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고르 레토프

 

1. 개요
2. 생애
3. 음악적 성향
4. 들어보기
5. 여담
6. 앨범 목록
6.1. 그라지단스카야 오보로나 앨범


1. 개요


이고리 표도로비치 '예고르' 레토프(Игорь Фёдорович 'Егор' Летов, 1964-2008)[1]는 러시아의 예술가로, 러시아의 유명 포스트 펑크/사이키델릭 락 밴드인 '그라지단스카야 오보로나(Гражданская Оборона)'[2]와 '예고르와 정신줄 놓은 놈들(Егор и Опизденевшие)'[3] 그리고 전위예술 프로젝트 '코무니즘(Коммунизм)'으로 유명하다. 싱어송라이터였으며, 이 외에도 시인[4], 사운드 엔지니어, 아방가르드 예술가로도 활동하였다.

2. 생애


1964년 시베리아의 옴스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독소전쟁에 참전한 전쟁 베타랑이었으며 어머니(카자흐스탄 출신 코사크)는 의사였다. 가족 혈통을 따져보면 러시아, 코미, 모르드바[5], 터키 계열이 혼재되어 있다고 한다. 유년 시절 집 근처 환경이 열악한데다[6] 선천적으로 몸이 허약했던 편이라 어릴 적 자신의 형과 함께 몇 번이나 임상사[7]를 겪었을 정도로 몸이 허약했다고 전해진다[8]. 그의 형 세르게이는 노보시비르스크에 위치한 물리학 및 수학 학교에 재학하며 알게 된 더 후 등 영국 락 음반들을 예고르에게 소개해 주었으며 예고르는 강렬한 사운드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1980년대 초반부터 레토프는 시와 가사, 각종 단편 소설들을 쓰기 시작했으며, RIO[9] 및 프리 재즈 계열 음악에 심취하였다. 이 외에도 그는 철학 분야에 큰 관심을 가지고 이었고, 많은 책을 읽고 영화를 보며 상당한 지식을 쌓았다.
1982년 중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예고르는 모스크바 화학기술대학교에 재학하던 세르게이를 찾아가 같이 살게 되었다. 당시 세르게이는 재즈 색소포니스트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아크바리움, 알리사, 데데테 등 당시 여러 유명 밴드에서 활동하는 등 명성이 적은 편이 아니었다. 예고르는 락 음악에 심취해 수많은 음반을 사들였으며, 드럼과 베이스 기타 연주법을 배우고 당시의 언더그라운드 아방가르드 예술가들 몇몇과 교류를 가지며 음악 활동을 시작하였다[10]. 기술 전문 학교에 들어가 미장이 일을 배우다가 1983년 3월 잦은 결석과 낮은 성적으로 인해 퇴학당하고 옴스크로 돌아가 경비원 및 선전 화가[11] 등의 일을 했다.
1982년 레토프는 자신의 친구들인 안드레이 바벤코(Andrey Babenko) 및 예브게니 데예프(Evgeny Deyev)와 함께 개러지/하드/사이키델릭 락 밴드 '포세프(Посев)'[12]를 결성하였다. 포세프는 공식 무대에 선 적이 없으며 단순 락 지망생들의 "홈 밴드"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콘스탄틴 랴비노프(Константин Рябинов)[13]가 합류하며 1984년 11월 8일 그 유명한 그라지단스카야 오브로나[14]를 결성하게 된다.
그롭은 점차 인기를 얻어가기 시작했고[15] 1985년 그롭의 첫 앨범인 "썩어빠진 젊은이들"과 "낙천주의"가 예고르의 집에서 제작되어 마그니티즈다트[16] 형식으로 유포되었다. 하지만 이는 관계당국의 감시와 견제를 야기했고, 그롭의 반권위적 기조와 다분히 정치적이고 저속하다고 볼 수 있는 가사들은 KGB의 시선을 끌게 되었다. 그롭의 음악을 들은 바벤코의 모친(소련 공산당원)은 자신의 아들이 반사회주의적 음악을 한다고 당에 신고했고, 그롭은 "테러적 행위"를 조직한 죄로 줄줄히 잡혀 들어간다(같이 활동했던 음악가들 및 일가친척들에게 가해진 협박은 덤으로). 예고르는 소령 블라디미르 메시코프(당시 자신을 심문하던 사람)의 압박에 못 이겨 자살한다는 내용의 쪽지를 남기고 자살을 기도했으며, 이로 인해 예고르는 감옥에 가는 대신 정신병원에 끌려가게 되고[17] 랴비노프는 심장 문제에도 불구하고 군대로, 그것도 격오지로 취급받던 카자흐스탄의 바이코누르 우주기지로 끌려갔다.
3월 초 그가 풀려난 뒤에도 주변 음악가들과 친구들은 예고르와 얽히지 않겠다는 서약서에 서명한 상태였기에 예고르는 1인 밴드로 혼자서 음악을 연주하고 녹음하며 앨범[18]을 제작한다. 해당 앨범들에 수록된 곡의 기괴한 가사와 노이즈 가득 낀 음악[19]은 전체주의 사회에서 억압받는 개인의 모습과 이러한 억압적 현실 속에서 몸부림치는 생존의 모습을 노래하고 있다. 이후 1986년 여름 예고르는 올렉 및 예브게니 리셴코(Oleg/Evgeny Lishchenko) 형제의 락 밴드 "피크 클락손(Пик Клаксон)"에서 드러머로 활동했으며, "아돌프 기틀레르(Адольф Гитлер, 아돌프 히틀러의 러시아식 표기)"라는 밴드의 이름으로 (소련 말기 전체주의 체제와 너무도 흡사한) 나치 체제의 부조리함을 두각하는 곡들을 작곡하였다.
1987년 예고르는 "그라지단스카야 오보로나"의 이름 하에 리셴코 형제와 제1회 노보시비르스크 락 페스티벌(1987. 04. 12)에 참여하게 된다[20]. 페스티벌 참가 예정이던 즈부키 무[21]아우크치온[22]이 '사상적 이유'로 참가가 거부되어 급조된 기회였는데, "옴스크에서 온 착한 소년들"이라는 사회자의 말이 무색하게 이들은 "아돌프 기틀레르"로 무대에 섰고 심사단과 청중은 나치 체제에 대한 이들의 풍자를 파시스트들의 진담으로 받아들였고, 주최 측은 관중의 분노를 이기지 못해 30분 만에 전력을 차단하고 레토프와 리셴코 형제를 무대에서 쫓아냈다.

"— Дружок, после тебя еще будут выступать группы. Ты че там? Тебе что, похуй на наш фестиваль, да?"

"Сегодня мы закончили."

"Ты понял меня или нет?"

"Понял."

-

"— 여러분, 여러분 뒤에 공연이 예정된 밴드가 여럿 있습니다. 뭐 하자는 겁니까? 뭐, 우리 페스티벌에 엿이라도 먹이려는 겁니까?"

"오늘 우리 공연은 끝났습니다."

"지금 제 말 이해하신 겁니까, 아닙니까?"

"아 이해했다고요."

-

공연이 중단된 후 당시 사회자와 밴드 사이에 오간 대화(영상 제일 마지막 부분 참고)

이후 집으로 돌아온 그는 또 다시 KGB가 그를 정신병원에 수감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에[23] 주머니의 얼마 안 되는 돈을 털어 표를 사서는 페스티벌에서 알게 된 여성 가수 야나 "얀카" 댜길레바와 함께 도망쳤다. 거의 1년 가까이 이 둘은 심페로폴, 키예프,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등 상당한 거리를 히치하이킹으로 돌아다니며 숨어지냈으나 그 와중에도 자주 크바르티르니크[24]에 나타났다. 다행히 1987년 12월 레토프의 친척들이 손을 써 주었기에 추적이 멈추었고 그는 사회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한 달 정도 조용히 있던 그는 앨범을 취입하는 등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1988년 제2회 노보시비르스크 락 페스티벌을 통해 그롭은 전국적으로 유명해지게 된다. 앞서 언급된 피르소프의 주선으로 레닌그라드, 모스크바, 발트 3국 등 여러 곳에서 라이브를 진행했으며 앞서 언급된 아우크치온 관련 에피소드 이후 집에서 본인이 자신의 걸작으로 꼽는 "러시아의 실험낭자한 대평원" 등 4개의 앨범을 취입한다.
1990년 그라지단스카야 오보로나는 탈린 콘서트를 마지막으로 잠시 해체되었다. 이후 레토프는 "코뮤니즘"[25]이나 "예고르와 정신줄 놓은 작자들" 등 여러 프로젝트를 통해 음악 활동을 계속하고 앨범을 취입하였다.

We have been playing together for a year and a half. There was some small period apart, just for the rest. We can’t live without each other. It’s like a commune. But I think that we must stop it after Barnaul. Now it’s that sort of situation in the country, that they make money by rock music. It’s just a profanation. People come to concerts as they would go to a discoteque, only for jumping and crying. Or there are some athletes who want to listen to some arpeggios or some timbre layers. I don’t think that rock is music or aesthetics. I think that it’s a kind of religious movement. I want to play the kind of music that we played in basements of Novosibirsk. It’s better to me if there are only ten persons in the concert hall, because they really want to listen to me. It seems to me that it’s absolutely impossible in our country to have such a small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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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그라지단스카야 오보로나)는 한 1년 반 정도 같이 공연해 왔다. 중간중간 단지 휴식을 위해서 잠깐씩 멈추었던 시기가 있기는 하다. 우리는 서로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 마치 공동체 같은 것이다. 하지만 바르나울[26]

이후로는 밴드를 그만 두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요새 우리 나라의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록 음악을 한다. 그것은 신성모독이다. 사람들은 마치 디스코텍에 가는 기분으로, 그냥 단순히 뛰고 소리지르기 위해서 공연장에 간다. 아니면 웬 선수들이 와서 특정한 아르페지오나 음을 듣고 싶어한다. 나는 록을 음악이나 미학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록은 차라리 종교적인 행동에 가까운 것이다. 나는 우리가 노보시비르스크의 지하실에서 연주하곤 했던 그런 음악을 하고 싶다. 나는 차라리 공연장에 관객이 10명만 있는 상황에서 공연을 하는 것이 더 좋은데, 왜냐면 그 10명의 관객은 나의 음악을 진정으로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작은 규모의 공연을 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이제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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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롭이 해체된 이유를 설명하는 1991년 5월 인터뷰 출처

KGB에 쫓기고, 잡혀서 정신병원에 수감당하고, 공산당에 의심당할 수준으로 저속하고 반항적인 가사가 가득 담긴 노래를 여럿 만들긴 하였으나 1993년의 1993년 러시아 헌정위기 이후로 예고르 레토프는 공산주의자가 되었으며[27], 실제로 반문화와 밀접한 연관성을 맺고있던 국가 볼셰비키 당(NBP)의 창설자 중 하나이자 초창기 맴버이기도 하였다. 소련 붕괴 이후, 옐친을 비롯한 여러 자유주의자들에 의해서 발생한 사회적 부조리와 갈등에 의하여 공산주의로 선회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소련 말기 권위적이고 부패한 모습을 보여주던 소련 정부에 대한 반대 기조는 버리지 않았으며, 2001년 발매된 앨범 "별똥별(Звездопад)"이 암시하듯[28] 90년대 말 이후에는 자신이 더이상 그 어떠한 정치적 운동과 관계가 없다고 발언하는 등 선을 긋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당시 몇몇 관련자들과 달리 극우 성향은 보이지 않았다[29].

"Я — СОВЕТСКИЙ НАЦИОНАЛИСТ. Моя Родина — не просто Россия, идею которой отстаивают и полируют разные серьезные мужи, я не россиянин, хотя и натурально русский (корни мои по отцу — из беднейших крестьян Северного Урала, по матери — из казачьего рода Мартемьяновых). Родина моя — СССР. Россия — это дело частное, отдельное, такое же, как Германия, Франция, Китай и прочие отдельные государства. СССР — это первый и великий шаг вдаль, вперед, в новое время, в новые горизонты. СССР — это не государство, это идея, рука, протянутая для рукопожатия, и слава и величие России в том, что она впервые в истории человечества взяла на себя горькую и праведную миссию прорыв сквозь тысячелетнее прозябание и мракобесие, одиночество человека к великому единению — к человечеству. Я верю, верую во всемирную, вселенскую Революцию и готов воевать за нее и словом, и делом, как это делали мои доблестные предшественники, учителя и соратники от Достоевского до Маяковского, все те, кто всегда был против лжи, равнодушия, упадка, смерти, В 1917 году наша страна сделала первый шаг на пути к истине — да не бывать ему последни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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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비에트 국가주의자다.''' 내 조국은 높은 놈들이 찬양하고 세워놓은 러시아가 아니다. 나는 인종은 비록 러시아인이고, 내 아버지의 조상은 북우랄의 가장 못사는 농부고, 어머니는 마르테먀노프의 카자크에서 왔다지만, 러시아 국민이 아니다. 내 조국은 소련이고, 러시아는 그저 그 부분이며 분리된 것이다.마치 중국이나 프랑스, 독일같은 그외 분리된 정부들 처럼 말이다.

소련은 위대한 도약이자. 한 발돋음이다. 앞으로, 새로운 시대로, 새로운 지평으로, 소련은 - 정부가 아니라. 이데아요, 약속된 손이요, 그리고 러시아로써는 천년동안 이어진 무지몽매함을 타파할 중대한 임무를 인류 역사상 처음올 맡게 되었다는 걸 영광이자 위대함이다,

외톨이였던 인간(러시아)을 - 인류(소련)로써 대통합을 하는 모습으로 말이다. 나는 곧 전세계, 전인류의 혁명이 일어날걸 믿는다. 영원한 혁명을 위해, 나는 입으로도, 행동으로도 싸울 준비가 되어있다. 마치 우리들 선조들처럼, 선생이자, 동반자들인 도스토옙스키부터 마야콥스키까지, 모든, 거짓말과 무관심, 퇴폐, 죽음에 반하는 자들처럼 말이다. 1917년에 우리 나라는 진실을 향한 첫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이 첫 걸음은 마지막 걸음이 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소련 붕괴 이전에는 단순한 반정부, 아나키즘적의 가사를 담은 노이즈 섞인 펑크 락을 주로 작곡하였으나, 소련 붕괴 이후에는 초월과 투쟁, 그리고 종교적 의미를 가사의 중심으로 사용하는 사이키델릭한 노래들을 작곡하였다. 초기곡만 보면 상상하기 힘들 수도 있지만, 그는 상당한 량의 독서량을 자랑하는 인텔리였다. 10분이 넘어가는 대작 "실험낭자한 러시아의 대평원"이나 "참을 수 없는 가벼운 존재"[30]등의 곡을 보면 그의 철학이 잘 드러난다.
2008년 2월 19일, 옴스크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수면 중 심장 질환으로 인해 사망하였다.
그의 장례식에는 상당한 수의 팬들이 따랐으며, 옴스크 동부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의 묘비

3. 음악적 성향


꽤 적지 않은 러시아의 록 뮤지션이 그러하듯 레토프도 초기와 후기로 나눌 수 있다.
우선 초기는 욕설이 난무하며, 가망이 없는 소련 사회에 대한 절망과 무력한 공산주의자들과 온갖 학살과 범죄를 주도한 높으신 분들에 대한 분노, 그리고 슬픔이 담겨있고 녹음을 하고 나서 편집을 하지 않은 듯한 펑크 락의 날카로움과 날 것의 감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소련 붕괴 이후의 후기는 종교적 키워드, 시적 은유, 그리고 앞과 뒤가 모순되는 가사의 요소들을 통해서 마음을 울리는 사이키델릭한 깊음, 그리고 좀 더 부드러우면서도 소리를 지르는 듯한 모습들이 상당히 인상적인 것들로 다가온다.
남자의 '그곳'(욕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4. 들어보기



'펑크 락과 락앤롤(Панк и рок-н-ролл)'. 포세프 시절의 곡.

'우리는 얼음이다(Мы — лёд, 1987)'
네크로필리아(Некрофилия)


'KGB-락(КГБ-рок, 1987)'

'모든 것은 계획대로(Всё идёт по плану, 1989)'

'총알에 대한 철학적인 노래(Философская песня о пуле, 1989)'. 솔로 앨범 수록곡.
]
'펄쩍-펄쩍(Прыг-скок, 1990)'. 그롭 해체 이후 '예고르와 정신줄 놓은 작자들' 시절 곡.[31]

'지점(Солнцеворот, 1997)' 수록[32].

'어느 바보에 대하여(Про дурачка)' 2006년 라이브

'사이코넛들에게 영광을(Слава психонавтам, 2007)' [33]

'나 없이(Без меня, 2004)'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달라지는 곡의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5. 여담


  • 초기 가사만 보면 상상하기 힘들 수도 있지만, 상당한 인텔리였다고 한다. 그의 집에는 상당한 양의 장서가 있고, 니콜라이 고골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를 가장 좋아했다고 한다. 흥미롭게도 도스토예프스키는 젊은 시절 옴스크에서 유배 생활을 보낸 적이 있다. 실제로 그의 가사를 분석해 보면 수많은 소설, 영화, 시에 대한 레퍼런스가 가득하다.
  • 생전 고양이와 선인장을 좋아했다고 한다[34]. 그의 곡 중에서는 자신의 죽은 고양이에게 바치는 노래[35]도 있다.
  • 축구에도 상당한 관심을 가졌고, 죽기 몇 년 전에는 로만 아브라모비치 때문에 첼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러시아 사업 역사상 한 사람이 이렇게 많은 돈을 투자한 건 처음 봤다는 게 그 이유. 그의 유일한 법적 배우자 나탈리야 추마코바 또한 그의 축구에 대한 애정을 공유했는데, 그녀의 최애팀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였다고 한다.
  • 원래 이름은 이고리지만, 레토프의 부친에 따르면 이름이 너무 평범해 보인다는 이유로(그리고 이름을 가능한 한 가장 바보같이 짓는다는 이유로) "뒤진 예고르(Егор Дохлый)"라는 예명을 직접 지었다고 한다. 허나 후일 "Дохлый"는 빠지고 예고르라는 이름만 남았다. 앞서 언급했듯 러시아어 특유의 모음 약화로 인해 예고르는 실제로 '이고르'로 발음되지만 이고리와 예고르는 어원부터 완전히 다른 별개의 이름이다.
  • 아버지 표도르 레토프는 전직 군인으로[36] 붉은 군대 합창단에서 잠시 노래를 부른 적이 있으며, 형 세르게이 레토프는 유명 재즈 색소포니스트다. 부친의 회고에 따르면 예고르의 첫 베이스 기타는 세르게이가 선물로 준 것이라고 한다.
  • 또 다른 시베리아의 여성 가수 야나 '얀카' 댜길레바(Яна "Янка" Дягилева, 1966-1991)와 80년대 동거했으며, 두 사람의 유명세로 인해 예고르는 얀카를 가장 사랑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표도르 레토프의 회고에 따르면 둘의 관계가 그렇게 좋기만 한 건 아니였으며[37], 오히려 당시 예고르가 가장 좋아하던 여자는 얀카의 친구이자 가수였던 안나 '뉴리치' 볼코바(Анна "Нюрыч" Волкова)였다고 한다. 둘은 90년대까지 동거했으나 좋지 않게 헤어졌고[38], 레토프의 유일한 법적 배우자는 그라지단스카야 오보로나의 베이시스트이기도 했던 나탈리야 추마코바(Наталья Чумакова)로[39] 이 둘의 관계는 레토프의 사망 때까지 유지되었다[40].
  • 2000년대 이전 라이브에서는 이 영상[41]같이 춤을 추는 경우도 있는데, 말이 춤이지 얼핏 봐서는 기괴하기 짝이 없는 허우적거림(...)이다. 러시아인들 입장에서도 웃긴 건지[42] 유튜브에서 관련 영상을 찾다보면 이런 기괴한 몸동작을 모아놓거나 여기다가 21세기 고프닉 하드바스(...)를 덧씌운 비디오를 찾아볼 수 있다.

6. 앨범 목록



6.1. 그라지단스카야 오보로나 앨범


'''스튜디오 앨범 목록'''
제목
발매 년도
Поганая молодёжь(썩어빠진 젊은이들)
1985/1988[43]
Оптимизм(낙천주의)
1985
Мышеловка(쥐덫)
1987
Хорошо!!(좋아!!)
1987
Тоталитаризм(전체주의)
1987
Некрофилия(네크로필리아)
1987
Красный альбом(붉은 앨범)
1987
Все идёт по плану(모든 것은 계획대로)
1988
Так закалялась сталь(그렇게 강철이 단련되었다)
1988
Боевой стимул(전투 흥분)
1988
Тошнота(역겨움)
1989
Песни радости и счастя(즐거움과 행복함에 대한 노래들)
1989
Здорово и вечно(멋지게 그리고 영원하게)
1989
Армагеддон-попс(아마겟돈 팝스)
1989
Война(전쟁)
1989
Русское поле экспериментов(실험낭자한 러시아의 대평원)
1989
Инструкция по выживанию(생존 가이드)
1990
Солнцеворот(지점)[44]
1995/2005[45]
Невыносимая легкость бытия(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1996
Звездопад(별똥별)[46]
2001
Долгая счастливая жизнь(길고 또 행복한 삶)
2004
Реанимация(소생)
2005
Зачем снятся сны?(그대는 왜 꿈을 꾸는가?)
2007
'''(공식 발매된) 라이브 앨범 목록'''
제목
발매 년도
Русский прорыв в Ленинграде(레닌그라드 러시아식 돌파구)
1994
Концерт в МЭИ, 17.02.90(1990년 02월 17일 MEI 콘서트)
1996
Последний концерт в Таллине(마지막 탈린 콘서트)
1996
Концерт(콘서트)
1997
Свет и стулья(세상과 똥통들)
2001
XX лет(20주년 기념)
2006
Выступление в клубе Рок-Сити(락시티 클럽 공연)
2007
Апельсин: Электричество(아펠신 클럽 일렉 라이브)
2010
'''컴필레이션 앨범 목록'''
제목
발매 년도
История: Посев 1982-1985(1982-1985년 포세프 시절)
1989
Хуй через плохо(제대로 좆됨)
1990
Попс(팝스)
1992
Легенды русского рока(러시아 락의 전설들)
2001
Поезд ушел(열차가 떠났다)
2002
'''싱글 앨범 목록'''
Электричесий пёс(전기견)[47]
2012

[1] 발음: /ˈiɡərʲ ˈfʲɵdərəvʲɪtɕ jɪˈɡor ˈlʲɛtəf/. '예고르'는 그리스 이름 '게오르기우스'에서 유래한 이름이며(이게 영어에서는 '조지'가 되었고, 독일어에서는 '게오르그'가 되었으며, 러시아에서는 발음 변화를 거쳐 '예고르' 혹은 '유리'가 되었다) '이고리'는 노르만 계통 이름 '잉그바르(Ingvar)'에서 유래하였기에 생긴 건 비슷해 보여도 실제로는 아주 다른 이름이다. '이고르'는 잘못된 표기지만 관습적 표기로 인해 이렇게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다만, 러시아어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예고르' 또한 강세로 인해 실제로는 '이고르'라고 발음한다.[2] 한국어로 '민방위(Civil defense)'[3] '미쳐버린', '좆된' 등을 의미하는 'опизденеть'에서 온 말.[4] 자신의 가사들과 기타 작품들을 모아 시집도 두 권을 냈다.[5] мордва. 우랄 계통의 민족.[6] 그가 살던 거리는 원래 활주로였던 곳이였다고 한다. 이 외에 예고르의 부모는 핵실험으로 악명높았던 비밀도시 세미팔라틴스크에서 만나 초창기 그 곳에서 살았으며(핵 실험으로 인해 집의 창문이 깨지는 건 예사였고 한 번은 지붕이 통째로 날아가기도 했다고 한다) 예고르의 형 세르게이 레토프 또한 세미팔라틴스크 출신이다. 이러한 환경이 그에게 유해한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7] Clinical death. 의학적으로 보았을 때 죽은 건 아니지만 겉보기에는 죽은 상태.[8] 여기에 이후 숲을 산책하다 진드기 감염으로 추정되는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기도 하고(해당 경험은 "펄쩍-펄쩍" 앨범에 수록된 동명의 곡의 제작 동기가 됨) 알코올 중독에 시달려 병원 집중치료실 신세를 지기도 하고(해당 경험은 2005년 앨범 "소생"에 수록된 동명의 곡의 제작 동기가 됨), 마약을 빨다 애시드 트립을 겪는 등(해당 경험은 그라지단스카야 오보로나의 마지막 앨범 "왜 우리는 꿈을 꾸는가?" 앨범의 제작 동기가 됨) 막말로 몸을 굴리며 살았고, 결국 나이 50도 못 넘기고 사망한다. [9] Rock in Opposition. 1970년대 후반 프로그레시브 락 밴드들이 뭉친 활동으로 자신들의 음악을 거부하던 당시의 기성 음악계와 맞서 투쟁하였다.[10] 1983년 초 그는 소련의 유명 아방가르드 음악가이자 대규모 음악 프로젝트 '팝-메카니카'로 유명한 음악가 세르게이 쿠료힌의 즉홍 연주 당시 베이스 기타리스트로 활동하기도 하였다[11] 공장 등에 레닌 초상화를 위시한 체제 선전을 그렸다는 말이다.[12] 한국어로 '파종', '파종한 종자' 등을 의미로 러시아의 반사회주의 집단이던 НТС(Национально Трудовой Союз, 러시아 사회 연대주의자들의 연합)의 공식 잡지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한다.[13] 흔히 별명인 '쿠지마(Кузьма: 러시아 속담에 등장하는 사악한 인물. 때에 따라서는 악마를 의미하기도 한다. 니키타 흐루시초프의 일화에서도 등장하는 존재)' 혹은 '백치 쿠자(Кузя УО: 'УО'는 옛 소련 속어로 지체장애(умственно отсталый)의 두문자어이며 '쿠자'는 '쿠지마'의 다른 이름)'로 더 잘 알려져 있다. 2020년 3월 심장 문제로 사망하였다.[14] 줄여서 '그롭(ГрОб)' 아니면 '게오/고(ГО)'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중 '그롭'은 의도적으로 지은 역두문자어인데, 러시아어로 관짝을 의미한다. 당시 레토프의 앨범에 인쇄되어 나오던 스튜디오 이름도 '그롭 레코드(GrOb Records)'였다.[15] 레토프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자신들의 추종자는 물론이요 자신들을 다루는 팬 잡지까지 있었다고 한다.[16] 카세트 테이프로 된 사미즈다트, 다시 말해 국가 몰래 발매한 '싸제' 앨범.[17] 레토프 본인의 자서전에 따르면 그는 1985년 12월 8일부터 1986년 3월 7일까지 정신병원에 감금되어 있었다. 당시 소련에서는 반체제 인사 등을 정신병원에 강제로 수감시켰으며 이 과정에서 강제 약물 주입이나 고문(침대 시트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싸맨 뒤 몇 시간 동안 방치한다거나) 등은 당연히 뒤따라왔다. 레토프 또한 강제로 여러 종류의 약물을 주입당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18] "전체주의", "네크로필리아", "쥐덫", "아주 좋소!!!", "빨간 앨범" 등 5개[19] 당시 그의 음악은 조악하게 들리며 노이즈가 가득하다. 이는 단순히 열악한 환경 때문이 아니며 강렬한 멜로디는 그라지단스카야 오보로나의 이념적, 음악적 무기로 기능하였다. 이후 레토프는 1989년 세르게이 피르소프의 소개로 레닌그라드에서 밴드 아우크치온의 고품질 음악 장비를 사용할 기회가 있었는데, 해당 장비들을 사용해 본 뒤 이런 고품질 녹음 장비는 자신의 음악에 있어 무언가 중요한 것을 없애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피르소프는 레닌그라드 락 클럽에서 일했는데 레토프와 알렉산드르 바실라초프의 이름을 알리고 빅토르 초이의 그 유명한 캄차트카 보일러실 취직을 도와주는 등 80년대 러시아 락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20] 해당 페스티벌은 관제 페스티벌에 가까웠으며, 제대로 된 공식 무대에서 연주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21] Звуки Му('무' 소리). 1983년 모스크바에서 결성되어 (두 번의 재결성 끝에)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는 인디 밴드. 얼터네이티브 락, 포스트 펑크, 아방가르드 락 쪽이다.[22] 레닌그라드에서 활동하던 아트 락 밴드[23] 실제로 이후 레토프에 대한 경찰의 추적이 이루어졌다고 그는 회고했다.[24] 당시 소련의 개인 아파트에서 이루어지던 작은 라이브 연주회를 가리키는 고유 명사. 언더그라운드 밴드 등 당시 소련 당국의 허가를 받지 않은 음악가들 및 밴드들은 크바르티르니크를 통해 팬들과 소통하고 자신의 음악을 알렸다.[25] 1989년 결성. 레토프, 랴비노프, 올렉 수다코프(Oleg Sudakov) 등이 활동[26] Барнаул, 시베리아에 위치한 도시 이름 - 편집자 주[27] 헌정 위기 당시 그는 반옐친 측에 서서 가두시위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형 세르게이 레토프는 예고르가 살아돌아오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으나, 옐친의 명령 하에 본격적으로 군이 진압을 시작하기 하루 전 집에 돌아왔다고 한다.[28] 해당 앨범은 소련 시절에 발매된 여러 노래들의 리메이크 앨범이다.[29] 이를 보여주는 사례가 2004년 2월 8일 예카테린부르크 콘서트에서 있었던 사건에 대한 반응이다. 당시 어떤 러시아 스킨헤드가 공연장에 있던 비슬라브인 팬을 구타하여 살해하는 사건이 터졌는데, 이 사건 이후 레토프는 공식 웹사이트에 글을 올려 그롭은 애국자일지언정 나치는 아니며, (그롭의 가사가 자신들의 취향과 맞아) 자신들의 팬이라고 주장하는 네오 나치들에게 '좆 까라'라는 반응을 보였다.[30] 밀란 쿤데라의 동명의 서적에서 제목을 가지고 왔다. 레토프는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줄기와 뿌리",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등 제목을 차용했지만 정작 내용은 해당 저서와 상당히 동떨어져 있는 곡들을 많이 작곡하였다.[31] 레토프가 진드기에 물려 병에 시달리던 도중 착상했다고 알려져 있다.[32] 1993년 러시아 헌정위기 이후 작곡된 곡이라는 사건과 예고르 레토프의 해당 사건에 대한 태도를 알아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곡이다.[33] 사이코넛은 정신(psycho)을 탐험하는 우주비행사들(astronauts)을 의미하는 영미권 신조어로, 원래는 명상 등 모든 요소를 동원해 정신 세계를 탐험하는 사람들을 말하지만 특히 환각제 등 불법 약물에 취해 헤롱헤롱거리는 사람들을 말한다. 당장 레토프 본인이 알코올 중독자에 마약도 좀 했으며, 해당 앨범의 제작 동기 또한 애시드 트립으로 알려져 있다.[34] 어린 시절 레토프는 배지, 우표, 동전 등을 수집하는 게 취미였으며 상당한 규모의 선인장 컬렉션 또한 소유하고 있었다고 한다.[35] "과다복용(Передозировка)", 1992년 앨범 '백 년 간의 고독(Сто лет одиночества)' 수록[36] 예고르가 자신의 밴드 이름을 "그라지단스카야 오보로나(민방위)"라고 붙였을 때 부친은 예고르에게 "지금 날 놀리기 위해 그런 이름을 지은 거냐"라고 물었고, 예고르는 "몇몇 사회적 밴드의 사회적 보호"를 의미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부친은 인터뷰에서 이를 회고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놀리려는 의도 또한 없지는 않을 것이라 여전히 생각한다고 덧붙였다.[37] 두 사람은 서로를 남편/아내라고 부르기까지 했지만 80년대 말 헤어졌는데, 히피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던 둘은 이에 대해 (히피들처럼) 관계는 자유로워야 한다고 말했다. 얀카는 1991년 사망했는데(공식 원인은 실수로 강에 빠져 익사했다는 것이지만 자살설과 타살설이 존재하며 주변 지인들은 자살설을 더 신뢰하는 편) 장례식 당시 레토프는 그녀의 죽음이 긍정적인 면도 있으니("жизнеутверждающая"라는 표현을 사용) 울 필요가 없다는 말까지 했으며 자신과 얀카 사이의 편지를 모조리 가져가 버렸다고 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예고르는 장례식 날 밤 슬픔을 못 이기고 자신의 팔에 크게 자해를 했다고 한다.[38] 부친의 회고에 따르면 둘이 언젠가 모스크바에 갔을 때 다른 여자 하나가 레토프에게 집적거린다는 이유로 볼코바가 그 여자를 때렸고, 이에 레토프가 볼코바를 멍이 들 정도로 때렸다고 한다. 그 일이 있고 일 주일 뒤에 볼코바하고 완전히 헤어졌다고 한다.[39] 얀카의 장례식에서도 둘이 만났다는 기록이 있어 이 둘의 관계가 상당히 오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담으로 둘 다 알코올 중독 증상이 있었다고.[40] 여기까지 작성된 내용은 표도르 레토프를 인터뷰한 콤소몰스카야 프라브다 기사를 참조함.[41] 노래는 '소총은 축제요(Винтовка - это праздник)'[42] 참고로 해당 영상의 가장 위에 올라와 있는 댓글 "Охеренный танец)"는 'ㅈ나 죽여주는 춤이네 ㅋ'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러시아웹에서 문장이나 단어 뒤에 붙는 )는 한국어의 ㅋ나 영어의 :)와 유사한 의미이다.[43] 1985년 마그니티즈다트로 최초 공개되었으나 KGB가 레토프와 랴비노프를 체포하는 과정에서 파기되었기에 이에 1988년 다시 스튜디오 앨범으로 발매하였다. 85년판과 88년판은 약간 다르다고 알려져 있다.[44] 至點/solstice. 동지하지를 일컫는 단어[45] 2005년 보너스 트랙과 함께 'Лунный переворот(달의 혁명)'이라는 제목으로 재발매[46] 여러 소련 음악가들 곡의 커버 앨범.[47] 아크바리움의 원곡을 커버한 것으로 원래 '별똥별' 앨범에 실릴 예정이었으나 실리지 못했고, 레토프 사후 싱글로 발매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