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흑석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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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榮州 黑石寺 木造阿彌陀如來坐像 및 腹藏遺物. 조선 세조 4년(1458)에 왕실인사들이 시주하여 조성된 목조아미타여래좌상과 그 안에 복장된 유물들. 불상은 흑석사, 복장유물은 국립대구박물관이 소장 중이고, 유물 일체는 1993년 국보 제282호로 일괄 지정되었다.
2. 내용
복장기와 보권문에 따르면 세조 4년(1458)에 정암산 법천사에서 아미타불상과 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을 조성했다. 위쪽의 맨 아래 사진 속 권선문에는 종이를 덧대어 천순 원년(1457)에 기록했다고 연도를 적었지만, 복장기에는 천순 2년(1458)이라고 다르게 기록했다. 권선기에는 종이를 덧대어 연도를 수정했으므로 복장기가 기록한 대로 1458년이 맞는다고 추정한다.
세조를 비롯하여 효령대군, 태종의 후궁 의빈 권씨와 명빈 김씨 등 왕실인물 275명이 시주하였다고 기록했는데, 시주자들 중에서도 의빈 권씨가 불상 조성을 주도한 듯하다. 권씨가 혼자 삼존불을 조성하려다가 힘이 드니까 다른 왕실 사람들에게 시주를 요청한 모양이다.
원래 아미타불의 협시보살로는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모심이 통례지만 여기서는 대세지 대신 지장보살을 모셨다. 권선문에 따르면 의빈 권씨가 세조 3년(1457)에 죽은 금성대군의 명복을 빌고자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지장보살을 선택했다. 세 불보살 모두 불교에선 영혼 천도에 힘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금성대군은 세종과 소헌왕후의 아들이지만 의빈 권씨의 슬하에서 자랐다. 그래서 권씨 또한 내심 아들처럼 여긴 듯하다. 그러나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운동에 참여했다가 1457년 사형을 받았고, 단종도 죽고 말았다.
의빈 권씨는 본디 태종의 후궁인데 세종 4년(1422)에 태종이 죽자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다. 하지만 절이 아니라 여전히 궁에서 살면서 불상을 모시고 조석으로 에불을 올렸다. 출가했다곤 하지만 자신이 키웠던 금성대군이 비참하게 죽음을 슬퍼하여 삼존상을 조성하여 명복을 빌려고 한 것이다. 세조의 눈치를 보아 표현하지야 못 했지만, 어쩌면 단종과 다른 죽은 자들까지 다 천도되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흑석사 아미타 좌상은 1992년 개금 도중 복장유물이 나왔다. 하지만 흑석사 주지가 신도회장에게 유물의 일부를 맡겠더니 문화재 밀매업자에게 팔아먹질 않나, 1999년에는 도둑이 훔쳐가서 경찰과 흑석사 승려들이 격투를 벌이며 찾아오질 않나... 1996년에는 유물들을 경찰서 무기고에 1년 넘게 보관하기도 했다.
국보로 지정된 불상은 그 가운데 본존불인 아미타불로 지금은 경북 영주 흑석사 극락전에 봉안되었다.
복장유물은 다음과 같다.
- 전적
- 아미타삼존불조성보권문: 6면으로 접힌 절첩본으로 능화판으로 찍어내었으며 앞면은 사격자모란당초문, 뒷면은 모란국당초문으로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제일 먼저 후원자 세조의 이름이 적혀있고, 이후 태종의 후궁으로 1457년 선왕을 위하는 세조의 특별배려로 궁호를 지어주고 노후를 안양(安養)하게 모시던 의빈 권씨와 명빈 김씨의 이름을, 이어서 효령대군, 대시주 이우와 지용천, 대화주 성철 등의 이름을 묵서했다.
- 아미타삼존불복장기: 세조 4년(1458) 법천사 아미타삼존불을 조성하며 넣은 복장기. 성철 등 9인의 대화주와 태종의 후궁인 의빈 권씨와 명빈 김씨, 태종의 아들인 효령대군, 세종의 부마인 연창위 안맹담[2] , 세조 등 왕실 인물들과 이소세를 비롯한 시주자 275명의 명단을 기록했다.
- 불설대보부모은중경 합각 장수멸죄호제동자다라니경: 조선 초 1432년 태종의 후궁 명빈 김씨가 발원한 왕실본이다. 부모의 은혜를 강조한 불설대보부모은중경과 부처의 힘으로 죄를 없애고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장수경인 불설장수멸죄호제동자다라니경을 합철했다. 동일한 2부가 함께 있었는데, 표지는 연녹색 명주로 만들어 화려하게 장식했다. 이전의 불경들이 주로 중국 당나라에서 만들어진 구양순체로 판각된 것과 달리, 고려의 사경체로 판각하여 우리나라 고유의 활자를 연구할 수 있고 태종~세조시기에 발달하던 한국 고유의 활자체계에 대해 알아볼 수 있다.
- 불조삼경: 불설사십이장경과 불유교경, 위산경책 3책을 묶은 것. 복장에서 나온 불조삼경은 표지를 감지에 금으로 화려한 연꽃문양을 장식하였다. 또한 고려시대의 목판본과는 달리 몽산의 서문을 수록하지 않고 대신 변상도와 같은 다수의 그림을 권수에 채워넣었다.
- 묘법연화경 변상도: 석가모니불이 사부대중에게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매우 화려한 것이 특징이다.
- 묘법연화경 권2, 3, 4, 5: 총 7권 중 4권만이 복장 안에 있었는데, 금니로 가장자리를 두르고 그 안에 연화문 네 송이를 배치한 후 바탕은 은니로 보상화문을 장식하는 등 매우 화려한 것이 특징이다.
- 부 : 조선 초에 종이 6장에 찍어낸 부적.
- 직물
- 구름무늬 연녹색 겹보자기, 옥색 겹보자기, 남색 겹보자기, 대록색 겹보자기, 연청색 겹보자기, 흰색 명주, 구름과 보배무늬 황색 단직물, 황색 명주, 시주자명 청색 명주, 홍색 명주, 홍색 단직물, 홍색 명주, 황색 명주, 번모양 명주, 작은꽃 넝쿨무늬 초록색 단직물, 감색 단직물, 남색 기직물, 잎사귀 모양 직물, 흰색 구름무늬 사직물, 오색 견사, 황색 명주, 모시, 목판에 부착된 모시
- 기타
- 오향: 흰색 종이에 다섯 묶음으로 싸여 있었는데 정향, 목향, 침향, 유향, 곽향이란 글씨가 있었다. 조상경에 의하면 이 오향을 나누어 다섯 병 안에 봉안하고 대관정을 받으면 여래의 오분법신향을 얻어 사업이 번창한다고 한다.
- 오약: 흰색 종이에 다섯 묶음으로 싸여 있었는데 계피, 인삼, 감초, 부자라는 글씨가 있었다. 부자는 두 묶음이다. 조상경에 의하면 이 오약을 나누어 다섯 병 안에 봉안하고 대관정을 받으면 법왕의 몸을 얻어 무병장수한다 한다.
- 오황: 흰색 종이에 다섯 묶음으로 싸여 있어야 하지만 복장에는 세 묶음만 있었다. 대황, 자황, 웅왕이란 글씨가 있었다. 대관정을 받으면 윤회를 벗어나 청정한 몸을 얻는다고 한다. 흑석사 복장유물에 없는 다른 두 묶음은 소황과 우황이다.
- 칠보류 : 흑석사 복장에는 아름다운 보석과 구슬, 옥 등 보배 4종류가 나왔다.
- 사리와 사리용기 : 도금된 용기 안에 사리가 있었다.
3. 의의
불상은 세조 시기에 왕실이 발원하여 만든 불상인데, 조선 500여 년 동안 이런 사례는 몇 없다. 세조 때의 숭불의식에 대해 알아볼 수 있고, 왕실에서 직접 조성한 완성도 높은 예술적인 불상으로 조선시대 불교 미술사에 대해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평평한 가슴과 나발형 머리, 계란형 얼굴, 양 어깨를 덮어 수직으로 흘러내린 법의 등은 고려 후기 불상에 보이는 특징인 반면, 단정한 어깨와 긴 허리, 상투, 장식용 구슬, 옷주름 등은 이후 조선시대의 고유한 특징이다. 조선 왕실이 고려 후기 조각 전통을 계승한 한편, 조선 초 중국 명나라 불상 양식을 합쳤다. 조선의 불상이 발전한 과정을 고찰해볼 수 있는 소중한 문화재이다.
복장유물들은 개별적으로도 하나하나가 국가 보물급의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한국의 서지학과 불경사, 직물사, 염색사 등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4. 바깥고리
5. 국보 제282호
흑석사는 삼국시대 석조마애여래상과 통일신라의 석조여래좌상(보물 제681호 영주 흑석사 석조여래좌상)이 있는 절로, 늦어도 통일신라 때 창건된 절이라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폐사되었다가 1945년 다시 중창되었는데, 1990년대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던 목조아미타불상 몸체 안에서 많은 유물들을 발견되었다.
이 목조불상은 함께 발견된 기록들에 의해 조선 세조 4년(1458)에 법천사 삼존불 가운데 본존불로 조성된 것임이 밝혀졌다. 정수리에 있는 상투 모양의 육계와 팔, 배 주변에 나타난 옷의 주름에서 조선 초기 불상의 특징이 보인다. 그러나 법천사란 사찰명은 경기도, 경상도, 전라도 등 여러 지역에 걸쳐 나타나고 있어 정확히 어느 곳에 있었던 절인지는 알 수 없다. 이 불상의 몸체 안에서는 불상의 조성을 알리는 글과 시주자 명단이 들어있는 『불상조성권고문』을 비롯하여 불경 내용을 적은 『불조삼경합부』와 불교부적 등 7종에 걸친 14점이 나왔다.
또한 1824년 유점사에서 간행된 『조상경』에 나오는 불상 몸체 안에 넣는 부장물의 내용과 일치하는 38종의 다양한 직물들과 5향(香), 5곡(穀), 유리·호박·진주 등 칠보류가 함께 발견되었다.
이 유물들은 아미타불의 만든 시기를 알려줄 뿐 아니라, 개별적으로도 가치가 있는 것으로 서지학(書誌學)과 직물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