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리 웨스트
1. 소개
前 NBA 농구선수. 커리어 전부를 레이커스에서 보낸 프랜차이즈 선수이자 현역 시절 마이클 조던이 1:1로 대결해보고 싶은 상대로 꼽았던 선수이다. 1960년대 말~1970년대 초 레이커스의 전성 시대에 크게 기여했다.
2. 생애
2.1. 학창 시절
웨스트버지니아 출신으로 어린 시절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석탄 배관공이었던 아버지는 6명의 아이를 낳았는데 이 중 5번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외향적이고 거친 성격이었지만[3] , 형이었던 데이비드가 한국전쟁 도중 전사한 후 소심해지고 내성적이 되었다. 게다가 덩치도 작은 데다 성격도 소심해서 의사가 쉽게 다칠 수 있는 스포츠를 조심하라고 할 정도로 왜소한 체격이었다.
그런 그가 농구 선수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된 것은 이웃집 창고에 걸려있던 농구 골대 때문이었다. 운동을 못하게 말린 그의 부모 덕에 유일한 취미로 낚시를 하게 되었는데 이는 너무나도 따분했던 것이다. 그러던 중 농구 골대가 눈에 들어왔고 농구공을 넣자 재미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고. 이후 어머니에게 혼나고 매를 맞았지만 굴하지 않고 농구 골대에 공을 넣는 걸 했다고 한다. 그 후 학생 스포츠로 농구를 선택, 웨스트 고등학교에서도 농구 선수로서 활약했고 이 때 183cm까지 크면서 스몰 포워드로서 활약을 하게 된다. 당시 경기 당 33.2 득점을 기록하며 한 시즌 900득점을 기록한 미국 최초의 고교 농구 선수로 이름을 알린 그는 미국 대학들의 최고의 관심 선수가 되었고 60여 개의 학교가 관심을 표한 가운데 집과 가까웠던 웨스트버지니아 대학교를 선택하게 되었다.
대학 농구 시절, 최우수 선수상을 밥먹듯이 먹은 그는 1960년 로마 올림픽의 미국 농구 국가대표팀으로 참가, 금메달을 목에 걸기도 했다.
2.2. 프로 시절
대학을 졸업하던 1960년, NBA 드래프트에 참가한 제리 웨스트는 미니애폴리스 레이커스가 1라운드 2픽으로 지명했다. 시즌 첫해부터 그는 NBA 올스타에 참가할 정도로 뛰어난 기량을 선보였고, 이해 레이커스는 엘진 베일러와 함께 "Mr. Inside and Mr. Outside"콤비로 불리면서 LA 레이커스의 전성기를 이끌었다.이후 '''윌트 체임벌린'''의 합류로 당대 최고승률인 정규시즌 69승 13패라는 기록을 남기기도한다
1969년 NBA 파이널에서 '''준우승을 했지만 MVP를 탄 유일한 사례'''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웨스트는 최근의 인터뷰에서 아직도 69년의 패배의 기억으로 고통받고 있으며 그 때의 MVP도 기쁘지 않다고 인터뷰했다. 기자들이 훌륭한 활약을 보이면서도 번번히 보스턴에 깨지던 웨스트를 위로하기 위해 '''동정심으로 준 MVP'''이기 때문. 리그에서 손꼽히는 선수였던 웨스트가 이런 MVP를 기뻐하지 않은 것도 당연한 일이다.
역대 최고의 슈팅 가드 중 하나로 알려졌고 어마어마한 득점력의 소유자였지만 실제로 웨스트는 게임리딩을 주로 하는 듀얼 가드에 가까웠다. 실제로 그의 백코트 파트너인 게일 굿리치도 슈팅 가드였다. (훗날 포인트 가드를 맡기도 하지만) 또한 삼점슛이 존재하지 않던 시대에 활동했음에도 지금의 삼점슛 라인에 해당하는 위치에서 자유자재로 득점했으며 역대 최고의 슈터 중 하나로 인정받는데, 당시 삼점슛이 있었다면 그 괴물같은 득점력[4] 이 어디까지 올랐을지 모를 일. 스타일은 판이하게 다르지만, 괴물같은 득점력과 특급슈팅력을 지닌 리딩 가드란 점에서 스테판 커리가 연상되기도 한다.
사실 당시는 슈팅가드-포인트가드 구분이 엄격한 시절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냥 가드라고 많이 불렸다.
69년 파이널 7차전 4쿼터: https://www.youtube.com/watch?v=Lnu5vMfPtbw&t=1815s
72년 파이널 5차전 풀게임: https://www.youtube.com/watch?v=ZsgQNV1_7rk
당시 경기를 보면 인바운드할 때 항상 웨스트가 볼운반을 하고 템포조절을 하는 포인트가드의 역할을 하는 걸 볼 수 있다. 다만 백코트 파트너 게일 굿리치 역시 리딩력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리딩가드 역할을 할 때도 있다. 현대적 시각으로 보면 웨스트는 득점형 포인트가드, 굿리치는 리딩이 좋은 슈팅가드였다.
"로고" 못지 않게 유명한 닉네임은 "미스터 클러치"였는데 실제로 플레이오프 평균득점(29.1점)이 정규시즌보다 높은 극소수의 레전드이기도 하다. 웨스트와 그의 동료 엘진 베일러는 큰 경기에서 강하기로 유명했는데, 정규시즌에서는 윌트 체임벌린이 압도적으로 득점왕을 쓸어갔지만 플레이오프에서 평균득점 1위를 차지한 건 항상 베일러나 웨스트였다.[5] 위에 언급된 대로 준우승팀에서 나온 유일한 파이널 MVP이기도 한데, 1969년 당시 우승은 빌 러셀이 선수 겸 감독으로 이끌던 셀틱스에게 뺏겼지만 웨스트는 최종전에서 무려 42점 13리바운드 12어시스트를 기록하며 [6] 파이널 MVP를 탔다. 이듬해 파이널에서 닉스를 상대로 그는 어마어마한 플레이를 해냈는데, 닉스를 상대로 열린 3차전에서 레이커스가 2점차로 뒤지고 종료를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무려 60피트(18미터) 지점에서 던진 버져비터가 적중한다! [7] 안타깝게도 당시는 3점슛이 없었던 관계로 이 슛은 2점밖에 안돼서 연장승부 끝에 레이커스는 석패, 결국 7차전 만에 윌리스 리드의 부상투혼을 앞세운 뉴욕 닉스에게 무릎을 꿇고 만다.[8]
그래도 1972년 파이널 우승을 1회하고 은퇴했다. 웨스트 본인에게도 1969년의 비통함을 달랠 수 있었을 듯.[9]
2.3. 은퇴 후
은퇴 후 1976년부터 3년 간 친정팀 레이커스의 감독으로 복귀해 임기 3년 간 팀을 다시 플레이오프권에 올려놨고, 이후 스카우터로서 매직 존슨을 발굴하는 데 도움을 준 바 있었다. 1982년에 단장으로 승진해 임기 12년간 제임스 워디, A.C. 그린, 블라디 디박, 엘든 캠벨, 세드릭 세발로스 등을 발굴해 '쇼타임 시대'를 만드는 데 주력했다. 1994년 미치 컵책 부단장이 단장으로 승진하자 자신도 부사장으로 승진해 1996년에 샤킬 오닐, 코비 브라이언트, 로버트 오리, 데릭 피셔 등을 영입하여 2000년대 초반의 영광을 만드는 단초를 마련했다. 2000년 퇴임 후 2002년에 약체 구단 멤피스 그리즐리스 단장으로 부임한 후 '스페인의 샛별' 파우 가솔을 성장시켜 부임 2시즌 만인 2003/04시즌에 플레이오프권에 올려놓기도 했다.
2007년 멤피스 단장에서도 은퇴한 후 2011년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의 집행부의 임원(Executive Board Member)으로 합류했다. 웨스트의 역할은 단장을 돕는 고문 역할로 특히 스쿼드 구성과 드래프트, 트레이드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2010년대 골스의 왕조 구성에 크게 공헌했다. 2017년에는 친정팀의 지역 라이벌 클리퍼스로 이적하여 동일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클리퍼스의 스타들인 크리스 폴과 블레이크 그리핀, 디안드레 조던을 모두 내보냈음에도 빠르게 구단을 정상 궤도로 올려놓은 것 역시 웨스트의 판단력과 결단력을 입증했다는 평가다. 2019년 레이커스가 이비차 주바치를 클리퍼스로 헐값에 보내자 큰웃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영입한 선수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만 그 중 코비와는 정말 막역한 사이였다. 본인이 직접 코비의 고등학교 경기를 본 후 당시 올랜도와 계약이 끝났던 샤킬한테 "우승하고 싶으면 레이커즈로 와라. 레이커즈가 리그의 기둥이 될 아이를 영입할거다"라고 코비를 소개한 에피소드는 유명하다. 코비 사망 뉴스를 듣고 정말 말 그대로 오열을 했다. TNT, ESPN 과의 인터뷰에도 눈물을 참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클리퍼스가 2020년 플레이오프에서 허무하게 4-3 역스윕으로 탈락당한 이후 제리 웨스트와 코치진들 사이에서 파워 게임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이 계속 들려오고 있다. 어이없는 참패를 당한 팀이 비시즌에 이런 뉴스가 나오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기는하다. 패배에 막대한 책임이 있던 닥 리버스는 일단 제거되었다. 타이론 루나 샘 카셀처럼 코치진들도 어떻게 될 지는 알 수 없었으나 리버스 후임으로 타이론 루가 감독이 되었다.
3. NBA 로고의 주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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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A 로고의 주인공으로도 유명하다. 해당 로고를[10] 디자인한 앨런 시겔은 웨스트를 모델로 했다고 밝힌 바 있고, 각종 농구 전문지에서도 해당 설을 다뤘으나, 정작 웨스트는 로고가 자기를 모델로 했다는 걸 당시에 모르고 있었다. 또한 NBA는 아직까지도 '''공식적으로는''' 웨스트가 모델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고 있다. NBA 역사상 최장기간을 집권했으며(1984년~2014년) 세계적인 규모의 리그로 만드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두 사람 중 하나로 꼽히는[11] 전 커미셔너 데이비드 스턴은 "기록이 없다"며 코멘트를 거부했으며 현 커미셔너 애덤 실버도 이에 대해 논한 적이 없다. 농구전문기자 손대범의 저서 <I Love Basketball(2008)>에서도 손대범 본인이 해당 소문에 대해 NBA 사무국에 문의한 결과 NBA 사무국 측은 "웨스트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고 밝혔고, 홍콩 NBA-ASIA 국제홍보부장 입감훙(Kam Hung Ip)도 "NBA 레전드를 모델로 삼긴 했으나, 제리 웨스트 건은 정확한 사실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물론 이는 눈가리고 아웅에 가까우며, NBA 선수들을 포함해 모든 관계자들은 로고의 모델이 웨스트라는 걸 잘 알고 인정하고 있다. 심지어 NBA의 공식 홈페이지의 제리 웨스트 페이지에 담긴 비디오 제목 자체도 그의 별명인 "The Logo"이다. 즉, NBA는 사실상 인정한 것. 디자이너 앨런 시겔은 NBA가 웨스트 모델 설에 대해 공식적으로 "뜬소문(urban myth)에 불과하다"고 입장을 정리하는 것에 대해 "그들(NBA)은 리그를 한 개인에 묶어두기보다는 제도화(institutionalize)하고자 하기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이와 같은 추측에 대해 웨스트는 동의하면서, "(로고사용은) 개인(웨스트 본인)을 영예롭게 하고자 하는게 아니라 리그의 이미지를 홍보하고자 하는 것"이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웨스트는 인터뷰를 통해 로고 관련 얘기는 듣지 못했다고도 했음에도 "그래도 로얄티를 좀 받았다면 멋졌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정작 웨스트는 모델료는 물론이고 로얄티를 지금까지 단 한 푼도 받지 못했다. NBA가 로고 사용으로 인해 매년 벌어들이는 라이센스비가 30억 달러(한화 약 3조 5천억 원)에 달한다는 걸 생각하면, NBA가 웨스트가 로고 모델임을 인정했을 경우 그에게 지불했을 비용이 매년 수백만달러에 달했을 수도 있다.
사실 이 같은 이유 때문에 NBA가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기 힘든 것이기도 하다. 단순히 돈 문제가 아니라 현재 NBA 로고는 판매용 상품 뿐 아니라 경기장이나 경기용 소품, 선수용 유니폼 외에도 심판부터 바닥을 걸레로 닦는 알바까지 관련 직원들의 유니폼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관련 물건에''' 박혀있다. 이 상황에서 만약 이 이미지를 갖고 분쟁이 생길 경우[12] 최악의 경우 로고 사용이 불가능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로고가 생긴 1969년 이후 모든 물품은 물론이고 거의 모든 경기 장면에 이 로고가 등장한다는 걸 생각하면 일시적으로 사용할 수 없게 되는 것조차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NBA는 현재처럼 앞서 언급된 홈페이지 설명이나, 전 선수 등 관계자들이 웨스트가 로고라고 하는 걸 묵인하는 등 "비공식적인 인정"에서만 그치는 것이다.
이런 이유가 생긴 건 로고가 만들어지던 1969년 당시 NBA가 지금과 전혀 다른 작은 규모의 리그였고, 법적으로 초상권이나 지적재산권 개념이 전무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현재로선 상상하기 힘들지만 윌트 체임벌린, 빌 러셀, 웨스트 등 스타들이 아닌 평범한 선수들은 NBA 연봉만으로 먹고 살기 힘든 경우가 많아 대부분 부업을 했다.[13] 오늘날 NBA팀은 십억달러 이상에 팔리곤 하지만 1970년대만 해도 NBA구단이 장사가 안되어 공중분해되는 경우도 잦았다. 1980년 결승전이 '''녹화중계되었다'''는 건 유명한 얘기며, 심지어 매직 존슨과 래리 버드의 라이벌 관계로 인기가 높아진 80년대에도 NBA가 드래프트를 TV 중계하기 위해 방송사에 '''돈을 준 적도''' 있었다.[14] 1970년대에 생겨난 신생리그인 ABA도, 결국 NBA에 밀려 사라지긴 했지만 몇년 동안 경쟁이 됐으며 줄리어스 어빙, 릭 베리 등 스타들 몇명을 뺏어가기도 했을 정도였다.(릭 베리는 아예 NBA와 ABA를 오가며 줄타기를 했다.) '''신생리그와 싸움이 될 정도'''의 규모였으니, 이렇게 로고가 어마어마한 가치를 가지리라고 상상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4. 여담
- 2019년 8월 11일 아들 조니 웨스트가 한국계 미국인 골프선수인 미셸 위와 결혼하며 미셸 위의 시아버지가 되었다. 조니는 아버지처럼 웨스트 버지니아 대학교에서 농구 선수로 뛰었고, 2019년 기준으로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에서 프론트 직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5. 관련 문서
[1] 맨발신장[2] 2020년 6월 21일생이며 조니 웨스트와 미셸 위의 딸이다.[3] 아버지로부터 가정폭력을 심하게 당해서 언제나 잘 때 장전된 샷건을 베게 밑에 숨겨놓고 잤다고한다. 학대가 점점 심해져서 언젠가는 자기방어를 해야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4] 커리어 평균이 27점이고 네번이나 평균 30점을 넘겼다.[5] 윌트는 1번, 베일러와 웨스트는 각각 4번.[6] 시리즈 평균 37.9점 7.4어시스트 4.7리바운드[7] http://www.thepostgame.com/blog/throwback/201504/remembering-jerry-wests-buzzer-beating-60-shot-shot-nba-finals[8] 가정에 불과하지만 이 때 닉스의 에이스 리드가 5차전에서 입은 부상으로 6차전을 결장했고 이 경기에서 닉스가 45점 27리바운드를 기록한 체임벌린에게 말 그대로 '''박살'''이 났다는 걸 생각하면, 만약 레이커스가 3차전을 이겼다면 결국 우승을 거머쥐었을 확률이 매우 높다. 당시 닉스는 3차전 승리로 2대1로 앞섰는데, 만약 레이커스가 승리했다면 2대1로 앞선 상태에서 4차전을 승리했으니 3대1이었을 거고, 뉴욕에서 열린 5차전을 패배하더라도 LA로 돌아온 6차전에서는 리드 없는 닉스를 상대하는 매우 유리한 상황이었다.(리드는 7차전에도 겨우 출장해 초반에 슛 두개를 쏘고 바로 교체됐기 때문에 6차전에서는 도저히 뛸 수 없었을 것이다). 즉, 한 경기만 더 이기면 되는 상황에서 홈에서 '''에이스가 없는''' 팀을 상대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우승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실제로 대승을 했었고...그랬다면 엘진 베일러는 결국 우승못한 한을 풀 수 있었겠지만...[9] 함께 고생했던 엘진 베일러는 "나의 전성기는 끝났다. 후배들을 위해서 은퇴하겠다"라며 해당시즌에 은퇴한 상태였다. 베일러는 선수의 신분으로는 우승반지를 얻지 못했지만 자신의 결정이 옳았다며 누구보다 레이커스의 우승을 기뻐했다.[10] 여담으로 저 장면에서 웨스트는 왼손으로 드리블을 하고 있었으나, 실제 웨스트는 거의 오른손으로만 드리블했다. 물론 웨스트는 당시 기준으로 훌륭한 드리블링 실력을 지녔으나 그가 전성기를 보낸 60년대~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주로 쓰는 손으로만 드리블을 하는게 흔했다. 심지어 왼쪽으로 드리블할 때도 오른손으로 드리블을 하는 모습을 보인다. 양손 드리블이 자유자재인 선수는 "코트 위의 마술사" 밥 쿠지 정도였으나 쿠지조차도 오른손을 주로 썼다. 그러나 기술이 급격히 발전하며 70년대를 거치며 피트 마라비치 등 양손 사용이 자유자재인 선수들이 많아지고, 80년대쯤 현재와 마찬가지로 양손사용이 흔해졌다. 이 중 아이재아 토마스같은 드리블의 달인들은 현대의 앵클 브레이커들과 비교해도 전혀 꿇릴 것이 없으며, 84년에 데뷔한 마이클 조던같은 경우 역대급으로 양손을 잘 쓴다. 특히 왼손 돌파와 왼손 마무리가 오른손과 차이가 거의 없는데, 이런 선수는 매우 드물다.[11] 다른 한 명은 물론 쪼잔한 그분.[12] 웨스트 본인이 원하지 않다고 해도 웨스트가 상당한 고령이기 때문에 사후에 가족들이 이를 걸고 넘어질 가능성도 있다.[13] 오늘날 선수들이 유명세를 이용해 광고출연, 사업 투자 등을 하는 것과 다른 '''진짜 부업'''이었다.[14] 현재는 당연히 거액의 광고들이 붙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