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굉

 

1. 후한낙랑군의 인물
2. 후한 말의 동군태수
2.1. 창작물에서
3. 후한 말의 부풍태수
4.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1. 후한낙랑군의 인물


왕굉(낙랑군) 참조.

2. 후한 말의 동군태수


王宏
생몰년도 미상
후한 말의 인물.
동군태수로 190년에 동탁을 공격하는 연합군이 해산되면서 유대가 동군태수인 교모에게 식량을 빌려달라고 했다가 거절하자 유대가 교모의 영채를 공격하면서 교모를 죽여 그 무리를 모두 항복시키면서 유대가 동군태수로 임명했다.
191년 가을 7월에 흑산적의 우독, 백요, 수고 등이 10여 만 군세를 거느려 업성을 향해 진군했다가 황하를 건너 위군을 공격했다가 위군과 인접한 동군을 공격하자 이를 막지 못했다. 192년에 조조가 군을 이끌고 동군으로 들어가자 복양에서 백요를 공격해 무찔렀다고 하며, 이 동군태수 자리는 흑산적이 토벌된 후 원소가 조조를 동군태수로 임명하도록 조정에 상소를 보내면서 조조가 동군태수가 되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행보가 다를 바가 없다.

2.1. 창작물에서


삼국전투기에서는 동군전투에서 2컷 만에 흑산적에 나가떨어지는 모습으로만 등장했다.
드라마 영웅조조에서는 흑산적과 싸우면서 고전하고 조조는 왕굉의 군사와 흑산적의 군사가 지칠 때까지 대기하기로 하는데, 왕굉은 조조가 한 달 동안 흑산적을 공격하지 않자 공격해달라고 한다. 조조는 밑지는 장사는 안한다고 하면서 흑산적이 동군을 함락하면 공격하겠다고 하자 왕굉은 조조의 유도에 넘어가 조조가 흑산적을 격파하면 동군태수로 취임할 것을 조정에 주청할 수 있게 한다고 약속하고 흑산적들에게서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조조가 부하들을 시켜 왕굉은 구금된다.
소설 조조(한종리앙 저)에서는 흑산적의 공격을 받고 어쩔 수 없이 나가서 싸우다가 뇌공과 단기접전을 벌였는데, 말이 넘어지자 뇌공이 죽이지 않고 말을 갈아타고 오라고 하자 물러났다가 면전패를 내걸어 흑산적이 의외로 순순히 받아들였다. 조조의 원군으로 백요의 군사를 격파했고 여러 차례 백요가 격파당했음에도 투항하지 않았으며, 왕굉은 백요가 투항하지 않는다면서 신구강의 물막이를 터뜨려야 한다고 하자 조조가 조급하게 행동하면 도적을 막겠냐고 질책했다.
삼국지: 한말패업에서 등장해 군사 45, 무용 41, 지모 31, 정무 45, 인사 25, 외교 28의 능력치로 157년생으로 나온다.

3. 후한 말의 부풍태수


王宏
(? ~ 192)
후한 말의 인물. 자는 장문(長文). 왕윤의 형.
태원 사람으로 어려서 웅대한 담력이 있어 융통성이 있으며, 홍농태수일 때 환관에게 직위를 사들인 일이 발생하면서 이를 조사해 2천 석의 관직에 이른 자라도 전부 잡아들여 수십 명을 처형했으며, 이로써 인근까지 위엄을 떨쳤다. 기주자사로 전임되자 사적인 편지는 쓰지 않아 호족들을 멀리해 빈객들이 왕독좌(王獨座)라 불렀다고 한다.
왕윤이 정권을 잡으면서 부풍태수로 전임되었다가 왕윤이 동탁의 부하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감행하고 이각, 곽사 등이 병주에서 학살 행위를 한 일로 인해 그들에 대한 사면령을 거부하면서 양주 사람들을 모두 죽인다는 유언비어가 퍼졌는데, 이각, 곽사 등이 군사를 일으켜 장안을 점령했다.
이각, 곽사는 송익과 부풍태수 왕굉을 두려워 해 왕윤을 죽이지 못했는데, 이각이 칙명으로 송익과 함께 부르자 자신들을 두려워 해 왕윤을 해치지 못한다면서 송익에게 가는 것을 말렸다. 그러나 송익이 왕명을 언급하면서 가려고 하자 동탁의 잔당 따위를 겁낸다면서 송익이 거병하면 산동의 제후들이 호응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송익이 조정으로 가자 독자 행동을 할 힘은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가서 도착하자마자 하옥되었는데, 사례교위 호충과 틈이 있어 호충이 죽이려고 애썼다. 자신의 운수가 다하자 송익과 호충을 욕했으며, 192년 음력 6월 7일에 왕윤, 송익 등과 함께 처형당했다.
후한서의 왕윤전 끝 부분에 나오는 인물로 왕윤전만으로 그 관계를 알 수 없으며, 후한서에서 인용하는 사승의 후한서를 인용한 주석을 통해 왕윤의 형인 것으로 나온다.

4.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王宏
(? ~ 284)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자는 정종(正宗).
왕개의 손자이자 왕업의 장남, 왕필의 형.
고평 사람으로 아버지 왕업에게서 조부 왕찬의 1만권의 장서를 왕필과 함께 물려받았으며, 위나라 때 공부에 벽소되어 상서랑, 급사중을 역임했으며, 태시 초에 급군태수를 지내 백성을 가족처럼 아꼈으며, 군을 통치하면서 치적을 쌓았다.
사례교위 석감이 왕굉의 정치에 대해 상소해 무제가 조칙을 내려 식량을 늘리는 것은 중요하다면서 왕굉의 방식을 넓혀야 한다고 조칙을 내렸다. 위위, 하남윤, 대사농 등을 역임했고 왕굉은 중앙에서는 명성을 얻지 못했으며, 죄인을 체포하면 진흙과 먹물을 바르고 깊은 구덩이 속에 내버려두고 식량을 주지 않았다.
독단으로 금고 5년 이하로 한 죄인이 21명이 있어서 유사에서 상주해 탄핵되었는데, 무제는 왕굉이 지방에서 치적을 올린 공이 있으므로 왕굉을 용서했다. 태강 연간에는 사례교위가 되었고 수레와 의복에 대해 고대의 제도와는 다른 제도를 만들고 서인은 자강색의 옷이나 비단옷을 입지 못하게 했으며, 무제는 측근을 시켜 풍속을 관찰하게 했다.
왕굉은 부인의 옷을 검열해 화려하다면 노상에서 몰수했으며, 왕굉은 늙어서 판단을 잘못 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세상의 비난을 받고 면직되었다가 복귀해 상서가 되었으며, 284년에 죽고 태상으로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