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제프 마소푸스트

 

'''요제프 마소푸스트의 수상 이력'''

'''둘러보기 틀 모음'''
'''개인 수상'''



'''베스트팀'''
1962 · 1964



'''1962 FIFA 월드컵'''
골든 볼
가린샤
실버 볼
'''요제프 마소푸스트'''
브론즈 볼
리오넬 산체스


''' 체코의 축구감독 '''
''' 이름 '''
'''요제프 마소푸스트'''
'''Josef Masopust'''
''' 출생 '''
1931년 2월 9일 /
체코슬로바키아 모스트 스트르지미체
''' 사망 '''
2015년 6월 29일 (향년 84세) /
체코 프라하
''' 국적 '''
체코
''' 신체 '''
177cm
''' 직업 '''
축구선수(미드필더 / 은퇴)
축구감독
''' 소속 '''
''' 선수 '''
ZSJ 테플리체 (1950~1952)
'''두클라 프라하 (1952~1968)'''
크로싱 몰렌베이크 (1968~1970)
''' 감독 '''
두클라 프라하 (1973-1976)
즈브로요브카 브르노 (1976-1980)
KSC 하셀트 (1980-1984)
체코슬로바키아 축구 국가대표팀 (1984-1987)
인도네시아 올림픽 축구 국가대표팀 (1988-1991)
즈브로요브카 브르노 (1992)
FK 펠리칸 데친 (1993-1996)
''' 국가대표 '''
63경기 10골(체코슬로바키아 / 1954~1966)
1. 소개
2. 클럽
3. 국가대표
4. 지도자
5. 은퇴 이후


1. 소개


[image]
체코의 前 축구선수이자 축구감독.
체코 선수로는 최초로 발롱도르를 수상한 1950년대-60년대 최고의 미드필더 중 하나. 센터 하프로 당대 최고의 패서이자 드리블러 중 하나였다. 마소푸스트의 전진 드리블에는 '마소푸스트 활강'이라는 수식어가 따로 있을 정도. 수비적인 면에서 마소푸스트는 공을 직접 따내는 것에 능한 선수는 아니었으나 탁월한 위치 선정으로 패스를 인터셉트하는 것을 잘했다.

2. 클럽


1946년 뫼스트의 유소년팀에 초청된 것으로 정식적으로 축구를 시작한 마소푸스트는 하부리그에서 데뷔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1부리그의 테플리체로 이적한다. 마소푸스트의 재능은 얼마 안가 전국에 알려졌고 1952년 ATK 프라하와 계약했다. ATK 프라하는 명칭을 UDA 프라하, 두클라 프라하로 변경했고 마소푸스트를 비롯해 라디슬라프 노박, 스바토플루크 플루스칼과 같은 체코슬로바키아 축구계의 거목들이 활약했다.
마소푸스트가 뛴 16년간 두클라 프라하는 8회의 리그 우승을 거머쥐었고, 마소푸스트는 팀내 최고의 슈퍼스타였다. 두클라 프라하는 자국 뿐만 아니라 유럽의 강자가 되기 위한 도전도 했으나 번번히 물을 먹었다. 1962년부터 1964년까지는 UEFA 컵에서 8강 탈락했고 1966-67 시즌 유러피언 컵 4강에서 셀틱을 만났으나 지미 존스톤의 맹활약으로 결승 진출이 무산되었다. 마소푸스트는 뮌헨 비행기 참사와도 연관이 있다. 1957-58 시즌 유러피언 컵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레드 스타를 만나기 전 상대가 바로 두클라 프라하였기 때문이다. 마소푸스트는 후에 자신들이 이겼더라면 비극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회고했고 바비 찰튼과의 대화에서도 이를 말했다고 한다.
1968년 전성기가 한참 지난 37세의 마소푸스트는 해외 이적의 기회를 얻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공산주의 국가였기 때문에 90년대가 돼서야 해외진출의 길이 열렸고 이전에는 해외 이적의 기회가 있더라고 전성기가 한참 지난 선수들에게만 허용되었다. 마소푸스트는 벨기에 2부리그의 크로싱 몰렌베이크로 이적했고 2시즌간 활약한 뒤 은퇴했다.

3. 국가대표


1954년부터 1966년까지 63경기에 나서 10골을 넣었다. 메이저 대회로는 1958년 월드컵, 유러피언 네이션스컵 1960, 1962년 월드컵에 참가했다.
1954년 헝가리와의 경기에서 데뷔한 마소푸스트는 금세 핵심 전력이 되었고 팀을 1958년 월드컵에 올려놓는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아르헨티나를 6-1로 완파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으나 2위인 북아일랜드와 승점 동률의 상황에서 치룬 플레이오프 경기에서 패배하며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유러피언 네이션스컵 1960에서는 첫 경기인 소련전에서 0-3으로 완패했으나 3, 4위 결정전에서 개최국인 프랑스를 2-0으로 꺾고 3위를 차지했다. 마소푸스트는 이 대회에서 라디슬라프 노박과 함께 대회 베스트 XI에 이름을 올렸다.
1962년 월드컵은 마소푸스트가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준 대회이다. 조별리그에서 브라질, 멕시코, 스페인과 같은 조가 된 체코슬로바키아는 2승 1무로 8강에 진출했고 손쉽게 헝가리와 유고슬라비아라는 두 공산 국가들을 잡아내며 결승전에 안착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신사적인 팀으로 유명했는데, 칠레와의 경기에서 퇴장당한 가린샤가 결승전에서 뛸 수 있었던 이유 중에 체코슬로바키아 대표팀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소푸스트는 브라질을 상대로 선발 출전했고 15분만에 포피찰의 패스를 이어받아 선취골을 터뜨렸다. 마소푸스트는 언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어릴적 월드컵 결승전에 출전해 결승골을 넣는 꿈을 꾸었다." 마소푸스트는 골을 넣는 것으로 그 꿈을 이루나 싶었으나 얼마 안 가 아마리우두가 각도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골을 성공시켰고, 동료 골키퍼인 빌리암 쉬로이프가 치명적인 실책을 연이어 저지르며 1-3으로 패배, 마소푸스트의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 대회에서 마소푸스트는 실버볼을 수상했고 대회 베스트 XI에 이름을 올렸다. 또한 이 대회의 활약을 기반으로 1962년 발롱도르를 수상하기까지 했다. 마소푸스트는 1966년 월드컵 예선전에 단 1경기만 뛰었고 체코슬로바키아는 월드컵 진출에 실패했다. 1966년 마소푸스트는 대표팀에서 은퇴했다.

4. 지도자


은퇴 직전 이적한 크로싱 몰렌베이크에서 선수 겸 감독으로 뛰며 지도자 생활에 적응했고 1973년 두클라 프라하의 감독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3시즌 간 마소푸스트는 리그 타이틀을 획득하지 못했고, 1977-78 시즌 즈브로요브카 브르노의 감독으로 리그 우승을 따낸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리그 타이틀이다. 1984년 체코슬로바키아 국가대표팀의 감독으로 임명되었으나 메이저대회에 참여하는 것에는 실패했다. 이후 인도네시아 올림픽 대표팀의 감독을 거쳐 1996년 펠리칸 데친의 감독을 끝으로 감독직에서 은퇴했다.

5. 은퇴 이후


은퇴한 뒤 마소푸스트는 두클라 플라하의 전직 선수들과 모임을 갖기도 했으며 정원을 가꾸는 등 평범한 생활을 했다. 2015년 6월 29일 마소푸스트는 프라하의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정확한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체코 공영 방송은 그가 지병을 앓고있었다는 추측을 하고 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