생자라고 나온다.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간단한 불꽃이 뜨겁게 느껴지지 않는 마법을 부려 죽지 않았고, 심지어 화형을 즐기는 괴짜 마법사도 있었다지만, 마법을 제대로 통제할 수 없는 어린 마법사나, 성인이어도 지팡이를 빼앗긴 경우엔 실제로 잡혀 처형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닉은 지팡이를 빼앗겨 저항할 수 없었다고 한다.
  • Fate/Grand Order - 1.5부 4장의 배경과 주요 소재가 세일럼 마녀 재판이다.
  • 라스트 위치 헌터 - 빈 디젤, 일라이저 우드 출연의 영화.
  • 트와일라잇 시리즈 - 볼투리 일가의 호위대원인 제인알렉 남매는 과거 영국에서 마녀사냥으로 희생되었다.

6. 비유적 의미에서의 마녀사냥


Witch hunt / public shaming[30]
현대 인터넷 등에서 마녀사냥이란 말이 나온다면 보통 이것을 뜻한다. 사회 안의 불특정 다수가 한 사람 혹은 소수를 거세게 몰아붙이는 것을 말하며, 마녀재판이라고도 한다. 개인정보 유포죄와는 엄연히 다른 개념으로, 개인정보 유포죄가 상대방의 사생활 등의 개인정보를 외부로 유포하는 행위에만 국한된다면, 마녀사냥은 허위사실을 퍼트려 소수의 상대방을 궁지로 몰아넣는 행위로, (허위) 개인정보 유포 외에도 명예훼손이나 모욕죄에 걸리는 행위도 마녀사냥의 범주에 들어간다. 유의어로 인민재판이 있다. [31]
한때 신상털이로 유명했던 코갤일베저장소는 마녀사냥의 온상으로 꼽힌다. 특히 코갤 등 신상털이를 자주 하는 곳은 실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라고 얼굴이나 전화번호 등의 신상까지 까고 보니 전혀 다른 무고한 사람이었던 사례도 꽤 있다. 당연하지만 잘못한 사람이라고 해서 무작정 신상부터 까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소위 말하는 '~~녀'들의 신상 중 이런 사례가 많았다. 웬만한 루머도 여기서 생산되거나 커지고 아니라는게 완전히 밝혀져도 계속 깔 정도니 말 다했다. 해당 문서로. 이외에도 여성시대메갈리안 등이 이러한 사례에 해당한다.
특정 사이트뿐만 아니라 페이스북같은 SNS에서는 하루가 머다하고 마녀사냥이 일어나고 있다. 사실상 지금 일어나는 마녀사냥의 대부분은 이런 SNS가 주도하고 있다고 봐도 된다.
굳이 신상털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 잘못을 저지른 것에 대해 비판을 하다가 그게 선을 넘어서 상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듯한 공격적인 언행을 저지를 때도 있는데, 이러한 행위는 엄연한 비난이자 일종의 폭력이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합리적인 근거에 기반한 비판도 싸잡아서 '마녀사냥하지 말라'고 변호를 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판단은 각자의 몫이나, 너무 앞뒤 가리지 않고 맹렬하게 비난하거나 인신공격, 신상털이 등의 행동을 하는 것은 삼가야 한다.
상대가 명백히 죄를 치렀거나 상대가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경우 이를 근거로 비판을 하는 것은 합당하다. 하지만 그것이 도가 지나쳐 욕설을 퍼붓거나 나쁜 놈으로 매도하는 등 상대에게 정신적 상처를 주는 행위는 실제 마녀사냥을 하는 사람과 다를 바 없는 공격적인 언행이 된다. 그러니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지키며 비판하고자 하는 점만 정중하게 비판을 해야 마녀사냥이라는 지적을 피할 수 있다.
냉전 이후 현대사회의 체계와 법적 이론, 윤리관들은 시민 저항권외에 사적 권력의 행사를 엄중하게 경계하고 있다. 긴급피난이나 정당행위의 성립요건이 까다로운 것이 그 일례이다. 집단적 광기에 편승해 공격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삼가는 것이 좋다.
이러한 취지에서 볼 때 '죄가 없으면 모르겠는데, 죄가 있는 사람을 비난하는 것이 무슨 마녀사냥인가', '정부나 사회지도층을 비판하는 것도 마녀사냥 아닌가'라는 식의 주장은 가장 위험한 생각일 수 있다. 애초에 죄가 있는 자들을 국가가 시민들의 사적 처벌을 막고, 공적으로 처벌하기 위해 만든것이 현대 형법이고, 윤리적인 잘못에 대해서 처벌할 수 없도록 법으로 규정해 놓은 것이 죄형법정주의이다. 또한, 정부나 지배층의 공적인 인물들에 대한 저항은 저항권으로 보장되어 있는 현대시민의 권리이다. 이를 혼동하는 것은 자제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사회의 통념에 반하고 인권, 자유 같이 현재의 보편적인 권리와 상식에 반하고 남에게 피해를 입히는 일을 해서 마땅한 비난과 처벌을 받는 자를 옹호하기 위해서 마녀사냥을 당한다는 의미로 소위 물타기를 시전하는 사례도 늘고 있으며 이에 대항하여 '억울한 사람이면 모르지만 진짜 마녀를 사냥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물론 이에 대답은 명확하며 헌법에서 그런 권리를 보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적제재 문서도 참조.

6.1. 마녀사냥이 묘사된 창작물


작중에서 별 것도 아니거나 잘못한 일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마을 사람들이 누명을 씌우거나 트집을 잡아 이지메를 하는 일이 잦다. 특히 하타케 사쿠모 건에 대해선 진짜 문제가 많은 게 사쿠모는 오랜 닌자 생활로 인해 정신력도 상당히 강한데다가 어린 아들도 있는데도 마을 사람들의 이지메를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다. 게다가 그 이유가 임무를 실패해서인데 이게 일부러 실패한 게 아니라 친구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6.2. 실제 마녀사냥 사례



위의 사건 간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팀의 극성 팬층에 의해 일어난 일이라는 것이다.
하이라이트 멤버 윤두준이 과거 보겸 채널 구독자며 보겸 애청자라고 했던 발언에 유언비어가 붙어 확산된 사건.

[1] 마법을 부리는 자 sorcièr(소시에)의 여성화 + 수렵 Chasse aux[2] 마녀사냥 뿐만 아니라 온갖 마녀에 대한 박해를 포함한 뜻이다.[3]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마녀 대신 무당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4] 계몽주의로 인해 반기독교 감정이 만연했던 19세기 초에는 8백만 명이 마녀사냥으로 목숨을 잃었다는 주장이 진실처럼 받아들여졌고 아직도 이와 같은 수치를 검증 없이 사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당시 유럽의 인구를 생각해볼 때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다.[5] 그런데 사실 이 로마법도 고대에는 이런 식으로 해석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석했어도 아무 때나 들먹이지는 않았다. [6] 종교재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종교재판은 이단심문을 포함하는 의미이지만, 이단심문 외에도 혼인 문제 등 주민과 밀접한 문제도 다루었다.[7] 존 비드마(Jojn Vidmar), 「십자군과 이단심문 Q&A 101」(번역: 이영욱)[8] 사실 스페인의 경우는 정말로 억울한 경우인데, 스페인은 마녀사냥도 적었을 뿐더러, 이단심문 역시도 알려진 것보다는 덜 광폭했다. Helen Rawlings의 통계(저서인 The Spanish Inquisition에서 인용)에 의하면 사형이 집행된 희생자 숫자는 최대한도로 올려잡아서 1480년부터 1530년까지 약 2000명이며 이마저도 1540년대부터는 콘베르소에 대한 의심이 줄어들고, 재판에 체계가 잡혀가면서 1700년까지 에스파냐 이단심문의 모든 관할권을 합쳐 총 826명만이 처형되었다. 롤링스의 통계를 토대로 최대한도로 잡는다면 가장 참혹했던 1480년부터 1530년까지 연간 40명이 처형된 것인데, 이는 끔찍한 희생이기는 하지만 유럽의 타국가들보다 스페인이 더 잔혹했다고 말하기엔 힘든 숫자이다. 또한 유대인 역사학자 Henry Kamen의 저서 The Spanish Inquisition에 의하면 스페인 이단심문에서는 100명이 사형선고를 받았을 경우 한두명만 사형이 집행되었고 나머지는 인형을 처형했는데, 이것이 사형 집행자 숫자가 터무니없이 오해되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특히 스페인 이단심문에서 40만이 처형되었다는 황당한 정보도 많이 돌아다니므로 주의. John Vidmar의 저서 「십자군과 이단심문 Q&A 101」에 의하면 17세기 스페인 톨레도 법정의 경우 151건의 마녀재판을 다루었는데, 이는 연간 약 1.5건이다. 또한 이들 전체가 처형된 것도 아니다.(이 문서에 자주 인용된 Peter Marshall에 의하면 15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전반까지 유럽 전체에서 약 10만명이 고발당해 4만명이 사망)[9] 영국 워릭 대학 역사학과 교수[10] 1590년부터 1680년까지 약 4,400명이 연루된 걸로 추정. 비슷한 시기 잉글랜드에서 200년간 교수형으로 처형한 일반범죄자가 1천명에 불과한것에 비하면 꽤나 많은 숫자이다.[11] 마르틴 루터가 살던 비텐부르크에도 1540년 마녀사냥이 처음 있었다고 한다.[12] 출처: 폴 존슨 「기독교의 역사」[13] 출처: Peter Marshall, 「종교개혁」[14] 아래에서 쓰여있지만 마녀감별법 중 바늘로 찔러보는 방법이 있었다. 아파하지 않거나 피를 흘리지 않으면 마녀로 간주했다고.[15] 아이러니하게도 공인되기 이전의 기독교도들 또한 고대 로마에 의해 이러한 잔혹한 탄압을 받은 적 있다. 정확히 말하면 공인된 지 1000년은 더 된 시점이니 그 시절 기독교인과 동일시할 순 없지만....[16] 전통적으로는 교황권이 약해지면서 발악한 거라는 견해가 많았으나, 교황권이 종교개혁 시기를 기점으로 과연 약해졌다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여러 반론의 등장(특히 트리엔트 공의회), 개신교 지역에서도 가톨릭 못지 않게 마녀 사냥이 많았다는 점 등으로 인해, 20세기 중반 이후로는 '교파화'라는 현상에서 주로 일컬어진다. 자세한 건 후술.[17] 이 시기 일본에서는 텐메이 대기근이, 조선에는 경신대기근 등이 일어났다.[18] 대부분의 마녀들이 기소당할 당시에 질병을 일으켰다는 죄목으로 기소를 당했다.[19] 당시에는 중앙권력보다 각 장원의 지방 권력이 더욱 강했다. 영주는 그 땅에 오랫동안 군림하는 왕 수준이었기 때문에 중앙의 왕이라 해도 함부로 어떻게 하지는 못했다. 다만 흑사병 이후 인구가 줄어들어 농노들이 강해졌고 이들 중에 자영농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농노들 중에 일부가 반기를 들기도 했다.[20] 다만 사회적으로 탄압받는 소수종파들 사이에서는 '폭군살해론', 다시 말해서 폭군의 살해는 정당하다는 인식이 퍼져갔다. 지역적으로는 잉글랜드 치하 아일랜드의 가톨릭 신자들과, 스코틀랜드의 칼뱅주의자들을 예시로 들 수 있다.[21] 네덜란드가 독립해버린 이유 중 하나는, 펠리페 2세가 이 지역에 근대적 신학교를 짓고 성직자 양성 시스템을 쇄신하려고 하면서, 네덜란드의 도시들이 이를 중앙의 과도한 간섭이라고 받아들인 탓이다. 자세한 것은 네덜란드/역사 문서로. 교황의 경우는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속권은 약해졌으나, 교권은 상승했다. 다시 말해, 종교적 분야에서 전세계의 사제들에게 행할 수 있는 통제력이 커졌다.[22] 케플러가 자기 엄마는 외계인과 결혼한 마녀라는 내용의 소설을 썼는데 그걸 진짜로 믿은 사람이 있었다. 케플러가 변론을 잘 해서 마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했기 때문에 사형까지는 안 가고 어찌저찌 풀려났지만 후유증으로 다음해에 사망한다. 그래도 이 사건 덕분에 그 지역에서 마녀사냥이 주춤해지는 효과가 있기도 했다.[23] 즉 살아있는 채로 태우지는 않는 것.[24]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책이기 때문에 라틴어-영어 대역판이 미국에서 출판되기도 했다. 더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으로.[25] 심지어 이 시골총각은 처음에 길 잃은 할머니를 도와주려 했었다고 한다.[26] 함무라비 법전에서도 마술 행위로 사람을 고발했을 때에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조항이 있었다.[27] 현대에도 중국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처럼 자신이 위협을 느끼는 대상에게 극도로 잔인한 행태를 보인 바 있다. 단지 전근대 사회에서는 이와 같은 집단 광기가 종교적인 이유로 배출되었던 것이고 현대 사회에서는 이념적인 이유로 배출되는 것이라는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28] 유명한 <큰바위 얼굴>, <주홍글씨>의 저자이다.[29] 이 현상을 주석페스트라고 한다.[30] 공개적 모욕.[31] 하지만 둘은 엄연히 다른데 마녀사냥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 마녀로 멀쩡한 사람을 몰듯이 잘못이 보통 없는 멀쩡한 사람을 몰아가는 걸 많이 이야기하고, 인민재판은 (보통) 잘못이 있지만 사소한 수준인걸 공개적으로 조리돌림 한다는 차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