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라소에시
1. 개요
나하시, 오키나와시, 우루마시에 이어 오키나와 제4의 규모를 가진 도시이다. 전국에서도 높은 출산율 을 자랑하며, 나하시와 인접하고 있어, 인구 증가가 눈에 띌 정도로 높다. 2007년 기준 인구 밀도는 5,694명/km²로 오키나와현에서는 나하시에 이어 두 번째로 높고, 일본 전국에서도 철도노선이 다니지 않는 시정촌에서는 제일 높다. 오키나와현에서도 유수의 상업, 공업이 발달한 도시이다. 2020년 1월 기준 인구 115,632명.
류큐 왕조의 발상지이며, "방방곡곡을 지배한다" 라는 뜻으로 "우라오소이"라는 류큐어에서 유래된 지명이 변화, "우라시이"로 되어, 현재는 우라소에라는 이름으로 굳어있다.
12세기 에서 14세기의 약 220 년간 우라소에성(浦添城)을 중심으로 류큐 왕국의 수도로 번영했다. 당시의 왕이었던 영조왕(英祖王)의 아버지가 태양 이었다는 전설이 있는데 그것을 따서 류큐어로 태양을 의미하는"티다"(てぃだ)와 그 태양의 아이를 뜻하는 "코"(こ)를 붙여 "테다코"(てだこ)라 하였다. 그로 인하여 일명"테다코의 마을"(てだこの街)로 불리는데, 행사 등에도 그 명칭을 붙이는 경우가 많다.
오키나와 전투에서는 우라소에시로부터 기노완시에 걸쳐 중앙사령부였던 슈리성을 지키기 위해 공방전이 일어나 격전지가 되었다. 전후 우라소에시 서해안 지역은 미군기지가 있다.
또한 2004년 1월 "핸드볼 왕국 도시 선언"을 하였는데, 시내의 모든 공립 초중학교 핸드볼부가 있는 정도로 일본 유수의 핸드볼이 번성한 지역이다.
2. 지리
오키나와 본섬의 남쪽의 동중국해에 접하고 있는 서해안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남쪽은 나하시, 북쪽은 기노완시, 동쪽은 니시하라초의 2시 1정과 접하고 있다. 시역은 동서 8.4km, 남북 4.6km로 북쪽을 정점으로 남서쪽과 남동쪽에 퍼진 부채꼴 모양을 하고 있다. 총 면적은 2000년9월에 니시노스 2가의 부두 용지의 매립(0.06km²)이 고시, 편입되자 19.09km²로 되었다. 동중국해와 접하는 곳은 미해병대의 병참기지"마키 미나토 보급 지구(Camp Kinser)"가 차지하고 있다. 또 우라소에 부두·오키나와 현 중앙 도매 시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이난세 지구는 월경지이다.
2.1. 미군기지
- 우라소에시의 서해안은 미군기지가 점유하고 있다. 마키미나토 보급지구는 소음문제가 없는 기지로서 반환의 목소리가 크지는 않았지만, 도시의 발전과 함께 서해안 지역의 개발계획이 세워져 2014년 현재는 부지이용계획등이 반환을 전제로 하여 도시개발계획이 계획되어 있다.
- 또한, 1995년경에 카데나 공군기지 이남의 오키나와 전역의 미군기지의 반환이 계획되었으나, 나하 항만시설(나하군항)에 대해서는 카데나의 남쪽인 우라소에로의 이전이 계획된 바 있다. 새로운 매립지의 건설이 예정되어 있어, 도시계획 자체에 영향이 없어 우라소에시는 기지이전을 수용했다.
2.2. 주요시설
- 나하 미국 총영사관
- FM오키나와 라디오 방송국(본래 한국으로 이전하기 이전의 극동방송 )
- 오키나와 전력 마키미나토 화력발전소
2.3. 인접하는 지자체
나하시 - ( 1954년 8월 까지 시의 남동쪽이 슈리시, 1957년까지 남쪽이 마와시시)
기노완시 - ( 1962년 6월 까지 기노완초)
니시하라초 - ( 1979년 9월 까지 니시하라손)
3. 역사
우라소에시의 역사는 오래되어, 13세기경에 등장하는 영조왕조의 중심지로서 번창해 14세기 말에 찰도왕조의 쇼하시 왕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중산왕국의 수도였다. 태평양 전쟁 중의 1944년에 일본군 육군 오키나와 미나미 비행장(별칭, 나카니시 비행장, 또는 시로마 비행장)이 건설되지만 미군의 공격과 상륙에 응전하는 비행기가 한대도 이륙못하고 방치상태로 오키나와 전투가 끝났다. 그 뒤 미군이 이 비행장을 점거한 후 마키미나토 보급 기지(일명 캠프 킨저)를 건설해 21세기 현재도 기지로 사용하고 있다.[2] 전후, 나하시의 베드타운이 되어 인구가 급격히 증가, 1970년에 우라소에손에서 우라소에시로 1998년 1월에는 인구 10만명을 달성한다.
4. 교통
4.1. 노선버스
나하시와 가까워 많은 노선이 통과한다. 다만 시가지(아하챠 지구, 야후소 지구, 나카마 지구 등 시청 주변)을 지나는 노선은 별로 없고 대부분의 노선은 국도 58호, 국도 330호를 경유한다. 오키나와 자동차도의 니시하라IC가 있지만 버스정류장이 없기 때문에 고속도로 경유 노선은 정차하지 않는다.
현재 오키나와 본섬 내의 민영버스 회사 4개사 모두 시내를 운행중으로 주로 시가지를 운행하는 버스 회사는 류큐 버스, 토요 버스, 오키나와 버스, 나하 버스이다.
이전에는 토요 버스가 시내 중심부를 경유하는 노선이 4노선이었지만 현재(2014년)는 그중 2노선이 폐지되었다. 또 과거에는 시내 일주선도 운행되고 있었다.
4.2. 철도
오키나와 전투 이전에는 오키나와 현영철도 카데나선이 다니다가 1945년의 전투당시 파괴되어 사라졌다. 오키나와 현영철도 카데나선은 경편철도의 이름을 딴 "케이빈(軽便)"으로 불리며 우라소에 시내에는 "마키미나토역" "시로마역"·"우치마 역"이 있었다. 현재도 시내 곳곳에 선로의 일부가 남아 있다.
2019년 10월 1일에 오키나와 도시 모노레일선이 우라소에시의 우라소에마에다역까지 연장되어, 나하시와 함께 오키나와현에서 둘뿐인 철도가 지나는 지자체가 되었다.
4.3. 도로
면적이 좁기 때문에 주요 도로의 수는 적지만 주요 도시인 나하시와 오키나와시, 나고시 등을 잇는 도로의 교통량이 많아 정체가 자주 발생한다.
5. 유명 출신자
6. 관련 문서
[1] 잊지 말자. 군대는 폭력을 관장하는 기관이다. 그렇지만 저런 사회악적 폭력과는 다르게 구분을 해야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경우 군대는 우리를 지키기 위하여 존재하고, 또 그럴 경우에만 폭력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평시는 그 대비를 하는 것이고.[2] 참고로 이 근처의 고지 중 하나에 핵소 리지(Hacksaw Ridge. 전기톱 고지)라는 후덜덜한 이름을 가진 약 360미터 짜리 언덕이 있는데, 이 고지에서 수많은 미군이 사상당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당시 참전했던 사람들의 경험담에 따르면 그런 별명이 붙기에 부족하지 않을 정도라니 얼마 정도의 생지옥이었을지는... 그런데 이런 개판에도 비무장을 한 채로 75명의 동료를 구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데스먼드.T.도스 상병. 그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출신이라 무장 및 군사훈련을 거부했다.(일반적 인식과 달리 재림교는 그렇게 군대에 대해 거부를 한다거나 그러지 않는다. 우리나라도 그냥 잘 군대 갔다 오는 재림교 신도 청년들이 대부분이다. 왜 양심적 병역거부가 이슈 될 때마다 이들이 거론되냐면 이들의 핵심 교리 중 일부가 군대와 잘 들어맞지 않기 때문. 원래는 사회 내 살인 등의 범죄 등을 경계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어쩌다보니 그런 경계해야 할 부분이 군대에도 존재함이 드러났기 때문이다.[1] 이에 대해 재림교는 본산 측에서 아무런 입장을 내놓지는 않았지만, 일부 신도들은 군 입대에 대해 반대를 한다. 데스먼드 이 양반은 군 입대는 긍정했으나 기본 훈련 및 전투행위에 대한 거부를 한 케이스. 문제는 우리나라에서 그런 양심적 병역거부 주장자 수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다 보니 전체 양심적 병역거부 반대자 중 이들이 차지하는 비율이 여호와의 증인에 이어 2위라는 것. 그래서 부각되는 것일 뿐이다. 위에 서술되어있다시피, 대부분을 잘만 군대 갔다온다.) 하지만 당시는 2차 세계대전 중이었고 그래서 상부의 부당한 압력과 주변의 왕따 및 부조리, 폭력에 노출되었고 그런 채로 전장에 나가게 된다. 상부와는 의무병으로 적당히 타협했지만 주변 동료들의 태도는 여전했다. 그러던 중 위의 헥소 리지에서 비무장인 채로 75명의 생명을 구했고, 그 결과 미군의 최고 무장 훈장인 명예 훈장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