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가와 야스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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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선발은 시즌 시작하자마자 아웃되고, 믿었던 불펜이 무너지면서 타선이 발렌틴을 제외하면 답이 없던 암울한 2013 시즌을 보낸 야쿠르트 팬들이 그나마 야구를 볼 수 있었던 원동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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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란 라이언을 연상하게 하는 하이키킹이 상당히 인상적인 투수다. 투구폼때문에 불리는 애칭은 라이언 오가와, 일본의 라이언이 있으며 작은 키에서 유래한 작은 거인이란 별명도 있다. 키킹동작은 트로이 퍼시벌과 비슷하다.
2. 프로 입단 전
초등학교 시절부터 야구를 시작했으며, 세이쇼 고등학교 3학년 때 팀을 고시엔 센바츠[1] 1라운드에 선발 등판, 팀의 고시엔 첫 승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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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과 같이 특이한 폼을 지니게 된 것은 소카대학 3학년 여름 놀란 라이언의 저서를 읽고서부터다. 책을 읽고 하이키킹을 하는 투구폼으로 바꿨고. 이 선택은 극도로 불리한 신체를 지닌 그를 대학리그 최강 투수로 성장하게 만들어줬다. 투구폼은 변경한 이후 대학 추계리그 방어율 신기록인 0.12를 기록한 것을 시작으로,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으며 대학 리그 21연승을 달리며 대학 리그 최강의 투수로 급성장한다. 48⅔이닝 동안 무실점을 기록하기도 했다.
대학교 1학년때 2013 시즌 신인왕 라이벌로 경쟁한 요미우리의 스가노 토모유키를 상대로 승리를 올렸었다.
대학 4년동안 성적은 '''36승 3패, ERA 0.60, 23완봉, 리그 MVP 5회'''의 성적으로 일본 대학 야구를 평정했다.
3. 프로 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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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단 당시 기자회견장.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에게 2순위 지명을 받았다. 대학때의 압도적인 모습에 비하면 낮은 순위인데, 171cm로 작은 체구와 하이키킹으로 인한 부상의 우려 때문. 이 때 1순위 지명을 받은 선수는 2013 시즌 야쿠르트를 같이 지탱한 불펜인 이시야마 타이치.
3.1. 2013 시즌
2013 시즌 완봉승 하이라이트
팀의 5선발로 시즌을 시작했고, 첫 경기였던 히로시마와의 원정경기에서 7이닝 2실점 무자책으로 호투하며 2013 신인 중 최초로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보였고, 6월 22일 히로시마를 상대로 시즌 첫 완봉승을 기록했다. 이 기록 역시 신인 최초. 그리고 7월 13일 히로시마와의 경기에서 승리를 거두며 1999년 우에하라 고지와 마쓰자카 다이스케가 기록 이후 14년만에 신인 10승 투수가 됐으며, 올스타 게임에도 출장했다. 후반기에도 시즌 종료 때까지 본인의 성적을 꿋꿋이 유지하며 다승왕(16승)과 승률왕(0.800), 완봉 1위를 기록했다. 야쿠르트의 시즌 마지막 경기는 히로시마와의 경기였는데, 당시 15승을 기록중이던 에이스 마에다 겐타를 야쿠르트 타선이 털어주면서 단독 다승왕이 되는 데 성공했다.
시즌 최종 기록은 26경기(26선발) '''16승(1위)''' 4패 178이닝(3위) 155피안타 135삼진/48사사구 ERA 2.93(5위) WHIP 1.12 4완투 '''3완봉(1위)'''로 리그 수위급의 성적을 거두었다. FIP도 3.03으로 ERA와 거의 차이가 없으며, 피장타율이 0.341로 높은 것을 제외하면 아주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성적만 보면 연봉 1200만엔의 선수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 결국 신인왕[2] 을 수상했다. 다만 팀은 오가와와 60홈런을 치며 아시아 홈런기록을 세운 블라디미르 발렌틴을 빼면 전혀 플러스 요소가 없는 전력이었기 때문에(...) 꼴지를 차지했다.
3.2. 2014 시즌
4월 22일 기준으로 팀의 6승의 절반인 3승을 기록하며 소년가장이 되어 고통받다 18일 고시엔 원정에서 선발등판해 0-3으로 뒤진 2회 2사 1루 상황에서 한신 3번타자 도리타니 다카시의 강습타구에 오른쪽 손바닥을 맞아 교체됐다. 교체 후 계속 통증을 호소했던 오가와는 결국 21일 정밀검진 결과 오른손 유구골 골절이라는 진단을 받게 되었다. 뼈가 완전히 붙을 때까지는 6주가 소요되는데 야쿠르트 트레이너에 따르면 회복속도에 따라 4주 후부터는 캐치볼이 가능하다고 한다. 다른데도 아니고 공을 던지는 오른손에 입은 부상이라 잘못하면 전반기를 거의 날릴수도 있는 상황이다. 일단 대체요원을 2군에서 찾고 있지만 쉽지않은 상황. 심지어는 트레이드 논의까지 나오기도. 안그래도 오가와 하나로 먹고살던 야쿠르트는 엎친데 덮친격이 되었다.
7월 12일 3달만에 요코하마와의 홈경기에 선발로 복귀하였으나 5이닝 5실점으로 패전, 그 이후로도 롤러코스터 피칭[3] 을 선보였고, 작년에 비해 좋지 못한 성적을 보였다.
시즌 최종 성적은 16경기(16선발) 9승 5패 100⅓이닝 113피안타 99삼진/21사사구 ERA 3.77 WHIP 1.33으로 전해에 비해 성적이 많이 하락했다. 부상의 여파인듯. 게다가 팀은 2년 연속 꼴지행(...) 그런데, 3달을 등판하지 못했음에도 승수는 팀 내 2위다.[4]
시즌 후 열리는 미일 올스타전에 선발됐지만 부상으로 인해 참가하지 못하게 됐다.
3.3. 그 이후
2015 시즌엔 27경기 168이닝을 던져 팀 내 선발진의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하였다. 승운은 좋지 않아서 11승(7패)를 얻는 데에 그쳤지만, 팀의 센트럴리그 우승에 기여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2016 시즌은 부진한 모습을 보여 8승(9패) 방어율 4.50의 성적을 거두었고, 피홈런도 22개를 허용하는 등 두들겨 맞는 투구가 많아졌다.
2017 시즌엔 마나카 미쓰루 감독에 의해 마무리 투수로 자리를 옮겼다가 히로시마 도요 카프 타선에 된통 얻어맞기도 했다. 최종성적은 8승(7패) 1홀드 방어율 2.83. 사실 2017 시즌에 부진했던 이유는 부상을 당해 많은 경기에 등판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22경기에 선발 등판은 18번 밖에 하지 못했다. 그래서 도중에 불펜으로 전환된 것이기도 하고.
2018 시즌에도 부상의 여파로 5월까지 1군에 올라오지도 못했다. 5월에는 방어율 6.39의 안좋은 모습을 보였으나, 6월 이후 나름 이닝이터의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9월까지 단 17경기에 등판한 것치곤 101이닝을 소화하였다. 9월 11일 요미우리 전에선 8이닝 1실점으로 막아 팀 승리를 도맡았다. (이번 시즌엔 요미우리 전 4경기 3승 방어율 1.59로 아주 강한 모습을 보였다.) 부상의 여파로 많은 경기에 등판하진 못했지만, 나름 괜찮은 활약을 보여 뷰캐넌과 함께 믿을 만한 원투펀치로 격상하였다. 시즌 성적은 7승 5패 방어율 2.85.
2019년에는 26경기에서 선발로 등판해 156이닝을 던졌지만, 팀이 폭망하며 5승 12패로 리그 최다패를 기록했다.
2020년 시즌 출발은 괜찮은 편이다.
8월 15일 요코하마와의 원정경기에서 135구 3볼넷으로 NPB사상 93번째의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다.
8월 23일 한신 타이거스전에서는 타석에서 1타점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2020 시즌을 끝으로 FA가 되지만, 권리를 행사하지 않고 잔류했다. 계약규모는 4년 7억5천만 엔.
4. 기타
- 운동선수치고는 아주 작은 171cm, 79kg의 체격을 가지고 있다. 다만 웨이트를 열심히 해 키에 비해 체구는 상당히 큰 편.
- 오가와가 고등학교 재학시절, 학교근처 헬스장에서 기숙사 통금시간이 다 될때까지 웨이트트레이닝에 매진했다고 한다. 기숙사에 돌아와서도 엄청 뛰었다고 한다. 유명한 말이 "체격은 바꿀수없어도 체력은 바꿀수있다."
- 같은 팀의 왼손 에이스 이시카와 마사노리와 딱 10살 차이나고, 키가 작은 모습에서 작은 거인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투구폼도 오가와의 하이키킹 이후에는 비슷한 딜레이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피칭 스타일은 상당히 다른 편.
- 투구폼은 그립이 보여 투구가 노출된다는 코치의 말에서 변경하게 됐다. 놀란 라이언의 저서 Pitcher's Bible에서 모습을 따왔고, 변화구는 다르빗슈 유의 책 '변화구바이블'을 참고한다고.
- 2014년 3월 13일 박동희의 야큐리포트에 실렸다. 기사
-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상 위엔 그의 버블헤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