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르 초이

 

'''빅토르 로베르토비치 초이
Виктор Робертович Цой
'''

[image]
'''본관'''
원주 최씨
'''출생'''
1962년 6월 21일, 소련 레닌그라드
'''사망'''
1990년 8월 15일(향년 28세)
소련 라트비아 SSR 투쿰스
'''국적'''
[image] 소련
'''소속 그룹'''
제6병동(Палата № 6)(베이스 기타 / 1978~1981)
자동으로 만족하는 자들(베이스 기타 / 1980~1981)
(Автоматические удовлетворители)
가린과 쌍곡선(Гарин и гиперболоиды)[1]
키노(Кино)(리드 기타 및 보컬, 작곡 / 1982~1990)
1. 개요
2. 생애
2.1.1. 불운의 러시아 록음악 단명사
3. 앨범 목록
4. 음악 성향
5. 사생활
6. 사후의 평가
7. 빅토르 초이에 대한 오해
7.1. 크즐로르다 출생?
7.2. 반체제적 가수?
7.3. 한국과의 관계
8. 여담


1. 개요


'''Цой жив'''[2]

초이는 살아있다[3]

풀네임은 빅토르 로베르토비치 초이(또는 최).[4] Виктор Робертович Цой(Viktor Robertovich Tsoi). '''Ч'''ой가 아니고 '''Ц'''ой인 이유는 고려인들의 ㅈ,ㅊ,ㅉ 발음이 현대 기준으로 표준어보다는 문화어에 더 가까웠기 때문이다. 로마자로는 보통 Viktor Tsoi/Tsoy 정도로 적는다.
생전에 러시아 대중음악계의 독보적인 슈퍼스타였으며, 그가 죽은지 30년이 됐음에도 여전히 러시아 대중음악계의 한 획을 그은 인물로 회자되고 있다.

2. 생애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5] 아버지는 엔지니어로 일하던 고려인 로베르트 막시모비치 초이(한국어 이름 최동열)였고, 어머니는 교사로 재직 중이었던 키예프인(현 우크라이나) 발렌티나 바실리예브나 구세바였다. 아버지의 본관은 원주 최씨로, 가계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증조할아버지 최용남(1883~1947)씨가 함경북도 성진시 출신이었고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해서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같은 고려인 여성이었던 안나 바실리예브나 유가이(1896~1985)[6]와 결혼해 빅토르의 할아버지인 막심 페트로비치 초이(한국명 최승준, 1914~1985)[7]가 출생했다고 한다. 이후 1937년에 스탈린에 의해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하며 카자흐스탄의 크즐로르다로 갔고 거기서 나데즈다 김(한국명 김혜정, 1917~2001)과 결혼해 빅토르의 아버지인 로베르트 막시모비치 초이(한국명 최동열, 1938~ )가 출생했다. 외가 쪽 가계를 따라가면 외증조부였던 필리몬 구세프(1880~1939)는 오늘날 벨라루스 동북부의 비텝스크 출신으로 러시아군에 복무했다가 러일전쟁에 참전했고 그 공로로 훈장을 받은 바 있다고 한다. 이후 빅토르의 외할아버지 바실리 구세프(1910~1974)는 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해 '젊은 돌격대'라는 공장에서 대장장이로 일했다고 한다.

외모는 대체적으로 한국계인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 하지만 유일하게 만은 어머니를 닮아 파란색이다. 그래서 서양인인 러시아인들과 동양인인 한국인들 모두에게 이국적으로 느껴진다. 게다가 키도 187cm로 서양인 기준으로도 매우 큰 편에 속했다.
아버지는 자신의 직업을 잇도록 하고 싶어 했지만, 빅토르는 기타를 치거나 노래를 만들어 부르는 것을 더 즐겼다. 하지만 1974년에 레닌그라드의 유명 예술교육기관인 세로프 예술학교(현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문화예술대학)에 들어갔다가 18세 때(즉 고등학생) 당시로썬 불법인 락그룹을 조성했다는 이유로 퇴학 당했다. 종종 초이를 다룬 글에서 '시콜라/쉬콜라(Школа/Shkola)'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그냥 러시아판 중고등학교 혹은 중등 교육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미 퇴학 전부터 초이는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던 록 음악을 비롯한 서구식 대중음악에 푹 빠져있던 상태였다. 당시 소련이 공산독재국가이긴 했으나, 암시장이나 다양한 루트로 서방의 음반(또는 해적판)을 구할 수 있었다고 한다. 특히나 빅토르 초이가 살았던 레닌그라드는 지척에 핀란드가 있던지라 서방의 음반을 구하기가 더욱 용이했다. 특히 비틀즈존 레논을 좋아했다.[8][9][10] 결국 퇴학 후 보일러공으로 일하며 레닌그라드의 여러 록밴드에서 연주를 맡거나 자작곡을 발표하면서 경험을 쌓기 시작했다.
이러던 중 1981년에 당시 러시아 록 음악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던 아크바리움(Аквариум)[11]의 리더 보리스 그레벤시코프(Борис Гребенщиков)가 우연히 빅토르 초이의 연주를 어느 파티 석상에서 듣게 되었고, 즉시 빅토르의 재능을 인정해 당시 레닌그라드의 유일한 합법 록 공연장이었던 '레닌그라드 록 클럽'(Ленинград Рок-Клуб)에서 공식 데뷔 무대를 마련해 주었다. 이후에도 그레벤시코프는 키노의 세션 연주[12]나 프로듀싱에 참여하며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었다. 또 빅토르는 당시 인기 밴드였던 '조파르크/주파르크(Зоопарк)'[13]의 리더이자 한때 아크바리움의 멤버이기도 했던 미하일 '마이크' 나우멘코(Михаил 'Майк' Науменко)하고도 친하게 지냈는데, 이들의 이야기는 영화 레토의 주제이다[14].
이 공연의 성공으로 빅토르는 알렉세이 리빈(Алексей Рыбин, 기타), 올레크 발린스키(Олег Валинский, 드럼)와 함께 독자적인 밴드를 결성하게 되었고, 밴드 이름은 영화를 즐겨 보던 빅토르의 취향으로 '키노#s-4(Кино)'라고 정해졌다. 이듬해인 1982년에 공식 데뷰 앨범인 '45'를 발표했는데,[15] 여기 실린 수록곡 중 '엘렉트리치카(Электричка)'[16]가 개인의 삶을 보장하지 않는 전체주의체제의 부조리를 짧고 우회적으로 비판한 가사로 큰 인기를 얻었다. 가사는 자신은 어젯밤 늦게 잠들어 간신히 일어났으며, 의사에게 가야 할 것 같지만 기차가 자신을 원치 않는 곳으로 데려간다는 내용.
Я вчера слишком поздно лег, сегодня рано встал,
어제 나는 너무 늦게 침대로 갔고, 오늘 아침에는 너무 일찍 일어났어
Я вчера слишком поздно лег, я почти не спал.
어제 나는 너무 늦게 침대로 갔고, 난 잠을 거의 자지 못했지
Мне, наверно, с утра нужно было пойти к врачу,
난 오늘 아침에 의사에게 가 봐야 했어
А теперь электричка везет меня туда, куда я не хочу.
하지만 이제 기차는 나를 내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리고 가네
(간주)
Электричка везет меня туда, куда я не хочу (2 раза).
기차는 나를 내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리고 가네
(간주)
В тамбуре холодно, и в то же время как-то тепло,
열차 플랫폼은 춥지만 동시에 따뜻하지
В тамбуре накурено, и в то же время как-то свежо.
열차 플랫폼은 담배 연기로 가득하지만 동시에 신선한 공기로 가득하지
Почему я молчу, почему не кричу? Молчу.
나는 왜 침묵을 지키고, 고함을 지르지 않는 걸까? 침묵을 말이야
(간주)
Электричка везет меня туда, куда я не хочу (3 раза).
기차는 나를 내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리고 가네
제한적인 허락과 별개로, 기본적으로 록음악을 '서구의 퇴폐적인 산물'이라며 신물나게 까고 있던 소련 문화 당국에서는 이 노래를 매우 위험한 반체제 작품으로 규정했고, 공공 장소에서 공연하는 것을 금지해 버렸다. 그럼에도 앨범은 매우 빠른 속도로 팔려나가 소련 젊은이들에게 파급되었고, 레닌그라드 록 클럽에서 열린 콘서트에서는 '나는 나의 집을 선언한다...(비핵화 지대로) (Я объявляю свой дом...(безъядерной зоной))' 라는 한층 노골적인 반전/반핵 메시지를 담은 노래를 발표해 화제가 되었다.[17]
이어 1984년 발매된 두 번째 스튜디오 앨범 '캄차트카의 지배인'[18]에서는 이후 라이브와 후속 앨범들에서도 자주 재편곡되어 등장하는 대표작 '마지막 영웅(Последний герой)'이 인기를 얻었고(1번 트랙), 색소폰이나 첼로, 키보드 등의 세션 악기를 적절히 가미해 밴드의 소리 영역을 확장시켰다.
각각 1985년1986년 발매된 후속 앨범들인 '이건 사랑이 아냐(Это не любовь...')와 '밤(Ночь')'도 큰 인기를 얻었지만, '키노'하면 떠오르는 최고의 대표작은 1988년 발표된 다섯 번째 스튜디오 앨범인 '혈액형(группа крови)'이었다. 동명의 타이틀 곡은 겉보기에는 그냥 전쟁 가요 정도였지만, 실은 당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침체기를 맞고 있던 소련의 현실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던 곡이었다[19] .
소련 정부에서는 일체의 공적 대응을 자제하며 애써 무시했지만, 이 앨범은 굉장한 인기를 끌어 심지어는 사미즈다트[20]처럼 카세트 테이프로 대량 복제되어 소련 전역에서 돌아다닐 정도였다. 다만 이 때문에 저작권이 완전히 무시되어[21], 키노 멤버들이 손에 쥔 돈은 그야말로 극소수였다고 한다.
같은 해에는 라시트 누그마노프(Рашид Нугманов) 감독의 '이글라(Игла. 바늘이라는 뜻의 러시아어)'라는 영화#에도 주연으로 출연했는데, 체제와 인습에 냉소적인 반항아 스타일의 주인공 모로(Моро)를 연기해 호평을 받았다.
'혈액형'에 이은 후속 앨범인 '태양으로 불리는 별(Звезда по имени Солнце)'#에서는 더욱 묵직한 록 사운드를 선보이면서 인기몰이를 했는데, 1990년에 모스크바에 위치한 러시아 최대 경기장 루즈니키 스타디움에서 대규모 단독 콘서트를 열면서 최절정을 맞이했다. 이 때 경기장에 모여든 관중들은 공식 집계로 62,000여 명에 달했고, 심지어 모스크바 올림픽 때나 볼 수 있었던 성화까지 점화되는 등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 이벤트를 연출했다고 한다.

2.1. 사망


1990년 8월 15일, 라트비아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차(모스크비치 알레코)를 타고 낚시 여행을 가다 버스(이카루스 250 빨간색 모델)[22]와 충돌해 현장에서 사망했다[23]. 향년 28세. 당시 아들이었던 사샤와 같이 갈 예정이었으나, 자던 사샤가 일어나지 않아 혼자 낚시 여행을 갔기에 사샤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 날 모스크바의 아르바트 거리(house no. 37의 벽)에 '오늘 초이가 죽었다(Сегодня погиб Виктор Цой)'라는 문구가 검은색으로 쓰여졌으며, 이 아래 '초이는 살아있다(Цой жив!)'[24]라는 말이 덧붙여지며 일명 '초이 벽(Стена Цоя)'이 만들어졌다[25]. 현재 이곳은 키노 팬들의 성지와 더불어 만남의 장소로 취급받고 있으며, 이 곳을 방문할 때는 아래에 위치한 재떨이에 부러뜨린 불 붙인 담배를 두고 가는 것이 전통이다.[26]
이후 키노는 해산을 선언했으며, 초이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보고슬로프스코예(Bogoslovskoe)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빅토르 초이의 입관식, 1990년 08월 19일[27]
초이의 죽음에 KGB가 관여되었다는 의혹이 있다. 여러가지 정황상 케네디 암살과 더불어 정보기관과 관련되 있다는 음모론이 가장 신빙성 있게 여겨지는 사건중에 하나다. 빅토르 최 의문사 사건 항목 참조.

2.1.1. 불운의 러시아 록음악 단명사


희한하게도 이 시절 레닌그라드 투소프카를 포함한 러시아 록 음악가들은 단명하거나 러시아를 떠나버린 케이스가 꽤 되며, 밴드 또한 해체 및 멤버 교체가 잦은 편이었다. 심지어 이런 사건들이 대부분 러시아 붕괴 이후인 1990년대에 일어났기 때문에, 러시아 록 팬들은 이 시기를 참 암담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 마이크 나우멘코 : 뇌졸중으로 1991년 사망.
  • 안드레이 '스빈' 파노프(Андрей 'Свин' Панов)[28]: 빅토르와 마이크의 동료였던 레닌그라드의 펑크 락 음악가. 1998년 복막염 수술 중 의료사고로 사망[29]. 영화 '레토'에서 씬 스틸러로 등장했는데, 텔냐시캬 입고 뾰족한 머리를 가진 그 사람 맞다[30]
  • 알렉산드르 바실라초프(Александр Башлачев): 러시아 바르드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평가받는 음악가[31]. 1988년 아파트 9층에서 떨어져 투신자살. 예카테린부르크 출신이지만, 레닌그라드를 오가면서 활동했기에 레닌그라드 투소프카에 같이 포함하는 경우가 많다.
  • 게오르기 오르다노프스키(Георгий Владимирович Ордановский): 레닌그라드의 락밴드 '로시야녜(Россияне)[32]'의 리더. 1984년 밴드 멤버들과 신년 축제를 즐기다 행방불명되어 지금까지도 생사가 파악되지 않고 있다[33]
  • 얀카 댜길레바(Янка Дягилева): 러시아의 여성 가수. 1991년 2월 노보로드니코보(Новородниково0 역에서 4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이냐(Иня) 강에서 익사체로 발견.
  • 이고리 '예고르' 레토프(Игорь 'Егор' Летов)[34]: 시베리아 쪽 옴스크에서 활동한 노이즈 펑크 락 음악가. 독실한 사회주의자였는데, 이 사회주의라는 게 소련 민족주의적 색체가 가미된 등 당시 소련 정부의 사회주의와는 어딘가 거리가 멀었기에 소련 말기 3개월 간 정신 병동에 수감된 적이 있을 정도로 어딘가 '똘끼'가 보였던 인물. 2008년 수면 중 심부전증으로 사망.
  • 유리 '호이' 클린스키흐(Юрий 'Хой' Клинских): 보로네시의 펑크 락 밴드인 섹토르 가자의 리더이자 보컬. 2008년 갑작스럽게 사망. 사인은 간암.
  • 미하일 '고르쇽' 고르셰뇨프(Михаил 'Горшок' Горшенев)[35]: 레닌그라드의 호러 펑크 락 밴드인 카롤 이 슈트의 원년 멤버이자 리드 보컬. 2013년 헤로인을 포함한 다수의 약물 중독으로 사망. 그의 사망으로 밴드는 해체되었다가 2014년 '북양 함대(Северный Флот)'라는 이름으로 부활.
  • 바실리 슈모프(Василий Шумов): 모스크바 출신의 락밴드 첸트르(Центр)[36]의 리더. 미국으로 이주했지만 2009년 다시 러시아로 돌아왔으며, 최근에는 보르지킨처럼 푸틴과 극우파를 비난하는 행동을 하고 있다.
  • 아크바리움(Аквариум): 레닌그라드의 락밴드이자 레닌그라드 투소프카의 대선배격 존재. 1984년에 녹음한 '주야평분시(Равноденствие)' 앨범 이후 그룹 내에서 분열이 일어나고, 이후부터는 보리스의 솔로 프로젝트에 가깝게 변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실상 밴드가 해체된 상황[37].
  • 알리사(Алиса): 레닌그라드의 하드 락 밴드. 원래 스뱌토슬라프 자데리(Святослав Задерий)가 리더였는데 이후 들어온 콘스탄틴 킨체프(Константин Кинчев)와 갈등을 빚다 리더가 킨체프로 바뀌었고, 자데리는 밴드를 나갔다가 이후 사망했다. 일단 밴드 자체는 지금도 잘 활동하고 있다.
  • ДДТ: 원래 러시아 우파(Уфа)에서 결성되었는데, 1986년 리더이자 결성자였던 유리 솁추크(Юрий Шевчук)가 가족 전체와 레닌그라드로 이주한 뒤 동명의 밴드를 다시 만들어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으므로 레닌그라드 투소프카에도 끼워주는 편이다. 여기는 아예 밴드 자체가 바뀌었으며 멤버 변동이 심한 편이다.
  • 미하일 보르지킨(Михаил Борзыкин): 레닌그라드의 락 밴드 '텔레비조르(Телевизор)'의 원년 멤버이자 리드 보컬. 이 밴드는 콘서트 도중 경찰과 정치 깡패들의 습격을 받아 콘서트가 중단된 일을 겪었을 정도로 소련의 체제에 반항적이었으며, 정치적인 색채가 강해서 레닌그라드 투소프카 내에서도 다소 겉돌던 왕따에[38] 음악 성향 또한 당시 레닌그라드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일렉 쪽에 가까웠다는 평가를 받는다[39]. 1990년대 보르지킨과 다른 멤버들 간의 내분이 일어나 일시적으로 해체된 뒤 보르지킨이 다른 멤버들을 모아 다시 재결성하였다. 보르지킨은 지금도 푸틴과 극우파 무리를 비판할 정도로 강한 정치색을 유지하고 있으며 노래 또한 다를 바 없다. 그 예로, 2010년에는 자신들의 곡인 '니 애비는 파시스트 새끼다(Твой папа - фашист)'를 헌정했는데 제목에서 감이 오듯 가사가 딱 푸틴을 욕하는 내용이다(다만 곡 자체는 푸틴 집권 전에 만든 곡이다).

3. 앨범 목록


  • 스튜디오 앨범
    • 45 (1982)
    • [40]
    • 캄찻카의 지배인 (Начальник Камчатки, 1984)[41]
    • 이건 사랑이 아냐... (Это не любовь..., 1985)[42]
    • 밤 (Ночь, 1986)[43]
    • 혈액형 (Группа крови, 1988)
    • 태양이라는 이름의 별 (Звезда по имени Солнце, 1989)
    • 키노 (Кино, 1990)[44][45]
  • 데모 앨범
    • 46 (1983)[46]
  • 기타 앨범[54]
    • 마지막 영웅 (Последний герой, 1989)[47]
    • 알려지지 않은 노래들 (Неизвестные песни, 1992)[48]
    • 이 세상의 이야기 (История этого мира, 2000)[49]
    • 영화 속의 키노 (Кино в кино 혹은 В кино, 2002)[50]
    • 마지막 녹음 (Последние записи, 2002)[51]
    • 첫 번째 녹음: 가린과 쌍곡선 (Первые записи, Гарин и гиперболоиды, 2003)[52]
    • 아타만 (Атаман, 2018)[53]

4. 음악 성향



그의 대표곡이라 할 수 있는 혈액형.

라이브 영상
해당 영상의 곡은 게임 GTA4의 차량 라디오 음악으로도 등장했다.
가사의 신랄한 체제 비판 외에 음악도 당시 소련의 사정에 비추어 보면 대단히 진보적이고 전위적인 모습으로 주목받았는데, 미국유럽에서 인기를 끌던 뉴웨이브, 포스트 펑크 계열 음악의 어법을 대단히 빨리 도입한 것이 즉효였다. 물론 서구에서 받은 강한 영향 외에도 러시아 포크 음악의 어법이나 블라디미르 비소츠키 등의 대선배들로부터 이어받은 가사 운율의 고전적인 분절법 등 전통적인 요소도 중시되었다.
다만 록이라고는 해도 서구의 그것과 달리 강렬한 기타 사운드나 화려한 드러밍, 고음역을 넘나드는 보컬 톤 등의 자극적인 요소[55] 는 생각보다 그다지 많지 않은 편이다.(뉴웨이브라는 장르 자체가 그런것과는 거리가 좀 있기도하고) 그래서 서구 록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소프트 록이나 포크 록 정도의 임팩트밖에 느낄 수 없다는 이들도 종종 있다.
본래 걱정 없는 낙관적인 백수가 노래하듯 밝은 톤을 즐겨 사용했으나, 1988년 혈액형 (Группа Крови) 앨범 전후를 기점으로 어두운 톤이 주류가 되어갔다. 그럼에도 듣기에 부담되거나 억지로 연기하는 느낌 없이 자유롭게 자신의 감정을 담담히 표현하였기에, 그런 비약적인 변화에도 불구하고 팬들에게 거부감 없이 오늘날까지 고루 받아들여지고 있다. 84년 곡 캄차트카 (Камчатка)와 88년 곡 혈액형 (Группа Крови)을 비교해 보면 차이가 느껴진다.
하지만 서구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던 전체주의 사회의 탄압 속에서 이 정도로 정제되면서 강한 메시지를 전해준 밴드는 극히 드물었고, 그 중에서도 이 만큼 대중적인 성공을 거둔 밴드는 없었기 때문에 소련 붕괴 후에도 러시아 음악사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때문에 위에도 언급한 전설의 음유시인이자 배우였던 비소츠키나 프리 재즈를 소련에 도입하고 꾸준히 발전시킨 재즈 뮤지션인 뱌체슬라프 가넬린 등과 함께 소련 반체제 음악인의 거두로 평가받고 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지금도 키노를 기억하는 러시아인들은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키노 이전엔 이 땅대중음악이란 것이 없었다. 키노가 오고 나서 소련에 대중음악이 생겼다. 이것이 우리가 아직도 빅토르 초이를 기억하고 사랑하는 이유다."
사족으로 빅토르 초이의 유명세를 모른 채 들어도, 오래된 음악이지만 자극적이지 않아 상당히 듣기 좋은 이지리스닝에 속한다. 유튜브에서 리믹스 돼서 돌아다니기도 하기 때문에 ' 어 이걸 이 사람이 불렀구나 ' 라고 느낄 곡도 꽤 있는 편.

5. 사생활


록 스타로 일생을 화려하게 살았다는 인식을 갖기 쉽지만, 실제 사생활은 질박(質樸)하기 그지 없었다고 한다. 인기의 절정을 누리던 시기에도 여전히 레닌그라드의 아파트 단지에 있는 작은 보일러실에서 살며 간신히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앨범을 발매해도 문화 산업을 국가가 통제하고 있는 이상[56] 해적판에 가까운 비공인 음반인 데다가 그마저도 카세트 테이프로 찍어낸 불법 복제본이 횡행하고 있어서 수중에 들어오는 돈도 매우 적었다고 한다.
공식 데뷔 무대를 치렀던 1982년에는 마리안나라는 여자와 동거하기 시작했고, 1985년결혼해 같은 해 아들인 알렉산드르(애칭 사샤)가 태어났다.[57][58] 다만 1987년 별거하고 영화 촬영 도중 만난 영화 평론가 나탈리아 라즈글로바랑 사귀게 되었지만 사샤와 교류는 계속했다고 한다. 빅토르는 아들을 귀여워했고, 죽음의 원인이 된 낚시 여행 때도 데려가고 싶어했다고 한다. 그런데 사샤가 잠에서 깨질 않아서 빅토르 혼자만 출발한 덕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전 부인 마리안나는 빅토르보다 3살 연상인 1959년생인데 안타깝게도 그녀 역시 2005년에 겨우 46세의 나이로 타계했다고 한다.
빅토르의 어머니인 발렌티나 구세바 씨도 2009년에 72세의 나이로 타계했다고 한다. 다만 아버지 로베르트 최 씨는 현재까지도 생존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안타깝게도 이후 가난하게 살다 2010년경 병원 수술비 문제로 집까지 팔아야 하는 상황에 처하자 후원을 위해 러시아 TV에 나온 적이 있었는데, 이때 엄청난 후원금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2018년 4월에는 아들의 작품 재산권 문제를 놓고 소송을 했는데 승소했다는 기사를 통해 근황을 전했다.기사
아들 알렉산드르 빅토로비치 초이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음악 활동을 하고 있다. 위에서 언급된 샤샤란 인물이 바로 이 인물이다.

6. 사후의 평가


그 당시만큼은 아니겠지만, 지금도 러시아의 록가수 중에서는 아직까지 사랑받고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묘소에는 무보수 묘지기를 자처하는 극성 팬들을 늘 볼 수 있다고 하며, 거리의 건물 외벽 곳곳에서도 빅토르 초이나 키노와 관련된 그래피티를 접할 수 있다고 한다. 심지어 빅토르 초이 사망 소식이 알려진 후 충격에 빠진 몇몇 팬들이 '''투신자살'''을 하기도 했다 카더라. 또 영혼결혼식을 올리거나, 그가 꿈속에 나와서 시를 읊어준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모스크바에는 대중가요에 많이 언급되는 아르바트 거리에 아예 빅토르 초이의 팬들을 위한 낙서용 외벽이 있어서, 빼곡하게 쓰여진 낙서들을 볼 수 있다. 사후 10주기였던 2000년에는 러시아의 후배 록 뮤지션들이 키노의 히트곡들을 모아 녹음한 트리뷰트 앨범을 발표했고, 6월 항쟁 이후 공산권 국가의 문화예술 규제가 완화된 뒤에는 한국에서도 한대수윤도현 같은 음악인들이 키노의 노래를 한국어로 번안해 부르기도 했다.
2020년 시점에서도 유튜브에서 빅토르 초이의 음악에 달린 댓글을 보면 어떻게 수십 년 전 뮤지션한테 이 정도로 댓글이 달리나 싶을 정도로 키릴 알파벳으로 적힌 추모 댓글이 달린다. 더 놀라운 건 번역기를 돌려서 읽어보면 옛날 올드팬이 아니라 유튜브에서 듣고 유입된 신규 팬도 상당수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신규 팬 유입에는 동유럽산 게임 스토커메트로 2033에 빅토르 최의 곡들이 들어간 것과 큰 관련이 있기도 하다. 수십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서 현 세대에게도 어필할 수 있다는 음악성을 갖췄다는 점이 놀랍다.
한국에서도 1995년에 KBS 일요스페셜에서 그의 일대기를 다루면서부터 이름이 알려지자 삼성 나이세스[59]나 부곡무역 같은 음반사에서 키노의 노래를 수록한 베스트 앨범이나 정규 앨범 몇 종류를 1990년대 중반에 라이선스로 제작해 발매하기도 했지만, 러시아어 전공자가 아닌 이상 이걸 온전히 이해하는 대중음악 애호가들이 극히 적은 탓도 있고 고립된 나라에서 독자적으로 발달된 음악의 희박한 시장성도 있었는지 매상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고 한다. 후새드. 게다가 당시 키노의 음악은 사실상 포스트 펑크에 속했는데, 펑크 록이 제대로 수입되지 않은 당대의 상황에서 매우 생경한 음악이었던 점도 원인으로 작용했다.[60]
빅토르 초이 탄생 50주년을 맞아 2012년에는 미공개 곡을 수록한 '아타만(ataman)' 앨범이, 2017년에는 러시아 락 음악가들의 헌정곡이 담긴 '우리는 영화관을 떠났다(Мы вышли из Кино)'와 '55'가 발매되었다.

탄생 55주년을 맞아 제작한 '태양이라는 이름의 별(Звезда по имени Солнце, 1989)' 뮤직비디오. 무려 러시아 최대 포털 사이트인 얀덱스가 제작을 맡았으며,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음악가, 배우, 학생, 행인들과 찍었다고 한다. 초이와 관련된 몇 가지 상징이 있는데, 자신이 빅토르 초이에 대해 좀 안다 싶으면 찾아보자. 정답은 코멘트에 적혀 있으니 구글 번역기 돌려서 확인해보면 된다. [61]
그러나 그때 의문사 하지 않았어도, 러시아의 높으신 분들에게 미움 안살지는 미지수인 인물이기도 하다.
2018년 빅토르 초이의 일생을 다룬 영화 레토가 러시아에서 제작, 개봉되었고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경쟁후보작으로 출품되었다. 빅토르 초이는 한국인 배우 유태오가 연기했다. 같은 해 개봉된 보헤미안 랩소디(영화)와 미묘하게 비슷한 점이 있다. 각각 소련과 영국의 소수민족 출신인 보컬의 전기 영화이고, 둘 다 요절했다는 공통점도 있다.
다만 두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확연히 다른데, '보헤미안 랩소디'가 단순히 프레디 머큐리의 일대기를 다룬다면, '레토'는 빅토르와 마이크라는 스타가 아니라 80년대 레닌그라드의 언더그라운드 음악계에 더 초점을 맞춘다는 느낌이 강하다. (그리고 러시아에 대한 우회적인 비판도 덤) 하지만 한국에서는 대부분의 유튜브 영상에서 볼 수 있듯 단순히 "오오 고려인 락스타 오오" 정도로밖에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 문제.

2020년 8월에 벨라루스의 시위 현장에서 벨라루스 시민들이 끌려가는 상황속에서 빅토르 초이의 노래 '변화'를 불렀다.#
빅토르 초이의 사망 30주기를 맞이한 러시아에서 그의 죽음을 다룬 영화 개봉을 둘러싼 논란이 뜨겁다.#
사후의 평가에 대해 정리하자면 러시아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는 것을 넘어서 소련이 해체하고 21세기가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모두에게 사랑받는 인물이라 할 수 있겠다.

7. 빅토르 초이에 대한 오해



7.1. 크즐로르다 출생?


카자흐스탄의 크즐오르다 출생이라는 말이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는데[62], 크즐로르다는 초이의 아버지가 태어난 곳이다. 초이는 레닌그라드 출생이고 레닌그라드에서 활동했다.
[image]
초이의 여권. 왼쪽 면에 보면 '1962년 06월 21일 레닌그라드 출생'이라고 적힌 걸 확인할 수 있다[63].

7.2. 반체제적 가수?


흔히 빅토르 초이를 소련 반체제의 상징으로 꼽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일종의 편견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초이 본인이 "자신의 음악은 정치와 별 상관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Q: Отражаются ли как-то на вашем творчестве перемены в общественной жизни?

(사회적 삶의 변화가 당신의 예술세계에 어떻게든 반영되고 있다고 생각하나요?)

A: А как они могут отражаться? Я же не певец социального протеста, не пишу песен "на злобу дня".

(그게 어떻게 반영된다는 건가요? 저는 무슨 사회운동을 하는 가수도 아니고, '원한의 시대'[64]

에 대한 노래를 쓰지도 않는데요.)

- '젊은 레닌주의자 신문' 1985년 4월 인터뷰

초이의 지인인 영화감독 라시드 누그마로프도 초이 사후의 QnA에서 이와 비슷한 증언을 했다.

Q: Могли бы Вы сказать, что Цой избегал разговоров о политике или что политика его интересовала мало?>

(빅토르 초이가 의도적으로 정치 화제를 피했는지, 아니면 정치에 관심이 없었는지 말해주실 수 있나요?)

A: Я бы сказал так: политика не входила в круг главных интересов Виктора. Но сказать, чтобы она вовсе его не интересовала, не могу. Слишком разносторонним человеком был Виктор для столь однозначного утверждения.

(정치는 전반적으로 빅토르의 중요한 관심사는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겠군요. 그러나 아예 관심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한 가지 주제로만 한정짓기엔 빅토르는 너무 다재다능한 사람이었으니까요.)

번역의 출처는 여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러시아 및 해외의 팬들 사이에서도 널리 퍼진 일종의 '전설'이다.
사실 러시아의 반문화인 투소프카(тусовка)[65] 자체가 상당히 비정치적인 편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념이나 신념을 투사한 구체적인 메시지보다는 개인의 행복을 방해하는 억압적인 체제에 냉소적이었다[66] 고로 '구 소련 국민들의 정신을 각성시키고 자유를 위해 투쟁한 가수' 같은 말에 대해서는 이견의 여지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오해는 키노의 대표 앨범인 '혈액형', '태양이라는 이름의 별', '검은 앨범'들이 전부 후기 앨범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초이의 작품은 초기와 후기가 상당히 다른데, 상대적으로 직설적이고 가벼운 어쿠스틱 기타가 주가 된 초기 곡들과 달리 후기 곡들은 가사들이 모호해 해석의 여지가 갈리는데다 음악 및 초이의 보컬 자체도 상당히 중후해진다. 잘 알려지지 않은 초기 앨범이나 라이브 판을 들어보면(특히 45, 46 앨범) 소탈한 20대 '백수'로서의 초이의 면모를 잘 찾아볼 수 있다. 영화 레토 역시 이런 빅토르의 초창기 모습에 집중하고 있다.
하지만, 빅토르는 '나는 나의 집을 비핵화지대로 선언한다'같은 반체제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가득한 노래도 분명히 냈기 때문에 정확한 건 알 수 없다. 사실 정치 성향을 떠나서 연예인들은 정치 자체에 얽히는 것을 꺼리는 경향이 있으므로[67], 당장 정치적인 것을 내포하지 않은 예술가들의 작품에도 풍기문란이나 체재전복기도 같은 말도 안되는 이유를 덧붙여 탄압했던 한국의 70년대 군사정권을 생각해보면 답이 나온다. 빅토르 초이가 반체제적 가수라는 게 편견인지 아닌지는 알아서 판단하길 바란다.

7.3. 한국과의 관계


한국에서는 초이의 아버지가 고려인이라는 이유로 '한국인 가수' 등등 한국과 연결하려는 시도가 많이 보이는데, 어머니는 우크라이나인이기 때문에 동구권의 팬들은 이런 시도에 거부감을 느낀다. 정체성과 관련된 그의 메모나 일기가 발견되지 않는 이상, 그는 다민족 국가인 러시아인의 정체성[68]을 가지고 살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일단 그는 '''한국인이 아니라 러시아인'''이다.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고려인으로 러시아에 정착한 게 맞지만, 어머니는 엄연한 우크라이나인이었고 빅토르 본인은 당시 소련국적이었고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은 희박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현재 그와 비슷한 처지인 많은 고려인들 또한 한국을 모국으로 생각하는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다.[69][70] 그 근거 중 하나로, 그의 노래에서는 수많은 비유와 은유들이 나오지만, 그 중 한국과 관련된, 혹은 민족주의적 가사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러므로 빅토르 초이는 자신의 뿌리에 대해 고민한 한국계 러시아 가수가 아니라 "노래를 좋아하고, 그 노래를 통해 자신이 동경하는 세계와 자유, 그리고 소련의 변화를 외친 소련의 청년 가수"라고 보는 게 맞다.
다만 이에 대한 반론도 있다. 80년대 후반 잠시 그의 홍보 담당자이자 프로듀서였던 유리 아이젠슈피스(Юрий Айзеншпис)는 회고록에서 초이가 모스크바에 위치한 한 고려인 식당의 단골이었으며, 그 식당에서 초이는 시원시원한 성격에 '한국계의 대표'로 여겨졌기에 매우 환영받았다고 서술했다. 또한 키노는 전국적 인기를 얻기 전에 투어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까지는 슈퍼스타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곳곳의 고려인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는 증언도 있다. 고려인들의 숙소를 애용했는데, 돈을 받지 않으려고 했다고. 고로 최소한 당시 소련의 고려인들은 그를 영웅으로 생각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또한 초이의 가장 가까운 지인 중 하나인 라시드 누그마노프의 Q&A에 따르면 초이는 자신의 한국 혈통에 관심이 있었으며[71] 한국 음식 요리하는 걸 좋아했다고 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한국은 물론 전반적인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음악 커리어를 만들고 싶어하는 욕심이 있었으며, 그 일환으로 일본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사망 당시에는 일본의 국민 밴드 사잔 올 스타즈와 조인트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으며, 한국 공연 역시 계획이 있었다고 한다. 출처
[image]
1990년 5월 5일 모스크바 소재 올림픽 경기장(Олимпийском)에서 열린 키노의 공연 사진. 일본(日本)이라는 한자어와 일장기 문양이 새겨져있는 셔츠를 입고 있는 빅토르의 모습이다. 부르던 노래는 '혈액형'이며, 장난삼아 '반자이'[72]를 외치는 영상이 존재한다. 안타깝게도 빅토르 본인이 사망한 지 오래라 이에 대한 확답은 찾기 힘들 것이다.

8. 여담


  • 빅토르 초이의 전기(Виктор Цой. Последний герой современного мифа)에 따르면, 1983년(20대 시절)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이 한창일 당시 병역기피를 위해 일부러 정신병동에 입원한 전력이 있다. 당시 러시아에는 외모가 동양인스러우면 아프가니스탄에 끌려가기 쉽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기에(진위 여부는 밝혀지지 않음) 이런 선택을 한 것으로 추측된다. 초이 본인 또한 군생활을 하며 락앤롤을 손에서 놓고 싶지 않았기에 징병을 기피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2주 동안 입원 예정이었던 정신병동 입원은 1달로 늘어났고, 병원 내에서 여럿 좋지 않은 경험을 겪었는데, 이는 초이의 음악세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알렉세이 리빈이나 마리아나 초이 등이 증언한 바 있다. 실제 그의 1집 앨범과 2집 이후 앨범의 가사는 큰 차이를 보인다.[73] 이로 인해 당시 다니던 회사에서 해고당하고, 청소부나 야채 장수, 보일러공 등 여러 직업을 거치며 생활비를 벌게 된다.
  • GTA 4 에 등장하는 가상 방송국인 블라디보스토크 FM에서[74] '혈액형'의 영어판이 나온다[75]. 그런데 발음 때문에 러시아어로 들리며 몇몇 단어는 실제로 러시아어다. 이 노래가 한국계 러시아인이 부른 영어 노래라는 걸 안 한국 게이머들의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지금은 저작권 만료로 나오지 않는다.
  • 전(前) 대한민국 쇼트트랙 국가대표이자 현(現) 러시아 쇼트트랙 국가대표인 안현수가 러시아로 국적을 바꾸면서 빅토르 초이의 이름을 따서 빅토르 안으로 개명했다. 소치 올림픽 기간 중 국내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승리를 뜻하고, 러시아에서 대표적인 한인인 빅토르 초이를 기리기 위해 빅토르라는 러시아 이름을 골랐다고 한다. 더불어 빅토르 초이도 새삼스럽게 재조명되고 있다. 빅토르 안은 2017년 10월 29일자 슈퍼맨이 돌아왔다에서도 아내와 딸과 함께 모스크바 붉은 광장의 빅토르 초이 추모 벽화가 그려진 곳을 방문하였다.
  • 김경진의 소설 데프콘 한중전쟁편에 암호문으로 나오는 "내가 잠들면 누가 밤을 노래하리."는 키노의 곡 '전설(Легенда)'의 가사에서 차용한 것이다.[76] 그러나 이는 오역인 듯 하다. 원래 가사는 "А кто будет петь, если все будут спать?"로, 해석하면 "모두가 잠들면 누가 노래하리"에 가깝다.
  • 활동 당시 ДДТ[77]의 리더 유리 셰프추크((Юрий Шевчук)와 사이가 나빴다는 설이 있는데[78], 지인 라시드 누그마로프는 이 설에 대해 근거가 없다며 일축했다.
  • 대체역사물인 일 베티사드에서는 '브루노 문'이라는 이름으로, 비틀즈 패러디로 추정되는 NoMoreEagleZ라는 밴드의 멤버라고 되어있다. 이 세계에서는 소련 대신에 적백내전에서 승리한 백군 러시아계열의 또 다른 독재국가인 SNOR에 저항하는 밴드라고 나와있다. 이름으로 봤을때 이쪽 역시 고려인이라고 추정된다. 재미있게도 1980년대 이후 "브루노는 죽었다(Bruno is Dead)"라는 음모론이 돌고 있는데, 비틀즈의 폴 매카트니 사망설을 패러디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사고로 사망하지는 않았지만, 밴드가 해체된 2000년대 이후에는 이혼하고(새로 뜬 여배우와 결혼) [79], 골프도 하고, 상당한 부동산도 소유하고, 정계에 발을 걸쳤다는 (어찌 보면 타락했다고 볼 수 있는) 뒷이야기가 있다.
  • 1996년에 한국에서 빅토르 초이의 삶을 다룰 영화를 제작하려고 했었으나 결국 엎어졌다. 감독은 정지영(부러진 화살감독}. 그리고 빅토르 초이 역할을 가수 신성우가, 그를 취재하는 기자역할을 당시 은행나무 침대로 스타배우 반열에 오른 진희경이 맡아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삼성영상사업단에서 제작비를 지원하겠다고 했으나 결국 백지화가 되었다.
  • YB는 1999년 발매된 4집 '한국 록 다시 부르기'에서 '혈액형'을 한국어로 번안#하여 앨범에 실었고, 2010년에는 일렉트로니카 팀인 RRM과의 합작 앨범에서 번안이 아닌 원어로 그대로 불렀다.# 팬들 사이에서는 후자가 조금 더 유명한 듯. 2014년 윤도현 솔로 콘서트에서 팬 앵콜 때문에 갑자기 부르게 된 후 한동안 락 페스티벌 같은 곳에서 불러 보기도 했지만 러시아어의 벽을 넘지 못하고 일반인들에게는 어필 실패로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간주 동안 화면에 나오는 빅토르 초이의 사진에 경의를 표하는 퍼포먼스는 인상적이었다는 평.[80]
  • 2014 소치 동계올림픽 선수입장 BGM 중 하나로 '여름이 끝난다(Кончится лето - '검은 앨범'에 수록)'와 '혈액형(Группа крови - '혈액형'에 수록)'이 사용되었다.
  • 영화 스탈린그라드 엔딩 크레딧 첫부분 BGM은 '전설(Легенда)'을 젬피라(Земфира)라는 뮤지션이 리메이크한 버전이 나온다.

  • 게임 스토커 콜 오브 프리피야트 의 모드 중 하나인 미저리에서 스카드보스크와 야노브 역의 라디오에서 키노의 노래가 여럿 흘러나온다. 동구권 게임 특유의 분위기와 잘 맞아 엔딩을 볼때 쯤이면 자신도 모르게 흥얼거리고 있다.
  •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그의 죽음에 대한 의혹들과 죽음에 대한 굉장히 수상한 점들에 대해 설명해준다.
  • 디시인사이드 빅토르 최 마이너 갤러리가 있다. 주로 대부분 부재중인 빅토르 초이 카페의 자료를 정리하고 있으며 빅토르 초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 빅토르 초이와 동시대에 중국에서도 최건이 록 음악의 선구자로 큰 활약을 하였다.
  • 빅토르 초이, 나아가 1980년대 러시아 록 씬에 대한 영화가 2018년 칸 영화제에서 공개되었다. 제목은 레토이며[81], 스튜던트로 유명한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82]가 감독하며 유태오가 초이 역을 맡는다.
  • 포스트 아포칼립스 게임 메트로 엑소더스에서는 라디오를 틀어서 노래를 들을수 있는데, 빅토르 초이의 노래가 여러 곡 나온다. 위 게임들 특유의 분위기와 꽤 잘 어우러진다. 한국 유저들도 노래가 좋아서 찾아보니 빅토르 초이였다는걸 안 사람도 있고 빅토르 초이를 몰랐던 이들도 이런 쪽으로 유입되기도 한다.
  • 러시아에서 활동하는 고려인 여가수 아니타 초이(Anita Tsoi)와는 아무 혈연 관계가 없다. 애초에 이 사람의 원래 성씨는 킴(Kim)이다. 초이라는 성씨를 가진 고려인 정치가와 결혼해 성을 바꾼 것.
  • 2019년 튜멘 대학교 연구진이 새로이 발견한 진딧물에 초이의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학명은 trachyoribates viktortsoii 다만 이에 대해 부친 로베르트 초이는 떨떠름한 반응(정확히 말하자면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이 없다. 세상에 무슨 이런 바보가 많은지 원' 정도의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1] 키노의 전신[2] '''초이 쥐프'''라고 읽으며 러시아인들이 빅토르 최를 기릴 때 제일 많이 하는 말이다. 살아있네의 뜻으로 초이의 정신은 영원히 우리 가슴 속에 남아있다라고 의역이 가능할 것이다.[3] 빅토르 초이가 한국계라는 것을 아는 팬들은 이 문장을 한국어 번역기를 돌려 써놓곤 하는데, 주로 '최 살아'라고 번역된다. 유튜브 등지에서 최 살아를 보면 당황하지 말고 이 의미가 있는 문장이라고 생각하면 된다.[4] 한국어 위키백과에는 '빅토르 초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한국인 혈통보다는 러시아인이라는 국적과 발음법을 더 중시한 모양.[5] 종종 카자흐스탄크즐로르다(Қызылорда) 출생이라는 내용이 인터넷에서 보이는데, 빅토르 초이 자신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 로베르트 초이가 그 곳에서 태어났다.[6] 유씨 성을 의미하는 '유가(哥家)'를 러시아식으로 표기한 성씨. 즉 원래 유씨였다는 소리다. 고려인이나 한국계 러시아인 중 성씨가 '-가이'로 끝나면 다 이 쪽이라고 생각하면 된다.[7] KGB에서 근무하며 소령까지 지낸 인물이다. 빅토르가 어렸을 때 부터 그에게 동양 철학을 가르쳐주었고 이는 빅토르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 자신도 시를 잘 쓰는등 예술적 재능이 높았다. 당시 소련 공무원들은 공식적으로 예술 활동을 할수 없었는데, '최민'이라는 가명까지 지어가며 한글시를 쓰기도 했다.[8] 당시 소련의 국가통제의 정도를 따지면 대충 10월 유신 헌법 하의 박정희 체제 정도를 생각하면 된다고 한다. 게다가 글라스노스트/페레스트로이카 시절엔 이런 배척적인 분위기가 많이 완화되었고 단순히 언더그라운드에 머물러 있던 밴드들이 오버그라운드로 나올 수 있었다. 이러한 이야기는 1950~60년대 동구권에 방문한 서유럽 기자들에게 젊은이들이 끊임없이 '''로큰롤 레코드를 구해다 줄 수 있느냐'''를 묻거나 일렉트릭 기타를 만들기 위해 공중전화를 부숴서 전화기 수화기를 훔쳐가는 사건이 빈발했다는 일화에서 드러난다.[9] 결국 이들은 자체 '빽판'을 만들어 듣기에 이른다. 당시 속어로 '갈비뼈(рёбра, 료브라)'라고 불리던 이 빽판의 재료는 (놀랍게도) 병원에서 쓰고 버린 X레이 필름이었는데, 특수 기계에 넣어 가운데 구멍을 뚫고 실제 LP처럼 가장자리를 둥글게 처리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다만 재료가 재료다보니 고작해야 5-10회 재생이 한도였다고 한다. 이 빽판은 이후 카세트테이프로 대체되었다. 키노의 정규 1집 '45'의 수록곡 '당신도 한때는 비트닉이었잖아요(Когда-то ты был битником)'에 등장하는 가사 'Ты готов был отдать душу за рок-н-ролл, Извлечённый из снимка чужой диафрагмы(당신도 한때는 락앤롤에 영혼까지 바칠 정도로 심취해 있었잖아요, 다른 누군가의 횡격막 사진(X-레이 필름)으로 찍어낸 그 락앤롤 말이에요 - 의역)'에서 언급된다.[10] 실제로 소련에서는 이미 1960년대부터 일부 록밴드들이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 중이었고, 1968년에는 모스크바 재즈 페스티벌과 1986년 5월 꼼소몰 위원회 주최로 록 파노라마 '86(Рок-Панорама 86)이라는 페스티벌이 공식행사로(!) 개최되는 등 생각보다 훨씬 자유로웠다.[11] 1970년대 결성한 러시아 록 밴드. 벨벳 언더그라운드 같은 개러지 록과 캣 스티븐스 같은 포크 록에 영감을 받아 시대를 앞서간 음악을 들려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마시나 브레메니(Машина Времени)와 비슷하게 러시아 록 개척자로 꼽히지만, 레닌그라드 투소프카 내 영향력은 아크바리움 쪽이 압도적이었다. 마쉬나 브레메니는 인기는 있었지만 다소 이질적인 선구자 포지션.[12] 1집 '45'나 2집 '캄차트카의 지배인'은 아크바리움 멤버들이 없었다면 녹음을 하지 못했을 것이고, 3-4집에서 인상적인 연주를 보여준 베이시스트 알렉산드르 티토프도 원래 아크바리움 소속이다.[13] 러시아 표기법상 '조파르크'가 맞겠으나 한국에서는 영어로 해석한 건지 '주파르크'로 알려져 있으며(참고로 이 단어는 영어가 아니라 'Зоологи́ческий па́рк'의 축약어이다), '조파르크'라는 표기법은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 실제 발음은 'a'에 강세가 들어가 '자-파르크' 정도이다.[14] 영화가 100% 거짓은 아닌데, 보리스 그레벤시코프나 키노의 초기 멤버 알렉세이 리빈 등은 이 영화에 허구적 요소가 상당하다고 비판했기에 이 영화를 100% 믿는 건 권장하지 않는다. 이 외에 빅토르가 1990년 교통사고로 요절한 뒤 마이크도 1991년 사망했는데(마이크는 1980년대부터 심각한 알코올 중독으로 고생했다), 두 사람을 1년 간격으로 잃은 그레벤시코프는 한동안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한다.[15] 물론 당시 소련에서는 모든 음반 산업을 국가가 통제했기 때문에 사실상 해적판의 형태로 유통되었다. 1980년대 소련에서는 국영 음반사(멜로디야)에서 녹음하지 않은 앨범들의 상업적 판매가 불가능했다. 이로 인해 멜로디야를 통해 유통되지 않은 빅토르, 마이크, 보리스 등의 앨범은 유명세와 상관없이 전부 언더그라운드 음악이었으며 이들의 레코딩은 당시 기준으로도 질이 썩 좋진 않았다. 그런데 웃기게도, 몇 년 뒤 빅토르가 앨범 '밤'을 찍다 영 아니다 싶어 프로젝트를 폐기하자 당시 사운드 엔지니어였던 안드레이 트로필로가 이를 멜로디야로 가져가 좀 손을 본 뒤 발매했고, 이는 무려 20만장이 팔리는 대기록을 세웠다. 그런데 멜로디야 측에서 키노에게 지불한 저작권료는 0루블이었다(...)[16] 한국의 광역전철 개념과 비슷한, 러시아의 대도시 근방을 잇는 전기철도를 가리킨다. 통근용으로 애용된다.[17] 이 곡은 1985년 출반된 세 번째 스튜디오 앨범 '이건 사랑이 아냐...'에서 공식 출반되었으나, (비핵화 지대로)라는 중요한 괄호 제목은 삭제되고 그냥 '나는 나의 집을 선언한다'로 나온다. 다만 가사엔 그대로 나온다.[18] 캄차트카(Камчатка)는 당시 속어로 '머나먼 곳', '보일러공'을 일컫는 단어였는데, 빅토르 초이가 보일러공으로 생계를 유지한 데서 착안한 자조적인 타이틀이다. 이 외에 1967년 소련 코미디 '추코트카의 지배인'에서 제목을 가져온 것이기도 한데, 추코트카나 캄차트카나 둘 다 소련의 변방에 위치한 반도이다. 당시 초이가 일하던 곳은 현재 '캄차트카 하우스'라는 이름의 술집이 되어 있는데 관련 굿즈도 전시되어 있고 매일 공연이 이루어진다.[19] 베트남 전쟁을 비판한 CCR의 곡 Run Through The Jungle과 그 맥락이 유사하다.[20] Самиздат(Samizdat). 소련 체제 하에서 출판을 금지당한 문인들이 지하에서 몰래 찍어내(주로 타자기로) 돌리던 유인물 혹은 출판물을 일컫는다.[21] 당장 '밤' 앨범만 해도 당시 소련의 유일한 국영 음반사 멜로디야에서 1988년 무단으로 찍어내 20만부나 팔았지만 멤버들에게 돌아간 돈은 1코페이카도 없어 논란이 있었다.[22] 이후 이 이카루스 버스는 러시아 인터넷에서 초이를 상징하는 또다른 밈이 되었다. 대충 의미가 마티즈 드립과 비슷하며, 유사한 상황에서 쓰인다.[23] 차는 완전히 박살났으며,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가슴에 핸들이 찍힌 채 발견되었다고 한다.[24] 누가 어떤 의도로 썼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초이의 사망 소식을 듣지 못한 다른 팬이 "헛소리 하지 마라. 초이는 멀쩡히 살아 있다" 라는 뜻에서 이렇게 적었거나, "이 세상에선 떠났지만 우리 가슴 속에는 항상 살아 있다" 라고 추모하는 뜻에서 적었으리라 추측하고 있다. 이후 이 글귀는 후자의 뜻으로 받아들어져 빅토르 초이를 상징하는 말이 되었고, 오늘날까지도 그를 기리는 팬들이 외치는 슬로건이 되었다.[25] 이 외의 도시에도 존재하나 여기가 제일 유명하며, 모스크바의 랜드마크 중 한 곳으로 손꼽힌다.[26] 그냥 담배만 두고 가도 되는 것 같다. 골초였던 빅토르를 추모하는 뜻에서 시작된 것으로 추측된다.[27] 1분 20초 경 화면이 흑백으로 바뀌면서 빅토르의 아들 알렉산드르와 빅토르의 부모가 화면에 잡힌다. 배경음악은 '마지막 영웅' 및 '태양이라는 이름의 별' 앨범에 수록된 'Печаль(슬픔)'.[28] '스빈'은 러시아어로 '돼지'를 의미[29] 마취제 종류에 알레르기가 있었던 걸로 추정되는데 수술 당시 이를 인지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파노프의 모친인 리야 페트로노바는 의사들이 자기 아들을 죽였다며 비난했다.[30] 같이 동료로 친하게 지내기도 했고 자신의 밴드에 빅토르를 넣어주기도 했기에, 카메오 식으로 넣어준 듯하다.[31] 러시아 음유 시가에 영향을 받아 시 낭송에 가까운 포크 음악을 했으며, 러시아에서는 상당히 높이 평가 받는 인물이지만 가사가 현지인들이 해석하기에도 난해한 부분이 있어서 해외에서는 별로 알려져있지 않다. 정규 레코딩을 하지 않았지만 개인 녹음본 복각본이 나와있다. 27세 클럽에 속하는 인물이기도 하다.[32] 러시아어로 '러시아 사람들'[33] 결국 2010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법원에서 사망 선고를 받았다.[34] 이고리가 본명, 예고르는 예명. 러시아어 강세에 따르면 '예고르' 또한 실제로는 '이고르'로 발음되는데, 본명과 에명의 차이를 강조하기 위해 보통 '예고르 레토프'라고 표기한다.[35] '고르쇽'은 러시아어로 병, 요강, 단지 등을 의미[36] 러시아어로 '센터(중심)'. 활동 당시 기행이 많았던 밴드였는데, '우리 밴드에서 연주하기엔 너무 잘한다'는 말과 함께 기타리스트를 해고했다던가 장 니콜라 아르튀르 랭보, 에드가 앨런 포 같은 서구권 시인들과 조이 디비전를 흠모했다는 일화가 남아있다. 다만 이 때문인지 러시아 내 인기는 열광적 컬트 수준에 그쳤다고 한다. 러시아 내에서도 정보가 의외로 빈약한 편.[37] 덤으로 당시 바이올린을 담당하던 멤버 또한 단명하였다[38] 당시 레닌그라드 투소프카는 가능한 한 노래나 평소 발언에서 노골적인 정치적 색채를 투과시키지 않으려 했으며, '자유와 변화를 외친 투사' 정도의 이미지가 있는 빅토르 초이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39] 평단에서는 이들을 언급하며 아예 조이 디비전이나 토킹 헤즈 등을 같이 언급할 정도다.[40] 제작 중 초이의 결정으로 엎어졌다. 현재 수록곡 목록은 남아 있으나, 총 12개 트랙 중 4개+손상된 트랙 1개만 남아 있다. 이들은 '알려지지 않는 노래들' 앨범에 수록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트랙 리스트를 보면 알렉세이 리빈이 작곡한 곡도 들어갈 예정이었으며, 만약 그랬다면 키노 앨범 중 유일하게 작곡가가 빅토르 초이가 아닌 사람의 노래가 들어간 케이스였을 것이다.[41] 이 앨범은 3개의 판본이 존재한다. 1-13번 트랙까지 있는 판본 / 14번 트랙('사샤')이 존재하는 판본(1984년 안트로프 판본 한정) / 1-13번 트랙 + 캄차트카 하우스에서 녹음한 3개의 미공개곡이 수록된 판본(1996년 모로즈 레코드 판본)[42] 아래의 '밤' 앨범을 만들다 지친 키노 멤버들이 기분 전환겸 만든 앨범. 실제로 녹음하고 찍어내는 데 고작 2주일 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43] 제작 중 초이의 결정으로 엎어졌는데, 위의 '마지막 영웅(1983)'과 달리 녹음한 트랙이 한 10개 정도 나왔기에 당시 프로듀서였던 트로필로가 국영 음반사 멜로디야와 손잡고 무단으로 찍어내 팔았다. 약 20만 부가 팔려나갔지만 키노 측에 돌아간 돈은 1코페이카도 없었기에 당시 논란이 되었고, 음질 및 앨범의 완성도에 대해 민감했던 초이 본인도 앨범의 판매에 대해 부정적이었다.[44] 밴드 이름과 혼동의 여지도 있고, 빅토르 초이의 유작이기도 하고, 쌈빡한 검은색의 표지로 인해, 정식명칭 대신 검은 앨범(Чёрный альбом) 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원래 앨범 아트나 제목은 초이의 몫이었는데 이걸 정하기도 전에 사망해 버렸기 때문.[45] 1996년 모로즈 판본에서 미공개곡 2개가 더 수록되었다.[46] 원래 그냥 연습곡을 녹음해 둔 거였는데 레코딩 회사 측에서 초이 동의 없이 찍어낸 앨범이라 생전 초이는 이 앨범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고, 인정하지도 않았다. 다만 대부분의 팬들은 2번째 앨범으로 인정하는 듯.[47] 초이 본인이 직접 관여한 리믹스.[48] 라이브에서 부른 노래와 만들다 엎어진 1983년 '마지막 영웅' 녹음본 등 수록.[49] 단순 히트곡 모음집이나, 이전까지 사라진 것으로 추정되었던 곡 '질문(Вопрос)'이 수록되어 있기에 이 목록에 올려둠. 여담으로 '마지막 녹음' 앨범에 수록된 곡과는 약간 다르다(인트로 부분).[50] '이글라', '휴가의 끝', '아사(АССА)' 등 키노가 참여한 영화에 수록된 키노의 음악 수록. 여기에 삽입된 곡들은 기존 앨범에 수록된 곡들과 다르며, 영화 '이글라'에 수록 예정이었으나 수록되지 않은 곡 및 가사 없는 BGM도 수록되어 있다. [51] '검은 앨범'에서 색깔만 반전한 앨범 아트로 인해 '하얀 앨범(белый альбом)'이라고도 불린다. '검은 앨범'에 수록된 곡들의 데모판과 초이가 카세트 테이프에 녹음한 어쿠스틱판, 그리고 미공개곡인 '질문(Вопрос)' 및 '봐봐, 이게 영화야(Смотри - это КИНО)' 수록.[52] 키노의 전신인 '가린과 쌍곡선' 시절 라이브 녹음 수록. 대부분은 초이의 자작곡 및 녹음인데, 알렉세이 리빈이 작곡한 곡도 몇 있고('짐승들', '아빠, 당신 아들은 아무것도 되고 싶다 하지 않네요' 등), 초이 자신이 아닌 타인이 작곡한 곡('보드카는 맛있는 음료', '교외 블루스')을 연주하기도 한다.[53] 마시나 레코드 발매. 1990년 초이가 직접 녹음한 보컬+어쿠스틱 판본 / 2012년 리믹스 / 2012년 리믹스 데모 총 3개 트랙으로 구성한 싱글.[54] 원체 리믹스나 컴필레이션, 트리뷰트 앨범이 많아 멤버들 본인들이 관여했거나, 특히 중요한 것만 수록.[55] 그런 것을 원한다면 Ария같은 그 당시의 헤비메탈 밴드를 들으면 되지만....록 음악을 '서구의 퇴폐적인 산물'이라며 신물나게 까고 있던 소련 문화 당국의 제도권 밖에서는 누가 들어도 아이언 메이든 삘이 나는 메탈 밴드도 버젓이 존재하고 있었다. 소련은 록 음악을 탄압 수준이 아닌 단순한 하위 문화 취급을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곳에도 '록의 시대'가 있었네-3 블라디미르 푸틴이나 드미트리 메드베데프도 젊었을 적에 록에 심취해 있었다.[56] 1980년대 소련에서는 국영 음반사(멜로디야)에서 녹음하지 않은 앨범들의 상업적 판매는 불가능했다.[57] 사샤는 현재 러시아에서 그래픽 아티스트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참고로 알렉산드르가 태어난 그 해에 빅토르의 할아버지 막심 페트로비치 최가 세상을 떠났다.[58] '이건 사랑이 아니야' 등에 수록된 '사샤'라는 곡이 있는데, 알렉산드르 초이가 태어나기 이전 작곡되었기에 알렉산드르와는 관계가 없다. 러시아 웹에서는 사샤가 초이의 이상형이었고 여기서 아들 이름을 따왔다는 추측을 한다.[59] 참고로 나이세스에서 나온 것은 12번 트랙이 'Троллейбус'라 되어 있는데 실제론 'Электричка'가 들어 있다.('45'에 실린 것은 아니고 89년에 나온 'Последний герой' 버전.)[60] 한국에서 펑크 록 음반이 제대로 유통되기 시작한 것은 너바나가 한국에 얼터너티브/그런지 붐을 일으킨 90년대 초반 이후다. 그 전까지는 섹스 피스톨즈의 음반도 수입 금지 품목이었다.[61] 1분 20초와 25초 벽에 적힌 문자열은 얀덱스 뮤직 1달 무료이용권이라고 한다.[62] 여기에 이로 인해 '러시아 연방 해체 이후 카자흐스탄과 러시아가 초이의 고향을 두고 싸웠다'는 투의 썰이 붙어 다니기도 한다.[63] 참고로 이 여권은 2018년 초이의 어느 친구(익명 처리)의 냉장고 뒷면에서 발견되었는데, 이 외에도 친구들의 주소록과 '변화(Peremen)'의 초이 자필 악보도 같이 발견했다고 한다. 그 친구는 이걸 경매에 붙였고, 신원 미상의 인물에게 한화 1억 5천만 원에 낙찰되었다고 한다. 키노의 초기 멤버인 알렉세이 리빈은 이걸 두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며 그 친구를 비난했다.[64] 매우 현실적인 삶, 살기 힘들고 부조리한 현실을 의미하는 러시아어 관용어구[65] 원래 투소프카는 같은 취향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을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언더그라운드 아티스트들의 총칭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초이는 밴드 아크바리움 등과 함께 레닌그라드 투소프카에 속해 있었다. 레닌그라드 투소프카는 '레닌그라드 락 클럽'이 건립된 1981년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존재했다. 다른 많은 투소프카들처럼 이들은 간신히 생계를 유지할 정도로만 돈을 벌면서 클럽, 아파트 등 여러 곳에서 라이브 공연을 했으며(이 때문에 초이와 키노의 라이브 공연은 대부분 '아파트' 혹은 '나이트클럽' 녹음이 많다) 80년대 락에 큰 영향을 미쳤다.[66] 여담으로, 당시 레닌그라드 투소프카에서 이런 흐름과 반대로 대놓고 정치적 메시지를 투사했던 밴드는 사실상 '텔레비조르(Televisor)'가 유일했다. 이들은 정부와 충돌을 일으킬 정도였으며, 투소프카에서도 좋은 취급을 못 받았다고 한다. 텔레비조르와 리더 미하일 보르지킨(Mikhail Vorzykin)은 2010년대에도 현역으로 활동중인데, 무려 푸틴과 러시아 극우파를 씹어하는 위엄을 보인다. 또한 이들의 장르는 일렉트로닉으로 분류될 정도로 전자 음향에 친화적이었는데 (평단에서도 토킹 헤즈갱 오브 포, 조이 디비전을 언급할 정도였다.) 이 또한 레닌그라드 투소프카에서는 주요 장르가 아니었다. 당장 이들의 대표곡은 '너네 아빠는 파시스트다(Tvoya Papa - Fashist)'라는 비범한 제목의 곡이다. 보르지킨은 주파르크(Zoopark)의 리더이자 초이와 친했던 미하일 '마이크' 나우멘코와 이 문제로 사이가 별로 좋지 않다 이후 화해해 그와 같이 작업을 하기도 했다.[67] 말할 것 없이 정치적인 발언을 잘못하면 연예인으로서의 커리어가 박살나기 때문이다. 굳이 박근혜 정부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같이 높으신 분들이 직접 코렁탕 배달하러 오지 않더라도, 연예인 본인과 정치 성향이 반대인 사람들에게 뭇매맞을 위험이 있어서, 대부분은 아무리 강경한 성향이라도 정치 얘기를 꺼리는 편이다.[68] 게다가 러시아에는 백인과 황인의 혼혈이 많다.[69] 현재 한국인들의 희망사항을 그들에게 거꾸로 투영하는 우를 범하지는 말자.[70]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러시아 국내여권에는 자신의 민족이 적혀있는데 고려인들은 한국 출신임이 명기되어 있어서 최소한 자신이 어느 민족 출신임은 자각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국력이 신장함에 따라 자신의 핏줄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고려인들이 늘어나는 것도 사실이다. [71] 다만 얼마나 관심이 있었는지, 어느 정도인지는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았다.[72] 일본어로 '만세'. 본래 그냥 '만세'라는 뜻이지만 국내에서 일본어 '반자이'는 일본의 군국주의와 관련해 안좋은 쪽으로 유명하다.[73] 관련 곡으로 '캄차트카의 지배인(Начальник камчатки)' 앨범에 수록된 '신경 안정제(Транквилизатор)'라는 곡이 있다. 또한 1집의 '엘렉트리치카' 또한 정신병원에 들어가기 위한 정신감정을 받으러 정신병원에 자주 들락거리던 당시 자신의 감정이 투여된 곡이라고 한다.[74] 동구권 음악 전문방송.[75] 커버 버전은 아니고, 초이가 직접 부른 버전이다. 사후 발매된 리믹스 앨범 'Последние записи'에 'Blood Type'라고 제목까지 영어로 바뀐 채로 수록되어 있다.[76] 본문에 빅토르 초이의 노래라고 언급된다.[77] 데데테라고 읽으며, 1980년 러시아 우파(Ufa)에서 결성되어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는 러시아의 락밴드[78] 그 이유로는 셰프추크가 초이의 캄차트카로 곡을 가지고 오지 않아서라는 설이 따라붙는다[79] 상술했지만 실제 초이도 1987년 별거한 상태였다.[80] 러시아 현지에서는 윤도현의 목소리를 들은 팬들이 "빅토르가 살아 돌아왔다." 라는 긍정적인 평가를 했다.[81] 참고로 초이의 곡 중에서도 동명의 곡이 있다. '알려지지 않은 노래들' 수록.[82] 현재 횡령 혐의로 자택 구금 중인데, 워낙 푸틴 정권에 반대하는 영화나 사회 운동을 자주 해와서 횡령은 핑계고 정치 탄압이라는 설이 대다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