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다 츠네미

 

'''이름'''
츠다 츠네미(津田恒実[1])
'''출생'''
1960년 8월 1일
야마구치현 츠노군 난요정[2]
'''사망'''
1993년 7월 20일
'''학력'''
난요 공업 고등학교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1년 드래프트 1위
'''소속팀'''
'''히로시마 도요 카프(1982~1991)'''
<color=#373a3c> '''1982년 센트럴리그 최우수 신인'''
1981년
하라 타츠노리
(요미우리 자이언츠)

'''츠다 츠네미
(히로시마 도요 카프)'''

1983년
마키하라 히로미
(요미우리 자이언츠)
<color=#373a3c> '''1989년 센트럴리그 최우수 구원투수[3]'''
1988년
카쿠 겐지
(주니치 드래곤즈)
44SP[4]

'''츠다 츠네미
(히로시마 도요 카프)'''
40SP[5]

1990년
요다 츠요시
(주니치 드래곤즈)
35SP[6]
1. 소개
2. 프로 데뷔 이전
3. 현역 시절
4. 투병생활
5. 츠다, 별이 되다
6. 이후


1. 소개


'''카프의 별이 된 불꽃의 스토퍼''' # #
일본 야마구치현 출신의 前 프로야구 선수.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첫 신인왕이며 츠네곤, '''불꽃의 스토퍼''' 등의 별명으로 불리며 팬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불의의 병으로 일찍 세상을 뜨고 만 비운의 선수.

2. 프로 데뷔 이전


난요 공업고등학교에 입학해 1학년 때부터 에이스 투수로 활약했다. 2학년이던 1977년 코시엔 지역 예선에서 퍼펙트 게임을 기록하며 스카우터들의 이목을 끌었고, 3학년이 된 이듬해 1978년엔 학교를 춘/하계 코시엔에 모두 진출시키며 전국 무대에 이름을 알렸다.
1979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인 야구팀 쿄와발효(2002년 해산)에서 뛰며 1981년 도시대항 야구대회덴덴 주고쿠[7]의 보강선수[8]로 출장했고 같은 해 열린 사회인 야구 선수권대회에도 출장했다.
이후 1981년 드래프트 1순위로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 입단했다.

3. 현역 시절


츠다는 데뷔 첫해인 1982년 주로 선발 투수로 마운드에 올라 11승 6패, 평균자책점 3.88이라는 나무랄 데 없는 성적으로 신인왕을 수상하였다. 이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창단 이래 최초로 배출한 신인왕인지라 구단으로서도 경사였다.
이듬해이자 프로 2년째인 1983년, 츠다는 전반기에만 9승을 거두며 향후 히로시마의 기둥 투수 자리를 굳히는가 했으나... 올스타전에 출전한 이후 어깨부상을 입어 시즌아웃 당하고 말았다. 다음해인 1984년 3승 4패 1세이브에 그쳤고, 설상가상으로 가운데 손가락 혈행장애로 인해 오랜 이닝을 던질 수 없게 되면서, 츠다는 한동안 방황하며 제 실력을 찾지 못하게 된다.
결국 1984년 시즌 종료 후 혈행장애를 치료하고자 선수 생명까지 걸며 '''세계 최초'''로 중지인대를 적출하는 수술을 감행했고 결과는 성공이었다. 하지만 1985년 시즌에도 츠다는 예전의 위력을 찾지 못한 채 6점대 방어율에 2승 3패라는 프로 데뷔 후 최악의 성적을 남겼다. 이대로 츠다는 끝나 버리는가 싶었지만...
1985년 시즌을 마치고 동계훈련 때 절치부심하며 훈련에 매진한 츠다는 1986년 팀의 구원투수로 돌아와 22세이브를 거두며 부활의 깃발을 올렸고, 그 해 컴백상을 수상함과 동시에 히로시마의 센트럴리그 우승에 크게 공헌하였다. 비록 세이부 라이온즈에 일본시리즈 제패를 허용하긴 했지만[9] 츠다는 자신이 등판했던 2~4차전의 승리를 모두 매듭짓는 활약으로 시리즈 우수선수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이해 어머니를 위암으로 잃는 슬픔을 겪었는데, '''5년 뒤 츠다 자신도..'''
1987, 1988년 시즌에 각각 18세이브, 20세이브를 거두며 변함없이 히로시마의 뒷문을 든든히 지켰지만, 1988년에는 어깨 통증으로 인해 유독 블론세이브를 많이 저지르는 바람에 '''끝내기의 달인 츠다''' 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기도 했다(...).
1989년 츠다는 다시 일어섰고, 그 해 '''12승 5패 28세이브, 평균자책점 1.63''' 이란 빼어난 성적으로 최우수 구원투수상과 파이어맨 상[10]을 거머쥐면서, 1989년은 츠다에게 생애 최고의 해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1990년 어깨 부상이 재발하는 바람에 4경기 등판에 그치며 데뷔 이래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지만 코칭스태프와 동료, 그리고 팬들은 츠다가 또 다시 부활의 날개짓을 보여줄 것을 기대하며 1991년 시즌 개막을 기다렸다.
'''그런데...'''
츠다는 1990년 말부터 원인 불명의 두통에 시달리고 있었고,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1991 시즌을 맞이했는데 4월 12일 개막전에서 1점차 리드를 지키지 못하고 동점을 내주며 강판당했다. 팬들은 처음엔 어쩌다 그러려니 했지만, 14일 히로시마 시민 구장에서 열린 요미우리 자이언츠 와의 경기에서 선발 키타벳푸 마나부의 호투로 1-0 리드를 잡던 8회초 구원 등판한 츠다는 안타와 사구, 폭투로 무사 2, 3루의 위기를 자초하더니 급기야 하라 다쓰노리에게 동점 좌전 적시타를 얻어맞고 강판당했다.[11] 히로시마의 홈 팬들은 분노 섞인 야유로 츠다를 몰아세웠고, 츠다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더그아웃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 날 경기가 츠다의 생애 마지막 등판이 될 줄은 그때까지 아무도 몰랐다. 츠다 자신도...'''

4. 투병생활


자신의 몸이 확실히 정상은 아니라는 것을 느낀 츠다는 다음 날 히로시마 대학 부속병원에 입원하여 정밀 검사를 받았는데, 그 결과는 '''청천벽력 같은 악성 뇌종양'''이었다. 그것도 이미 '''수술로는 적출이 불가능한 위치'''에 있었고, 결국 일단은 뇌에 찬 물을 빼내는 수술을 받게 된다. 츠다의 아내 테루요는 츠다가 큰 충격을 받을까봐 그냥 수두증이라고 둘러댄 채[12] 츠다를 수술실로 들여보내야 했는데, 아무것도 모르던 츠다는 수술 전 아내에게 처음으로 "무섭다" 라면서 울먹였다고 한다.
일단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그 후 츠다의 상태는 계속 악화되었고, 병명도 모른 채 심한 두통에 시달리는 츠다를 보다못한 아내는 주치의와 담판을 벌인 끝에 방사선과 항암제 치료를 그만두고 집에서 식이요법과 통원 치료를 병행하기로 하면서 츠다는 퇴원하여 집에 돌아오게 되었다. 귀가한 츠다는 아내에게 자신이 무슨 병인지 알려 달라고 애원했고, 아내가 결국 뇌종양 말기라고 털어놓자 츠다는 밤새 어린애처럼 울부짖었다.
하지만 의지가 강했던 츠다는 다시 그라운드로 돌아가겠다는 일념으로 식이요법과 통원치료에 전념했고, 아내도 그를 진심으로 도와주었다. 덕분에 츠다는 상태가 일시적으로 악화되기도 했지만 조금씩 병세가 호전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츠다의 암 투병 소식을 전해들은 히로시마 동료들도 '''"츠다를 위해 싸운다!"''' 라는 결심으로 매 경기 분투를 거듭하여 결국 그 해 주니치 드래곤즈를 제치고 극적인 역전 리그 우승을 거두었다.[13] 이 경기를 병상에서 TV로 시청하던 츠다는 히로시마의 리그 우승이 결정되자 손뼉을 치며 한없이 기뻐했다고 한다.
1991년 시즌 종료 후 츠다는 본인의 의지에 따라 퇴단서를 제출, 히로시마에서 방출되며 현역에서 은퇴하게 되었지만 츠다는 방출을 계기로 단순히 살아남겠다는 의지가 아닌 "반드시 그라운드로 돌아가겠다" 라는 오기와 투지를 가지고 치료를 위해 후쿠오카현으로 이사, 치료와 동시에 복귀를 위한 트레이닝에 몰두하게 되었다.

5. 츠다, 별이 되다


하지만 츠다의 상태는 1992년 6월부터 다시 악화되기 시작하였고, 그 해 10월 이후 의식불명 상태에 빠지며 호흡기로 연명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결국 1993년 7월 20일[14], 더 이상의 연명 치료는 의미가 없다는 의료진의 판단으로 아내 테루요의 '''"여보, 그동안 고생 많았어요. 이제 편안해지셔도 돼요"''' 라는 눈물어린 작별 인사와 함께 호흡기를 제거하였고, 츠다는 길고 고통스럽던 투병생활을 마감하며 아내와 외동아들을 남긴 채 일생을 마쳤다. 향년 32세.
그는 투병 중일 때 아내에게 '''"여보, 감독과 코치에게 욕을 먹고 관중들에게 어떤 야유와 비난을 받아도 좋으니까 한 번만, 딱 한 번만 마운드에 올랐으면 좋겠어..."''' 라고 털어놓았다 한다.
츠다의 일본프로야구 10시즌 통산 성적은 '''286경기 등판, 49승 41패 90세이브, 평균자책점 3.31'''이다.

6. 이후


야구팬 대개는 츠다가 죽은 후 그의 등번호 14번이 영구결번된 것으로 알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이는 천국에 올라간 츠다를 신격화하는 대신 그 영혼을 히로시마 선수 모두에게 계승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 후 14번은 1997년 신인왕 '''사와자키 토시카즈'''(1997~2005)를 거쳐서 '''시노다 준페이'''(2006~2013)[15], 그리고 2013 신인 드래프트에서 1위로 지명된 대학 NO.1 투수 오세라 다이치에게 이어졌다. 공교롭게도 사와자키와 오세라는 츠다와 같은 신인왕 수상자이다.
또한 히로시마 구단은 향후 홈구장을 새로 짓더라도 절대로 돔구장으로 짓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는데, 이유인 즉슨 하늘에 있는 츠다가 언제든지 경기를 볼 수 있도록 위함이라고... 그래서 히로시마의 새 홈구장인 마쓰다 줌줌 스타디움은 일반적인 개방형 구장이다...라고 하긴 하지만 저건 그냥 듣기좋게 갖다 붙인 얘기고 실상은 히로시마 카프 프로야구단이 돈이 없기도 하거니와 기존 구장이 오래 되어 새로 짓긴 해야 하는데 허울 좋은 돔구장 만들려고 시간 끄는 거보단 차라리 최고의 개방형 구장을 만들자 해서 마쓰다 줌줌 스타디움이 탄생한 것이긴 하다.(...) 어쨌든 히로시마가 돈이 없어서 돔구장을 못 지은게 하늘에 있는 츠다에게는 다행인지도... 여기서 이야기하는 루머와 비슷한 사례로 임수혁 선수가 있다. 다만 이 케이스는 루머에 그치지 않고 팬들이 지지하는 경우.
그의 불꽃 같은 삶을 2000년 후지TV에서 <최후의 스트라이크>라는 특집 드라마로 제작하기도 했다(타이틀롤인 츠다 역은 '''키시타니 고로'''[16]가 맡았다.)
츠다의 아들인 타이키(津田大毅, 1989년생)[17]도 아버지 뒤를 이어 투수로 뛴 적이 있다. 큐슈학원고교와 큐슈 국제대학을 거쳐 2008년 도쿄 국제대학에 편입했는데, 당시 츠다 츠네미의 스승이던 카프의 명장 고바 타케시가 이 대학의 야구부 감독을 맡고 있었다. 2대에 걸쳐 같은 감독님의 지도를 받은 셈인데, 유감스럽게도 다이키는 잦은 부상으로 그리 등판을 많이 못했고, 대학 졸업 후 야구의 길을 접고 현재는 평범한 회사원으로 지내고 있다고 한다.
그로부터 6년 뒤인 1999년에는 한국에서 해태 타이거즈의 야구선수인 김상진이 츠다처럼 암으로 인해 세상을 떠났다. 둘은 팀에서 촉망받던 젊은 투수였고, 암에 걸려 안타깝게 요절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2012년, 기자투표로 같은 팀의 대선배 투수였던 키타벳푸 마나부와 함께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표창식에는 부인이 참여했다. 다만 통산성적이 다른 헌액자 선수들에 비해 많이 낮았기 때문에 헌액 당시 츠다가 난치병으로 요절한 것이 득표에 영향을 준 게 아니냐며 반발의견이 적지 않았다.
[1] 데뷔 시즌인 1982년부터 1984년까지 '''津田恒美'''란 표기를 사용.[2] 현 슈난시[3] 이때 수상기준은 세이브 수가 아닌 세이브 포인트(구원승+세이브, 약칭 SP)가 기준이었다. 2005년부턴 세이브 포인트가 폐지되면서 이 상도 최다 세이브 상으로 새로 개편된다.[4] 7구원승 37세이브, 세이브 수는 리그 1위[5] 12구원승 28세이브, 세이브 수는 리그 1위[6] 4구원승 31세이브, 세이브 수는 리그 1위[7] 후에 '''NTT 니시닛폰 주고쿠 야구클럽'''으로 개명했다가 2003년 해산했다.[8] 도시대항야구대회 본선진출팀이 지역예선 탈락팀의 에이스 3명을 본선기간 동안 임대선수로 쓰는 제도. 올림픽의 와일드카드제를 생각하면 이해가 갈 듯싶다.[9] 그것도 '''3승 1무'''로 앞서다 리버스 스윕으로 관광당했는데, 그 시초가 상대 팀 '''투수'''였던 쿠도 키미야스에게 허용한 '''끝내기 안타'''(...) 그리고 쿠도는 이 해 일본시리즈에서 '''1승 1패 2세이브'''로 맹활약하며 시리즈 MVP를 수상했다.[10] 야스다 생명보험에서 후원하던 구원투수를 대상으로 주던 상. 2002년을 끝으로 폐지.[11] 뒤이어 마운드에 오른 오노 유타카가 실점을 내주면서(물론 기록되는 건 츠다) 츠다는 이날 패전 투수가 되었다.[12] 당시 히로시마 구단도 수두증으로 일시 은퇴한다는 발표를 했다.[13] 그러나 일본시리즈에서는 공교롭게도 또 다시 세이부 라이온즈를 만나 3승 4패로 지고 말았다. 그리고 이것이 2016년 전까지 카프의 마지막 리그 우승과 일본시리즈 진출이었다.[14] 그 날은 일본프로야구 올스타전 1차전이 열리던 날이었다. 이날 올스타전에 출장한 히로시마 도요 카프 선수들은 추모의 의미로 전원 상장을 달았고 당시 중계를 맡은 닛폰 TV 측 아나운서 야마시타 스에노리가 경기 도중 부고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15] 시노다는 2014년 오세라 다이치에게 14번을 물려주고 21번으로 등번호를 바꾼 후 2015년 은퇴할 때까지 카프에서 뛰었다.[16] 용과 같이 원작게임을 원작파괴 수준으로 만든 쿠소영화 용이 간다에서 마지마 고로 역할을 맡으신 배우다. 영화 자체는 혹평이었지만 이분이 연기한 마지마 고로만큼은 대호평.[17] 발음은 비슷하나 한자 표기는 다른 동명이인(이 쪽은 津田大樹)에 나이까지 같은 츠다 다이키라는 선수가 닛폰햄에 2007년 대학생/사회인 드래프트 3위로 지명된 적이 있었는데, 행실불량(확실한 것은 아니나 잦은 숙소 귀가시간 위반이나 늦잠 등 기본 에티켓이 글러먹은 점이나 코치들한테 자주 대들었다는 소문이 있다)으로 1군등판은 커녕 바로 다음해인 2008년 시즌 후 잘렸다고 한다(...) 그래서 한국내에선 츠다의 아들이 그랬다는 오해성 소문이 떠돌기도 했다. 사실 츠다의 아들 쪽은 이름 발음이 타이키(たいき)이고 닛폰햄 선수 쪽은 이름 발음이 다이키(だいき)라서 조금만 자세히 검색했으면 소문이 틀렸다는 걸 알 수 있었겠지만, 그런 정보를 찾기도 어려운 데다가 표기법 문제도 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