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슈퍼게임
1. 소개
'''한일 슈퍼게임'''
'''日韓スーパーゲーム'''
1990년대에 대한민국과 일본 양국의 프로야구 시즌이 마감된 뒤 열린 한/일 야구 정기전. 1991년/1995년/1999년 이렇게 세 차례 열렸다. 한국프로야구와 일본프로야구 올스타팀끼리의 대결이었다. 미일 프로야구 올스타전을 모방한 리그간 친선 경기였던 셈.[1]
대회는 한국프로야구 발족 10주년과, 한-일 국교정상화 2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한국야구위원회와 일본야구기구가 공동으로 주최한 1991년 대회가 시작이었다. 요미우리 신문이 미일 올스타전 개최로 쏠쏠한 재미를 보는것에 대항하여 주니치 신문이 후원했던 대회였다.
특이사항으로 국가대항전이 아닌 리그간 대항전이었기 때문에 국대 유니폼이 아닌, 자국내 소속팀의 유니폼을 입고 출전했는데,[2] 이는 미일 프로야구 올스타전도 마찬가지 방식이었다. 특히 한국 롯데와 일본 롯데는 색만 다른 같은 유니폼을 입고 시합을 뛰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2. 역대 전적
경기는 모두 일본에서 열렸으며, 한국의 역대 전적은 1991년 2승 4패, 1995년 2승 2무 2패, 1999년 1승 1무 2패.
3. 대회 소개
3.1. 1991년
1991년 한일 슈퍼게임 일본 측 중계방송. 장훈(하리모토 이사오) 씨가 해설하고 있다. 일본 투수인 사사오카 신지(히로시마 도요 카프)는 1991년 사와무라상 수상자.
1991년 기준으로 한국 프로야구는 출범한지 불과 10년째였고, 당시 55년의 전통을 자랑했던 일본 프로야구와의 실력 격차가 지금보다 훨씬 컸다. 때문에 최초의 한일 슈퍼게임을 앞두고서는 '''1승이라도 하면 대단한 거다''' 라는 평가가 중론이었을 정도.
당시 경기에 참여한 타자들도 '''일본 투수들이 작정하고 던지면 컨택도 힘들다'''고 토로했을 정도였다. 이정훈, 김성한, 한대화, 장종훈 등 당대 한국 프로야구 최고의 선수들의 평이 이 정도였으니, 이 시절 한일 프로야구간 격차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특히 일본 투수의 정교한 변화구(주로 포크볼)에 맥없이 삼진을 당하기 일쑤였다. 이 슈퍼게임의 영향으로 한국 투수들도 포크볼을 본격적으로 던지기 시작하고, 재일교포가 아닌 순수 일본계 코치들이 프로야구에 등장한다.[3]
한국대표는 프로야구 올스타팀이었지만, 일본은 경기마다 선수 구성에 약간 차이를 두었다. 1991년 도쿄돔에서 열린 1,2차전은 일본도 올스타 팀이었고, 이들 두 경기에서 한국 올스타는 2~3점만 겨우 득점하며, 8점을 득점한 일본 올스타에게 크게 패했다. 하지만 지방구장을 돌면서 열린 3,4,5,6차전[4] 에서 일본팀은 해당 구장의 홈팀을 주축으로 다른 팀 주전을 몇명 끼워넣는 구성이었던 것이다. 일본 선발로 10승도 하지 못한 투수가 나오기도 했고, 이런 경기에서 2승을 거두었다.
이 당시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 최고의 투수였던 선동열(해태)이 대회 직전 발목부상을 입어 조기 투입이 곤란해졌다. 그 탓에 1차전에선 당대 최고의 강속구 투수로 명성을 날렸던 박동희(롯데)가 선발로 나섰다. 한일 프로야구의 첫 공식 대결로 기록된 이 경기에서 한국팀은 장단 14안타를 맞으며 3-8로 패했다. 선발 박동희가 7피안타를 맞으면서도 4이닝 3실점으로 비교적 호투했지만, 5회에 교체 투입된 그해 구원왕 조규제(쌍방울)가 처음 두 타자를 잘 처리한 후 3번 아키야마 코지(세이부), 4번 오치아이 히로미츠(주니치)에게 연속으로 홈런을 맞으면서 경기 흐름이 완전히 기울었다. 이후 한국 올스타는 해태 김성한이 훗날 메이저리그로 진출 하였으며 당시 일본의 대표적인 강속구 투수이던 이라부 히데키(롯데)를 상대로, 8회에 3점째 만회점을 올리는 홈런을 기록했다.[5]
2차전은 롯데 윤학길이 선발로 나섰으나 3이닝도 못 버티고 4실점으로 두들겨맞는 등 1차전보다도 더 실력차를 드러내며 2-8로 완패를 당했다. 3차전은 빙그레 송진우가 선발로 나서 6이닝동안 무실점 호투, 이정훈과 김성한의 홈런에 힘입어 2-0으로 앞섰지만, 7회말 후속 투수들이 5실점을 허용하며 2-5로 역전패.
3연패로 몰린 한국은 4, 5차전을 잇달아 승리하며 부진을 씻어내기 시작했다. 특히 5차전에서는 부상으로 앞선 경기에서 등판 못했던 선동열이 선발로 나서 오치아이 등 일본의 간판급 타자들을 상대로 5연속 탈삼진을 기록하며 3이닝 무실점으로 호투했고, 장종훈이 장외홈런을 날리는 등 8-0의 완승을 기록했다.
보기 드물게 투수전으로 벌어진 마지막 6차전은 1-2로 아쉽게 패하며 6경기동안 2승 4패를 기록했다.
3.2. 1995년
1995년 한일 슈퍼게임 우리측 중계방송
1995년 2회 대회땐 1차전에서 나름 정예로 나온 일본과 0:0 무승부, 지역팀 주축으로 나온 2,3차전에서 내리 승리하여 일본에서도 말이 나왔고 결국 4차전에서 정예로 임한 일본에게 완패. 이후 5차전 무승부 후 6차전에서 지면서 2승 2무 2패로 마무리. 일본은 1, 4차전에서 나름대로 정예 선수들을 내보냈고 여기서 한국은 1무 1패를 하였다. 흥미로운 점은 각국 심판이 앞,뒤 3경기씩 심판을 봤는데 모두 자국 심판이 나온 경기에서 2승 1무를 하였다.
3.3. 1999년
1999년 3회 대회는 이전 대회가 6경기씩 치른 것에 비해 4경기로 축소되어 치러졌다. 한국팀은 1, 2차전을 연달아 패하였지만 3차전을 가까스로 잡아내 첫승을 거두었다. 마지막 경기였던 4차전은 8:8무승부로 끝난 화끈한 타격전으로 전개.
이 대회에서 마쓰이 히데키가 타율 10할을 기록하며 한국 투수진에게 가장 위협적인 면모를 보였다. 1차전과 4차전에 출전하여 8타석 7타수 7안타 1홈런 1볼넷(고의사구).
4. 한일프로야구 친선시리즈 / 골든시리즈
한일슈퍼게임은 돔구장이 갖춰진 일본에서 열렸지만, 1993년에는 한일프로야구 친선시리즈를 1997년에는 한일프로야구 골든시리즈를 한국에서 개최했다. 참가팀은 전 구단이 아닌 일부 구단만 참여했다. 93년도에는 주니치, 지바롯데, LG, 해태, 롯데였고, 97년도에는 주니치, 오릭스, LG, 현대, 삼성, 해태, 쌍방울이었다. 93년 1차전 결과 93년 2차전, 3차전 93년 3차전에서는 해태 김성한이 잠실 홈경기에서 롯데 이라부에게 홈런을 뽑아내며 91년 슈퍼게임에 이어 이라부를 또 울렸다. # 93년은 1승1무1패. 97년은 2전 전패.
1997년 젊은 이치로는 한국에서 열린 친선게임에서 한국의 첫인상에 대해 마늘 냄새가 난다고 입을 털었으나 보도가 안 됐다. # 하지만 입을 과하게 턴건지 몸을 사린건지 1차전 1회 수비까지만 모습을 보이고 급거 귀국. 반면 이승엽은 이 때도 일본 킬러 본능을 보이며 2차전에서 5타석 4타수 3안타로 맹활약했다. 97년 1,2차전 2차전에서는 주니치의 선동열과 해태 이종범의 맞대결이 관심을 끌었다. 2차전 마무리투수 선동열 투구기록
5. 이후
이후 아시아 시리즈(舊 코나미컵)이나 한일 클럽 챔피언십이 한일 슈퍼게임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아시아 시리즈 등은 국가별 프로리그 우승팀만이 참가하는 방식이므로, 슈퍼게임과는 차이가 있다. 2000년 이후 야구의 올림픽 포함, WBC 등을 통해 프로야구 선수들의 국제대회 참가가 가능해 지면서, 이전보다 리그별 올스타팀들의 친선 경기의 필요성이 줄어든 것을 반영한 듯.
자세한 사항은 해당 문서들 참조.
6. 기타
- 2009년에 열린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의 이상한 대진표로 인해서 WBC가 아니라 한일 슈퍼게임 또는 한일 베이스볼 클래식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1] 미일 올스타전은 1986년부터 2년 간격으로 개최되었고, 2006년을 끝으로 중단되었다. 가장 최근에는 일본 국가대표 야구팀이 2017 WBC 대비 차원에서, 2014년에 메이저리그 올스타와 초청 경기를 하여 1 대 0 승리를 거둔 바 있다.[2] 아시아시리즈 등의 대회는 올스타가 아니라 단일팀 출장이므로 경우가 조금 다르다.[3] 1992년에 도이 마사히로가 삼성 라이온즈 타격코치로 활동했다.[4] 3차전은 고시엔 구장, 4차전은 후지이데라 구장, 5차전은 기후 현 나가라와구장, 6차전은 나고야 구장에서 개최[5] 김성한은 이후에도 슈퍼게임 경기 동안 3 홈런을 쏘아 올리며 한국 올스타의 타자로서는 꾸준히 활약했고, 당시 사용했던 배트가 도쿄돔 야구박물관에 전시되는 영예도 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