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조(고려)
1. 개요
고려 왕조의 추존 군주.
일반적으로 알려진 묘호는 '국조(國祖)', 시호는 '원덕대왕(元德大王)'. 태조 신성대왕이 등극한 뒤 추존한 세 임금 중 한 명이다. 개성 왕씨의 시조로 알려져 있지만 편년통록/편년강록에 따르면 '''고려의 국왕 중 유일하게 왕씨가 아닌 것이 된다.'''
2. 모호한 기록
현존 기록을 보다보면 모든게 꼬여 있고 확실한게 없다.
보통 한 왕조의 건국자는 자신으로부터 사대조를 군주로 추존하는데[1] 고려는 이상하게 세 명만 추존했다. 그 이유를 추정해보자면 제대로 된 기록이 없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왕건 가문 자체가 결과적으로 왕건이 고려의 왕으로 올랐으니까 주목받은 것이지 그 조상 대에는 전혀 특별할 것이 없는, 신라 중앙(서라벌)에서도 한참 거리가 있는 변경지방의 세력가인데, 비슷한 수준의 다른 호족가문들에 비해서 더 자세한 기록이 많이 있었던 것이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2] 당장 태조 왕건의 삼대조 중 그나마 기록이 확실한 건 세조 왕륭 뿐이고, 작제건은 거타지 설화 복붙이나 당숙종과 혈연을 연결시키는 등 윤색하다가 생긴 빈틈이 많이 보인다.
그러다보니 조선 왕조는 태조 왕건 이전의 족보를 기록한 고려사의 '고려세계(高麗世系)'에 '기록이 없어서 모름!' 이라고 깔끔하게 시작한다. 대신 고려시대에 전해지던 여러 기록들을 싸그리 모아 적고 그에 대한 종합 평론을 썼다.
고려사는 '태조실록', '편년통록', '편년통목', '이제현의 논평', 이제현이 인용한 '왕대종족기와 성원록의 단편적 기록'을 모아 놓았다.
2.1. 태조실록
고려사가 인용한 이 태조실록은 고려가 직접 편찬한 고려왕조실록 중 태조의 실록을 의미한다. 즉 그나마 정설에 가장 가까운 기록이라고 볼 수 있는데 문제는 국조에 대해 딱 한 줄만 썼다.
태조실록엔 국조의 묘호를 시조(始祖), 시호를 원덕대왕(元德大王), 아내를 정화왕후(貞和王后)라 했다. 태조와의 관계는 나와있지 않다. 삼대조고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증조부일 가능성이 높지만.'''(태조) 즉위 2년, 왕의 삼대조고(三代祖考)를 추존하니 책(冊)을 올려 시조(始祖)의 시호를 원덕대왕(元德大王)으로, 비(妣)는 정화왕후(貞和王后)라 하였다.'''
고려사 고려세계가 인용한 고려 태조실록.
2.2. 편년통록/편년강목
고려사가 인용한 '편년통록(編年通錄)'이란 의종(고려) 때 김관의란 신하가 쓴 설화 형식의 책이다. 편년통록은 진실과 전설, 고려의 의도적 포장까지 모조리 다 담고 있어 매우 논란이 많다. 어쨌든 고려사는 이걸 인용해 보다 상세한 족보를 서술했다. 족보는 문단 상단의 틀 참조.
1. 우선 백두산에서 부소산으로 내려온[3] '호경(虎景)'이란 남자가 있다. 호경이 이름이 남지 않은 아내와 아들 '강충(康忠)'을 낳았다.
2. 강충은 당시 송악의 부잣집 딸 '구치의(具置義)'와 결혼해 맏아들 '이제건(伊帝建)'과 막내아들 ''''손호술(損乎述)''''을 낳는다. '''손호술'''은 나중에 ''''보육(寶育)''''으로 이름을 바꾼다.
3. '''보육(寶育)'''은 형 이제건의 딸 '덕주(德周)'와 결혼해 두 딸을 낳으니 맏딸의 이름은 남지 않았고 막내딸의 이름은 '진의(辰義)'이다.
여기까지가 편년통록의 기록이다. 이후의 이야기는 고려사가 인용한 편년강목(編年綱目)에서 그대로 이어지는데 이는 충렬왕 때 민지(閔漬)라는 신하가 쓴 책이다.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의 문신 민지는 1317년(충숙왕 4년)에 '본조편년강목(本朝編年綱目)'을 제작했는데 총 42권이며 ''''국조 문덕대왕(國祖 文德大王)''''부터 고종 안효대왕까지의 역사를 기록했다고 한다. 고려사는 편년통록의 이야기를 편년강목에서 이어가는데 편년통록과 강목은 같은 설화를 기록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4. '당숙종' 혹은 '당선종'이 진의와 사랑에 빠져 아들 '작제건(作帝建)'을 낳는다. 이후 보육은 '국조 원덕대왕(國祖 元德大王)', 진의는 '정화왕후'로 추존된다.
편년강목 기록상 정화왕후는 국조의 딸로 표현된다. 그리고 국조는 태조의 외고조부다.
게다가 편년강목은 당숙종이 태조의 직계 증조할아버지란 설을 집어 넣어 고려가 '''당 천자의 직계 혈통'''이라는 정통성 아닌 정통성을 만들어 냈다...
우선 위에 적힌대로 국조의 할아버지는 '호경', 아버지는 '강충', 어머니는 '구치의'다. 형으로 이제건이 있었다.
이름은 원래 손호술, 나중에 ''''보육(寶育)''''으로 이름을 바꿨다.
그는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매우 똑똑했다고 하며 지리산(智異山)에 도를 닦으러 갔다가 곧 할아버지가 신으로 있는 평나산(平那山)의 북쪽에서 잠시 머물었다. 그후 다시 가족이 있는 마아갑(摩訶岬)으로 돌아왔다.
어느날 잠 좀 때리다가 꿈을 꿨는데 곡령(鵠嶺)(지금의 송악산) 남쪽에다가 오줌을 싸니 천하가 은빛바다로 잠겼다.[4] 깨어나 형 이제건에게 썰을 푸니 형은
라고 말하며 자신의 딸 덕주(德周)와 결혼시켰다."넌 분명히 하늘을 지탱할 기둥(支天之柱)을 낳을 것이다."
고려사의 편년통록 중.
자신의 조카인 덕주와 결혼한 보육은 환속한 승려, 즉 거사(居士)가 되어 움막을 짓고 살았다. 어느날 한 신라 술사(新羅術士)가 와서 말하길:
라고 한 뒤 떠났다고 한다."이 곳은, 대당천자(大唐天子)가 사위가 될 곳이다."
고려사의 편년통록 중.
그 뒤 보육은 딸 둘을 낳았는데 첫째의 이름은 기록되지 않았고 둘째의 이름은 진의(辰義)였다. 진의는 매우 아름다웠으며 똑똑했다고 한다.
첫째딸도 제 아버지처럼 꿈을 꾸니 이번엔 오관산(五冠山)에 올라가 오줌을 누어 천하가 뒤덮혔다. 역시 일어나 진의에게 썰을 푸니 진의는 언니의 꿈을 치마를 주고 사겠다고 했다. 그러자 언니는 꿈을 던지는 시늉을 세 번하며 진의에게 팔았고, 진의는 그걸 받는 시늉을 하니 무언가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고 한다.
어느 날, 당숙종이 난을 피해 신라의 송악까지 와 잠시 머물렀다. 보육은 당숙종을 모시게 됐는데 당숙종이 딸을 보고 반했다고 한다. 당숙종이 옷을 기워달라고 부탁하자 보육은 첫째를 시켰으나 첫째는 가다가 넘어져 코피를 흘렸고, 둘째 진의가 대신 가 당숙종과 있게 되었다.
1년이 지나 당숙종은 다시 당나라로 돌아갔고, 진의는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작제건, 즉 고려 의조 경강대왕이다. 고려사가 인용한 편년강목엔 국조의 이야기가 이게 끝이다. 강목엔 편년통록, 강목 기록상 국조의 외손자인 '작제건'의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자세한 건 작제건 문서 참조.
편년통록, 강목의 보육에 대한 기록은 여기까지다. 보면 알겠지만 신라의 전설, 전통신앙, 중화사상에 불교까지 다 섞어 놓았다는 걸 알 수 있다. 편년통록의 기록은 신라 문희, 보희의 전설(김유신의 여동생)을 두 번이나 베껴오고[5] 평나산 여신, 신라의 술사(術士) 등 전통신앙과 거사(居士) 같은 불교 이야기까지 짬뽕돼있다.
2.3. 이제현 논평
고려사가 인용한 이제현의 논평은 여러 방면에서 위의 편년통록, 강목을 비판했다.
1. 편년통록을 쓴 김관의의 말대로라면 국조는 태조의 직계가 아닌 외가 조상인데 왜 국조, 즉 나라의 조상이라고 불러주냐?
2. 김관의의 말대로라면 왜 우리 태조가 통상 하는대로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순으로 추존안하고 굳이 외고조부를 가져다가 태묘에 넣냐?
라고 우선 비판을 던졌는데 전부 맞는 말이다...
그래서 이제현은 이하 왕대종족기, 성원록을 인용해 '''고려가 추존한 '국조 원덕대왕'과 설화 속 '보육'이 서로 다른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이제현이 정리한 국조의 가계도는 이렇다.
1. '보육성인(寶育聖人)'이란 사람이 이름 모를 딸을 낳았다.
2. '당숙종' 혹은 '당선종'이 이 딸과 사랑에 빠져 아들을 낳았다.
3. 이 아들이 바로 ''''국조 원덕대왕''''이며 그의 아내는 '정화왕후'이다.
4. 그래서 '의조 경강대왕' 작제건은 국조의 아들이다. 그러니 국조는 '태조'의 증조부다[국조 이제건(?)-의조 작제건-세조 용건-태조 왕건].
사실 이제현의 주장대로 하면 얼추 맞는다. 여전히 당나라의 숙종이 태조의 직계 조상이란 건 유지되지만.
이제현의 논평이 인용한 '왕대종족기(王代宗族記)'는 '왕씨종족기(王氏宗族記)', '종족기(宗族記)'라고도 불리며 이젠 대체 뭔지 알 수 없는 기록이다. 이제현은 단편적으로 인용했다.
이제현은 왕대종족기엔 국조의 성씨가 왕(王) 씨로 기록되있다고 하였다.'''국조(國祖)는 태조(太祖)의 증조(曾祖)다. 정화(貞和)는 국조(國祖)의 비(妃)다.'''
이제현이 인용한 고려 왕대종족기.
이제현은 더불어 '성원록(聖源錄)'이란 기록도 인용해 자신의 주장을 밑바침했다. 성원록은 두 줄이 남아있다.
이제현의 주장은 사실상 성원록과 왕대종족기에 기초하고 있다.'''보육성인(寶育聖人)이란 자는 원덕대왕(元德大王)의 외조(外祖)다.'''
이제현이 인용한 고려 성원록.
3. 조선왕조의 결론
조선왕조는 고려의 '''정사(正史)'''라고 할 수 있는 태조실록을 수중에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태조실록의 단편적 기록을 정설로 하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단편적이니 자세한건 다른 사서를 찾아볼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이 편년 시리즈, 이제현의 논평이다. 세 기록에 대한 평가는:
1. 김관의는 의종에게 편년통록에 대해 답할 때 고려 사람들이 각자 자기집에 모아둔 문서를 합친 것이 편년통록이라고 했다.
2. 이제현이 당대 유명한 학자이니 뭐 나름 생각이 있겠지만 당숙종이니 당선종이니 하며 당나라 황제가 고려까지 갔다는 소릴 믿냐?[7]
3. 우리가 가진 태조실록은 앞선 설화에 대해 아무런 기록이 없음.
결론. 허무맹랑한 이야기들이지만 일단 다 모아서 기록함.
4. 기타
고려사의 지리지에서는 성골장군(호경)이 국조라고 했다.
[1] 조선왕조의 목조, 익조, 도조, 환조, 대한제국의 장조, 정조, 순조, 문조가 대표적.[2] 송악 근처 다른 패서지역 호족들, 평주호족 박지윤, 정주호족 유천궁, 황주호족 황보제공 등의 가문내력 기록은 3대 조상의 이름이나 칭호, 출신지 딱 이 정도가 대부분이다. 왕건 가문의 조상들도 조상대에는 비슷한 급의 일개 호족가이었으므로 원래 남아있던 기록의 양도 비슷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3] 부소산의 부소(扶蘇)는 고구려 때 송악의 이름이다.[4] 신라 태종 무열왕의 비인 문명왕후 김문희 전설과 비슷하다. 현종(고려)도 이 전설을 가졌는데 당시 고려에서 즐겨 활용된 설화인 듯하다.[5] 다만 보육 쪽은 대체적으로 후대에 가필된 것으로 본다.[6] 이제건(伊帝建)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7] 다만 당숙종의 아우 중 하나인 영왕 이교가 안동도호부의 도호를 역임하기는 했다. 문제는 이게 727년의 일이라 시열대 차이가 더 벌어져서 그렇지... 하여튼 이 영왕 이교라는 사람은 718년부터 783년까지 살았던 사람이라 임명 이후 죽을 때까지 실제 안동도호부에 상주했다면 당 황족 중 그나마 왕건의 직계 조상일 가능성이 높은 인물이라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