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고르 레토프
1. 개요
이고리 표도로비치 '예고르' 레토프(Игорь Фёдорович 'Егор' Летов, 1964-2008)[1] 는 러시아의 예술가로, 러시아의 유명 포스트 펑크/사이키델릭 락 밴드인 '그라지단스카야 오보로나(Гражданская Оборона)'[2] 와 '예고르와 정신줄 놓은 놈들(Егор и Опизденевшие)'[3] 그리고 전위예술 프로젝트 '코무니즘(Коммунизм)'으로 유명하다. 싱어송라이터였으며, 이 외에도 시인[4] , 사운드 엔지니어, 아방가르드 예술가로도 활동하였다.
2. 생애
1964년 시베리아의 옴스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독소전쟁에 참전한 전쟁 베타랑이었으며 어머니(카자흐스탄 출신 코사크)는 의사였다. 가족 혈통을 따져보면 러시아, 코미, 모르드바[5] , 터키 계열이 혼재되어 있다고 한다. 유년 시절 집 근처 환경이 열악한데다[6] 선천적으로 몸이 허약했던 편이라 어릴 적 자신의 형과 함께 몇 번이나 임상사[7] 를 겪었을 정도로 몸이 허약했다고 전해진다[8] . 그의 형 세르게이는 노보시비르스크에 위치한 물리학 및 수학 학교에 재학하며 알게 된 더 후 등 영국 락 음반들을 예고르에게 소개해 주었으며 예고르는 강렬한 사운드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1980년대 초반부터 레토프는 시와 가사, 각종 단편 소설들을 쓰기 시작했으며, RIO[9] 및 프리 재즈 계열 음악에 심취하였다. 이 외에도 그는 철학 분야에 큰 관심을 가지고 이었고, 많은 책을 읽고 영화를 보며 상당한 지식을 쌓았다.
1982년 중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예고르는 모스크바 화학기술대학교에 재학하던 세르게이를 찾아가 같이 살게 되었다. 당시 세르게이는 재즈 색소포니스트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아크바리움, 알리사, 데데테 등 당시 여러 유명 밴드에서 활동하는 등 명성이 적은 편이 아니었다. 예고르는 락 음악에 심취해 수많은 음반을 사들였으며, 드럼과 베이스 기타 연주법을 배우고 당시의 언더그라운드 아방가르드 예술가들 몇몇과 교류를 가지며 음악 활동을 시작하였다[10] . 기술 전문 학교에 들어가 미장이 일을 배우다가 1983년 3월 잦은 결석과 낮은 성적으로 인해 퇴학당하고 옴스크로 돌아가 경비원 및 선전 화가[11] 등의 일을 했다.
1982년 레토프는 자신의 친구들인 안드레이 바벤코(Andrey Babenko) 및 예브게니 데예프(Evgeny Deyev)와 함께 개러지/하드/사이키델릭 락 밴드 '포세프(Посев)'[12] 를 결성하였다. 포세프는 공식 무대에 선 적이 없으며 단순 락 지망생들의 "홈 밴드"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콘스탄틴 랴비노프(Константин Рябинов)[13] 가 합류하며 1984년 11월 8일 그 유명한 그라지단스카야 오브로나[14] 를 결성하게 된다.
그롭은 점차 인기를 얻어가기 시작했고[15] 1985년 그롭의 첫 앨범인 "썩어빠진 젊은이들"과 "낙천주의"가 예고르의 집에서 제작되어 마그니티즈다트[16] 형식으로 유포되었다. 하지만 이는 관계당국의 감시와 견제를 야기했고, 그롭의 반권위적 기조와 다분히 정치적이고 저속하다고 볼 수 있는 가사들은 KGB의 시선을 끌게 되었다. 그롭의 음악을 들은 바벤코의 모친(소련 공산당원)은 자신의 아들이 반사회주의적 음악을 한다고 당에 신고했고, 그롭은 "테러적 행위"를 조직한 죄로 줄줄히 잡혀 들어간다(같이 활동했던 음악가들 및 일가친척들에게 가해진 협박은 덤으로). 예고르는 소령 블라디미르 메시코프(당시 자신을 심문하던 사람)의 압박에 못 이겨 자살한다는 내용의 쪽지를 남기고 자살을 기도했으며, 이로 인해 예고르는 감옥에 가는 대신 정신병원에 끌려가게 되고[17] 랴비노프는 심장 문제에도 불구하고 군대로, 그것도 격오지로 취급받던 카자흐스탄의 바이코누르 우주기지로 끌려갔다.
3월 초 그가 풀려난 뒤에도 주변 음악가들과 친구들은 예고르와 얽히지 않겠다는 서약서에 서명한 상태였기에 예고르는 1인 밴드로 혼자서 음악을 연주하고 녹음하며 앨범[18] 을 제작한다. 해당 앨범들에 수록된 곡의 기괴한 가사와 노이즈 가득 낀 음악[19] 은 전체주의 사회에서 억압받는 개인의 모습과 이러한 억압적 현실 속에서 몸부림치는 생존의 모습을 노래하고 있다. 이후 1986년 여름 예고르는 올렉 및 예브게니 리셴코(Oleg/Evgeny Lishchenko) 형제의 락 밴드 "피크 클락손(Пик Клаксон)"에서 드러머로 활동했으며, "아돌프 기틀레르(Адольф Гитлер, 아돌프 히틀러의 러시아식 표기)"라는 밴드의 이름으로 (소련 말기 전체주의 체제와 너무도 흡사한) 나치 체제의 부조리함을 두각하는 곡들을 작곡하였다.
1987년 예고르는 "그라지단스카야 오보로나"의 이름 하에 리셴코 형제와 제1회 노보시비르스크 락 페스티벌(1987. 04. 12)에 참여하게 된다[20] . 페스티벌 참가 예정이던 즈부키 무[21] 및 아우크치온[22] 이 '사상적 이유'로 참가가 거부되어 급조된 기회였는데, "옴스크에서 온 착한 소년들"이라는 사회자의 말이 무색하게 이들은 "아돌프 기틀레르"로 무대에 섰고 심사단과 청중은 나치 체제에 대한 이들의 풍자를 파시스트들의 진담으로 받아들였고, 주최 측은 관중의 분노를 이기지 못해 30분 만에 전력을 차단하고 레토프와 리셴코 형제를 무대에서 쫓아냈다.
이후 집으로 돌아온 그는 또 다시 KGB가 그를 정신병원에 수감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에[23] 주머니의 얼마 안 되는 돈을 털어 표를 사서는 페스티벌에서 알게 된 여성 가수 야나 "얀카" 댜길레바와 함께 도망쳤다. 거의 1년 가까이 이 둘은 심페로폴, 키예프,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등 상당한 거리를 히치하이킹으로 돌아다니며 숨어지냈으나 그 와중에도 자주 크바르티르니크[24] 에 나타났다. 다행히 1987년 12월 레토프의 친척들이 손을 써 주었기에 추적이 멈추었고 그는 사회로 돌아올 수 있었다."— Дружок, после тебя еще будут выступать группы. Ты че там? Тебе что, похуй на наш фестиваль, да?"
"Сегодня мы закончили."
"Ты понял меня или нет?"
"Поня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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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분, 여러분 뒤에 공연이 예정된 밴드가 여럿 있습니다. 뭐 하자는 겁니까? 뭐, 우리 페스티벌에 엿이라도 먹이려는 겁니까?"
"오늘 우리 공연은 끝났습니다."
"지금 제 말 이해하신 겁니까, 아닙니까?"
"아 이해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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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정도 조용히 있던 그는 앨범을 취입하는 등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1988년 제2회 노보시비르스크 락 페스티벌을 통해 그롭은 전국적으로 유명해지게 된다. 앞서 언급된 피르소프의 주선으로 레닌그라드, 모스크바, 발트 3국 등 여러 곳에서 라이브를 진행했으며 앞서 언급된 아우크치온 관련 에피소드 이후 집에서 본인이 자신의 걸작으로 꼽는 "러시아의 실험낭자한 대평원" 등 4개의 앨범을 취입한다.
1990년 그라지단스카야 오보로나는 탈린 콘서트를 마지막으로 잠시 해체되었다. 이후 레토프는 "코뮤니즘"[25] 이나 "예고르와 정신줄 놓은 작자들" 등 여러 프로젝트를 통해 음악 활동을 계속하고 앨범을 취입하였다.
KGB에 쫓기고, 잡혀서 정신병원에 수감당하고, 공산당에 의심당할 수준으로 저속하고 반항적인 가사가 가득 담긴 노래를 여럿 만들긴 하였으나 1993년의 1993년 러시아 헌정위기 이후로 예고르 레토프는 공산주의자가 되었으며[27] , 실제로 반문화와 밀접한 연관성을 맺고있던 국가 볼셰비키 당(NBP)의 창설자 중 하나이자 초창기 맴버이기도 하였다. 소련 붕괴 이후, 옐친을 비롯한 여러 자유주의자들에 의해서 발생한 사회적 부조리와 갈등에 의하여 공산주의로 선회한 것으로 추정된다.We have been playing together for a year and a half. There was some small period apart, just for the rest. We can’t live without each other. It’s like a commune. But I think that we must stop it after Barnaul. Now it’s that sort of situation in the country, that they make money by rock music. It’s just a profanation. People come to concerts as they would go to a discoteque, only for jumping and crying. Or there are some athletes who want to listen to some arpeggios or some timbre layers. I don’t think that rock is music or aesthetics. I think that it’s a kind of religious movement. I want to play the kind of music that we played in basements of Novosibirsk. It’s better to me if there are only ten persons in the concert hall, because they really want to listen to me. It seems to me that it’s absolutely impossible in our country to have such a small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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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그라지단스카야 오보로나)는 한 1년 반 정도 같이 공연해 왔다. 중간중간 단지 휴식을 위해서 잠깐씩 멈추었던 시기가 있기는 하다. 우리는 서로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 마치 공동체 같은 것이다. 하지만 바르나울[26]
이후로는 밴드를 그만 두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요새 우리 나라의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록 음악을 한다. 그것은 신성모독이다. 사람들은 마치 디스코텍에 가는 기분으로, 그냥 단순히 뛰고 소리지르기 위해서 공연장에 간다. 아니면 웬 선수들이 와서 특정한 아르페지오나 음을 듣고 싶어한다. 나는 록을 음악이나 미학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록은 차라리 종교적인 행동에 가까운 것이다. 나는 우리가 노보시비르스크의 지하실에서 연주하곤 했던 그런 음악을 하고 싶다. 나는 차라리 공연장에 관객이 10명만 있는 상황에서 공연을 하는 것이 더 좋은데, 왜냐면 그 10명의 관객은 나의 음악을 진정으로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작은 규모의 공연을 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이제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 된 것 같다.-
그롭이 해체된 이유를 설명하는 1991년 5월 인터뷰 출처
다만 소련 말기 권위적이고 부패한 모습을 보여주던 소련 정부에 대한 반대 기조는 버리지 않았으며, 2001년 발매된 앨범 "별똥별(Звездопад)"이 암시하듯[28] 90년대 말 이후에는 자신이 더이상 그 어떠한 정치적 운동과 관계가 없다고 발언하는 등 선을 긋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당시 몇몇 관련자들과 달리 극우 성향은 보이지 않았다[29] .
또한 소련 붕괴 이전에는 단순한 반정부, 아나키즘적의 가사를 담은 노이즈 섞인 펑크 락을 주로 작곡하였으나, 소련 붕괴 이후에는 초월과 투쟁, 그리고 종교적 의미를 가사의 중심으로 사용하는 사이키델릭한 노래들을 작곡하였다. 초기곡만 보면 상상하기 힘들 수도 있지만, 그는 상당한 량의 독서량을 자랑하는 인텔리였다. 10분이 넘어가는 대작 "실험낭자한 러시아의 대평원"이나 "참을 수 없는 가벼운 존재"[30] 등의 곡을 보면 그의 철학이 잘 드러난다."Я — СОВЕТСКИЙ НАЦИОНАЛИСТ. Моя Родина — не просто Россия, идею которой отстаивают и полируют разные серьезные мужи, я не россиянин, хотя и натурально русский (корни мои по отцу — из беднейших крестьян Северного Урала, по матери — из казачьего рода Мартемьяновых). Родина моя — СССР. Россия — это дело частное, отдельное, такое же, как Германия, Франция, Китай и прочие отдельные государства. СССР — это первый и великий шаг вдаль, вперед, в новое время, в новые горизонты. СССР — это не государство, это идея, рука, протянутая для рукопожатия, и слава и величие России в том, что она впервые в истории человечества взяла на себя горькую и праведную миссию прорыв сквозь тысячелетнее прозябание и мракобесие, одиночество человека к великому единению — к человечеству. Я верю, верую во всемирную, вселенскую Революцию и готов воевать за нее и словом, и делом, как это делали мои доблестные предшественники, учителя и соратники от Достоевского до Маяковского, все те, кто всегда был против лжи, равнодушия, упадка, смерти, В 1917 году наша страна сделала первый шаг на пути к истине — да не бывать ему последни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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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비에트 국가주의자다.''' 내 조국은 높은 놈들이 찬양하고 세워놓은 러시아가 아니다. 나는 인종은 비록 러시아인이고, 내 아버지의 조상은 북우랄의 가장 못사는 농부고, 어머니는 마르테먀노프의 카자크에서 왔다지만, 러시아 국민이 아니다. 내 조국은 소련이고, 러시아는 그저 그 부분이며 분리된 것이다.마치 중국이나 프랑스, 독일같은 그외 분리된 정부들 처럼 말이다.
소련은 위대한 도약이자. 한 발돋음이다. 앞으로, 새로운 시대로, 새로운 지평으로, 소련은 - 정부가 아니라. 이데아요, 약속된 손이요, 그리고 러시아로써는 천년동안 이어진 무지몽매함을 타파할 중대한 임무를 인류 역사상 처음올 맡게 되었다는 걸 영광이자 위대함이다,
외톨이였던 인간(러시아)을 - 인류(소련)로써 대통합을 하는 모습으로 말이다. 나는 곧 전세계, 전인류의 혁명이 일어날걸 믿는다. 영원한 혁명을 위해, 나는 입으로도, 행동으로도 싸울 준비가 되어있다. 마치 우리들 선조들처럼, 선생이자, 동반자들인 도스토옙스키부터 마야콥스키까지, 모든, 거짓말과 무관심, 퇴폐, 죽음에 반하는 자들처럼 말이다. 1917년에 우리 나라는 진실을 향한 첫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이 첫 걸음은 마지막 걸음이 되지 않을 것이다!"
2008년 2월 19일, 옴스크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수면 중 심장 질환으로 인해 사망하였다.
그의 장례식에는 상당한 수의 팬들이 따랐으며, 옴스크 동부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의 묘비
3. 음악적 성향
꽤 적지 않은 러시아의 록 뮤지션이 그러하듯 레토프도 초기와 후기로 나눌 수 있다.
우선 초기는 욕설이 난무하며, 가망이 없는 소련 사회에 대한 절망과 무력한 공산주의자들과 온갖 학살과 범죄를 주도한 높으신 분들에 대한 분노, 그리고 슬픔이 담겨있고 녹음을 하고 나서 편집을 하지 않은 듯한 펑크 락의 날카로움과 날 것의 감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소련 붕괴 이후의 후기는 종교적 키워드, 시적 은유, 그리고 앞과 뒤가 모순되는 가사의 요소들을 통해서 마음을 울리는 사이키델릭한 깊음, 그리고 좀 더 부드러우면서도 소리를 지르는 듯한 모습들이 상당히 인상적인 것들로 다가온다.
남자의 '그곳'(욕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4. 들어보기
'펑크 락과 락앤롤(Панк и рок-н-ролл)'. 포세프 시절의 곡.
'우리는 얼음이다(Мы — лёд, 1987)'
네크로필리아(Некрофилия)
'KGB-락(КГБ-рок, 1987)'
'모든 것은 계획대로(Всё идёт по плану, 1989)'
'총알에 대한 철학적인 노래(Философская песня о пуле, 1989)'. 솔로 앨범 수록곡.
]
'펄쩍-펄쩍(Прыг-скок, 1990)'. 그롭 해체 이후 '예고르와 정신줄 놓은 작자들' 시절 곡.[31]
'지점(Солнцеворот, 1997)' 수록[32] .
'어느 바보에 대하여(Про дурачка)' 2006년 라이브
'사이코넛들에게 영광을(Слава психонавтам, 2007)' [33]
'나 없이(Без меня, 2004)'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달라지는 곡의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5. 여담
- 초기 가사만 보면 상상하기 힘들 수도 있지만, 상당한 인텔리였다고 한다. 그의 집에는 상당한 양의 장서가 있고, 니콜라이 고골과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를 가장 좋아했다고 한다. 흥미롭게도 도스토예프스키는 젊은 시절 옴스크에서 유배 생활을 보낸 적이 있다. 실제로 그의 가사를 분석해 보면 수많은 소설, 영화, 시에 대한 레퍼런스가 가득하다.
- 생전 고양이와 선인장을 좋아했다고 한다[34] . 그의 곡 중에서는 자신의 죽은 고양이에게 바치는 노래[35] 도 있다.
- 축구에도 상당한 관심을 가졌고, 죽기 몇 년 전에는 로만 아브라모비치 때문에 첼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러시아 사업 역사상 한 사람이 이렇게 많은 돈을 투자한 건 처음 봤다는 게 그 이유. 그의 유일한 법적 배우자 나탈리야 추마코바 또한 그의 축구에 대한 애정을 공유했는데, 그녀의 최애팀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였다고 한다.
- 원래 이름은 이고리지만, 레토프의 부친에 따르면 이름이 너무 평범해 보인다는 이유로(그리고 이름을 가능한 한 가장 바보같이 짓는다는 이유로) "뒤진 예고르(Егор Дохлый)"라는 예명을 직접 지었다고 한다. 허나 후일 "Дохлый"는 빠지고 예고르라는 이름만 남았다. 앞서 언급했듯 러시아어 특유의 모음 약화로 인해 예고르는 실제로 '이고르'로 발음되지만 이고리와 예고르는 어원부터 완전히 다른 별개의 이름이다.
- 아버지 표도르 레토프는 전직 군인으로[36] 붉은 군대 합창단에서 잠시 노래를 부른 적이 있으며, 형 세르게이 레토프는 유명 재즈 색소포니스트다. 부친의 회고에 따르면 예고르의 첫 베이스 기타는 세르게이가 선물로 준 것이라고 한다.
- 또 다른 시베리아의 여성 가수 야나 '얀카' 댜길레바(Яна "Янка" Дягилева, 1966-1991)와 80년대 동거했으며, 두 사람의 유명세로 인해 예고르는 얀카를 가장 사랑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표도르 레토프의 회고에 따르면 둘의 관계가 그렇게 좋기만 한 건 아니였으며[37] , 오히려 당시 예고르가 가장 좋아하던 여자는 얀카의 친구이자 가수였던 안나 '뉴리치' 볼코바(Анна "Нюрыч" Волкова)였다고 한다. 둘은 90년대까지 동거했으나 좋지 않게 헤어졌고[38] , 레토프의 유일한 법적 배우자는 그라지단스카야 오보로나의 베이시스트이기도 했던 나탈리야 추마코바(Наталья Чумакова)로[39] 이 둘의 관계는 레토프의 사망 때까지 유지되었다[40] .
- 2000년대 이전 라이브에서는 이 영상[41] 같이 춤을 추는 경우도 있는데, 말이 춤이지 얼핏 봐서는 기괴하기 짝이 없는 허우적거림(...)이다. 러시아인들 입장에서도 웃긴 건지[42] 유튜브에서 관련 영상을 찾다보면 이런 기괴한 몸동작을 모아놓거나 여기다가 21세기 고프닉 하드바스(...)를 덧씌운 비디오를 찾아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