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산서원
玉山書院
1. 개요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에 있는 서원이다. 문묘 종사와 종묘 배향을 동시에 이루고 영남학파의 정신적 지주로 추대된 이언적을 주향하는 서원으로서 도산서원과 함께 영남 남인의 정신적 본산이며, 조선시대 서원 건축의 대표 양식을 보여준다.
1967년 사적 제154호로 지정되었다.
병산서원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중복으로 등재되어 있는데 2010년 7월 31일 양동마을의 일부로 먼저 등재되었다. 경주 양동마을은 같은 경주시 안에 있어도 옥산서원과 직선거리 8km 정도로 떨어져 있지만, 세계유산으로서는 옥산서원, 독락당, 동강서원을 포함해 '하회와 양동'의 일부로 등록되었다. 이 서원의 주인공인 이언적의 집과 그의 가문인 여강 이씨의 본진이 양동마을이었던 등 거리가 멀지만 관련성이 많기 때문이다. 2019년 7월 6일에는 한국의 서원 중 하나로도 등재되어 세계유산 2관왕이 되었다.
2. 역사적 흐름
이언적은 조선시대 최초로 체계적인 성리학 저술을 다수 남긴 주리론의 선구자였다. 을사사화로 희생된 후 유배지에서 생을 마친 뒤 약 14년이 지나서 선조 조에 처음 신원되고 그 유문을 수집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이후 차례로 1568년(선조 1) 영의정 추증, 1569년(선조 2) 종묘 배향이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그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1572년(선조 5년) 경주부윤 이제민 및 회재의 제자 군수 권덕린 등 관료 및 유림(선비들의 집단)이 처음으로 서원을 세웠으며, 1574년(선조 7) 선조로부터 '옥산'이라는 이름으로 사액을 받았다.
1610년(광해군 2) 문묘 종사에 따라 위상이 더욱 높아졌다. 이에 경주시지역 향촌사회를 실질적으로 대표하면서 지역 유림들의 교육 및 정치사회적 활동의 중심지로 역할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언적이 이황과 함께 영남 남인의 정신적 지주로 추앙됨에 따라 안동의 도산서원과 더불어 영남의 수원(首院)으로 자리매김 하였다.
갑술환국 이후 노론이 정권을 잡게됨에 따라 침체를 겪었으나 그런 가운데 18세기 말에 이언적의 학문이 영조 및 정조에 의해 주목 받으면서 그를 제향하는 옥산서원 역시 다시금 중앙정부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특히 정조의 관심은 지대하여, 1781년(정조 5) 옥산서원으로 중앙관료를 보내 노론의 대표 서원인, 송시열을 주향하는 화양서원(華陽書院)의 사례에 준하여 치제하도록 명했다. 이후 1792년(정조 16)에도 치제를 명했으며, 1794년(정조 18)에는 옥산서원에서 빌려온 이언적의 <속대학혹문(續大學或問)>을 읽고 돌려보내면서, <회재선생 ‘속대학혹문’의 서문에 제하여(題先正晦齋續大學或問卷首)>라는 글을 직접 지어 옥산서원에 보내 이를 소장하게 하였다.
문묘 종사 대현을 주향하는 영남의 대표서원이자, 세도정치에 대항할 정치적 동반자로서의 영남 남인의 구심점이라는 성격탓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은 47개소 중 한 곳이다.
3. 구조
3.1. 역락문(亦樂門)
옥산서원에 들어가기 위한 출입문. 논어의 첫 부분 구절인 '벗이 먼 곳으로부터 오는 것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有朋而自遠方來 不亦樂乎)'에서 따 지었다. 이는 도산서원의 역락서재와 같다.
3.2. 무변루(無邊樓)
역락문을 들어서면 나오는 누각이며 올라가는 계단이 통나무를 깎아 만든 특이한 형태다. 공부하던 유생들의 휴식 공간이었다.
끝이 없는 누각이라는 의미인데 본래 이름은 납청루였으나 노수신이 '스승이 남긴 뜻에 맞지 않다'고 하여 주돈이의 '풍월무변(風月無邊)'을 따서 무변루로 고쳤다.
이곳의 현판은 한석봉의 글씨다.
3.3. 구인당(求仁堂)
옥산서원에서 강의와 토론이 열렸던 강당. 서원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이다. 마루 양쪽의 양진재와 해립재는 교사들이 지내는 곳으로 현대 학교의 교무실에 해당한다. 강당 앞마당 좌우에는 공부하는 유생들이 기거하는 동재와 서재가 마주보고 있는데 동재 쪽에 더 나이가 많은 유생들이 지냈다고 한다.
구인당 정면에 걸려 있는 옥산서원 현판 글씨는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로 유배되기 직전 54세에 쓴 글씨다.
3.4. 체인묘(體仁廟)
이언적의 사당이다. 사당은 신성한 공간이므로 추가로 담장을 둘렀다. 보통 서원에서 제향을 하는 사당에는 사(祀)자를 쓰는데 여기는 이언적을 높게 쳐서, 왕이나 왕에 버금가는 정도로 좀 더 격이 높은 경우에 사용하는 글자인 묘(廟)를 쓰고 있다.
3.5. 민구재(敏求齋), 암수재(闇修齋)
동·서재 기숙사이다.
3.6. 장판각(藏板閣)
3.7. 전사청(典祀廳)
체인묘 옆에 있는 제사에 사용하는 제기와 제구를 보관하는 건물.
3.8. 신도비(神道碑)
체인묘 사당 왼쪽에 있는 이언적의 신도비 비석이다. 원래 서원 앞 계곡에 세웠는데 물이 불어나 훼손될 수 있다는 우려로 서원 안으로 옮겼다.
4. 관람
입장료는 없다.
관광도시로 유명한 경주시에 있지만 대부분의 경주 주요 관광지가 모여있는 동 지역에서는 거리가 꽤 있는 북부 안강읍에서도 서쪽 외곽지역에 있다. 옥산권으로 묶어서 바로 인근에 있는 이언적이 지은 사랑채인 독락당(보물 413호)[1] , 통일신라시대의 특이한 석탑 정혜사지 십삼층석탑(국보 40호)과 하나의 코스로 같이 관람하도록 안내되고 있다. 세 장소는 서로 도보이동이 가능할 만큼 가까이 있다. 가장 능역이 잘 보존된 신라왕릉인 흥덕왕릉도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는 유적지지만 거기는 대중교통 접근은 거의 힘들고 자가용이 있다면 같이 방문할 만하다.
대중교통은 경주 버스 203이 있다. 자주 다니는 버스가 아니므로 시간표를 참고해야 한다. 203번은 양동마을을 먼저 거치고 옥산서원으로 향하므로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면 양동마을과 같이 일정에 넣는 게 낫다.
[1] 건물 옆쪽 담장에 좁은 나무로 살을 대어 대청마루에서 살창을 통해 앞 계곡의 흐르는 냇물을 바라볼 수 있는 특이한 구조의 조선시대 건축물이다. 옥산서원과 함께 양동마을의 일부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