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러시아 헌정위기

 


러시아어: Конституционный кризис в России (러시아 헌정위기), Октябрьские события (10월 사태)
영어: Russian constitutional crisis
'''1993년 러시아 헌정위기'''
보리스 옐친 집권기 사건 중 일부
'''날짜'''
1993년 9월 21일 ~ 1993년 10월 4일
'''장소'''
러시아, 모스크바
'''교전세력'''
<^|1> [image] 러시아 정부군
<^|1> [image] 러시아 연방 인민 대표 회의
러시아 소비에트 최고 회의
'''지휘관'''
<^|1> [image] 보리스 옐친
알렉산드르 코르자코프[1]
파벨 그라초프[2]
빅토르 예린[3]
아나톨리 쿨리코프[4]
<^|1>[image] 알렉산드르 루츠코이[5]
[image] 루슬란 하스불라토프[6]
[image] 알베르트 마카쇼프[7]
[image] 알렉산드르 바르카쇼프[8]
[image]빅토르 안필로프[9]
'''결과'''
보리스 옐친 정부군의 승리
'''영향'''
인민 대표 회의와 최고 소비에트 회의 해체
상원 연방의회 및 하원 국가두마 설립
새 헌법 채택
'''보리스 옐친의 독재권력 강화'''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의 완전한 소멸'''
'''투입부대'''
러시아 연방 경호국
[image] 러시아 내무군
[image] 러시아군 제4'칸테미르'근위전차사단
제2'타만'근위차량화소총사단
[image] 알파 그룹
빔펠 그룹
[image][image][image] 반옐친연합세력
'''피해규모'''
187명 사망, 437명 부상
1. 개요
2. 발단: 갈등의 조짐
3. 전개: 실패한 경제개혁
4. 절정: 불타는 모스크바
6. 의의
7.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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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 사건을 다룬 RT#s-2의 다큐멘터리.
러시아 헌정위기는 1992년부터[10] 1993년까지 러시아 대통령이었던 보리스 옐친과 러시아 최고회의 사이에서 헌법 제정 및 국정 운영을 두고 벌어진 정치적 분쟁이다.
러시아에서는 워낙 이 사건에 대한 평가가 갈리기 때문에 보통은 중립적으로 '''10월 사태(Октябрьские события)'''라고 부르는 편이다. 그 외에 "최고회의 해산(Разгон Верховного Совета)", "백악관 공격(Штурм Белого дома)", 백악관 포격(Расстрел Белого дома)" 등의 표현도 쓰인다.

2. 발단: 갈등의 조짐


1991년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는 명목상이나마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신생 국가였다. 비록 러시아는 1978년 제정된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의 헌법에 따르고 있었지만, 소비에트 시절에 맞추어 제정된 이 법을 계속 쓰기에는 실정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러시아는 새로운 헌법을 제정해야 했다.
여기서 당시 러시아의 권력 구조를 잠시 살펴보면, 소련이 망하기 전 러시아 공화국의 헌법은 러시아 공화국의 최고권한이 대통령에게 있다고 규정했지만, 실질적인 권한 면에 있어서 대통령제보다는 이원집정부제의 대통령과 가까웠다. 즉, 대통령은 총리를 지명할 수 있었지만, 의회의 허락을 구해야 했다. 또한 의회는 대통령의 정책에 동의하지 않거나 국정에 어느 정도 관여할 수 있었다. 이는 행정부(대통령)와 입법부(최고회의)가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는 장점처럼 보였지만, 사실 근본적으로는 소련 시절의 모순된 권력구조에서 시작되었다.
원래 소련이 처음 세워졌던 초창기에는 의원내각제 국가의 총리 격인 인민위원회의 의장에게 최고권력을 부여해, 어느 정도 의원 내각제 국가처럼 운영되었다.[11] 하지만 블라디미르 레닌 이후 실권을 장악한 이오시프 스탈린이 집권 과정에서 자신의 직위였던 서기장(또는 총서기)을 활용해 최고권력으로 부상했다. 따라서 이후 소련 최고권력은 '''행정기관 수장'''인 소련 장관회의 주석이나 '''입법기관 수장'''인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이 아닌 집권당의 총대표인 '''소련 공산당서기장'''에게 있었다.[12]
당시 소련의 정치구조는 소련 공산당이 국가의 입법기관과 행정기관을 직접 통제하고 있었고,[13] 소비에트 연방의 국내에서 정치권력을 장악할 수가 있는 정당이 오직 소련 공산당이었기에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1988년 다당제를 허용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만약 소련 공산당이 '''입법기관과 행정기관을 통제'''하는 정당이 아닌 소련을 구성하는 한 정치정당이라면, 기존의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최고권력자로써 남아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련은 1990년 개헌을 실시, 미국의 대통령제와 유사한 체제로 바꾸었다. 당시 미하일 고르바초프 본인이 공산당원이었고, 의회 다수정당 역시 소련 공산당이었기 때문에 이는 딱히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소련 붕괴 이후 상황이 급격하게 변했다.'''
소련이 무너진 이후, 러시아의 새 헌법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민주국가로써 '''국가최고수장''', 나아가 국정운영의 총책임자가 누구인지를 정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고, 이 과정에서 당연히 '''행정기관'''의 수장인 '''대통령'''과 '''입법기관'''인 '''최고회의, 인민대표회의'''는 이 문제를 가지고 이해관계가 다를 수 밖에 없었다.
보리스 옐친은 새 헌법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기존 최고회의의 권한보다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시킨 '''대통령제''' 헌법을 원했다. 반면 러시아 최고회의는 소련 시절과 비슷하게 최고회의가 실권을 쥐는 '''내각제'''처럼 제정되길 원했다. 러시아 정부는 이 문제를 가지고 1992년과 1993년에 걸쳐 여러 차례 조율했지만, 당연히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상황에서 충돌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3. 전개: 실패한 경제개혁


[image]
예고르 가이다르
1992년 4월, 러시아 최고회의는 당시 재정부 장관을 지냈던 예고르 가이다르의 총리 임명을 거부했다. 당시 예고르 가이다르는 재정부 장관을 지내면서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에 '충격요법'이라 알려진 신자유주의적 경제 개혁을 도입하면서 악화되고 있던 러시아 경제를 부활시키려 하였다.
가이다르가 계획한 가장 좋은 시나리오는 환율 자유화, 국가경제의 자유화를 통해 경기가 활성화되는 것이었지만, 페레스트로이카 때와 같이 급작스러운 경제개혁이 작동할 만큼 러시아 경제가 건실한 상황이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특히 충격요법이 포함하고 있던 통화 자유화 같은 조치는 페레스트로이카 시절 어느 정도 남아있던 국가경제의 요소를 완전한 시장에 맡긴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는 시장이 경제를 운영하던 자본주의 국가에서라면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는 '''갓 사회주의 국가에서 벗어난 지 채 1년도 안된 상태'''였다.
이미 소련 경제는 1990년과 1991년에 부분적인 가격 자유화 및 각 공화국 간 산업연계가 마비되어 완전히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지만, 가이다르가 진행한 충격요법은 러시아 경제를 다시 급격히 악화시켰다. 충격요법의 핵심인 경제 자유화는 달리 말하자면, '''국가가 경제에서 완전히 손을 놓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당장 정부에 의해 시장에 풀린 사회간접자본들은 전부 민영기업으로 넘어가 우리에게 흔히 올리가르히로 알려진 소수의 부유층과 다수의 빈민층을 만들어냈다. 또한 소련 시절 사회주의 체제에 의해 지탱되던 시장 경쟁력이 없던 수많은 공장들과 기업, 연구소들은 자동적으로 해외 회사들에게 밀려 파산하거나 해외로 매각되어 버렸다.
특히 '''가격 및 환율 자유화''' 조치는 최악의 실패작이었는데 이미 부분적인 가격자유화로도 부작용이 엄청나던차에 거의 모든 물자의 가격을 자유화해놓았다. 변동환율제는 원칙적으로는 옳은 정책이지만 그래도 환율이 어느 정도 선에서 안정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정부와 중앙은행은 세입과 세출, 채권과 화폐의 발행, 금리 등을 정교하게 컨트롤 할 준비가 되어있어야 했다. 물론 세계 어느 국가도 이 문제들을 완벽히 처리하고 있는 곳은 없지만 적어도 시장이 신뢰를 가질만한 수준은 보여줄 필요가 있고 시장이 해당 국가 정부가 다양한 상황에 대해 상당한 대비를 하고 있다고 믿을 수 있을 때에만 해당 국가 화폐를 계속 들고 있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소련 시절부터 러시아 경제 정책 담당자들은 당연하게도 이 방면에서 유능함을 보여준 적이 없었고 이런 상황에서 루블화의 환율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은 시장에 루블화를 계속 가지고 있는 것은 위험하다는 의미로 밖에 해석될 수 없었다. 루블화가 외환 시장에서 매물로 쏟아져나오기 시작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고 결과는 루블화 가치 하락으로 인한 러시아 국내 시장의 인플레이션이었다. 즉 최근 유행하는 양적완화와 같이 자국 생산품의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의도적이고 완만한 화폐 가치 하락이 아니라 한국의 IMF 사태처럼 세계가 해당 국가에 대한 신뢰를 거둬들이면서 화폐 가치가 통제불능으로 추락하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가격자유화의 여파로 각종 물자의 가격이 치솟는데 반해 봉급상승률은 이에 한참 못미치고 은행예금도 하루 아침에 모조리 휴지조각으로 변하면서 대다수 러시아 국민들의 구매력이 아프리카 빈국수준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이 당시 러시아 은행에 예금되어있던 개인들의 저축자금이 1991년 기준으로 3천억 루블에 달하는 수준이었는데 그러한 자산이 하루아침에 몽땅 휴지조각이 되어버렸으니 재빠른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주민들의 경우에는 기대했던 서방소비재의 소비는 커녕 당장 내일 먹고살것을 걱정하는 처지가 되어버리게 된 셈이다. 1930년대에 벌어졌던 농업집산화에 비유되는 경우도 있을 정도로 엄청난 악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루블화에 닥친 이 재앙은 러시아에 국한되지 않고 '''구 소련에 속한 15개국 모두 경제가 만신창이가 되는 최악의 결과를 낳았다'''. 원래 가격자유화의 목적은 지나치게 낮게 유지되었던 상당수 물자들의 가격을 정상화시켜 생산을 늘리겠다는것이었지만 엄청난 물가상승률 앞에서 국민들의 재산 및 은행예금을 하루아침에 휴지조각으로 만들어버린 셈이 되어버렸고 기대했던 물자생산도 산업기반의 붕괴로 인해 물건너갔다.
이렇게 가이다르가 펼친 경제개혁이 실패하면서, 수많은 러시아 국민들은 직장을 잃고 실업자가 되어버렸다. 소련 시절 축적한 고급 인력들은 생존을 위해 좋은 조건을 제시하던 외국으로 이민가버리면서 순식간에 유출되었다. 군대와 경찰은 제대로 된 월급조차 받지 못해 많은 장교들이 제대하거나, 뇌물을 받고 무기를 파는 등 부패가 만연했다. 이렇게 러시아 국민들은 소련 시절 구축한 복지제도마저 잃어버리고 가난과 절망에 빠졌다. 한마디로 '''처참한 실패'''였다.
이 상황에서 1992년 러시아 지방선거가 실시되었다. 당시 국민들은 옐친 행정부의 경제개혁 실패에 분노했고, 그 결과 공산당 및 좌익계열 정당과 민족주의 계열 극우정당이 대거 약진하게 되었다.[14] 그 뿐만 아니라 정부관료 내 옐친의 개혁에 반감을 품은 인사들이 증가하면서 '''민주화 투사'''로써의 옐친의 정치적 입지는 점차 정치적으로 위협받기 시작했다.
당연히 옐친의 경제개혁에 불만을 품었던 이들은 옐친의 경제개혁을 중지시키고 더 나아가 옐친을 견제하려 하기 시작했다. 1992년 4월 러시아 최고회의는 옐친이 제안한 가이다르의 총리 임명안을 기각했다. 이는 최고회의가 8월 쿠데타 당시 공산당에 맞서 협력하던 관계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국가의 급진적인 개혁을 원했던 옐친과 대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비록 대통령과 의회는 이후 협상을 통해 빅토르 체르노미르딘을 총리에 임명했지만, 이후 옐친 행정부의 정책이 바뀌거나, 체르노미르딘이 훌륭한 국정운영 능력을 보여주었던 것은 아니었기에 대통령과 의회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이렇게 의회가 비협조적으로 자신의 정책을 거부하자, 옐친은 점차 행정명령 등을 통해 나라를 통치하기 시작했다. 반면 대통령이 독단적으로 국정을 운영한다고 판단한 의회는 부통령이었던 알렉산드르 루츠코이와 손잡아 옐친을 '''탄핵'''하고 새로운 행정부를 구성할 준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물론 이대로 가다가는 당장 정치적인 파국이 몰아닥칠 걸 직감한 러시아 정부에서는 1993년 4월 25일 국민투표를 통해 헌법 제정 과정에서 대통령에 대한 신뢰와 대선, 총선의 조기선거에 대한 의사를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했지만, 선거 결과 대통령에 대한 신임과 대선과 총선의 미실시로 결론났다.[15]
이렇게 국민투표에서조차 정말 애매모호하게 결론이 나버리자 어쩔 수 없이 대통령과 의회 둘 다 만족스러운 해결책을 얻지 못한채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대통령과 의회는 어떠한 해결책도 찾지 못하고 서로 극단적으로 대립했다.

4. 절정: 불타는 모스크바


이 가운데 더이상 헌법 제정과 개혁을 미루어서는 안되겠다고 판단한 옐친은 9월 21일 최고회의를 해산, 12월에 새로운 입법부인 국가두마를 선출하겠다고 공표했다. 문제는 당시 현행헌법이었던 러시아 공화국 헌법에 따르면 러시아 대통령은 어떠한 국가기관도 해산시킬 수 없었다. 또한, 대통령이 국가기관을 해산시킬 경우 대통령은 면직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실제로 러시아 헌법재판소는 9월 23일 대통령의 최고회의 해산조치가 헌법에 위반되며, 현행 헌법에 따라 대통령은 '''해임'''될 수 있다고 판결했다. 하지만 옐친은 당시 최고회의와 대립이 고착된 상황에서 정국을 극단적인 수로 돌파하려 했는데, 이는 아무리 좋게 봐줘도 사실상 최고회의에 대한 '''선전포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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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최고회의 역시 대통령의 해산선포에 반발했고 가만히 앉아있지 않았다. 최고회의는 당시 의장이었던 루슬란 하스불라토프(Руслан Хасбулатов)의 주도 아래 9월 21일 밤 긴급회의를 열어 옐친을 대통령에서 파면하고, 알렉산드르 루츠코이(Александр Руцкой) 부통령을 대통령 대행에 임명했다. 또한 당시 국방부, 보안부[16], 내무부 장관들을 재인가했다. 사실상 대통령을 '''탄핵'''시킨 것이었다.[17]
한편, 최고회의를 지지하는 시위를 벌이던 시위대는 9월 28일 첫 유혈사태를 겪으면서 점차 과격해지고 있었다. 이에 옐친은 내무부 병력을 동원해 국회의사당을 포위하는 한편, 국회의사당으로 향하는 수도, 전기 공급을 중단시켰다.
모스크바의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불만을 조금이라도 달래기 위해, 10월 2일 모스크바 시의회는 다음날 있을 집회를 공식적으로 승인했다.
하지만 10월 3일, 역대급 인파로 몰린 시위대는 시의회와 경찰이 정한 시위 구역을 벗어나 시청으로 향했다.
이에 경찰들은 해산하지 않으면 발포하겠다고 경고했지만 결국, 계속해서 시청으로 진격해오는 시위대들을 향해 집단 발포를 시작하였다.
알베르트 마카쇼프(Альберт Макашов)의 전직 소련군 병력이 무장하여 시위대에 합류하고 있다는 정보가 있어서, 당시 시청 근처에는 AK-74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경찰들과 장갑차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경찰의 무차별 발포가 시작되자 마카쇼프의 병력이 경찰들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시청과 경찰의 작전본부까지 점령했다.
결국 대통령과 최고회의는 더 이상의 협상의 여지가 없었다. 오후 4시 옐친은 행정명령 1400호를 발령해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모스크바 외곽에 주둔한 타만스카야 전차사단[18] 등 군 병력 1400여명을 동원시켰다.
같은 날, 모스크바 시내는 최고회의 지지 시위 뿐만 아니라 옐친 지지 시위도 일어나고 있었는데, 최고회의 지지 시위대가 무장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당시 친 옐친 성향 의원이었던 콘스탄틴 보로보이[19]는 "'옐친 지지 시위대도 무장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이에 세르게이 쇼이구 또한 필요한 경우 옐친 지지자들에게 무기를 배포할 것을 보장하였다.
10월 4일 새벽 2시, 옐친의 명령을 받고 군대가 진압을 위해 출동했으며, 약 2시간 이후인 4시 20분에 국회의사당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이후 여러 신경전이 오갔다. 오전 6시에는 크라스나야 프레스냐 경기장 근처에서 최고회의 지지자들과 정부군-친 옐친파 시위대가 무장충돌 하기도 하였으며, 7시에는 경관 한명이 국회의사당에서 발포한 총탄에 저격당해 사망하기도 했다.
결국 오전 8시, 투입된 장갑차와 군병력이 국회의사당을 겨냥해 소총과 기관총 사격을 시작했고, 9시 20분에는 T-80 전차의 전차포 포격이 시작됬다. 공성중인 최고회의 지지자들이 별 다른 대책을 내놓지 않자, 군부는 항복 의사가 없음으로 판단하여 오전 11시 25분에 포격을 재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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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시, 정부군이 국회의사당으로 진격하자 작은 규모의 총격전이 시작됐다. 하지만, 정부군은 국회의사당 건물 코 앞까지 진격했고, 시위대와 반란 경찰병력들로 이루어진 국회의사당 수비대는 결국 오후 2시 30분에 정부군에 투항한다, 하지만 아직 적지 않은 최고회의 지지자들이 국회의사당에 남아있었다.
오후 3시에는 진입 부대로 선정된 알파 그룹과 빔펠 그룹의 공격명령이 떨어졌지만, 그들은 공격하지 않다가 대략 1시간 이후에 국회의사당 건물로 들어가 최고회의 잔존 병력들과 협상을 하기 시작했다. 협상은 결렬됬지만, 최고회의 진압에 부정적인 병력들이 알파 그룹과 빔펠 그룹에 존재했기 때문에 공격은 시작되지 못했다. 결국 이들을 대신해 119 공수연대가 진압작전에 참가했다.
국회의사당 내부로 공수부대가 진입해, 한층씩 차례로 점령하기 시작했다. 저항을 계속할 경우 대규모 희생자가 나올 것을 직감한 최고회의 측에서는 결국 항복했다.
(사진) 러시아군에 의해 체포되는 하스불라토프와 루츠코이

5. 결말: 피로스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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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으로 옐친은 공산주의 및 민족주의 세력이 10월 혁명과 같은 무력봉기를 일으킬 가능성을 완벽히 제압해버렸다. 특히 옐친은 10월 5일 최고회의를 지지한 언론들을 폐간시키고 공산당 및 우익계열 단체의 활동을 금지했다. 또한 10월 6일 러시아 헌법재판소장이었던 발레리 조르킨을 해임시키고, 최고회의를 지지했던 지방 회의(지방 소비에트)들을 해산시켰다. 또한 언어학자였던 드미트리 리하초프, 가수였던 불라트 오쿠자바 등 개혁파 인사들은 10월 5일 옐친에게 공산주의 및 민족주의 정당 해체, 무장세력 해체, 파시즘 및 국수주의, 인종주의 프로파간다 금지 등을 담은 공개 서한을 보내 최고회의 세력을 철저하게 처벌할 것을 호소했다.
한편 옐친에 의해 해산된 최고회의는 1993년 12월 입법부 선거를 통해 새로운 의회, 즉 오늘날의 러시아 상원인 연방회의(Совет Федерации)와 하원인 국가두마(Государственная дума)로 재편되었다. 러시아 정부는 1993년 12월 국민투표를 통해 새로운 헌법을 채택, 기존의 소련식 정치체제에서 벗어나 이원집정부제 국가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치러진 총선에서 친 옐친파 정당인 '러시아의 선택'은 극우파인 러시아 자유민주당에게 비례대표 득표율에서 월등히 밀렸고 의석수도 동률을 기록하는 참패를 기록했다. 특히 비례대표에서 러시아 연방 공산당과도 고작 3%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으며 비슷하게 친엘친파 정당인 러시아 협정당을 합쳐도 86석에 불과했기 때문에 '''친옐친파 정당의 의석수는 개헌저지선에도 한참 미달했다'''. 또한 정치불신이 극심하여 투표율도 1990년 러시아 최고의회 선거와 1991년 대통령 선거에 비하면 크게 떨어진 54%에 그쳤으며 의석의 상당수를 무소속 의원들이 차지했다.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면서 일단 발등의 불을 껐지만 의회에서는 압도적으로 여소야대인 것은 변함이 없었고 도리어 옐친에 대한 지지율이 크게 떨어진 것도 동시에 확인했기 때문에 옐친 입장에서는 근본적으로 상황이 달라진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반대세력은 이 사건을 절대 잊지 않았다. 1993년 총선에 이어 1995년 총선에서도 반(反) 옐친파가 압승을 거두었고 이 기세를 타서 1996년 대선에서 엘친이 실각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비록 언론플레이와 올리가르히 언론의 옐친 밀어주기 작전으로 인해서 실패하기는 했지만 정권교체 직전의 상황에 까지 오기도 했으며, 1998년에는 체첸전 패배와 경제 위기 등으로 러시아가 혼란 상태에 빠지자, 의회의 주도 아래 옐친에 대한 탄핵을 한 번 더 시도하려다 간신히 부결되기도 했다. 그래도 옐친은 푸틴을 후계자로 지명하면서 은퇴했고 후계자로 지명되어 새로운 대통령이 된 푸틴이 승승장구하면서 말년에 스탈린과는 달리 격하당하는 꼴이나 감옥에 가는 꼴을 당하지 않고 평온하게 생을 마칠 수 있었다.

6. 의의


이 사건은 이제 막 자라나려던 러시아 민주주의에게 여러모로 적잖은 상처, 사실상 민주주의를 살해해버리고 혼돈스러운 정국의 러시아를 완전한 독재 국가로 만들어버린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최고회의가 옐친에 패배한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몇가지 중요한 요인을 보면 군부의 비호응이 있었다. 당시 군부의 주류는 군을 동원하는데 소극적이었으나(연휴 때문에 병사들을 투입하기 어렵다는 둥) 파벨 그라초프, 알렉산드르 레베디 등을 필두로 8월 쿠데타 당시 옐친과 러시아 행정부를 지지했던 소장파 인사들은 적극적으로 옐친을 구호했다. 이들 입장에서 옛 반 옐친파 및 공산당 세력의 집권은 아무리 좋게 봐줘도 '''자신들의 실각'''으로 연결되는 지름길이었다. 이 때문에 이들이 옐친 편으로 돌아서면서 공산당은 군부세력의 지지를 얻을 수 없었다. 실제로 이들은 사태 진압 이후 군과 정계에서 상승가도를 달리게 되었다. 그러나 상층부는 몰라도 하층부의 경우에는 생각이 달라서 1993년 총선에서 군인 투표함에서는 자유민주당의 지지율이 매우 높았다고 한다.
또한 옐친의 지지세가 아직까지 남아있던 시기였다는 점도 중요한 이유다. 헌정위기 당시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 카잔 등의 대도시에서 최고회의를 지지하는 대규모 시위대들[20]이 발생해 경찰 및 내무군과 충돌했고 사태 초기에만 양측에서 수백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옐친에 대한 지지율이 폭 꺼진 상태였을 때에도 모스크바 등 대도시에서는 친옐친 성향이 어느정도는 남아있었고[21] 탄핵을 주도한 반 옐친파 인사들 및 공산당이나 자유민주당이 옐친에 비해 딱히 뚜렷한 대안을 내놓은 것도 아니었으며 경제 충격요법에 반대하던 중도 좌/우익 정당들은 조직력이 약했기 때문에 시민들이 이들에 대해서 갑자기 신뢰가 생기거나 지지를 내보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당시 러시아의 자유민주주의 세력의 정치적 입지에 큰 타격을 안겨주었다. 비록 상대는 민주 정부 입장에서는 허용할 수 없는 극단주의적인 정치 세력이었지만 나름 정당한 선거로 집권한 최고회의를 헌법을 어겨가면서, 군 부대를 불러오면서까지 유혈 사태를 일으키면서 진압한 옐친은 그 명분이 어찌되었든 거대한 정치적 타격을 입을 수 밖에 없었다. 국가적인 위기 상황에서 행정부의 무능과 이로 인한 극단주의 세력의 득세, 그리고 극단주의 세력을 유혈진압하는 과정은 여러모로 민주주의가 결여된 바이마르 공화국을 연상케하는 씁쓸한 모습을 보였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1993년에 이루어진 러시아 연방 헌법 국민투표인데, 이 때 투표율은 고작 54.8%에 지나지 않았다. 민주주의가 이뤄진지 고작 4년도 안 되었는데 벌써부터 러시아 국민들이 민주주의에 냉소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옐친의 국정을 보면서 국민들이 실망했고, 비록 체첸 사태에서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정권재창출에 성공을 해서 우파가 재집권했다고는 하지만 블라디미르 푸틴은 개혁적 자유주의가 아닌 권위주의를 내세우는 통치를 하면서 러시아 민주주의는 이때부터 식물인간 상태, 사실상 시체로 접어들게 되었다. 오늘날 보리스 넴초프로 대표되는 자유주의 성향의 개혁 정치인들은 옐친 시절과 연관되어 부정적인 인식을 받고 있고, 그나마 리버럴에 가까운 정의 러시아당 정도를 제외하면 총선에서 처참한 성적을 내는데 그치고 있다.[22]

7. 여담



해당 사건에 대한 러시아 락밴드 그라지단스카야 오보로나의 곡 "승리(Победа, 1997)"
이 곡을 작곡한 보컬 예고르 레토프는 국가 볼셰비키 당(NBP)의 창당인이 되는 등 90년대 공산당적 행보를 보였다[23]. 소련 시절 "반체제적" 가사로 인해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을 당할 정도로 소련 정부와 충돌을 빚었던 것을 생각하면 모순으로 보이지만, 레토프 자신이 생각하는 '소비에트 국가주의'와 소련 말기 '부패한 정부'는 다르며 자신은 소비에트 국가주의자라고 과거 인터뷰에서 언급한 바 있다. 본인은 헌정위기 당시 가두행진에도 여러 번 나섰는데, 옐친이 본격적으로 탱크로 사람들을 깔아뭉개기 하루 전 벗어나[24] 살아남았다고 한다.
같은 날인 10월 3일, 소말리아에서는 모가디슈 전투가 일어났다. 미국 클린턴 행정부는 소말리아보다 훨씬 중요한 일인 모스크바 사태에만 주의를 집중하느라 모가디슈 전투에서 고전하는 미군 병력에 대한 지원이 늦었고, 미군은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1] 당시 대통령 경호국 국장[2] 당시 러시아 국방장관[3] 당시 러시아 내무부 장관[4] 당시 러시아 내무군 사령관[5] 당시 러시아 부통령이자 의회에서 임명된 대통령 대행[6] 당시 러시아 최고 소비에트 회의 의장[7] 러시아 공산당 소속 정치인[8] 네오 나치 극우 성향의 러시아 국민당 대표로 반옐친전선에 동참한 인물이다.[9] 소련의 복원을 주장하는 강경파 공산당원이었다.[10] 역사학자들은 넓게는 1992년 총리 임명을 두고 벌어진 대통령과 의회의 대립부터를, 짧게는 1993년 10월 사건만을 기점으로 삼는다.[11] 10월 혁명으로 임시정부를 몰아낸 이후 블라디미르 레닌이 구상한 체제는 전 인민이 비밀선거로 선출해 1년 내내 열리는 소비에트가 최고권력기관이 되고, 소비에트가 임명한 상무회(Президиум)가 일상적인 국정을 운영하는 형태로 서유럽의 내각제와 상당히 유사하였다. 10월 혁명 이후 치뤄진 제헌의회(후에 있을 소비에트와는 다르다.) 선거에서 사회혁명당(나로드니키 계열)이 40%로 제1당,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이 24%로 제2당, 우크라이나 사회혁명당이 7.7% 제3당으로 좌익계 3개 정당이 총의석의 80%를 차지하는 압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좌익세력들과 노선 차이로 대립하던 레닌은 이들이 제헌의회에서 정국 주도권을 잡을 것을 우려했다.(러시아 혁명 당시 좌익 계열은 정치적으로 극심하게 대립했다. 당장 레닌이 몰아낸 알렉산드르 케렌스키만 해도 멘셰비키 계열 정치가였을 정도.) 이를 염두에 둔 볼셰비키는 제헌의회를 개회식 다음날 무력으로 강제 해산하고 같은 좌익 세력인 나로드니키, 멘셰비키까지 배제한 채 일당독재체제를 수립하였다. 이런 볼세비키의 막장 행태에 반발한 나로드니키멘셰비키러시아 내전 당시 반볼셰비키 세력 중 하나가 된다.[12] 굳이 우리나라와 비교하자면, 국가지도자가 '''대통령'''이나 '''총리'''가 아닌 '''여당대표'''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13] 그래서 소비에트 연방의 국내에서 소련 최고회의(입법기관)의 결의보다는 소련 공산당의 전당대회가 훨씬 더 영향력이 강했다.[14] 이 시기에 소련의 해체를 후회하는 국민이 전체의 80%가 넘었고, 여기저기에서 소련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15] 사실 대선과 총선 모두 다 집계상으로는 '''조기실시''' 주장이 더 지지를 얻었지만, 둘 다 과반수인 50%를 넘지 못해 부결되었다.[16] 훗날 러시아 연방 보안국의 전신.[17] 어찌보면 러시아 마지막의 민주적 절차로 시행된 행정 사례이다.[18] 공교롭게도 이 부대는 1991년 쿠데타 당시 보수파의 주병력으로 동원되었던 적이 있었다. 한국으로 치면 수도방위사령부 급 부대.[19] 1999년 까지 의원직을 지냈으며, 현재는 반(反) 푸틴 진영의 인물 중 한명이다. 러시아에선 드문 유로마이단 지지자이며, 루간스크와 도네츠크 인민 공화국 건설을 반대하기도 하였다.[20] 대부분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활동했고 수도권 외부에서는 시위대와 당국의 충돌도 드물었다.[21] 예를 들어보자면 1991년 러시아 대통령 선거에서 모스크바는 득표율 80%를 넘긴 스베르들롭스크 만은 못하지만 첼랴빈스크, 체젠, 야말로 네네츠, 페름 레닌그라드와 더불어 옐친의 득표율이 2/3를 넘은 대표적인 지역이었다.[22] 정작 넴초프 본인은 옐친 시절 니즈니 노브고로드 주지사를 지내면서 개혁적인 정책으로 꽤나 호평을 얻은 편이었다.[23] 단 90년대 말부터는 정치와 선을 긋는 행보를 보였다.[24] 본인은 자신의 고향인 옴스크에서 할 일이 있어 모스크바를 떠났다고 하고, 형 세르게이 레토프는 행진 중 몇몇 노파에게서 "이 장발 자식아, 여긴 너 같은 놈이 있을 곳이 아니야" 같은 모욕적 언사를 듣고 떠났다고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