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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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라 말기 송악군의 호족. 의조 작제건과 원창왕후 저민의의 맏아들로 남동생으로는 왕평달과 이름이 남아있지 않는 2명이 있고 여동생이 1명이 있었다. 성씨는 왕씨(王氏)라는데 그가 살던 시절에 이미 왕씨를 사용했는지는 미심쩍은 부분이 많으며 이름은 처음에는 용건(龍建), 나중에 융(隆)으로 고쳤다.
아내는 위숙왕후 한씨(韓氏)로 꿈에서 만나 결혼했기 때문에 몽부인(夢夫人)이라는 별칭이 있으며 자식으로 왕건이 있다. <고려사> 태조 세가 총서를 보면 태조가 세조의 장남(長男)이라는 표현이 있어 세조가 태조 외에도 아들이든 딸이든 자식이 더 있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현재 남아있는 기록에서는 세조의 자식은 태조 하나뿐이다.
사후 태조 신성대왕이 고려 왕으로 등극한 뒤 임금으로 추존한 3명의 직계 조상 중 1명이다. 묘호는 세조(世祖), 시호는 원렬민혜위무대왕(元烈敏惠威武大王), 자는 문명(文明).
2. 생애
송악 일대를 지배하던 성주(城主) 출신으로 현대에는 왕륭같은 지방 세력을 호족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2] 정확히 '송악군 사찬(松嶽郡 沙粲)'이라는 제8등위 관등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 작제건, 설화 속 조상인 강충, 보육 등 윗대 모두가 부자였다는 기록이 있어 설화의 진실 여부는 차치해도 왕건 일가가 부자였기는 한가보다. 송악의 유력자로서 평주 박직윤-박지윤, 황주 황보제공, 정주 유천궁 등과 함께 패서 지역을 대표하던 유력한 호족이었다.
고려사 고려세계가 인용한 편년강목엔:
라는 묘사가 있어 단순히 송악뿐만 아니라 신라를 삼키려는 야욕이 있었다는걸 알 수 있다. 왕륭은 어느 날 꿈을 꿨는데 어떤 미인과 만나 결혼하는 꿈이었다. 꿈을 꾼 뒤 언젠가 영안성(永安城)[3] 에 갔는데 그 곳에서 꿈 속의 미인을 만났으며 이에 놓치지 않고 말을 걸어 나중에 결혼에 성공한다. 근데 아무도 이 미인의 정체에 대해 몰라 세간에서는 꿈의 부인, '몽부인(夢夫人)'이라 불렀다고 한다. 혹자는'''멋진 외모와 아름다운 수염을 가졌고 그릇과 풍도가 컸으며 삼한(三韓)을 병탄(幷呑)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고려사 고려세계 편년강목 중.
라는 설명도 덧붙여져 있다. 877년 4월 아내와 결혼도 하고 집에 돈도 많으니 송악 남쪽에 집을 새로 짓고 거주하기 시작했다.[4] 어느 날 백두산에서 송악까지 유람하던 도선(道詵)이 왕륭의 집을 보더니,'''그가 '삼한의 어머니(三韓之母)'이기에 성(姓)을 한씨(韓氏)로 하였다.'''
고려사 고려세계 편년강목 중.
을 심을 땅에 왜 삼(麻)을 심는가?하고 돌아서던걸 부인이 듣고서는 왕륭에게 알리자 놀란 왕륭은 버선발로 뛰어가 도선을 만나고자 했고 도선은 그를 데리고 송악산 정상에 가서 배경을 가리켰다.
고려사 고려세계 편년강목 중
그러고서 떠났다고 한다. 명망 높은 도선이 그렇게 말하니 말대로 집을 고쳐 지었는데 진짜로 이듬해 아들을 낳아 이름을 왕건이라 했다. 도선은 나중에 왕건이 17살일 때 다시 돌아와 임금으로서의 도리를 가르쳐주고 또 홀연히 떠났다고 한다. 이후 시대는 갈수록 혼란스러워져 왕륭은 명주[7] 부터 철원을 점령하고 황해도까지 세력을 뻗어온 궁예에게 896년에 귀부했다."(송악의) 이 지맥(地脉)은, 임방(壬方)의 백두산(白頭山) 수목대간(水母木幹)에서 나와 마두(馬頭)에 내리는 명당(明堂)이오. 군(君)은 또 수명(水命)을 타고 났으니[6]
물의 대수(水之大數)를 이어 집(宇)을 여섯 채 또 여섯 채(六六)를 지어 서른여섯 구역(三十六 區)를 만드시오. 그러면 천지의 대수(天地之大數)에 응하여 내년(明年) 필히 '''성자(聖子)'''를 낳을 것이니 이름을 왕건(王建)이라 하시오."그리고 편지를 써 봉인하니, 바깥에 제목이 이랬다.
"'''삼가 봉서(奉書)를 백배(百拜)하며 바치니 미래통합삼한지주(未來統合三韓之主) 대원군자(大原君子) 족하(足下)께 드립니다.'''"
고려사 고려세계 편년강목 중
자신의 기반인 송악을 내주고 궁예 정권의 수도로 활용하라고 한 점은 귀부한 다른 성주들이 제지 기반을 인정받아 자신의 터전을 지속적으로 보존하던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8] 언뜻 보면 왕륭의 판단은 궁예를 인정하고 따르는 것 같지만 아들 왕건을 송악성주이자 궁성 공역 책임자로 기용하라고 권한 점을 볼 때 자신의 가문이 새 정권 내에서 유력한 위치를 점하기 위한 행동은 아니었나 생각된다. 아니면 더 높은 뜻을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으며 실제로 왕건은 궁예 정권 초기부터 중용된다.
이후 금성(金城, 오늘날 북한 강원도 김화군) 태수로 있다가 1년만인 897년 5월에 사망했고 이후 고향인 송악에 안치되었다. 고려가 건국된 이후 아들 왕건이 왕이 되자 세조(世祖)라는 묘호를 추존했고 그의 무덤을 창릉(昌陵)이라 하였는데 미수복 지역인 개풍군의 하위 행정 구역인 남면에 창릉리라는 곳에 있다.'''"대왕(大王)께서 만약 조선숙신변한 땅(朝鮮肅愼卞韓之地)의 왕(王)이 되고 싶으시다면, 먼저 송악(松嶽)에 성을 쌓아 제(吾) 장자(長子)를 그 주인으로 삼으소서."'''
고려사 태조세가 총서 중. 세조 왕륭이 대왕 궁예에게 조언하다.
3. 성씨와 이름
초명인 용건(龍建)과 후명인 융(隆), 그리고 그의 부친 작제건, 아들 왕건 등의 이름들이 창업의 뜻을 너무 강하게 갖고 있다. 당연히 왕건 가문의 조상들이 미래를 보는 초능력이 있지 않은 이상, 후대에 왕건이 실제 왕으로 오른 뒤에 작위적으로 조정한 느낌이 강하게 난다는 것이다. 이름도 그렇지만 호경으로부터 시작되는 왕씨 집안에 얽힌 설화들은 그냥 신라 말 당대의 그럴듯한 설화들과 당숙종까지 끌어들인 잡탕으로 현대인 관점에서 보기엔 이후에 윤색한 티가 너무 난다.
그래서 원래 이름은 '왕륭'이 아니었는데 고려가 창업한 이후에 개명된 것이라 보는 설도 있다. 마침 성씨가 민간에 정착하기 시작하던 시기가 후삼국시대였다. 이때부터 그냥 이름 앞 글자 따와서 성으로 삼거나, 그렇게 쓰다가 나중에 다른 성을 얻는 경우가 많았다. 즉, 왕건도 원래 성명(姓名)이 아니라 그냥 이름(名)이었는데, 나라를 세우면서 이름의 앞 글자를 성씨로 정하고, 그 성씨를 아버지에게 소급함과 동시에 피휘를 위해 비슷한 의미의 새로운 이름을 지어 올렸다는 것이다.
이때까진 유교는 불교에 비해 그 세가 크진 못했고, 신라 왕실도 중국에서 들어온 관습인 피휘라는 개념을 알고는 있었지만 내부 사정이 있는지 굳이 철저히 지키려 하지는 않았다.[9] 그런 세태에 중앙 귀족도 아니고 수도 서라벌에서 가장 먼 깡촌의 호족이 유가 관점을 지켜가며 이름을 지을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10] 현대에 유가 관점으로 볼 이유 또한 없기도 하고.
3.1. 이제현의 논평
고려 말 명망 높은 유학자 이제현은 작제건-용건-왕건 삼부자의 이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했다. 논평은 고려사 고려세계에 인용되있다.
그 내용은 후대의 유가적 기준에 맞지 않는 부분을 가설을 통해 최대한 쉴드를 쳐 주는 내용이다. 사실 이제현 본인이 바로 고려왕조의 녹을 먹는 대신이므로 당연한 것이지만. 그리고 3대가 피휘를 지키지 않고 건자 돌림자를 쓴 것은 사실 이름이 아니라 고대 한국에서 존칭의 의미가 있던 '간'이 와전된 것이라고 보았는데, 이 '간'은 초기 신라의 왕호인 거서간, 마립간이나 신라 관등의 대아'찬', 파진'찬' 등의 '찬'도 간의 변형으로 보이는데 이것과 연결시킨 것이다.
요약하자면(이제현이) 또 논하였다.
편년통록을 쓴 김관의가, "도선이 세조를 송악 남쪽 저택에서 만나 이르길, '기장을 심을 땅에 왜 삼을 심는가?'라 했다. '기장'과 '긔ㅈㆍ(王, 임금)'는 방언(方言, 우리말) 상 비슷하다. 그리하여 태조께서 성을 왕씨(王氏)로 하셨다"고 기록했다. (…) '''아버지(父)가 있는데 아들(子)이 성을 바꾸다니, 천하에 이런 이치가 있던가? 오호라(嗚呼)! 이것이 우리 태조(我太祖)께서 의도하신 바란 말이냐?'''[11]
게다가 태조께선 세조의 뒤를 이으셔 궁예를 도왔다. 예(裔)는 의심이 많고 질투도 많은데 태조께서 갑자기 왕(王)을 성으로 하시면 재앙이 알아서 오지 않겠는가? 그런즉슨 '왕씨종족기(王氏宗族記)'에 따르면 국조(國祖)께서 성(姓)이 왕씨(王氏)셨으니 (태조께선) 처음부터 성(姓)이 왕(王)이었던 것이다. (…) 그러니 기장을 심으라는 설이 어찌 허무맹랑하지 않은가? (종족기가) 또 이르길 의조(懿祖), 세조(世祖)의 휘(諱) 중 나머지(下字)가 태조(太祖)의 휘(諱)와 같다고 했으니 김관의는 개국 전 풍속이 순박해서(즉 중국의 풍습인 피휘가 정착하기 전이어서) 그러려니 하고 적은 것이다. '왕대력(王代曆)'엔 의조께서 육예(六藝, 선비가 배워야 할 6가지 예술)에 뛰어나시고 그 중 글과 활쏘기에 특히 빼어나시다고 했다. 세조께선 어려서부터 그릇이 크고 삼한을 휘어잡을 의지를 가지셨다 하니 조고(祖考)의 이름을 범해 자신과 아들의 이름을 지으셨겠는가? 게다가 태조께선 창업수통(創業垂統, 국가를 창건하고 왕통을 잇다)하시고 동법선왕(動法先王, 행동거지를 역대 선왕들을 본땀)하셨으니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면''' 이름 짓는 예법을 무시하셨겠는가? (…) 생각컨대 신라의 시기(新羅之時)에 그 임금을 '마립간(麻立干)'이라 하고 그 신하를 '아간(阿干)', '대아간(大阿干)'이라 했다. 그리고 시골의 민(民)들도 간(干)을 자기 이름에 덧붙혀 불렀으니, 바로 존칭의 의미였다. 아간(阿干)은 혹 아찬(阿粲), 알찬(閼餐)이라 하니 간(干), 찬(粲), 찬(餐) 세 글자가 모두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의조, 세조의 휘 중 나머지(下字, 즉 '建')도 역시 간(干), 찬(粲), 찬(餐)의 발음과 비슷하다'''. '''그러니 존칭의 의미로 덧붙여 부르던 것이지 원 이름이 아니었던 것이다'''. '''태조께선 단지 이 존칭을 아예 이름으로 삼으신 것인데 호사가들이 거기다 의미를 부여해 '삼세일명(三世一名)이면 필왕삼한(必王三韓)이라'고 말하니 믿을 수 없는 것이다'''.
고려사 고려세계 이제현 논평 중
- 김관의의 기록은 유교식 예법상 맞지 않다.
- 그러니 예법을 아는 의조·세조·태조가 성명을 그렇게 지었을 리가 없다.
- 건(建)의 의미는 신라 때 존칭이던 간(干)과 같은 뜻이다.
- 태조는 그걸 이름으로 썼을 뿐이다.
- 그렇기에 건은 돌림이 아니라 어쩌다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4. 대중매체에서
김성한의 소설 <왕건>에서는 해적과의 싸움에서 아내와 자식들을 잃은 장사치로 등장한다. 외아들인 왕건 역시 평범한 장사치로 키우려 했으나 왕건의 재목을 알아본 궁예는 왕건을 자기 휘하에 둔다.
몇 년 뒤 간암으로 세상을 뜨면서, 왕건에게 항상 공은 남에게 돌려서 뾰족하게 나오지 말라는 유언을 남긴다.
4.1. 드라마 태조 왕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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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에선 신구가 열연했다.[12] 조상 누대에 걸친 왕씨 천하의 대망을, 도선의 예언으로 점지된 아들 왕건에게 건다.'''난 너한테 천하를 물려주려고 송악도 버렸다. 이놈아! 계집 하나가 그렇게도 소중하더냐!! 궁예가 이리 다가오고 있다! 계집 일은 잊어버려라!!!'''
자신의 앞가림에 급급한 다른 패서지역 호족들과는 달리 앞을 길게 내다볼 줄 아는 인물로 묘사되며, 패서 호족들 가운데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것으로 묘사된다.[13] 위에 서술된 왕씨 천하의 대망을 위해서, 왕건에게 어린 시절부터 엘리트 교육을 철저하게 시켜, 왕건을 왕재로 길러낸다. 왕건은 어릴적부터 당나라, 발해, 일본 등 인근 각국에 장사하러 다니며 많은 경험을 쌓았으며, 어린 왕건과 궁예의 대화를 통해서, 왕륭이 특히나 왕건에게 인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거기다 궁예가 철원을 함락하고 호족들이 앞다투어 궁예에게 투항할 때 짐짓 투항을 늦추었다. 여러 호족들 사이에 섞여 흐지부지 빛이 바래는것 보다, 가장 마지막까지 버티며 궁예의 시선이 집중될 때 앞으로 중히 쓰일 자신의 해양 세력과 그 기반인 송악을 바쳐 궁예의 환심을 사고서 후일을 기약한다는 것.
허나 그 때문에 강비를 향한 왕건의 첫사랑을 파토내는 냉혹한 일면도 있다. 강비, 그러니까 작중 이름은 연화인 인물 자체는 별다른 하자가 없지만, 그녀의 아버지가 문제였던 것. 작중 설정상 왕씨 가문과 신천의 강 장자 집안은 잦은 교류를 하였는데, 왕륭은 강장자를 장사치나 하면 족할 소인배로 평가하였고, 때문에 연화를 며느리로 들이는 것을 차일피일 미루다 결국 파기해버린다. 강장자의 훗날 행각을 보자면 왕륭의 판단이 옳기는 했다. 물론 아들은 이 사건으로 인해 마음의 큰 상처를 입었고, 20대 후반에 접어들도록 연애나 결혼에는 일체 관심을 보이지 않고 업무에만 전념하여 하마터면 솔로로 살 뻔했다는 문제가 있긴 했지만. 왕건이 훗날 신혜왕후가 되는 정주 호족 유천궁의 딸인 유씨를 술에 취한채 바라보며 연화로 착각하고 그렇게 부르는 모습에서 이 마음의 상처가 얼마나 크고 깊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실제 행적을 참고했는지) 궁예 정권에게 의도적으로 송악을 바친다. 금성태수로 좌천되어도 묵묵히 궁예를 따랐고, 송악이 고려의 수도가 되고, 수도를 짓는데 전 재산을 탕진하는데도 오히려 자기 뜻대로 되어간다고(왕건이 훗날 큰 뜻을 이루게 되는 발판이 되는 것) 만족한다. 왕륭이 죽은 후의 일이긴 하지만, 왕건 가문은 장삿길을 복구하여 또다시 큰재산을 벌어들이기 시작했으니, 왕륭이 재산에 연연하지 않는 것도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신구가 일갈하는 장면을 꽤 볼 수 있기도 하다. 특히 왕건과 관련되어선 더욱 그렇다. 아직 왕이 되기 이전의 견훤과 궁예를 만났으며, 은근히 견훤을 마음에 들어 했는지 자신과 함께할 것을 넌지시 청하기도 했다. 견훤이 이를 완곡하게 거절하자 내심 아쉬워 하기도 했다. 다만 이후 견훤이 세력을 다지고 왕이 되었다는 소식에 자신이 실수할 뻔 했다며 아찔해 하기도 했다. 왕륭이 견훤을 영입하려 했던 것은 훌륭한 장수로서 왕건을 보필하게 하려는 목적이 분명했는데[14] , 하마터면 범을 방안에 불러들일 뻔 한 것이니 그럴만 했다.
작중 설정상 궁예의 은인이기도 하다. 어린 궁예가 유모를 따라 세달사로 가던 중 힘이 다한 유모는 송악 나루터에서 쓰러졌는데, 때마침 그 곳을 지나가던 왕륭은 궁예와 유모를 거두어 집에 데려간다. 잠시 후 신라군이 궁예를 찾아 왕륭의 집에 갔으나, 왕륭이 송악 일대의 유력한 호족이었던데다 신라의 실세인 위홍과 친분이 있다보니 신라군은 문전박대당하고 물러난다. 작중 설정상 권력다툼 때문에 반역죄를 뒤집어쓰고 몰락하는 가문들이 많았는데, 왕륭은 궁예 역시 권력다툼의 희생양이었을 것이라고 보고 그를 보호한 것이었다. 왕륭 덕분에 목숨을 건지고 세달사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궁예는 왕륭과 왕건 부자에게 은근히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고, 훗날 왕건이 양길과의 싸움에서 공을 세우자 아예 왕건을 의형제로 들인다.[15]
이후 25화에서 병으로 사망하는데, 왕건을 직접 보지는 못하지만 유언으로 왕씨의 나라를 세우라는 말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