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트 체임벌린
1. 소개
단일 시즌 PER 역대 2, 3위[11][12] 를 비롯해 수많은 전설적인 개인 기록을 써 내려간 코트 위의 괴물로, '''농구 역사상 최고의 센터 중 한 명'''이다.
샤킬 오닐, 마이클 조던과 더불어 '''NBA 역사상 가장 압도적이었던 선수'''[13] 로 평가받으며, 역사상 유일한 '''3만 득점'''[14] '''- 2만 리바운드'''[15] 의 기록 보유자다.
닉네임으로 'Wilt the Stilt', 'The Big Dipper',‘The Record Book’이라 불렸다.
2. 플레이 스타일
공격적인 부분에 있어 만능 토탈 패키지. 오른손잡이로 페인트존 내에서 모든 득점이 그의 오른손에서 쏟아져 나온다. 그의 필살기로는 'Lay down'[16] 이 있는데, 정말 기괴한 핑거롤이 아닐 수 없다. 설명하자면 보통 레이업처럼 공을 올리는데, 보통 선수들 같으면 공이 포물선처럼 올라가는 단계가 있기 마련인데 이 분한테 그딴 건 없다. 그냥 공을 '''말 그대로 골대에 내려두고 오기 때문에''' 블락 시도하면 바로 골텐딩 작렬... 사기적인 팔길이에서 구사하는 레이 다운을 그 시대의 어떤 선수도 손쉽게 막는 것은 불가능이었다.
하이라이트 영상을 보면 드리블이나 슛 같은 게 현대 기준으로 엉성해 보일 수 있지만, 1960년대 기준으로 보면 탑클래스의 기술적인 센터라 평할 수 있다. 그 당시에도 윌트에게 기술적인 점을 문제 삼자 Fade away를 무기로 삼고, 패스를 문제 삼자 그 해 어시스트 왕을 차지한다.[17]
또한 그의 점프력은, 오죽하면 자유투 라인에서 한 발 도약으로(!) 레이업이나 덩크를 성공시켰을 정도다. (마이클 조던이나 줄리어스 어빙도 자유투라인 덩크를 성공시켰으나, 그건 전력으로 달려서이고 체임벌린은 실제 '자유투'할 때에 그랬다. 대학리그 당시.) 자유투 시 라인을 넘으면 안된다는 룰[18] 이 이 때문에 생겼다.
가장 큰 단점은 역시 자유투. 통산 성공률이 '''51.1%''' 밖에 안 될 정도로 낮다.[19] 참고로 오늘날 종종 비교대상이 되는 샤킬 오닐의 통산 자유투 성공률이 52.7%이다.
특히 1968년에는 겨우 38.7% 기록해 자유투 최저 성공률 1위를 차지했다. 2015~16년 안드레 드러먼드가 35.5%로 기록을 경신했다. 사실 이 기록외에도 10위권 내에 2개 더 올라가 있다. 참고로 샤크는 10위권안에는 없고 13위에 포진되었다.
3. NBA Career Statis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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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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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점, 리바운드, 출전 시간에 있어 압도적인 기록을 보인다.'''
단일 시즌 PPG '''역대 1위 (50.4)''', 통산 PPG 역대 2위 (30.1)
단일 시즌 RPG '''역대 1위 (27.2)''', 통산 RPG '''역대 1위 (22.9)'''
단일 시즌 PER 역대 2위 (31.82), 통산 PER 역대 6위 (26.13)[20]
단일 시즌 WS 역대 2위 (24.98), 통산 WS 역대 2위 (247.26)
단일 시즌 MPG '''역대 1위 (48.5분)'''[21] , 통산 MPG '''역대 1위 (45.8분)'''
굵직한 것만 해도 이 정도. 단일 시즌 기록은 적혀있는 것 외에도 역대 10위권 내에 윌트의 이름이 여럿 올라가 있다.
이 외에도 '''한 경기 100득점 기록'''[22] , '''한 경기 55리바운드 기록'''[23] , 65경기 연속 30득점 이상[24] , 50득점 이상 경기 118회[25] 등등 일일히 나열하기도 힘든 기록을 세웠다.[26]
루키 시절 기록도 무시무시해서 데뷔경기에서 43득점 28리바운드(!)를 기록했는데 이 43득점은 '''NBA 역대 데뷔전 최다 득점''' 기록이고, 시즌 총 2707득점(경기당 37.6득점)과 1941리바운드(경기당 25리바운드)를 기록했는데 이 역시 '''NBA 역대 루키시즌 최다 득점과 최다 리바운드 기록'''이다.
NBA는 이러한 그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페인트 존을 넓히는 등 무단히 룰을 바꿔야 했다. 그런데도 그는 50-30을 밥먹듯이 하였다. 한 때 시즌 평균 50.4 득점을 한 적도 있다.[27]
당시에는 블록슛이 집계되지 않아서 트리플-더블은 그리 많이 하진 않았다.[28] 만약 그 당시 블록슛이 집계 되었다면[29] 쿼드러플-더블, 트리플-더블 기록이 다시 쓰였을 거라는 의견이 다수이다.
또한 지금까지 뛰었던 모든 선수들 가운데 단 둘 뿐인[30] ''''더블 트리플-더블''''[31] 을 달성했던 선수이다. 1968년 2월 2일 피스톤스와의 경기에서 25득점, 22리바운드, 21어시스트를 기록했었다.
또다른 기록은 1966년과 1967년에 기록한 +30득점 동반 야투율 100%의 트리플 더블 기록이었는데, 이것도 50여 년 동안 윌트만이 기록하고 있었다가 2018년 10월 21일 유럽에서 온 콜라 좋아하는 센터가 35득점 12리바운드 11어시스트 야투율 100%의 기록으로 기록했다.
5. vs 러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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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임벌린과 빌 러셀은 10년 동안 무려 142경기나 맞대결을 펼쳤다. 평균 1년에 약 14번 이상 대결을 펼친 것. 상대전적은 윌트가 57승 85패로 열세에 있고, 체임벌린은 러셀과의 맞대결에서 평균 28.7점, 28.7 리바운드를 기록했다.[32]
이렇게 괴물 같은 능력으로 전설 같은 기록들을 써내려간 윌트 체임벌린이지만 빌 러셀의 팀인 보스턴[33][34] 과의 플레이오프 대결에선 계속 패배[35] 하며 우승과는 거리가 먼 시절[36] 을 계속 보내다가,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에서 알렉스 해넘 감독의 설득으로 수비형 센터로서 동료를 살리는 플레이로 스타일을 바꾼다. '''수비형 센터'''로 스타일을 바꿔서 시즌 평균 24.1득점(...) 24.6 리바운드 7.8 어시스트 를 기록, 마침내 빌 러셀과 보스턴 셀틱스를 꺾고 우승에 이른다. 그 10년 간 러셀은 9번의 우승을 거머쥐었지만 체임벌린의 우승은 고작 1번뿐이었다.
그럼에도 체임벌린은 수비와 리바운드서 최고라는 평가를 받는 러셀과의 맞대결에서 훨씬 많은 리바운드 숫자를 기록했다. 1960년 11월 25일 체임벌린이 기록한 한 경기 최다 55개 리바운드는 바로 '''러셀과의 맞대결'''에서 기록한 것.
실제 1대1 매치업에서는 러셀이 안됐다고 한다. 일단 사이즈부터가 러셀이 딸리는 데다가 개인기량이 워낙 좋고 운동능력이 워낙 개사기라...[37]
그래도 2016년 ESPN이 선정한 순위에서 7순위인 빌 러셀보다 앞순위인 5순위로 뽑혔다. 러셀의 우승기록만큼이나 전성기 시절 윌트의 개인기록과 퍼포먼스는 압도적이었던 만큼, 빌 러셀이 우승 횟수가 훨씬 많다고 해서 윌트를 무조건적으로 앞선다고 보진 않는다는 소리.[38][39] 빌 러셀의 항목에서 러셀의 야투율이 그 당시 기준으로는 결코 낮은 편이 아니라 했지만 체임벌린과는 차이가 상당하다. 야투율 자체도 차이가 나지만 훨씬 더 많이 던져서 넣고 그정도 차이라면 정말 상당한 차이라 볼 수 있다. 일단 통산 평균 득점에서도 러셀이 15.08점, 체임벌린 30.07점으로 약 두 배정도 차이 난다. 2015-16시즌으로 비교 하자면 스테픈 커리와 마이크 콘리 정도의 득점력 차이라 보면 된다.
NBA가 블록을 윌트가 은퇴한 직후인 1973-74시즌부터 집계한 덕분에 공식적인 블록 수치는 0이다. 그러나 만약 NBA가 1960년대부터 블록 수치를 집계했다면 그가 역대 1위, 라이벌 빌 러셀이 2위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40] 그들을 지켜본 이들은 그들의 블럭이 "평균 7~8개"라는 증언이라고 하고 있는데, 이게 과장이라고 생각해 평균 5개라고 생각해도 윌트는 5,225개, 러셀은 4,815개라는 말도 안되는 수치가 나온다.
사실 "평균 7~8개" 자체가 터무니없다고 보기도 힘든게 한 양덕이 윌트와 러셀의 당시 블록에 대한 기록이 존재하는 신문기사를 샅샅히 뒤져서[41] 통계를 내본 결과 윌트는 112개에서 '''평균 8.8블록''', 러셀은 135경기에서 '''평균 8.1블록'''이라는 무지막지한 수치가 나왔다고 한다. 참고로 두 선수 모두 마지막까지 포함된 수치. 윌트의 마지막 시즌은 표본이 21경기로 평균 7.6개, 러셀의 경우 표본이 13경기로 8.3개였다. 게다가 "블록수치가 높은 것만 기사화됐을 것이다"라고 추정할 수도 없는게 블럭수치가 1개, 2개인 경기까지 그대로 집계되어 있다. 참고로 시즌 하이 수치는 윌트는 15블록, 러셀은 '''21블록'''이다.
6. 일화, 떡밥
빌 러셀의 보스턴 셀틱스 때문에 우승은 2번에 그쳤지만 체력/신체에 관해서는 정말 말도 안 되는 무수한 일화들을 가지고 있다. 그의 기록들을 보다보면 한 경기 30-20 정도는 '''겨우?'''라 생각하게 될 정도.
결론적으로 엄청난 운동능력의 소유자이다. 캔자스 대학 시절에는 육상 종목에서 우승을 휩쓸기도 하고, 힘이 엄청나게 세어서 내기 팔씨름으로 용돈벌이(!!!)를 했다고 할 정도이다.
NBA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의 팀동료였던 게리 와드는 이렇게 말했다.
00년대 핸드폰 가로본능 cf에 나왔던 무브로 카포에라나 올드스쿨 비보잉에 있는 기술이다. 체중대비 엄청난 코어힘이 있다면 가능하고 일반인중에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긴 하지만 하반신의 길이, 즉 키가 클수록 어렵다. 180이상만 되도 상당히 난이도가 있는 동작이다."윌트가 나나 빌리를 데리고 밖에 나가는 일은 거의 없었는데, 사람들이 항상 그를 둘러싸고 사인을 요청했기 때문이었죠. 하지만 어느날 밤 홈경기가 끝난 후 우리 셋은 필라델피아 중심가를 걷고 있었죠. 밤 11시 정도였습니다. 우리는 '나처럼 해봐요' 놀이를 하면서 가고 있었죠. 다른 모든 세 젊은 독신남이 모이면 그렇듯 바보스런 일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다가 기둥 하나와 마주쳤는데, 마침 윌트의 차례가 되었었죠. 그는 두 팔을 벌려서 기둥을 끌어안더니 자기 몸을 공중으로 들어올려서 기둥과 45도의 각도를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공중에 자기 몸을 고정시킨 자세로 대략 1분 정도를 버티다[42]
가 내려왔죠. 빌리와 나도 시도해봤습니다. 우리는 공중으로 발을 박차고 올라갔지만 그 즉시 땅으로 떨어졌죠. 두 명 다 단 1초도 그 자세를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43]
큰 키에 팔길이까지도 무지막지하다.
윌트 체임벌린 시대의 농구 룰에 대한 자세한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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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무릎을 다쳐 운동 능력을 상실하지만 그 몸으로 카림 압둘 자바의 스카이 훅도 블록했다. 부상으로 운동 능력을 많이 잃은 상태에서도 저 정도... 그러나 이 장면은 잘보면 첫번째 슛은 스카이 훅슛보단 일반적인 훅 슛에 가깝고, 두번째는 골텐딩이다.
40대 중반의 나이에 배구 홍보차 LA를 방문했는데, 마침 LA 레이커스의 연습이 있었다고 한다. 어린 선수들이 뛰는 모습이 기특했던 건지 그 특유의 과시욕이 불타올랐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심심풀이로 나선 연습 경기에서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그 매직 존슨의 공을 블록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럴 수 있는' 부분이다. 문제는 그냥 넘어갔으면 될 일을 당돌한 매직 존슨이 "님 반칙해놓고 왜 모른 척? 뻔뻔하네염 'ㅅ'"라고 대선배 체임벌린에게 함부로 떠들었던 것. 순간 새파란 아들뻘에게 모욕을 당한 체임벌린의 얼굴은 금방 시뻘겋게 부풀어 올랐다. 곧 그는 손가락을 들어 매직을 겨냥하였다. 그리고 "지금부터 이 경기장에서 레이업은 없다." 라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그 말대로 상대팀 선수들[44] 의 모든 골밑공격만을 블락으로 막았다. 그 연습경기 내내 매직은 단 한 번의 골밑 득점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 매직 +4인과 대굇수 윌트 체임벌린의 난잡한 골밑 공성전(...)은 래리 브라운의 입에서 나온 목격담이다.
다만 이런 일화가 항상 그렇듯 과장이 섞여있다는 걸 감안해야 한다. 이때 코트에 있을게 분명한 카림 압둘자바는 윌트만큼 크고 11살이나 어리다. 카림의 데뷔 당시 전성기가 한참 지났던 윌트는 현역시절 매치업에서도 카림에게 밀렸는데[45] 은퇴한지 한참 지난 이때, 아무리 골밑만 막았다고 한들 '''현역인 카림'''에게 단 한 차례의 골밑공격도 허용하지 않았을까? 윌트는 은퇴 후 카림의 데뷔(물론 당시 이름은 이슬람 개종 전이라 루 앨신더) 시절에 대해 "내가 누군가를 막는데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다는 걸 처음 깨달았다"고 회고한 적 있다.
사실 체임벌린에 대한 일화들은 미국인들 특유의 과장법을 감안해서 들어야 한다. 상당수 미국인들, 특히 스포츠 선수들은 원래 대단한 일을 설명할 때 악의없이 과장해서 얘기하는 경우가 많고 이것 때문에 직접 보고 들은 얘기를 전할 때도 정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도미니크 윌킨스의 경우 래리 버드에게 4쿼터에만 20점을 얻어맞아 역전패한 경기를 두고 "그 중 하나는 왼손 3점슛이었다"고 하지 않나[46] , 로버트 오리는 전 동료인 팀 던컨보다 또 다른 동료인 하킴 올라주원이 '''20배'''는 더 잘한다고 하지 않나, 얼 매니고트 등 길거리 농구에 대한 믿기지 않는 일화 등 (체임벌린과 닥터 J가 발렸다던가)이 있다. Open Court같은 NBA 관련 토크쇼를 보다보면 이런 식으로 "단 한 개의 슛도 못 넣었다," "50점은 넣었다"고 하는 식의 일화가 많은데, 실제 기록을 찾아보면 다른 경우가 많다.
가장 비슷한 경우가 크리스 웨버의 드림팀과의 일화로, 그랜트 힐, 바비 헐리, 웨버 등이 속한 대학선발팀은 전날 드림팀과의 연습경기에서 놀랍게도 승리했다. (물론 이와 관련해 여러 논란이 있다. 조던이 거의 뛰지 않았다던지...자세한 것은 미국 농구 국가대표팀 항목 참고) 그리고 다음날 웨버는 칼을 갈고 나온 드림팀에게 쳐발렸다고 하면서, "우릴 완전 박살냈지. (They killed us). 단 한 점도 못 넣었어. 레이업이던, 자유투건..."이라고 했는데, 농구 특성상 풀경기를 뛰면서 체격과 운동능력이 대등한 팀을 무득점으로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 당시 기량은 드림팀이 압도적이었지만 웨버나 힐같은 선수들은 드림팀 선수들도 부담스러운 체격과 운동능력을 지닌 선수들이었고, 드림팀의 가장 큰 약점인 "작고 재빠른 단신선수에 대한 수비"를 잘 공략하는 헐리도 있었다. 단적인 예로 드림팀을 상대로 가장 적게 득점한 팀이 앙골라로 고작 48점 득점했는데(68점차로 패배) 앙골라는 키도 작지만 7, 80kg대의 갈비씨들이 빅맨을 볼 정도로 체격이 형편없었다. 그런데도 48점이나(?) 넣은 것.
즉, 농구에서 성인 프로급 이상 레벨에서는 아무리 미친듯이 수비를 해도 경기 내내 무득점은 결코 불가능하다. 래리 브라운의 증언도 이런 식의 과장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미국인들의 화법상 누군가 얘기를 할 때 관심이 없어도 리액션을 크게 하는 경우가 많고, 얘기를 할 때도 담담하게 하기보다는 과장되게 액션과 단어를 쓰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다소 과장법이 섞이는 경우가 많다.[47]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심한게 스포츠계이다.
포인트는 이런 식의 과장은 별볼일 없는 것을 대단한 것처럼 포장하는게 아닌 윌트나 버드, 드림팀처럼 '''실제로 대단한 것을 더욱 대단하게''' 포장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 브라운의 일화나 여성편력이 엄청난 윌트 본인이 떠들어댄 "여자 2만명과 동침"이라든지, 윌트가 무려 500파운드를 벤치프레스할 수 있다고 한다던지, 퓨마를 맨손으로 때려잡았다고 하던지...윌트는 실제로 여러모로 대단한 인물이었고, 그런 윌트의 대단함에 대해 떠드는 것을 윌트 본인도, 주변인들도 즐겼다. 그러다보니 그의 대단함에 대한 이런저런 과장된 일화들도 굉장히 많다. 문자 그대로 "전설적인" 인물.
보유하고 있는 대기록들과 신체능력 등으로 인해 아직도 농구팬들 사이에서 심심찮게 떡밥으로 등장한다. 그가 현재 리그에 등장한다면 명실공히 리그 최강의 센터가 되었을 거라는 편과, 당시 농구가 현대농구보다 상당히 낙후된 점을 들어 그 정도 대기록은 남기지 못했을 것이라는 편이 대립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그의 축복받은 신체운동능력 만큼은 NBA 역사상 가장 뛰어나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데뷔 시즌의 몇 없는 기록 영상들 중에는 리바운드를 잡자마자 무슨 퓨마처럼 달려서 레이업을 올리는 장면이 있는데, 림 위로 공이 올라올 무렵에 뒤에서 죽을 힘으로 따라오던 상대편 선수는 겨우 자유투 라인에 도달했다.(...) 물론 같은 편에서는 아무도 가담하지 않았다.
농구가 각종 구기종목 중 신체능력과 체격의 영향이 가장 큰 종목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언제 뛰었다고 해도 NBA를 지배하는 데는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만큼 인간, 조금 더 부풀려보자면 '''종의 한계를 초월하는''' 신체의 소유자였다. 현대 농구가 센터의 영향력이 줄어들고 있는 추세지만 만일 오늘날에 윌트 체임벌린이 나타났다면 스피드, 체력, 내구성이 전부 최상이면서 키, 팔 다리 길이, 운동능력, 기술 등이 전부 최상급이기 때문에, 리그 트렌드에 뒤처지지 않는 건 물론이요 오히려 리그를 선도하면서 지배하고 있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더불어서 다시 센터 전성시대가 열렸을 가능성도 높다. 현 리그 최고의 몸뚱아리라는 르브론 제임스보다 거의 전 부분에서 비교우위를 가진 피지컬이니... 스몰 라인업은 도태된 전술로 여겨졌을 것이다.
신체능력은 역사상 최고였고 힘도 무시무시했고 상대 선수를 블락으로 깔아뭉갠 일화도 무수히 많지만... 다행히 성격은 착했다고 한다. 이런 무시무시한 플레이어를 상대 선수들이 가만 안 놔뒀으리라는 건 안 봐도 당연한 일이고 실제로 폭력에 가까운 수비를 종종 했지만 경기 중에는 도를 넘어서는 정도만 아니면 보복하거나 같이 짜증낸 적이 없다고 한다. 이 양반 성격이 드마커스 커즌스나 바이넘 같았다면 NBA는 폭력사건 때문에 1960년대에 문 닫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7.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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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놀드 슈워제네거, 안드레 더 자이언트와 함께. 가운데 슈왈제네거가 꼬마로 보이지만 188cm의 장신이다.[48]
- 현재 인터넷에서 볼 수 있는 윌트의 경기 영상은 다 전성기가 지난 이후의 모습이라 그의 최전성기 피지컬이 어느정도 수준이었는지 우리는 눈으로 직접 볼 수 없다고 한다.
- 평생 독신이었지만 20,000명이 넘는 여인과 동침을 했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49] 사실 정확한 수치를 밝힌 적은 없지만, 본인의 자서전 꼭대기에서 바라본 경관에서 "이 때까지 나는 리바운드를 잡은 숫자만큼 여자와 잤다"라고 했는데, 통산 기록이 2만 개가 넘기 때문... 자서전 출간일 기준으로 하루에 1.4명의 여성과 자야 가능한 수치이다. 데니스 로드맨은 훗날 이를 두고 "내가 계산해봤는데(...) 2만명은 도저히 불가능함"이라 말하기도. 사실 이게 절대적 수치의 표현이라기보다는, 그냥 본인이 경기에서 리바운드를 밑도 끝도 없이 잡아대는 것처럼 동침을 밑도 끝도 없이 해댔다는 얘기에 더 가까워 보인다...고는 하지만 언론 인터뷰에서 절대적 수치이며 거짓은 없다고 본인이 언급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생일에 14명의 여성과 동침했었다고도 덧붙였다. 그러니까 매일 1~2명과 관계를 가진 것은 아니고, 특별한 날에는 수십명과 한번에 관계를 하거나 하루에 여러번 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불가능은 아니다. 실제 킨제이 보고서에는 19세기 유럽의 평생동안 5만 명이 넘는 여성과 섹스를 한 남자의 기록이 매우 상세하게 실려있으며[50] 11살에 즉위한 아라비아의 이반 사드 왕은 일생동안 궁녀나 시녀 등 2만여명과 섹스를 했다는 역사 기록이 있다. 정작 윌트 본인은 이에 대해 후일 "천명의 여자와 한 번씩 사랑을 나누는 것보다 한 명의 여자와 천 번 사랑을 나누는 것이 낫다."라고 하기도.[51]
- 과장이 섞일 수 있는 걸 감안하더리도 피지컬과 관련된 여러 괴물같은 일화나 증언들이 많다. 샤킬 오닐과 같은 234cm의 윙스팬으로 122kg의 벤치프레스를 수행할 수 있었으며, 90kg이 족히 넘는 동료 2명을 멱살을 잡고 락커에 밀어서 들어올린채 혼쭐을 내고 또 다른 선수를 위로 던져올렸다가 받는다던가, NBA팀원들을 보트에서 아기처럼 들어 내린다던가, 130kg에 육박하는 거구로 철봉도 아니고 기둥을 붙잡고 가로본능 자세로 1분 넘게 있다가 내려오고도 전혀 힘들어하지 않았다던가[52] , 전미 팔씨름대회 준우승자를 팔씨름으로 아이다루듯 이겼다던가[53] , 퓨마를 맨손으로 죽인 적이 있다던가, 무하마드 알리의 전성기에 TV쇼에서 전국민 앞에서 복싱경기를 제안하지만 알리가 표정이 굳으며 묵묵부답 했다는 등[54] ... 물론 위 일화들 중 상당수는 현재로썬 사실확인이 불가능하고, 미국인들 특유의 과장된 말하기 방식이나 너무 오래되어 와전되었을 가능성 등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
- 한 동료는 "윌트가 착한 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한다. 그는 마음만 먹으면 왼손 하나로 우리를 죽일 수 있다"라고 말한 바가 있다. 당대 NBA 선수들이 사이즈(특히 체중)에서 현대의 NBA 선수들보다 후달린다고는 하나, 엄연히 지구상 모든 스포츠 리그를 통틀어 NFL 다음가는 피지컬 괴물들이 모이는 곳이었음에도 윌트의 무력은 단연 독보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지금과 달리 느바 내 폭력사태나 벤치클리어링이 숱했던 만큼, 윌트가 포악한 성격이었다면 정말로 사람 하나 죽었을지도 모를 일... 물론 윌트는 자신이 이성을 잃고 날뛰면 진짜 큰일이 난다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아는 사람이었고, 덕분에 폭력적인 수비를 받으면서도 어지간하면 큰 반응없이 인내하는 모습을 보였으니 다행이기도 하다.
- 1992년부터 심장질환을 앓았는데, 1999년 LA의 저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 뉴욕 닉스전에서 100득점한 그 날, 집이 뉴욕인 윌트가 뉴욕 닉스팀 보고 같이 버스 좀 타자고 말했다. 버스에서 자다가 잠결에 앞의 선수가 이야기하는 것 들었는데, 자기 욕하는 중이었다고 한다... 어쩔까 하다가 그냥 자는 척하고 도착하고 나서 태워다줘서 고맙고, 100득점 넣어서 미안하다고 말하고 집에 갔다...[55]
8. 윌트는 왜 압도적인 개인 기록을 남기고도 우승을 거의 못했나?
위에 언급되듯이 윌트는 개인기량, 스탯에 관해선 당대에 대적할 선수가 없었고 현재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라이벌 빌 러셀이 이끄는 보스턴 셀틱스와 거의 매년 플레이오프에서 붙으면서 단 한번을 제외하곤 매번 패했다.
후대 사람들은 이 점에 대해 의아해하면서 "빌 러셀이 더 뛰어난 동료들과 뛰어서 그렇구나."하고 단정짓곤 하는데, 물론 전반적으로 러셀의 동료들이 윌트의 동료들에 비해 수준이 높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단순히 팀 동료들의 수준으로만 설명하는 것은 상황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이다. 마이클 조던이 등장하기 전까지 빌 러셀은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불렸고, 매직 존슨같은 선수들은 "조던은 최고의 선수지만, 빌 러셀은 최고의 승리자다."라고 하는 등 러셀은 단순히 동료복이 좋기만 한 선수는 아니었다. 또한 반대로 윌트의 동료들이 러셀보다 더 강한 적도 있었는데, 이때 윌트가 승리를 챙기지 못한 적도 있었다. 즉, 윌트의 압도적인 스탯에 가려진 점이 분명 있었던 것이다.
- 윌트는 물론 역대 최고의 선수 중 하나였고 개인기량으론 가장 압도적인 선수였지만, '스탯 부풀리기'의 의혹이 있다.
그는 개인스탯에 매우 신경을 쓰는 것으로 알려졌고, 본인의 우월한 스탯이 본인이 러셀보다 우월한 근거라고 몇번이나 강조한 적이 있다. 전설적인 감독 잭 램지에 따르면 그는 경기 도중에도 본인이 얼마나 스탯을 기록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기록원에게 "내 리바운드 기록이 잘못 나왔다."고 지적한 다음, 고치는 것을 직접 확인한 적도 있다고 한다.
윌트는 빌 러셀을 상대로 플레이오프에서 25.7점을 기록했다. 그가 정규시즌에 러셀을 상대하면서 평균 34.4점을 기록한 것에 비하면 거의 10점 가까이 떨어진 기록이다. 또한 평균 50점을 기록한 1962시즌의 경우 플옵 1라운드에서 37점, 2라운드에서는 보스턴을 상대로 33.6점을 기록했다. (통합 평균 35점)
그와 동시대 라이벌인 러셀과 비교해보면 윌트는 리바운드를 제외하곤 득점/어시스트/자유투성공률/필드골 성공률이 모두 플옵에서 정규시즌에 비해 하락했지만, 러셀은 필드골 성공률을 제외하고 득점/리바운드/어시스트/자유투 성공률이 모두 플옵에서 상승했다. 윌트와 더불어 역대 최고의 득점원으로 평가받는 마이클 조던의 경우에도 플옵 득점 기록이 정규시즌에 비해 3점이나 높지만 윌트는 8점 가까이 떨어진다.
물론 윌트는 커리어 후반기에 득점보다 수비/리바운드/어시스트에 더 집중하는 스타일로 바뀌었다. 그러나 그가 연속으로 득점왕을 차지하던 첫 7시즌만 놓고 보더라도 정규시즌에서는 39.6점, 플옵에서는 32.8점을 기록했다. 그는 플옵에서 최고의 득점원도 아니었다. 윌트가 포스트시즌 평균 득점 1위를 차지한 적은 단 한번, 1964시즌(34.7점) 뿐이며 그 외에는 엘진 베일러, 제리 웨스트 등이 1위를 차지했다. 반면 조던의 경우 포스트시즌 13번 중 1위를 차지한 게 10번에 달한다. 물론 1986, 87시즌은 고작 3경기만 뛰어서 표본의 신뢰도가 떨어지지만 그 외에는 최소 16경기를 뛰며 1위를 차지했으며, 특히 '''우승을 차지한 시즌 중에는 정규시즌/플옵 평균/총득점 1위를 놓친 적이 한번도 없다.''' 반면 윌트가 우승을 차지했을 때는 정규시즌/플옵 평균이 24.1/21.7이었고 당연히 총득점 1위와도 거리가 멀었다.
1962 플옵 당시 필라델피아와 보스턴이 붙은 1차전에 대한 기사를 보면 1, 2번에서 지적한 점들이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기사에는 러셀이 이끄는 보스턴의 팀 수비 덕에 필라델피아를 117대 89로 승리했다고 나왔다. 당시 윌트는 33점을 넣었지만 전반전에는 빌 러셀 때문에 12점에 그쳤는데 이때 보스턴은 점수차를 15점까지 벌리며 승부를 사실상 결정지었다고 한다. 승부가 사실상 갈린 후반에 21점을 넣은 것인데, 스탯상으로는 윌트의 승리지만 진정한 승자는 중요한 순간에 윌트를 묶으며 팀을 승리로 이끈 러셀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윌트가 후반에 추가한 득점은 승부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팀은 대패했으므로...
또한 최종 7차전에서는 정규시즌 평득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22점에 그쳤으며 필드골 7개를 시도하는데 그쳤다. 팀내 최다 득점자는 32점을 기록한 Tom Meschery였는데, 이처럼 중요한 경기에서 윌트가 쪼그라든 것은 한 두번이 아니었다.
- (우승하기 전까지) 윌트는 팀을 돕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이런 플레이는 심지어 그가 스타일을 바꾼 후인 레이커스 시절까지 이어졌는데, 이에 대해 당시 레이커스 감독인 Butch van Breda Kolff는 "러셀은 블럭 이후 플레이를 전개하는데, 윌트는 관중석으로 쳐내니까 공격권이 상대에게 돌아간다."고 불평한 바 있다. 그러자 윌트는 "보스턴 선수들은 러셀의 블럭슛을 잡아내도록 훈련을 받는단 말이오."라고 받아쳤다. 물론 전체적으로 러셀이 윌트보다 더 뛰어난 동료들과 뛴 것은 사실이지만, 1969 파이널 당시 늙고 병든 셀틱스와 붙으면서, 베일러-웨스트라는 명예의 전당급 동료들을 데리고도 7차전 홈에서 패한 건 윌트 본인이다.
또한 윌트는 1965년, 11승 33패로 무너져가던 샌프란시스코 워리어즈에서 필라델피아 식서스로 트래이드되었는데, 이때 식서스는 윌트 합류 이전 22승 23패, 윌트 합류 이후 18승 17패로 별 차이가 없었다.[57]
- 그는 중요한 시리즈에서 침묵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윌트의 반응은 리더로서 매우 실망스러웠는데, 그는 자신의 감독 알렉스 해넘이 "감을 잃었다."고 비난한 것. 해넘이 명감독으로 알려져 있고 그가 부임한 이후에 윌트가 첫 우승을 차지한 걸 생각하면 그가 패배의 책임을 지지 않고 감독탓만 한 것은 에이스의 자격이 없는 것이다. 또한 본인의 자서전에서 "동료들이 슛을 대부분 쏴서 3분의 1밖에 못 넣었는데, 나만 탓한다"고 불평했다. 이는 마지막 이유와도 관련이 있는데
- 윌트는 좋은 리더도 팀메이트도 아니었다.
우승하기 직전 감독이었던 돌프 셰이즈와의 에피소드도 유명한데, 선수시절 레전드 빅맨이었던 셰이즈는 현역시절 윌트와 자주 맞붙으며 충돌이 있어서 둘의 사이가 서로 안 좋았다. 이러한 악연은 셰이즈가 윌트의 감독으로 부임한 이후에도 이어졌는데 당시 윌트는 필라델피아 선수였지만 뉴욕에서 살면서 필라델피아로 출퇴근했다.[59] 거기다 윌트는 늦잠을 자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에, 그에 맞추기 위해 셰이즈는 팀 연습을 오후 4시로 잡았고, 이로 인해 오전에 연습하고 오후에 자유시간을 받길 원했던 다른 선수들은 불만이 폭발했다. 이에 당시 팀 구단주였던 어브 코슬로프는 그에게 필라델피아로 이사올 것을 요청했지만 윌트는 이를 거절했다.
1966년 보스턴과의 시리즈에서 윌트의 재멋대로인 성격은 더욱 두드러지는데, 당시 필리는 홈 1, 2차전을 모두 패배하고 3차전을 원정에서 겨우 잡았다. 4차전까지 지면 벼랑끝까지 몰리는 상황에서 셰이즈는 3차전 다음날 팀 연습을 잡았는데, 윌트는 "너무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거절했고 "그냥 와서 자유투 연습이라도 해라."는 셰이즈의 요청도 거부한다. 그리고 4차전에는 식서스는 패배하고 만다. 이어진 5차전 직전 연습에서도 챔벌린은 별 이유없이 잠적해버린다.[60]
이 외에도 그는 종종 동료들과 감독을 비난한 바 있다. 물론 버드같은 선수들도 1984년 결승에서 3차전 패배 이후 "나를 포함해 우리들이 기집애처럼 뛴다."고 비난한 바 있지만 이는 본인을 포함한 비난이었고, 이 발언 이후 셀틱스 선수들은 힘을 내 시리즈를 역전시켜버린다. 또한 셀틱스 선수들 사이에선 상호존중하는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에 이 발언 이후 "저 새x가 우리를 욕해?"가 아니라 "우리가 오죽하면 저 친구가 저러겠냐. (실제로 셀틱스 선수들의 경기력은 버드를 제외하고 형편없었다.) 좀 더 빡세게 하자"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윌트는 이런게 아니라 "얘들이 더 못하는데 왜 나만갖고 그러냐"식의 책임전가였다는 게 문제다.
종합해보면 어떤 기준으로 봐도 당시 윌트 챔벌린이 매우 뛰어난 선수였던 것은 확실하다. 또한 현재 그의 업적으로 봐도 역대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선수라고 봐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본인이 매치업을 압도해도 윌트가 팀을 승리로 이끄는 능력은 조던이나 러셀같은 선수들에 비해 현저히 떨어졌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스탯을 너무 의식했던 것도 문제인데, "팀만 이긴다면 스탯 따위 상관없다."는 마인드로 접근했던 러셀이나, "승리를 위해 뭔 짓거리든 한다."는 마인드의 조던과 달리 윌트는 "내가 이 정도 스탯을 쌓는데도 팀이 지는데 그게 내 탓이냐."고 한 적이 많았다. 은퇴 이후에도 윌트는 스탯 얘기를 굉장히 많이 했는데, 보통 탑텐이라고 분류되는 선수들 중 자기 스탯에 대해 그렇게 강조하는 선수는 윌트 뿐이다.
그는 자신과 조던의 비교에 대해 "조던이 50점을 넘긴 적이 몇 번 있었지만, 나는 평균 50점을 기록한 적도 있다."고 했는데, 정작 중요한 플레이오프에서는 조던이 윌트보다 월등히 높은 득점을 기록했다. 다른 걸 다 떠나 팀 스포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승리다. 윌트가 아무리 개인기량이 뛰어났다고 해도 커리어 내내 원맨팀에서만 뛰었던 것도 아닌데 동시대 라이벌인 러셀에 비해 우승 횟수가 11대 2로 밀린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애초에 윌트의 팀은 보스턴이 서서히 하락세를 그리던 1966년부터 4년 연속으로 러셀의 팀보다 더 좋은 정규시즌 성적을 거뒀고 멤버도 더 좋으면 좋았지 나쁘지 않았다. 특히 1969년에는 늙고 병든 보스턴보다 훨씬 더 강력한 멤버들과 함께 했다.[61] , 그런데도 러셀은 자기가 불리한 상황에서 네번 연속 윌트의 팀과 맞붙어 이 중 세번의 시리즈를 따냈다. 즉, '''윌트와 러셀의 차이는 팀빨만이 결코 아니었다.'''
[1] 맨발 신장이다. 착화 216cm인 샤킬 오닐 옆에서 점프볼을 던지는 장면이 있는데, 그 장면을 보면 오닐보다 약간 큰 것을 알 수 있다.[2]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시절 몸무게. 배구선수 시절은 더 말랐다.[3] 지역연고제를 하는 NBA 특성을 위해 지역연고팀이 해당 지역의 유망한 신인을 우선지명하는 우선지명제 비슷한 방식이다. 1949년에 NBA가 출범하면서부터 시작되었고, 1965년에 이 제도는 없어졌다. 이 제도를 통해 NBA에 데뷔해서 유명해진 선수로는 체임벌린 외에도 폴 아리진, 에드 매카우리, 톰 헤인슨, 가이 로저스, 오스카 로버트슨 등등이 있다.[4] 이 등번호는 필라델피아, 골든스테이트, 그리고 레이커스 3개 구단의 영구결번이다.[5] 본래 필라델피아 워리어스였다가 연고지를 샌프란시스코로 옮겼다. 현재의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의 전신. 체임벌린은 워리어스가 샌프란시스코로 이전한 후 고향인 필라델피아에 터를 잡은 세븐티식서스로 트레이드되었다.[6] 지금은 사라진 IVA라는 배구 리그에서 뛰었다.[7] 1968-69시즌부터 수상 시작[8] 1968-69시즌부터 수상 시작[9] 득점왕, 리바운드왕, 어시스트왕을 모두 석권해본 유일한 선수.[10] 이 시즌에 정규시즌 MVP도 함께 휩쓸었다. 리바운드왕과 득점왕은 덤.[11] 2위 PER 31.82, 1962-63시즌, 3위도 1961-62시즌에 31.74를 기록한 윌트 체임벌린. 마이클 조던은 단일시즌 4위(1987-88시즌, 31.71)를 기록중이며, 5위가 르브론 제임스(2008-09시즌, 31.67)다.[12] 참고로 이 시기에는 스틸, 블락, 턴오버, 3점슛 등이 집계되지 않았기 때문에 PER가 손해볼수 있다. 실제 수치는 이보다 더 높았을 것이다. 야니스 아데토쿤보가 19-20시즌 단일시즌 PER 기록 갱신에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윌트의 기록이 결코 폄하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13] 그 자존심 강한 샤크가 직접 '''"He is the father of dominant basketball"'''이라 평가했다. 1분 50초부터[14] 통산 득점 역대 7위 (31419점)[15] 통산 리바운드 역대 1위 (23924)[16] 레이업에서 유래[17] 이 때의 어시스트 기준은 받자마자 슛... [18] 정확하게는 자유투를 던지고 나서, 던진 공이 림에 맞기 전에 던진 선수가 자유투 라인 너머에 발을 대는 것을 금지한 것이다. 이렇게 하면 노골이 되더라도 재빨리 들어가 풋백을 집어넣는 등의 플레이가 가능하기 때문. 2011년 기준 현행 규정상 자유투를 레이업처럼 던지는 것은 원칙적으로 가능하다.[19] 자유투 슛폼은 찾아보면 알겠지만 굉장하다. 주로 부정적으로... 일단 라인 한참 뒤에 서있고 슛을 쏘는 타점 자체도 낮고 약간 정면에서 빗껴서 잡는 폼도 폼이지만, 쏘는게 아니라 그냥 휙 냅다 던지는 느낌이다. 이 때문에 스핀도 거의 안 먹고 포물선도 낮아 얼핏 봐도 안 들어갈 것 같은 슛. 하도 자유투가 안되니까 한때는 언더핸드 (릭 베리나 슬램덩크의 강백호 자유투폼)로 던졌던 때도 있었다.[20] 아직 현역인 르브론 제임스와 앤서니 데이비스가 각각 역대 2,3위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의 향후 행보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21] NBA의 정규경기는 4쿼터까지 48분이다. 체임벌린은 이 시즌 결장없이 80경기를 모두 출장하였고, 연장전 포함해서 시즌 내내 단 7분만 쉬었다고 한다. '''51경기 연속 풀타임 출전'''도 이때 세운 기록. 당연하게도 윌트를 제외한 거의 모든 선수들에게 농구에서 한 게임을 풀타임으로 뛰기는 굉장히 어려운 것을 넘어 혹사에 가까운 일이며, 당시 NBA 수준이 낮았다며 폄하하는 사람들도 평균 출장시간 48.5분만큼은 절대 까지 못한다.[22] 당연히 역대 최대. 2위는 코비 브라이언트의 81득점... 원래 윌트는 자유투 성공률이 낮은데 이 날은 자유투 32개를 던져서 28개를 성공시켰다.[23] 이것 역시 당연히 역대 최다.[24] 2위는 제임스 하든의 32경기[25] 2위는 마이클 조던의 31회[26] 참고[27] 30대 중후반쯤에는 수비형 센터로 변신했더니 어떤 아나운서가 "이제 득점력이 한 물 갔나봐요?" 라고 철없는 발언을 했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치뤄진 경기에서 45득점을 넘겼다(...).[28] 그래도 트리플-더블 횟수 역대 4위.[29] 블락의 경우 '''너무 대단해서''' 따로 집계했다는 기록원들이 몇 명 있었다. 그들의 기록에서는 정말로 10개는 기본적으로 넘어간다. 또한 당시 상대편에서 뛰었던 선수들은 마치 벽과 함께 플레이하는 기분이었다고... [30] 50여 년 동안 윌트만이 보유한 기록이었으나 2019년 4월 3일 러셀 웨스트브룩이 레이커스를 상대로 20득점, 20리바운드, 21어시스트를 기록하여 달성했다.[31] 3개 이상의 분야에서 20점 이상을 기록[32] 러셀은 윌트 상대 평균 14.5점, 23.7리바운드 기록[33] 빌 러셀의 과대평가 논란과 반박 항목에도 자세히 나와있지만 당시 보스턴이 마치 슈퍼스타들이 모인 팀인 것처럼 생각되는 것이나, 윌트에 비해 동료들이 훨씬 높았다고 여겨지는 것 둘 다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당시엔 팀 수가 적어 뛰어난 선수들이 지금보다 각 팀에 촘촘하게 분포가 됐었으며 윌트 역시 레전드 동료들이 여럿 있었다. 또한 러셀이 함께 뛰었다는 "8명의 명예의 전당 동료" 역시 한 번도 올스타에 못 뽑힌 평범한 선수가 셀틱스 왕조에 대한 예우로 헌액되는 등 실제 실력이 명전급이 아닌 선수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보스턴이 당대 최강의 강팀이긴 했지만 다른 팀들과 주전 한명한명이 차원을 달리하는 슈퍼팀까진 아니었다는 소리. 커리어 전반을 볼때 윌트가 러셀에 비해 밀리는 전력의 팀에서 뛰어온 기간이 많은건 사실이나, 정작 윌트가 전력에서 훨씬 앞서는 슈퍼팀을 꾸렸을때도 끝내 반지를 차지한건 러셀의 보스턴이었다. 윌트와 러셀의 차이가 팀원의 차이만 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34] 결정적으로 1969시즌 당시 윌트의 레이커스엔 제리 웨스트, 엘진 베일러라는 전설들이 포진한 최강라인업이었고 보스턴은 늙고 병든 라인업으로 포스트시즌에도 턱걸이로 진출한 팀이었다. 당시 셀틱스가 결승에서 선전해 7차전까지 몰고갔으나 7차전은 레이커스의 홈에서 치뤄지기까지해 셀틱스의 승리를 점치는 이는 거의 없었다. 오죽하면 레이커스 구단주가 우승시 풍선 떨어지는 것과 밴드연주, 수훈선수 인터뷰 순서까지 정해둘 정도(베일러, 웨스트, 체임벌린 순) 그러나 셀틱스는 극적으로 업셋 우승에 성공했고 레이커스 직원들은 천장에 세팅된 풍선을 하나하나 꺼내야했다(...). 사실 체임벌린은 포스트시즌에서는 최고의 득점원도 아니었다. 그가 플옵 득점 1위를 차지한 적은 단 한 번이었으며 엘진 베일러, 제리 웨스트에게 플옵 최고 득점원 자리를 항상 내줬다. 큰 경기만 되면 더 강한 모습을 보인 빌 러셀과 대비되던 모습. 실제로 전문가들은 체임벌린이 팀을 이끌기보다는 본인의 스탯에 신경쓴다는 평가를 내렸으며 그가 이와같은 성향을 버리고 나서부터야 우승에 성공했다.(첫 우승당시 그의 평균득점은 24점을 조금 넘었다. )[35] 당시 보스턴의 전략은 1980년대 마이클 조던을 마크했을 당시의 그것과 완전히 똑같았다. "윌트(조던)에게 득점은 주되, 우리는 우리의 기량차이로 나머지 상대를 압살하며 승리한다." 결과적으로 두 선수 모두 본연의 스타일 속에서는 끝끝내 그 시절의 레전드들이 포진했던 보스턴과의 맞대결에서 한 번도 시리즈를 따낼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것은 끝끝내 시카고 구단 자체적인 징크스로 남게 된다.[36] 물론 어딜 가도 월트가 들어간 팀은 챔피언 컨텐더로 낙점되었다.[37] 다만 러셀은 팀을 위해 자기희생을 하는 스타일이라 본인은 매치업에서 져도 팀을 이기게 하는 스타일인 반면 체임벌린은 개인활약에 훨씬 신경쓰는 선수였다.(스타일을 바꾸기 전 기준) 블록슛의 경우 숫자는 얼추 비슷했으나 체임벌린은 호쾌하게 블록을 해 관중석으로 날려버리거나 상대팀이 되찾는 경우가 많았는데 러셀을 최소한의 견제를 해 항상 블럭당한 공이 동료들 손에 가도록 신경을 썼다. 팀플레이에 대한 이해도 역시 러셀이 월등했다. 체임벌린이 러셀 스타일로 바꾸고 나서야 비로소 우승을 했다는 것을 생각해보자.[38] 사실 현지 랭킹을 찾아보면 알겠지만 윌트와 카림 압둘자바, 빌 러셀은 평가기관에 따라 순위가 엎치락뒤치락 한다. 러셀은 역대 최고의 수비수이자 궁극의 팀플레이어로서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는 '''역대 최다 우승'''기록의 소유자이고, 윌트는 팀적인 성과는 러셀에게 한없이 못미치지만 한경기 100득점이나 50리바운드, 시즌 평득 50점 등의 '''초월적인 개인기록'''을 자랑한다. 이 셋 중 필두로 꼽힐 때가 많은 카림은 균형잡힌 우승경력과 개인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누적 득점 1위'''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셋 모두 NBA 올타임 Top5에 주로 꼽히는 레전드들이면서도 커리어상 돋보이는 부분이 서로 워낙 다르기 때문에, 평가자들의 기준에 따라 순위가 업치락뒷치락 할 밖에 없는 것.[39]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의 유명 기자 잭 맥캘럼이 최근 랭킹을 내며 러셀을 8위라는 일반적인 평가에 비해 굉장히 낮은 순위에 올려놨는데(조던, 윌트, 카림은 물론이고 래리 버드, 매직 존슨, 르브론 제임스, 오스카 로버트슨보다도 낮다. 이 때 적은 평이 이를 잘 보여준다. "여러분들의(독자) 양해 바랍니다. 제가 선택하는 모든 역대 팀에는 빌 러셀을 센터로 뽑아왔습니다. 그 이유는 그 주변에 다른 불멸자들(조던, 버드, 로버트슨, 베일러, 매직)이 있으면 그는 득점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의 축복받은 수비력이 빛을 발할 테니까요. 그렇지만 우리는 선수 개인에 대해 논하는 거고, 저는 그의 11개 반지에도 불구하고 위에 언급한 두 센터만큼 좋은 선수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셀)가 강하게 반대할 걸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걸 존중하고요." 하나 추가하자면 굳이 "양해 바랍니다"란 코멘트를 단 것만 봐도 "러셀 8위"가 일반적인 인식과 괴리가 굉장히 크다는 걸 알 수 있다.[40] 왜 수비력이 단연 더 앞섰던 러셀이 2위냐면 1. 러셀은 963경기에 불과해 1,045경기를 뛴 윌트보다 80경기 이상 덜 뛰었고, 2. 윌트는 사기적인 높이와 운동능력으로 블럭능력에서만큼은 러셀과 최소 대등했기 때문이다. 물론 블럭능력이 동급이라고 수비력이 동급인 것은 아니다. 러셀은 블럭슛은 전략적으로 이용하는데 능했고 속공의 시발점으로 이용하는 선수였기 때문에...[41] 기사에서 "~개 블럭을 했다"라고 언급된 경우. 기록이 상충되는 경우 더 적은 기록을 선택했다고 한다. 예를 들어 한 기사에서 7개 블록, 다른 기사에서 9개 블록의 경우 7개 블록이라고 기록하는 식.[42] 이게 왜 대단하냐고 묻고 싶냐면, 직접 해봐라... 역도 선수라면,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윌트는 '''달리기와 점프에 특화된 농구 선수다!!!'''[43] 게다가 이 아저씨 키가 7ft 1.06in, 대략 216~7이다...ㄷㄷㄷ[44] LA의 모든 선수들이다. 당연히 압둘 자바도 포함되어 있고 어쩌면 루키 시절의 제임스 워디도... [45] 물론 가끔 노장의 투혼을 발휘해 그를 압도한 적도 있다.[46] 버드는 물론 왼손슛을 잘 쐈지만 이 경기에서 왼손 점프슛은 없었다.[47] 물론 모든 미국인이 얘기할때마다 슬랩스틱을 한다는 얘기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성향이 그런 경우가 있다는 것[48] 참고로 영화 코난을 찍을때 사진. 슈워제네거가 ESPN의 빌 시몬스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안드레와 윌트가 종종 아놀드를 아이처럼 번쩍 들어올리곤 했다고. 또한 셋이서 자주 어울렸는데 안드레가 워낙 대인배라 항상 저녁값을 지불했다고 한다. 반면 윌트는 천하의 짠돌이라 절대 안 냈다고(...) 그러던 어느 날, 아놀드가 "오늘은 내가 쏴야지"하고 맘을 먹고 안드레가 화장실에 간 사이 몰래 계산을 했다고 한다. 이 사실을 안 안드레가 화가 나 "너 나 열받게 했어!"라면서 아놀드를 들어 올리자 옆에서 윌트가 "그래! 나도 낼려고 했다고!"(...)하면서 거들었다고 한다. 여기에 대한 아놀드의 반응은 "웃기고 있네!(That's a good one!)"[49] 같은 파트너와 여러 번 한 적도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총 횟수는...[50] 이런 인간이 실제 존재했다면 윌트가 경험한 여체는 그의 절반도 한참 되지 않는 것이다.[51] 이후에 이 내용에 대해 누군가가 질문을 했고 실제로 그 정도는 아니지만 4천명은 넘는 건 확실하다고 답했다는데, 이제는 사실 확인이 불가능하다.[52] 같이있던 동료는 몇초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53] 그가 유일하게 팔씨름에서 진게 NFL의 짐브라운 이라고한다.[54] 이는 실제 영상이 있어 사실임이 확인되며 두 사람의 손 크기를 대는 모습도 나온다. 알리는 실제로 비슷한 신장과 리치의 NFL 선수인 '라일 알자도'와의 복싱시합에서 고전 끝에 판정승을 한 적이 있었다.(물론 알자도는 아마추어 복싱경력이 있는 등 초짜는 아니었고, 체급도 더 컸으며, 무엇보다도 알리는 37세로 많이 노쇠화가 된 상태였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는 있다.)[55] 다큐멘터리에서 인터뷰에서 나온 말이다.[56] 안 그래도 약체였던 닉스는 주전 센터겸 포워드였던 필 조던은 결장해 상대가 안되는 상황.[57] 아무리 본인의 기량이 훌륭해도 팀을 승리로 이끌지 못한다면 팀스포츠에서 박한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팀스포츠의 가장 큰 목적은 '''팀이 승리하는 것'''이기 때문. 역대 최고의 선수라 불리는 마이클 조던은 1995시즌에 야구하다 복귀해서 제 컨디션이 아니었음에도 34승 31패를 달리던 팀을 13승 4패로 이끌면서 확실한 임팩트를 남겼다. 또한 전성기와 비교도 안됐던 워싱턴 시절에도 19승에 그치던 팀이 조던의 합류로 37승으로 거의 두 배나 뛰었다.[58] 결국 몇년 더 고생하던 레이커스는 1968년에 윌트를 데려오고 만다.[59] 뉴욕과 필라델피아 사이 거리는 직선거리로 130km, 차도로 150km에 달하며 뉴욕시까지 가는데만 최소 두시간이 걸린다. 거기다가 뉴욕 내 교통상황까지 생각하면...[60] 대외적으론 감독이 "열외처리"한 것으로 되었지만 팀 동료들은 진실을 알고 불만을 가졌다고 한다. 처: 윌트 챔벌린 전기 Larger than life.[61] 참고로 1969년의 웨스트-베일러-체임벌린 라인이 얼마나 사기적이었냐면 체임벌린과 베일러는 바로 직전 시즌에 올 NBA 퍼스트팀 (NBA의 베스트 5라고 보면 된다.)에 뽑혔고, 웨스트는 세컨팀에 뽑혔다. 게다가 웨스트가 세컨팀이라고 무시못할 것이, 그는 1962년부터 1967년까지 6년 연속 퍼스트팀에 올랐다가 1968, 1969시즌 세컨팀, 1970시즌부터 다시 4년 연속으로 퍼스트팀에 오른 선수다. 즉, NBA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선수들 중 세명이자 당대 최고의 센터, 포워드, 가드가 뭉친 것. 심지어 체임벌린은 1968시즌 MVP였다. 현재로 따지면 2015시즌이 끝나고 나서 MVP 스테픈 커리와 르브론 제임스, 앤써니 데이비스가 한 팀으로 뭉친 셈이다. 게다가 웨스트와 베일러는 하필 윌트, 러셀과 전성기가 겹쳐 MVP가 하나도 없지만, 다른 시대였으면 MVP 쯤은 한두번 충분히 타고도 남을 선수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