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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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소설가, 수필가, 르포 작가이자 번역가.
무라카미 류와 함께 일본의 한 세대를 풍미한 작가로 대접받는다. 요시모토 바나나와 함께 해외에서도 유명한 작가인데,[2] 특히 서구권에서 인물의 작품 대부분이 번역된 몇 안 되는 일본 작가이며, 대한민국 출판업계에서도 주요 출판사의 통계상 21세기 들어 '''가장 인지도 높은 일본 작가'''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힌다.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 1979년 군조신인문학상을 받으면서 데뷔하였다. 1987년 발간된 《노르웨이의 숲》이 430만 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국내외적으로 무라카미 하루키 붐이 일어나게 되었다. 단편소설, 장편소설을 포함하여 에세이, 논픽션, 기행집 집필 활동도 활발하고 영미 문학 일역가로서도 활동한다. 30대 후반부터는 소설도 소설이지만 세계 각지를 여행하면서 에세이를 많이 쓰기도 했다. 2015년 타임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 Icon 부문에 선정되었다.
2. 생애
하루키의 에세이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등 여러 책에 기술된 일화, 또는 실제 알려진 사실 등을 서술함.
2.1. 어린 시절과 20대
1949년 교토부 교토시 후시미구에서 그 당시 흔치 않은 무녀독남 외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사립 고요 학원 중학교의 교사로 부임하자 곧 효고현 니시노미야시의 슈쿠가와로 전학 갔다. 아버지는 교토부 나가오카쿄시 아오의 정토종 니시야마파 고묘지 주지스님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오사카 센바의 장사꾼 집안의 딸로 부모 모두 간사이 토박이였기에 당연하게 간사이 사투리를 쓰면서 지냈다. 또 부모 두 분 다 국어교사라서 책을 좋아하는 부모의 영향으로 독서가로 자라났다. 2019년에 문예춘추에 따르면 중일전쟁 당시 아버지가 1938년 징병돼 중국에 배치됐었다고 밝혔다. 하루키의 초등학생 때는 아버지가 자신이 소속된 부대가 '''중국군 포로를 처형'''했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이후 2차례 더 군에 소집됐으며, 전후에는 교사로 재직했다고 한다.#
니시노미야 시립 하마와키 초등학교 입학, 니시노미야 시립 고로엔 초등학교 졸업. 아시야 시립 세이도 중학교를 나와서 효고현립 고베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부모님이 일본문학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것에 진절머리가 나서 서구 번역문학에 심취했고, 부모가 구독하던 가와데 쇼보의 <세계문학전집>과 중앙공론사의 <세계의 문학>을 한 권 한 권 읽으며 10대 시절을 보냈다. 중학교 때부터는 중앙공론사의 전집 <세계의 역사>를 반복해서 읽었다. 고베 고등학교에서는 신문위원회에 소속돼 있었다.
재수를 해서 1968년에 와세다대학 제1문학부에 입학해 연극과에 진학했다.[3] 대학교 재학 중에는 연극 박물관에서 영화 시나리오를 탐독하는가 하면 영화 각본가를 꿈꾸며 시나리오를 집필하기도 했는데, 학교에는 거의 나가지 않고 신주쿠에서 레코드 가게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가부키초의 재즈 찻집을 뻔질나게 드나들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1970년대 초에는 도쿄도 치요다구 스이도바시에 있던 재즈 찻집인 "스이도바시 윙"의 종업원이 됐다. 1971년에 다카하시 요코와 '''학생 신분으로 결혼'''을 했고, 한때는 분쿄구에서 침구가게를 운영하던 아내의 처가에 세들어 살았다.
2.2. 재즈 카페 개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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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도쿄도의 코쿠분지시에서 '피터 캣[4][5] '이라는 커피점(저녁에는 재즈바)을 개업해서 운영하였다.가게 이름은 이전 기르던 고양이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밤에는 재즈바가 되고, 주말에는 라이브 공연을 실시했다. 개점 자금은 500만 엔으로, 절반은 부부가 아르바이트를하고 모은 돈, 나머지 절반은 부모에게서 받은 돈이었다. 가게는 아내와 함께 1974년부터 1981년까지 운영했다.
1975년 7년간 재학한 와세다대학을 졸업했다. 졸업논문의 제목은 <미국영화에서의 여행의 계보>로, 이 논문에서 아메리칸 뉴시네마와 '이지 라이더'에 대해 논했다. 1977년 '피터 캣'을 센다가야로 옮긴다.
2.3. 데뷔와 성공
1978년 4월 1일, 메이지진구 구장에서 프로야구 개막전을 관람하던 중 소설을 쓰자는 생각이 떠올랐다. 1회 말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선발 타자 데이브 힐턴이 2루타를 친 순간의 일이었다고 한다. 그 후로 재즈 찻집을 운영하는 한편으로 매일밤 부엌 테이블에서 글을 계속 썼다.
1979년 4월, '군조'에 응모한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 제81회 군조 신인 문학상을 수상했다. 이 작품이 '군조' 1979년 6월호에 실리면서 작가로 데뷔했다. 커트 보네거트, 리처드 브라우티건 등 미국문학의 영향을 받은 문체로 현대의 도시 생활을 그려내며 주목을 받았다. 그해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제81회 아쿠타가와상 및 제 1회 노마 문예 신인상 후보에 오르는가 하면, 이듬해에는 《1973년의 핀볼》로 제83회 아쿠타가와상 및 제2회 노마 문예 신인상 후보에 올랐다. 1981년에 전업작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피터 캣'을 다른 사람에게 넘겼다. 이듬 해에는 장편소설 《양을 쫓는 모험》을 발표해 제4회 노마 문예 신인상을 탔다.
1985년에는 두 개의 이야기가 번갈아 가며 진행되는 장편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발표해 제21회 다니자키 준이치로상을 수상했다. 1986년 10월에 유럽으로 이주했다. 주된 체류지는 그리스, 이탈리아, 영국.
1987년에 "100% 연애소설"이라는 타이틀을 내건 《노르웨이의 숲》을 발간했는데 결과는 초대박. ''''노르웨이의 숲'은 상권과 하권을 통틀어 430만 부 이상이 팔려나간 베스트셀러였으며 일본내 소설 최대 발행부수 신기록을 세우는 등 일본 전국적으로 하루키 신드롬'''이 일어났다.
1989년 10월에는 하루키 소설 중 처음으로 '양을 쫓는 모험'이 영어로 번역되었다. 영어 제목은 Wild Sheep Chase.
2.4. 1990년대, 작품관의 변화
1991년 뉴저지주 프린스턴 대학교의 객원 연구원으로 초빙 받아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때를 전후로 걸프전이 발발했다. 훗날 하루키는 '''"솔직히 말해 그 당시 미국의 애국적이고도 마초적인 분위기는 그리 달갑지 않았다"'''고 술회했다. 그 다음 해에 체류 기간 연장을 위해 객원 강사로 취임한다. 현대 일본문학 세미나에서 제 3의 신인에 대해 강의하면서 에토 준의 '성숙과 상실'을 서브 텍스트로 썼다. 1994년 4월에는 '태엽 감는 새 연대기' 제1부와 2부를 펴냈으며, 이듬해 6월 귀국. 8월에 '태엽 감는 새 연대기' 제3부를 간행했다. 이듬 해 '태엽 감는 새 연대기'로 제47회 요미우리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1996년 6월에 '무라카미 아사히도 홈페이지'를 개설했다. 1997년 3월에는 지하철 사린 사건의 피해자들의 인터뷰를 정리한 논픽션 《언더그라운드》를 출판했는데, 그때까지는 오히려 내성적인 분위기로 사회에 무관심한 청년을 그려 왔던 하루키가 사회 문제를 정면에서 다뤄 주위를 놀래켰다. 1999년에는 《언더그라운드》 속편으로 옴진리교 신자들과의 인터뷰를 정리한 《약속된 장소》를 발표해 제 2회 구와바라 다케오 문예상을 수상했다. 이 시기에 사회적인 사건들을 소재로 다루게 된 것에 대해 하루키 자신은 "커미트먼트"(commitment)라는 단어를 써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commitment(책임감, 헌신)이라는 것에 대해서 요즘 많이 생각합니다. 예컨대 소설을 쓸 때도 저한테 이 commitment라는 게 매우 중요해졌습니다. 예전에는 detachment(무심함)가 중요했는데 말이죠.
'태엽 감는 새 연대기'는 저에게는 제3스텝에 해당합니다. 우선 아포리즘과 디태치먼트가 있고, 다음으로 이야기를 하는 단계가 있는데, 마침내 그래도 뭔가 부족하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은 거죠. 그 부분에서 commitment라는 것과 관련이 생겨났을 겁니다. 저 자신도 아직 정리가 안 되고 있지만요.
- 동상(同上), 70쪽에서
2.5. 2000년대
2002년 9월, 처음으로 소년을 주인공으로 한 장편 소설 《해변의 카프카》를 발표한다. 2004년에는 카메라아이와 같은 시점이 등장하는 실험적인 작품 《애프터 다크》를 발표했다. 2005년 '해변의 카프카'의 영문 번역판인 Kafka on the Shore가 뉴욕 타임스의 "The Ten Best Books of 2005"에 선정돼 하루키에 대한 국제적인 평가가 높아졌음을 보여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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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에는 '''프란츠 카프카상'''과 '''프랭크 오코너 국제 단편상''' 등 국제적인 문학상을 연거푸 수상했다. 카프카상은 아시아권 통틀어서 최초로 수상했다. 특히 카프카상은 전년도 수상자인 해럴드 핀터와 그 전년도 수상자인 엘프리데 옐리네크 모두 그해의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점에서, 하루키가 2006년도 노벨 문학상의 유력한 후보로 꼽히기도 했다. 그해 세계 최대 규모의 배팅업체인 영국 라드브록스의 스톡홀름 사무소는 하루키의 수상 가능성에 34배의 배율을 걸어 18번째 인기마로 올렸다(수상의 영광은 예상 1위였던 오르한 파무크에게 돌아갔다). 2007년에는 배율이 11배, 인기 순위는 6위로 한 단계 더 뛰어올랐다. 게다가 2007년 연수입을 보면 외국에서 벌어들이는 것이 이미 일본 국내 수입을 넘어섰고, 사무소의 작업량도 3분의 2는 외국과 작업하는 것이라고 한다.
2008년 6월 3일 프린스턴 대학은 무라카미 하루키를 포함한 5명에게 명예 학위를 수여했다고 발표했다. 하루키에게 수여된 것은 문학 박사이다.
2009년 1월 21일 이스라엘의 일간지 <하레츠>가 하루키의 예루살렘상 수상을 발표했다. 당시 이스라엘은 가자 침공으로 국제적인 비난을 받고 있었는데, 이 수상에 대해 오사카 시민 단체 등에서는 "이스라엘의 전쟁 범죄를 은폐하고 면죄부를 주는 꼴"이라면서 사퇴를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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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하루키는 2월 15일 예루살렘에서 열린 시상식에 참석해 기념강연을 영어로 했다. 연설 전문은 즉각 미디어에 의해 중계됐고, 그 내용을 일본어로 번역한 다양한 글들이 온라인에 올라왔다. 『문예춘추』 2009년 4월호에 하루키의 인터뷰 "나는 왜 예루살렘에 갔는가"가 실렸는데, 기념강연 전문(영어와 일본어 둘 다)도 함께 수록됐다. 한편 수상식 때 연설 중반부터 페레스 이스라엘 대통령의 얼굴이 굳어졌다고 전해진다. 예루살렘 연설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밑의 항목을 참고하자.
2009년 5월 장편 소설 《1Q84》 1, 2권이 간행되었다. 11월까지 합계 223만 부의 발행 부수를 달성했다. 이 작품으로 매일 출판 문화상을 수상했다. 같은 해 12월 스페인 정부에서 스페인 예술 문학 훈장이 수여되고, Excelentísimo Señor라는 칭호를 받고 대우를 받았다.
2.6. 201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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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6월, 카탈로니아 국제상을 수상했다. 부상인 8만 유로(약 930만 엔)를 동일본 대지진 의연금으로 기부했다. 카탈로니아 국제상 수상 연설에서 일본의 원자력 정책을 비판했다
2012년 9월 28일 아사히 신문 조간 신문에 에세이 '영혼의 오가는 길'을 기고했다. 이 글에는 센카쿠 열도 문제와 한일간의 독도 문제에 의해 동아시아의 문화 교류가 파괴되는 사태를 걱정하였다. 하루키는 '''“문화의 등가교환은 ‘국경을 넘어 영혼이 오가는 길’이다. 지난 20년간 동아시아 문화권은 풍부하고 안정된 시장으로 성숙한 길에 접어들었다, '국경선’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이상 불행히도 영토 문제는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실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이슈이며, 실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이슈가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영토문제가 실무과제임을 넘어 ‘국민감정’의 영역에 발을 디디는 순간 그것은 ‘출구 없는 위험한 상황’을 초래한다”'''고 강조했다. 더불어 영토분쟁을 둘러싼 갈등에 대한 과격한 반응들은 값싼 술을 마신 뒤의 취기어린 행동에 가깝다고 비판하며 술이란 것이 하루가 지나면 취기는 물론 사라지지만 남는 것은 두통뿐이라면서 하루키는 ‘영토문제’에 집착하고 있는 한중일의 정치인들에게 경고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2013년 4월, 장편 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간행. 예약만 50만 부가 팔렸고 발매된지 6일 만에 100만부를 돌파. 2013년 종합 베스트셀러 종합 2위를 기록했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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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1월, 독일의 유력 일간지 '디 벨트'가 주는 '벨트 문학상' 올해의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하루키는 베를린에서 베를린 장벽 붕괴를 거론한 뒤 "세계에는 지금도 인종, 종교, 불관용, 근본주의, 그리고 욕망과 불안이라는 벽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우리들 소설가에게 벽은 뚫고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장애물"이라며 "벽을 통과할 자유가 있다는 점을 느끼게 하는 이야기를 되도록 쓰고 싶다"고 밝힌 뒤 "이 메시지를 자신들의 벽과 지금 이 순간에도 싸우고 있는 홍콩의 젊은이들에게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2015년 1월 15일 기간 한정 사이트 "무라카미씨가 있는 곳"을 개설했다. 이날부터 1월 31일까지 사이에 37,465 통의 편지가 전해졌고 공개된지 3개월 반 만에 1억 페이지뷰를 기록했다. 이 사이트는 4월 30일에 종료되었고 큰 인기에 힘 입어 단행본으로 나왔다.
안데르센 문학상 시상식 소감에서 '''"우리에게 맞게 아무리 역사를 다시 써도, 결국에는 우리 자신을 다치게 할 뿐"'''이라고 말했다
신작 장편 소설 《기사단장 죽이기》(騎士団長殺し)가 1부, 2부로 나뉘어 일본에서 2017년 2월 24일에 발매되었다. 제목은 1권은 드러나는 이데아(顕れるイデア), 2권은 이동하는 메타포(遷ろうメタファー).
1, 2부의 한국어 번역본 출간은 동시 출간 기준으로 2017년 7월 12일이며, 전체 제목은 기사단장 죽이기, 1권 제목은 현현하는 이데아, 2권 제목은 전이하는 메타포로 번역되었다.
2018년 11월 4일에는 37년 만에 일본내 기자회견을 갖고 자신의 자필 원고와 장서, 편지 등 문서들과 음반을 모교에 기증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자식이 없기 때문에 사후 자신의 자료가 붕 떠서 흩어지면 곤란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와세다 측에선 이를 바탕으로 무라카미 연구 센터를 설립하기로 했다.
2.7. 2020년대
2020년 7월에 마이니치신문과 인터뷰에서 관동대지진 후 벌어진 조선인 학살 사건을 거론하며 코로나19이 확산하는 가운데 대두하는 배타주의에 우려를 표명했다.# 12월 프랑스 일간지 리베라시옹와 인터뷰에서 일본회의 6명 임명 보류와 관한 발언했다.#
3. 작품의 특징
3.1. 평이한 문장과 난해한 이야기
평이하고 친숙한 문장은 하루키가 데뷔 당시부터 의식하고 있던 점으로, 하루키에 따르면 "낮은 문턱"으로 "마음에 호소하는" 문장은 미국작가인 브로티건과 보네거트에게서 받은 영향이라고 한다. "글에선 리듬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도 하루키가 곧잘 하는 말인데, 그는 이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하여튼 7년 가량 아침부터 밤까지 재즈 가게를 운영했는데, 머릿속에서 계속 엘빈 존스의 하이햇이 울리더라구요."
하루키가 구사하는 은유의 정교함에 대해 사이토 다마키는 "은유 능력을 서로 다른 두 이미지 사이의 점프력이라고 생각할 때, 하루키만큼 멀리까지 점프할 수 있는 일본 작가는 없다"고 평가한다.
반면 문장은 평이한 데 반해 작품의 스토리는 흔히 난해하다는 지적을 받는다. 하루키 자신은 이러한 "스토리의 난해함"에 대해서 독자들에게 "논리"가 아닌 "이야기"로 텍스트를 이해해 달라고 촉구한다. 이야기 속의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이나 현상들을 하루키는 "격렬한 은유"라 칭하면서, 영혼의 깊은 부분에 있는 어두운 영역을 이해하려면 밝은 영역의 논리로는 부족하다고 설명한다. 이처럼 "평이한 문체로 고도의 내용을 다루고, 현실 세계에서 비현실의 또 다른 세계로 seamless하게(=이음매 없이, 완벽하게) 이동하는" 작풍은 일본 국내만 아니라 해외에도 소위 "하루키 칠드런"이라 일컬어지는 바 하루키의 영향을 받은 작가들을 배출하고 있다. 또 하루키의 작품은 기존의 일본문학과 대비해 종종 미국적이고 무국적적이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세계적인 보편성이 높이 평가되고 있는데, 하루키 본인은 자신의 소설이 어디까지나 일본을 무대로 일본어로 쓴 "일본문학"이며 무국적적인 문학을 지향하는 것은 아니라고 밝힌다. 덧붙여서 하루키가 즐겨 사용하는 모티프는 "연인이나 아내, 친구의 실종"으로, 장단편을 막론하고 거듭 쓰이고 있다.
3.2. 작품 간 유사점
대부분 소설 주인공은 1인칭 '나'로 전개되고 '나'는 20대에서 30대 남자로서 부모와 거의 교류가 없으며 형제도 없다. 이것은 하루키의 성장 배경에서 비롯된 듯 하나, 근작 '어둠의 저편', '해변의 카프카', '1Q84'도 일부에서는 3인칭 시점을 시도했으며 주인공을 15세 소년으로 내세우기도 하는 등으로 변화했다.
하루키의 작품에는 성격이 매우 다른 자매, 즉 우수한 언니와 평범한 동생, 쌍둥이[7] ,벽을 뚫고 지나가기, 주인공이 자주 먹는 스파게티, 끝없이 깊은 우물, 아내의 실종, 자아의 성장, 연결되지 않는 전화가 소재로서 유난히 반복하여 등장한다.
그리고 섹스가 정말 자주 등장한다. 일부에서는 "야설작가"라고 폄하하기도 하는데, 하루키의 소설에서는 섹스를 통해 해당 주인공의 성장이나 이야기를 해결하는 열쇠가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어쨌든 결국은 같이 잔 이야기
마지막으로 죽음에 관한 내용도 굉장히 많이 등장하는 편인데, 이는 단편소설에서 짧은 내용으로 인상을 깊게 남기기 위해서는 죽음만큼 효과적인 소재가 없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는 비단 무라카미 하루키뿐만이 아닌, 동화 작가가 아닌 이상 거의 모든 소설 작가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경향성이다.
그 밖에 잘 등장하는 것들로 미스테리한 여성, 귀 페티쉬, 마른 우물, 무언가의 실종, 추적당하는 느낌, 예상치못한 전화, 고양이들, 오래된 재즈 레코드, 도시의 권태감, 초자연적인 힘, 달리기, 비밀통로, 자유공간, 기차역, 역사적 회상, 조숙한 십대, 요리, 고양이와의 대화, 평행세계, 괴상한 섹스, 도쿄의 밤, 흔하지 않은 이름, 얼굴없는 악당, 고양이들의 실종 등이 있다.
3.3. 《노르웨이의 숲》의 예외성
하루키의 많은 소설에서는 오컬트 요소와 초현실주의적인 존재(예: 양 사나이)가 빠지지 않고 등장하며 '의식 아래 세계'가 현실 세계와 동시에 진행되는 작품이 많다.
《노르웨이의 숲》은 하루키가 쓴 작품 중 유일하게 이런 오컬트다운 요소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 현실주의 소설이지만 역설스럽게도 이것이 하루키가 쓴 작품 중 가장 많이 판매된 작품이다. 작가 자신도 그저 단발성 시도에 가까웠던 캐주얼한 작품이 최고 히트작이라는 사실에 크게 부담스러웠다고 고백한다. 오죽하면 이전 평범한 전업 작가였던 시절에는 사랑받던 느낌이였는데 '노르웨이의 숲'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자 모든 사람에게 미움받는 느낌까지 들었었다고. 건방지게 들리겠지만 백만 부가 팔린다는 건 자신에겐 정말 기가 찰 정도로 지나치게 높은 판매고라서 감당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다만 유명작가들이 명성을 얻은 후 초연한 태도를 표하는 것은 업계의 인지상정(...)임으로 감안하자. 시간이 많이 흐른 후 해외 인터뷰들에 밝힌 이야기는 다르다.
자신의 초현실적인 글쓰기 취향을 평생 지켰다면 커리어는 컬트 작가에서 끝났을 것이라고 밝혔다. 주류 작가로 진입한 이후 자신이 원하는 글을 쓰고자하는 전략에 의해 써낸 현실주의+연애 소설이며, 결국 자신이 예상한 대로 되었지만 성공한 정도가 너무 거대하다는 것이 불만 아닌 불만 정도.
3년간 유럽 체류 시절[8] 에 쓴 소설이며 《댄스 댄스 댄스》도 같은 시기에 쓰여졌다.
3.4. 장편 소설가
하루키의 저작은 소설 외에도 에세이, 번역, 논픽션 등 다방면에 걸쳐 있고, 이처럼 서로 다른 형태의 작업들을 의도적으로 돌아가며 집필하고 있다. 하지만 자신을 본디 장편작가라고 규정하고 있으며, 단편과 중편소설을 "실험"의 장으로 다루면서 여기서 얻은 것들을 장편소설에 도입한다고 말한다. 또한 이들의 균형을 잘 잡아가며 작업을 진행해야 하므로 원칙적으로 의뢰를 받고 하는 일은 맡지 않는다고.
3.5. 종합소설로의 시도
하루키는 1990년대 후반부터 자주 "종합소설을 쓰고 싶다"는 말을 했다. "종합소설"의 본보기로 하루키는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인용한다.
종합소설이란 "다양한 세계관과 여러 가지 관점들을 하나의 이야기 속에 짜넣고 이들을 조합함으로써 뭔가 새로운 세계관이 부상하는" 소설을 목표로 삼는다고 한다. 그리고 "관점을 몇 개로 나누려면 인칭 변화가 꼭 필요하다"고 한다. 이와 같은 시도는 "태엽 감는 새 연대기"(1인칭 안에 편지나 다른 등장인물들의 회상이 삽입됨)와"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전부 3인칭으로 쓰임), "해변의 카프카"(1인칭과 3인칭이 번갈아 가며 나타남), "애프터 다크"(3인칭에 "우리"라는 1인칭 복수 대명사가 더해짐) 등의 작품에서 엿보인다.
3.6. 작품관 변화: '무심함'에서 '헌신'으로
1980년대 후반까지 하루키의 모든 소설의 화자는 상당히 깔끔하면서도 담담하고 자폐스러우면서도 감각적인 성격과 취향이 있는 '나'에 국한되어 있었으나 1990년대 이후에는 장기간 미국 체류에 따른 영향, 불혹을 넘긴 나이에 따른 작가의 내면 성장으로 말미암아 타자에서 자발하는 무심함('''detachment''')에서 헌신('''commitment''')으로 변하기 시작한 세계관이 수필집 '슬픈 외국어'에서 보이기 시작한다. 이것은 이후 1990년대 중반·후반 일본을 강타했던 옴진리교 사건 피해자 유가족과 예전 옴진리교 소속자들을 취재한 르포인 《언더그라운드》에서 크게 진보하며, 작가 스스로 어린 시절의 한때를 보냈던 고베에서 일어난 대지진을 모티브로 한 단편 연작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에서는 최초로 3인칭 주인공을 등장하게 하고 마지막 단편 <허니 파이>에서 주인공의 입을 빌려 'commitment'를 대상으로 한 의지를 본격으로 현로하고서 하루키의 작품 세계는 기존 세계관과 인간관에 토대하서도 작중 화자의 스타일을 바꾸어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거나(<해변의 카프카>), 타인과의 연계 / 소통을 희망을 이야기하는(<어둠의 저편>) 태도를 보인다.
4. 작가 성향
4.1. 이념
자유와 인권을 강조하고 조직상·집단상 행동이나 국가주의적인 운동에는 상당히 반발하는 개성이 있다. 자민당의 준 막부 정치가 지속되는 일본 행정부와 일본 사회의 공동체 성향을 향한 비판을 그 사람이 쓴 작품 곳곳에서 목도 가능하지만, 그렇다고 극좌를 두둔하지도 않는다. 그 자신 1960년대 말 전공투의 좌절을 경험하고서 개인주의를 토대로 문학에 입문한 예. 자유주의적 좌파라고 보는 것은 사실이나, 하루키는 좌우와 관계 없이 '''악한 조직 논리에 기초한 집단 행동을 혐오'''한다. 즉, 그냥 '아무 생각이나 기준도 없이 떼로 우루루 몰려다니며 못된 짓 하는 거 싫어한다'는 얘기. 근본적으로 봤을때는 일본이라는 나라의 만성적인 보수성향을 혐오하는 기준으로도 볼수 있다는 점에서 적어도 군중심리에서는 자유로운 입장으로 볼수 있는 다른 일면이기도 하다.
예컨대, 미국·일본 안보조약 반대 운동이 있었던 1960년이나 반전운동을 중심으로 대규모 학생운동이 벌어졌던 1969년 같은 해를 두고 가수 모씨가 어떤 노래를 부른 해라는 식으로 거시 담론을 의도로 회피하는 태도를 자주 드러내지만, 이런 회피하는 태도는 예전에는 역설 일종으로 간주됐으나 현 시점에서는 더는 역설로서 의미는 없고 독자는 그저 하루키의 농담을 진지하게 수용할 뿐이라는 주장도 제기되나 이런 성향이 역설스럽게도 은연중 내재된 일본인의 기묘한 피해의식을 조장했다고 (<해변의 카프카>[9] ) 고모리 요이치[10] 같은 사람들에게는 대차게 까이기도 했으나 특히 언더그라운드 이후 개인이 모여 합력하는 긍정스러운 공동체나 결속을 두고서는 오히려 긍정하는 편. 한마디로 집단 자체를 싫어하지는 않지만, 그것과 별개로 본인이 여전히 집단이나 조직에 잘 적응한다거나 속하기 좋아하지는 않는 성향이라서 일본 우익 세력은 물론 전공투 같은 좌익 세력의 전체주의적인 면도 못마땅하게 보는 작가 중 한 명이다. 밑에 언급될 오에 겐자부로만큼 일본 우익 세력에 자주 쓴소리하지는 못하지만, 가끔씩 인터뷰나 기고문을 이용해 일본 우익 세력의 보수성이나 호전성을 부정하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가 2012년 일본의 우경화를 대차게 깐 기고문 탓에 넷우익들이 하루키를 벌떼처럼 까고 들기도 했으며, 앞서도 언급했듯이 고모리 요이치 같은 좌익 평론가에게도 맹렬한 비판을 받는다.
또한 몽골 여행을 가서 노몬한 사건(할힌골 전투) 승전비를 보고 일본 극우를 비아냥거린 일로 살인 협박받은 바 있기도 하다. 우습게도 이때 한 몽골 여행이 그 일본 극우 잡지이던 마르코 폴로[11] 에서 보내주었다. 이에 대해,'그의 수필 및 기행문 책자에서도 언급하듯이 보내주면 가는 거지. 일절 마르코 폴로의 이념이니 뭐니 신경도 안 썼다.'는 말이 있는데 마르코 폴로(동음이의어)에는 '몽골 여행기행문 책자에서도 이 잡지 이름이 언급된다.'고 한다. 도리어 <상실의 시대> 내의 묘사와 엮어 극우잡지 후원으로 몽골에 다녀온 연유로 성향을 의심하는 의견도 있다.# 물론, 정치 성향과 무관하게 여행 보내준 것에 대해 언급을 안 하는게 더 이상하다는 옹호도 있다. 일본이 한국 뺨치는 수준으로 예의를 엄청 따지는 나라인 걸 생각하면, 아무리 극우 잡지가 보내준 여행이라 한들 감사의 말 하나 안 올리면 정치 성향은 둘째치고 까였을 것이라는 것.[12] .
그래도 어쨌든 2010년대 기준으로 역사 직시 발언#, 난징 대학살에 대한 바른말#을 한 작가이다.
맥아더가 일본어에서 원어 발음에 따라 '맛카사'(マッカーサー)라고 부르는데,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것과 거꾸로 처박혔다는 뜻의 '맛사카사마'(真っ逆さま)를 이용해 말장난을 하기도 했다.
4.2. 문화
현대 미국의 문학과 영화에 많이 영향받고 자랐으며 패션 잡지와 영화와 재즈로 대표되는 서구 문화에 익숙하다. 이것은 작품에도 많이 나타나는데 소설에선 지배하는 분위기와 세부 묘사 대상으로, 수필에서는 소재로 사용하며 극단적으론 수필집 한 권 전체를 1980년대의 미국 문화를 이야기하는 데 할애할 때도 있다.
7년간 고쿠분지에서 재즈 카페를 경영할 정도로 재즈를 비롯한 거의 모든 음악을 좋아하며 오디오 시스템과 중고 레코드 모으기에서는 오타쿠다운 열정이 있지만, 좋은 음악을 듣고 싶어 오디오 시스템에 투자하지 오디오 시스템 자체를 좋아하지는 않는다고. 본인의 수필을 보면, 이공계 계열 센스는 꽝이라서 자주 이사하는 하루키는 이사 때 복잡한 오디오 배선 연결을 제일 골치 아파한다. 처음 외국에 가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그 도시의 중고 레코드 가게 알아보기라니 이미 할 말이 없는 정도. 그 사람의 집에는 음악 감상실이 따로 있다. 특히 재즈에 관한 한 평론가 수준으로 수필집을 내기도 했지만, 음악을 좋아할 뿐 음향 기기를 조작에는 소질이 없다. 이사하면 스파게티 가락처럼 얽히고 설킨 오디오 선을 제대로 꼽는 행위만으도 고역이라고 주장하는데 몇몇 작품을 보면, 스페인계 가수 훌리오 이글레시아스를 '느끼한 목소리'라고 까는 태도라든지 가끔 남들과 다른 '''독특한 음악관(觀)'''을 보이는데 하루키는 "이글레시아스는 다들 싫어하지 않나? 그런 녀석은 서핑스쿨에 콱 처박아야 하는데. 하긴 그래봤자 곧 교관이라도 돼서 남들을 쥐어박을 테지" 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서도 오디오 잡지에 꾸준히 글을 연재하고 있고, 오디오 평론가들과 절친으로 지낸다.
오디오뿐만 아니라 총, 시계, 자동차와 같은 정밀 기계들에 대한 묘사가 디테일하고 사건이나 캐릭터를 상징하는 중요한 아이템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해변의 카프카의 카프카가 가출할적에 아버지의 롤렉스 서브마리너를 훔쳐갈까 하다가 여러가지 현실적인 이유로 대신 카시오 전자시계를 가져간다던가, 기사단장 죽이기에서 등장한 인물을 흰색 스바루 포레스터의 남자라고 부른다던가, 1Q84에서 여주인공이 세계가 바뀌었다는것을 알아채는 계기가 하루 아침에 일본 경찰의 제식 권총이 뉴 남부 M60에서 베레타 92로 바뀌었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고 였다던가...
그의 내성적이면서 담백한 성격은 수필집에서 확인 가능한데, 반면 단편 소설집 《밤의 거미원숭이》를 보면 콩트에 가까운 재미난 이야기도 많다. 장편은 진지하게 쓰고 단편은 가볍게 쓴다고 본인도 밝혔다. 장편소설이 본업이자 전력을 경주해 페이스 조절하면서 쓰는 마라톤이라면 단편소설과 수필은 휴식이나 스트레칭으로 생각하고 쓴다고 말한다. 한편, 일부 안티들에겐 노르웨이의 숲처럼 남녀간 정사신이 많고, 성애장면 묘사도 꽤 자세히 하는 작가라 에로 소설 작가 해도 잘하겠다는 비아냥을 받기도 한다.(...)
5. 하루키가 영향을 받은 작가와 작품
하루키는 자신에게 특히 영향을 끼친 작가로 스콧 피츠제럴드, 트루먼 카포티, 리처드 브라우티건, 커트 보네거트, 레이먼드 챈들러 등과 더불어, 프란츠 카프카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나쓰메 소세키, 오에 겐자부로 등을 꼽는다.
"이제까지 살면서 만난 가장 중요한 책"으로는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와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챈들러의 《롱 굿바이》이 세 권을 꼽는다. 요미우리 신문에 실린 《1Q84》에 관한 기자들과의 대담에서는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사적인 언어" 개념에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밝혔다.
6. 작품 일람
6.1. 장편소설
-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9)
- 1973년의 핀볼 (1980)
- 양을 쫓는 모험 (원제: 양을 둘러싼 모험) (1982)
-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1985)
- 상실의 시대 (원제: 노르웨이의 숲) (1987)
- 댄스 댄스 댄스 (1988)
-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1992)
- 태엽 감는 새 (원제: 태엽 감는 새 연대기) (1994[13] , 1995[14] )
- 스푸트니크의 연인 (1999)
- 해변의 카프카 (2002)
- 어둠의 저편 (원제: Afterdark) (2004) [15]
- 1Q84 (2009)
-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16] (2013)
- 기사단장 죽이기 (2017)[17]
6.2. 단편소설
일본에서 출간된 년도(같은 해일 경우 월) 순으로 나열. 리스트는 일본어 위키백과를 참조하였다.
- 중국행 슬로보트 (1980/4)
- 가난한 아주머니 이야기 (1980/12)
- 뉴욕 탄광의 비극 (1981/3)
- 5월의 해안선 (1981/4)
- 스파게티의 해에 (1981/5)
-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퍼센트의 여자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 (1981/7)
- 졸립다 (1981/8)
- 강오리 (1981/9)
- 빵가게 습격 (1981/10)
- 캥거루 통신 (1981/10)
- 강치 (1981/10)
- 32살의 데이트리퍼 (1981/11)
- 택시를 탄 흡혈귀 (1981/12)
- 마을과 그녀의 면양 (1982/1)
- 사우스베이 스트라트 - 듀비 브라더즈 <사우스베이 스트라트>를 위한 BGM (1982/2)
- 강치축제 (1982/3)
- 1963년.1982년의 이파네마 아가씨 (1982/4)
- 도서관에서 있었던 기이한 이야기 (1982/6~11)
- 서재기담 (1982/6)
- 월간 강치 문예 (1982/7)
- 매발톱꽃주의 밤 (1982/여름호)
- 오후의 마지막 잔디밭 (1982/8)
- 땅 속 그녀의 작은 개 (1982/11)
- 치즈케이크와도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나의 가난 (1983/1)
- 반딧불이 (1983/1)
- 헛간을 태우다 (1983/1)
- 거울 (1983/2)
- 고깔구이의 성쇠 (1983/3)
- 풀 사이드 (1983/10)
- 비 피하기 (1983/12)
- 장님 버드나무와 잠자는 여자 (1983/12)
- 춤추는 난쟁이 (1984/1)
- 택시를 탄 남자 (1984/2)
- 지금은 없는 공주를 위하여 (1984/4)
- 야구장 (1984/6)
- 구토 1979 (1984/10)
- 헌팅 나이프 (1984/12)
- 하이네켄 맥주의 빈깡통을 밟는 코끼리에 대한 단문 (1985/5)
- 빵가게 재습격 (1985/8)
- 코끼리의 소멸 (1985/8)
- 쌍둥이와 가라앉은 대륙 (1985/겨울호)
- 로마제국의 붕괴 (1986/1)
- 태엽 감는 새와 화요일의 여자들 (1986/1)
- 비오는 날의 여인 #241. #242 (1987/1)
- TV피플 (1989/6)
- 비행기: 혹은 그는 어떻게 시를 읽듯 혼잣말을 하였는가? (1989/6)
- 잠(무라카미 하루키) (1989/11)
- 가노 크레타
- 좀비(무라카미 하루키) (1990/1)
- 토니 다니자키
- 침묵
- 녹색짐승
- 얼음사나이
- 일곱 번째 남자
- 렉싱턴의 유령
- 개구리 군, 도쿄를 구하다 (1999/12)
- 벌꿀 파이 (2000/2)
- 사랑하는 잠자 (2013/9)
- 드라이브 마이 카 (2013/12)
- 예스터데이 (2014/1)
- 기노 (2014/2)
- 독립기관 (2014/3)
- 셰에라자드 (2014/2)
- 여자 없는 남자들 (2014/4)
- 일인칭 단수 (2020/7)
6.3. 수필집
하루키가 쓴 소설은 읽기 쉽고 주인공들의 사고방식이나 세계관도 대체로 '쿨'하다는 인상이 드는 작품이 많지만, 그것과 별개로 주제 자체는 우울하거나 무겁고 초현실주의적인 때가 잦은데 하루키가 쓴 수필집은 "소설의 하루키와 판이한 하루키"라고 할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고 재미있으며 위트가 넘치고 읽기도 쉽다. 자신은 '맥주회사가 만드는 우롱차' 같은 느낌으로 만든다고 밝혔다. 물론 자신의 이름을 걸고 쓰므로 최선을 다해 경주하지만 본업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고. 본래 소설을 집필하는 동안 주간지나 월간지, 문예 계간지에 틈틈이 연재하는 개념으로 수필을 작성하니 소설보다 분위기가 밝고 제시하는 주제도 명확하며 공감할 내용이 많다. 소설을 읽을 때는 잘 이해되지 않았던 부분이 수필을 읽고 확실히 이해되기도 하지만, 외국에서 살았던 이야기를 담은 수필은 일반 짧은 수필보다는 진지하고 작가의 작품세계 이해에 많이 유익하다. 대표작으로는 그리스와 이탈리아에서 1980년대에 한 생활을 녹여낸 <먼 북소리>, 프린스턴대학에서 1991년에서 1993년까지 2년간 체류했던 경험을 이야기하는 <슬픈 외국어(원제: 이윽고 슬픈 외국어)>가 있다.
초기 문학사상사에서 독점 계약 출판하던 시절에는 수필도 이 회사에서 언역해 출간한 작품이 많지만, 잡지에 연재했던 1980년대 수필집은 원래 체계와 제목을 무시하고 순서를 뒤죽박죽 섞거나 안자이 미즈마루의 삽화를 제외하고 언역한 때가 있어서 아쉽다.
워낙 다양한 출판사에서 하루키의 작품을 출간하고 있는 지금은 수필집도 단편소설도 온갖 삽화와 함께 쏟아져 나오고 있다. 경우에 따라 그림이 들어간 단편 한편에 만원이 넘는 강력한 가격대를 보여주기도 한다.
수필마다 삽화를 그린 화백 안자이 미즈마루의 재치 있는 화(畵)도 볼 만하다.
[image]
특히 안자이가 그리는 하루키의 얼굴은 not only simple but also real.
하루키가 쓴 어느 수필을 보면, 실물 하루키를 (즉 하루키의 사진을) 본 적이 없는 어느 여성 독자가 길에서 하루키를 알아보고 사인을 요청했다고 한다. 어떻게 자신을 알아보았느냐는 하루키의 대답에 그 여자는 "미즈마루가 그린 삽화와 똑같이 생겨서."였다고 대답했다. 얼핏보면 아기 장난 같은 화풍이 일품. 물론 진짜 장난은 아니다. 달인 경지라고 해야 할까?
백암출판사의 3권짜리 수필집과 <그러나 즐겁게 살고 싶다> / <작지만 확실한 행복>은 내용상 겹치는 부분이 많으며, 동 출판사에서 출간됐지만 시기상 나중에 출판된 <스크랩> 일부 내용은 <그러나 즐겁게 살고 싶다>에 포함되어 있다. 물론 모두 들어 있지는 않다.
6.3.1. 수필 일람
작품 제목과 분류는 문학사상사나 국내 여러 출판사의 한국어판 체계를 따라 연대별로 배열.
- 무라카미 하루키 수필집 (1~3, 도서출판 백암)
- 그러나 즐겁게 살고 싶다 (문학사상사)
- 작지만 확실한 행복 (문학사상사)
- 먼 북소리 (문학사상사)
- 우천염천 (문학사상사)
- 스크랩: 그리운 80년대의 추억 (문학사상사)
- 하루키의 여행법 (문학사상사)
- 무라카미 하루키의 위스키 성지여행 (문학사상사, 원제: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면)
- 또 하나의 재즈 에세이 (까치)
- 슬픈 외국어 (문학사상사)
- 하루키 일상의 여백 (문학사상사)
- 하루키, 하야오를 만나러 가다 (문학사상사)
- 무라카미 라디오 (까치)
- 오블라디 오블라다, 인생은 브래지어 위를 흐른다 (동문선)
- 승리보다 소중한 것 (문학수첩)
-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문학사상사)
-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비채)
- 무라카미 라디오 시리즈 (비채)
- 저녁무렵에 면도하기
-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
-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걸작선 (문학동네)
- 밸런타인데이의 무말랭이
- 세일러복을 입은 연필
- 해 뜨는 나라의 공장
- 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
- 시드니! (비채)
-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현대문학)
- 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 (문학동네)
- 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
6.4. 르포르타주
- 언더그라운드
- 언더그라운드 2권 약속된 장소에서
7. 번역가 활동
무라카미 하루키는 창작 활동과 병행하며 많은 번역을 해왔다.1979 년 "카이" 8월호에 게재 된 스콧 피츠제럴드의 단편 '슬픔의 공작'이 상업지에 발표한 것이 그의 번역 첫작품이다. 하루키는 이에 대해 "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라는 소설을 쓰고 '군조 신인상'을 받고 무엇보다 기뻤습니다. 이것으로 번역을 마음껏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피츠제럴드를 번역 한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실제로 '슬픔의 공작'의 번역 발표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군조' 1979 년 6월호에 게재된 지 불과 2개월 만의 일이었다.
1981년 5월 첫 번역서 '마이 로스트 시티: 피츠제럴드 작품집'을 간행. 1983년 7월 레이먼드 카버의 작품집 '내게 전화를 걸어'를 간행. 2004년 7월 "레이머드 카버 전집" 8권의 번역을 했다.
2003년 이후 미국 현대 문학의 번역을 지속적으로 발간하고있다. 같은 해 4월 《호밀밭의 파수꾼》을 번역하였다. 이 작품을 시작으로 2006년 《위대한 개츠비》, 2008년 《티파니에서 아침을》, 2007년 《기나긴 이별》을 시작으로 2009년 《잘가요 내사랑》, 2010년 《리틀 시스터》, 2012년 《큰 잠》, 2014년 《높은 창문》을 번역했다.
소설의 집필과 번역을 번갈아 행하는 작업 스타일을, 무라카미 하루키는 '''초콜릿과 소금전병'''이라고 비유했다.
8. 주요 수상 경력
- 군상 신인 문학상 (1979 년)
- 노마 문예 신인상 (1982 년)
- 다니자키 준이치로상 (1985 년)
- 요미우리 문학상 (1996년)
- 구와바라 다케오 학예상 (1999년)
- 프란츠 카프카상 (2006년)
- 세계환상문학대상 (2006년)
- 아사히상 (2007년)
- 와세다 대학 쓰보우치 소요 대상 (2007년)
- 버클리 일본상 (2008년)
- 매일 출판 문화상 (2009년)
- 예루살렘상 (2009년)
- 스페인 예술 문학 훈장 (2009년)
- 카탈로니아 국제상 (2011년)
- 고바야시 히데오상 (2012년)
- 벨트 문학상 (2014년)
- 안데르센 문학상(2016년)
8.1. 노벨 문학상 떡밥
2006년 이후 매년 노벨 문학상 후보로 거론되어 오고 있다. 후보자들을 노벨 재단에서 공개하는 것은 아니지만, 언론에서 계속 후보 수상자라 칭하는 이유는 그가 영국의 래드브록스라는 도박 사이트에서 배팅률이 높은 인물이기 때문이다. 래드브록스는 2006년에 오르한 파묵의 수상을 맞힌 이력이 있고, 2012년 수상자인 모옌도 당시 배팅률 2위였다. 문학 평론가들은 하루키의 수상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편이지만[19] , 수상자 선정의 추세를 보면 하루키가 근시일 내에 탈 수 있을 지는 미지수이다.[20]
한편 이와 관련해 하루키가 트위터에다 관련 소감을 올렸다는 보도가 나왔으나,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하루키는 트위터뿐 아니라 대외적인 모든 SNS 활동을 일절 하지 않는다.
9. 관련 인물
- 안자이 미즈마루(安西水丸)
하루키의 수필집은 미즈마루와 콤비를 이루어 한 작품이 많다. 미즈마루의 그림이 없는 하루키의 수필집은 그 가치를 20% 가량 잃는다는 평이 있을 정도. 하지만 그림을 끝내주게도 느리게 그려서 여러 사람 복장을 터지게 한다. 간단한 그림이든 복잡한 그림이든 상관 없이 똑같이 늦게 그리니 신기할 따름. 삼각형 도형을 그리든 작대기 하나를 긋든 둘다 똑같이 시간이 걸린다.
한 번은 하루키가 신문에 칼럼을 기고할 당시, 미즈마루에게 조금 어려운 과제를 내주고자, 한마디로 골탕 먹이려고 '두부 시리즈 연작'을 기고한 적이 있다. 미즈마루가 '기차에서 식당칸에 애완견과 함께 우아하게 비프 커틀릿을 먹는 로멜 장군'(...) 같은 복잡한 그림은 의외로 쉽게 그리지만, 단순한 두부는 오히려 잘 그리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 그러나 미즈마루는 이를 비웃듯 별 고민 없이 네모반듯한 날두부 하나만 텅 그려주었다고. 이후 고심을 거듭하던 하루키는 드디어 미즈마루를 골탕먹일 소재를 찾았다면서 기뻐했는데 그 소재가 곤충(...)이였다. 미즈마루는 곤충, 특히 지네류의 털많고 징그러운 쪽을 아주 무서워한다고 하며, 하루키는 이것을 발견하자 바로 호쾌하게 연작 시리즈로 써 주는 대인배 정신(...)을 발휘하였다. 삽화를 보면, 정말 그냥 지네들만 덜렁 그려져 있다.참고 링크 책으로도 출판된 무라카미 수필집에서도 읽을 수 있다.
그림체는 유치원생이 그린 그림같지만 실제로는 니혼대학 미술학과 출신에 교수 겸임 및 굵직굵직한 상을 여러번 받은 사람이다. 소설도 쓴다. 국내에서도 하루키의 작품으로 알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 하루키 얘기에 빼먹으면 조금 심심한 인물이다. 2014년 3월 19일 뇌출혈로 쓰러져 향년 71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 시바타 모토유키
2006년 3월에 도쿄, 삿포로, 고베에서 열린 '국제 심포지엄 및 워크샵 하루키를 둘러싼 모험 - 세계는 무라카미 문학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고문 및 사회를 맡기도 했다. 한편, 국 심포지엄을 기록한 서적 '세계는 무라카미 하루키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의 편집도 실시했다.
- 제이 루빈'
2006년 3월에 도쿄, 삿포로, 고베에서 열린 '국제 심포지엄 및 워크샵 하루키를 둘러싼 모험 - 세계는 무라카미 문학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참가. 같은 해 6월 아일랜드 에서 열린 프랭크 오코너 국제 단편 영화상 시상식[24] 에 무라카미에 대리로 참석하기도 했다.
무라카미는 루빈이 번역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단편집 「Rashōmon and Seventeen Other Stories」(2006년)의 서문을 쓰기도 했다. 이 책은 2007년 6월 신초에서 일본어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단편집'으로 간행되었다.
- 무라카미 요코
수필집을 보면 소설가 데뷔 전에 부인이 직장을 다니고 하루키 본인이 집안 살림을 도맡은 시기가 잠깐 있었는데, 장을 보고 요리하고 청소하고 빨래했던 당시 일과를 상술하여 매우 가사에 도가 튼 모습을 현로하기도 했다. 이 경험은 소설 '태엽감는 새'에 반영되어 있다. 하루키는 이 시절을 회상하며 '남자는 한 번쯤은 주부 역할을 해 봐야 좋다. 세상이 생각하는 많은 여성성은 오롯이 주부라는 직업 때문에 생긴다'라고 밝히기도.
- 가와이 하야오
- 야스하라 아키라 (1939년 4월 29일 ~ 2003년 1월 20일)
하루키는 2006년 3월 10일에 발매된 '문예춘추' 4월호에 '어느 편집자의 삶과 죽음: 야스하라 켄씨'라는 제목의 에세이를 발표했다. 이 글에 하루키는 자신의 친필원고가 야스하라에 의해 무단 유출돼 도쿄 간다 진보초의 헌책방과 인터넷 옥션 등지에서 팔리고 있다고 썼다. 그리고 "기본적인 직업 윤리에 어긋나는(중략) 것이 아닌가", "그 글들(주: 야스하라에 의해 유출된 친필원고)은 부정한 루트로 반출된 일종의 장물로, 금전적 이익을 얻기 위해 팔린 것임을 여기서 명확히 하고 싶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 후 노부유키
10. 일본 문단과의 불화
세계에 걸쳐 명성을 얻은 사람이건만 일본 문단을 대표하는 상인 아쿠타가와상과 인연이 없었다. 초기 작품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제81 회 아쿠타가와상 후보에 올랐으나 '''오에 겐자부로'''[26] 가 '''이건 너무 외국소설 일역투라 상 못주겠군요'''라고 일침해서 수상에 실패했으며[27] 두 번째 소설인 《1973년 핀볼》도 비슷한 이유로 수상에 실패했다.[28]
일본 내에서도 하루키 소설을 대상으로 평은 엇갈린다. 오에 겐자부로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소설이 지나치게 가볍다고 비판한 바 있고 와타나베 나오키는 '''자기애 현상에 불과하다'''라고 신랄하게 말한 바 있으며, 하루키가 쓴 소설에 나오는 여성상과 여성관을 비판하는 시각도 있다. 하루키가 쓴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상과 여성관은 논란의 소지가 있긴 하다. 사상가이자 비평가인 가라타니 고진은 “구조 밖에 없다”며 평가절하했다. 도코 고지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가장 좋아하는 작품중의 하나다. 하지만 무라카미가 아무리 정치적으로 올바른 연설을 하고 자유로운 의견을 에세이에서 언급해도 '''무라카미의 작품이 성차별적인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라고 언급했다. 사이토 미사코는 '무라카미 하루코라는 여성작가였다면 어땠을까?'라는 재미있는 가정을 하기도 했다. 히라노 게이치로는 "개인적으로 일본은 물론 수많은 해외작가들에게서 영감을 얻고 영향을 받았지만 하루키에게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심지어 그의 글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그동안 그의 작품을 읽었으나 ‘1Q84’를 힘겹게 읽고 난 후 불만이 생겨 그 이후론 그의 책을 읽지 않는다”고 혹평하고 있다.[29]
하루키가 쓴 소설을 높게 평가하는 평론가도 물론 있다. 대표적으로 후쿠다 가즈야는 '작가의 값어치'라는 책에서 하루키를 '''''나쓰메 소세키 이후 일본 문학사에 가장 중요한 작가로 자리매김했다"'''고 평했고, 오노 마사쓰구, 스게 미쓰히코, 스와 데쓰시, 가토 노리히로 등등 하루키 긍정파로 알려저있다.
10.1. 예루살렘 연설
하루키는 2009년, 예루살렘 문학상을 받았다. 예루살렘 문학상은 프란츠 카프카 문학상과 더불어서 노벨 문학상으로 가는 전초로 간주되는데 이 수상식 자리에서 하루키는 '''높고 단단한 벽에 깨지는 알이 있다면 나는 알의 편에 서겠다'''라고 연설해서 꽤 논란을 일으켰다. 당시 이스라엘이 가자 지구를 침공하는 사태가 있던 시점이라 하루키가 한 이 발언은 이스라엘을 비판한 내용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직접 읽고 판단하자. 연설문 번역
이와 관련하여 일본 국내에서는 "벽과 알이라는 표현이 너무 모호하다"라고 비판하는 견해가 제기됐다. 하루키 자신이 자세히 말하지는 않지만 자신의 최신작인 '1Q84'와 연관해 생각하면, 단순히 벽과 알이 이스라엘을 비판한 것이라기보다는 조금 근본성을 띤 이야기가 아닐까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아예 저서인 '잡문집'에서 다원성 의미를 담은 발언이지만 기본으로 벽은 시스템을 의미하고 알은 개인을 의미한다고 보면 된다고 직접 해설했으며 이 말은 갑자기 튀어나온 말이 아니라 본인이 소설을 쓸 때 늘 기초로 까는 생각이라고 주장한다.
작가 사이토 미나코는 아사히 신문에 "달걀을 꽉 움켜쥐어 으스러뜨린 뒤 냅다 던지는 퍼포먼스라도 보여줄 걸 그랬다", "이런 경우에 '나는 벽 쪽에 서겠다'는 뜻을 밝힐 사람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라는 감상을 밝혔다.
작가 다나카 야스오는 아사다 아키라와 한 대담에서, 예루살렘상이 노벨 문학상의 등용문으로 여겨진다는 점에서 "모두가 '달걀이 존귀하다'고 화답하는 국면에 벽 쪽에도 어느 정도 일리는 있지 않겠냐고 굳이 목탁을 치는 것이야말로 소설가로서의 증표라고 한다면" 이라는 전제를 단 뒤, 차라리 솔직하게 노벨상을 달라고 말하는 게 성숙한 장사꾼의 태도일 것이라고 논평했다. 누구나 당연히 힘없는 약자=달걀의 편에 설 때 굳이 벽 쪽=사회체제의 편을 들어주는 것이야말로 소설가라는 거냐, 즉 하루키가 하는 말과 행동은 모순되는 거 아니냐 하고 비꼰것. 하지만 2009년 2월 27일 신당일본의 유튜브 채널에서 다나카는 하루키에게 노벨상에 대한 마음이 있었는지 여부는 묻지 않았다. 작가 아사다 아키라는 다나카 야스오와의 대담에서 벽과 알이라는 비유가 너무나 모호하다고 비판했다.
훗날 하루키는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발언으로서는 가장 아슬아슬한 것이었다고 술회했다. 이스라엘 정부 요인들이 모인 무대였기에 그 이상의 발언을 하기는 곤란했고, 그 이하의 발언을 하는 것은 무의미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 이상의 발언을 할 수 있었을까. 물론 다니엘 바렌보임 등 정권에 비판적인 유대인이 신랄한 발언을 한 예는 있다. 그러나 유대인 동포가 하는 비판과 일본인이 하는 비판은 무척 다르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예루살렘상을 수상하다는 소식을 듣고 많은 "진보적" 미디어가 비판을 했으나, 하루키는 현지에서의 발언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고 미디어 측에서도 자신의 그때까지의 행동에서 본뜻을 어느 정도 미루어 추측해 주길 바랐다고 말했다.
11. 어록
11.1. 하루키가 한 말들
저는 그 일(사잔올스타즈)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잘 알지 못해서, 그 일에 대한 의견은 말씀드릴 수 없지만 어디까지나 일반론으로 말씀드리자면 모든 일본인은 어떤 의미에 있어서, 어떤 부분에 있어서 반일이 될 권리 정도는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성숙한 국가라는 것은 그런 겁니다. 성숙한 인간이 반드시 자기부정이나 자기비판을 마음에 품듯이.
— 사잔 올 스타즈의 반일 논란에 대해, 한 여성 독자에 질문에 대한 대답
'어른이란 건 멋진 것이다'라는 생각 자체가 좀 잘못된 것 같습니다. 어른이라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릇입니다. 거기에 무엇을 넣을 것인가는 당신의 책임이죠. 무언가를 이루어낸다는 것은 그렇게 간단히 할 수 없습니다. 조금씩 그 주변의 것들을 그릇에 넣어가는 것에서 부터 모든 게 시작됩니다.
나는 고교 시절에 "어느 면도사에게나 철학은 있다."는 서머셋 몸의 글을 읽고 감동했었다. 어른이 되어 술집을 경영하면서도, '어떤 온더록에도 철학은 있다'라고 생각하면서 8년 간 매일 온더록을 만들었다
후회할 거라면 그렇게 살지 말고, 그렇게 살 거라면 절대 후회하지 마라
'자유로워지다'라는 것은 설령 그것이 잠깐 동안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역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멋진 것이다.
나도 한 번밖에 결혼한 적이 없어서 자세한 것은 잘 모르지만, 결혼이라는 것은 좋을 때는 아주 좋습니다. 별로 좋지 않을 때 나는 늘 뭔가 딴생각을 떠올리려 합니다. 그렇지만 좋을 때는 아주 좋습니다. 좋을 때가 많기를 기원합니다. 행복하세요.
— 지인의 딸에게 보내는 결혼식 축사
11.2. 작품 속 글귀들
완벽한 문장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 완벽한 절망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中
"죽음이란 삶의 대극이 아니라 그 일부로 존재한다."
"우리는 대체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걸까, 나는 생각해본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그렇게나 소중해 보인 것들이, 그녀와 그때의 나, 나의 세계는 어디로 가 버린 것일까. 그래, 나는 지금 나오코의 얼굴조차 곧바로 떠올릴 수 없다. 남은 것은 오로지 아무도 없는 풍경뿐이다."
"자기 자신을 동정하지 마. 자기 자신을 동정하는 건 야비한 인간이나 하는 짓이야."
"인생이란 비스킷 깡통이라 생각하면 돼. 비스킷 깡통에는 여러 종류의 비스킷이 있는데 좋아하는 것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이 있잖아? 그래서 먼저 좋아하는 것을 먹어 치우면 나중에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만 남는거야. 나는 괴로운 일이 있으면 늘 그런 생각을 해. 지금 이걸 해두면 나중에는 편해진다고. 인생은 비스킷 깡통이라고."
"나를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 내가 존재하고 이렇게 네 곁에 있었다는 걸 언제까지나 기억해 줄래?"
— '노르웨이의 숲' 中
"추억들은 너를 내면에서부터 따뜻하게 해줘. 그러나 그것은 널 갈가리 찢어버리기도 해."
"네가 날 기억한다면, 다른 모든 사람이 날 잊어도 상관없어."
"사랑을 한다는 건 그런거야. 숨이 멎을 만큼 황홀한 기분을 느끼는 것도 네 몫이고, 깊은 어둠속에서 방황하는 것도 네 몫이지. 넌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 그것을 견뎌야만 해."
— '해변의 카프카' 中
내 생각에 넌 아직 날 사랑해. 그러나 우린 내가 너에게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에서 벗어날 수는 없지. 난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알았어. 그러니 네가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진걸 비난하지 않을게. 화가 난 것도 아니야. 그래야 하겠지만, 아니야. 난 그저 아픔을 느낄 뿐이야. 아주 많은 아픔을. 난 이게 얼마나 아플지 상상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틀렸었어.
—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中
아픔은 피할 수 없지만 고통은 선택이다.
—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中
"삶은 물 같지 않아. 인생의 일들은 가장 짧은 길로 당연하게 흘러 가지는 않거든."
"그 자들은 그래, 잊어버릴 수 있어." "하지만 나는 잊지 못해." "역사 속의 대량학살하고 똑같아." "저지른 쪽은 적당한 이론을 달아 행위를 합리화 할 수도 있고 잊어버릴 수도 있어. 보고싶지 않은 것에서 눈을 돌릴 수도 있지. 하지만 당한 쪽은 잊지 못해. 눈을 돌리지도 못해."
— '1Q84' 中
난 꿈을 꿔. 가끔은 그것만이 올바른 일인 것 같다고 생각해.
— '스푸트니크의 연인' 中
사랑에 빠지는 사람은 자신의 잃어버린 조각을 찾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에 빠져있는 사람은 그들의 연인을 생각할 때 슬프다. 그것은 네가 오래동안 보지 못했던 소중한 추억들이 있는 방으로 뒷걸음질 해 들어가는 것과 같다.
— '장님 버드나무와 잠자는 여자' 中
"기억을 감출 수는 있어도, 거기서 비롯된 역사는 감출 수 없어".
"30분이라는 짧은 시간은 16년만에 재회하는 옛 친구에게는 분명 짧았을지도 모른다. 나누지 못한 이야기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쓰쿠루는 둘 사이에 나누어야 할 소중한 것이 더는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모든 것이 시간의 흐름에 휩쓸려 사라져 버리지는 않았어."
소설가란 많은 것을 관찰하고, 판단은 조금만 내리는 일을 생업으로 삼는 인간입니다. 왜냐 하면 판단은 독자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 '잡문집' 中
사랑은 바람이다.분명히 불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지만 잡으려고 하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마음이란 사용하는것이 아니다. 마음이란 그냥 거기에 있는 것이다. 마음은 바람과도 같아서 당신은 그 움직임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좋은 것이다.
인간은 나이가 들면 그만큼 자꾸만 고독해져 간다. 모두가 그렇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은 잘못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인생은 고독에 익숙해지기 위한 하나의 연속된 과정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식별하는 능력은 자아의 사회화에 무척 중요한 능력일 터이다. 무엇이든 얘기하는 것이 선이라는 발상은 지나치게 억지스럽다.
바로 코앞에 자유가 있는데 왜 손을 뻗어 거머쥐지 않는가? 왜 뒷걸음질하는가? 우선 자유를 거머쥘 것, 그리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것, 그것이 우리가 사는 세계의 원칙이지 않은가?
무지라는 것은 현대에 있어서 최고의 사치인 것이다.
내일은 내일이야. 오늘은 오늘밖에 없어.
— '기사단장 죽이기' 中
12. 여담
- 하루키의 팬들은 '하루키스트(Haruki + ~ist)'라고 지칭된다.
- 2000년 아사히 신문에서 '지난 1천년간 일본 최고의 문인은 누군가?'라는 설문조사에서 12위를 기록했다. 1위는 나쓰메 소세키였다. 2위는 무라사키 시키부, 3위 시바 료타로, 4위 미야자와 겐지, 5위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6위 마츠오 바쇼, 7위 다자이 오사무, 8위 마쓰모토 세이초, 9위 가와바타 야스나리, 10위 미시마 유키오, 11위 아리시마 다케오였다.#
- 부모 모두 간사이 토박이이고 본인도 교토에서 태어나 효고에서 학창시절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한신 타이거즈가 아닌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열혈 팬이다. 소설가가 된 계기도 야구장에서 찾았는데, 1978년 4월 1일 오후 1시경 메이지진구 야구장에서 스왈로즈의 데이브 힐턴의 2루타 소리를 듣고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말한다.[30] 그가 남긴 단편 수필중에 야쿠르트 스왈로즈에 대하여에선 약팀을 응원하는 팬의 비애가 담겨있다.
- 30대 후반부터 세계를 돌아다니며 에세이를 썼다고 하지만 의외로 바로 옆에 있는 한국은 아직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루키에게 한국이 전혀 관심 밖의 나라란 것은 아니고, 스푸트니크의 연인의 뮤나 1Q84의 등장인물 다마루가 한국인 출신으로 나오는 등 지금까지 몇 차례 작품에서 언급한 바는 있다. 본인은 2017년 인터뷰에서 한국 독자들에 대해 "30여 년간 변함없이 제 작품을 열심히 읽어주셔서 늘 각별한 고마움을 느낀다"며 한국 방문 계획에 대해선 "언젠가 그럴 기회가 생기면 좋겠지만 솔직히 공적인 행사를 좋아하지 않아 초대를 받으면 사양하게 된다"고 답했다. [31]
- 고양이 애호가이며 대학생 시절부터 유럽에서 생활했던 1986년까지 많은 고양이를 키웠다. '고양이'는 하루키 소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는 일이 많다. 직장에서 해외를 다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현재는 기르는 것을 포기하고 있다고한다.
- 음악과 함께 그의 작품 세계를 지지하는 요소는 규칙적인 생활습관과 달리기이다. 실제로 저녁 9시 취침 - 새벽 5시 기상을 몇십 년째 빠뜨리지 않고 지키고 있으며, 생선과 채소를 주로 먹고 하루에 1시간에서 2시간씩 빠짐없이 달리기한다. 일찍 일어나서 달리고서 오전에 집필, 오후에는 음악을 듣거나 수필, 일역 등 반취미인 작업. 자신은 천재가 아니라 재능보다 규칙과 단련을 믿는다고 말한다. 일단 아무리 기술이 발달해도 장편소설을 쓴다는 건 상당한 체력을 요하니까.
- 달리기를 향한 애정은 실로 대단해서 "나는 머리로 사물을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몸을 움직여 파악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할 정도. 보스턴 마라톤 대회를 비롯한 각종 마라톤 대회와 철인 삼종 경기에 수십 번 출전한 달리기의 베테랑이다. 등단 이래 30년간 꾸준히 작품 활동 가능했던 원동력인 셈이다. 최근에는 이와 관련된 수필집을 내기도 했다('달리기를 말할 때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가끔 달리기를 예찬할 때 "신체 장애가 있고 스포츠를 못하는 사람도 조금 생각하라."고 지적받으면 '건강한 몸을 갖고 있으면서 그것을 무신경하게 함부로 다루는 사람이 더 문제 있다'고 받아친다. 1998년 6월 호놀룰루에서 열린 시각장애인 마라톤 15km 코스에 어느 시각장애인의 동반자로서 줄 하나를 연결해 마주 잡고 달린 훈훈한 일화도 있다.
- 마라톤에 대한 열정에 대한 예로 아테네의 마라톤 코스를 뛰기도 했고 한번은 100km를 이틀에 걸쳐 달리는 초장거리 마라톤도 완주한 적이 있다.
- 여러 외국어에 능통하고 낯선 환경에 꽤 쉽게 적응하는 성격 덕분에 여러 국가에서 거주하였다. 일본어, 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그리스어, 터키어를 할 줄 안다. 일역은 영어는 물론이고 프랑스어와 해당 언어로 쓴 문학작품을 읽는 데 지장이 없을 정도. 다만 에세이에서 이방인은 읽는데 말은 못 한다며 아내가 질책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 대표작인 '노르웨이의 숲'도 그리스와 이탈리아와 영국을 오가면서 완성되었고 '태엽 감는 새'는 미국에 소재한 프린스턴 대학에서 교환 교수로서 일하던 시절 직필했다. 이때 경험을 담은 에세이를 쓰기도 했다. (<먼 북소리>, <슬픈 외국어>)
- 대학 시절 문학 희곡/시나리오을 전공해서인지 다른 작가와 다른 문체를 느낄 수 있고 대사에 비중이 꽤 높아서 독자가 읽기 쉬운데 정작 본인은 "와세다 대학에서 나는 아내만 얻었다"고 말한다.
- 중학생 시절부터 재즈 레코드를 수집을 하고 있으며, 방대한 양의 레코드를 소유하고있다[32] . 음악은 재즈, 클래식, 록 등을 즐겨 들으며. 엘비스 프레슬리와 비틀즈, 비치 보이즈를 비롯한 60년대 가수와 밴드는 물론, 라디오헤드, 오아시스, 벡등의 음악을 즐겨 듣는다고 한다. 최근에는 콜드플레이와 고릴라즈, 스가 시카오의 팬이라고 공언 했다. 항상 새로운 무언가를 향하는 정신이 중요하다라고 하루키는 밝혔다.
- 영화를 좋아하기로 유명하다. 와세다 대학 문학부에서 연극영화론을 전공했고 수업에는 잘 안 들어가는 대신 희곡과 시나리오가 있는 도서관, 명화좌[33] 에서 거의 살았다. 본인은 수업은 그리스 고전 비극만 해서 재미없고 테네시 윌리엄스나 사뮈엘 베케트 같은 현대 작가가 쓴 작품을 다루는 수업은 교수가 작가 욕만 해대서 들어가기 싫고(…) 해서, 타협책으로 "난 영화를 공부하는 학생이니까 영화 감상이 공부하는 거야"라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졸업논문도 미국 영화 비평에 관한 내용이지만, 의외로 자신의 작품을 영화화에는 난색을 표해서 하루키의 소설 중 가장 영화화가 용이하다는 평을 듣던 '상실의 시대'도 영화화에 상당히 오랜 세월이 걸렸다.
- 하루키는 첫 작품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처음으로 쓴 소설이었는데 이 작품이 당선되지 않았다면 글을 더는 쓰지 않았으리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쓴 소설이 당선된 셈인데 이상하지도 않은 게 이미 어린 시절부터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설을 행한 관심이 지대해서, 학창 시절에도 책을 손에 달고 살았다. 심지어 밥을 먹으면서도 책을 읽었다니 말 다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러시아 원서와 미국 원서까지 찾아 읽었다고. 이미 어린 시절부터 엄청난 독서가였기에 소설을 쓰는 데 큰 도움이 된 셈이다.
- 일본의 TV, 라디오에 출연한 적은 없다. 최근에는 인터뷰 의뢰가 있어도,일부의 신문 & 잡지를 제외하고 적극적으로는 응하지 않는다. 인터뷰가 싫은 이유로 본인은 재즈 카페를 경영하던 시절에 "매일 밤 고객을 상대로 평생 분의 대화를 했다.앞으로는 정말 대화하고 싶은 사람에게만 말하겠다고 맹세했다'라고 말한다. 한편,해외 매체의 인터뷰에는 정력적으로 응하고 있다.그 중 십수편은 번역되어 인터뷰 모음집 '꿈을 꾸기 위해 매일 아침 저는 눈을 뜨는 겁니다'에 수록되었다. 해외에서는 서점 사인회도 자주 한다.
- 2018년 부터는 심경의 변화가 생겼는지 TOKYO FM에서 비정기적으로 <무라카미RADIO>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으며 2020년 5월22일 방송을 기준으로 14회를 맞이했다. 주로 주제에 맞춰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틀고, 미리 받은 청취자들의 메일에 대답 해주는 방식이다. 중저음에 목소리로 나이에 비해 목소리가 젊은 편으로, 외국물을 먹어서인지 RADIO를 일본식으로 라지오라 읽지않고 레이디오라고 읽는다.
- 평론가가 쓴 자신의 소설에 관한 문장은 일단 읽지 않지만, 인터넷을 통해서 받은 독자의 의견은 전부 읽는다고 한다."저는 옳은 이해라고 하는 것은 오해의 총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해가 많이 모이면 정말로 옳은 이해가 그것으로부터 생겨나는 거에요"라고 하루키는 말한다.단 예루살렘상 수상에 관한 미디어의 비평은 충분히 읽고 있다고 한다.
- 대학 졸업 후, 무라카미 하루키도 평범한 사람처럼 취직 하러 이리저리 원서 냈다. 어느 방송국에 면접을 보러 갔다가, 면접관이 "ㅉㅉ. 우리 회사는 와세다대학 정도로는 안 돼."라며 면박하는 바람에 엄청나게 기분이 상했었다.[34] 대학 간판과 사람의 능력이 무슨 상관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어서 결국 취직도 접고 재즈 카페를 차린다. 다른 작가들이 그렇듯이 소설이 잘 팔리기 시작하자 카페를 접고 전업 작가로 돌아선 예다. 장편소설 '양을 쫓는 모험'을 출판할 즈음부터 금전 사정이 좋아져서 전업 작가가 될 수 있었다.
- 생선과 채소를 주로 먹고 붉은 고기는 평소에는 쇠고기 붉은 살만 먹는다. 가끔 스테이크가 땡길 때만 고기를 먹는데 한 달에 한 번 정도라고 한다. 스스로 자기 음식 취향을 노인 스타일이라고 규정해서인지 터키 동부로 여행해서 음식 탓에 고생했다고 수필에서 언급했다. 동부로 가면 생선은 도저히 찾아볼 수 없고 죄다 양고기만 주로 먹으니 고생했다는데 수필에서 한국 요리처럼 터키 요리는 너무 향이 강해서 안 좋아한다고 쓰는데 그리스 시골에서 먹던 빵처럼 그리스 요리는 무척 잘 먹었다고 말한다.
- 방송 출연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같은 성을 가진 작가 무라카미 류가 미디어에 얼굴을 자주 내밀고 이런저런 말하는 태도와 대조적이다. 오죽했으면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소설을 좋아하는 팬 중에서도 그 사람의 목소리를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부지기수일 정도. 그 사람이 쓴 수필집을 읽으면 평범한 사람 사이에 섞여 유유자적하게 살며 이것저것 사물을 생각하는 방식을 좋아하는 성격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루키는 대학 시절 잠간 머리를 길게 길렀던 적도 있지만, 대학을 졸업하고서 지금까지 계속 짧은 스포츠 머리를 유지한다고 말한다. 일본에서 가장 성공한 작가 중에 한 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성격도 소탈해서 옷이나 자동차 같은 거에 비싼 돈을 쓰지 않는다.
- 이에 관련해서 일화가 있는데 어떤 사람이 하루키에게 "선생은 저명한 소설가인데 왜 이런 차를 타고 다니십니까? 선생 정도면 더 좋은 차를 탈 수 있을 듯한데"라고 하는 말을 무척 못마땅하게 생각한 하루키는 "아니 내가 번 돈을 어떻게 쓰든 니가 뭔 상관?"이라고 반응했다고.
- 위에 언급한대로 자동차에 큰돈을 쓰지는 않지만 자동차를 상당히 좋아하는데, 특히 수동변속기 애호가로 일본에서 매우 유명하다. 하루키의 에세이집을 보다보면 "확실히 수동 운전은 자동 운전보다 방법을 익히는 시간이 더 오래 걸린다. 발도 둘 다 써야 한다. 하지만 자전거나 수영처럼 몸에 익으면 평생 잊어버리지 않는다. 그리고 자동 운전만 한 사람보다 확실히 한 눈금 더 인생이 즐거워진다." 처럼 종종 수동변속기를 찬양하는 듯한 글귀를 볼 수 있다. 렌터카를 빌릴 일이 있었는데 수동변속기 차량이 없어서 아쉬웠다는 말까지 했을 정도.
- 하루키가 쓴 소설만 보고 하루키가 여성 편력이 대단할 듯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하루키는 고등학교 때 조금 놀았다고는 생각하지만 그때를 제외하고는 일탈된 삶을 살지 않았다고 말한다. 고등학교 때 놀았다는 것도 동네 외진 곳에서 모닥불이나 피워 놓고 친구들끼리 술이나 마시는 정도였다고. 다만 어릴 때부터 책을 지독하게 많이 읽어 국어 성적은 늘 좋았다고 한다.
- 아내 무라카미 요코는 신학과를 졸업해서 하루키가 쓴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양사나이도 성경에서 나오는 양의 의미로도 해석을 더할 수 있다고. 신학 지식은 아내에게 많이 영향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여담으로 슬하에 자식이 없다고. 무리카미 요코는 사진을 찍는 취미가 있어서 종종 아내가 찍은 하루키의 사진이 자신의 책에 실리기도 한다. 하루키는 소설을 쓰면 아내에게 보여주고 이런저런 조언을 듣기도 한다고.
- 소설가 김영하와 공통점이 많다. 일단 둘 다 유년시절을 외롭게 자라왔고[35] 도시적인 인간들의 삶을 주로 그리는 성향도 비슷하고 방랑벽이 있는 성격에 예술 방면으로도 공통점이 많으며, 둘 다 결혼을 했지만 자녀가 없는 것, 고양이 애호가인 것도 같다. 작품 활동 중간에 사회적 사건을 계기로 집필 성향이 바뀐 것도 그렇다. 하루키는 걸프전, 도쿄 지하철 사린가스 살포사건, 고베 대지진 등의 사건들을 계기로 좀 더 사회 참여적인 작품들을 많이 냈으며 1인칭을 고수하던 작법도 3인칭으로 바뀌었다. 김영하도 뉴욕 체류 시절 일어난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집필 스타일이 약간 바뀌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세월호 참사 전과 후에 집필된 단편들이 같이 들어있는 '오직 두 사람'에서 드러난다.
- 지난 2005년부터 2015년 2월 현재까지 교보문고에서 작가별 도서 판매량을 집계한 결과 고전·현대, 국내·해외, 시·소설(추리 등 장르 포함)·산문집까지 포함한 문학분야 중 지난 '10년간 최다팔린 작가’는 무라카미 하루키라고 한다. 하루키의 책들은 교보문고에서 89만 4000여권 판매를 기록했다. 교보문고의 점유율이 전체 도서시장의 20∼25%라는 점을 감안하면 지난 10년간 국내에서 350만∼450만 권이 나갔다는 것을 예측할 수 있다고 한다.[36]
- 취미는 일역과 영일사전 idiom 암기라고 한다. 일역도 처음에는 취미 겸 생계 유지하고자 시작했다가 직업으로 굳어진 예라서 이제는 어디가서 취미가 일역이라고 말도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제 진정한 의미의 취미는 마라톤밖에 남지 않았다고 투덜투덜. 주로 트루먼 카포티, 팀 오브라이언, 레이먼드 카버 등 미국의 현대소설을 일역했고 그 자신도 이 작가들에게 많이 영향받았지만,가장 좋아하는 소설인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는 쉽게 손대지 못하다가 어느 정도 나이가 먹고서야 일역하였는데 나오자마자 "무라카미 하루키가 일역한 위대한 개츠비 드디어 출간!" 같은 광고 문구가 나붙어 서점에서 불티나게 팔렸다.
- 영화화 자기 작품 '상실의 시대'(2010년 12월 일본 개봉)를 보고 조금은 다른 작품이 된 듯하다고 평가하였다.
- 애니메이션 '스즈미야 하루히의 소실'에서 나가토 유키가 줄곧 읽는 책인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소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애니메이션 '하이바네 연맹'의 모티프가 되기도 했다.
- 아무래도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조정래는 한국의 젊은 작가들이 하루키의 영향력 아래 놓인 것에 우려스럽다는 반응을 내비쳤다. 사소설 대가인 하루키와 사회소설·역사소설 대가인 조정래의 성향이 극단으로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런데 이건 한국 문단의 자업자득이다. 원로급들이 사회소설, 역사소설 장르만 편애해서 기타 장르 쪽에서 원로급으로 크고 영향력을 끼칠 만한 기성작가가 없다.
- 일본 사회의 "자기 책임 회피" 경향을 따끔하게 비판했다. 그는 2014년 11월 3일 보도된 마이니치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일본이 안고 있는 문제들에 공통적으로 자기 책임 회피가 있다.”면서 "태평양전쟁 문제나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등에 대해 정말 아무도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 2015년 4월 교도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일본의 침략에 대해 피해자가 됐다고 할 때 까지 사과해야한다며 사죄는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 아사하라 쇼코 등의 사형 집행에 대해 마이니치 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하루키는 사형제도에는 찬성하지 않지만, 언더그라운드를 집필하면서 유족들의 슬픔과 고통, 분노를 본 것 때문에 이 사건에서 '사형에 반대한다고 공언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 조악한 성교씬을 쓴 소설가에게 주어지는 Bad Sex in Fiction Award라는 상에 노미네이트 됐는데 이유는 기사단장 죽이기에서 인간을 초월한 사정량을 표현해서라고(...). 하지만 Katerina라는 소설을 쓴 제임스 프레이라는 작가가 수상했다한다.
- 수필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에 의하면 단 음식을 안 좋아해 과자나 초콜릿은 잘 안 산다고 한다. 하지만 1년에 두번 정도는 초콜릿이 먹고 싶다는 욕망에 시달린다는 듯. 이유는 모른다고 한다. 그는 그 욕망을 초콜릿을 좋아하는 급한 난쟁이가 몸 속에 숨어있다고 비유했다. 그리고 그 난쟁이는 어느 날 갑자기 깨어 초콜릿을 가져오라며 난동을 피우는데, 그럴 땐 편의점으로 급히 달려가 글리코의 아몬드 초콜릿을 사서 한통을 다먹어야만 다시 잠든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