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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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景職
1903년 1월 27일(음력 1902년 12월 29일) ~ 2000년 4월 19일
1. 개요
2. 서북청년단과의 관계
3. 저서


1. 개요



1987년 7월 12일 영락교회 3부 주일예배 실황[1]
대한민국개신교 장로회 목사.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증경총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903년 1월 27일 (양력) 평안남도 평원군 공덕면 간리 자작마을#에서 빈농 한도풍의 아들로 태어났다.
진광학교와 오산학교, 숭실대학을 나왔으며 이승훈조만식의 제자이기도 하다.
이후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월남 후 한국 최초의 대형교회인 영락교회를 세우는 등 한국 개신교계에서 상당히 비중이 있는 인물이다.
자신이 평양에서 졸업한 숭실대학교신사참배 반대로 자진폐교된 이후 서울에서 다시금 이 학교를 새로 개교하는데 기여하였으며 1954년 숭실대학교가 영락교회 가건물에서 새로 출범할 당시 서울 숭실대학교 초대 총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훗날 숭실대학교 총장이 된 이효계에게 '한 우물을 파거라' 라며 법조인을 권유하기도 했다.
월남 전 소련군의 약탈,강간,학살과 기독교인 탄압 등의 만행을 미군에 알린 적이 있다.
1970년 12월 23일 당시 조계종 종정 청담스님과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 김수환 추기경, 조덕송 조선일보 논설위원과 함께 시국을 논의하며 민주화에 적극적으로 나섰다.[2]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신설동에 있는 대광고등학교, 대광중학교, 대광초등학교를 설립한 이력도 있다.
1992년 템플턴상을 수여받는 자리에서 일제강점기 말기에 신사 참배를 하였다는 양심 선언을 하여 주위를 놀라게 하기도 하였다.
동료 목사들의 체포로 어쩔 수 없이 한 것이라고 한다.
현재 숭실대학교에 이 사람의 이름을 딴 건물이 있으며 채플, 입학식 등을 진행하기 위한 강당으로 자주 쓰인다.
장로회신학대학교에도 이 사람의 이름을 딴 건물이 있으며, 여기의 경우는 아예 특강이나 과정별 예배가 아닌 한, 채플을 비롯한 모든 주요 행사의 중심지가 된다. 애초에 학교 자체가 작고 건물 수도 적어서 여기 말고는 딱히 큰 행사를 치를 만한 공간도 없지만... 그리고 대광중학교와 대광고등학교 사이에 입학식, 채플 등을 진행하는 강당이 있는데 흔히 '추양 기념관'이라고 부르며 이 곳의 정식 명칭은 '추양 한경직 기념관'이다.
1954년 지금의 경희 의료원이 숭실대에 흡수되고자 신청을 내었으나 재정 문제를 들어 거절했다는 루머가 있다. 어찌되었건 경희 의료원은 경희대 소속이며 숭실대에는 의학 관련 전공으로 메디컬 스쿨 대비반만이 존재한다.
1950년 밥 피어스 목사와 함께 '월드비전'을 설립하였다.
한국 기독교의 흑역사중 하나인 군사독재정권 시기 국가조찬 기도회의 중심 인물중 한명으로도 유명하다.
사망 당시 양복 한벌과 구두 한 켤레가 전 재산이었을 만큼 검소하고 청렴했다고 한다.

2. 서북청년단과의 관계


'''그때 공산당이 많아서 지방도 혼란하지 않았갔시오. 그때 ‘서북청년회’라고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중심되어 조직을 했시오. 그 청년들이 제주도 반란사건을 평정하기도 하고 그랬시오. 그러니까니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미움도 많이 사게 됐지요''' (김병희 편저, 『한경직 목사』, 규장문화사, 1982.)

1945년 9월에 한경직은 '기독교사회민주당'을 조직했으나 소련군의 진주로 그 해 10월 월남했으며 12월에 김재준의 도움을 받아 일본의 천리교 건물을 사들여 오늘날 '영락교회'의 시초인 '베다니 교회'를 열었다. 다음 해인 1946년에 교회에 속한 청년들이 중심이 된 서북청년회가 11월에 출범했으며 이들이 바로 서북청년단의 시초였다.
그 서북청년단은 잔혹하리만큼 철저한 반공정신으로 무장하고 있었고, 1947년에 3월 1일에 제주도에서 일어난 소요사태로 경찰 66명이 해임되자, 그 후임으로 투입되었다. 이후 벌어진 4.3 사건 때 제주도의 남로당5.10 총선거에 반대해 무장단을 결사해 경찰서를 습격하고 60여명이 사망하자, 제주도 한라산 일대에 계엄령을 내리고 그 주변부의 민간인들을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남로당 무장대로 규정해 학살, 약탈, 강간 및 살인연습 등을 자행하였고, 그 중 서북청년단 무장단의 활약(...)이 가장 돋보였다.[3]
이후 서북청년단은 한국 내 남로당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전향한 공산주의자들을 규합한 '보도연맹'이 6.25 전쟁 중에 북한군에 부역행위할 가능성이 있다는 추정 이유로 북한군 미점령지역의 보도연맹 인원들을 예비검속 차원에서 대량학살한 보도연맹 학살사건에서도 가장 앞장서서 학살에 나섰으며[4] 그 밖에도 이승만 초상화와 태극기를 가지고 다니며 강매를 하였고 이에 불응하면 공산당 빨갱이로 누명을 씌워 고문, 폭행, 살해 등을 일삼고 가족들을 상대로 협박, 금품 갈취, 성상납, 강제결혼 등을 하였다.
이후 서북청년단은 5.16 쿠데타 시기에 해체되었고, 그 참가인원들은 지방으로 옮겨 교회를 건축하고 자신들의 '반공행위'를 내세우며 목회를 하였다.

3. 저서


  • 건국과 기독교
  • 신자의 사회적 사명
  • 팔복
  • 민주국가의 정신기초
  • 한경직 목사 설교전집
  • 병상에서의 묵상

[1] 과거 한국교회 주일예배 영상 실황을 녹화한 몇 개 되지 않는 희귀한 영상물이며, 예배 사회에는 당시 영락교회 사회부에서 시무하던 고유곤 목사이며, 성가대는 윤학원 당시 장로가 지휘하는 시온성가대로, 설교제목은 '예수의 증인들'이다.[2] 한 목사가 조계종 종정이던 청담스님과 한국 천주교의 지도자인 김수환 추기경과 시국을 논했다는 것은 당시 종교를 초월하고 시국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의미이다.[3] 이 영향으로 인해 제주도는 전국적으로 개신교 인구 비중이 적은 편이다.[4] 보도연맹 학살 항목에도 나와있듯이,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성향을 가진 사람들 뿐만 아니라 아예 그냥 공무원들 각자 인원 할당량을 만들어서 쌀을 지급하는 등으로 유인해 허위로 가입된 무고한 민간인들도 수없이 무차별로 희생당했기에 이는 단지 이념만의 문제가 아니며, 매우 중대한 묻지마식 대량학살 범죄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