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스미스

 

1. 개요
2. 생애
3. 매체에서
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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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dward John Smith (1850-1912)
1912년 빙산에 부딪혀 침몰한 여객선 타이타닉호의 선장. 배가 배인 만큼 여객선 선장 중에서는 제일 유명하다.
사망 당시 나이 62세였으며 늦둥이 딸이 하나 있었다. 이 딸은 나중에 자식 두 명을 낳았는데 둘 다 젊었을 때 자식도 없이 죽었기 때문에 현재 직계 후손은 없다.

2. 생애


스미스 선장은 13세부터 50년이나 바다에서 일했으며 낮은 하류층 출신이었으나 자수성가했고 그 기품과 카리스마 덕분에 영국의 유명 해운사인 화이트 스타 해운(White Star Line)의 고객 중에도 오로지 스미스 선장의 배만을 타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당시 영국 해군 예비역 항해중령 계급을 가지고 있었다.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 1년 전인 1911년, RMS 타이타닉 호의 자매선 RMS 올림픽 호의 선장으로 재직하던 중, 영국 해군 방호순양함 HMS 호크(Hawke) 함과의 충돌 사고를 겪었다. 자칫하면 말년에 명성과 재산 등에 타격을 입을 수도 있는 사건이었지만, 조사 결과 자연현상에 따른 불가항력으로 결론나서 스미스 선장 개인의 이력 등엔 아무 흠집이 나지 않았다. 이 해에 은퇴할 예정이었지만 회사측의 설득으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출항하기로 한 것이 바로 타이타닉호의 첫 항해였다는 얘기가 있다. 이 항해에서 안타깝게도 에드워드 스미스 선장은 자신의 최후와 마주하게 되었다. 비록 법적 책임을 면했다지만, 엄연히 화이트 스타 입장에선 꽤 큰 재산상의 손해를 입힐 당시의 책임자임에도 불구하고 동급 선박의 선장을 다시 부탁할 정도였으니, 그의 해운 업계에서의 명성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참고로 스미스 선장 본인은 당시 선박회사들간에 불붙은 속도 경쟁(일명 블루 리본 레이스)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그보다는 여객선 선장으로서 승객이 안락하고 편안한 항해를 할 수 있도록 주의를 기울여 안전한 항해를 하는 쪽에 가까웠다. 뉴욕-사우샘프턴 간 대서양 정기 항로는 예나 지금이나 바다가 거친 북빙양을 가로지르는 코스이다. 이 모습은 당시를 그린 다른 영화 브루클린에 잘 묘사되어 있다. 그가 무리한 항행을 한 것으로 보일 수 있으나 사실 스펙상으로는 무리한 항행도 아니었다. 올림픽 호의 자매선인 타이타닉은 당대 최대, 최고의 선박이었으며 충분한 항행 능력이 있었다. 단지 운영상의 허점들(빙산 주의보 무시, 무선사의 과로 등)이[1] 결국 빙산 충돌 후 침몰이라는 해난사고로 이어졌던 것이다.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 당시 난생 처음으로 이러한 상황에 처하자 매우 난처해했다고 한다. 그가 선원들에게 배를 포기하라고 선언한 뒤 마지막으로 목격된 이후에 무엇을 했는지는 목격담이 제각각인데, 영화에 묘사된 것처럼 조타실 문을 잠그고 침수될 때까지 나오지 않았다는 설과 다른 선원들과 함께 승객들의 탈출을 돕다 물에 휩쓸려 가라앉았다는 설 등 여러 가지의 설이 있다. 종합해서 추측해보자면 조타실에서 잠시 마음을 가다듬다가 나온 뒤 물에 흽쓸려 죽은 것으로 보인다. 뭐가됐든 항해 및 침몰 과정에서 비록 실책을 어느정도 저질렀지만 직무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배에 남은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선장은 배와 운명을 함께한다는 사례 중 하나가 되었다. 절반 가량의 항해사[2] 및 기관사 총원 또한 순직했다. 시체는 발견되지 못했다.
타이타닉이 고속으로 질주하다가 빙산에 충돌한 것 때문에 그가 무리하게 항행을 했다는 설이 많고, 심지어 선주인 이스메이가 속도를 내라고 압박했다는 낭설도 있지만, 최고속도에 가깝게 항해하는 것은 당시 대서양 횡단 여객선으로서는 '''당연시되던''' 일이었다. 타이타닉은 초호화배이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이동용 여객선이었지 관광용 크루즈선이 아니었으며[3], 스케쥴을 지키는 것이 중시되었다. 또한 사건 전까지 빙산으로 인한 대형침몰사고는 드물었으며, 오히려 1907년에는 독일의 거대 여객선인 SS Kronprinz Wilhelm이 빙산에 충돌하고도 항해를 무사히 마친 적도 있었다. 1901년에 진수된 이 배는 1923년에야 퇴역했다.
당시는 비약적으로 발전한 조선 기술 덕분에 더 이상 빙산 정도로는 거대한 여객선에 위협이 될 수 없다는 풍조가 있었으며, 빙산을 발견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견시와 함교에 배치된 상선사관들의 몫이었다. 무엇보다 빙산 침몰에 대한 위험 자체를 경시하는 풍조가 컸다. 스미스 본인도 "현대 조선술로는 배가 침몰하는 상황을 상상하기 힘들다"는 인터뷰를 한 적이 있으며, 실제로 빙산 충돌 이후에도 승객들은 사건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했다. 당시 1등석 승객들은 구명보트를 타기 위해 밖으로 안내된 뒤에도 춥다고 불평하며 다시 들어갔으며, 아예 구명보트를 타길 거부하는 사람들도 많았다.[4] 승객들 중엔 갑판 위에 떨어진 빙산 조각들을 갖고 축구를 하거나 음료수에 넣으려 가져가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승객들의 정원에 맞춰 갑판 위에 이중으로 보트를 쌓자고 타이타닉 설계자 토마스 앤드류스가 건의했으나 구명보트 자체가 필요없다며 윗선에서 묵살된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현대 기준으로 보면 단체로 죽고 싶어 환장한 사람들인가 싶지만, 1912년 당시 사람들은 "타이타닉이 빙산에 충돌해 침몰하고 참사를 당하는 것" 자체를 상상하기 힘들었다는 소리. 즉, 스미스는 안전불감증 무모한 선장이 아니라, 이정도의 대형 해상사고를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20세기 초 사람들의 한정된 지식과 시각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3. 매체에서


타이타닉 관련 영상물에서 맡은 배우만 따져도 15명은 넘는데, 증언대로 승객들을 돕다가 선교 조타실에 들어가서 조용히 최후를 맞이하는 모습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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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년판에서는 반지의 제왕세오덴의 실사 배우로도 유명한 영국인 배우 버나드 힐이 배역을 맡았다. 실책을 저질렀으나, 그것을 영웅적인 최후로 만회한 지도자격 캐릭터라는 점에서 세오덴과 비슷하다.
영화에선 실제 인품 그대로 인자하고 기품 있는 모습을 시종일관 유지하고 있다. 이사장 이즈메이가 종용하여 빙산이 많은 야간에 무리하게 고속을 내게 된 것으로 묘사됐다.[5] 충돌 직후 침몰을 막을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자 이즈메이에게 '당신이 원하는 대로 신문 1면에 나오게 되었군요.'라고 차갑게 독설을 날린다.
더 이상 쓸 수 있는 구명보트가 없는 상황에서 갓난아기를 데리고 있는 한 여성이 "선장님, 어디로 가야만 하나요?"라고 묻자 안타까움과 자괴감이 섞인 표정으로 바라보고 차마 대답을 못한채 돌아서고, 선원이 양보하려는 구명조끼를 거부한 채 바로 뒤 조타실[6]에 들어가 문을 잠근다. 유리가 깨지며 침수되자 담담히 타륜을 잡고 물길에 흽쓸려 사망했다. 마지막 로즈의 환상 때 계단실 윗층에 서 있으면서, 잭과 로즈에게 박수를 쳐 줬다.


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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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미스 선장을 기리는 동상. 동상 건립 비용은 전액 기부에 의해 충당되었으며, 그가 마지막에 남긴 말인 '영국인답게 행동하라(Be British)'란 문구를 새겼다고 한다. 사진 출처 다만 영국인답게 행동하라는 말은 출처가 불분명하다. 실제로 알려진 유언은 선원들에게 한 "자네들은 충분히 직무를 다 했네. 이제 각자 알아서 하게"(You've done your duty, boys. Now, every man for himself)이다.


20세기 초까지 생존한 인물이었던 탓에, 짧으나마 생전 모습이 기록된 동영상이 존재한다. 사망 1년 전, 타이타닉의 자매선 RMS 올림픽의 선장으로 재직 중 찍힌 영상으로, 저위도 지역 혹은 더운 기후에서 근무할 때라 흰색 하정복을 입고 있다.

[1] 첨언하면 타이타닉은 무선통신사 두명(필립스와 브라이드)가 교대로 24시간 근무를 해 규정을 지켰으며, 참사 당시에도 근무시간이 거의 다된 필립스를 브라이드가 교대해주러 통신실에 있던 참이었다. 여기서 무선사 과로는 타이타닉과 지척에 있던 캘리포니안 호 얘기로, 캘리포니안은 불과 한 시간 정도 거리에 있어(구조요청 로켓이 보일 정도였다) 운이 따르면 전원구조도 가능했으나, 무선통신사가 시릴 에반스 한명이라 하필 그때 잠이 들었고, 당시엔 로켓의 신호에 대한 해석이 하나로 정해진게 아닌지라 선장도 로켓을 보고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 그냥 다시 취침했다.[2] 항해사들 중 2등 항해사 찰스 라이톨러, 3등 항해사 허버트 피트맨, 4등 항해사 조지프 박스홀, 5등 항해사 헤럴드 로우 총 4명이 생존했다. 3~5등 항해사는 '''본인이 멋대로 탄 게 아니라''' 생존자들의 인솔을 위해 '''선임 항해사들의 지시에 따라''' 보트에 탔으며, 수석 항해사와 1등 항해사는 배에 남아 순직, 막내 항해사인 6등 항해사 제임스 무디는 보트 탑승 지시를 받았지만 거절하고 배에 남아 있다 순직했다. 생존 상선사관 중 최선임인 2등 항해사 라이톨러는 표류하다 뒤집힌 접이식 구명정 B에 올라타 생존자들을 지휘하며 살아남았다. 선원들이 덜 타면 그만큼 승객들이 더 탈 수 있지 않느냐고 할 수도 있으나, 험한 바다에서 항해술 등에 무지한 민간인들만 잔득 타 봤자 구조될 때까지 버티지 못 하고 사상자만 늘기 때문에(불빛도 없는 망망대해에서 떠내려가버리면 구조선이 도착해도 찾을 길이 없다), 항해사 등 선원들이 몇 명 타서 인솔해야 한다.[3] 여객기의 대중화로 현재 순수 이동을 목적으로 며칠동안 대양을 건너는 초대형 여객선은 사실상 없으며, 이동목적 여객선 비교적 짧은 거리(한국-중국,일본 등)를 오가고 저 정도 규모의 초대형 여객선은 대부분 크루즈선으로 쓰인다. 그러나 당시로서 저런 배들은 현대의 비행기처럼 주요 장거리 이동수단으로, 장거리 여행인만큼 몇시간이 아닌 며칠씩 연착되는 경우도 많아 스케쥴을 엄수하는게 중요했다. 그리고 현대에 기술이 발전해도 비행기 참사는 발생하듯, 당시도 주 장거리 이동수단이 배인만큼 아무리 당시 기준으로 좋은 배고 무리한 운항이 없어도 참사를 아예 없애는 건 불가능했다. 염두에 둘 건 당시 규정상 타이타닉의 운항은 전혀 무리한 운항이 아니라 것. 최고속 운항은 당연한 것이고, 구명보트도 규정이 강제하는 것보다도 넉넉하게 실은 것이다. 즉, 당시 규정이나 운항 관례가 그 따위인게 더 문제. 사고 이후 낙후된 여러 규정(배의 구명보트 승선 인원에 대한 것이라든지)이 바뀐 걸 생각하면, 막말로 타이타닉이 아니어도 누가 됐던간에 사고가 일어나긴 했을 것이다.[4] 살 기회를 포기하고 숭고하게 희생한 사람들 얘기가 아니라, 초반에 배가 가라앉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안 탄다고 한 사람들 얘기다.[5] 라이톨러가 바람없이 수면이 잔잔하다면서 "이대로라면 빙산을 식별하긴 더 힘들듯 합니다만..(어두운 밤에는 파도가 빙산에 부딫히는 모습이 더 식별하기 쉽다)"라면서 은근히 눈치를 주는데 "그렇군..."하고 고민하다가 결국 현 속도를 유지하라는 지시를 내린다.[6] 타이타닉은 EOT(엔진 오더 텔레그래프)와 타륜이 있는 선교 바로 뒤에 예비 개념으로 조타실이 위치해 앞 타륜이 고장나거나 할 경우를 대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