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위
1. 개요
중화민국의 정치인. 왕징웨이를 따르는 개조파의 대표적인 정객이었으나 반장전쟁과 1차 양광사변에서 패배한 이후 별볼일 없어졌다. 중일전쟁을 계기로 왕징웨이와 단절하였으며 중화민국 초대 행정원 부원장을 지냈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1888년 직예성 완평현에서 태어났다. 1905년 베이징 역학당에서 공부하다가 독일로 유학, 베를린 대학교에서 정치경제학을 공부했다. 1910년 중국 동맹회에 가입했고 1911년 신해혁명이 발생하자 귀국하여 혁명에 참가했다. 1916년 베이징대학 교수가 되었고 독일어, 경제학, 법학 등을 가르쳤으며 교무장까지 승진했다. 1924년 중국 국민당 베이징특별시 당부 주비주임이 되었으며 1925년 12월, 광동대학 교장이 되었다. 왕징웨이의 측근으로 국민당의 대표적인 좌파 인물 중 한사람이었지만 맑시즘의 계급투쟁 이론에 반대하여 중국에서는 여러 계급이 적대적으로 상호충돌하는 것이 아니니 중국 사회를 계급적으로 구분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구멍위는 삼민주의를 구성하는 민족주의, 민권주의, 민생주의를 모두 강조해야 하며 이는 한 계급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특정 계급이 전적으로 향유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노동자와 농민은 그저 직업에 불과하지 이를 계급으로 분류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1926년 1월, 중국 국민당 중앙집행위원 겸 황포군관학교 정치교관이 되었으며 3월 중산함 사건이 발생하고 5월에 당무정리안에 제출되자 중국 공산당원은 부장직을 맡을 수 없다는 새로운 조항에 따라 선전부장 마오쩌둥을 대신하여 새로운 선전부장에 취임했다. 7월에 중앙정치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7월 15일, 외교부장 천유런과 함께 영국 측과 파업 문제와 관련하여 국민정부의 대표로 협상에 참여했으며 10월, 중산대학 대학위원회 부주임을 맡았다.
2.2. 국민혁명 시기
1926년 국민당의 1차 북벌이 거행되자 중산함 사건 이후 프랑스 외유를 떠난 왕징웨이의 복직을 위해 위수더와 함께 10월 18일, 왕징웨이 복직 청원 전보를 보내는 등 영왕운동에 앞장서는 등 반장활동을 전개했으며 우한 연석회의가 조직되자 우한 측에 가담하였다. 1927년 2월 28일, 정치위원회 결정에 따라 쑹쯔원 등과 함께 국민정부 재정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27년 3월, 2기 3중전회에서 중앙정치위원회 위원 겸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27년 3월 말에 있었던 중앙선전위원회 14차 회의에서 장제스가 기껏해야 북벌에 나가지 않고 버티는 수준으로밖에 저항할 수 없을 것이라고 오판하였다. 1927년 4월 2일 조직된 중앙토지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어 토지몰수 문제를 심의, 정치적 몰수안을 주장하였다.
그러던 중 장제스는 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키게 된다. 이후 4월 15일에 개최된 상무위원회 확대회의에서 장제스에 대해 개인적인 징계를 내리는 수준에서 갈등을 봉합하자고 주장하여 덩옌다 등의 난징 무력토벌 주장을 무산시켰다. 이후 펑위샹이 북벌 참가를 선언, 2집단군 사령관에 취임하여 하남성을 점령하자 6월에 정저우에서 펑위샹과 회담하였다. 국공결렬 이후 1927년 7월, <국민당은 반드시 계급기초가 있어야 하는가?>라는 글을 발표하여 국민당 개조를 주장했다.
7월에 국공결렬이 일어나면서 우한 국민정부는 더 이상 난징 국민정부와 대립할 명분을 잃게 되어 합작을 타진하게 되는데 난징 측은 구멍위를 공산당에 부역한 범죄자로 비난하며 그를 배제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때 왕징웨이가 구멍위, 천궁보 등의 포함을 강력히 요구하여 연석회의 의장인 쉬첸을 배제하는 정도로 갈등이 마무리, 쑨커의 제의로 성립된 국민당 중앙특별위원회에서 구멍위는 일단 특위위원으로 선출되었으나 왕징웨이와 우한 측의 정통성이 인정받지 못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 9월 13일, 왕징웨이와 동반 하야한 후 탕성즈에게 의탁하게 된다. 1927년 9월 21일 탕성즈, 천궁보와 함께 우한정치분회를 신설하였으나 너무 나대던 탕성즈가 당계전쟁으로 토벌당하자 10월, 광동군벌 장파쿠이가 광저우에 새로운 당중앙을 세우자고 초청하자 광저우로 이동하게 된다.
11월, 광저우를 완전히 장악하려는 천궁보의 사주로 장황사변이 일어나자 구멍위는 광저우 정치분회 주석으로 추대되었다. 난징 측은 이를 공산당의 소행으로 비난했는데 12월에 정말로 공산당원들이 광저우 폭동을 일으키면서 구멍위는 용공부역 혐의로 지탄받게 된다. 이에 12월 7일, 차이위안페이와 리쭝런이 구멍위를 정식고발하였고 난징 측의 강경파들은 분노하여 구멍위를 비롯, 광동 측 9명의 주요인사들의 중집위원 자리를 박탈하고 이들의 사중전회 출석권을 부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권좌에 복귀한 장제스는 1928년 1월 7일 중앙상무위를 통해 3전대회에서 문제를 논하자고 무마시켰다. 하지만 1928년 1월 31일, 감찰위원회가 왕징웨이, 천궁보, 간나이광과 함께 구멍위를 중집위상임위에 고발하는 등 풍파는 그치지 않았다. 이때 구멍위는 왕법근, 천궁보 등과 함께 개조동지회를 설립하여 개조파를 형성하고 프랑스로 떠난 왕징웨이의 귀국을 청원하였고 상하이에서 쑹쯔원의 지원을 받아 잡지 <전진>을 발간하는 등 반장 언론활동을 전개했다. 이때 필명기고를 고집하며 실명기고를 주장하던 <혁명평론>의 발간인 천궁보와 계급기초론 등에 있어 사상적으로 계속 충돌을 빚었다.
2.3. 반장전쟁과 1차 양광사변
1929년 개최된 3전대회는 구멍위에 대해 3년간 당권 정지 처분을 내렸다. 하지만 구멍위는 굴하지 않고 개조동지회를 중심으로 펑위샹, 옌시산, 리쭝런 등 반장군벌들을 부추겨 장제스로부터 정치적 투기꾼이라고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들은 강소, 절강, 안휘, 강서, 하남, 산동, 하북, 호북, 사천, 광동 등 여러 성에 빠르게 지부를 설립하였으며 난징, 베이핑, 톈진에도 지부를 설치, 비밀리에 반장활동을 벌였고 왕징웨이, 천궁보, 구멍위는 연명으로 3전대회와 장제스를 비난하며 3전대회가 "13년 이래의 당의 개조정신을 망각하고 (...) 본당의 민주의 원칙을 위반했다."고 맹비난했다.
개조파는 서산회의파와 합작하여 1929년에서 1930년까지 진행된 반장전쟁에 가담하였고 1930년 중원대전에서 옌시산의 베이핑 국민정부 수립에 참가했지만 장쉐량과 힘을 합친 장제스에게 모두 토벌당했다. 결국 망명의 길을 택한 왕징웨이가 1931년 1월 1일 홍콩에서 개조동지회의 해산을 정식으로 선포함에 따라 개조파는 공식적으로는 와해되었다. 1931년, 탕산 사건을 계기로 그간 장제스의 편에 서왔던 광동파가 거병하여 1차 양광사변이 일어나자 개조파도 다시 참가했으나 개조파와 사이가 좋지 않던 광동파는 후한민의 지시에 따라 구멍위의 광저우 출입을 금지하는 등 개조파를 핍박하였다. 이에 분노한 구멍위는 천궁보와 함께 상하이에서 12월 3일, 독자적인 전국대표대회를 소집하여 구 개조파 일원들에 대한 자신들의 영향력을 과시했다.
1차 양광사변은 12월 15일, 장제스가 하야함으로 종식되었으며 1931년 12월 28일 국민당 4기 1중전회에서 구멍위는 중앙 집행위원회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허나 광동파를 중심으로 출범한 쑨커 내각은 만주사변, 제1차 상하이 사변, 경제위기 등을 감당하지 못하고 한달만에 붕괴되었고 다른 반장파에 완전히 빈정상한 왕징웨이는 1932년 1월 항저우 회담을 계기로 장제스와 합작하여 장왕합작 체제를 수립하고 행정원장에 취임하게 된다. 1932년 1월, 다이지타오를 위원장으로 하는 특별외교위원회가 수립되자 특별외교위원회 상무위원에 선출되었으며 제1차 상하이 사변에 대응하여 정책 결정에 참여하였다.
2.4. 서안 사건과 중일전쟁
1935년 11월 왕징웨이 저격 사건으로 행정원장 겸 외교부장 왕징웨이가 사퇴하자 장제스는 왕징웨이 계파를 달래기 위해 구멍위에게 행정원 부원장직을 제안했으나 천궁보 등이 이를 순전히 눈가리고 아웅하는 걸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구멍위는 장제스의 제안을 거절했다. 이어 열린 국민당 5기 1중전회에서 구멍위는 중앙집행위원 겸 중앙정치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교통부 부장에 임명되었지만 왕징웨이의 퇴갤로 왕징웨이 계열의 타격은 걷잡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1936년 서안 사건이 일어나자 천궁보, 천비쥔 등과 긴밀히 연락하여 황급히 치료차 독일에 가 있던 왕징웨이의 귀국을 종용했지만 왕징웨이가 귀국하기도 전에 서안 사건이 평화적으로 해결되면서 김칫국만 마신 격이 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1938년 6월 국민참정회 참정원에 선출되었으며 중앙선전부 부장으로 취임하여 항일전쟁을 수행했다. 1938년 왕징웨이 공작에 포섭된 왕징웨이가 그에게 일본과 합류할 것을 제안하자 오히려 왕징웨이를 만류하였으나 그가 듣지 않자 결국 오랜 세월 이어졌던 왕징웨이와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였다. 1941년 7월 국립중앙대학 교장에 취임했으며 1943년 삼민주의청년단 지도원이 되었다. 1945년 5월에 중앙집행위원으로 재선출되었다.
2.5. 말년
1948년 2월, 정부고문이 되었으며 5월에 웡원하오 내각이 출범하자 5월 31일 행정원 부원장으로 지명되었으나 취임을 거절하여 내정부장 장려생이 6월 22일 부원장으로 교체되었다. 1949년 4월, 2차 국공내전이 국민정부의 패배로 귀결되는 것이 보이자 영국령 홍콩으로 망명하여 언론활동을 하다가 1952년 장파쿠이, 장궈타오 등 홍콩에 있던 중국의 유력 정치인과 함께 중국자유민주전투동맹을 설립하였다. 하지만 조직 문제를 놓고 갈등하다가 1954년에 탈퇴하였다.
이후 가족을 거느려 미국 캘리포니아주로 이주,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캠퍼스 중국문제 연구소와 미국 국무부에서 중국연구 관련 고문으로 활동했다. 1969년 7월, 국민정부가 특파원을 보내 귀국을 종용하자 아내와 함께 타이완으로 귀국하여 총통부 자정에 임명되었다.
1972년 타이베이에서 사망했다.
3. 주요경력
4. 참고문헌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장개석 연구, 배경한, 일조각.
- 왕징웨이 연구, 배경한, 일조각.
- 중국국민혁명 지도자의 사상과 행동, 민두기 등 공저, 지식산업사.
- 중국초기혁명운동의 연구, 민두기, 서울대학교 출판부.
- 蔣介石의 '第1次 下野'와 復職, 김영신, 중국학보 44권, 한국중국학회.
- '湯山事件' 후의 정국과 '反蔣派'의 動態, 김영신, 중국학연구 53권, 중국학연구회.
- 광주국민정부의 北伐과 蔣介石의 대응, 김영신, 중국학연구 55권, 중국학연구회.
- 唐生智와 武漢國民政府, 나현수, 중국근현대사연구 29권, 중국근현대사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