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F. 케네디
1. 개요
미합중국의 케네디 행정부에서 64대 법무장관을 지냈으며,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대통령 선거 후보로 경선에 참가했으나 암살당했다.
미합중국 제35대 대통령인 존 F. 케네디의 동생으로 케네디 정권의 가장 핵심 인물 중 하나였다. 쿠바사태, 케네디가의 저주, 마릴린 먼로 스캔들로 미국인들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정치인이다.
2. 상세
1925년 매사추세츠 주 브룩레인에서 9남매중 일곱째로 태어나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하고 버지니아 대학교 로스쿨을 졸업한 후 변호사 자격증을 얻었다. 로스쿨을 졸업할 무렵인 1952년 형인 존 F. 케네디가 상원의원에 출마하자 형의 선거운동을 도왔다. 1953년에는 매카시즘으로 유명한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이 이끄는 상원 위원회 법률고문으로 활동하였다. 1960년에는 형 존 F. 케네디가 대통령에 출마하자 대통령 선거 운동 사무장으로 선거 운동을 관장하였다. 원래는 형과 나이 차이도 있고 해서 데면데면한 사이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형의 상원의원 선거운동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형에게 큰 신임을 얻게 되었고 이후 존 F 케네디의 모든 선거전에서 선거본부장을 맡으며 선거전을 총지휘하게 되었다.
1960년 대통령 선거에서 존 F. 케네디가 당선되자 로버트는 35세의 나이에 법무장관에 발탁되는데, 당연히 이러한 장관 인사를 두고 족벌인사, 정실인사라는 비난이 빗발쳤다.[2][3] 이후 형의 신임으로 내각에서도 대통령의 심복으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원래 법무장관은 그 직책의 특성상 국정 전면에 나서는 경우가 거의 없다. 대부분의 경우 국무장관, 국방장관, 재무장관 등이 내각에서 주요한 정책을 담당하면서 매스컴을 타는 경우가 많으며 서열도 법무장관에 앞선다. 혹은 국내 이슈로 인해 노동부, 복지부, 상무부, 주택도시부 장관 등이 그때그때 나서는 경우가 종종 있어도 법무장관이 언론에 나오는 경우는 그렇게 흔치 않다. 정치 스캔들이 터져도 특별검사가 언론에 나오지 법무장관이 나올 일은 별로 없다. 하지만 로버트의 경우 대통령의 핵심측근으로서 이들에 앞서 전면에 나서는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어쨌거나 역대 법무장관 중에서는 상당히 유명세를 얻게 되었다.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과 존 F. 케네디 대통령 둘만 1962년 여름 대통령 집무실과 각료회의실에 녹음장치를 설치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존 F. 케네디 사후에는 248시간 분량의 회의기록, 12시간의 전화통화 내역을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의 지시로 케네디 도서관으로 옮겨졌으며 특히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43시간의 녹음 부분은 1983년, 2001년에 나누어져 공개되었다. 이 녹취 대화록은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의 국정수행능력을 평가하는 아주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하지만 이 자료로 인해 그가 미사일 위기 당시 쿠바 침공을 일관되게 주장한 초강경파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가 생전에 이 사건에 대해 했던 발언들에 대한 신빙성을 의심하는 지적도 제기되었다.[4]
존 F. 케네디의 암살 이후 린든 B. 존슨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하였고 얼마 후 1964년 상원의원 출마를 위해 법무장관직을 사임했다.
그해 11월 상원의원 선거에서 현직 상원의원을 제치고 뉴욕주 상원의원이 된 로버트 케네디는 민권법안의 통과에 큰 기여를 하였고, 한창 진행중이던 베트남 전쟁의 수행에 관하여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면서 진보 세력의 추앙을 받게 되었다.
1968년 대통령 선거에 예비 후보로 출마하여 여러 주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민주당의 차기 대선 후보로 확정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었지만,[5] 캘리포니아 주 경선에서 승리한 직후인 6월 5일 로스엔젤레스에 위치한 앰배서더 호텔에서 지지자들에게 연설을 하고 나오던 중 요르단계 미국인 시르한 비샤라 시르한(سرحان سرحان Sirhan Bishara Sirhan (Sirhan Sirhan))에게 총격을 받아 다음날 이른 새벽 사망했다.
3. 암살
Assassination of Robert F. Kennedy
1968년 6월 5일 태평양 표준시로 밤 12시 15분경 로버트 케네디는 캘리포니아 주 예비 선거에서 승리를 거둔 뒤 지지자들에게 연설을 하고 나서 앰배서더 호텔의 주방으로 빠져나왔다.
주방 복도에서 마주치는 지지자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하던 로버트 케네디는 당시 16세 소년 후안 로메로와 악수를 하는 순간, 미리 접근하고 있던 시르한에게서 8발[6] 의 총격을 받고 3발을 맞아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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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격 직후의 모습. 오른쪽은 피격당하는 순간 악수를 나눈 16세 소년 후안 로메로 (당시 호텔 주방 보조원).
로버트 케네디는 3발을 맞았는데 머리에 맞은 한 발로 치명상을 입었고 근처 병원으로 이송되어 응급 조치를 받았지만 다음날 새벽 1시경 사망하였다. 경찰의 조사에 따르면 시르한 비샤라 시르한은 팔레스타인 이민자로서 평소에 로버트 케네디의 친이스라엘적인 행동에 불만을 품고 범행을 저질렀다. 원래 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나중에 캘리포니아 주에서 사형제가 폐지되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7] 여담으로 이때 시르한을 기소한 검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로스쿨을 나와 법조계에서 활동했던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실제 인물 린 캄프튼. 2016년에도 계속 복역 중이며, 2016년 초에 감형을 요청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모 마피아의 히트를 다룬 서적에서는 법무장관 당시에 조직적인 수사로 마피아들을 제압하려 한것의 복수로 마피아가 암살했다고 하는 음모론이 있다.
또 다른 음모론은 쿠바 미사일 위기 때 소련을 전면공격하지 않고 평화적으로 해결한 케네디 형제에 대한 커티스 르메이 등 군부 강경파와 CIA 등의 분노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입장으로는 형 존 F. 케네디가 쿠바 습격 작전을 축소한 탓에 공격이 실패했으며, 이 때문에 결국 쿠바 미사일 위기가 생겨났고, 이때 소련에게 전면 핵전쟁을 걸었다면 미국의 피해도 컸겠지만 핵전력에서 뒤쳐지는 소련을 아예 멸망시켜 미국의 세계지배를 이룰 절호의 기회였는데 존 케네디가 겁을 먹고 도리어 아예 발을 빼게 되어 미국은 소련에 끌려다니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최근 모건 프리먼이 나레이션을 맡은 다큐 <JFK: 배신당한 대통령> 같은 곳에서도 밝혔고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같은 영화에서도 묘사되었듯 앞뒤안가리는 군부 미치광이들의 의견대로 전쟁을 확장했다면 3차 대전으로 빠질 위험이 상당했다. 그리고 당시 군부와 CIA는 어떻게든 전면전으로 확장하려고 대통령에게 왜곡되거나 제대로 되지 않은 정보를 제공하는 등 횡포가 심했다. 로버트 케네디도 형의 뜻을 따르고 있었고 자신이 집권하면 당시 테트 공세 등 격화되던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을 철수시키겠다는 주장을 했었으므로 군부 강경파와 CIA가 이번에는 미국이 발을 빼지 않도록 로버트 케네디를 암살했다는 주장.
4. 암살 여파
로버트 케네디가 암살 당함에 따라서 몇 해 전 존 F. 케네디, 그리고 대선이 열리던 1968년 4월 마틴 루서 킹 목사를 잃었던 미국인들은 충격에 빠졌다. 특히 1968년 대통령 선거에서 로버트 케네디는 민주당의 가장 유력한 후보였기에 로버트 케네디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많았으나 결국 암살당하면서 로버트 케네디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것을 볼 수 없었다. 케네디 형제의 암살은 미국 정치지형상 진보(민주당)와 보수(공화당)의 균형에도 오랜 영향을 끼치게 되어 70~80년대까지 여진이 지속되었다는 평가도 많다.
만일 로버트 케네디가 68년 선거에서 승리해 취임했다면 형과 같은 만 43세가 되는데, 로버트가 생일이 더 늦기에 43세 2개월로 형의 기록을 반년 경신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선거를 거치지 않은 승계 최연소인 시어도어 루스벨트를 이길 수는 없었겠지만.
오래 생존한 편인 동생 에드워드 케네디(테드 케네디, 1932 ~ 2009) 상원의원 역시 다음 선거인 1972년 선거에서 대통령의 꿈을 꾸고[8] , 실제로 당선 가능성도 높게 여겨졌지만 여비서의 의문사 일명 차파퀴딕 스캔들로 인해 대통령 경선에서 낙마하고 말았다. 그렇게 닉슨은 (곧 사임하지만) 짧게나마 수명 연장을 했다. 이후 1980년 선거에서 지미 카터를 대신할 인물로 부상하지만 경선에서 패배했다. 에드워드 케네디는 1994년 선거에서 밋 롬니를 이기는 등 피선거권이 주어지는 30세(1962년)에 보궐선거로 당선된 이래 반세기에 가까운 46년 292일을 8선 상원의원으로 지냈다. 뇌종양 투병 속에서도 버락 오바마를 지지를 호소했으며, 결국 약 1년 뒤에 병으로 사망했다.
이후 민주당은 전당 대회에서 부통령 허버트 험프리를 대선후보로 내세우지만 리처드 닉슨에게 패배했다. 거기에 민주당의 분열 크리까지 겹치면서 선거인단을 제외하고는 간발의 차로 패한 것. 아마 로버트 케네디였다면 당선되었을 확률도 컸을 것이다. 그랬다면 1968년(68혁명 항목 참조)은 완벽하게 실패하지만은 않은 해가 되었을 것이며, 존 F. 케네디 - 린든 B. 존슨으로 이어진 민주당 주도 정국은 당분간은 유지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 워터게이트 사건와 같은 불명예스런 사건도 없었을 것이다.[9] 여러 의미로, 로버트 케네디의 죽음은, 특히 미국 진보 진영에게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이후 2001년 11월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로버트 케네디의 탄생 76주년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법무부(미국) 청사의 이름을 '''로버트 F. 케네디 빌딩'''으로 바꾸었다.
5. 자녀
케네디가(家) 중에서도 자식이 많았던 걸로도 유명하다. 현재 남아있는 대부분의 케네디가(家)의 인물들은 절반 이상이 이 사람의 후손일 정도.[10] [11] 총, '''7남 4녀'''로 자세한 것은 아래 참조. 그중 막내 딸은 생년월일에도 나오듯이, 부친이 암살 당한 후에 태어난 유복녀이다.
6.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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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컬프[14] 가 마릴린 몬로의 삶을 다룬 <노마진과 마릴린>(1996년작), 쿠바 미사일 위기를 배경으로 한 (2001년작)에서 두 차례 로버트 케네디 역으로 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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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TV 미니시리즈 <케네디가( 家)>(Kennedys. 2011년작)에서는 배리 페퍼[15] 가 로버트 역으로 출연했다. 화려하지만 스캔들, 잔병 치레에 시달리는 형과는 대조적으로 가정적이고 사생활도 깨끗하며, 나이와 경력으로 자신보다 한참 위인 FBI 국장 에드가 후버를 상대로도 주눅들지 않는 바람직한 정치인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형의 피살 후 형수인 재클린을 각별히 배려하는 모습도 나온다.[16]
- 올리버 스톤 감독의 영화 <닉슨>에선 노골적으로 밥 호스킨스가 분한 존 에드거 후버의 음모로 묘사된다. 후버를 만난 닉슨이 로버트 케네디가 있는 한 당선이 어렵다고 하자 "그럼 그 인간이 출마를 안하면 되겠군."라고 하고 닉슨은 그 인간이 왜 출마를 안하겠나?하고 손사레를 치지만...
- 저메키스 감독의 포레스트 검프에서도 존 F. 케네디 암살과 함께 간단히 언급된다. "형제는 힘든가봐요."
- 2006년 부시 집권기에 그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바비>가 개봉되었다. 에밀리오 에스테베즈가 감독을 맡았으며, 부시에 질려있던 많은 할리우드 스타들이 영화에 대거 출연해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 2011년작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영화 <제이. 에드가>에서도 등장한다. 자기보다 서른 살이나 위인 부하 FBI 국장 존 에드가 후버(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분)와 마주앉아 신경전을 벌인다.
- 워해머 40,000에서는 이오지마 전투당시 납치당해 카발의 일원이 된 데이먼 프라티니스라는 인물이 암살한 것으로 나온다.
- 넷플릭스에서 케네디 대선 캠프 때부터 사망하기까지의 일생을 담은 다큐멘터리 "로버트, 우리가 사랑한 케네디"를 제작했다. 대체로 유익하다는 평.
[1] 남편과 사별한 지 50년이 넘은 2020년 현재까지, 만 96세의 나이로 장수하고 있다.[2] 이 때 JFK는 "나도 기뻐하고 우리 어머니도 기뻐하는데 대체 누가 이 인사를 반대하는지 모르겠다."고 기자들에게 능글맞게 대꾸하기도 했다.[3] 당시 로버트의 법무장관직 임명은 FBI 국장 에드가 후버가 형 케네디의 사생활을 약점으로 삼을 가능성에 대비하기 위해, 후버의 상관 자리에 믿을만한 인사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단순한 장관이 아닌, 형의 '정치적 경호실장' 역할을 했던 셈. [4] 하지만 로버트 케네디는 자신을 굳이 온건파라고 지칭하지도 않았다. 그의 온건파 이미지는 쿠바 미사일 위기보다는 1960년대 말 대선 출마를 전후로 린든 존슨의 베트남 전쟁 수행에 관한 비판 수위를 높이면서 부각된 것이다.[5] 당시 같은 민주당 소속의 존슨 대통령은 베트남 전쟁에 대한 미국 내 반대 여론의 증가로 인해 재선 출마를 포기한다고 선언한 상태였다.[6] 데이비드 사우스웰의 책에 의하면, 그 대부분의 총격은 '''뒤에서''' 날아온 것이라고 한다.[7] 같은 이유로 캘리포니아 주에서 범행을 저지른 희대의 살인마 찰스 맨슨도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8] 여기는 당선됐다면 취임시 만 40세 9개월. 더 어리다![9] 특히 이 당시 미국 정부의 신뢰 실추가 미국 강경 보수 시대의 서막을 연 로널드 레이건을 대선으로 소환했음을 기억한다면 더욱 더 의미심장하다.[10] 큰형 조셉은 2차대전 참전 중에 전사하여 후손이 없었고, 작은형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아들이 후손없이 사망했고, 살아남은 딸 1명만이 후손을 남겼다. 때문에 '케네디'라는 성을 물려준 사람은 본인과 남동생 뿐이다.[11] 두 사람 모두 생전 각자의 가문에서 수장이 되지는 못했으나 이들의 후손이 가문의 수장이 되었다.[12] 2020년 4월 2일 카누 침몰 사고로 막내아들 기디언 맥킨과 함께 사망했다.[13] 2010년부터 3선 중인 뉴욕 주지사이다[14] <위기의 주부들> 시즌1에서 브리 반 드 캠프의 남편, <웨스트 윙>에서 미 하원의장 등으로 출연했음.[15] 전쟁 영화 <위 워 솔저스>에서 종군기자 조 갤로웨이로 출연했다. 그보다도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다니엘 잭슨 이병 역으로 나왔었다.[16] 극중에서 재클린 역으로는 과거 탐 크루즈의 부인이었던 케이티 홈즈가 출연했다.[17] 로버트가 1953년 조지프 매카시의 법률 고문으로 재직했던 시기에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다. 매카시즘에 대해 아는 위키러들이라면 짐작할 수 있겠지만 로버트의 이후 정치 행보와는 다수 상반되는 경력이라 이 경력 때문에 진보 성향의 일부 청년층은 그를 다소 불신하기도 했다.[18]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로버트, 우리가 사랑한 케네디'에서는 로버트가 정치권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계기가 된 사건으로 묘사된다. 이후 뉴욕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해 유세 과정에서 컬럼비아 대학교를 방문한 로버트에게 한 대학생이 이와 관련된 질문을 하자 '의견 차이로 인해 6개월 만에 그만뒀고, 매카시즘에 반대한다'고 해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