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창왕후
1. 개요
고려 왕조의 두번째 추존왕후. 고려 삼대조고 중 2대 조모이다. 2019년 7월 21일, 북한 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부와 유관기관의 인력이 원창왕후의 능묘인 온혜릉(溫鞋陵)에 대한 전면적인 조사 및 발굴을 마치고 북한의 국보 유적으로 등록했다.#
작제건 문서를 참고하면 좋다.
2. 각종 기록
2.1. 태조실록
고려사엔 의조의 아내를 원창왕후로 추존했단 기사 한줄이 남아있다. 이 기사는 고려실록에서 가져온 것이다.
2.2. 편년통록 - 편년강목
가장 상세한 기록은 의종 대 만들어진 편년통록, 충렬왕대 만들어진 편년강목에 있다. 문제는 이 기록이 실제 역사보단 설화에 가깝다는 점이다.
신궁(神弓) 작제건은 바다를 건너 서쪽으로 가던 중, 배가 나아가질 않게 됐다. 뱃사람들이 점을 치니 '고려사람(高麗人)'을 버려야 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결국 작제건은 활과 화살을 챙겨 한 섬에 내린다.
이 다음부터 고려사는 두 버전을 기록했다.
1. 홀로 있던 작제건은 한 노인을 만났다. 그는 스스로를 서해 용왕(西海 龍王)이라고 소개했다. 노인은 늘 밤마다 악한 여우가 '치성광여래상(熾盛光如來像)'으로 변해 주문을 외웠고, 그로인해 천천히 죽어가고 있었다. 그는 결국 신궁으로 소문난 작제건에게 없애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그를 배에서 내리게 했다.
2. 섬에서 내린 작제건은 섬을 둘러보다가 어떤 길을 찾아냈다. 이 길을 따라가니 한 채의 큰 전각이 있었다. 전각의 문이 열려있어 들어가보니 누군가가 금(金)물로 베껴쓰고 있던 불경이 보였다.
주변은 마치 누군가가 방금까지 쓰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작제건은 이 불경을 마저 쓰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한 여성이 등장해 작제건을 처다보았다. 작제건은 그녀가 관세음보살인 줄 알고 무릎을 꿇고 절했으나 머리를 들자 보이지 않았다. 다시 불경을 베끼고 있자 여성은 다시 나타나 작제건에게 말했다.
두 이야긴 결국 내용은 같다. 다만 작제건을 남긴 주체가 서해용왕인지 서해용녀인지에 차이가 있을 뿐. 어쨌든 작제건은 부처인척 하는 늙은 여우를 쏘아 죽였고, 용녀 저민의와 결혼한 뒤 용왕에게 칠보(七寶)와 돼지 한 마리를 받고 의기양양하게 돌아온다."난(我) 용녀(龍女)이오. 오래 경(經)을 써왔지만 지금까지 끝내지 못했소.
낭군(郞君)이 글을 잘 쓰고 활도 잘 쏘니, 군(君)을 배에서 남기어 내(吾) 공덕(功德)을 쌓는걸 돕고 우리 집안의 어려움을 풀어주길 바라오.
그 어려움이 무엇인지는 7일이 지나면 알게 될 것입니다."
- 고려사 고려세계 중.
사람들은 작제건과 서해용녀가 온 것을 보고 개주(開州), 정주(貞州), 염주(塩州), 백주(白州) 4주를 합치고 강화현(江華縣), 교동현(喬桐縣), 하음현(河陰縣)의 사람들을 불러 성을 쌓아 바치니 영안성(永安城)이다.
저민의는 은그릇으로 우물을 파내고 집을 지었다. 하지만 1년이 넘도록 돼지가 우리에 들어가려고 하질 않자 저민의는:
라 하자 돼지는 이곳저곳 돌아다니다가 작제건의 조상 호경이 살던 옛 송악군 터에 누웠다. 이 곳에서 새 집을 짓고 영안성과 송악군을 경영했는데 저민의는 이 집에도 우물을 파 서해용궁으로 갔다가 돌아왔다. 저민의가 예전 작제건과 약속하기를:"만약 이곳이 살만한 곳이 아니라면 난(吾) 네(汝)가 가려는 곳을 따르겠다."
- 고려사 고려세계 중.
라 했지만 궁금함을 참지 못한 작제건은 몰래 저민의와 막내딸이 궁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봤다. 저민의와 딸은 황룡(黃龍)으로 변하고 주위엔 오색운(五色雲)이 가득했다."내(吾)가 용궁으로 돌아갈 땐 절대 바라보지 마시오. 그렇지 않으면 두번 다시 오지 않겠소."
저민의는 용궁에서 돌아와 화를 냈다.
결국 딸을 데리고 아예 가버리니 작제건은 더 이상 아내를 만날 수 없었다."부부의 도리 중엔 신뢰가 제일 중요한데 이를 어겼으니 난(我) 이 곳에서 살 수 없소."
저민의는 작제건과의 사이에서 용건, 왕평달을 포함한 아들 넷과 딸을 하나 낳았다. 후에 용녀 저민의는 '원창왕후(元昌王后)'로 추존됐다.
2.2.1. 평가
작제건 설화 속 저민의는 그야말로 신화 그 자체다. 서해용왕의 딸이니 황룡으로 변신하고 우물을 뚫어 용궁과 왕래할 수 있다. 고려의 전설 중 저민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데 저민의의 존재로 인해 ''''고려의 임금들은 용의 후손.''''이라는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태조 신성왕은 용조(龍祖)라는 별칭으로 불렸고 문종 인효왕은 용손(龍孫)이라 불렸다. 고려 국왕은 황룡의 자손이기에 겨드랑이에 용린(龍鱗)을 가지고 있다는 전설도 생겨났다. 이는 후대 사람들의 구전과 고려 왕실의 암묵적인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한편 이러한 설화들이 은유이고 좀 더 현실적으로 생각해본다면 저민의는 당대 유력 호족 가문의 자제였을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할 수 있다. 성씨가 없는 것으로 보아 귀족 계층은 아닌 것이 확실하지만 지역 내에서 떵떵거리는 부유한 집안이었을 것이다. 이제현이 인용한 성원록에서도 이와 같은 맥락의 내용을 담고 있다. 작제건의 외증조부 강충은 영안촌(永安村)의 부잣집 딸 구치의와 결혼하고 송악군을 차지했다. 비슷하게 작제건은 저민의와 결혼함으로써 영안성(永安城)을 쌓고, 송악군을 지배할 수 있었다. 즉 '''작제건과 저민의의 설화는 고구려계 패서 호족의 연합을 의미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
2.3. 이제현 논평 - 성원록
고려사엔 이제현이 인용한 성원록의 기록이 두 줄 남아있다.
편년통록, 강목에 비해 훨씬 현실적인 기록이다. 용녀는 신라 평주[1] 사람이고 아버지는 두은점이란 관료이다. 아버지가 신라의 최고위 관등 각간을 가졌는데 이는 평주 호족 두은점이 자칭했을 가능성이 높다.[2] 역으로 각간 관등을 칭했을 정도면 두은점은 평주에서 매우 강력한 권위를 지녔다고 볼 수 있다. 이를 보면 작제건은 평주 호족과 연합해 자신의 입지를 다지고자 했다고 간접적으로 유추해볼 수 있는 대목.'''흔강대왕(昕康大王), 즉 의조(懿祖)의 처(妻)인 용녀(龍女)란 자는 평주 사람(平州人) 두은점(豆恩坫) 각간(角干)의 딸이다.'''
고려사 고려세계 성원록 중.
2.4. 번외: 세종실록 지리지
특이하게 조선왕조실록에도 원창왕후의 설화가 나온다. 세종실록 지리지 구도 개성 유후사 조에 있는데 기록된 설화는 편년강목 기록과 동일하며 짧게 줄였다.
근데 다른건 태조 왕건이 즉위하여 용녀(龍女)를 ''''경헌왕후(景獻王后)''''로 추존하고 작제건과 용녀가 살던 집을 광명사(廣明寺)로 바꿨다고 한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나오는 ''''경헌왕후(景獻王后)''''는 의조 경강대왕(景康大王)과 景 자로 시호돌림이 같다. 고려는 국왕과 왕후의 시호를 맞추는 전통이 있었는데 지리지 기록으론 이 전통이 의조 대부터 맞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고려사 등에 나오는 시호는 원창왕후 뿐이고 경헌왕후는 지리지에서만 나온다. 그러다 보니 용녀의 시호가 경헌왕후라는 건 가능성이 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