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자카 다이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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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No.16
'''마쓰자카 다이스케 (松坂大輔)'''
'''생년월일'''
1980년 9월 13일(43세)
'''국적'''
일본
'''출신지'''
아오모리현 아오모리시[1]
'''출신학교'''
요코하마 고교 (가나가와)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8년 드래프트 1위
'''소속팀'''
'''세이부 라이온즈 (1999~2006)'''
보스턴 레드삭스 (2007~2012)
뉴욕 메츠 (2013~2014)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2015~2017)
주니치 드래곤즈 (2018~2019)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2020~)
'''월드시리즈 우승 반지'''
'''2007'''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우승 반지'''
'''2006'''
'''2009'''
[image]
'''2006,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MVP'''
'''대회 창설'''

'''마쓰자카 다이스케
(일본)'''

로빈슨 카노
(도미니카 공화국)
'''1999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리그 신인왕'''
오제키 타츠야
(세이부 라이온즈)

'''마쓰자카 다이스케
(세이부 라이온즈)'''

없음[2]
'''2001년 일본프로야구 사와무라상'''
없음[3]

'''마쓰자카 다이스케
(세이부 라이온즈)'''

우에하라 고지
(요미우리 자이언츠)
1. 소개
2. 프로 입단 전
4.1. 2006년~2012년 : 보스턴 레드삭스
4.2. 2013년 : 마이너리그
4.3. 2013년 ~ 2014년 : 뉴욕 메츠
6. 연도별 성적
7. 이모저모


1. 소개


일본프로야구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소속 야구선수.
세이부 라이온즈에서 데뷔해서 메이저 진출 전까지 엄청난 활약을 펼쳤다.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는 보스턴 레드삭스클리블랜드 인디언스 마이너리그를 거쳐 뉴욕 메츠에 몸담았으며, 이후 일본프로야구로 복귀하여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에 몸을 담았으나 12억엔을 받고 "3시즌 동안 1경기만 등판"하는 먹튀 행각을 보이며 NPB 역사상 레전드급 먹튀가 된 선수다.
별명은 마쓰퐁(マツポン), 마쓰(マツ), 다이스케(ダイスケ)이며 메이저리그 진출 후에는 미국 미디어에서 '''Dice-K''', '''D-Mat'''라고 자주 축약해서 표기하기도 한다.[4] 한국에선 한자표기를 그대로 읽은 '''송판'''이나 '''마작가''' 혹은 '''마쓰작가''' 등의 별명이 있다. 메이저리그 진출 후에는 일본에 비해 구위로 압도하기 힘들어지고 컨트롤도 애매해서 늘어나는 투구수를 주체하지 못해서 3회정도만 되면 땀을 뻘뻘 흘리는 모습이 자주 찍혀서 '''육수자카'''라는 비칭도 있다.
전성기였던 일본프로야구 시절 포심패스트볼의 구속이 최고 156km/h에 달한 적이 있는 우완 강속구 투수이며(메이저리그 시절에도 초반 몇년은 95~96 마일 이상을 여러번 기록했다.) 슬라이더, 체인지업, 커터, 자이로 볼성 회전을 보이는 슬라이더[5] 등 다양한 구질을 구사하는 타입이기도 하다.

2. 프로 입단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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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하마 고교 시절 고시엔에서 투구하는 모습.
요코하마 고교 시절부터 엄청난 초고교급 유망주로 최고 152km/h의 강속구와 날카로운 슬라이더, 커브, 체인지업을 구사해 '''헤이세이의 괴물(平成の怪物)'''이라는 찬사를 들을 정도였다.
특히 1998년 고시엔 야구대회 준준결승에서 일본의 전통적인 야구명문인 오사카 부PL학원고등학교를 상대로 '''연장 17회까지 무려 250개의 공을 뿌리면서''' 완투승을 기록한 것은 유명한 일화.[6] 거기다 '''바로 다음날'''인 메이토쿠기쥬쿠 고교와의 준결승전에서 구원등판[7], 역전승의 발판이 되어 팀을 결승으로 이끌고 이후 이어지는 결승전에서 선발등판해 59년만에 결승전에서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게 불과 사흘 동안에 일어난 일이다!'''[8] 그 결과 고시엔 춘계·하계 대회에서 연패를 달성해 팀의 우승에 공헌했고 우리나라의 전국체전에 해당하는 국민체전에서도 팀을 정상으로 이끌며 한 해 3연패를 달성했다. 1997년 추계 현 대회 예선부터 다음해 제53회 국민 체육 대회 결승까지 공식 경기에서 44연승을 기록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고교 시절의 이런 엄청난 활약을 바탕으로 그해 프로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세이부 라이온즈,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닛폰햄 파이터즈가 영입경합을 벌인 끝에 교섭권을 따낸 세이부 라이온즈의 지명을 받고 1순위로 세이부 라이온즈에 입단했다. 여기에 한가지 비화가 있는데, 마쓰자카 본인은 요코하마에서 고등학교를 나와서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에 가고 싶었다고 한다. 지명한 세이부가 마쓰자카가 염두에 두고 있던 팀이 아니었기 때문에 세이부 구단은 모기업의 세이부그룹 계열사에 요코하마 고등학교 학생들을 취업시키겠다는 조건을 마쓰자카에게 걸었고, 이를 들은 마쓰자카는 결국 수락했다.
  • 이때 마쓰자카 지명에서 미끄러진 요코하마 베이스타즈는 거포 3루수 후루키 카츠아키를 1순위로 지명하게 되는데, 이 선수 초등학교 때 절대로 가고 싶지 않은 구단은 '타이요(요코하마의 전신)'라고 썼었다.(...) 이 선수는 무라타 슈이치, 우치카와 세이이치 등과 함께 요코하마를 대표하는 거포 유망주로 기대받았으나, 컨택, 선구안, 수비가 죄다 막장이어서 결국 프로에서 제대로 자리잡지 못했는데 커리어하이가 2003년타율 .208 / 22홈런 / 37타점이었으니 말 다했다.(...)

마찬가지로 마쓰자카 지명에서 미끄리진 닛폰햄 파이터즈는 당시 고교 제일의 포수 중 1명으로 칭송받던 사네마츠 카즈나리를 1순위로 지명한다. 하지만 이쪽도 수비는 그럭저럭 제몫을 했으나, 타격이 통산 타율 1할(...)을 찍을 정도의 개막장이었는지라 후루키와 마찬가지로 닛폰햄에서 제대로 주전포수 자리를 잡지 못했고, 결국 경쟁에서 밀려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했으나 거기서도 백업, 2군 수준으로만 머무르다 2017년을 끝으로 방출되었다. 2018년 육성코치 겸 포수로 닛폰햄 복귀 예정. 동기들에 비하면 매우 빈약한 통산성적을 갖고 있지만 포수인 점 때문인지 아직까지도 가늘게나마 선수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3. 일본프로야구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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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세이의 괴물(平成の怪物)'''이라 불리던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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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회 연속 WBC 대회 MVP를 차지한, 역시 영광의 시절을 보낸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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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1월 세이부 입단식에서. 왼쪽은 당시 세이부 감독 히가시오 오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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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말랐던 데뷔 초기 시절.

1999년 4월 7일, 도쿄 돔에서의 대 닛폰햄 파이터즈 원정경기에서 선발로 출장한 데뷔전에서 1회 초 투구하는 모습.
평균 구속은 150.1, 최고 구속은 155km가 찍혔다. 참고로 이 영상의 제목은 '''마쓰자카 다이스케, 충격의 프로 데뷔전'''이다.[9]
자신이 특급 유망주였다는 것을 증명하듯 프로 데뷔 첫해인 1999년도에 '''180이닝 16승 5패 평균자책점 2.60'''이라는 신인으로서는 믿기 힘든 스탯을 찍으며 데뷔 첫해에 다승왕, 베스트나인, 골든글러브를 석권하고[10] 고졸 투수로는 33년 만에 신인왕을 차지해 일본 야구계 최고의 투수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다. 이치로와의 첫 대결에서 3연타석 삼진을 뽑아냈고, "자신이 확신으로 바뀌었다"는 멘트를 남겼다.
그리고 팔꿈치 부상을 당했던 2002년을 제외하곤 가공할만한 완투율을 자랑하면서 매 시즌 10승 이상을 기록하는 특급 에이스로 군림했다. 특히 3년차인 2001년엔 33경기에 등판해 240과 1/3이닝동안 15승 15패 평균자책점 3.60을 기록하면서 사와무라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다만 워낙 패수가 많아 15패씩이나 기록한 투수에게 수상을 해야하는지 논란이 있었는데, 마침 전해인 2000년에도 수상자가 없었고 원칙대로 수상자를 뽑자면 2년 연속 수상자가 없게 되자 사와무라상 선정위원회에선 비록 마쓰자카가 자격 미달이긴 하지만 더 나은 투수가 되라는 격려 차원에서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밝히는 해프닝도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1999년 87볼넷, 2000년 95볼넷 2001년 117볼넷으로 제구력이 썩 좋은 투수는 아니었는데 2002년에 투구폼을 간결하게 바꾸고 딜리버리를 수정 한 이후 2003년부터는 볼넷 허용률도 눈에 띄게 줄이면서 완전체 투수로 성장했다.

2006년까지 NPB 통산 8년 동안 평균자책점 2.95, WHIP 1.14, 204시합(190선발) 108승 60패 '''72완투 18완봉 완투율 38%(!)'''[11] 1402.2이닝 1355삼진이라는 엄청난 스탯을 찍고 '''역대 일본 프로야구 최고의 투수'''라는 찬사와 함께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로 진출하게 된다.[12]
이 글들은 당시 마쓰자카의 메이저리그 진출에 대한 현지 관계자들의 반응이다.
* 메이저리그 포스트시즌을 확인했지만 마쓰자카를 능가할만한 투수는 보이지 않았다. 마쓰자카는 지구상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만한 기량을 갖췄다. 최고구속 156km의 강속구에 수준급의 다양한 변화구를 정교하게 던진다.
* 매덕스는 마쓰자카만큼 빠른 공을 던지지 못했다. 오히려 변화구의 예리함은 마쓰자카가 더 나아 보인다. 한마디로 마쓰자카는 95마일(153km)을 던지는 매덕스다. 당장 내년부터 로이 오스왈트(2006년 15승 8패 평균자책점 2.98 기록)와 비슷한 수준의 피칭을 선보일 것이다.
- 바비 발렌타인
* 25승에 사이영상이 가능하다.
- 커트 실링
* 마쓰자카는 최고다. 내가 그에게 배워야 한다.
- 팀 웨이크필드
* 마쓰자카는 오스왈트와 동급이다.
- 세이버메트리션
* 마쓰자카에게서 페드로 마르티네즈를 느꼈다.
- 데이비드 오티즈
* 메이저리그 어느 누구도 마쓰자카와 비교될 수 없다. 요한 산타나도 그보다 아래이다.
- ESPN 현지 해설가
* 홈런을 쳤지만 운이 따라준 것이다. 마쓰자카의 공은 누구도 칠 수 없다.
- 데이비드 데헤수스

4.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시절



4.1. 2006년~2012년 : 보스턴 레드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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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2월 13일 보스턴 레드삭스 입단식에서.
2006 시즌 종료 후,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텍사스 레인저스, 뉴욕 메츠, 뉴욕 양키스 등 여러 메이저리그 팀들이 입찰경쟁을 벌인 끝에 보스턴 레드삭스가 '''5111만 1111달러'''를 지불하고 독점 교섭권을 따냈고 '''6년간 총액 5200만 달러'''라는 엄청난 특급대우를 받으며 보스턴 레드삭스에 입단했다. 포스팅비까지 합치면 무려 1억 달러 넘게 투자한 셈. 투자한 금액인 6년간 1억 달러면 S급선수를 FA로 영입할수 있는 금액이다. 사이 영 상을 2회 수상한 "제2의 외계인" 요한 산타나의 계약규모가 6년간 1억 3750만 달러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훗날 보스턴팬들의 분노를 십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에이전트가 그 분인 마쓰자카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구단주인 존 헨리는 협상기간 동안 테오 엡스타인 단장과 테리 프랑코나 감독 등 사절단(...)과 함께 마쓰자카와 저녁식샤를 주선했는가 하면 '''자신의 개인 전용 제트기'''로 래리 루치노 사장과 테오 엡스타인을 보라스 코퍼레이션 사무실이 있는 LA까지 파견해서 보라스와 협상하게 하기도 했다.(...) 결국 지리한 마라톤 협상을 벌인 끝에 보스턴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극적으로 계약을 타결했다고 한다.
보스턴 입단 첫해인 2007 시즌, 데뷔전에서 잭 그레인키와의 선발 대결에서 승리한 것을 시작으로 시즌 평균자책점은 썩 좋다고 말할 수 없는 4.40이지만 15승 12패 204.2이닝과 201탈삼진 bWAR 4.1을 기록해 좋은 성적을 내며 메이저리그에 연착륙했으며, 다음 시즌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며 팀의 2007년 월드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포스트시즌 성적은 총 4경기 선발 등판해 2승을 거두었으나 퀄리티스타트는 한 차례도 기록하지 못하였고 ALDS, ALCS의 평균자책점도 5점대로 좋지 않았다. 다만 월드시리즈 본선에서 5.1이닝 2실점 승투로 전보다는 선전했지만, 결과적으로 포스트시즌에서는 그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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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시리즈 트로피를 들고있는 오카지마 히데키와 마쓰자카
이듬해인 2008년에는 18승 3패 ERA 2.90 154탈삼진을 기록했다. 클래식으로는 매우 좋은 성적이었지만 뚜껑을 열어보면 세부스탯은 그닥 좋지는 않았다. '''29게임 167⅔이닝 94볼넷'''. 부상으로 한 달가량 출장하지 못하긴 하였으나 평균 소화이닝이 5.78이닝, 퀄리티스타트 성공률이 48%로 채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다만 볼넷은 리그 최하위의 기록이고, BB/9 또한 5.05로 최하위권. 피안타율이 .211로 AL 1위를 기록하며 선전했다.
당시에는 인플레이 타구는 투수가 컨트롤할 수 없다는 DIPS 이론이 세이버매트릭스계의 지지를 받던 때라 운빨이라고 평가절하 당하기도 했지만, 2010년대 후반에 들어서며 투수의 투구 스타일도 BABIP에 영향을 끼친다는 해석이 중론이 된 이후로는 08마쓰자카의 경우 BABIP을 낮추는 스타일의 피칭을 한 것이라고 평가가 바뀌었다. 실제로 08년엔 극단적으로 바깥쪽으로 도망치는 스타일의 투구를 했는데, 보더라인에 걸치는 투구는 스트라이크 존 안쪽에 비해 명백하게 BABIP가 낮다. 그러나 볼넷을 내 줄 위험성이 크고 누구도 계속해서 존 안에 걸치도록 던지는 게 불가능하며 이런 식으로 던지면 낭비되는 투구수가 많아 이닝소화력도 떨어지므로 크게 의미가 없다고 경시되는 부분인데, 마쓰자카는 볼넷을 주건말건 어쨌던 바깥쪽만을 집요하게 공략하는 투구를 했던 것. 그 결과물이 저 극단적으로 낮은 피안타율과 많은 볼넷, 규정이닝을 간신히 채운 이닝소화력.
물론 운 또한 따라주었음도 부정할 수 없다. 08마쓰자카는 유독 분식을 안 당했고 6이닝도 힘들게 꾸역꾸역 채우고 내려갔음에도 좋은 보스턴 타선에 힘입어 18승을 기록할 수 있었다.
이 당시 bWAR은 5.3으로 운이 따라주었건 세부스탯이 별로이건 어쨌든 1선발급 활약을 했다. 커쇼/그레인키가 있어서 3선발이지 약팀의 1선발도 가능하다던 13류현진이 bWAR 3.3이었으니 이보다 한급 이상 나은 활약을 했던 이 당시 마쓰자카가 에이스급 활약을 했던 것 자체는 부정하기 힘들다. 알동에 타자구장인 펜웨이파크, 약물시대의 끝물이던 타고투저 시즌을 보내면서 어쨌든 규정이닝을 채워가며 ERA 2.90를 기록했으니.
포스트시즌에서는 3경기 등판해 딱 1경기만 7이닝 무실점으로 호투해 승리를 챙겼을 뿐 나머지 2경기 모두 5이닝만에 강판당하였고 평균자책점도 4점대에 이르는 등 작년과 똑같이 큰 활약을 하지는 못했다. 이 해 뛰어난 활약으로 사이영 상 투표에서 4위를 기록한다. 여기까지가 마쓰자카의 전성기.

이듬해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일본의 2연패를 이끄는 선봉장이 되어 MVP를 수상하기도 하며 성공적으로 마쳤지만, 2009시즌 부상으로 인해 59⅓이닝 던지는 데 그쳤으며, 2010시즌에도 9승 6패 ERA 4.69 153⅔이닝 74볼넷 133탈삼진을 기록하는데 그쳤다. 마쓰자카 본인은 2009년의 부진에 대해 일본과 메이저리그의 트레이닝 시스템 차이라고 밝혔다. 마쓰자카는 "던지면 던질수록 어깨가 단련된다"라는 일본식 피칭 이론의 신봉자라 선발등판을 앞두고 롱토스와 불펜피칭을 같은 날에 하는 습관이 있었는데, 이것을 두고 어깨가 소모되고 부상우려가 있다며 레드삭스 구단이 금지시켰고, 일본식 훈련을 고집하려는 마쓰자카가 반발하면서 소속팀과의 불화설이 돌았고 동시에 현지언론의 폭격을 받기도 했다.
2011년 성적은 8경기 3승 3패 ERA 5.30 37⅓이닝 23볼넷 26탈삼진.
2012년에는 복귀 후 첫 등판부터 5이닝 4실점으로 좋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최종 성적은 11경기 45⅔이닝 동안 1승 7패 '''ERA 8.28'''.
2012년 시즌으로 보스턴과의 6년 계약이 끝났다. 메이저리그 정복할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6년 동안 117경기 50승 37패, ERA 4.52, 1완투, 조정 ERA 101, WAR 10.5, WHIP 1.418로 그냥 평범한 메이저리그 성적을 냈다. 참고로 동급이라던 요한 산타나로이 오스왈트는 같은 기간 142경기 61승 47패 평균자책점 3.21, 조정 ERA 128, WAR 16.6(산타나), 168경기 65승 49패 평균자책점 3.56, 조정ERA 117, WAR 19(오스왈트)이다.
첫 2년은 상당한 성적을 냈지만 09년의 부상 이후 나락으로 떨어져 기량을 회복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먹튀가 되고 말았다. 그래도 2년 잘하고 4년간 망했음에도 결과적으로 평범한 정도의 성적이라도 된 것을 보면 전성기에는 정말 MLB에서 통할 만한 선수가 맞았다. 박찬호도 못 받은 사이영 상 득표를 받았으니. (3위로 수상은 못했다.)

4.2. 2013년 : 마이너리그


마쓰자카 자신은 보스턴에 남고 싶은게 솔직한 심정이지만 확률은 '''제로'''라고 스스로 인정했다. 보스턴도 "어떤 결정도 안했고 어떤 대화도 안했지만 '''언제 대화할지도 모른다'''"라고 말해 마쓰자카를 잡을 의지가 약함을 입증했다. 일본에서는 마쓰자카 쟁탈전이 일어날 조짐이 보였다. 고향팀인 요코하마 디엔에이 베이스타즈스캇 보라스와 접촉을 시작했고, 치바 롯데 마린즈이토 쓰토무 감독이 직접 나서서 마쓰자카가 일본에 오면 좋을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여기다 친정팀인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도 마쓰자카를 뺏기지 않을 기세였다.
그러나 마쓰자카 본인은 메이저리그 잔류에 무게를 두고 있었고 결국 2013년 2월 11일, 메이저리그 구단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었다.# 시범경기에서는 호투를 펼쳤지만 5선발 경쟁에선 실패했고 일단 마이너리그에서 시즌을 시작하게 되었다. 안습.
그리고 마이너리그에서 투구를 하다가 4월 29일 옆구리 통증으로 강판. 그 뒤 DL로 내려갔는데 왼쪽 옆구리 좌상으로 복귀에는 3주나 걸린다고 한다.#
부상에서 복귀한 뒤 6월 11일에 트리플A에서 2⅔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았고, 6월 16일 선발 등판을 했으나 3⅔이닝 4안타 4실점으로 강판당했다. 결국 8월 20일 메이저리그 승격에 실패한 채 방출되었다. 마쓰자카의 트위터에 의하면 자신이 스스로 방출 요청을 하여 방출된 것이라고 한다. 성적은 5승 8패 평균자책점 3.92

4.3. 2013년 ~ 2014년 : 뉴욕 메츠


그리고 FA 신분을 얻게 되었다. LA 다저스와 LA 에인절스 등의 서부 지구 팀으로 갈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하며 세이부 라이온즈의 경우에는 마쓰자카의 영입을 시즌이 끝난 이후 고려하겠다고 하면서 만약 마쓰자카가 일본 복귀를 희망할 경우 영입에 적극적으로 나설 계획이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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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메츠 시절.
8월 22일, 뉴욕 메츠와 메이저리그 계약에 성공했다. 기존 우완 선발투수인 제레미 헤프너와 헨리 메히아의 시즌아웃으로 땜빵 선발로서 계약한 것. 계약하고 바로 다음 날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와의 홈경기 선발로 등판했다. 하지만 등판하자마자 1회 1실점, 2회 4실점(...)하고 6회 시작 전 교체되었다. 5이닝 5실점(5자책) 1볼넷 4삼진 6피안타 2피홈런. 필라델피아와의 경기에 선발로 등판했을 때의 성적은 4⅓ 이닝 4실점 5삼진 4볼넷(…). 애틀란타와의 경기에서는 3이닝 6실점을 하며 강판되었다. 이 3경기동안 성적은 3경기 12⅓이닝 동안 ERA 10.95 무승 3패 피안타율 0.365 WHIP 2.11이라는 최악이라는 말밖에 안나오는 막장피칭을 보였다.
그래도 9월 8일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를 상대로는 콜업 안 해준 원한이 서린 투구를 하며 5⅔이닝 1실점 6삼진 3볼넷으로 그럭저럭 희망이 보이는 피칭을 했다.
9월 14일 마이애미 말린스를 상대로 드디어 오랜만에 메이저리그 선발승을 거뒀다. 7이닝 동안 탈삼진 3개에 2피안타 1볼넷, 1실점 호투를 통해 스스로 메이저리그 잔류 희망의 불씨를 남기는데 성공. 9월 20일 필라델피아 필리스와의 경기에서도 6이닝 동안 탈삼진 6개에 4피안타 3볼넷 4실점 2자책점으로 다소 부진했으나 팀 타선이 터지면서 승리투수가 되었다.
9월 25일 신시내티 레즈와의 경기에는 선발로 나와 7⅔이닝 무실점에 4피안타, 탈삼진 6개를 잡아내며 활약, 본인의 시즌 3승과 함께 팀의 1:0 승리를 이끌어내는데 큰 공을 세웠다.
콜업된 후 초기에는 퇴물급 피칭을 선보였으나, 이후 실전 감각이 돌아와서인지 급격히 경기 내용이 좋아졌다. 2014년 계약은 꿈도 못 꿀 것 같던 8월 달 분위기와 달리 2014년 1년 남짓한 짧은 계약으로 메츠에 잔류할 가능성, 내지는 4~5 선발을 찾는 팀들이 긁어볼만한 복권으로 등극하는데에 성공했다.
2014시즌을 앞두고 스프링캠프 초청선수 자격으로 메츠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4월 16일(미국시각) 메이저리그로 콜업되었다. 19일 경기에서는 1이닝 2피안타 1볼넷 1실점으로 부진했으나 바로 다음날인 20일 경기에서는 연장전 3이닝동안 1볼넷 5K 무실점 호투를 펼치며 팀의 승리에 기여했다. 거기다 이 경기를 통해 미국, 일본 통산 2000탈삼진을 달성했다. 그리고 4월 24일(미국 시각) 팀이 4:1로 이기고 있는 9회에 올라 1이닝 퍼펙트를 기록하며 첫 세이브를 기록하였다. 불펜으로 전환한 뒤에는 비교적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는 중.
한편 메츠와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경기가 우천때문에 취소되어 5월 25일 더블헤더로 진행되게 되었는데, 여기서 한 경기에 선발 출전하게 되었다. 간만에 선발로 출전한 5월 25일 경기에서는 6이닝 3피안타 1볼넷 6탈삼진 2실점으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며 승리투수가 되었다. 답내친으로 1점을 얻은 것은 덤. 이 경기 이후에는 선발로도 출장하고 있다. 여전히 볼넷이 많지만 과거에 비하면 확실히 좋아진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평균자책점도 3점대를 유지하고 있다.
2014 시즌 최종 성적은 34경기 83⅓이닝 3승 3패 1세이브 3홀드 78탈삼진 평균자책점 3.89로 마무리하였다.
이후 일본 복귀를 결정하며 이 시즌이 메이저리그 마지막 시즌이 되었다.
메이저리그 통산 8시즌 158경기 132선발 790.1이닝 56승 43패 1세이브 ERA 4.45 Bwar 9.4 Fwar 8.4.

5. 일본프로야구 복귀



5.1. 소프트뱅크 호크스 시절


[image]
사이버 투수화가 되어버려서 금지어로만 남은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시절
[image]

2014 시즌 종료 후 일본프로야구 복귀설이 돌더니 결국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와 3년 12억 엔 계약을 맺고 돌아오게 되었다.
계약이 보도됐을 당시부터 구단관계자를 비롯해 팬들까지 '이미 메이저리그에서 실패했고 앞으로 잘할 가능성이 희박한 투수한테 16억엔은 너무 과한거 아니냐?'는 반응이 많았는데, '''썩어도 준치라고 헤이세이의 괴물 마쓰자카가 최소 10승은 해줄 거다'''라는 예상이 대부분이었던지라 논란은 금세 수그라들었다.
이 와중에도 장훈은 '''마쓰자카는 현재 딴 사람이다. 팔꿈치가 너무 내려와 있다. 8:2의 비율로 활약할 수 없을 것'''이라는 비판적인 발언을 남겼는데, 워낙 메이저리거에서 돌아온 선수들한테 혹평을 하기로 유명한 장훈의 발언이라 '저 영감님 또 그러시네' 정도로 무시당했다.
시즌을 앞둔 2015년 3월 초, 팀 연습에 혼자만 참가 안 해서 어깨를 부상당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직후에 치뤄진 시범경기에서도 3이닝 3사구 2실점의 영 좋지못한 피칭을 보여주며 팬들을 실망시켰다. 이후 시즌이 개막한 2015년 3월 말,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되면서 어깨부상으로 인한 2군 스타트가 확정됐다. 호크스팬들뿐만 아니라, 타구단 팬들까지도 '''그래도 후반기부터는 던지겠구만'''이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2015년 4월, 언론의 취재로 '''마쓰자카의 부상은 마음의 병으로 몸은 아픈 곳이 없다'''라는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졌다. 이후, 특단의 조치로 무기한 '노 쓰로 조정'[13]에 들어갔지만 별다른 성과를 보지 못했고, 5월에 실시한 원투(멀리 던지기)테스트에서는 '투수의 최소 합격선'인 50m도 힘겨워하는 처참한 모습을 보여주며 일본 야구계를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었다. 결국 2015년 7월, '''마쓰자카는 내년을 향한 조정에 돌입'''했다는 게 공식 발표되면서 2015년의 등판은 없는게 확실시됐다.
입스에 빠진 선수를 바보취급했던 선수가 본인이 입스[14]에 걸려 제대로 투구도 못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어서 팬들에게까지 조롱받으며 헤이세이의 괴물의 일본 복귀 첫해는 본인에게 있어서 최악의 시즌이 되어버렸다.
이 당시의 사진
2015년 8월 어깨수술을 받으면서[15] 확실하게 시즌 종료. 이로서 2015년 시즌은 먹튀 확정.
정작 소속팀인 소프트뱅크는 마쓰자카 없이도 2015년에 승률 5할 + 40승으로 퍼시픽리그를 초고속으로 우승하고 2015년 일본시리즈마저 연패한 탓에 마쓰자카의 공백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상황이다. 2015년 시즌 동안 남아도는 투수들을 주체를 못해서 통상 5자리가 주어지는 1군 선발투수 자리만 해도 6명(스탠드리지, 밴덴헐크, 나카타, 셋쓰, 데라하라, 다케다)이 변칙적으로 로테이션을 돌고 있으며[16] 이 틈에 못 끼어서 2군에 쳐박혀 있는 2군의 로테이션 투수들만으로도 하위권 팀으로 보내면 1군의 로테이션을 꾸릴 수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타구단 팬들로부터 1군에서 안 쓰려면 임대라도 해달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 투수 사정이 이 정도이니 팀에서는 마쓰자카가 드러눕거나 말거나(...). '''"당장 급하지는 않으니 천천히 너님 하고 싶은 거 다 해보면서 맘대로 재활하셈"'''이라는 식으로 거의 방목을 하다시피 했다. 심지어는 마쓰자카 본인의 요청에 따라 수술 후 아직 가족들이 남아있는 미국으로 건너가서 재활을 하는 것을 허용할 정도.
마쓰자카의 먹튀행각에 대한 소프트뱅크 구단의 조치를 이해할 수 없다는 얘기가 많은데, 이는 사전에 부상에 대해서 알고 있으면서도 '''혹시나 라이벌 팀에 가서 만에 하나 부활해서 장애물이 될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17] 저 말도 안되는 계약으로 붙잡아 놓고 '''일부러 2군에 박아 두고 있다는 설'''이 있다. 이미 호크스의 관계자가 "구단주도 기대는 안 했다. '타 구단에서 활약할 바에 우리가 붙잡자'라고 생각해서 계약했다"라고 했다(...).# 일본 최강의 재력을 가진 구단이니 가능한 퍼포먼스.
일단 구단에서는 수술 후 복귀까지 6개월이 걸린다고 발표했지만, 수술 완치와 재활에 걸리는 시간만 따져도 2016년 시즌 개막까지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못 맞추고 시즌 중간에나 복귀할 수 있으면 다행인 상황이다. 게다가 2016년 시즌에 복귀를 한다고 해도 호크스 1군의 선발진이 여전히 건재해서 이후의 전망마저 그리 밝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선수로서 가장 치명적인 어깨수술을 받았기 때문에 두 번 다시 마운드에 오를 수나 있을지 의심되는 상황...이었는데 어쨌든 배째라하고 1년 접고 구단의 방목 덕분에 맘편하게 재활을 할 수 있었던 게 도움이 됐는지 몸 상태는 나아졌다고 한다. 2016년 3월 3일 두산 베어스와의 연습경기에 등판해서 2이닝을 퍼펙트로 막았다. 최고 구속은 141km/h 정도로 아직 완전히 예전의 모습을 회복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2016시즌에 등판하는 모습은 볼 수 있을 듯 하다. 등판하는 모습은.
그러나 2군 경기에서도 1⅔이닝 동안 2피홈런 9실점이라는 재앙같은 피칭을 하는 것을 보면 1군에서 공을 던지는 것에 대한 희망이 줄어들었다.
2016년 정규시즌 마지막 경기 라쿠텐 전에서 0대2으로 뒤진 8회말에 등판해서 '''드디어''' 일본 복귀후 첫 1군 마운드에 올랐다. 2006년 이후 일본프로야구 1군 무대에는 거의 10년만에 올라온 셈. 결과는 '''1이닝, 3피안타 4사사구 5실점 2자책점으로 ERA 18.00'''(...). 최고 구속은 시속 144km에 머무는데다 제구력이 시망이라 다음 시즌에도 큰 기대는 안하는 게 좋을 듯.

2년동안 말아먹은게 못내 아쉬웠는지 17년 스프링캠프에서 의욕적으로 공을 던지며 재기를 노리는 모습이 포착되었는데, 한시간동안 공을 수백개나 뿌리는 무시무시한 연습량으로 인해 그 분이 있는 한화로 오라는 드립이 흥하고 있다.
그리고 모두의 예상과 같이 17시즌 역시 한경기도 등판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소뱅에서 재계약을 원한다고 한다! 향간에 들리는 말에 의하면 마쓰자카에게 준 돈은 상품판매로 다 충당했다고. 그러나 선수 본인이 FA를 선언하면서 소뱅과 결별하게 되었다. 3년간 단 1번 등판하면서 소뱅팬들에게는 일본시리즈의 극적인 우승 뒤에 혈압을 올리는 소식이 되며 소뱅뿐아니라 일본 프로야구계의 전설적인 먹튀가 되었다. [18] 이정도 먹튀면 소뱅 팬들이 이를 갈듯도 한데 의외로 차분한 편이다. 뭐 구단주부터 3년동안 먹튀한 12억엔을 가지고 '''그 정도는 (상승의 강팀을 만드는 비용을 생각하면) 오차수준'''이라고 할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긴데다, 마쓰자카가 연봉 4억을 먹고 있다고 다른 선수들 연봉을 주지 못해서 좋은 선수들이 팀을 떠나거나 팀이 약체화된 것도 아니라서 다른 팀 팬들의 어그로에도 배아파하기는 커녕 "어, 그래" 하면서 개의치 않는 수준.
소프트뱅크 퇴단 이후에는 뛸 팀을 찾아다녔고 요코하마에서 관심이 있다는 얘기도 나왔지만 오퍼가 들어오지 않자 최저연봉(2000만엔)만 받겠다고 선언을 했다. 비록 현재 실력만 보자면 그 돈도 아깝지만 마쓰자카가 가진 상품성을 감안하면 데려올 가치는 충분하다는 게 현재 인식. 우선 한신과 주니치거 거론됐지만 한신은 리빌딩을 이유로 거절했고. 이제는 아예 대만 진출까지 모색하고 있다고. 퉁이 라이온즈측에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다만 마쓰자카 본인이 "거짓뉴스가 나를 망친다."고 강력히 반발, 부인하기에 대만 진출은 단순 찌라시로 머물듯 싶다.
그러던 와중에 닛칸 스포츠를 시작으로 일본의 스포츠 신문들이 일제히 주니치 드래곤즈의 마쓰자카 영입 가능성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이에 시라이 분고 주니치 구단주가 "유통기한이 지났다"는 극단적인 표현을 써가며 혹평을 했고 이러한 기사를 접한 한국의 기레기들은 얼씨구나 하고 마치 마쓰자카가 주니치에게도 버림받은 것처럼 보도를 했다. 그러나 구단 사정을 잘 아는 현지의 주니치 팬들 사이에서는 시라이 구단주의 혹평에도 "저 영감 의뭉스럽게 딴청부린게 하루이틀이냐, 어차피 얘기 다 해놓고 연막피우는 게 뻔하다"라면서 마쓰자카의 영입을 거의 기정사실화하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팬들의 추측대로 결국 주니치에서 입단 테스트 기회를 제공, 마쓰자카에게 희망을 선사하였다. 전적으로 감독, 코치진 등 현장의 의견을 고려하여 결정한다고 하는데 감독과 사장은 긍정적인 뉘앙스의 인터뷰를 남겨 2018시즌 마쓰자카의 소속팀이 점차 정해지는 분위기다.[19]

5.2. 주니치 드래곤즈 시절


2018년 1월 23일, 언론을 통해 비공개 입단 테스트를 통과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주니치 공식 입단을 확정지었다. 주니치의 모리 시게카즈 감독에 의하면, 스프링캠프 명단에도 넣을 예정이라고 한다. 하지만 연봉은 4억엔에서 무려 96%가 삭감된 1500만엔에 계약하였다. 이 수치는 육성선수를 제외하면 일본 프로야구 사상 최고의 삭감률이라고 한다. 등번호는 테스트 직전 만약 테스트를 통과한다면 99번을 달 것이라고 예고했었다.[20]
2018년 3월 4일 일본 아이치현 나고야돔에서 열린 라쿠텐 이글스와 시범경기에 선발 등판해 피홈런 포함 2이닝 2실점을 기록했다.
시범경기에서도 그다지 눈에 띄는 퍼포먼스를 보여주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선발 로테이션에 포함되었다. 4월 5일 요미우리전에서 선발로 나섰다. NPB 경기에서 선발로 나선 것은 12년만. 선발로 나선 경기에서 5이닝 96구를 던지면서 8피안타 3사사구 3실점(2자책)으로 패전투수가 되었다. 올시즌 받는 연봉액수와 지난 3년간을 생각하면 그럭저럭 나쁘지는 않은 결과이지만 어디까지나 당장 우승이 무리인 주니치니까 그럭저럭이지 우승을 목표로 하는 소뱅이나 히로시마 같은 상위권 팀에서는 로테이션 진입은 고사하고 1군 로스터에 등록되는 것조차 언감생심인 수준이다. 다만 결과가 크게 나쁘지 않았고 소뱅시절 입에 달고 살던 레파토리였던 팔이나 어깨부위의 '위화감' 얘기도 안 하는 것으로 봐서 다음번 등판기회도 보장받을 듯 하다.
4월 19일 한신 타이거스전에 선발등판하여 7이닝 동안 123구를 던지며 4피안타 2탈삼진 2볼넷 1몸에 맞는 공 2실점(1자책)을 기록하며 퀄리티스타트 플러스를 챙겼지만 1-2로 패배하며 패전 투수가 됐다.
4월 30일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전에 선발등판하여 6이닝 1실점 3피안타 8피사사구 6탈삼진을 기록했고 팀이 3:1로 승리하며 승리투수가 됐다.
5월 20일 한신 타이거스전에 선발등판하여 투수로서는 6이닝 3피안타 7탈삼진 1실점을 기록했고 타자로서는 3타수 2안타를 기록하는등 투타 양면에서 활약했고 팀이 6:1로 승리하며 승리투수가 됐다.
6월 8일 소프트뱅크 호크스와의 교류전에 선발등판하여 5이닝 1실점을 기록했고 팀이 5:4로 승리하며 승리투수가 됐다.
전반기 기록은 7선발등판 3승4패 방어율 2.41 37.1이닝 35탈삼진 22볼넷 WHIP 1.29. 잔부상이 많아 등판수가 적은 것을 빼면 빼어난 비율스탯을 보여주며 쏠쏠하게 활약중. 나이와 스팟스타터라는 보직상 많이 못 나와서 그렇지 실력 자체는 돌아왔다고 봐도 무방할 듯. 원 소속팀 소프트뱅크 선발 로테이션이 붕괴된지라 아까운 자원으로 재평가되는 지경.
그리고 마운드에서 극적으로 재기에 성공한 덕분인지 올스타전 세리그 선발투수 팬투표 1위로 선발되었다.
8월 1일 한신 타이거스전에 선발등판하여 5이닝 2실점 6탈삼진 5피안타 6피사사구를 기록했고 팀이 8:5로 승리하며 승리투수가 됐다.
8월 16일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전에 선발등판하여 6이닝 3실점 6탈삼진 5피안타 3피사사구를 기록했고 팀이 11:5로 승리하며 승리투수가 됐다.
9월 2일 거인전에서는 2이닝 61투구 9피안타(2피홈런) 1탈삼진 7실점(모두 자책)으로 거하게 불을 질렀고 9월 13일 한신전에서는 5이닝 95투구 5피안타 4탈삼진 1실점(1자책)으로 선발승을 거두었다. 시즌 6승(4패) 기록.
시즌 성적은 11경기 55.1이닝 등판 6승 4패 51탈삼진 방어율 3.74로 많이 나오지는 못했지만 괜찮은 비율스탯을 기록했다. 거의 이닝당 1탈삼진을 기록할 정도로 올라온 구위가 볼만하다.
시즌 후에는 테레비아사히에서 중계한 일본시리즈 1차전에서 게스트 해설을 맡았다. 2018년 11월 12일 NPB에서 선정한 올해의 컴백상 수상자가 됐다. 그리고 주니치도 마쓰자카 영입 효과를 톡톡히 봤는지 연봉도 1500만엔에서 8000만엔으로 상승하였다.
그런데 2019년 2월 9일 오키나와 스프링캠프에서 팬에게 싸인을 해주다가 극성팬이 팔을 잡아당겼는데 이때 팔에 위화감을 호소했고, 검진 결과 '''어깨 염증'''이라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이 탓에 장기간 이탈이 불가피 해졌다.
5월 16일 팀의 연습일에 골프를 치러 가서 구단 자체 징계를 받았다는 소식이 구단 대표를 통해 발표되었다. 팬들의 반응은 비난 일색.#
7월 16일 한신전에서 시즌 첫 등판했다. 5이닝 2실점을 기록했는데 1, 3, 5회 대량실점 위기가 있었으나 위기관리능력을 보이며 탈출했다. 2:2로 팽팽한 가운데 교체되어 승리는 기록하지 못했다.#
7월 27일에는 DeNA와의 경기서 0.1이닝 8실점이라는 최악투를 보이며 다시 1군에서 말소됐다.
이후 2군에서 컨디션 조절과 경기 출전으로 1군 복귀를 노렸으나 정규 시즌이 끝나면서 그대로 2019년을 마무리. 시즌 후 거취 문제를 둘러싸고 연봉을 최저까지 내리면서 주니치에 계속 남을지를 협의 중이었으나 주니치 입단 테스트를 도와준 모리 시게카즈 디렉터, 토모리 유이 해외 스카우트가 사임을 하면서 마쓰자카 본인도 방출을 요청했다. 일단 현역 생활은 계속 할 생각이라는 방침. #
그리고 이후 백수가 된 김에 같은 백수 처지인 다카하시 요시노부와 일본시리즈 해설을 맡았다. 나름 소프트뱅크 출신이라고(...) 교진 출신인 다카하시와 함께 부른 듯. 작년에도 일본시리즈 게스트해설을 맡았는데, 나름 평가가 나쁘지 않아 올해도 해설을 맡게 되었다. 은퇴 후 진로는 해설 쪽으로 점쳐지는 듯.

5.3. 세이부 라이온즈 시절


그리고 퇴단 이후 친정인 세이부 라이온즈에서 마쓰자카 획득에 나섰다. 2020년은 세이부에서 뛰게 될 것이 거의 확실한 분위기. 그리고 2019년 12월 3일 NHK 등 일본 언론에서 오피셜이 뜨면서 돌고 돌아 결국 세이부에 돌아오며 친정팀에서 커리어를 마무리하게 되었다.
시즌 시작 전 연습경기에서 두산 베어스정수빈에게 3루타를 맞고 오재일에게 투런홈런을 맞았다(...).
이후에 닛폰햄 전 연습경기에 등판하여 4이닝 4실점을 기록했다. 직구가 힘이 없어서 변화구 위주 피칭을 하다보니 투구수가 많아지는게 여전히 문제.
그러다가 또다시 수술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경추(목) 부위에 내시경 수술을 받았다고 하며 재활에만 2~3개월이 소모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 소식을 들은 세이부 팬들은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결국 2020시즌 한 경기도 나오지 못했다. 그럼에도 구단은 재계약 예정이라고. 연봉이 3천만 엔으로 저렴한데다 90년대 말~2000년대 초 세이부를 대표하는 구단 역사에 남을 에이스이자 왕년의 전국구 스타라 일단 다시 세이부 유니폼을 입고 마운드에 서는 날엔 구장은 매진될 것이고 상품도 불티나게 팔려서 적자는 메꿀 수 있는데다, 세이부 입장에서도 다 늙은 이제와서 활약을 기대하기보다는 은퇴식을 치뤄주고 지도자로서 기대하며 데리고 온 것인데 한두경기는 멋있게 던져줘야 친정팀에서 재기-영광의 은퇴식이라는 스토리를 만들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2020년 12월 21일 1천만엔 깎인 연봉 2,000만엔에 다음시즌 계약을 체결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거의 신인선수급 연봉.

6. 연도별 성적


역대기록
년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WHIP
1999
세이부
25
180
16
5
0
0
2.60
124
95
151
1.17
2000
27
167⅔
14
7
0
1
3.97
132
99
144
1.35
2001
33
240⅓
15
15
0
0
3.60
184
118
214
1.25
2002
14
73⅓
6
2
0
0
3.68
60
22
78
1.02
2003
29
194
16
7
0
0
2.83
166
72
215
1.17
2004
23
146
10
6
0
0
2.90
127
48
127
1.16
2005
28
215
14
13
0
0
2.30
172
59
226
1.03
2006
25
186⅓
17
5
0
0
2.13
138
37
200
0.92
년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WHIP
2007
BOS
32
204⅔
15
12
0
0
4.40
191
81
201
1.32
2008
29
167⅔
18
3
0
0
2.90
128
101
154
1.32
2009
12
59⅓
4
6
0
0
5.76
81
32
54
1.87
2010
25
153⅔
9
6
0
0
4.69
137
82
133
1.37
2011
8
37⅓
3
3
0
0
5.30
32
24
26
1.47
2012
11
45⅔
1
7
0
0
8.28
58
23
41
1.71
년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WHIP
2013
NYM
7
38⅔
3
3
0
0
4.42
32
16
33
1.24
2014
34
83⅓
3
3
1
3
3.89
62
56
78
1.34
년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WHIP
2015
소프트뱅크
-
-
-
-
-
-
-
-
-
-
-
2016
1
1
0
0
0
0
18.00
3
4
2
5.00
2017
-
-
-
-
-
-
-
-
-
-
-
년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WHIP
2018
주니치
11
55⅓
6
4
0
0
3.74
50
37
51
1.48
2019
2
5⅓
0
1
0
0
16.88
12
5
2
2.63

7. 이모저모


  • 국제대회에서 강한 모습을 보여주는 선수로 시드니 올림픽에서는 미국 대표팀의 벤 시츠와의 맞대결에서 10이닝 2실점으로 호투했으며, 대한민국전에서도 2경기 모두 팀이 패배했으나 17이닝 5자책으로 딱히 못 던진 건 아니었다. 아테네 올림픽에서는 좋은 활약을 펼치며 일본 대표팀의 동메달에 기여했고, 특히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선 1.38의 평균자책점으로 3승을 쓸어담으며 대회 MVP로 뽑혔다.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는 한국전에 선발등판해서 승리투수가 됐고, 대회 전체 3승으로 2회 연속 MVP를 수상. 다만 한국을 상대로는 적시타나 홈런을 허용하곤 했다. 시드니 올림픽에서는 어느 국민타자와의 대결에서 8타수 2안타 탈삼진 5개를 잡아냈으나, 2안타가 투런홈런과 결승 2타점 2루타였다.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도 별명이 많으신 분께 투런홈런을[21] 헌납했는데, 선술한 것처럼 이 경기에서는 승리투수가 됐지만 4이닝 2자책 볼넷 2개로 내용이 좋았다고는 할 수 없다.
  • 다이스케(大輔)라는 이름은 80년대 고교야구를 풍미했던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강속구 투수 아라키 다이스케(荒木大輔)에서 따왔다고 하는데, 마쓰자카의 어머니가 제일 좋아했던 투수라고 한다. 근데 아라키가 코시엔 혹사로 프로에선 기대 이하의 성적만 찍고 은퇴한 걸 생각하면 마쓰자카 다이스케 쪽이 청출어람.
  • 비록 프로에서는 지명타자제를 채택한 퍼시픽리그나 아메리칸 리그에서 뛰어서 자주 타격기회를 보지 못했지만, 타격능력도 꽤 괜찮았다. 고교시절 가나가와현 예선전에서 연타석 홈런을 날렸고, 센트럴리그(요미우리) 홈경기였던 2002년 일본시리즈 1차전에서는 무려 투수인데 7번타자로 선발출장하기도 했으며 한신 타이거스와의 교류전(고시엔 구장)에서 홈런을 치기도 했다. 농담이 아닌 게 메이저 통산 45타석 7안타 .189로 심지어 타점도 안타 7개 친 주제에 3타점이나 쳤다. 황재균의 17시즌 성적과 거의 비슷한 사이즈의 샘플인데 비율은 황재균보다 낫다.
  • 이 애니메이션주인공이 애니메이션 내에서 마쓰자카를 코스프레했다. 펜웨이 파크에 보스턴(으로 추정되는) 유니폼에 등번호 18번이니 확실하다. 이 코스프레 비슷한 게 등장한 화가 2009년 4월 초. 그렇다. 2회 WBC가 끝난 직후였다.
[1] 참고로 마쓰자카는 태어나기는 아오모리에서 태어났지만 자라기는 도쿄에서 자랐다.[2] 이 해에 사상 유례가 없는 신인 흉작으로 인해 퍼시픽리그 측에서 결국 신인왕은 '해당자 없음'으로 발표하였다.[3] 신인왕과 마찬가지로 투수 중에서도 뚜렷한 성적을 낸 투수가 없어서 사와무라상도 '해당자 없음'으로 처리하였다.[4] 본인은 사인할때 D-Mat을 선호한다고 한다.[5] 사실 구종 자체는 140km를 상회하는 빠지는 고속 슬라이더이지만 회전축은 실제로 진행 방향과 평행한 자이로 볼 성 회전에 가깝다.[6] 여담으로 이 명승부에서 마쓰자카와 맞대결해 패한 PL학원의 투수 카미시게 사토시는 팔꿈치 부상으로 프로 진출을 포기한 후 2003년 니혼TV에 입사해 현재 아나운서로 활동하는 중이다.[7] 마운드에 오르지 않았을 때도 덕아웃에서 쉬고 있었던 게 아니라 좌익수로 선발 출전해서 풀 이닝 소화중이었다![8] 참고로 고시엔 대회는 전부 낮 경기로 치러진다. 1년 중 가장 더운 8월 초중순에 뙤약볕 밑에서 경기를 한다는 얘기다. 특히 8강전은 하루에 4경기를 다 치러버리기 때문에 아침 8시부터 경기를 시작하는데, 요코하마 고교와 PL학원의 경기는 그 중에서도 가장 더운 세번째 경기인 낮1시 경기였다![9] 1번타자 이데 타츠야 - 2번타자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 3번타자 카타오카 아츠시와 대전하며, 결과는 마쓰자카가 이데와 카타오카는 삼진, 오가사와라는 투수 땅볼로 삼자범퇴시켰다. 이날 경기는 5 - 2로 세이부가 이김과 동시에 마쓰자카가 8이닝 9탈삼진 2실점으로 데뷔 첫 승리투수가 되었고, 닛폰햄의 이날 득점은 오가사와라가 8회에 마쓰자카의 생애 첫 피홈런인 2점 홈런을 날린 것이 유일했다. 출처[10] 사와무라상은 옆 동네에서 같은 해에 데뷔한 대졸 신인 우에하라 코지가 차지했다.[11] 훗날 '''왜 메이저리그 투수들은 완투를 안하죠?'''라는 드립을 치게 될줄 누가 알았을까.(...)[12] 가끔 비교가 된 우에하라 코지의 성적은 같은 기간 평균자책점 3.02, WHIP 1.03, 195시합(193선발) 102승 54패, 56완투 9완봉, 1391⅓이닝, 1236삼진이다.[13] 볼을 아예 던지지 않는 조정. 즉 캐치볼이나 투구연습을 하지않고, 달리기스트레칭 등의 기초적인 훈련만 하며 경과를 지켜보는 조정법.[14] yips. 스포츠 선수가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호흡이 가빠지고 경련 등을 일으키며, 스포츠에 관련된 활동을 하는데 지장을 겪는 정신질환인데 사실 입스는 정확히 골프용어이며 스티브 블래스 증후군이 맞는 용어이다.[15] 류현진이 받았던 수술과 비슷한 수술이다.[16] 특히 외국인인 스탠드리지와 밴덴헐크를 10일 간격으로 번갈아서 등록시키는 방법을 쓰고 있다. 결국 시즌 종료 후 스탠드릿지는 10승 + 3점대 ERA의 준수한 성적에도 자리가 없어서 치바 롯데 마린즈로 이적했다.[17] 실제로 미국 진출 전까지 마쓰자카는 호크스의 천적이었다.[18] 사실 15년도에 복귀한 윤석민은 불펜으로 WAR 3.87을 찍었고 16년도에 겨우 3경기지만 선발투수 가능성도 보여줬다. 게다가 실제로 신체에 부상이 있어서 못나오는거라 마쓰자카에 비빌 급이 못된다(...). 물론 같은 먹튀는 먹튀지만.[19] 일단 뜬금없이 주니치행이 떠오른 이유 중의 하나로 팬들은 현 주니치의 수뇌진이 세이부 시절 마쓰자카와 인연이 있는 사람들인 점을 들고 있다. 모리 시게카즈 현 감독은 마쓰자카의 신인시절 세이부의 코치였고 데니 도모리 해외 스카우트 담당은 마쓰자카의 선배로서 세이부의 필승조의 일원이었다. 그래서 갑자기 주니치 행 얘기가 나온 것은 주니치 구단 수뇌부와 마쓰자카의 개인적인 인연이 작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20] 자세한 내용은 링크 참조[21] 그것도 비거리 145m 초대형 홈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