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가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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足軽 / あしがる
족경[1]
아시카가 막부부터 에도 막부 시대까지 존재하던 일본의 최하위 무사계급. 말이 좋아 무사계급이지 사실상 일반 병사와 크게 다름이 없었다. 조선에서는 이들을 왜병이라 불렀다.
그래도 가끔 가다가 아시가루로 시작해 출세한 인물도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시다 미츠나리, 토도 타카토라가 대표적인 예.
그 기원은 사무라이 계급의 등장과 궤를 같이 한다.
고대 일본은 율령제 국가로 율령제 국가시기만 해도 군사체제는 징집된 민초들을 '군단'으로 편성하는 고대 징병제의 형태를 띄고 있었다. 그러나 10세기를 전후해 일본의 율령제가 급격히 약화되면서 토지제도와 군사동원제도 또한 이완되었다. 기존의 군제가 무너지고 중앙정부의 지방행정력이 유명무실화되자 진공상태가 되어버린 지방 장원들의 실권은 자연스럽게 혈연을 중심으로 뭉친 무사들에게 넘어갔다. 이에 무사들은 각기 차지한 지방의 장원에서 기존의 징병제를 기반으로 한 중앙정부 휘하의 군대가 아닌 봉건적인 주종관계를 기반으로 한 '사병'들을 보유하기 시작했는데, 이들이 곧 아시가루의 전신이 되는 하급무사 계층이다.
무사계급이 출현한 헤이안 말기~무로마치 막부시대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무사단의 수장과 주종의 관계를 맺는 엄연한 무사계급의 일원이었고 그 규모도 중세 전국시대의 아시가루에 비해서는 소규모였다. 물론 휘하에 병력을 이끌 정도로 지위가 있는 각 무사 개개인이 이끈 규모가 크지 않았다는 얘기이고 전체적인 군사 규모로만 보면 결코 작다고는 볼 수 없다. 헤이안 말기~무로마치 막부시대에도 일본의 무사들은 여러 쟁란에 왕왕 수만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해서 투쟁에 나섰다.
그러나 전국시대에 접어들어 일본 전토가 내전상태에 놓이자 전쟁의 빈도와 규모는 이전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이 확대되었고, 다이묘들은 대규모로 병력을 유용해야할 일이 잦아졌다. 따라서 기존의 일족(혈연과 휘하 고용인들까지 포괄하는 개념) 중심의 주종관계 속에서 유지되던 형태의 무사단만으로는 전쟁을 수행할 수 없는 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무사단의 하급계층을 맡던 아시가루가 본격적으로 대규모로 계약을 맺고 모집되는 일반 병계급의 형태로 변화한다.
전국시대가 끝나고 에도 막부시대에 접어든 이후에는 막부의 방침에 따라 다시 계급이 고착화되어 아시가루 또한 무가 소속의 고용인으로 고정되었고 더이상 용병의 성격을 띠지 않게 되었다. 아시가루 계급은 최종적으로 메이지 유신과 함께 진행된 근대화로 계급제도가 해체되면서 사라졌다.
흔한 오해로는 이들이 일본식 징집병이라는 것이 있지만, 실제로는 율령제 하에서 군역의 형태로 징집되는 '징집병'이 아니라 어느 정도는 용병이라고도 볼 수 있는 모집병에 가까운 존재들이었다. 고대 이래로 일본은 지방행정력이나 치안이 극도로 불안했기 때문에 촌락들이 자체적으로 무장을 하는 경우가 많았고 촌락들간에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들을 무력투쟁으로 해결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렇게 자체적으로 무장을 했던 촌락집단들 중에서 전란이 급격히 확대되는 전국시대에 들어, 일종의 인력시장 개념으로 다이묘들과 계약관계를 맺고 복무하는 이들이 발생했다. 동시에 율령제를 기반으로 한 고대체제가 붕괴된 이래로 일본의 사회문화는 전쟁을 일종의 특수직으로 보아, 일반 백성이 전쟁에 직접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금지했다. 이에 따라 근대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전쟁에 직접적인 전투병으로 참여하는 이들은 무사계층으로 한정되었고, 일반 백성은 짐을 나르고 잡일을 하는 비전투병력 정도로만 참여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일본 중세의 아시가루는 다이묘와 계약을 맺은 전투병력으로 일반 백성이 아니었고, 물론 징집병 또한 아니었다. 그러나 향촌사회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완전히 집도 절도 없이 떠도는 근세 서양식 용병단과도 성격의 차이가 있다. 이때문에 아시가루는 서양 봉건제와도 다른 중세 일본 사회문화의 독특한 면을 보여주는 계급으로, 일반 백성의 징집이 불가능한 사회문화와 급격하게 확대되었던 전쟁규모라는 상충되는 상황 속에서 발생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그렇다고 징병제적 성격이 전혀 없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전국 시대의 경우 다이묘들이 통치하는 마을에 고쿠다카와 인구를 바탕으로 얼마의 병력을 보내라고 통보하는 식이었다. 이 통보에 따라 각 마을은 병력을 보내는데 우선 원래 아시가루인 자들을 보냈고, 그것으로 모자라면 지원자를 받아 아시가루로 만들어 보냈고, 그것으로도 모자라면 당연히 차출... 때문에 원치 않게 아시가루가 된 사람도 많았다.[2] 그 밖에 큰 전투를 앞두고 다이묘들이 일시불 봉록을 미끼로 임시병력을 모집하는 경우도 있어서 여기에 응한 용병에 가까운 아시가루도 있었다.[3] 즉, 아시가루는 용병제와 모병제와 징병제의 성격이 모두 있었다.
무엇보다 아시가루가 되는 것이 꼭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우선 당시 일본의 일반 백성들은 전쟁에 전투병으로 참전하는 것은 금기시 되었지만, 센푸(戦夫)라고 불리며 전쟁시 각종 부역에 동원되는 것은 무척 흔했다. 그런데 어차피 부역으로 끌려나가 중노동을 하며 고생할 바에는 아시가루가 되어 공이라도 세워 출세하는게 낫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또한 아시가루들은 얼마 안 되기는 하지만 녹봉도 받고, 감세, 부역 면제 등의 혜택이 있었으므로 이를 노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전리품을 약탈할 수 있었던 것은 덤. 특히 과거 제도도 없던 일본에서 평범한 농민이 신분상승을 이룬다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아시가루로 공을 세우면 아시가루 코가시라 정도는 얼마든지 될 수 있었고, 여기서 더 공을 세우면 정식으로 무사로 발탁되어 출세하는 것도 가능했다. 대표적인 예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생각할 수 있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아시가루라기보다 하인에서 올라간 경우고, 다케다 신겐의 가신으로, 훗날 다케다 사천왕 중 하나로 불리는 코사카 마사노부가 진짜 백성 출신에서 출세한 경우다.[4]
아시가루는 아시가루 코가시라와 아시가루 다이쇼같은 계급이 있었다. 아시가루 코가시라는 현대의 부사관 겸 소대장 정도에 해당하는데 약 30명 정도를 통솔했고, 아시가루 다이쇼는 현대의 위관 겸 중대장 정도로 한 명당 수명의 코가시라를 통솔해 약 50~150명의 병력을 지휘했다. 다만 통솔 병력은 다이묘에 따라 규모가 달랐다. 원래 아시가루 다이쇼는 무로마치 시대만 해도 아시가루 중에서 뛰어난 자들을 임명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전국시대에는 무사가 임명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아시가루 다이쇼는 다시 사무라이 다이쇼가 지휘해, 사무라이 다이쇼(侍大将)→아시가루 다이쇼(足軽大將)[5] →아시가루 코가시라(足軽小頭)→일반 아시가루(足軽衆)로 이어지는 계급 체계가 있었다.
전국시대에 아시가루는 계약을 통해 모집되는 병력이기 때문에 일본의 장수들이 이 아시가루를 '''공짜로 부려먹는 일은 없다.'''
전국시대 당시의 일본의 화폐단위는 다음과 같다.
아시가루의 연봉은 1칸 5유이 정도 되었다. 즉 1,500몬으로 오늘날 한국 화폐로 따지면 대략 195만 원 정도 되는 돈이다. 그러나 다이묘에게 복무의 대가로 받는 소득 외에도 아시가루들은 일본 향촌사회를 기반으로 하는 이들답게 다이묘에게 고용되지 않았을 때는 일반 농민과 마찬가지로 농업이나 상업, 어업에도 종사했다.[6] 사실 급여가 적다보니 별도로 직업을 가지지 않으면 먹고 살 수가 없었기에 부업은 필수였다. 기본적으로 말단인 아시가루뿐만 아니라 전국시대의 무사들도 농업 경영인의 성격을 함께 가지고 있었기에 많은 하급무사들 또한 아시가루와 다름없이 평시에는 자신의 농지를 경영했다. 이는 삼국지의 병호(兵戶)와도 비슷한 형태이지만 아시가루는 병호와는 달리 병력으로 복무할 때에는 엄연히 다이묘와 계약을 맺은 다이묘 휘하의 병력이었기 때문에 급여가 따로 지급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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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창(야리)으로 무장한 아시가루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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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유미)로 무장한 아시가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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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총(텟포)으로 무장한 아시가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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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도로 무장한 아시가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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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임진왜란 관련 작품에 등장하는 많고 많은 왜군 엑스트라 병사들을 아시가루라고 생각하면 대충 맞다.
전국시대의 아시가루들은 진가사라고 불리는 삿갓처럼 생긴 철모에 서양의 브레스트 플레이트같이 상반신과 하반신 일부만을 가리는 간략화된 갑옷[9] 을 다이묘로부터 지급받았으며, 무기로는 일본도, 창, 활, 조총을 주로 사용하였다. 아시가루가 하급무사이던 이전시대에는 나기나타를 주무기로 사용하기도 했지만 전국시대에 들어서면 이미 나기나타는 변화한 전장의 변화에 맞지 않아 군대의 주된 무장에서는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아시가루의 보호구는 도오세이구소쿠(當世具足)에서 딱 4개만 착용한다. 이를 오카시구소쿠(御貸具足)라고 한다.
아시가루는 각 무장에 따라 진군할 때에 놓이는 위치가 다르다.
대부분이 엑스트라로 큰 비중 없이 나오는 게 일반적이지만[10] 가면라이더 가이무에서 등장하는 조연급 라이더인 가면라이더 쿠로카게의 모티브가 이 아시가루다.
도미네이션즈에서 계몽 시대의 일본 고유 유닛으로 나온다.
수리검전대 닌닌저의 악역 잡졸 히토카라게 이미지 역시 아시가루. [11]
임진왜란 시기를 다룬 한국의 사극들에서는 위력적인 철포병을 제외하면 허구한 날 조선 장수들이나 의병들에게 썰리는 성가신 잡몹으로 나온다. 그러나 이건 일본 사극도 마찬가지라서 이쪽도 그냥 잡몹 취급.
라이즈 오브 네이션즈에서는 고대 시대 일본 고유 홉라이트(근접병)으로 나온다.
명실상부한 주력. 사무라이는 생산을 위해 테크 건물이 필요하고 생산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아시가루는 처음부터 빠르게 양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창을 사용하는 야리 아시가루와 활을 쓰는 유미 아시가루가 있으며, 후기 테크로 가면 조총 아시가루도 쓸 수 있다. '''"나는 폼 나고 성능도 좋은 사무라이만으로 병력을 구성하겠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막대한 유지비와 수많은 테크 건물이 필요하므로 주력은 아시가루로 채우되 엘리트 병종 개념으로 사무라이를 채우는 것이 좋다.[12] 잇코 잇키의 아시가루는 보통 아시가루보다 능력치가 떨어지지만 사기가 높고 머릿수가 많다. 오다 가문은 아시가루 병종 3돌이가 유지비가 싸지고 능력치도 올라가서 가성비가 정말 우월하다. 재빠르게 잇코 잇키를 털어버리고 정확도 버프를 주는 공방이 있는 에치젠과 바로 오른쪽의 대장간이 있는 카가에서 정확도 극한으로 끌어올린 유미, 뎃포 아시가루와 금갑빠 입힌 야리 아시가루를 뽑아내면 답이 없어진다. 그냥 아시가루의 탈을 쓴 야리 사무라이가 튀어나온다고 보면 된다. 수많고, 싸고, 유지비도 적고 이제 여기다가 DLC를 사서 나가에 야리까지 나오면 답이 없다. 이놈들은 그냥 창벽만 키고 달려가도 근접전에서 가장 강한 카타나 사무라이를 이기는데 금갑빠까지 받으면...
항목 참조
일본의 만화잡지 코코하나(集英社)에서 모리모토 코즈에코(森本梢子)(고쿠센의 작가)가 연재중인 이고깽 시대물 로맨스 만화. 주인공이 여자인 아시가루라는 느낌을 내기 위해서인지 あしがる가 아닌 アシガール로 표기한다. 드라마화되었다.
현대에 살고 있는 평범하고 의욕이 없는 여고생 하야카와 유이가 우연한 기회로 과거로 타임슬립하여 사정상 남장여자 유이 노스케로, 그리고 1번 항목의 아시가루로 행동하면서 남자 주인공인 꽃미남 도련님(쿠하치로우 타다키요)을 위험에서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내용이다.
여주인공의 달리기가 말만큼 빠르다든가 남동생이 천재라서 타임머신을 개발하였다든가 하는 등 뭔가 개연성과는 거리가 먼 스토리 진행이지만 그런 쪽을 포기하면 그냥 부담없이 술술 읽을 수 있는 만화이다.
번역본에서는 제목을 '아시걸', 작중에서 나오는 1번 항목의 아시가루는 '하급무사'로 번역되어 있다. 드라마 제목이 아시걸(드라마)인데, 여기서 베낀 듯하다.
足軽 / あしがる
족경[1]
1. 개요
아시카가 막부부터 에도 막부 시대까지 존재하던 일본의 최하위 무사계급. 말이 좋아 무사계급이지 사실상 일반 병사와 크게 다름이 없었다. 조선에서는 이들을 왜병이라 불렀다.
그래도 가끔 가다가 아시가루로 시작해 출세한 인물도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시다 미츠나리, 토도 타카토라가 대표적인 예.
2. 역사
그 기원은 사무라이 계급의 등장과 궤를 같이 한다.
고대 일본은 율령제 국가로 율령제 국가시기만 해도 군사체제는 징집된 민초들을 '군단'으로 편성하는 고대 징병제의 형태를 띄고 있었다. 그러나 10세기를 전후해 일본의 율령제가 급격히 약화되면서 토지제도와 군사동원제도 또한 이완되었다. 기존의 군제가 무너지고 중앙정부의 지방행정력이 유명무실화되자 진공상태가 되어버린 지방 장원들의 실권은 자연스럽게 혈연을 중심으로 뭉친 무사들에게 넘어갔다. 이에 무사들은 각기 차지한 지방의 장원에서 기존의 징병제를 기반으로 한 중앙정부 휘하의 군대가 아닌 봉건적인 주종관계를 기반으로 한 '사병'들을 보유하기 시작했는데, 이들이 곧 아시가루의 전신이 되는 하급무사 계층이다.
무사계급이 출현한 헤이안 말기~무로마치 막부시대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무사단의 수장과 주종의 관계를 맺는 엄연한 무사계급의 일원이었고 그 규모도 중세 전국시대의 아시가루에 비해서는 소규모였다. 물론 휘하에 병력을 이끌 정도로 지위가 있는 각 무사 개개인이 이끈 규모가 크지 않았다는 얘기이고 전체적인 군사 규모로만 보면 결코 작다고는 볼 수 없다. 헤이안 말기~무로마치 막부시대에도 일본의 무사들은 여러 쟁란에 왕왕 수만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해서 투쟁에 나섰다.
그러나 전국시대에 접어들어 일본 전토가 내전상태에 놓이자 전쟁의 빈도와 규모는 이전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이 확대되었고, 다이묘들은 대규모로 병력을 유용해야할 일이 잦아졌다. 따라서 기존의 일족(혈연과 휘하 고용인들까지 포괄하는 개념) 중심의 주종관계 속에서 유지되던 형태의 무사단만으로는 전쟁을 수행할 수 없는 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무사단의 하급계층을 맡던 아시가루가 본격적으로 대규모로 계약을 맺고 모집되는 일반 병계급의 형태로 변화한다.
전국시대가 끝나고 에도 막부시대에 접어든 이후에는 막부의 방침에 따라 다시 계급이 고착화되어 아시가루 또한 무가 소속의 고용인으로 고정되었고 더이상 용병의 성격을 띠지 않게 되었다. 아시가루 계급은 최종적으로 메이지 유신과 함께 진행된 근대화로 계급제도가 해체되면서 사라졌다.
흔한 오해로는 이들이 일본식 징집병이라는 것이 있지만, 실제로는 율령제 하에서 군역의 형태로 징집되는 '징집병'이 아니라 어느 정도는 용병이라고도 볼 수 있는 모집병에 가까운 존재들이었다. 고대 이래로 일본은 지방행정력이나 치안이 극도로 불안했기 때문에 촌락들이 자체적으로 무장을 하는 경우가 많았고 촌락들간에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들을 무력투쟁으로 해결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렇게 자체적으로 무장을 했던 촌락집단들 중에서 전란이 급격히 확대되는 전국시대에 들어, 일종의 인력시장 개념으로 다이묘들과 계약관계를 맺고 복무하는 이들이 발생했다. 동시에 율령제를 기반으로 한 고대체제가 붕괴된 이래로 일본의 사회문화는 전쟁을 일종의 특수직으로 보아, 일반 백성이 전쟁에 직접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금지했다. 이에 따라 근대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전쟁에 직접적인 전투병으로 참여하는 이들은 무사계층으로 한정되었고, 일반 백성은 짐을 나르고 잡일을 하는 비전투병력 정도로만 참여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일본 중세의 아시가루는 다이묘와 계약을 맺은 전투병력으로 일반 백성이 아니었고, 물론 징집병 또한 아니었다. 그러나 향촌사회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완전히 집도 절도 없이 떠도는 근세 서양식 용병단과도 성격의 차이가 있다. 이때문에 아시가루는 서양 봉건제와도 다른 중세 일본 사회문화의 독특한 면을 보여주는 계급으로, 일반 백성의 징집이 불가능한 사회문화와 급격하게 확대되었던 전쟁규모라는 상충되는 상황 속에서 발생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그렇다고 징병제적 성격이 전혀 없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전국 시대의 경우 다이묘들이 통치하는 마을에 고쿠다카와 인구를 바탕으로 얼마의 병력을 보내라고 통보하는 식이었다. 이 통보에 따라 각 마을은 병력을 보내는데 우선 원래 아시가루인 자들을 보냈고, 그것으로 모자라면 지원자를 받아 아시가루로 만들어 보냈고, 그것으로도 모자라면 당연히 차출... 때문에 원치 않게 아시가루가 된 사람도 많았다.[2] 그 밖에 큰 전투를 앞두고 다이묘들이 일시불 봉록을 미끼로 임시병력을 모집하는 경우도 있어서 여기에 응한 용병에 가까운 아시가루도 있었다.[3] 즉, 아시가루는 용병제와 모병제와 징병제의 성격이 모두 있었다.
무엇보다 아시가루가 되는 것이 꼭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우선 당시 일본의 일반 백성들은 전쟁에 전투병으로 참전하는 것은 금기시 되었지만, 센푸(戦夫)라고 불리며 전쟁시 각종 부역에 동원되는 것은 무척 흔했다. 그런데 어차피 부역으로 끌려나가 중노동을 하며 고생할 바에는 아시가루가 되어 공이라도 세워 출세하는게 낫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또한 아시가루들은 얼마 안 되기는 하지만 녹봉도 받고, 감세, 부역 면제 등의 혜택이 있었으므로 이를 노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전리품을 약탈할 수 있었던 것은 덤. 특히 과거 제도도 없던 일본에서 평범한 농민이 신분상승을 이룬다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아시가루로 공을 세우면 아시가루 코가시라 정도는 얼마든지 될 수 있었고, 여기서 더 공을 세우면 정식으로 무사로 발탁되어 출세하는 것도 가능했다. 대표적인 예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생각할 수 있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아시가루라기보다 하인에서 올라간 경우고, 다케다 신겐의 가신으로, 훗날 다케다 사천왕 중 하나로 불리는 코사카 마사노부가 진짜 백성 출신에서 출세한 경우다.[4]
아시가루는 아시가루 코가시라와 아시가루 다이쇼같은 계급이 있었다. 아시가루 코가시라는 현대의 부사관 겸 소대장 정도에 해당하는데 약 30명 정도를 통솔했고, 아시가루 다이쇼는 현대의 위관 겸 중대장 정도로 한 명당 수명의 코가시라를 통솔해 약 50~150명의 병력을 지휘했다. 다만 통솔 병력은 다이묘에 따라 규모가 달랐다. 원래 아시가루 다이쇼는 무로마치 시대만 해도 아시가루 중에서 뛰어난 자들을 임명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전국시대에는 무사가 임명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아시가루 다이쇼는 다시 사무라이 다이쇼가 지휘해, 사무라이 다이쇼(侍大将)→아시가루 다이쇼(足軽大將)[5] →아시가루 코가시라(足軽小頭)→일반 아시가루(足軽衆)로 이어지는 계급 체계가 있었다.
3. 녹봉
전국시대에 아시가루는 계약을 통해 모집되는 병력이기 때문에 일본의 장수들이 이 아시가루를 '''공짜로 부려먹는 일은 없다.'''
전국시대 당시의 일본의 화폐단위는 다음과 같다.
아시가루의 연봉은 1칸 5유이 정도 되었다. 즉 1,500몬으로 오늘날 한국 화폐로 따지면 대략 195만 원 정도 되는 돈이다. 그러나 다이묘에게 복무의 대가로 받는 소득 외에도 아시가루들은 일본 향촌사회를 기반으로 하는 이들답게 다이묘에게 고용되지 않았을 때는 일반 농민과 마찬가지로 농업이나 상업, 어업에도 종사했다.[6] 사실 급여가 적다보니 별도로 직업을 가지지 않으면 먹고 살 수가 없었기에 부업은 필수였다. 기본적으로 말단인 아시가루뿐만 아니라 전국시대의 무사들도 농업 경영인의 성격을 함께 가지고 있었기에 많은 하급무사들 또한 아시가루와 다름없이 평시에는 자신의 농지를 경영했다. 이는 삼국지의 병호(兵戶)와도 비슷한 형태이지만 아시가루는 병호와는 달리 병력으로 복무할 때에는 엄연히 다이묘와 계약을 맺은 다이묘 휘하의 병력이었기 때문에 급여가 따로 지급되는 것이다.
4. 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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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창(야리)으로 무장한 아시가루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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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유미)로 무장한 아시가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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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총(텟포)으로 무장한 아시가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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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도로 무장한 아시가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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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임진왜란 관련 작품에 등장하는 많고 많은 왜군 엑스트라 병사들을 아시가루라고 생각하면 대충 맞다.
전국시대의 아시가루들은 진가사라고 불리는 삿갓처럼 생긴 철모에 서양의 브레스트 플레이트같이 상반신과 하반신 일부만을 가리는 간략화된 갑옷[9] 을 다이묘로부터 지급받았으며, 무기로는 일본도, 창, 활, 조총을 주로 사용하였다. 아시가루가 하급무사이던 이전시대에는 나기나타를 주무기로 사용하기도 했지만 전국시대에 들어서면 이미 나기나타는 변화한 전장의 변화에 맞지 않아 군대의 주된 무장에서는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아시가루의 보호구는 도오세이구소쿠(當世具足)에서 딱 4개만 착용한다. 이를 오카시구소쿠(御貸具足)라고 한다.
- 진가사 (陣笠 / じんがさ) - 아시가루 전용 투구로 삿갓처럼 생겼다.
- 가슴 방어구 (腹当 / はらあて)
- 코테 - 손 방어구
- 스네아테 - 정강이 방어구
5. 진군 순서
아시가루는 각 무장에 따라 진군할 때에 놓이는 위치가 다르다.
- 진군 도중 전방 300m 정도 거리에 접근하면 조총 사격.
- 전방 50m 정도 거리까지 도달하면 궁병 사격.
- 전방 20m 이내의 거리에서는 근접보병 부대가 움직인다.
- 적진이 무너지면 기마무사들이 움직인다.
6. 타 매체에서의 아시가루
대부분이 엑스트라로 큰 비중 없이 나오는 게 일반적이지만[10] 가면라이더 가이무에서 등장하는 조연급 라이더인 가면라이더 쿠로카게의 모티브가 이 아시가루다.
도미네이션즈에서 계몽 시대의 일본 고유 유닛으로 나온다.
수리검전대 닌닌저의 악역 잡졸 히토카라게 이미지 역시 아시가루. [11]
임진왜란 시기를 다룬 한국의 사극들에서는 위력적인 철포병을 제외하면 허구한 날 조선 장수들이나 의병들에게 썰리는 성가신 잡몹으로 나온다. 그러나 이건 일본 사극도 마찬가지라서 이쪽도 그냥 잡몹 취급.
라이즈 오브 네이션즈에서는 고대 시대 일본 고유 홉라이트(근접병)으로 나온다.
6.1. 쇼군: 토탈 워
6.2. 토탈 워: 쇼군2
명실상부한 주력. 사무라이는 생산을 위해 테크 건물이 필요하고 생산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아시가루는 처음부터 빠르게 양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창을 사용하는 야리 아시가루와 활을 쓰는 유미 아시가루가 있으며, 후기 테크로 가면 조총 아시가루도 쓸 수 있다. '''"나는 폼 나고 성능도 좋은 사무라이만으로 병력을 구성하겠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막대한 유지비와 수많은 테크 건물이 필요하므로 주력은 아시가루로 채우되 엘리트 병종 개념으로 사무라이를 채우는 것이 좋다.[12] 잇코 잇키의 아시가루는 보통 아시가루보다 능력치가 떨어지지만 사기가 높고 머릿수가 많다. 오다 가문은 아시가루 병종 3돌이가 유지비가 싸지고 능력치도 올라가서 가성비가 정말 우월하다. 재빠르게 잇코 잇키를 털어버리고 정확도 버프를 주는 공방이 있는 에치젠과 바로 오른쪽의 대장간이 있는 카가에서 정확도 극한으로 끌어올린 유미, 뎃포 아시가루와 금갑빠 입힌 야리 아시가루를 뽑아내면 답이 없어진다. 그냥 아시가루의 탈을 쓴 야리 사무라이가 튀어나온다고 보면 된다. 수많고, 싸고, 유지비도 적고 이제 여기다가 DLC를 사서 나가에 야리까지 나오면 답이 없다. 이놈들은 그냥 창벽만 키고 달려가도 근접전에서 가장 강한 카타나 사무라이를 이기는데 금갑빠까지 받으면...
6.3.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 아시아 왕조
항목 참조
6.4. 일본 만화 아시가루(アシガール)
일본의 만화잡지 코코하나(集英社)에서 모리모토 코즈에코(森本梢子)(고쿠센의 작가)가 연재중인 이고깽 시대물 로맨스 만화. 주인공이 여자인 아시가루라는 느낌을 내기 위해서인지 あしがる가 아닌 アシガール로 표기한다. 드라마화되었다.
현대에 살고 있는 평범하고 의욕이 없는 여고생 하야카와 유이가 우연한 기회로 과거로 타임슬립하여 사정상 남장여자 유이 노스케로, 그리고 1번 항목의 아시가루로 행동하면서 남자 주인공인 꽃미남 도련님(쿠하치로우 타다키요)을 위험에서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내용이다.
여주인공의 달리기가 말만큼 빠르다든가 남동생이 천재라서 타임머신을 개발하였다든가 하는 등 뭔가 개연성과는 거리가 먼 스토리 진행이지만 그런 쪽을 포기하면 그냥 부담없이 술술 읽을 수 있는 만화이다.
번역본에서는 제목을 '아시걸', 작중에서 나오는 1번 항목의 아시가루는 '하급무사'로 번역되어 있다. 드라마 제목이 아시걸(드라마)인데, 여기서 베낀 듯하다.
7. 기타
[1] 발 족자에 가벼울 경. '경보병' 정도로 해석하면 될 듯.[2] 와츠키 노부히로의 단편 데뷔작으로 일본 전국시대를 다룬 만화 '전국의 초승달'(바람의 검심 단행본에도 특별편으로 수록)에서 마을에 병사가 부족해 강제 징집된 아시가루 잇신타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강제징집된 아시가루는 일본 역사극에 꽤 흔하게 등장하는 소재이다.[3] 대표적으로 오사카 전투에서 히데요리 측이 대규모 병력을 모집했다.[4] 원래 이름은 카스가 토라츠나(春日虎綱)로 코사카라 불리는 것은 아시가루 다이쇼가 되고 난 뒤 공을 세워 코사카 가문의 양자로 들어가면서부터였다.[5] 아시가루 가시라(足軽頭)라고도 불렸다.[6] 대표적으로 히데요시는 출세하기 전에 여기저기 봇짐장사를 하러 떠돌아 다니다 곤욕을 치렀다는 류의 일화가 여러 개 남아있다[7] 바로 위의 사진은 행진을 위해 아시가루로 분장한 참가자들.[8] 바로 위의 사진은 재현 및 시범을 위해 아시가루로 분장한 참가자들.출처.[9] 이를 도우마루(胴丸) 혹은 하라마키(腹巻)라고 한다.[10] 거의 전국시대나 임진왜란을 소재로 한 창작물에서 자주 나온다.[11] 하지만 아시가루가 어떤 직책이었는지 감안하면 쿠로카게나 히토카라게가 왜 양산형으로 나오는지 대충은 이해된다.[12] 물론 자금 상황이 안정되는 중반 정도부터는 사무라이만으로 이루어진 선봉 군단을 한두 개 정도 편성해야 한다. 몸집을 잔뜩 불린 적 가문들의 정예 병력과 대치 시 승리를 완벽히 보장해줄 보험이 필요하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