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진 베일러
1. 소개
NBA의 전직 농구 선수로 선수 생활 내내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에서만 뛰었던 레이커스의 대표적인 프랜차이즈 스타. 그리고 콩라인의 전설이기도 하다. 명예의 전당에도 올랐으며 그의 등번호 '''22번'''은 레이커스에서 영구결번이 되었다. 커리어 내내 LA 레이커스를 8번이나 결승에 올렸지만 결과는 '''모두 준우승'''.[3] 더 황당한 것은 시즌 중에 은퇴했는데, 그 해 '''소속팀이 우승했다'''. 거기다 LA의 '''2'''등팀 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의 단장을 '''22'''년간 지냈다.
그리고 '''2'''0'''2'''0년 ESPN 선정 올타임 순위에서 '''22'''위를 하였다(...)
은퇴에 대해 한가지 알아두어야 할 것은 그의 은퇴는 그가 내린 결정이란 것이다. 구단도 감독도 엘진 베일러에게 은퇴를 강요하진 않았다. "늙은이가 더 머물렀다간 창창한 후배들의 발전이 뒤처질 것이다. 내 전성기는 이미 끝났고 난 물러날 때가 되었다." 이게 그의 은퇴 이유였다. 그리고 레이커즈가 닉스를 꺾고 그 해 우승하자 누구보다 기뻐하며 자기의 은퇴 결정이 옳았다는게 증명되어서 행복하다고 했다. 레이커즈 극렬 안티인 빌 시몬스 도 '우승을 누구보다 염원했던 선수가 본인이 팀의 우승에 장애물이 될 것 같다며 스스로 물러났다. 도대체 역사상 이런 선수를 어느 스포츠에서 찾아볼 수 있겠는가?' 라며 극찬했다.
베일러의 팀을 위한 희생덕분이었는지 레이커스는 드디어 1972년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파이널 우승을 차지했다.[4] 그리고 베일러는 그 공로로 반지를 받기는 받았다. 비록 은퇴는 했지만 팀의 공로가 컸던 베일러를 위해서 레이커스에서 반지를 선물한 것.[5]
하지만 클리퍼스 단장 시절 구단주인 도널드 스털링의 인색한 투자와 인종차별 등에 시달리다가 2008년에 경질당했고, 이에 베일러는 도날드 스털링 구단주와 앤디 뢰저 사장을 상대로 고소했다가 결국 패소했다.
콩라인의 거장이긴 한데 인터넷을 돌아다니는 정보는 다소 부정확하며 과장된 부분이 있다. 실제 베일러의 성적 확인
미네소타 팀버울브스에서는 미네소타 시절의 엘진 베일러의 활약을 기억하는 의미로 그와 조지 마이칸을 비롯 7명의 미네소타 레이커스 선수들의 그의 이름을 구장 천장에 영구결번들과 함께 달고 있다.[6]
2. 플레이 스타일
NBA 농구의 아이덴티티를 만들어낸 장본인 중 한 명이라고 할 수 있다. 현란한 드리블로 상대를 제치고, 슬램덩크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프리스타일. 마이클 조던같은 슈퍼스타 플레이의 원조가 바로 엘진 베일러다. 커리어 평균 득점이 27.4점일 만큼 막강한 공격력을 자랑했다.
또한 결승전 한 경기 최다득점 기록(61점) 보유자다. 2위는 '''마이클 조던'''이 1993년 결승전 때 기록한 55득점, 릭 배리 역시 1967년 파이널에서 55득점을 했다. 참고로 베일러의 기록은 한동안 포스트시즌 한 경기 최다득점이었는데 마이클 조던이 86년에 63점을 때려박으며 2위로 내려앉았다.
거기에 센터도 아닌 스몰포워드였음에도 커리어 평균 리바운드가 13개일정도로 엄청난 선수였다. 다만 당시 농구와 현대 농구에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http://cafe.daum.net/ilovenba/7i/26944. 베일러가 뛰던 60년대는 현대와 비교해 페이스가 엄청나게 빠른 반면에 슛성공률은 훨씬 낮았다. 윌트 체임벌린의 전설적인 평균 50점이 나온 62점을 예로 들면 NBA팀당 평균적으로 107.7개의 필드골을 시도했는데, 오늘날 평균인 84.2과 비교도 안되는 수치이다. 현재 NBA에서 가장 빠른 페이스로 농구하는 골든 스테이트 워리어즈조차 올 시즌 107개의 필드골을 한번, 그것도 두번의 연장을 거치면서 넘겼을 뿐이었다. 2016시즌 현재 NBA 리바운드 1위는 안드레 드러먼드로 14.9개, 2위는 13.9개의 디안드레 조던, 3위는 11.9개의 드와이트 하워드이다. 그렇다면 62시즌에는? 윌트 체임벌린 25.6개, 빌 러셀 23.6개, 월트 벨러미 19개, 밥 페팃 18.7개, 레드 커 14.7개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베일러의 위력을 무시할 수는 없다. 당시 군복무중이던 베일러는 48경기 출장으로 최소기준에 미달해 랭킹에서 빠졌지만 18.6개를 기록했으며, 그 전 시즌에는 73경기를 뛰며 무려 19.8개의 리바운드를 기록하기도 했다. 이때 베일러의 리바운드는 리그 4위였다. 스몰포워드였으면서 리그 최고의 센터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베일러의 리바운드 능력은 사기적인게 맞다. 요점은 베일러의 커리어 리바운드 13개가 대단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당시에는 엄청난 페이스로 인해 현대로서는 상식 밖의 수치들이 나오던 시기였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리고 특이한 사실은, 그가 27세인 1961-62시즌에는 군복무 중이었음에도 NBA에 참가했다. 90년대 중반까지 프로야구에 있었던 '''방위병 주말 or 홈경기 출전 가능'''과 유사한 리그 규정덕에 평일에는 군복무를 하고 주말에 시즌을 뛰면서 그해 자신의 커리어 최고인 평균득점 38.3을 기록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그런 득점머신임에도 불구하고 실제 득점 1위는 한 번도 못해봤는데, 그 앞에 다름 아닌 윌트 체임벌린이 있었기 때문. 개인기록마저도 콩라인인 게 안습.
그래도 플레이오프에서는 4번이나 평균 득점 1위를 차지했다. 물론 플옵의 경우 경기수가 훨씬 적긴 하지만 그가 얼마나 큰 경기에서 강한 선수였는지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라이벌이자 스탯 괴물인 윌트 체임벌린의 경우 의외로 플옵에서 평균 득점 1위에 오른 적이 단 한 번에 불과한데 전문가들이 그가 큰 경기에서 약했다고 지적한 점을 생각하면 의미심장한 부분. [7] 참고로 마이클 조던은 13번 플옵 중 득점 1위에 오른 게 열 번이다.
[1] 미네아폴리스에서의 2시즌 포함.[2] 공동수상[3] 엘진 베일러 개인으로서는 총 7회 준우승으로 역대 최다 준우승 '''2위'''. 왜 준우승이 8번이 아니고 7번이냐 하면, 그의 커리어 내내 소속팀 레이커스는 8번 파이널에 올라가 모두 고배를 마셨지만 그중 1965년 파이널의 경우 베일러가 무릎 부상으로 인해 파이널에서 한 경기도 뛰지 못했기 때문이다. 1위는 그의 팀동료이자 준우승 8회의 제리 웨스트. 그나마 제리 웨스트는 1972년 파이널 우승으로 한을 풀기는 했다. 참고로 역대 NBA팀 중 3연속 '''준우승'''을 기록한 팀은 이 시기 레이커스와 1950년대 뉴욕 닉스 둘 뿐이다.[4] 미니애폴리스에서의 연고이전 이후 최초의 우승. 무려 8번의 준우승 끝에 이뤄낸 우승이다.[5] 하지만 규정상 시즌의 절반 이상도 뛰지 못하고 은퇴를 선언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NBA 챔피언은 아니다.[6] 레이커스가 LA 연고이전 후에 미네소타 시절의 선수들의 영구결번을 모두 해제했다.[7] 윌트는 득점기계 시절 한 번도 우승한 적이 없다. 그가 우승한 건 팀플레이어로 변신한 이후. 게다가 윌트는 플옵 평균득점이 정규시즌보다 확 떨어지던 선수 중 하나다. 자세한 건 윌트 체임벌린 항목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