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 만인소

 

1. 개요
2. 1차 영남만인소: 사도세자 복권 만인소
3. 2차 영남만인소: 서얼 차별 철폐 만인소
4. 3차 영남만인소 : 장헌세자 추존 만인소
5. 4차 영남만인소 : 서원 철폐 반대 만인소
6. 5차 영남만인소 : 흥선대원군 봉환 만인소
7. 6차 영남만인소 : 척사 만인소
7.1. 상세
7.2. 전문
8. 7차 영남만인소 : 갑신의제개혁 반대 만인소


1. 개요


조선 후기 1만명 내외의 유생, 즉 유학자들이 연명해 올린 대규모 집단상소를 가리킨다. '''만 사람의 뜻은 천하의 뜻'''이라는 모토 하에 벌어진 정치적 사건이다. 이들을 대표로 하여 올린 우두머리 즉 '''소수(疏首)'''라 하였으며 당대 대표 유학자들이 맡았다. 특히 중앙 정권의 권력에서 멀어진 영남남인들이 주도하여 영남 만인소로 불린다. 따라서 이것은 '''직접민주주의 정신 그 무엇이 아니라''' '''지배계층의 정치적 행동'''이었다.
영남만인소는 1881년 이만손이 주도한 만인소(6차)만 있는게 아니다. ''' 1만여명 내외가 서명하고 학계에서 인정받는 '''영남만인소는 총 7차례가 있었다.''' 이 중 '''두 건이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2. 1차 영남만인소: 사도세자 복권 만인소


  • 시기: 1792년
  • 내용: 영조에 희생당한 사도세자의 복권을 주청하며, 준론탕평과 소론남인 중용을 노리던 정조의 노력에 호응함
  • 소수: 이우

3. 2차 영남만인소: 서얼 차별 철폐 만인소



  • 시기: 1823년
  • 내용: 서얼 차별 철폐를 청원함. 영남 뿐만 아니라 삼남지방 유생들도 동원
  • 소수:

4. 3차 영남만인소 : 장헌세자 추존 만인소


  • 시기: 1853년
  • 내용: 신원된 사도세자를 추존하는 것을 주청함
  • 소수: 이휘병. 진성 이씨. 이황의 후손. 이만손의 아버지(부자 소수)
  • 비고: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기록유산


5. 4차 영남만인소 : 서원 철폐 반대 만인소



6. 5차 영남만인소 : 흥선대원군 봉환 만인소


  • 시기: 1875년
  • 내용: 실각한 흥선대원군의 봉환을 요청함. 영남 남인을 중용한 대원군은 그들의 동앗줄과도 같았다.
  • 소수:

7. 6차 영남만인소 : 척사 만인소


  • 시기: 1881년
  • 내용: 김홍집에 의해 조선책략이 정부의 계획으로 인해 일파만파 퍼지게 되면서 이만손을 비롯한 영남 출신 유학자 '위정척사파' 1만 명이 정부를 향해 올린 상소.
  • 소수: 이만손. 진성 이씨. 이황의 후손. 이휘병의 아들 - 부자 소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조선책략에서는 우리더러 중국, 미국, 일본과 손을 잡고 러시아를 견제하라고 언급하고 있지만 이는 터무니 없는 소리입니다. 중국은 우리와 친밀한 나라이나 일본은 임진왜란 이후 우리와 원수지간이며 미국은 우리가 잘 모르는 나라입니다. 또한, 러시아는 본디 우리가 경계해야 할 필요조차 없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런 내용의 책을 전국에 나누어 주며 읽으라고 명하시니 머리카락이 저절로 곤두서고 쓸개가 흔들리며 통곡하지 않을 수 없나이다...


7.1. 상세


요약하면,
  • 친중 반대 : 이미 충분히 친하다! 괜히 트집잡힐 구실을 만들 필요 없다!
  • 결일 반대 : 왜놈들은 원수다!
  • 연미 반대 : 모르는 놈들이다!
  • 방아 반대 : 경계할 필요없다!
  • 척사 : 싹 다 오랑캐니 공평하게 박대하자!
이들의 주장에는 물론 맞는 말도 있다. 당시 조선은 러시아와 어느 정도 친밀한 관계에 있었으며 명성황후가 러시아 세력을 끌여들어 일본을 견제하려 했다.
다만 이 상소를 올린 사람들이 위정 척사파라는 점을 감안하면, '''서양 열강은 일본 오랑캐와 똑같으니 미국과는 국교 맺으면 안 됨'''이라는 주장임을 알 수 있다. 최익현과 같이 산업 혁명의 문제점을 꿰뚫고 있었던[1] 사람도 있긴 했지만 대다수는 일방적으로 '안 돼'를 외치는, 꽉 막힌 사람들이었으니 이들의 주장은 받아들여질 리가 없었다. 결국 이 주장을 올린 대부분의 사람은 귀양을 가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국제 정세를 생각하면 이들의 주장에도 나름 합리성이 있었다.
전세계에 걸쳐 영국과 러시아는 그레이트 게임을 펼치며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고, 영국은 청나라를 이용해 러시아의 남하를 막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마침 청나라와 러시아는 국경 분쟁 중이었으므로, 영국의 공러 의식에 대해 더욱 더 민감하게 받아들일수 밖에 없었다.
이에따라, 청나라는 러시아의 남하에 필요 이상의 위협을 느끼고, 대러시아 방어 전략에 조선을 포함시키기로 결정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나온것이 조선책략이었다. 청의 의중은 쉽게말해, 한반도에 여러 외세(일본과 미국)를 끌어들여, 러시아의 남하에 대비하자는 것이었다. 2차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된 김홍집과 황준헌(黃遵憲;황쭌셴)은 만나게 되고, 조선 책략은 조선으로 흘러들어 조선 조정에 일대 파란을 일으키게 된다. 조선 책략의 내용은 친중국, 결일본, 연미국으로 요약할수 있었다.
이들의 주장을 찬찬히 들여다 보면, 합리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일단은 유달리 강조된 친중국에 대해 명확하게 청나라의 의중을 확신할수 없었고 의문을 품게 된다.[2] 연미국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이억만리 떨어진 미국이 조선을 도와준다는 것은 현실성이 없다는 지적이었다. 결일본은 모두다 알것이라 생각되므로 생략한다.
다시말해, 조선이 중국과 러시아 사이에 끼어 쓸데없이 러시아를 적국으로 돌릴필요가 없다는 지적이었다.
하지만 이걸 '합리적'이라고 평가하기에는 무리가 많다. 예나 지금이나 국제 관계와 외교는 자국의 이익을 최대한 뽑아내는 행위기 때문에 어디와 수교하든 위험성이 따르게 마련이다. 따라서 냉정한 정세 판단과 유연한 자세가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영남 만인소에 표현된 위정 척사파의 주장은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눈감고 모르쇠로 일관하자는 주장이다.'''
어쨌거나, 김홍집은 일본을 시찰하면서 일본과 서양과의 관계에 대해 알게 되었고 양이와 일본은 같지 않음을 확신하게 된다.
종전에 1879년 베이징에서 이홍장과 영의정 이유원의 회담에서 이홍장은 이유원에게 조선은 러시아와 일본의 위협을 받고 있으므로, 서양 열강과의 조약을 체결하여 이이제이[3]를 강구하여야 한다고 제의하였으나, 국력이 약한 조선으로서는 비현실적이라고 거절한 바 있었다. 그러나 수신사로 김홍집이 일본에 다녀온뒤, 일본의 사정[4]을 어느 정도 알게 된 후, 서양 열강들과의 수교로 그 방향을 돌린듯하다.
결과적으로 조선은 조선 책략을 받아들여 청나라의 주선으로 미국과 수교를 시작으로 서양 여러 나라들과 수교를 맺게 된다. 이 때문에 서양 열강들과 수교에 청나라가 상당 부분 관여를 하게 되지만, 러시아와의 수교는 조선과 러시아 단독으로 이루어지게 된다.[5]
결국은 조선 책략은 조선을 위한 외교 지침서라기 보다도, 청국의 대러시아 정책의 일부였던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 이후 위정척사 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부작용을 낳고 말았으며, 이는 당시 조선의 근대화를 막았던 골칫거리들 중 하나로 지목되고 있다.

7.2. 전문


영남 유생 이만손(李晩孫) 등 1만 명이 연명으로 상소하여 수신사(修信使) 김홍집(金弘集)의 죄를 논하고 이어 척사(斥邪)를 청하니, 임금께서 비답을 내리셨다

“신들은 모두 영남의 멀리 떨어져 있는 자들으로 유신(維新)의 정치를 도운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곧 수신사 김홍집이 가지고 온 황준헌(黃遵憲)의 『사의조선책략(私擬朝鮮策略)』 1책이 유포된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가슴이 떨리며 이어 통곡하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단(異端)으로 사람들을 미혹시키는 자에 대한 형벌이 국법에 드러나 있고, 그 무리에 가담한 자를 먼저 다스려야 한다는 가르침이 『춘추(春秋)』에 실려 있습니다. 이를 따르면 바로 잡히고 이와 반대로 하면 혼란해진다는 사실은 영원히 똑같아 혹시라도 어긋남이 없습니다.

……(중략)……

이른바 『사의조선책략』에 대해 조목별로 분별해 보겠습니다. (『사의조선책략』에) 따르면, “오늘날 조선의 급선무는 러시아를 막는 것[防俄]보다 먼저 할 것이 없고, 러시아를 막는 계책은 중국과 화친하고 일본과 결탁하고 미국과 연합하는 것[親中國 結日本 聯美國]보다 먼저 할 것이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무릇 중국은 우리가 번국(藩國)이라 칭하는 나라입니다. 신의가 서로 두터운 지가 거의 200년이나 되었는데, 하루아침에 ‘황제(皇帝)’요, ‘짐(朕)’이요 하는 두 존칭을 사양하지도 않고 태연히 수용하고 그런 말을 한 사람을 용납하고 그런 사람의 글을 받아들였다가 만일 중국이 이를 가지고 따지고 시끄럽게 떠든다면 무슨 말로 해명하겠습니까.

일본은 우리에게 얽매여 있는 나라입니다. 국경 요충지가 험준하고 평탄한 지형을 저들이 이미 익히 알고 있고, 수로와 육로의 요충지를 저들이 이미 알고 있으니, 만에 하나라도 우리나라가 대비가 없는 것을 엿보고 함부로 쳐들어온다면 장차 어떻게 막아 내겠습니까.

미국은 우리가 원래 잘 모르던 나라입니다. 쓸데없이 다른 사람의 종용을 받아 우리 스스로 (미국을) 끌어들여 풍랑과 바다의 온갖 험난함을 무릅쓰고 건너와서 우리 신하들을 피폐하게 하고 우리 재물을 자꾸 없앨 것입니다. 만에 하나 우리의 허점을 엿보고 우리의 약함을 업신여겨 응하기 어려운 청을 강요하거나 계속 댈 수 없는 비용을 떠맡긴다면 장차 어떻게 응대하겠습니까.

러시아는 본래 우리와 아무런 감정도 없습니다. 공연히 남이 이간질하는 말을 믿었다가 우리의 체통이 손상되는 바가 클 것입니다. 먼 나라와의 외교에 기대어 가까운 나라와 배척하는 전도된 조처를 했다가 헛소문이 먼저 퍼져 이것을 빙자하여 틈을 만들어 전쟁의 단서를 찾는다면 장차 어떻게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또 하물며 러시아와 미국과 일본은 모두 같은 오랑캐들이니 그 사이에 누가 더하고 덜하다는 차이를 두기 어렵습니다. 두만강 일대는 국경이 서로 접하여 만에 하나 저들이 일본이 과거에 했던 전례를 따르고, 새로 맺는 미국과의 조약을 끌어다 대어 땅을 요구하면서 와서 살고 물화를 교역하기를 청한다면 장차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하물며 세상에는 일본이나 미국과 같은 나라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만에 하나라도 각 나라들이 이 일을 본받아 인상을 쓰며 일본이 한 것처럼 땅을 요구하고 화친을 청한다면 장차 어떻게 막을 수가 있겠습니까. 허락지 않는다면 지난날의 성과는 다 쓸모 없게 되어 원수가 되고 온갖 원한이 쌓여 적이 되고 말 것은 단지 러시아 한 나라에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허락한다면 세계의 한 모퉁이인 우리 나라에 장차 받아들일 땅이 없게 될 것입니다.

황준헌의 말처럼 만약 러시아가 능히 병탄할 수 있는 힘이 있고 침략할 뜻이 있다면 장차 만 리 밖의 구원을 앉아서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장차 홀로 도성의 군대를 일으켜 대적해야겠습니까. 이는 그 이해관계가 분명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조정에서는 얼마나 괴롭길래 이런 백해무익한 일을 해서 러시아가 생각하지도 않았던 마음을 열게 하고, 미국과는 아무 일도 없던 것을 생겨나게 하여 병란을 초래하고 오랑캐를 부른단 말입니까.

그는 또 말하기를, ‘서학에 종사하면 재물 모으기에 힘을 다하고 농사를 장려하는 데 힘을 다하고 상공업의 발전에 힘을 다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재물과 농공(農工)은 원래 선왕의 훌륭한 법과 아름다운 법규가 있습니다. 요(堯) 임금과 순(舜) 임금 때에는 집집마다 어진 사람이 살았고, 주(周) 나라에서는 집에는 양식을 쌓아 두고 길 떠나는 자들은 전대를 걸머지고 다녔던 것이 어찌 일찍이 서학에 종사하였기 때문이겠습니까.

더욱 분통한 것은 저 황준헌이라는 자는 중국 태생이라 말하면서 일본의 연사(演士)로 행세하고 예수를 선한 신이라 하였으니 사문난적(斯文亂賊)의 효시가 되었습니다. 아마도 지난번 사악한 패거리와 비적들이 강화도에서의 패배에 분개하여 병력으로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요행수로 차츰차츰 먹어 들어가려는 욕심을 부려 점차로 우리를 물들이려는 간계가 아니겠습니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감언이설로 꾀어 내는 것이 극도에 이르렀고 위협하는 말로 두렵게 하는 것이 심한 것입니다. 또 어찌 ‘전교(傳敎)가 무해하다’라는 말을 끝머리에 붙였겠습니까. 그 의도는 사교를 우리나라에 퍼뜨리려는 것에 불과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깊이 생각하시고 판단해서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모두 쫓아 버리고 그 책은 물이나 불 속에 집어 던져 좋아하고 싫어함을 분명히 보이고, 중외(中外)에 포고하시어 온 나라 백성으로 하여금 전하의 뜻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게 하고, 주공과 공자, 정자와 주자의 가르침을 더욱 밝혀 사람들이 모두 위와 친하여 어른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바치는 백성이 의리로 성(城)을 이루어 비류와 사당이 간악한 짓을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면 우리나라의 예의를 지키는 풍속을 장차 천하 만대에 자랑하게 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황제께서 비답(批答)하기를, “간사한 것을 물리치고 바른 것을 지키는 일[闢邪衛正]에 어찌 너희들의 말을 기다리겠는가. 다른 나라 사람의 『사의조선책략』은 애당초 깊이 파고들 것도 없지만, 너희들도 또 잘못 보고 지적함이 있도다. 만약 이를 빙자하여 또다시 번거롭게 상소하면 이는 조정을 비방하는 것이니, 어찌 선비로 대우하여 엄하게 처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너희들은 이 점을 잘 알고 물러가도록 하라”

『일성록』, 고종 18년 2월 16일 출처


8. 7차 영남만인소 : 갑신의제개혁 반대 만인소


  • 시기: 1884년
  • 내용: 갑신정변으로 개화파 일당이 의제개혁으로 서구식 관복과 일상복을 강제하자, 유교적 사회질서 및 국내 면직사업의 몰락을 염려하며 상소함. 위정척사의 예시.
  • 소수: 이재교. 여주 이씨. 이언적의 후손.


[1] "서양인이 원하는 바는 우리와 무역을 하는 것이다. 서양은 그 공산품의 양이 무한하나, 우리는 농산물이기에 그 양이 한정되어 있으므로 무역이 이루어지면 우리는 멸망하게 될 것이다." 산업으로 식민지의 경제를 짓밟은 사례가 여럿 있었던 만큼 최익현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긴 했지만, 그게 무섭다고 뒤늦게라도 개화를 하지 않으면 더 답이 없었다는 것을 간과했다.[2] 청나라는 전통적인 책봉 - 조공국 관계를 근대적인 종주국 -속국으로 개편하려는 시도나 위안스카이와 같이 근대적 식민지로의 변화를 꾀했다.[3] 일종의 세력 균형[4] 생각보다 위협이 되지 않고 세력 균형을 통해 이들 관계가 이루어진다는 것[5] 청나라는 조러 수교를 반대하지만 외교 고문 뮐렌도르프의 주선으로 조러 수교가 이루어지게 된다. 물론 당시 독,러 관계를 의식한면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