웡원하오
1. 개요
중화민국의 지질학자, 초대 행정원장.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전향했다.
2. 생애
2.1. 항전기의 경제전문가
1891년 절강성 근현에서 태어났다. 1902년에 과거시험을 보아 수재가 되었으며 벨기에로 유학하여 1912년 벨기에 루벤대학교에서 지질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중국으로 귀국한 후 20년 동안 학술활동을 하였다. 1922년 베이징 지질 조사소 소장이 되었으며 베이징대학 교수로 지질학을 가르쳤다. 1928년에는 칭화대학 지질학 교수가 되어 지질학과 학장을 거쳐 대리총장까지 승진, 교육에 힘쓰다가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한 이후 행정원 비서장에 임명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국민정부 교육부장, 경제부장, 전시 생산국장 등의 경제 관련 직책을 역임하였고 자원위원회 위원장을 겸하게 되었다. 1943년 8월 국민당 5기 11중전회에 출석, <전후공업건설강령>의 통과에 참여하여 "전력공업, 야금, 석유, 철강, 동력기, 발전기, 전신, 기본 화학공업 등은 마땅히 국영으로 귀속시켜야 하며, 정부가 국영으로 지정한 공광사업 이외에는 모두 민영으로 귀속한다., 예를 들면, 방직공업, 식품업, 유지업 등 다수 사업이 여기에 속한다."고 발언했으며 농민반란의 원인에 대해서 부정부패가 있다고 인정하였다. 1944년 11월 6일 개최된 국방최고위원회 상무위원회 148차 회의에도 참여, <제1기 경제건설원칙>를 통과시켰고 1945년 5월 개최된 국민당 6전대회에서 <공업건설요령실시원칙>을 발표했다. 또한 1945년 7월 8일 국민참정회 2기 회의에 <방직공업에 관한 보고>를 제출했다. 6월에 쑹쯔원 내각이 출범하자 행정원 부원장 겸 최고경제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중일전쟁 종전 이후 쑹쯔원 내각 밑에서 경제부장으로서 전후 경제 수습에 나섰다. 1945년 8월 23일, 웡원하오는 경제부장 명의로 성명을 발표하여 모든 공광사업은 정부가 정식으로 접수하기 이전에 그 자산과 설비를 보전하며 사사로이 이관, 변동하는 경우 엄중하게 조사하여 법에 따라 처벌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후 일본에 부역한 적산사창을 대상으로 국유화를 단행하였으며 1945년 12월 7일 국민참정회의에서 이 조치가 방직공업의 신속한 복원과 생산력 증대를 위한 것임이라고 밝혔다.
1945년 8월 25일, 웡원하오는 전후 경제 수습을 요청하는 경제단체 대회에 참여하였는데 정부의 명확한 구제의지를 요청하는 기업인들에게 "현재 공업 구제의 문제에 관해서, 두 가지 방면으로 나누어 이야기할 수 있다. 첫째, 정부의 구제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어 무원칙하게 무조건적으로 일괄해서 구제할 수는 없다. 따라서 국가에 도움이 되는가, 구제할 가치가 있는가 하는 점을 가지고 판단하지 않을 수 없다. 둘째, 현재 모두들 비관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이렇게 해서는 안되며, 마땅히 떨치고 일어나 장래의 일에 나서야 한다. (...) 공업계 스스로도 분발하지 않으면 안된다. 예를 들어 업무효율을 제고시키고, 노동자와 지출을 경감하고 이를 통해 생산 원가를 낮춰야 한다./ 적은 단위는 가능한 한 합병을 단행해야 하며 사실상 경영을 지속하기 어려운 공장은 애통하지만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며 냉정한 견해를 드러냈다. 1946년 1월 6일, 공상업 대표들이 구제를 요청했을 때도 "지금의 공장은 자금, 설비, 기술의 각 방면에서 공업이라고 할 수도 없을 정도이며 차라리 공장 문을 닫는 편이 낫다."라고 회답했다. 이에 재계는 반발하였으며 CC계의 곡정강, 번공전, 정천방, 여정당, 뇌련 등은 웡원하오와 쿵샹시를 해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허나 천리푸는 웡원하오를 옹호하였다.
2.2. 국공내전
1946년 입법원이 개원할 때 민주동맹과 청년당이 참여를 거부하자 7월 2일 천부레이, 우톄청과 함께 소수당의 정부 참여를 독려하는 활동을 벌였고 이에 7월 4일 중국청년당이 중앙 상무위원회를 소집, 입법원 참여를 선언했으며 민사당도 뒤따라 정치적 분규가 해결되었다. 1947년 2월, 쑹쯔원이 주도한 국영산업 매각 정책결정에 참여, 2월 22일에 상하이 중국은행에서 국영사업 매각을 위한 계획위원회 회의를 개최하였다. 허나 경제지표가 계속 악화되면서 1947년 3월 1일, 쑹쯔원이 사직을 표명했다. 1947년 10월 30일 전국경제위원회 21차 회의에서 매각감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어 국영사업 매각을 감독했다.
1948년 중화민국 헌정이 실시되면서 5월 21일, 입법원은 허잉친을 행정원장으로 선출했지만 허잉친은 당일에 사의를 표했다. 이에 입법원은 허잉친 다음으로 많은 표를 얻었던 장췬을 행정원장에 선출했으나 장췬 역시 5월 22일 사의를 표하여 장제스 총통은 5월 24일 입법원에 자문을 보내 자유파이며 명망이 있던 웡원하오를 행정원장으로 지명했다. 5월 24일 오후, 입법원은 624표 중 489표의 찬성으로 웡원하오의 행정원장 임명을 승인, 5월 25일 웡원하오의 행정원장 임명안이 발표되었다.
웡원하오는 임명을 수락, 내각 구성에 들어가 5월 31일 내각을 발표했다. 행정원 부원장에 구멍위, 내정부장에 장려생(張厲生), 외교부장에 왕세걸, 국방부장에 허잉친, 재정부장에 왕윈우 등을 임명하였다. 이중에 구멍위가 취임을 거부함에 따라 6월 22일 내정부장 장려생이 행정원 부원장으로 승진하고 내정부장엔 내정차장 팽초현(彭招賢)이 임명되었다. 6월 1일 웡원하오가 행정원장에 취임하면서 중화민국 사상 첫 헌정내각이 실시되었다. 6월 23일 장제스는 왕충후이를 사법원장에, 석지량을 사법원 부원장에, 장백령을 고시원장에, 가경덕을 고시원 부원장에 임명하였다. 6월 24일 감찰원이 임명안을 승인하여 중앙 5원 조직이 완성되었다. 여기에 행정원 산하에 미국원조운용위원회가 설립되자 주임위원에 임명되어 미국의 원조를 끌어오려고 노력했다.
1948년 8월, 경제위기가 심각해져서 몇달 안에 중국이 파산할 것이라는 재정부장 왕윈우의 선고가 있자 재정경제긴급처분령을 통해 물가 통제와 화폐개혁으로 사태를 모면하려 했으나 참담한 실패로 끝났고 11월 1일 재정경제긴급처분령을 폐기하였고 이 때문에 장징궈로부터 무능력한 관료주의자라는 원망을 듣고 그와 관계가 나빠졌다. 여기에 회해전역과 요심전역에서 국부군이 참담한 패배를 당하자 웡원하오는 세 차례나 행정원장에서 사직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장제스는 그의 사의를 반려하였다. 웡원하오가 네번째로 사의를 표하자 쑹메이링이 직접 그를 찾아가 장제스가 그에게 지지를 표하고 있으니 끝까지 행정원장직을 수행하라고 권했으나 웡원하오는 이렇게밖에 사퇴할 수 없는 것이 부끄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11월 26일 사의를 표하고 행정원장에서 사퇴하였고 장제스는 당일에 쑨커를 신임 행정원장으로 지명하였다.
웡원하오는 1948년 12월 25일 중국 공산당에 의해 12호 전범으로 지명되어 비난받았다. 장제스의 명령을 받고 장강 하류 지역의 공장을 해체하여 대만으로 수송하는 일을 맡았으며 1949년 1월 21일 리쭝런이 대리총통이 되자 총통 비서장이 되었으나 이 역시 곧 사임하여 영국령 홍콩에 망명했다. 1950년 프랑스로 망명하여 파리에 거주하였다.
2.3. 말년
1950년 중화인민공화국이 그의 전범 지명을 취소하고 귀국을 종용하자 1951년에 귀국, 1954년에 정협 전국위원을 지냈다. 1966년 문화대혁명이 발생하자 위기에 처했으나 저우언라이의 지시로 보호받을 수 있었고 1971년 베이징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3. 매체에서
호이4에서 waking the tiger DLC가 출시된 이후 등장한다. 중화민국의 민주당파 지도자로 나오는데 같이 패치된 인물이 공산주의 지도자로 나오는 장궈타오.[2] 하지만 실제 초상화 없이 천샤오콴의 사진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아시아 지도자 공용 초상화를 돌려 쓰고 있었으나, 다행히도 이번 패치로 제대로된 초상화가 추가되었다.
Eight Years' War of Resistance 모드에서는 국민정부 장관진으로 등장하면서 경제 전문가였던 실제 역사에 발맞춰서 산업 전문가로 등장, 민수공장과 인프라 건설 속도를 10% 올려준다.
4. 주요 경력
5. 참고문헌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 전후중국경제사(1945~1949), 김지환, 고려대학교출판부.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장개석은 왜 패하였는가, 로이드 이스트만, 지식산업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