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
村上春樹(むらかみ はるき|Murakami Haruki

'''출생'''
1949년 1월 12일 (77세)
연합군 점령하 일본 교토부 교토시 후시미구
'''국적'''

'''학력'''
와세다대학 제1문학부 연극과 학사
(현 와세다대학 문학부 연극영화코스)
'''종교'''
불교(추측)[1]
'''직업'''
작가, 번역가
'''데뷔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風の歌を聴け』, 1979)
'''주요 작품'''
양을 쫓는 모험
(『羊をめぐる冒険』, 1982)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世界の終りとハードボイルド・ワンダーランド』, 1985)
노르웨이의 숲 (a.k.a. '상실의 시대')
(『ノルウェイの森』, 1987)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国境の南、太陽の西』, 1992)
태엽 감는 새
(『ねじまき鳥クロニクル』, 1994)
해변의 카프카
(『海辺のカフカ』, 2002)
1Q84(2009)
기사단장 죽이기
(『騎士団長殺し』, 2017)
'''배우자'''
무라카미 요코 (村上陽子, 1971년 결혼)
'''서명'''
[image]
'''링크'''

1. 개요
2. 생애
2.1. 어린 시절과 20대
2.2. 재즈 카페 개업
2.3. 데뷔와 성공
2.4. 1990년대, 작품관의 변화
2.5. 2000년대
2.6. 2010년대
2.7. 2020년대
3. 작품의 특징
3.1. 평이한 문장과 난해한 이야기
3.2. 작품 간 유사점
3.3. 《노르웨이의 숲》의 예외성
3.4. 장편 소설가
3.5. 종합소설로의 시도
3.6. 작품관 변화: '무심함'에서 '헌신'으로
4. 작가 성향
4.1. 이념
4.2. 문화
5. 하루키가 영향을 받은 작가와 작품
6. 작품 일람
6.1. 장편소설
6.2. 단편소설
6.3. 수필집
6.3.1. 수필 일람
6.4. 르포르타주
7. 번역가 활동
8. 주요 수상 경력
8.1. 노벨 문학상 떡밥
9. 관련 인물
10. 일본 문단과의 불화
10.1. 예루살렘 연설
11. 어록
11.1. 하루키가 한 말들
11.2. 작품 속 글귀들
12.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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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소설가, 수필가, 르포 작가이자 번역가.
무라카미 류와 함께 일본의 한 세대를 풍미한 작가로 대접받는다. 요시모토 바나나와 함께 해외에서도 유명한 작가인데,[2] 특히 서구권에서 인물의 작품 대부분이 번역된 몇 안 되는 일본 작가이며, 대한민국 출판업계에서도 주요 출판사의 통계상 21세기 들어 '''가장 인지도 높은 일본 작가'''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힌다.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 1979년 군조신인문학상을 받으면서 데뷔하였다. 1987년 발간된 《노르웨이의 숲》이 430만 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국내외적으로 무라카미 하루키 붐이 일어나게 되었다. 단편소설, 장편소설을 포함하여 에세이, 논픽션, 기행집 집필 활동도 활발하고 영미 문학 일역가로서도 활동한다. 30대 후반부터는 소설도 소설이지만 세계 각지를 여행하면서 에세이를 많이 쓰기도 했다. 2015년 타임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 Icon 부문에 선정되었다.

2. 생애


하루키의 에세이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등 여러 책에 기술된 일화, 또는 실제 알려진 사실 등을 서술함.

2.1. 어린 시절과 20대


1949년 교토부 교토시 후시미구에서 그 당시 흔치 않은 무녀독남 외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사립 고요 학원 중학교의 교사로 부임하자 곧 효고현 니시노미야시의 슈쿠가와로 전학 갔다. 아버지는 교토부 나가오카쿄시 아오의 정토종 니시야마파 고묘지 주지스님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오사카 센바의 장사꾼 집안의 딸로 부모 모두 간사이 토박이였기에 당연하게 간사이 사투리를 쓰면서 지냈다. 또 부모 두 분 다 국어교사라서 책을 좋아하는 부모의 영향으로 독서가로 자라났다. 2019년에 문예춘추에 따르면 중일전쟁 당시 아버지가 1938년 징병돼 중국에 배치됐었다고 밝혔다. 하루키의 초등학생 때는 아버지가 자신이 소속된 부대가 '''중국군 포로를 처형'''했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이후 2차례 더 군에 소집됐으며, 전후에는 교사로 재직했다고 한다.#
니시노미야 시립 하마와키 초등학교 입학, 니시노미야 시립 고로엔 초등학교 졸업. 아시야 시립 세이도 중학교를 나와서 효고현립 고베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부모님이 일본문학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것에 진절머리가 나서 서구 번역문학에 심취했고, 부모가 구독하던 가와데 쇼보의 <세계문학전집>과 중앙공론사의 <세계의 문학>을 한 권 한 권 읽으며 10대 시절을 보냈다. 중학교 때부터는 중앙공론사의 전집 <세계의 역사>를 반복해서 읽었다. 고베 고등학교에서는 신문위원회에 소속돼 있었다.
재수를 해서 1968년와세다대학 제1문학부에 입학해 연극과에 진학했다.[3] 대학교 재학 중에는 연극 박물관에서 영화 시나리오를 탐독하는가 하면 영화 각본가를 꿈꾸며 시나리오를 집필하기도 했는데, 학교에는 거의 나가지 않고 신주쿠에서 레코드 가게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가부키초재즈 찻집을 뻔질나게 드나들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1970년대 초에는 도쿄도 치요다구 스이도바시에 있던 재즈 찻집인 "스이도바시 윙"의 종업원이 됐다. 1971년에 다카하시 요코와 '''학생 신분으로 결혼'''을 했고, 한때는 분쿄구에서 침구가게를 운영하던 아내의 처가에 세들어 살았다.

2.2. 재즈 카페 개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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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도쿄도코쿠분지시에서 '피터 캣[4][5]'이라는 커피점(저녁에는 재즈바)을 개업해서 운영하였다.가게 이름은 이전 기르던 고양이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밤에는 재즈바가 되고, 주말에는 라이브 공연을 실시했다. 개점 자금은 500만 엔으로, 절반은 부부가 아르바이트를하고 모은 돈, 나머지 절반은 부모에게서 받은 돈이었다. 가게는 아내와 함께 1974년부터 1981년까지 운영했다.
1975년 7년간 재학한 와세다대학을 졸업했다. 졸업논문의 제목은 <미국영화에서의 여행의 계보>로, 이 논문에서 아메리칸 뉴시네마와 '이지 라이더'에 대해 논했다. 1977년 '피터 캣'을 센다가야로 옮긴다.

2.3. 데뷔와 성공


1978년 4월 1일, 메이지진구 구장에서 프로야구 개막전을 관람하던 중 소설을 쓰자는 생각이 떠올랐다. 1회 말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선발 타자 데이브 힐턴이 2루타를 친 순간의 일이었다고 한다. 그 후로 재즈 찻집을 운영하는 한편으로 매일밤 부엌 테이블에서 글을 계속 썼다.
1979년 4월, '군조'에 응모한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 제81회 군조 신인 문학상을 수상했다. 이 작품이 '군조' 1979년 6월호에 실리면서 작가로 데뷔했다. 커트 보네거트, 리처드 브라우티건 등 미국문학의 영향을 받은 문체로 현대의 도시 생활을 그려내며 주목을 받았다. 그해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제81회 아쿠타가와상 및 제 1회 노마 문예 신인상 후보에 오르는가 하면, 이듬해에는 《1973년의 핀볼》로 제83회 아쿠타가와상 및 제2회 노마 문예 신인상 후보에 올랐다. 1981년에 전업작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피터 캣'을 다른 사람에게 넘겼다. 이듬 해에는 장편소설 《양을 쫓는 모험》을 발표해 제4회 노마 문예 신인상을 탔다.
1985년에는 두 개의 이야기가 번갈아 가며 진행되는 장편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발표해 제21회 다니자키 준이치로상을 수상했다. 1986년 10월에 유럽으로 이주했다. 주된 체류지는 그리스, 이탈리아, 영국.
1987년에 "100% 연애소설"이라는 타이틀을 내건 《노르웨이의 숲》을 발간했는데 결과는 초대박. ''''노르웨이의 숲'은 상권과 하권을 통틀어 430만 부 이상이 팔려나간 베스트셀러였으며 일본내 소설 최대 발행부수 신기록을 세우는 등 일본 전국적으로 하루키 신드롬'''이 일어났다.
1989년 10월에는 하루키 소설 중 처음으로 '양을 쫓는 모험'이 영어로 번역되었다. 영어 제목은 Wild Sheep Chase.

2.4. 1990년대, 작품관의 변화


1991년 뉴저지프린스턴 대학교의 객원 연구원으로 초빙 받아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때를 전후로 걸프전이 발발했다. 훗날 하루키는 '''"솔직히 말해 그 당시 미국의 애국적이고도 마초적인 분위기는 그리 달갑지 않았다"'''고 술회했다. 그 다음 해에 체류 기간 연장을 위해 객원 강사로 취임한다. 현대 일본문학 세미나에서 제 3의 신인에 대해 강의하면서 에토 준의 '성숙과 상실'을 서브 텍스트로 썼다. 1994년 4월에는 '태엽 감는 새 연대기' 제1부와 2부를 펴냈으며, 이듬해 6월 귀국. 8월에 '태엽 감는 새 연대기' 제3부를 간행했다. 이듬 해 '태엽 감는 새 연대기'로 제47회 요미우리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1996년 6월에 '무라카미 아사히도 홈페이지'를 개설했다. 1997년 3월에는 지하철 사린 사건의 피해자들의 인터뷰를 정리한 논픽션 《언더그라운드》를 출판했는데, 그때까지는 오히려 내성적인 분위기로 사회에 무관심한 청년을 그려 왔던 하루키가 사회 문제를 정면에서 다뤄 주위를 놀래켰다. 1999년에는 《언더그라운드》 속편으로 옴진리교 신자들과의 인터뷰를 정리한 《약속된 장소》를 발표해 제 2회 구와바라 다케오 문예상을 수상했다. 이 시기에 사회적인 사건들을 소재로 다루게 된 것에 대해 하루키 자신은 "커미트먼트"(commitment)라는 단어를 써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commitment(책임감, 헌신)이라는 것에 대해서 요즘 많이 생각합니다. 예컨대 소설을 쓸 때도 저한테 이 commitment라는 게 매우 중요해졌습니다. 예전에는 detachment(무심함)가 중요했는데 말이죠.

'태엽 감는 새 연대기'는 저에게는 제3스텝에 해당합니다. 우선 아포리즘과 디태치먼트가 있고, 다음으로 이야기를 하는 단계가 있는데, 마침내 그래도 뭔가 부족하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은 거죠. 그 부분에서 commitment라는 것과 관련이 생겨났을 겁니다. 저 자신도 아직 정리가 안 되고 있지만요.

- 동상(同上), 70쪽에서


2.5. 2000년대


2002년 9월, 처음으로 소년을 주인공으로 한 장편 소설 《해변의 카프카》를 발표한다. 2004년에는 카메라아이와 같은 시점이 등장하는 실험적인 작품 《애프터 다크》를 발표했다. 2005년 '해변의 카프카'의 영문 번역판인 Kafka on the Shore가 뉴욕 타임스의 "The Ten Best Books of 2005"에 선정돼 하루키에 대한 국제적인 평가가 높아졌음을 보여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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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에는 '''프란츠 카프카상'''과 '''프랭크 오코너 국제 단편상''' 등 국제적인 문학상을 연거푸 수상했다. 카프카상은 아시아권 통틀어서 최초로 수상했다. 특히 카프카상은 전년도 수상자인 해럴드 핀터와 그 전년도 수상자인 엘프리데 옐리네크 모두 그해의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점에서, 하루키가 2006년도 노벨 문학상의 유력한 후보로 꼽히기도 했다. 그해 세계 최대 규모의 배팅업체인 영국 라드브록스의 스톡홀름 사무소는 하루키의 수상 가능성에 34배의 배율을 걸어 18번째 인기마로 올렸다(수상의 영광은 예상 1위였던 오르한 파무크에게 돌아갔다). 2007년에는 배율이 11배, 인기 순위는 6위로 한 단계 더 뛰어올랐다. 게다가 2007년 연수입을 보면 외국에서 벌어들이는 것이 이미 일본 국내 수입을 넘어섰고, 사무소의 작업량도 3분의 2는 외국과 작업하는 것이라고 한다.
2008년 6월 3일 프린스턴 대학은 무라카미 하루키를 포함한 5명에게 명예 학위를 수여했다고 발표했다. 하루키에게 수여된 것은 문학 박사이다.
2009년 1월 21일 이스라엘의 일간지 <하레츠>가 하루키의 예루살렘상 수상을 발표했다. 당시 이스라엘은 가자 침공으로 국제적인 비난을 받고 있었는데, 이 수상에 대해 오사카 시민 단체 등에서는 "이스라엘의 전쟁 범죄를 은폐하고 면죄부를 주는 꼴"이라면서 사퇴를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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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하루키는 2월 15일 예루살렘에서 열린 시상식에 참석해 기념강연을 영어로 했다. 연설 전문은 즉각 미디어에 의해 중계됐고, 그 내용을 일본어로 번역한 다양한 글들이 온라인에 올라왔다. 『문예춘추』 2009년 4월호에 하루키의 인터뷰 "나는 왜 예루살렘에 갔는가"가 실렸는데, 기념강연 전문(영어와 일본어 둘 다)도 함께 수록됐다. 한편 수상식 때 연설 중반부터 페레스 이스라엘 대통령의 얼굴이 굳어졌다고 전해진다. 예루살렘 연설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밑의 항목을 참고하자.
2009년 5월 장편 소설 《1Q84》 1, 2권이 간행되었다. 11월까지 합계 223만 부의 발행 부수를 달성했다. 이 작품으로 매일 출판 문화상을 수상했다. 같은 해 12월 스페인 정부에서 스페인 예술 문학 훈장이 수여되고, Excelentísimo Señor라는 칭호를 받고 대우를 받았다.

2.6. 201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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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6월, 카탈로니아 국제상을 수상했다. 부상인 8만 유로(약 930만 엔)를 동일본 대지진 의연금으로 기부했다. 카탈로니아 국제상 수상 연설에서 일본의 원자력 정책을 비판했다
2012년 9월 28일 아사히 신문 조간 신문에 에세이 '영혼의 오가는 길'을 기고했다. 이 글에는 센카쿠 열도 문제와 한일간의 독도 문제에 의해 동아시아의 문화 교류가 파괴되는 사태를 걱정하였다. 하루키는 '''“문화의 등가교환은 ‘국경을 넘어 영혼이 오가는 길’이다. 지난 20년간 동아시아 문화권은 풍부하고 안정된 시장으로 성숙한 길에 접어들었다, '국경선’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이상 불행히도 영토 문제는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실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이슈이며, 실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이슈가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영토문제가 실무과제임을 넘어 ‘국민감정’의 영역에 발을 디디는 순간 그것은 ‘출구 없는 위험한 상황’을 초래한다”'''고 강조했다. 더불어 영토분쟁을 둘러싼 갈등에 대한 과격한 반응들은 값싼 술을 마신 뒤의 취기어린 행동에 가깝다고 비판하며 술이란 것이 하루가 지나면 취기는 물론 사라지지만 남는 것은 두통뿐이라면서 하루키는 ‘영토문제’에 집착하고 있는 한중일의 정치인들에게 경고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2013년 4월, 장편 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간행. 예약만 50만 부가 팔렸고 발매된지 6일 만에 100만부를 돌파. 2013년 종합 베스트셀러 종합 2위를 기록했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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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1월, 독일의 유력 일간지 '디 벨트'가 주는 '벨트 문학상' 올해의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하루키는 베를린에서 베를린 장벽 붕괴를 거론한 뒤 "세계에는 지금도 인종, 종교, 불관용, 근본주의, 그리고 욕망불안이라는 벽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우리들 소설가에게 벽은 뚫고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장애물"이라며 "벽을 통과할 자유가 있다는 점을 느끼게 하는 이야기를 되도록 쓰고 싶다"고 밝힌 뒤 "이 메시지를 자신들의 벽과 지금 이 순간에도 싸우고 있는 홍콩의 젊은이들에게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2015년 1월 15일 기간 한정 사이트 "무라카미씨가 있는 곳"을 개설했다. 이날부터 1월 31일까지 사이에 37,465 통의 편지가 전해졌고 공개된지 3개월 반 만에 1억 페이지뷰를 기록했다. 이 사이트는 4월 30일에 종료되었고 큰 인기에 힘 입어 단행본으로 나왔다.
안데르센 문학상 시상식 소감에서 '''"우리에게 맞게 아무리 역사를 다시 써도, 결국에는 우리 자신을 다치게 할 뿐"'''이라고 말했다
신작 장편 소설 《기사단장 죽이기》(騎士団長殺し)가 1부, 2부로 나뉘어 일본에서 2017년 2월 24일에 발매되었다. 제목은 1권은 드러나는 이데아(顕れるイデア), 2권은 이동하는 메타포(遷ろうメタファー).
1, 2부의 한국어 번역본 출간은 동시 출간 기준으로 2017년 7월 12일이며, 전체 제목은 기사단장 죽이기, 1권 제목은 현현하는 이데아, 2권 제목은 전이하는 메타포로 번역되었다.
2018년 11월 4일에는 37년 만에 일본내 기자회견을 갖고 자신의 자필 원고와 장서, 편지 등 문서들과 음반을 모교에 기증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자식이 없기 때문에 사후 자신의 자료가 붕 떠서 흩어지면 곤란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와세다 측에선 이를 바탕으로 무라카미 연구 센터를 설립하기로 했다.

2.7. 2020년대


2020년 7월에 마이니치신문과 인터뷰에서 관동대지진 후 벌어진 조선인 학살 사건을 거론하며 코로나19이 확산하는 가운데 대두하는 배타주의에 우려를 표명했다.# 12월 프랑스 일간지 리베라시옹와 인터뷰에서 일본회의 6명 임명 보류와 관한 발언했다.#

3. 작품의 특징



3.1. 평이한 문장과 난해한 이야기


평이하고 친숙한 문장은 하루키가 데뷔 당시부터 의식하고 있던 점으로, 하루키에 따르면 "낮은 문턱"으로 "마음에 호소하는" 문장은 미국작가인 브로티건과 보네거트에게서 받은 영향이라고 한다. "글에선 리듬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도 하루키가 곧잘 하는 말인데, 그는 이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하여튼 7년 가량 아침부터 밤까지 재즈 가게를 운영했는데, 머릿속에서 계속 엘빈 존스의 하이햇이 울리더라구요."
하루키가 구사하는 은유의 정교함에 대해 사이토 다마키는 "은유 능력을 서로 다른 두 이미지 사이의 점프력이라고 생각할 때, 하루키만큼 멀리까지 점프할 수 있는 일본 작가는 없다"고 평가한다.
반면 문장은 평이한 데 반해 작품의 스토리는 흔히 난해하다는 지적을 받는다. 하루키 자신은 이러한 "스토리의 난해함"에 대해서 독자들에게 "논리"가 아닌 "이야기"로 텍스트를 이해해 달라고 촉구한다. 이야기 속의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이나 현상들을 하루키는 "격렬한 은유"라 칭하면서, 영혼의 깊은 부분에 있는 어두운 영역을 이해하려면 밝은 영역의 논리로는 부족하다고 설명한다. 이처럼 "평이한 문체로 고도의 내용을 다루고, 현실 세계에서 비현실의 또 다른 세계로 seamless하게(=이음매 없이, 완벽하게) 이동하는" 작풍은 일본 국내만 아니라 해외에도 소위 "하루키 칠드런"이라 일컬어지는 바 하루키의 영향을 받은 작가들을 배출하고 있다. 또 하루키의 작품은 기존의 일본문학과 대비해 종종 미국적이고 무국적적이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세계적인 보편성이 높이 평가되고 있는데, 하루키 본인은 자신의 소설이 어디까지나 일본을 무대로 일본어로 쓴 "일본문학"이며 무국적적인 문학을 지향하는 것은 아니라고 밝힌다. 덧붙여서 하루키가 즐겨 사용하는 모티프는 "연인이나 아내, 친구의 실종"으로, 장단편을 막론하고 거듭 쓰이고 있다.

3.2. 작품 간 유사점


대부분 소설 주인공은 1인칭 ''로 전개되고 '나'는 20대에서 30대 남자로서 부모와 거의 교류가 없으며 형제도 없다. 이것은 하루키의 성장 배경에서 비롯된 듯 하나, 근작 '어둠의 저편', '해변의 카프카', '1Q84'도 일부에서는 3인칭 시점을 시도했으며 주인공을 15세 소년으로 내세우기도 하는 등으로 변화했다.
하루키의 작품에는 성격이 매우 다른 자매, 즉 우수한 언니와 평범한 동생, 쌍둥이[7] ,벽을 뚫고 지나가기, 주인공이 자주 먹는 스파게티, 끝없이 깊은 우물, 아내의 실종, 자아의 성장, 연결되지 않는 전화가 소재로서 유난히 반복하여 등장한다.
그리고 섹스가 정말 자주 등장한다. 일부에서는 "야설작가"라고 폄하하기도 하는데, 하루키의 소설에서는 섹스를 통해 해당 주인공의 성장이나 이야기를 해결하는 열쇠가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어쨌든 결국은 같이 잔 이야기
마지막으로 죽음에 관한 내용도 굉장히 많이 등장하는 편인데, 이는 단편소설에서 짧은 내용으로 인상을 깊게 남기기 위해서는 죽음만큼 효과적인 소재가 없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는 비단 무라카미 하루키뿐만이 아닌, 동화 작가가 아닌 이상 거의 모든 소설 작가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경향성이다.
그 밖에 잘 등장하는 것들로 미스테리한 여성, 귀 페티쉬, 마른 우물, 무언가의 실종, 추적당하는 느낌, 예상치못한 전화, 고양이들, 오래된 재즈 레코드, 도시의 권태감, 초자연적인 힘, 달리기, 비밀통로, 자유공간, 기차역, 역사적 회상, 조숙한 십대, 요리, 고양이와의 대화, 평행세계, 괴상한 섹스, 도쿄의 밤, 흔하지 않은 이름, 얼굴없는 악당, 고양이들의 실종 등이 있다.

3.3. 《노르웨이의 숲》의 예외성


하루키의 많은 소설에서는 오컬트 요소와 초현실주의적인 존재(예: 양 사나이)가 빠지지 않고 등장하며 '의식 아래 세계'가 현실 세계와 동시에 진행되는 작품이 많다.
노르웨이의 숲》은 하루키가 쓴 작품 중 유일하게 이런 오컬트다운 요소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 현실주의 소설이지만 역설스럽게도 이것이 하루키가 쓴 작품 중 가장 많이 판매된 작품이다. 작가 자신도 그저 단발성 시도에 가까웠던 캐주얼한 작품이 최고 히트작이라는 사실에 크게 부담스러웠다고 고백한다. 오죽하면 이전 평범한 전업 작가였던 시절에는 사랑받던 느낌이였는데 '노르웨이의 숲'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자 모든 사람에게 미움받는 느낌까지 들었었다고. 건방지게 들리겠지만 백만 부가 팔린다는 건 자신에겐 정말 기가 찰 정도로 지나치게 높은 판매고라서 감당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다만 유명작가들이 명성을 얻은 후 초연한 태도를 표하는 것은 업계의 인지상정(...)임으로 감안하자. 시간이 많이 흐른 후 해외 인터뷰들에 밝힌 이야기는 다르다.
자신의 초현실적인 글쓰기 취향을 평생 지켰다면 커리어는 컬트 작가에서 끝났을 것이라고 밝혔다. 주류 작가로 진입한 이후 자신이 원하는 글을 쓰고자하는 전략에 의해 써낸 현실주의+연애 소설이며, 결국 자신이 예상한 대로 되었지만 성공한 정도가 너무 거대하다는 것이 불만 아닌 불만 정도.
3년간 유럽 체류 시절[8]에 쓴 소설이며 《댄스 댄스 댄스》도 같은 시기에 쓰여졌다.

3.4. 장편 소설가


하루키의 저작은 소설 외에도 에세이, 번역, 논픽션 등 다방면에 걸쳐 있고, 이처럼 서로 다른 형태의 작업들을 의도적으로 돌아가며 집필하고 있다. 하지만 자신을 본디 장편작가라고 규정하고 있으며, 단편과 중편소설을 "실험"의 장으로 다루면서 여기서 얻은 것들을 장편소설에 도입한다고 말한다. 또한 이들의 균형을 잘 잡아가며 작업을 진행해야 하므로 원칙적으로 의뢰를 받고 하는 일은 맡지 않는다고.

3.5. 종합소설로의 시도


하루키는 1990년대 후반부터 자주 "종합소설을 쓰고 싶다"는 말을 했다. "종합소설"의 본보기로 하루키는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인용한다.
종합소설이란 "다양한 세계관과 여러 가지 관점들을 하나의 이야기 속에 짜넣고 이들을 조합함으로써 뭔가 새로운 세계관이 부상하는" 소설을 목표로 삼는다고 한다. 그리고 "관점을 몇 개로 나누려면 인칭 변화가 꼭 필요하다"고 한다. 이와 같은 시도는 "태엽 감는 새 연대기"(1인칭 안에 편지나 다른 등장인물들의 회상이 삽입됨)와"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전부 3인칭으로 쓰임), "해변의 카프카"(1인칭과 3인칭이 번갈아 가며 나타남), "애프터 다크"(3인칭에 "우리"라는 1인칭 복수 대명사가 더해짐) 등의 작품에서 엿보인다.

3.6. 작품관 변화: '무심함'에서 '헌신'으로


1980년대 후반까지 하루키의 모든 소설의 화자는 상당히 깔끔하면서도 담담하고 자폐스러우면서도 감각적인 성격과 취향이 있는 '나'에 국한되어 있었으나 1990년대 이후에는 장기간 미국 체류에 따른 영향, 불혹을 넘긴 나이에 따른 작가의 내면 성장으로 말미암아 타자에서 자발하는 무심함('''detachment''')에서 헌신('''commitment''')으로 변하기 시작한 세계관이 수필집 '슬픈 외국어'에서 보이기 시작한다. 이것은 이후 1990년대 중반·후반 일본을 강타했던 옴진리교 사건 피해자 유가족과 예전 옴진리교 소속자들을 취재한 르포인 《언더그라운드》에서 크게 진보하며, 작가 스스로 어린 시절의 한때를 보냈던 고베에서 일어난 대지진을 모티브로 한 단편 연작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에서는 최초로 3인칭 주인공을 등장하게 하고 마지막 단편 <허니 파이>에서 주인공의 입을 빌려 'commitment'를 대상으로 한 의지를 본격으로 현로하고서 하루키의 작품 세계는 기존 세계관과 인간관에 토대하서도 작중 화자의 스타일을 바꾸어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거나(<해변의 카프카>), 타인과의 연계 / 소통을 희망을 이야기하는(<어둠의 저편>) 태도를 보인다.

4. 작가 성향



4.1. 이념


자유인권을 강조하고 조직상·집단상 행동이나 국가주의적인 운동에는 상당히 반발하는 개성이 있다. 자민당의 준 막부 정치가 지속되는 일본 행정부와 일본 사회의 공동체 성향을 향한 비판을 그 사람이 쓴 작품 곳곳에서 목도 가능하지만, 그렇다고 극좌를 두둔하지도 않는다. 그 자신 1960년대 말 전공투의 좌절을 경험하고서 개인주의를 토대로 문학에 입문한 예. 자유주의적 좌파라고 보는 것은 사실이나, 하루키는 좌우와 관계 없이 '''악한 조직 논리에 기초한 집단 행동을 혐오'''한다. 즉, 그냥 '아무 생각이나 기준도 없이 떼로 우루루 몰려다니며 못된 짓 하는 거 싫어한다'는 얘기. 근본적으로 봤을때는 일본이라는 나라의 만성적인 보수성향을 혐오하는 기준으로도 볼수 있다는 점에서 적어도 군중심리에서는 자유로운 입장으로 볼수 있는 다른 일면이기도 하다.
예컨대, 미국·일본 안보조약 반대 운동이 있었던 1960년이나 반전운동을 중심으로 대규모 학생운동이 벌어졌던 1969년 같은 해를 두고 가수 모씨가 어떤 노래를 부른 해라는 식으로 거시 담론을 의도로 회피하는 태도를 자주 드러내지만, 이런 회피하는 태도는 예전에는 역설 일종으로 간주됐으나 현 시점에서는 더는 역설로서 의미는 없고 독자는 그저 하루키의 농담을 진지하게 수용할 뿐이라는 주장도 제기되나 이런 성향이 역설스럽게도 은연중 내재된 일본인의 기묘한 피해의식을 조장했다고 (<해변의 카프카>[9]) 고모리 요이치[10] 같은 사람들에게는 대차게 까이기도 했으나 특히 언더그라운드 이후 개인이 모여 합력하는 긍정스러운 공동체나 결속을 두고서는 오히려 긍정하는 편. 한마디로 집단 자체를 싫어하지는 않지만, 그것과 별개로 본인이 여전히 집단이나 조직에 잘 적응한다거나 속하기 좋아하지는 않는 성향이라서 일본 우익 세력은 물론 전공투 같은 좌익 세력의 전체주의적인 면도 못마땅하게 보는 작가 중 한 명이다. 밑에 언급될 오에 겐자부로만큼 일본 우익 세력에 자주 쓴소리하지는 못하지만, 가끔씩 인터뷰나 기고문을 이용해 일본 우익 세력의 보수성이나 호전성을 부정하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가 2012년 일본의 우경화를 대차게 깐 기고문 탓에 넷우익들이 하루키를 벌떼처럼 까고 들기도 했으며, 앞서도 언급했듯이 고모리 요이치 같은 좌익 평론가에게도 맹렬한 비판을 받는다.
또한 몽골 여행을 가서 노몬한 사건(할힌골 전투) 승전비를 보고 일본 극우를 비아냥거린 일로 살인 협박받은 바 있기도 하다. 우습게도 이때 한 몽골 여행이 그 일본 극우 잡지이던 마르코 폴로[11]에서 보내주었다. 이에 대해,'그의 수필 및 기행문 책자에서도 언급하듯이 보내주면 가는 거지. 일절 마르코 폴로의 이념이니 뭐니 신경도 안 썼다.'는 말이 있는데 마르코 폴로(동음이의어)에는 '몽골 여행기행문 책자에서도 이 잡지 이름이 언급된다.'고 한다. 도리어 <상실의 시대> 내의 묘사와 엮어 극우잡지 후원으로 몽골에 다녀온 연유로 성향을 의심하는 의견도 있다.# 물론, 정치 성향과 무관하게 여행 보내준 것에 대해 언급을 안 하는게 더 이상하다는 옹호도 있다. 일본한국 뺨치는 수준으로 예의를 엄청 따지는 나라인 걸 생각하면, 아무리 극우 잡지가 보내준 여행이라 한들 감사의 말 하나 안 올리면 정치 성향은 둘째치고 까였을 것이라는 것.[12].
그래도 어쨌든 2010년대 기준으로 역사 직시 발언#, 난징 대학살에 대한 바른말#을 한 작가이다.
맥아더가 일본어에서 원어 발음에 따라 '맛카사'(マッカーサー)라고 부르는데,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것과 거꾸로 처박혔다는 뜻의 '맛사카사마'(真っ逆さま)를 이용해 말장난을 하기도 했다.

4.2. 문화


현대 미국의 문학과 영화에 많이 영향받고 자랐으며 패션 잡지와 영화와 재즈로 대표되는 서구 문화에 익숙하다. 이것은 작품에도 많이 나타나는데 소설에선 지배하는 분위기와 세부 묘사 대상으로, 수필에서는 소재로 사용하며 극단적으론 수필집 한 권 전체를 1980년대의 미국 문화를 이야기하는 데 할애할 때도 있다.
7년간 고쿠분지에서 재즈 카페를 경영할 정도로 재즈를 비롯한 거의 모든 음악을 좋아하며 오디오 시스템과 중고 레코드 모으기에서는 오타쿠다운 열정이 있지만, 좋은 음악을 듣고 싶어 오디오 시스템에 투자하지 오디오 시스템 자체를 좋아하지는 않는다고. 본인의 수필을 보면, 이공계 계열 센스는 꽝이라서 자주 이사하는 하루키는 이사 때 복잡한 오디오 배선 연결을 제일 골치 아파한다. 처음 외국에 가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그 도시의 중고 레코드 가게 알아보기라니 이미 할 말이 없는 정도. 그 사람의 집에는 음악 감상실이 따로 있다. 특히 재즈에 관한 한 평론가 수준으로 수필집을 내기도 했지만, 음악을 좋아할 뿐 음향 기기를 조작에는 소질이 없다. 이사하면 스파게티 가락처럼 얽히고 설킨 오디오 선을 제대로 꼽는 행위만으도 고역이라고 주장하는데 몇몇 작품을 보면, 스페인계 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