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역사/선사시대

 



1. 개요
2. 구석기 시대
3. 패총시대
3.1. 고대 문명 떡밥?
3.2. 외부와의 접촉과 기록


1. 개요


류큐 열도가 일본 본토로부터 워낙에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선사시대의 시대 구분도 일본 본토를 따라 규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따라서 이 지역의 선사시대는 대개 토기의 등장을 기준으로 구석기 시대(旧石器時代)와 패총시대(貝塚時代)로 나뉘어진다.

2. 구석기 시대


마지막 빙하기(약 12,500년 전에 끝남)에는 해수면의 높이가 낮아서 한동안 류큐 열도가 육지에 붙어있으며, 이 때 다양한 육상동물이 들어왔을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오키나와 열도 전부가 육지에 붙어있었던 것은 해수면이 굉장히 낮아진 일부 시기 뿐이기 때문에 인류는 배를 타고 들어왔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 내에서 발견된 화석인류의 상당수는 오키나와 제도에서 발견되었다. 일본 본토는 화산이나 지진 같은 지각변동이 심했고, 화성암 토양이 비교적 산성이 있었기 때문에 구석기 유물이나 화석인류가 별로 없지만,[1] 오키나와 제도는 석회암 지질이고 지각변동은 덜 심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나하시에서는 1962년 야마시타 동굴인(山下洞人)이 발견되었고, 이후 1967년 남부 구시카미 촌(具志頭村)[2]에서 미나토가와 인(港川人)이 발견되었다.[3] 이 외에도 미야코지마, 이시가키, 등지에서도 인류 화석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인류 화석들은 최소 1만년 내지 3만년 전의 것이며, 일본인의 조상이 남방계통이었다는 설의 근거로 활용된다.
인골 화석 뿐만 아니라 구석기 유물도 발견되었다. 2012년에 난죠 시의 사키타리 동굴(サキタリ洞)에서 인골과 함께 구석기가 발견되었다. 2016년 9월에 세계에서 오래된 낚시바늘이 발견되기도 했다.(#)
2019년 7월에 3만년전의 향해 재연이라는 프로젝트를 가지고 대만에서 요나구니 섬까지 카누로 통해 가졌으며, 48시간만에 도착하였다고 한다.#

3. 패총시대





패총(貝塚), 혹은 조개무지는 선사시대 인류가 조개를 먹고 껍데기를 모아 버린 일종의 쓰레기장(...)이지만, 고고학 연구에 있어서는 금광 같은 곳이다.[4] 패총에 버려진 물건들로 당시 생활상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신석기시대에 패총이 발달했기 때문에 패총시대라는 이름이 붙었다. 오키나와의 패총시대는 약 1만 년 전부터 11세기까지 이어지는데, 이는 일본의 헤이안 시대 말이나 한국의 고려 중기까지 이어진다. 류큐 제도가 대륙이나 일본 본토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졌기 때문에 발전이 느렸던 것으로 여겨진다.[5]
당시 류큐 열도의 사람들은 수렵[6] 및 채집 생활을 했으며 패총이 발달한 것으로 보아 어로의 비중이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말기에는 벼농사도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일본 본토의 영향을 받아 조몬 토기가 만들어졌지만, 이후에는 오기도식 토기(荻堂式土器) 이하식 토기(伊波式土器)와 같은 독특한 양식이 등장했으며, 미야코지마와 같은 떨어진 섬들에서는 또 독자적인 양식이 등장하기도 했다.
당시 류큐 열도가 외국과 교류를 했던 증거인 야요이 토기와 중국 동전 등도 발견되었다.

3.1. 고대 문명 떡밥?


류큐 열도의 서쪽 끝 요나구니 섬 근해에서 요나구니 수중 유적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아직 이것이 자연적으로 생성된 것인지 정말 고대문명의 증거인지는 알 수 없는 상태. 자세한 건 해당 항목 참조.

3.2. 외부와의 접촉과 기록


류큐 제도가 등장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중국의 역사서인 수서(隋書)의 607년 기사에 유구(流求)라는 이름으로 등장한 것이다. 다만 내용으로 보아 오키나와가 아닌 타이완 섬을 지칭할 가능성도 높다.
일본서기의 기록에는 7세기에 액구(掖玖), 아마미(阿麻彌) 등지의 사람들이 일본 조정에 여러번 조공을 해온 것으로 나온다. 이 가운데 아마미(阿麻彌)는 지금의 아마미 군도인 것이 거의 확실하지만, 액구(掖玖)는 오키나와인지 아니면 야쿠시마인지 확실하지는 않다.
속일본기에서는 관리를 보내 조공관계를 확인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 8세기 초에는 신각(信覚)과 구미(球美)의 사람들이 조정에 찾아왔다는 기록이 있는데 신각은 이시가키 섬, 구미는 쿠메지마(久米島)로 추정된다. 한편 나라 시대의 승려 간진(鑑真)이 753년 항해중에 아아나파 섬(阿児奈波島)에 표류했다는 기록이 있다. 아아나파는 일본식으로는 '아지나하', '아지나와' 정도로 읽을 수 있으며 오키나와 섬이었던 걸로 보인다.
8세기 일본은 견당사 파견시에 아마미 군도오키나와 섬을 거치는 항로를 사용하기도 했다.
의외로 한국 삼국시대와도 연관이 많다. 류큐열도산 청자고둥조개(이모가이)를 활용한 패제운주(조개껍질로 만든 말띠장식)가 4세기 금관가야 대성동 88호분, 91호분에서 출토되었다. 뿐만 아니라 신라 경주의 왕릉급 적석목곽분(돌무지덧널무덤)인 황남대총, 천마총에서는 이 곳 특산인 야광조개로 만든 국자가 나왔다. 한편, 대가야의 왕릉인 고령 지산동44호분에서도 동일한 국자가 나왔다. 신라의 야광조개 국자는 테두리를 금동으로 둘러서 아름다움을 더했는데, 과연 금은의 나라라 할 만하다. 이 청자고둥조개(이모가이)나 야광조개국자는 류큐와 직접 교섭에 의한 결과물이라기 보다는 일본 큐슈 세력과의 교섭 속에서 들어온 문물로 추정된다.
이후 대륙이나 일본 열도 등지에서 도래인 및 선진 문물들이 들어오고, 11~12세기 경부터 오키나와에 농경문화가 정착되어 구스쿠 시대가 시작하게 된다.

[1]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시즈오카의 하마키타 인(浜北人)이나 군마의 이와쥬쿠 유적(岩宿遺跡) 등이 있다.[2] 오키나와어로는 구시챤(ぐしちゃん)이라고 한다. 지금의 야에세 정(八重瀬町)[3] 미나토가와 인의 발견자는 사업가 겸 아마추어 고고학자였던 오오야마 세이호(大山盛保). 어느 날 채석장에서 사슴뼈를 발견하고는 '동물 뼈가 나왔으니 사람 뼈도 나오겠지.'라는 생각으로 가족과 직원들을 동원해 조사하여 정말 인골 화석을 발견했다.[4] 하지만 발굴작업이 굉장히 고되기 때문에 고고학자에게는 쓰레기장을 넘어 지옥이 되기도 한다(...). [5] 한반도의 남쪽 끝(해남군 땅끝 전망대)에서 제주도까지는 100km가 넘지 않지만, 일본 본토의 남쪽 끝(가고시마)에서 아마미 군도까지는 330km, 오키나와 본섬까지는 550km나 된다.[6] 지금은 멸종되었지만 당시 살던 사슴 뼈가 발견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