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공주

 


'''조선 세종의 왕녀
정의공주 | 貞懿公主
'''
'''출생'''
1415년(태종 15년) 8월 16일
장소 불명
'''사망'''
1477년(성종 8년) 2월 11일
(향년 만 61세)
장소 불명
'''부왕'''
세종
'''모후'''
소헌왕후 심씨
'''부군'''
연창위 안맹담
'''자녀'''
4남 2녀
(장남) 안여달
(차남) 안온천
(3남) 안상계
(4남) 안빈세
(장녀) 정광조의 처
(차녀) 한치례의 처
'''묘소'''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 63-1
1. 개요
2. 야사
3. 남편 안맹담
3.1. 자녀
4. 기타
5.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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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제4대 왕 세종과 정실 소헌왕후 심씨의 8남 2녀 중 셋째 자녀이자 적차녀. 위로는 언니 정소공주와 오빠 문종이 있고, 아래로는 수양대군안평대군을 비롯하여 7명의 남동생이 있다. 세종이 15살 때 낳은 첫째인 정소공주는 겨우 13살 때 병으로 죽어, 이후 오랫동안 실질적으로 세종의 장녀이자 유일한 적녀(嫡女)였다.
실록에 따르면 정의공주는 총명하고 지혜로워 역산, 즉 수학천문학을 할 줄 알아서 관심사가 맞는 아버지 세종대왕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2. 야사


정의공주의 시가(媤家)인 죽산 안씨 가문의 기록에 따르면, 세종대왕훈민정음을 창제할 때도 오빠 문종, 두 남동생 수양대군, 안평대군과 함께 많이 도왔다고 한다.

“世宗憫方言不能以文字相通 始製訓民正音 而變音吐着 猶未畢究 使諸大君解之 皆未能 遂下于公主 公主卽解究以進 世宗大加稱賞 特賜奴婢數百口”(세종이 우리말한자가 서로 통하지 못함을 딱하게 여겨 훈민정음을 만들었으나, 변음과 토착을 다 끝내지 못하여서 여러 대군에게 풀게 하였으나 모두 풀지 못하였다. 드디어 (정의)공주에게 내려 보내자 공주는 곧 풀어 바쳤다. 세종이 크게 칭찬하고 상으로 특별히 노비 수백을 하사하였다.

《죽산안씨대동보(竹山安氏大同譜)》

하지만 이 기록을 그대로 믿기엔 문제가 있다. 우선 출처가 조선시대나 적어도 대한제국 시기도 아닌 '''1976년'''에 편찬 및 출판된 '''집안 족보'''며, 숱한 행장처럼 조상을 미화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1]
그리고 '''노비 수백'''을 하사하였다는데, 개국공신에게도 노비는 30여 구 하사하였고, 이후 공신에게도 수명에서 십수명 정도 하사한 사례가 대부분이었다. 계유정난세종대왕후궁이었던 혜빈 양씨에게 노비 100구, 정의공주와 세종의 다른 후궁 및 공주에게 20구 등을 내린 기록이 단종실록에 나오긴 하지만, 이는 계유정난에서 죽은 신료의 노비들을 몰수한 후 나눠준 것이라 사정이 다르다.
따라서 공주에게 수백 구의 노비를 하사하였다면, 분명 막대한 재정 부담을 이유로 대간이나 유생의 반발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기록이 없다는 점, 죽산안씨대동보 외에 사료 교차검증이 되지 않는 점 등을 미루어 볼 때, 정의공주의 훈민정음 창제 기여설은 허구이거나 혹은 기여했다 해도 과장되어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만에 하나 실제로 있었다면, 실제로 있었던 것을 과장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훈민정음 완성 직전 정의공주의 양모가 상을 당했는데, 세종대왕이 직접 "상복을 입지 말라"고 한 기록이 실록에 있다. 성종실록에 송처관이라는 사람이 양모의 상복을 100일 만에 벗어서 사헌부에 탄핵당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볼 때, 특별한 이유 없이 이런 명령을 내렸다고 보기는 어렵다. 정의공주는 세종대왕이 특별히 총애하던 자식이고, 능력도 있었다. 이런 상황을 종합해서 정의공주에게 호의적인 결론을 내리면, 다른 왕자들처럼 훈민정음 창제 작업에 참여 혹은 지속키 위해 세종대왕이 편의를 봐주었다는 '''추측'''의 근거 정도로 정도로 볼 수 있겠다.
위의 노비 관련 기록의 경우 왕조국가에서 왕이 하사한 상을 과장할 수는 있지만, 아예 주지 않은 상을 줬다고 기록했다고 보긴 어렵다. 다만 진짜 문제는, 죽산안씨대동보가 1976년 편찬된 것이고 진위 논란이 있는[2] 족보라는 것이다. 1976년에 대동보를 편찬할 때, 애초에 해당 대목이 원래 있던 기록을 인용한 것인지 아닌지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이 기록이 진짜인지 거짓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페미니스트들이 이 내용을 근거로 훈민정음을 세종대왕이 아닌 정의공주가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상술한 것처럼 이는 신빙성이 낮은 야사에 불과하며, 정의공주의 참여가 사실이라 쳐도 '작은 부분에 협조했을 가능성이 있다' 정도의 '''추측'''에 불과하다. 무엇보다도 당장 저 위의 족보에서 '''"세종대왕께서 시제(만들다)하셨다"고 쓰여 있다.'''
[image]
정의공주 훈민정음 창제설을 주장하는 소설
애초에 해당 주장의 기반이 된 소설 <정의공주>는 상기한 족보 죽산안씨대동보를 토대로 정의공주가 토착음에 관한 문제를 해결했다는 내용에 착안, "토착음은 (해묵은) 환단고기의 단군세기편에 나오는 가림토 문자이며, 정의공주는 그 가림토 문자를 바탕으로 한글 창제에 기여했고, 한글의 모태는 가림토 문자"라는 상상력을 기반으로 소설의 내용을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소설적 상상과 허구를 넘어 역사로서 받아들일 경우, 논거부터 주장까지 유사역사학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애초에 가림토 문자부터가 사실이 아닌 것은 물론, 족보의 내용을 토대로 여러 야사와 그 유명한 환단고기와 같은 위서를 토대로 작가가 창작한 소설일 뿐이며 이를 마치 사서처럼 역사적 근거로 활용하는 건 대단히 무리가 있다.
소설의 바탕이 된 환단고기가림토 문자가 시사하듯, 역사 연구에서 사실을 증명하는 길은 매우 어렵고 고단한 길이다. 그리고 한일 간의 역사 분쟁에서 볼 수 있듯 확실한 정사의 기록을 가지고도 교차검증해가며 격렬한 토론과 연구가 수반된다. 그런 마당에 족보 기록 하나만을 가지고 단순히 "그럴 가능성이 있다"를 넘어 "한글을 창제했다"고 확언하는 건 역사학을 너무 쉽게 보는 것이다. 당장 정사부터 다양한 검증의 통로를 거쳐야 하는 마당에다, 기록되어 있는 사실마저도 학자에 따라 확증편향적인 시선에 따라 원하는 것만 체리피킹되어 유사역사학의 통로가 되는데 재야사학자의 사변보다 작은 근거로 추론을 넘어 사실을 논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상술되었듯 이런 식의 가정이라면 정사가 못 될 사료들이 없다. 행장부터 야사집, 위서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역사적 기록도 정사가 될 수 있다는 식인데, 당연히 이는 가능한 이야기가 아니다. 사실과 거짓을 구분하고 검증하는 건 역사의 영역에서 이루어져야지 사료도 아닌 창작물을, 그것도 제대로 된 사서를 기반으로 한 것도 아닌 소설을 기준으로 삼는 것은 무리한 일이다.

3. 남편 안맹담


정의공주는 죽산 안씨 가문의 연창위(延昌尉) 안맹담(安孟聃)에게 하가(下嫁)[3]하였다. 부부의 금슬은 매우 좋았다고 하며, 슬하에 4남 2녀가 있었다. 안맹담이 1462년에 죽자, 불교에 대해 조예가 깊었던 정의공주는 남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장보살본원경(地藏菩薩本願經) 상ㆍ중ㆍ하를 간행하였으며, 이 책은 대한민국 보물 966호로 지정되었다.
안맹담은 을 매우 좋아하여 병을 얻기도 했다고 한다. 세종대왕사위를 불러다가 혼을 내기도 하고 어르고 달래기도 했지만 말을 듣지 않자, 정의공주의 집에 술꾼들이 출입하는 것을 금했다고 한다.
안맹담은 계유정난(癸酉靖難)에 협조하여 성록대부(成祿大夫)로 가자(加資)되었고, 1455년(세조 1년)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었으며, 1457년(세조 3년) 수록대부(綏祿大夫)에 가자되었다. 그래서 정의공주도 이러한 남편의 공훈에 힘입어, 남동생 세조로부터 노비와 전토 등을 받았다.
종손 성종도 정의공주의 4남 안빈세(安貧世)를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임명했다고 한다.

3.1. 자녀


  • 장남 : 안여달(安如獺)
    • 손자 : 안원경(安元卿)
  • 차남 : 안온천(安溫泉)
    • 손자 : 안언경(安彦卿)
    • 손녀 : 하동 정씨 정인지의 5남인 정상조(鄭尙祖)에게 시집감.[4]
  • 3남 : 안상계(安桑鷄)
    • 손자 : 안몽경(安夢卿)
  • 4남 : 안빈세(安貧世)
    • 손자 : 안처성(安處誠)
  • 장녀 : 정인지의 장남인 정광조(鄭光祖)에게 시집감.
  • 차녀 : 청주 한씨 한확의 3남인 한치례(韓致禮)[5]에게 시집감.

4. 기타


불교에 조예가 깊었다. 연창위 안맹담과 함께 세종대왕 승하 후 소헌왕후와 세종의 명복을 기원하기 위해 문수사(文殊寺)를 중창하였다. 안맹담도 평소 불경을 읽고, 살생을 싫어하여 양잠(養蠶)도 하지 않았다.
1469년(예종 1년) 지장신앙의 기본 경전인 『지장보살 본원경』을 간행하였는데, 이는 죽은 연창위 안맹담의 명복을 빌기 위한 것으로 오늘날에는 대한민국 보물 제966호로 지정되어 있다.
묘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 63-1에 있으며, 남편과 합장되어 있다. 1982년 11월 13일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0호로 지정되었다.

5. 대중매체에서


  • 소설 <정의공주> (한소진)
  • 드라마 대왕 세종 - 이주현 : 유년시절만 짧게 나온다.
  • 웹소설 <정의롭다 안맹담>

[1]원균행장을 근거로 평하면 명장이라고 할 여지가 있는 수준.[2] 주로 안씨 가문의 시조에 관련해[3] 신분이 높은 여자가 자신보다 낮은 신분의 남자에게 시집감. 왕녀(공주, 옹주)의 경우에는 이웃 나라의 왕이나 왕자와 혼인하지 않는 이상, 어떤 남자에게 시집가더라도 '하가'가 될 수밖에 없다.[4] 정상조의 손녀가 덕흥대원군의 부인이자 선조의 생모인 하동부대부인 정씨다.[5] 인수대비의 남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