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락교회

 


<color=#ffffff>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영락교회
永樂敎會 | Youngnak Presbyterian Church'''
<colbgcolor=#005bac><colcolor=#ffffff> '''설립일'''
1945년 12월 2일[1]
'''소속국가'''
[image] '''대한민국'''
'''소속교단'''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소속노회'''
'''서울노회'''
'''초대목사'''
한경직
'''원로목사'''
이철신 (2018 ~ '''現''')
'''위임목사'''
김운성 (2018 ~ '''現''')
'''표어'''
'''눈을 들어 밭을 보라'''
'''위치'''
서울특별시 중구 수표로 33 (저동1가)

'''링크'''
/
1. 개요
2. 역사
2.1. 역대 담임목사
3. 참고문헌
4. 건물
4.1. 본당
4.1.1. 벧엘관
4.1.2. 엘림관
4.2. 50주년 기념관
4.2.1. 베다니홀
4.3. 교육관
4.4. 봉사관
4.5. 선교관
4.6. 한경직 목사 기념관
5. 2020년 코로나 바이러스 관련
6. 비판

[clearfix]

1. 개요


서울특별시중구에 자리한 장로회 소속 교회.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교단을 대표하는 대형교회 중 하나다.

2. 역사


1945년 12월 2일 공산주의의 박해를 피해 월남한 27명의 성도들이 한경직 목사를 중심으로 모여 창립예배를 드린 것이 시초이며, 당시 교회이름은 '''베다니 전도교회'''라 정하고 일본 천리교 경성분소의 신전을 개조하여 예배장소로 사용했다.
창립 직후에 주일학교 유년부와 성가대, 청년부, 부인전도회 (지금의 여전도회)가 조직되었고, 1946년 지금의 명칭인 '''영락교회'''로 개명하였다.
개명 직후 인천광역시의 첫 장로교회인 인천제일교회를 개척시키고, 교회의 급성장으로 당시에는 보기 드문, 주일예배를 2부에 나누어 드리는 제도를 실시했다.
2년 간 천막을 치고 교회당으로 급개조해 사용하던 중, 1947년 폭우로 교회가 물에 잠기자 지금의 성전 건축을 시작했다.
1950년에 완공은 되었지만, 6.25 전쟁이 발발하여 예배가 사실상 정상적으로 드려지지 못하고 휴전 직후인 1954년 헌당예배를 드렸다.
1950년 6.25 전쟁의 발발로 예배당을 인민군이 점령하려 하자 끝까지 교회를 지키던 김응락 장로와 김창화 집사가 순교하는 사건이 있었고,
1951년 1.4 후퇴로 피난지에서 서울 예배당으로 올라가기 힘들어진 성도들이 각자 피난지의 성도들끼리 예배를 이어갔는데,
그것이 지금의 부산영락교회 (부산광역시 서구 부민동 대청로 8), 대구영락교회 (대구광역시 동구 장등로 36-10 (신천동)), 제주영락교회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일도2동 동광로23길 15)로 이어진다.
1955년에는 첫 해외선교사로 최찬영 선교사를 태국으로 파송하고, 1957년에는 영락중학교, 영락고등학교, 영락유치원, 영락여자신학교 (2012년 폐교)를 개교한다.
1969년 꾸준히 교회가 성장하자 성도들의 체계적인 양육을 위해 교구제를 실시해 3개 교구를 두었고, 2020년 현재 18개 교구로 증가되었다.
북한 서북지방의 피난민교인들이 몰려들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이 교회는 서울 최대의 교회가 되었고 1950년 6월에 교인 3,0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예배당을 건축하는 한편, 교회당 주위의 빈터에 천막을 쳐 집이 없는 피난민들에게 거처를 마련해 주기도 했다.
영락교회는 신탁통치반대운동, 반공운동에 적극 참여한 전력이 있고 [2], 피난민구제와 전도사업, 개척교회 설립, 농아전도, 해외선교사파송, 교육사업 및 사회복지사업에도 힘써 왔다.
여담으로, 시라소니라는 별칭으로 유명한 이성순이 주먹세계 은퇴 이후 출석했던 교회이기도 하다[3].
일제 때 폐교된 숭실전문학교 [지금의] 가 1954년 숭실대학이란 이름으로 남한에서 다시 개교했을 때, 영락교회 내의 가건물들을 학교로 이용한 적이 있었다. 이 때 한경직 목사가 숭실대 1대 총장을 맡았다. 숭실대는 1957년 현 위치인 상도동으로 이전하였다.

2.1. 역대 담임목사


<rowcolor=#ffffff> '''No.'''
'''성명'''
'''재임기간'''
'''비고'''
1
한경직
1945년 - 1972년
원로목사(1973 - 2000) 재임, 2000년 소천
(동사목사)[4]
강신명
1947년 - 1955년
숭실대학교 총장,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총회장, 1985년 소천
2
박조준
1973년 - 1984년
現 갈보리교회 원로목사
3
김윤국
1985년 - 1987년
미국 한인교회 전국총회장, 2016년 소천
4
임영수
1988년 - 1997년
現 모새골 공동체 이사장
5
이철신
1997년 - 2018년
영락교회 원로목사
6
김운성
2018년 -


3. 참고문헌


『영락교회50년사』(영락교회, 1998)
『영락교회부흥사』(최종고, 한국문학사, 1974)
영락교회 요람 (영락교회, 2017)
영락교회 홈페이지 (http://www.youngnak.net/)

4. 건물



4.1. 본당


[image]
1945년 12월 첫 주일 한경직 목사를 중심하여 27명의 북한 피난민이 베다니전도교회로 시작, 베들레헴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장소가 급증하는 교우들을 수용할 수 없어 1947년 6월 1일 대형 천막을 설치하여 천막 교회에서 주일예배를 드리며 교회 신축을 준비, 1949년 3월 24일 본당 신축기공을 하고 지금의 본당에서 1950년 6월 4일 첫 예배를 드렸다. 1978년 5월 십자형으로 증축하여 약 2,500여 명의 수용이 가능하며 2001년 10월 개·보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총 970평의 석조건물 본당에는 예배실 외에 시무장로실, 기도실, 방송실, 녹음실, 헌금계수실, 기계실, 인쇄실이 있다.
현대적인 고층빌딩에 둘러싸인 중세 유럽의 성(castle)같아서 안개가 자욱한 날에는 상당히 신비하고 묘한 분위기가 연출된다.
그래서 가끔 화보촬영이나 출사를 나온 작가들을 종종 볼 수 있고 지나가던 중국인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어가기도 한다.

4.1.1. 벧엘관


[image]
본당 지하에 자리한 기도실은 500석 규모로 지어졌으며, 국가와 민족을 위한 기도, 통일한국을 위한 기도, 교회를 위한 기도, 개인문제의 기도등을 주로 하며 개인 기도실과 집단 기도실로 설계되있다. 중보 기도실로 기도 제목을 적어 내면 접수가 된다.

4.1.2. 엘림관


엘림관은 본당으로 올라오는 계단옆 본당 마당 지하에 위치한 공간으로 베다니광장과도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다. 2005년 6월에 준공하여 연면적은 105평이다. 1층에는 안수집사실, 2층에는 서무부, 예산위원회, 시설관리부, 감사위원회 등이 사용한다.

4.2. 50주년 기념관


[image]
교회 창립 50주년을 기념하는 역사성을 담은 50주년 기념관이 착공한지 4년만인 1997년 11월 2일 입당했다. 지하 5층 지상 8층의 규모로 대지 2,300평에 건평은 10,225평이며(선교관, 목양관 포함), 활용공간은 1만여명이 수용 가능하다. 특히 지하 1,2,3층에 걸친 베다니홀은 1,500석 규모로 최신음향 시설과 조명이 설치되어 각종 공연 및 연주회, 젊은이예배, 주일예배 부속실 등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지하 2층에 위치한 드림홀은 700석 규모로 고등부, 대학부의 예배공간 및 각종 행사의 진행이 가능한 복합공간으로 사용된다. 2층은 유치부, 3층은 유년부, 4층은 중등부의 교육공간으로 사용되며,  5~8층에는 당회실, 교육부 산하 각급 교회학교 사무실 북한선교센터 등이 있다. 50주년 기념관 장소사용은 총무팀과 교육부에, 시설장비 사용에 관한 문의는 본 교회 시설관리팀에서 상담한다. 주일에는 1층에서 남·녀선교회비, 은퇴제직상조회비 접수 및 사회복지기관, 영락여자신학원 등 여러가지 후원회비를 접수하고 있다.

4.2.1. 베다니홀


[image]
베다니홀은 50주년기념관 지하 1,2,3층에 걸쳐있으며, 1,500석 규모이다, 각종 공연 및 연주회, 젊은이예배, 주일예배 부속실 등으로 사용한다.

4.3. 교육관


[image]
교육용 4층 석조 건물로 1957년 완공되었고 지난 2000년과 2001년에 내부 보수공사를 하였다. 현재 원로·은퇴장로실, 은퇴제직상조회 사무실, 1층은 사랑부·영락주간보호센터, 2·3층은 음악부 찬양대 연습실, 4층은 소년부 예배실로 사용한다.

4.4. 봉사관


[image]
정문에 들어서서 오른쪽 5층 건물이 봉사관이다. 본당으로 처음 사용하던 베들레헴 성전이 서 있던 곳이며 1973년 봉사관을 이곳에 세웠다. 현재 담임목사실을 비롯한 교역자실, 행정처, 한경직목사기념사업회, 목양부, 상담부, 선교부, 홍보출판부, 영락공원묘원, IT미디어부 등 사무실이 집중되어 있다. 4,5층은 성경공부반, 남선교회 모임, 외국이주자예배 등의 장소로 사용한다. 1층에는 교회 행정사무 및 교우들의 민원업무를 처리하는 행정처 사무실이 자리잡고 있으며, 건물 현관 입구에는 새가족부 등록처, 의료봉사실, 교회안내데스크가 설치되어 있다. 지하에는 예배실, 경조부, 은퇴안수집사실, 기계실이 있다.

4.5. 선교관


[image]
선교관은 예식을 위한 독립 건물로 400석, 장의자가 설치되어 있다. 외관과 내부가 꽤 아름다워서 신도들의 결혼식장으로 많이 쓰이고 있다.

4.6. 한경직 목사 기념관


[image]
1975년 교회창립 30주년을 맞아 지하1층, 지상 4층 규모의 한경직목사기념관으로 세워진 건물로서 2011년에 5층으로 증축하였다. 지하는 교직원 식당 겸 강의실, 1층은 한경직목사기념사업회와 영락교회유지재단, 2층은 한경직목사 전시실, 3층과 4층은 도서관, 5층은 교회역사자료실과 영락공원묘원 사무실, 서울성서신학원이 위치해 있다.

5. 2020년 코로나 바이러스 관련


영락교회는 홈페이지에 올려놓은 김운성 목사와 당회원 일동 명의의 ‘목회서신’을 통해 “주일 낮 예배는 1~5부 예배를 온라인과 본당예배를 같이 드린다”며 “코로나19와 관련해 임시 당회(25일)에서 이같이 결정했다”고 밝혔다.[5] 영락교회 측은 목회서신을 통해 예배는 유지되어야 하고 한번 중단된 예배는 쉽게 재개되기 힘들고 예배 중단이 길어지면 교회 공동체가 와해될 것을 우려했다.
2월 29일에 온라인 생중계 예배로 대체하기로 발표하였다.[6]
수도권 코로나 재확산이 진행중인 6월 25~27일 사이에 1200명이 모이는 대규모 집회인 '6.25 구국기도대성회'를 개최했다.
현재도 정부의 지침에 따라 각 부와 예배마다 온라인예배로 진행중에 있다.

6. 비판


한경직 목사를 거의 사위일체 수준으로 떠받들어 모시는데, '그분께도 공과 과가 있지 않을까요' 라는 온건한 비판마저도 천인공노할 신성모독으로 받아들인다. 거의 한경직이라는 또 하나의 하나님을 만들어 신격화시키고 모시는 수준이다.
가장 큰 문제는 한경직이라는 개인이 아무리 선인이어도 일개 인간을 이 정도 수준으로 신격화하여 모신다는 것은 기독교의 기본 교리에 어긋나는 일이며, 또 다른 문제는 한경직이라는 인물이 결코 완벽한 선인이 아닌 잘못이 있는 인물이라는 점이다.[7]
이 때문에 청년 신도들이 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한경직의 잘못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인이나 장로들이 완벽한 성인으로 치장한 한경직이 국가조찬기도회와 서북청년회 관련해서 명백한 잘못이 있음을 알게 되었을 때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수준이다. 물론 기독교에서 말하듯 '완벽한 인간은 없다'는 변명도 가능한데 그런 변명이 불가능할 정도로 이 교회는 한경직을 신성화시켜왔다.
그러다 보니 한경직을 변호하려면 전두환 혹은 서북청년회에 대해서도 '잘못이 아니다' 라는 스탠스를 취해야 하고 그러다보니 교회가 전체적으로 매우 보수적이고 극우에 가까운 사람들이 많다. 때문에 활발히 활동하는 청장년 신도 중에서도 이런 분위기에 점점 지쳐가는 사람이 많다.

[1] 한경직 목사가 베다니 전도 교회(영락교회의 옛 이름)를 세운 것이 시초이다.[2] 자세한 것은 한경직 목사 문서와 해당 문서 참조.[3] 실제로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 영락교회 예배당이 등장하였다[지금의] 숭실대학교[4] 담임목사의 일을 도와 같은 업무를 맡는 것. 급격히 성장했던 당시 교회의 과중한 업무를 분담하기 위해 청빙했다. 1951년 1.4 후퇴로 각자의 피난지에서 영락교회 성도들이 모여 예배를 드린 것이 시초인 부산영락교회, 대구영락교회, 제주영락교회의 설립을 도왔다.[5] #[6] 기사전문[7] 한경직 본인은 특정인을 떠받드는 행위를 싫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