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숭

 


'''북한 초대 황제'''
'''世祖 神武帝 | 세조 신무제'''
'''묘호'''
'''세조(世祖)'''
'''시호'''
신무황제(神武皇帝)
'''연호'''
건우(乾祐, 951년 ~ 954년)[1]
''''''
유(劉)
''''''
숭(崇) → 민(閔)
'''생몰 기간'''
895년 ~ 954년
'''재위 기간'''
951년 ~ 954년
1. 소개
2. 생애
3. 기타
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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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오대십국시대의 10국 중 하나인 북한(北漢)의 초대 황제. 그가 통치한 나라의 정식 명칭은 한(漢)이었으나 남쪽에 있던 남한(南漢)[2]과 구별하기 위해 후대의 역사가들이 북한이라고 불렀다.

2. 생애


건국자 유숭은 후한을 세운 유지원의 동생으로, 유지원의 아들인 은제 유승우후주(後周)를 세운 곽위(郭威)를 죽이려다 도리어 살해당하자, 근거지인 태원(太原)에서 독립하려고 했다. 그러나 곽위가 유숭의 아들인 서주의 유빈을 황제로 옹립하겠다고 선언하자 자립 시도를 중단했다. 하지만 유빈이 수도 카이펑(開封)으로 오던 도중 곽위후주를 세우고 자립한 뒤 유빈을 모셔오던 풍도에게 명해 유빈을 죽여버리자 자립하여 후한의 재흥을 선언하고 스스로 황제에 올랐다. 그리고 이름을 유숭에서 유민(劉旻)으로 바꿨다.
954년, 후주의 태조 곽위가 죽고, 양자인 시영(후주 세종)이 즉위하자 요나라의 힘을 빌려 후주를 공격했고, 고평에서 격돌했다.(고평 전투) 처음에는 승기를 잡는 듯 했으나, 시영과 후일 태조가 되는 조광윤의 활약으로 고평전투는 북한의 대패로 끝났다. 유숭은 간신히 도망쳐 돌아간 뒤 결국 패배에 대한 충격으로 사망했다.

3. 기타


여담으로 안구 하나에 2개의 눈동자를 가졌다고 한다. 유숭이 대패한 이후에 둘째 아들인 유균이 즉위해 내정에 힘을 기울였지만 957년에 후주의 침공을 받고 영토를 빼앗겼다. 유균의 아들이자 유숭의 손자인 유계은은 즉위하자마자 2개월만에 피살당했고, 북한의 마지막 왕인 유계원 역시 유숭의 손자였지만 979년 송나라의 침공으로 멸망당했다.
후한의 정통을 잇는다는 뜻에서 연호도 자신의 조카인 후한의 은제가 사용하던 건우(乾祐)라는 연호를 그대로 사용했으며, 사후 묘호도 태조(太祖)나 고조(高祖)가 아닌 세조(世祖)를 사용했다. 그래서 학자에 따라서는 후한과 북한을 한 나라로 취급하는 경우도 있다.

4. 둘러보기





'''북한의 역대 황제'''
후한 2대 은황제 유승우

'''초대 세조 신무제 유숭'''

2대 예종 효화제 유승균
[1] 후한에서 사용했던 건우 연호를 습용하였다.[2] 물론 이 나라도 정식 명칭은 한이었다. 남한은 후세의 역사가들이 붙인 이름.