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S-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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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월 16일, 28번째 발사 순간. '''모든 일의 화근이자 마지막 발사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던''' 이 순간을 마지막으로 컬럼비아는 온전히 지상으로 되돌아오지 못했다.
1. 컬럼비아에 대한 소개
아폴로 계획을 이어 소련의 소유즈에 대항하기 위해 6년 만에 재개된 유인 우주왕복선 실험의 주인공으로, 제작 계약은 1972년 7월 20일에 했고 제작 후 1981년 4월 12일, 유리 가가린의 우주 진출 이래 20주년이 되는 날에 존 영과 로버트 크리펀[1] 의 STS-1 미션으로 데뷔한 '''역사상 최초의 재활용 가능 우주선'''이다. 이름은 미국 건국 초기에 탐험선으로 활약했던 범선 컬럼비아[2] 에서 따왔다.
제식번호는 OV-102, 추력은 3,000톤이나 되며 전체 중량은 2,000톤이다. 승무원이 타는 궤도선 컬럼비아, 그리고 외부 연료탱크와 고체 연료 로켓부스터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 셋을 통틀어 '우주왕복선'이라고 칭한다...지만 왠지 사람들은 그냥 비행기 모양의 간지나는 궤도선만 우주왕복선으로 쳐준다(...) 전체길이는 56.1m. 궤도선은 전장 37.2m 전체 폭 23.8m로 제트여객기 DC-9와 거의 비슷하고, 최대 7명의 승무원이 탑승하며 표면에는 내열용 타일이 장착되어 있다. 초창기 STS-1~4의 궤도비행 테스트를 비롯한 총 28회의 우주 임무를 수행했으며, NASA와 ESA의 합작 프로젝트인 스페이스랩 프로그램을 위한 EDO(Extended Duration Orbiter) 팔레트[3] 가 설치되어 십수 일 단위의 장기간 임무도 가능했다. 컬럼비아를 거쳐간 우주비행사의 수는 169명에 달한다. STS-1을 시작으로 22년간 26번의 임무를 무사히 마쳤으나 아래에서 소개할 마지막 임무였던 28번째 임무 '''STS-107'''을 수행하고 돌아오던 중 공중분해되고 만다.
다른 셔틀들과의 다른 점이 있다면, 프로토타입에 가까운 특성상 너무 무거웠다. 그래서 ISS 미션에는 써먹을 수가 없었다. 엔데버에 태울 작정으로 만들어진 EDO 팔레트를 엔데버가 포기한 것도 결국은 그나마 가장 가벼운 엔데버를 ISS 전용으로 써먹으려던 것. 때문에 컬럼비아는 챌린저 이후 유일하게 ISS에 방문하지 못한 우주왕복선이다. 대신 그 반대급부로 셔틀 프로그램 역사상 장기 미션 목록 랭킹은 죄다 컬럼비아의 EDO 미션이 차지하고 있다. STS-107은 4위이며, 3위의 엔데버 미션이 엔데버에 EDO를 태워 써먹은 딱 한 번의 그 미션 STS-67. 원래는 컬럼비아 역시 EDO 팔레트를 뗀 다음 이런저런 정비를 통해 ISS에 보낼 예정이었으나...
1998년 4월에는 인간 신경계에 미치는 무중력상태의 영향에 관해 실험할 목적으로 발사되어 16일간 우주에 머무르면서 불면증, 불안정 등에 대한 실험을 하기도 했으며, 귀뚜라미, 물고기, 쥐, 달팽이 등 2,000여마리의 동물이 함께 탑승한뒤 실험 대상이 되면서 '우주 노아의 방주' 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또한 1999년에는 STS-93 미션에서 찬드라 엑스선 관측선을 발사하고 2002년 STS-109 미션에서는 허블 우주 망원경의 4차 보수를 진행하기도 했다.
1981년 STS-1 미션을 한 달 앞두고 3월 19일경 점검을 진행하던 기술자 5명이 질소만 가득찬 셔틀에 들어가 점검하다 산소 부족으로 질식사한 안타까운 사고도 있다.
2. STS-107의 승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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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부터 데이비드 브라운, 릭 허즈번드, 로렐 클라크, 칼파나 차울라, 마이클 앤더슨, 윌리엄 맥쿨, 일란 라몬. 전원 2004년 2월 3일에 명예 훈장이 추서되었다.
- 데이비드 맥도웰 브라운(미션 스페셜리스트) - 1956년 4월 16일 버지니아 주 출생. 미 해군 항공군의관으로 활동하다 해군 조종사가 된 역대 보기드문 커리어를 갖고 있다. 1996년 4월에 우주비행사로 선발되어 같은 해 8월에 존슨 우주 센터에서 훈련을 개시한 뒤 2년간 훈련을 수료하고 미션 스페셜리스트에 선정되었다. 사망 당시 계급은 대령.
- 릭 더글라스 허즈번드(지휘관) - 1957년 7월 12일생, 텍사스 출신으로 4살 때부터 유리 가가린과 머큐리 세븐을 보며 우주비행사를 꿈꿨으며, 1994년 우주비행사로 선발된 뒤 1999년에 STS-96으로 첫 비행을 했던 미 공군 대령이자 기계공학 석사이다. 귀환하는 대로 배우자 에블린과 결혼 21주년을 축하할 예정이었다.
- 로렐 블레어 샐턴 클라크(미션 스페셜리스트) - 1961년 3월 10일 미국 아이오와주에서 태어났고, 미 해군에서 네이비 씰, 잠수함, 항공을 넘나들며 해양의학을 연구하다 1996년 4월 우주비행사 후보로서 선발된 뒤 2년 후 존슨 우주 센터에서 훈련을 수료해 미션 스페셜리스트로 선정되었다. 사망 당시 대령. 해군 시절부터 같이 활동했던 NASA의 항공의무관 조너선 클라크와 결혼하여 당시 기준으로 6살이었던 아들 이안을 두었었다.
- 칼파나 차울라(미션 스페셜리스트) - 1961년 7월 1일 인도에서 태어났으며[4] 1994년 12월에 우주비행사 후보로서 선발된 뒤 1995년 3월 존슨 우주 센터에서 훈련을 개시해 1년 후 미션 스페셜리스트로 선정된, 사상 최초의 인도계 미국인 우주비행사이다. 첫 비행은 STS-87의 로봇 팔 오퍼레이터였는데, 당시 로봇 팔 조작 중에 조금 기우뚱하는 바람에 동료들이 선외활동을 해야 했다고.
- 마이클 필립 앤더슨(페이로드 커맨더) - 1959년 12월 25일 뉴욕에서 태어났으며, 1994년 12월에 우주비행사 후보로 선발되었다. 존슨 우주 센터에서 훈련을 개시해 1년 후 미션 스페셜리스트로 선정된 미 공군 중령이다. 첫 미션은 STS-89 미르-엔데버 도킹 미션이었다. 산드라 호킨스와 결혼하여 두 딸 케이시와 시드니를 두었다.
- 윌리엄 캐머런 맥쿨(파일럿) - 1961년 9월 23일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났다. 미 해군 중령이자 컴퓨터 과학 석사로, 미국해군사관학교 시절 마라톤 선수로도 활동했다. 1996년 우주비행사에 선발되었고 이 미션이 첫 비행이었다.
- 일란 라몬(페이로드 스페셜리스트) - 1954년 6월 20일, 이스라엘 텔아비브에서 아우슈비츠 생존자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981년에 F-16의 파일럿으로 이라크의 원자로를 폭격하는 오페라 작전에 참가했던 이스라엘 공군의 베테랑 조종사였다. 1997년 페이로드 스페셜리스트로 선정되어 첫 이스라엘인 우주비행사가 되었다. 원래 세속적인 인물이었지만, 발사를 앞두고 홀로코스트를 추모하는 많은 랍비와 유대인들의 성원을 받아서 미션을 앞두고부터는 나름대로 독실한 종교 생활을 했고, 많은 유대인들이 보낸 기념물을 우주에 가져갔다.
3. 이륙
2003년 1월 16일 오전 7시 5분, 연료 급유한지 1시간이 지나고 주황색 외부연료통에 200만 리터의 액체수소와 산소를 채워넣었다. 사령관은 NASA의 전통에 따라 탑승준비팀의 책임자와 플레잉 카드로 게임을 했고, 책임자가 지기 전까지는 대원들은 이동 차량에 타지 못했다.[5] 7시 30분 카드 게임에서 이긴 뒤 이동차량을 타고 우주왕복선으로 출발했고, 7시 53분에 사령관을 비롯한 모든 승무원들이 탑승했다.
10시 38분, 카운트 다운을 시작하고 1분 뒤 이륙했다. 고도 43km에서 부스터를 분리했고, 10시 47분, 컴퓨터가 주 엔진의 가동을 중단하면서 우주에 무사히 진입했다. 1월 17일 컬럼비아가 7.7km/s 궤도에 진입하고 우주비행사들은 일정을 수행했다. 79가지 실험[6] 을 진행했으며, 하루 16시간을 실험에 매진하느라 끼니도 종종 거를 정도로 바빴다.
4. 파편을 둘러싼 우려
한편, NASA에서는 발사 순간 영상을 분석하던 도중, 발사 직후 외부 연료통의 절연 조각 하나가 떨어져 나간 뒤 컬럼비아의 왼쪽 날개를 강타한 것을 확인했다. 이 절연체는 연료의 낮은 온도를 유지하기 위한 말랑한 발포 소재였는데, 재질 특성상 조각이 떨어져 나오는 일이 잦았으며 우주왕복선 본체에 부딪히는 일도 발사 10건당 1번꼴로 발생했다. 그런데 이 절연체 조각은 큰 서류가방 크기로 그때까지 우주왕복선에 충돌한 것 중 가장 큰 크기였고, 부딪힌 각도도 좋지 않았다. 궤도에 오른 컬럼비아 조종석에서는 뒤에서 앞으로 뭔가 기계조각 같은 것이 밖에 날아가는 것이 육안으로 관찰되기도 했지만, 당시에는 승무원도 NASA도 이것이 무엇인지 확정하지 못했다.[7]
이러한 정황들은 기술자들에게 우려를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발사 당시에 지상 카메라 중 2대에만 충돌 장면이 잡혔기 때문에[8] 정확한 충돌 지점과 피해 상태를 파악할 수 없었다. 또 컬럼비아도 대원이 EVA로 나가거나 로봇암을 동원해 선체 외부를 촬영할 준비가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9] 보잉에서 만든 "크레이터"라는 충돌 시뮬레이터 소프트웨어가 있었지만, 크레이터는 수 센티미터짜리 작은 물체의 충돌을 모사하기 위해 개발된 것으로 이러한 대형 충돌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또 충돌은 일반 내열타일 구역이 아닌 카본으로 강화된 내열타일 구역에서 일어난 것으로 추정되었는데, 당시에는 카본 강화의 강도를 과대평가하고 있었다. 이러한 오류로 인해 크레이터 시뮬레이션 결과로는 손상은 있으나 복귀 후 정비하면 될 수준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오류의 원인까지는 몰랐어도 크레이터가 기존 충돌사례를 제대로 시뮬레이션하지 못하는 것을 경험적으로 느끼고 있었던 파편평가팀은 크레이터의 결과를 불신했다. 다른 확인 방법이 없자 고심하던 파편평가팀은 유일한 수단으로 미국의 정찰위성을 움직여 충돌 부위를 찍을 것을 요청하는 보고를 올린다. 그러나 위성의 궤도 수정은 위성의 수명을 극적으로 단축시키므로 수백억 원 이상을 소모하는 셈이었고, 위성 고해상도 촬영은 3번이나 요청했음에도 결국 최종 결정 권한이 있는 미션관리팀의 리더인 Linda Ham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0]
그리고 운명의 2월 1일, 승무원들은 다시 우주복을 입고 지구로 진입을 시도했다.
5. 사고
2003년 2월 1일 오전 8시 10분, 존슨 우주 센터에서 대기권 돌입을 승인하고 8시 15분, 사령관이 재진입을 위한 위치로 이동했다. 받음각 40도를 이루고 대기권으로 진입했다. 8시 44분, 시속 28,000km로 하강했다. 재진입열로 날개 온도는 1,400도 가까이 오르고, 착륙이 순조로이 진행되는 듯 했다. 그런데 8시 48분 39초, 왼쪽 날개의 RCC 패널 9번 옆의 압력감지계가 이상 증가값을 보이기 시작했다.[11] 8시 48분 59초에는 RCC 패널 9번 앞의 온도감지계가 이상 증가값을 보이기 시작했다.[12] 이를 시작으로 여러 감지기들이 계속해서 이상값을 보이기 시작했다. 8시 54분 24초, 교신소에서 컬럼비아의 임무사령관에게 기체 좌측에서 온도감지계 4개가 고장났다고 알렸다.
이때부터 지상의 아마추어 촬영자들에게는 파편들이 하나씩 밝게 빛나며 떨어져나가는 것이 관측되기 시작했다.[13] 임무사령관은 감지기 4개가 동시에 나갔는지, 무슨 공통점이 있는지 되묻고[14] , 교신소는 온도감지기들이 4~5초 간격으로 나갔으며 모두 왼쪽 날개의 승강타 액추에이터 앞에 있는 것이지만 다른 공통점은 없다고 회신했다. 8시 57분 25초, 교신소는 다른 이상이 없는지 재점검했다. 8시 58분 32초, 좌측 랜딩기어의 온도감지기와 타이어 2개의 압력감지기의 수치가 이상 하락하기 시작했다.
8시 59분 24초, 관제소와 임무사령관이 이에 관해서 교신하던 중 59분 32초에 갑자기 연결이 두절되었다.[15] 관제소가 통신 문제를 확인하며 교신을 재시도하는 사이, 테스트파일럿 출신인 조종 승무원들은 컬럼비아 호를 수습하기 위해 수동 조종으로 전환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16]
9시 0분 2초, 텍사스 상공을 지나던 컬럼비아에서 큰 파편이 떨어져나가는 것이 아마추어 촬영자들에게 관측되었다. 그리고 불과 몇 초 뒤인 9시 0분 18초 컬럼비아 호는 공중분해되었다. 댈러스 지역방송 WFAA의 사진기사 하나가 떨어져나가는 파편들이 선명하게 보이는 영상을 촬영했고, WFAA는 이 영상을 속보로 보도했다.[17] 관제소에서는 계속해서 교신 재개를 시도했다.
마지막(GMT 기준 1시 59분 31초 기준으로)으로 수신된 속도 마하 17.5, 고도는 20만 1천피트를 마지막으로 불과 1초 뒤, 송신하던 신호는 끊겼다.
그리고 9시 3분경 '''결국 컬럼비아는 텍사스 동부 상공에서 굉음을 내며 20000여개의 파편으로 완전히 분해되었다'''
9시 12분 55초에 관제소의 재진입 비행 책임자 리로이 케인은 교신을 통해 "Lock the doors"라고 하며 우주왕복선의 사고를 선언한다. 이는 실제 물리적으로 MCC의 출입문을 잠글 것을 명한 것인데, 사고가 발생했으니 공식적으로 해당 컨트롤 센터도 사건현장이 되어 조사를 위해 모든 데이터나 물품 등이 보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비행 책임자로서는 일생에 한 번이라도 선언하고 싶지 않은 것이고, 영상[18] 에서도 그의 좌절감이 표정을 통해 드러남을 확인할 수 있다. 컬럼비아 호는 84,000개 이상의 잔해가 되어 텍사스와 루이지애나에 쏟아졌고, 오후 1시, NASA가 컬럼비아 호의 공중분해를 공식으로 언급한 뒤, 우주센터에 조기가 게양되었다. 조지 워커 부시 대통령이 긴급 애도 성명을 냈을 정도로 나라는 큰 충격에 빠졌다.
이스라엘에서는 온 국민들의 열성적인 성원을 받고 성공적으로 우주 임무를 수행했던 일란 라몬의 죽음으로 슬픔에 빠지자[19] 이스라엘과는 쌈박질이 일상이었던 팔레스타인, 이집트, 요르단 등 여러 이웃 나라들도 공식적으로 조의를 표했다. 이라크에서는 유독 '''"사악한 침략자''''''가 천벌을 받았다! 알라후 아크바르!"'''를 외쳤는데, 라몬이 오시라크 원전 공습에 참여했던 F-16 조종사 8인 중에서 최연소였기 때문이다. 당시 UN 안보리가 만장일치로 이스라엘에 대한 제재안을 통과시켰을 정도로 심각한 사건이기는 했지만, 이 발언은 미국 싫고 이스라엘 싫다는 아랍권 국가들에서조차 빈축을 사고 말았다.
한편, 폭발한 잔해가 대서양에 추락했고 유해도 대서양 해저에서 인양된 STS-51-L 챌린저 참사 때와 달리 이 미션은 북미 내륙지역 고고도 상공에서 폭발한 사고였기 때문에 승무원들의 유해가 내륙에서 발견되었다.[20] 물론 유해가 온전한 형태로 남은 것은 하나도 없었는데, 폭발도 폭발이거니와 탑재되었던 미생물들이 잔해와 유해에서 증식하면서 엄청난 훼손이 발생했다. 다만 승무원들의 유품 일부가 발견되고 이를 통해 일부나마 신원을 파악할 수 있었다. 발견된 유품 중 일란 라몬 대령이 우주에서 썼던 일기는 '''도저히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없을 정도로 기적에 가까운 확률'''로 일부 내용이 보존된 채[21] 발견되어 다시금 많은 이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다만 이 과정에서 NASA가 인체에 유해할 수 있는 잔해들이 많으므로 전문 수색인력이 아닌 일반인들은 잔해 수집을 자제해달라 요청[22] 했지만 일부 민간인들이 쌩까고 잔해를 주워다가 eBay 같은 데에 매물로 올리기도 했다.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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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의 수풀에서 발견된 미션 패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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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란 라몬의 일기 조각, 히브리어로 되어 있다.
5.1. 조종실 비디오
STS-107의 지구 재진입 당시 촬영된 영상이 복구되었다. 이 영상은 컬럼비아호가 재진입이 시작되는 동안 우주 비행사가 제작 한 비디오 테이프 영상으로, 일상적인 재진입 절차를 수행하고 서로 농담을 주고받는 아주 평범한 당시 상황을 보여주며 곧 지구로 귀환할 승무원들의 일상이 있었다.
2003년 당시 NASA와 관계자들은 한편으로는 이 비디오 테이프가 우주왕복선 사고조사의 생생한 증거자료가 되거나 혹은, 대중에게 절대로 공개할 수 없는 자료로 판단했으나, 해당 영상은 컬럼비아호가 정상적인 귀환 16분전, 분해되기 약 4분 전에 끝이남에따라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6. 사고 조사
3시간 만에 NASA 부국장은 미합중국 해군 퇴역 대장 해롤드 게먼 제독에게 조사 지휘를 부탁했고, 백악관의 승인을 받아내 12명의 조사관을 뽑았다. 챌린저 조사위원회에서 활동한 샐리 라이드가 다시 초빙되었고, 전 공군장관이었던 실라 위드놀 MIT 교수, 1996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더글러스 오셔로프도 초빙되었다. 이 사람의 지도교수는 챌린저 진상규명에 공헌했던 리처드 파인만. 하지만 대부분은 미군 쪽 인사들이었다.
게먼 제독의 조사팀은 바퀴칸에서 온도가 비정상적으로 높게 일어난 걸 확인했는데, 이는 표면에 틈이 생겼다는 뜻이었다. 이게 진짜인지 알기 위해서는 블랙박스를 회수해야 했는데 문제는 컬럼비아 호의 블랙박스는 추락과 화재에 견디도록 만들어지지 않았고, 60km 상공에서 떨어져서 위치를 파악하지 못해 찾기가 힘들었고, 찾는다 하더라도 멀쩡할 가능성이 적었다. 결국 잔해 회수 작전을 시작해 미국 전역에서 25,000명을 뽑은 뒤 텍사스와 루이지애나를 수색했으나 6주가 지나도록 성과는 없었다. 6주간 발견한 잔해들의 무게와 크기 등을 계산해 예상 낙하지점[24] 을 알아낸 뒤 그곳에 수색대를 파견했고, 원주민 출신 소방관 천시 버드테일이 기록장치를 찾아냈다. 다행히 멀쩡한 상태였다.
기록장치 분석결과 온도가 상승하기 시작한 곳은 바퀴칸이 아니라 왼쪽 날개의 앞쪽이었다. 구멍은 재진입 전부터 있었고, 비행 초기단계에서 온도 상승의 초기 징후가 보인 것으로 드러났다. 다시 말해, '''대기권 진입 전에 문제가 발생'''했단 것이었다. 발사 후 82초에 타일이 떨어져나가 날개에 부딪힌 것을 떠올린 조사관들은 2개월에 걸쳐서 영상을 좀 더 선명하고 자세하게 복원한 뒤 분석했다. 떨어진 타일의 무게는 약 770g으로 크기는 작은 서류 가방 정도였으나 시속 800km로 충돌해 충격량이 엄청났다.
이후 버드 스트라이크 실험 장비를 개조해 서류가방 크기의 절연체를 RCC복합체에 발사하는 실험을 계획했으나 문제는 절연판 하나의 가격이 6억 이상이나 되다보니, NASA에서 실험용으로 주기를 꺼려했다. 다시 더 깊이 조사한 끝에 고장난 온도기의 순서를 파악해 어디부터 고장난지 알아내고 고장난 절연판들만 골라서 얻어낸 뒤 실험을 시작했다. 절연체를 발사하는 순간, 8번 절연판에 '''구멍'''이 생겼다. 이로써 사고의 원인이 밝혀졌다.
7. 사고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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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륙 당시 충격으로 절연체가 떨어져나가 왼쪽 날개의 8번 절연판을 강타하면서 구멍이 생겼다. 당시에는 이렇게 떨어져 나가는 게 흔한 일이라 그리 신경쓰지 않았으나, 생각보다 문제는 심각한 상태였다. 지구 대기권으로 재진입할 때 충돌로 생긴 25cm의 구멍으로 1,400도의 열기가 들어오면서 왼쪽 날개의 구멍을 통해 플라즈마 토치를 쏘이는 것 같은 상태가 되었고, 공기와의 마찰이 계속해서 생기면서 온도는 4,400도까지 올라갔다. 온도 감지기는 온도를 버티다 못해 다 타버려서 작동을 멈추고 겉면이 떨어져 나가 내부 구조물이 녹아내리고 모든 장비가 고장나버리며 기체가 불안정해져 공중에서 분해된 것이다.
8. 사고 이후
'''사고 원인은 드러났고, 17년 전처럼 NASA의 안전불감증이 다시금 도마 위에 올랐다. 하지만 방열판 문제는 셔틀 발사의 원리 자체에 기인했기에 뿌리를 온전히 뽑을 수 없이 점검 절차와 그에 따른 비용만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결국 우주왕복선 프로그램 전체의 폐지로 이어졌다.'''It is important to note at the outset that Columbia broke up during a phase of flight that, given the current design of the Orbiter, offered no possibility of crew survival.
'''현재의 오비터 디자인으로는, 컬럼비아의 승무원이 재돌입에서 생존할 가능성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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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럼비아 사고 조사위원회 보고서(Columbia Accident Investigation Board Report)
NASA는 2003년 8월 26일 사고 보고서를 발표했고, 대책으로 남은 우주왕복선들의 절연체를 약한 부분을 싹 제거하고, 왕복선이 궤도에 오를 시 화물칸에 새로 탑재된 카메라+레이저 스캐너가 장치된 막대기를 로봇팔로[25] 잡아서 조종실에서 보이지 않는 기체 하면을 샅샅이 사진찍어서 기체에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도록 했고, 지구로 다시 떨어지는 연료 탱크 또한 안 보일 때까지 승무원이 직접 관측하도록 했다.[26] 덧붙여서, ISS에서 귀환 시에도 ISS 승무원이 관측하는 앞에서 360도 제자리선회[27] 를 하면서 기체에 이상이 없는지 살펴보고 나서야 귀환하도록 절차를 개선했다. 하지만 이는 여전히 '예방'일 뿐 원인이 된 충돌의 '방지'는 불가능했다. 당장 컬럼비아 폭발 이후 재개된 첫 미션인 STS-114 디스커버리 미션에서부터 '''똑같은 문제가 발생하여 긴급 EVA로 수리를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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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S-1'''에서의 컬럼비아 - 수직미익 좌우의 벗겨진 부분에 주목. 컬럼비아가 처음 제작되던 70년대부터 제기된 문제였으나 2010년대가 되어도 해결되지 못했다.
한편 이 사고 이후로 만약 컬럼비아처럼 지구 귀환이 불가능한 손상이 재발했을 경우 승무원만이라도 귀환시킬 수 있도록 구조 계획이 만들어졌다. 이른바 STS-3xx 미션. 약간의 여유가 있었더라면 컬럼비아도 같은 식으로 구조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나 현실적으로는 어려웠을 듯. 상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당시 보잉 엔지니어의 글을 참조하자. #
이후의 우주왕복선 미션에서는 다른 우주왕복선 1기가 비상시 구조용으로 원래 미션을 수행한 왕복선이 귀환할 때까지 40일 내 발사가 가능하도록 완비시키는 규정도 생겼다. 이 규정 덕분에 NASA 발사팀은 이후 미션 1회마다 우주왕복선을 한 대 더 준비시키느라 엄청난 예산과 인력의 압박을 받았고, 우주왕복선 프로그램의 조기 종료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었다. 또한, ISS 공사에 집중한다는 명분으로 다른 위성 수리와 회수 미션을 전부 백지화하여 ISS의 대피가 불가능한 미션은 없이 했다. 뭐, 미소중력 실험 같은 것들은 ISS가 확장되면서 충분히 ISS가 감당해낼 수 있긴 했지만... 다만 예외가 하나 있긴 했는데 바로 STS-125 미션. 바로 '''허블 우주 망원경'''의 마지막 서비스 미션[28]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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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 23일, 아틀란티스 오비터가 STS-125 미션 발사 준비 태세에 들어가 있는 모습. 멀리 뒤쪽 다른 발사대에 구조용으로 엔데버도 발사대기 상태로 세팅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이거 한다고 아레스까지 치우고 두 대를 세워놨다.[29]
마지막 우주왕복선 비행은 원래 마지막으로 만들어진 오비터인 엔데버의 STS-134가 될 예정이었으나, STS-133, 134 미션 준비 중 구조용 왕복선으로 지정된 아틀란티스가 발사대기 상태로 준비되어 있던 점에 착안해 STS-135 미션을 급히 수립하고 NASA가 높으신 분들에게 눈물의 호소를 하여 예산을 더 받아내 마지막으로 한번 더 우주에 나가게 되었다. STS-135 미션에서는 구조용 우주왕복선이 당연히 없으므로 비상 시에는 ISS로 피난하기 위해 승무원도 평소보다 적은 4명만 탑승했다. 왕복선이 망가졌을 경우 1년간 소유즈 승무원을 한 명씩 줄여가면서(즉, NASA의 정식 ISS 승무원 TO를 제외해가며) 분기마다 한 명씩 귀환시키려 했다고...
한편으로, 이 사고로 인해 우주왕복선 프로그램이 3년간 중단되면서 국제우주정거장이 치명타를 맞았다. 보급과 주요 모듈 공사를 셔틀에게 맡기다가 정교한 작업과 기동 면에서 셔틀에 비할 바가 못되고 그냥 쏘면 끝일 뿐인 프로톤이나 소유즈 계열 로켓에게만 일임해야 했던 것. 결국 2005년 STS-114 디스커버리로 발사가 재개될때까지 엑스퍼디션 7부터 엑스퍼디션 12까지 만 3년에 가까운 시간을 ISS는 2인 승무원 체제로 버텨야 했고 공사 역시 지지부진하다 완공 일정을 한참 넘기고 말았다.
9. 기타
알링턴 국립묘지에 이 우주인들을 기리는 추모비가 설립되었고, 6월 발사를 앞둔 화성 탐사 로버 스피릿에 추모패가 달렸다. 로버가 착지한 장소는 컬럼비아 메모리얼 스테이션(Columbia Memorial Station)으로 이름지어졌고, 탐사한 화성의 지형 중 7개의 봉우리가 나란히 솟아있는 언덕에 이들의 이름이 각각 붙여졌으며, 소행성이 이들의 이름을 따와서 명명되기도 했다.
휴스턴의 야구팀 휴스턴 애스트로스는 시즌 개막을 앞두고 전해진 비보에 개막전에서 NASA 관계자들을 대거 초청하여 추모 행사를 열어줬다. 우주비행사들이 성조기를 들고 나왔고, ISS 체류자들이 추모 메시지를 보내왔으며 순직자들의 유가족들이 시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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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앤더슨의 아내가 딸 케이시에게 '''107'''번 유니폼을 입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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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스턴 애스트로스의 2003년 유니폼 패치. 애스트로스는 미션 패치와 동일한 디자인의 패치를 2003 시즌에 부착하며 승무원들을 추모했다. 해당 사진의 선수는 호세 비스카이노와 옥타비오 도텔.
한편 2003년 2월 2일, 휴스턴 로케츠는 당초 예정되어있던 음력 설날 마케팅[30] 을 강행했다가 넌씨눈 소리를 들었다.
아폴로 1호와 STS-51-L 챌린저 폭발사고도 1월 말에 있었던지라 이후 NASA에서는 1월 말~2월 초 기간을 추모 기간으로 정하고 고인들을 기리고 있다.
인디 포스트록 밴드 The Evpatoria Report의 곡 Taijin Kyofusho의 초반 부분에 이 사고 당시의 통신 음성기록 일부가 들어가 있다. 가사 없이 매우 우울한 음악으로, 지상 관계자들이 계속 호출해도 응답없는 컬럼비아 호에게서 느꼈을 절망감과 슬픔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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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에 레드불 스트라토스 팀의 펠릭스 바움가르트너가 39km 상공에서 맨몸으로 낙하하여 음속을 돌파하고 무사히 착지하자, STS-107 승무원들의 비상 탈출이 가능했다면(사실은 이것조차 불투명했고 결국 이뤄지지 못했지만...) 생존할 수 있었을 지를 두고 많은 우주덕들 사이에서 탄식이 나오기도 했다. 바움가르트너가 뛰어내린 고도가 실제로 폭발이 일어난 성층권급 고도와 얼추 비슷하기도 하고(물론 컬럼비아의 폭발 고도가 더 높긴 하다) F-15, F-100의 추락 사례 중 초음속 비행 중에 탈출에 성공한 사례도 있어서 그럴 듯도 하다. 하지만 일반 항공기의 사출보다 훨씬 고난이도인 우주왕복선 낙하 시스템의 특성상 탈출 자체가 힘들거니와 탈출해도 당시 기술력에 의한 여압복으로는 생존 가능성이 높지 않았다는게 중론.[31] 이 레드불 스트라토스 팀의 의료팀장인 우주왕복선 프로그램 항공의무관 출신 조너선 클라크는 이 사고로 희생된 로렐 클라크의 '''남편'''[32] 으로, 사고 이후 우주에서 인간의 생존과 안전을 위한 연구에 매진했다. 컨스텔레이션 계획이 백지화되고 NASA에서 나와 진행한 연구가 바로 레드불 스트라토스라고.[33]
2016년 3월 발사된 시그너스 화물선 CRS-OA-6에 STS-107 사령관 릭 허즈번드의 이름이 붙었다. 그런데 이 시그너스는 '''재돌입을 견디지 못하고 타도록''' 만들어진 물건이라 고인드립 논란이 있다(...)
2017년, 발사 14주기에 아폴로 17호 사령관 유진 서넌이 별세했다.
[1] 이분의 딸 역시 휴스턴의 우주인 훈련센터에서 근무했고, STS-107 사고 당시 울먹이는 딸에게서 비보를 전해들었다.[2] 1972년 보스톤을 떠나 컬럼비아 강을 탐험했다. 또한 아폴로 11호 사령선의 이름이기도 하다.[3] 셔틀 화물칸 뒤에 액체수소 액체산소 등등 장기간 우주 체류에 쓰일 온갖 장비들을 바리바리 쑤셔넣은(?) 장비. 이름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미술 시간에 쓰는 그 팔레트처럼 필요하다 싶은걸 넣을 수 있는 만큼 마구마구 쑤셔넣은 봇짐이라 할 수 있다. 처음엔 엔데버에 설치되었지만 엔데버에서는 한 번만 쓰이고 이후에는 컬럼비아에 탑재되었다. 이 장비 역시 '''STS-107을 마지막으로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4] 다만 어릴 적에 상급 학교로의 월반/조기진학을 위해 생년월일을 몇 달 앞당겼다. 그래서 공식 서류상으로는 1962년 3월 17일생.[5] 제미니-아폴로 시절 우주비행사인 마이클 콜린스나 셔틀 시절 우주비행사인 리처드 M. 멀레인의 회고록을 비롯해 이 전통을 언급하는 우주비행사들의 기록이 없다.[6] 무중력이 인체세포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하는 실험이 포함되었다. 암이나 골다공증 치료에 쓰일 예정이었다. 이런 실험 때문에 승무원들 중에 의사가 둘이나 포함되었다. 또한, 생물학 실험에 쓸 미생물들도 많이 들어 있었다.[7] 날개에 난 구멍으로 나온 내부 파편이었다.[8] 하나는 컬럼비아호의 왼쪽을 촬영한 것으로, 파편의 충돌이 그나마 선명하게 잡혔지만, 오른쪽에서 촬영된 다른 하나는 파편이 분리되는 것은 찍혔지만 충돌 장면이 잡히지 않았다[9] 보잉 기술자의 설명에 따르면 EVA용 우주복이 2개 있었다고 한다. 설령 당시에 문제를 파악했더라도 여러 산적한 기술적 어려움 때문에 구조는 거의 불가능했으리라는 견해가 있다.[10] 미션 6일째인 2003년 1월 21일 미션관리팀 회의록에 따르면 "And I’m really ... I don’t think there is much we can do, so it’s not really a factor during the flight, since there is not much we can do about it." 즉 어차피 손쓸 방법이 없으니 지금 확인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말했다. 이후에 Wayne Hale 등은 심지어 비공식적으로 미공군을 접촉해 위성 촬영을 시도하기까지 했지만, 이를 알게 된 Linda Ham이 위성 촬영을 중지시켜 버렸다.[11] 최초의 감지기 이상.[12] 최초의 과열 신호.[13] 지상에서는 당연히 재돌입하는 컬럼비아가 빛으로 보인다[14] 센서 하나쯤 오작동하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여러 개가 동시에 고장났다는 것은 중대한 이상을 암시하기 때문이다.[15] 컬럼비아에서 ''Loger....uh...bu...."라는 교신이 온 후, 더 이상의 교신은 들리지 않았다[16] 9시 0분 1초에서 3초 사이에 오토파일럿 회전스위치 작동 실패 기록이 있다. 그러나 데이터 오류일 가능성도 있다.[17] 문서에 나오는 시간은 동부 표준시 (EST), 방송에 나오는 시간은 텍사스 시간 (MST) 기준[18] 12분 31초[19] 특히 이스라엘에서는 일란 라몬 대령의 아버지가 아들의 귀환을 다루는 특집 생방송에 출연하고 있었다. 생방송 중에 이런 충격적인 소식이 날아온 것이다.[20] 즉, 동부 케네디 우주센터가 아닌 서부 에드워즈 공군기지에 착륙할 예정이었다면 모든 잔해와 유해는 동태평양에 떨어졌을 것이고 수습도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21] 볼펜과 연필로 쓰여진 이 글을 복원하고 해독하기 위해 이스라엘 최고의 법의학 전문가들이 동원되었다.[22] 항공기 사고가 다 그렇듯이 위험물질이 어디로 떨어졌는지 모르기 때문. 이때는 그걸로 모자라 생물학 실험에 쓰인 미생물들까지 흩어졌고 증식했다.[23] 잔해들이 시가지나 교외 전원주택 같은 곳에도 마구마구 떨어졌다. 괜히 나서지 말아달라는 권고 외에는 이들을 통제할 방법이 없다.[24] 굉음이 들렸던 헴프힐 부근[25] 캐나다에서 만든 CANADARM[26] 원칙적으로 '비디오'를 찍고, 사람이 부족한 경우 최소한 사진만이라도 찍도록 했다.[27] 이것을 RPM 기동이라 하지만 보통 백플립(...)이라 부르는듯 하다.[28] 앞으론 수리 못 할 테니 어떻게든 오래오래 써먹으려고 최대한 오래 버틸만한 부품으로 갈아치웠고, 나중에 재돌입에 쓰일 설비도 부착했다. 이 팀 중에는 컬럼비아의 마지막 귀환이었던 STS-109 허블 4차 서비스 미션 팀원들이 참여하기도 했다.[29] 물론 컨스텔레이션은 나중에 아르테미스란 이름으로 부활하긴 했다[30] 2월 1일이 2003년 설날 당일이었다. 왜 이런 마케팅을 했냐면 야오밍이 주가를 한창 올리던 시절이기 때문이다. 새해 초부터 홍보를 열심히 하면서 이 참사가 터질 리는 상상도 못했을 테지만...[31] 바움가르트너가 맨몸 낙하를 성공시킨 옷을 보면 사실상 최신형 우주복 수준이다. 그것도 2000~10년대의 연구와 기술력으로 만들어진 것. 80~90년대의 옷인 데다 구명보트 겸용으로 불어나야 하는 군더더기(?)가 많이 붙은 셔틀 여압복은 이런 기록에 도전하기엔 애로사항이 많다.[32] 해군 시절부터 알고 지내며 결혼까지 했다가 NASA로 옮긴 뒤 아내도 우주인으로 선발되었다.[33] 아들 이안은 10년이 지난 뒤 대학에서 어머니처럼 해양생물학을 공부하고 있다. 클수록 엄마의 얼굴이 역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